*데릭X빛의 전사+메테이온.
고유 설정값을 가진 빛의 전사가 등장합니다.
*『황금의 유산』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드림러 보법: 원작에 안 나오는 사건 집어넣기
#0. 모험을 앞두고
데릭은 파이퍼를 배웅하기 위해 부둣가에 섰다. 코앞에 있어서 더욱더 거대하게 보이는 살리아크 석상이 마치 이곳은 자신의 영토라고 선언하듯이 물을 쏟아붓는, 올드 샬레이안을 드나드는 모든 배가 모여든 이 항구에 서 있는 건 데릭과 파이퍼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데릭이 여기 와서 지낸 사흘 동안 면면을 익힌 파이퍼의 동료들도 함께였다. 데릭은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떠올려냈다.
“있잖아, 데릭은 투랄 대륙에 가 본 적 있어?”
이제는 버릇이 되다시피 해서 거의 매일 나누는 링크펄 통신에서, 파이퍼는 그렇게 물었다. 에오르제아에서는 듣기 힘든 지명일 텐데도 데릭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 투랄도 이 별이 안고 있는 곳이니까. 에오르제아에서 처음으로 거기까지 도달한 탐험가의 등을 밀어준 적도 있는데……, 하지만 직접 가 보진 않았어.”
“앗, 아까 책에서 본 사람인가. 근데 왜 안 갔어?”
“그곳은 우리를 향한 신앙이 희미한 지역이기도 하고, ‘데릭’으로서 갈 만한 장소는 아니라고 판단했거든.”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던 파이퍼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거기서 여행담을 잔뜩 가져와야겠다.”
데릭은 아기 오포오포를 긁어주던 손길도 딱 멈추고서 그게 무슨 소린지 물었다가, 파이퍼가 투랄 대륙으로의 모험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데릭이라면 혹시 아는 게 있으려나 싶어서 물어봤던 거야.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 오히려 좋은가? 에오르제아는 데릭이 더 잘 알 테니까. 그치? 히히.”
상상도 못 한 이야기가 우수수 쏟아지자 놀란 데릭은 파이퍼의 천연덕스러운 웃음소리와 얼른 마저 쓰다듬어달라고 보채는 오포오포의 몸짓 덕분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파이퍼와 통신을, 아니, 그냥 파이퍼랑 엮여 있다 보면 예상을 벗어난 일을 보고 듣는 경우가 적잖아서 익숙하긴 했지만…….
“언제 출발할 예정이야?”
“몰라! 아직 배편도 섭외 못했대.”
대책 없는 말의 내용과는 달리 명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들은 데릭은 문득, 저 또한 거기에 맞춰 다소 무모한 짓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떠나기 전까지 같이 지내도 괜찮을까?”
데릭이 저도 모르게 꺼낸 말 뒤로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괜찮다면 말이지만”, “네가 떠난 뒤로는 한동안 만나지도 못하고 통신도 어려워질 테니까”라고 허겁지겁 주워섬긴 변명은 듣지도 않았는지, 파이퍼는 좋다고 외쳤다.
데릭은 그 길로 곧장 올드 샬레이안에 들어섰다. 파이퍼 덕분에 최근에 이 도시의 에테라이트와 교감해 둔 적이 있어 여정은 길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광장에서 메테이온의 손을 잡은 채 기다리고 있었던 파이퍼를 끌어안았고, 이튿날에는 파이퍼가 함께 떠날 동료들이라며 소개해 준 이들을 만났고, 그날 오후에 배편이 잡혔다는 소식을 받았다. 둘, 아니, 메테이온까지 포함해 셋만 있게 되자 파이퍼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여태까지 아무 진척 없었는데 데릭이 오자마자 일이 풀리다니 신기하네. 가호라도 내렸어?” 하고 농담을 던졌다. 데릭은 고개를 저었지만,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다.
데릭과 파이퍼는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 함께 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짧았다는 것과 일시적이나마 헤어지게 된 것으로부터 기인한 아쉬움, 그러나 결코 억누를 수 없는 기대 등등이 하고 싶은 말들을 끊임없이 빚어냈다. 파이퍼가 도중에 스르륵 잠들어 버리지 않았다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밤을 새웠을지도 몰랐다. 데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충분히 자고 만전의 상태로 떠날 수 있다면 다행이니까. 잠든 연인에게 입 맞춘 데릭은, 다음날 또다시 파이퍼를 껴안고서 뺨과 이마에 입 맞추고 배웅했다.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배가 점처럼 작아지더니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지식신의 항구를 벗어나지 않았다.
#1. 파랑의 위에서
투랄 대륙으로 나아가는 항해 내내 메테이온은 뱃머리에 못 박혀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새로운 모험을 앞두고 파이퍼를 따라서 들떴던 탓인지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낸 채로. 올드 샬레이안에서 머물던 최근 며칠 동안 계속 그 상태로 지내고 있어 깜빡했지만, 머리 양옆에 달린 날개 한 쌍과 살갗 대신 비늘이 덮인 다리, 그리고 그 발끝까지 늘어진 꽁지깃 따위는 확실히 이질적일 터였다. 덕분에 걱정스레 곁을 맴돌던 파이퍼는 이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메테이온을 보기 드문 종족 중 하나겠거니 넘겨짚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어찌나 안심했는지 메테이온을 여행이 기대돼서 눈을 반짝이는 소녀쯤으로 여긴 우호적인 승객이 말을 건네 왔을 땐 저도 모르게 냉큼 끼어들어 대답하기도 했다. 낯선 이와의 길지 않은 대화를 마친 뒤에야 메테이온은 파이퍼를 돌아보며 감상을 털어놓았다.
“바다, 신기해.”
“신기해?”
“응. 이 파랑색은, 별의 바깥에서 봤던, 아이테리스의 색하고, 똑같아. 다른 별에선, 찾을 수 없었던, 이 별만의 색깔. 그리고, 여기서는, 별 밖에 있을 땐, 멀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도, 많이 볼 수 있어.”
“그러네, 얼가니새가 떼로 있는 건 나도 처음 봐.”
이것 말고도 본 적 없는 것들을 잔뜩 보게 되겠지? 파이퍼가 그렇게 덧붙인 말을 듣자마자 메테이온은 양손을 맞잡고 눈을 빛냈다. 날개를 파닥이기도 했다. 파이퍼는 메테이온의 고수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대화를 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휴식을 취하려고 선실에 앉아 있다가 밀려온 졸음을 이겨내지 못해 고개를 떨군 바로 그 순간, 배가 크게 휘청이더니 선실 위의 갑판을 분주하게 오가는 선원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음 중에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파이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메테이온도 일어섰다.
“같이, 갈래……!”
“서 있기 힘들어서 쉽게 넘어질 거야.”
파이퍼가 그렇게 대답했더니, 메테이온은 자그마한 새의 모습으로 변해선 파이퍼의 어깨 위에 앉아 버렸다. 파이퍼는 웃음 섞인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탓에 주위가 소란스럽고 한 치 앞조차 잘 보이지 않아도, 헤매지 않고 마법 장벽 발동기 앞에 섰다. 파이퍼는 메테이온이 곁에 있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 망설임 없이 해낼 수 있었다.
“리믈렌이 떠나서 그런 걸까?”
사태가 일단락된 뒤 파이퍼가 농담을 하자 일행 중 네 명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메테이온과 쿠루루만은 서로를 쳐다보고 쿡쿡 웃었다.
#2-1. 왕도 유람
긴 항해 끝에 툴라이욜라에 발을 딛게 된 파이퍼는 마침내 맞닥트린 이국의 풍경에 감탄하는 것도 미뤄두고 메테이온을 흘끔거렸다. 메테이온은 이 광경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다행히 메테이온은 파이퍼와 비슷한 감상을 느낀 것 같았다. 배 위에서도 반짝이던 새파란 눈동자가 여전히 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성실하게 이방인들을 경계하러 다가온 병사들과 잠깐이나마 대치하고 나서도 메테이온은 그저 왕도의 모든 것이 신기한 듯 웃음을 잃지 않은 채였다. 덕분에 파이퍼는 마음을 내려놓고 우크라마트의 안내를 따라 쿠루루까지 합해 넷이 함께 거리를 거닐 수 있었다.
북적이는 시장의 알록달록한 색채는 언뜻 라자한을 닮은 듯싶으면서도 확실히 달랐다. 라자한에서조차 볼 수 없었던 낯선 종족들이 도처에 있었고, 점포에 진열된 물건들 역시 이색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구경하던 파이퍼는 문득 메테이온이 어느 상인의 주의를 끌었다는 걸 알아채고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메테이온은 더듬대는 말투로 요령 좋게 바다 건너 먼 땅에서 왔다고 말하고 대화를 이어 가더니, 기어코 연갈색 과일 몇 알을 받아오기까지 했다. 가게 주인한테 눈인사하면서 메테이온을 쓰다듬은 파이퍼는 일행과 과일을 나눠 먹으며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은 에테라이트 광장 북동쪽에 있는 초소와 사카 투랄로 이어지지만 당분간은 열리지 않을 거라는 관문에 들렀다. 오래 걸어서 지쳤을 테니 잠시 쉬자며 서 있던 내내, 파이퍼가 고대 도시에서 봤던 건물들에나 어울릴 듯싶은 거대한 문 너머를 궁금해하자 메테이온이 이렇게 물었다.
“새로 변해서, 건너편, 보고 올까?”
“아냐, 직접 보는 게 좋으니까 열심히 할래.”
곁에서 둘의 얘기를 들은 우크라마트가 호쾌하게 웃고선 이제 서쪽을 소개해주겠다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쿠루루와 파이퍼, 메테이온은 그 뒤를 따라갔다. 왕궁, 거주구, 그리고 커다란 북과 기구 발착장을 지나 개선문까지 왔지만, 메테이온이 관심을 보인 건 오는 도중에 보게 된 알파카였다. 엘피스에서 지낼 때 봤던 ‘비쿠냐’라는 생물이 이 애들과 비슷하게 생겼다나.
그러나 메테이온은 우크라마트가 알파카 근처를 얼른 떠나고 싶어 하는 바람에 끝내 알파카를 쓰다듬지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그게 영 아쉬운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메테이온의 모습을 본 쿠루루가 쿡쿡 웃었다.
“너희 둘, 정말 많이 닮았어.”
파이퍼와 메테이온은 쿠루루를 쳐다보다가, 서로를 마주 보고 사이 좋게 미소 지었다.
“메티랑 난 가족이니까 당연하지.”
“맞―아―.”
#2-2. 마음이 향하는 곳
왕도 유람 중 알파카 다음으로 메테이온의 반응을 가장 크게 끌어낸 건 이 나라의 연대기를 돋을새김으로 그려 넣은 석탑이었다. 역사가 기록된 유적 같은 건 다른 별에서도 여럿 보지 않았냐고 파이퍼가 묻자, 메테이온은 여기 담긴 마음은 아직 살아 있으니까 그것들과 전혀 다르다고 했다. 오래전에 세워졌을 이 석탑은 새롭게 새겨질 그림을 기다리면서 지금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 곁에 있다고, 그래서 돌봐 주는 이 없이 삭아 버렸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고 했다. 메테이온의 얘기를 이해한 파이퍼와 쿠루루는 나란히 흐뭇하게 웃었다.
비록 각자 정도는 다를지언정 두 사람도 사물에 깃든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뜻대로 제어하기가 몹시 어려운 힘이긴 하나, 파이퍼는 이렇게 벽이 허물어지는 듯싶은 순간을 겪을 때면 이런 힘을 가졌다는 게 기꺼웠다. 다만 이 능력이 매번 긍정적인 마음만을 전해 주지는 않아서 문제라는 것도 잘 알았다. 짧은 관광을 마치고 요기를 하러 간 곳에서 목도한 불한당의 적의도, 그놈과 마찬가지로 왕위 계승 의식의 경쟁 상대 중 한 명이라는 인물의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마음도, 전부 고스란히 닿았다. 그래도 파이퍼는 이런 것들을 흘려넘기는 데 익숙했지만…….
“메티, 여기 봐.”
메테이온은 여전히 타인의 마음에 쉽게 휩쓸렸다. 조라쟈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숙인 채 굳어버린 메테이온의 양손을 잡고 거듭 이름을 부르던 파이퍼는, 그래도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아예 메테이온을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 메티. 내 소리 들려?”
“응…….”
“거기 집중해.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이건 메테이온과 함께 지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인파로 뒤덮인 광장에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산발적으로 느끼고 어지러워하던 메테이온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르쳐 준 방법이자, 초월하는 힘을 각성한 다섯 살배기 파이퍼가 혼란을 겪을 때마다 아버지가 사용한 방식이었다.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마, 제일 중요한 건 너니까……. 다행히 메테이온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약간 빠르게 뛰고 있는 파이퍼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제게로 향하는 파이퍼의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차츰 안정을 되찾는 듯싶었다.
“삐삐, 나, 이제 괜찮아……!”
“정말?”
“정말.”
메테이온의 얼굴을 들여다본 파이퍼가 피식 웃으며 새파란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듯 쓰다듬었다가, 메테이온이 손길에 방긋 미소 짓는 것을 보고서야 부스스해진 머리를 다시 정돈해 놓았다. 그리고 메테이온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인물을 경계 대상으로 점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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