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릭X빛의 전사+메테이온.
고유 설정값을 가진 빛의 전사가 등장합니다.
*『황금의 유산』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드림러 보법: 원작에 안 나오는 사건 집어넣기


#0. 모험을 앞두고
 데릭은 파이퍼를 배웅하기 위해 부둣가에 섰다. 코앞에 있어서 더욱더 거대하게 보이는 살리아크 석상이 마치 이곳은 자신의 영토라고 선언하듯이 물을 쏟아붓는, 올드 샬레이안을 드나드는 모든 배가 모여든 이 항구에 서 있는 건 데릭과 파이퍼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데릭이 여기 와서 지낸 사흘 동안 면면을 익힌 파이퍼의 동료들도 함께였다. 데릭은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떠올려냈다.
  “있잖아, 데릭은 투랄 대륙에 가 본 적 있어?”
이제는 버릇이 되다시피 해서 거의 매일 나누는 링크펄 통신에서, 파이퍼는 그렇게 물었다. 에오르제아에서는 듣기 힘든 지명일 텐데도 데릭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 투랄도 이 별이 안고 있는 곳이니까. 에오르제아에서 처음으로 거기까지 도달한 탐험가의 등을 밀어준 적도 있는데……, 하지만 직접 가 보진 않았어.”
  “앗, 아까 책에서 본 사람인가. 근데 왜 안 갔어?”
  “그곳은 우리를 향한 신앙이 희미한 지역이기도 하고, ‘데릭’으로서 갈 만한 장소는 아니라고 판단했거든.”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던 파이퍼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거기서 여행담을 잔뜩 가져와야겠다.”
데릭은 아기 오포오포를 긁어주던 손길도 딱 멈추고서 그게 무슨 소린지 물었다가, 파이퍼가 투랄 대륙으로의 모험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데릭이라면 혹시 아는 게 있으려나 싶어서 물어봤던 거야.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 오히려 좋은가? 에오르제아는 데릭이 더 잘 알 테니까. 그치? 히히.”
상상도 못 한 이야기가 우수수 쏟아지자 놀란 데릭은 파이퍼의 천연덕스러운 웃음소리와 얼른 마저 쓰다듬어달라고 보채는 오포오포의 몸짓 덕분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파이퍼와 통신을, 아니, 그냥 파이퍼랑 엮여 있다 보면 예상을 벗어난 일을 보고 듣는 경우가 적잖아서 익숙하긴 했지만…….
  “언제 출발할 예정이야?”
  “몰라! 아직 배편도 섭외 못했대.”
대책 없는 말의 내용과는 달리 명랑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들은 데릭은 문득, 저 또한 거기에 맞춰 다소 무모한 짓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떠나기 전까지 같이 지내도 괜찮을까?”
데릭이 저도 모르게 꺼낸 말 뒤로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괜찮다면 말이지만”, “네가 떠난 뒤로는 한동안 만나지도 못하고 통신도 어려워질 테니까”라고 허둥지둥 주워섬긴 변명은 듣지도 않았는지, 파이퍼는 좋다고 외쳤다.
 데릭은 그 길로 곧장 올드 샬레이안에 들어섰다. 파이퍼 덕분에 최근에 이 도시의 에테라이트와 교감해 둔 적이 있어 여정은 길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광장에서 메테이온의 손을 잡은 채 기다리고 있었던 파이퍼를 끌어안았고, 이튿날에는 파이퍼가 함께 떠날 동료들이라며 소개해 준 이들을 만났고, 그날 오후에 배편이 잡혔다는 소식을 받았다. 둘, 아니, 메테이온까지 포함해 셋만 있게 되자 파이퍼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여태까지 아무 진척 없었는데 데릭이 오자마자 일이 풀리다니 신기하네. 가호라도 내렸어?” 하고 농담을 던졌다. 데릭은 고개를 저었지만, 마찬가지로 웃고 있었다.
 데릭과 파이퍼는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 함께 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짧았다는 것과 일시적이나마 헤어지게 된 것으로부터 기인한 아쉬움, 그러나 결코 억누를 수 없는 기대 등등이 하고 싶은 말들을 끊임없이 빚어냈다. 파이퍼가 도중에 스르륵 잠들어 버리지 않았다면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밤을 새웠을지도 몰랐다. 데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충분히 자고 만전의 상태로 떠날 수 있다면 다행이니까. 잠든 연인에게 입 맞춘 데릭은, 다음날 또다시 파이퍼를 껴안고서 뺨과 이마에 입 맞추고 배웅했다.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배가 점처럼 작아지더니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지식신의 항구를 벗어나지 않았다.

#1. 파랑의 위에서
 투랄 대륙으로 나아가는 항해 내내 메테이온은 뱃머리에 못 박혀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새로운 모험을 앞두고 파이퍼를 따라서 들떴던 탓인지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낸 채로. 올드 샬레이안에서 머물던 최근 며칠 동안 계속 그 상태로 지내고 있어 깜빡했지만, 머리 양옆에 달린 날개 한 쌍과 살갗 대신 비늘이 덮인 다리, 그리고 그 발끝까지 늘어진 꽁지깃 따위는 확실히 이질적일 터였다. 덕분에 걱정스레 곁을 맴돌던 파이퍼는 이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메테이온을 보기 드문 종족 중 하나겠거니 넘겨짚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놓았다. 어찌나 안심했는지 메테이온을 여행이 기대돼서 눈을 반짝이는 소녀쯤으로 여긴 우호적인 승객이 말을 건네 왔을 땐 저도 모르게 냉큼 끼어들어 대답하기도 했다. 낯선 이와의 길지 않은 대화를 마친 뒤에야 메테이온은 파이퍼를 돌아보며 감상을 털어놓았다.
  “바다, 신기해.”
  “신기해?”
  “응. 이 파랑색은, 별의 바깥에서 봤던, 아이테리스의 색하고, 똑같아. 다른 별에선, 찾을 수 없었던, 이 별만의 색깔. 그리고, 여기서는, 별 밖에 있을 땐, 멀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도, 많이 볼 수 있어.”
  “그러네, 얼가니새가 떼로 있는 건 나도 처음 봐.”
이것 말고도 본 적 없는 것들을 잔뜩 보게 되겠지? 파이퍼가 그렇게 덧붙인 말을 듣자마자 메테이온은 양손을 맞잡고 눈을 빛냈다. 날개를 파닥이기도 했다. 파이퍼는 메테이온의 고수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대화를 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휴식을 취하려고 선실에 앉아 있다가 밀려온 졸음을 이겨내지 못해 고개를 떨군 바로 그 순간, 배가 크게 휘청이더니 선실 위의 갑판을 분주하게 오가는 선원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음 중에는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파이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메테이온도 일어섰다.
  “같이, 갈래……!”
  “서 있기 힘들어서 쉽게 넘어질 거야.”
파이퍼가 그렇게 대답했더니, 메테이온은 자그마한 새의 모습으로 변해선 파이퍼의 어깨 위에 앉아 버렸다. 파이퍼는 웃음기 섞인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탓에 주위가 소란스럽고 한 치 앞조차 잘 보이지 않아도 헤매는 일 따윈 없이 마법 장벽 발동기 앞에 섰다. 파이퍼는 메테이온이 곁에 있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 망설이지 않고 해낼 수 있었다.
  “리믈렌이 떠나서 그런 걸까?”
사태가 일단락된 뒤 파이퍼가 농담을 하자 일행 중 네 명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메테이온과 쿠루루만은 서로를 쳐다보고 쿡쿡 웃었다.

#2-1. 왕도 유람
 긴 항해 끝에 툴라이욜라에 발을 딛게 된 파이퍼는 마침내 맞닥트린 이국의 풍경에 감탄하는 것도 미뤄두고 메테이온을 흘끔거렸다. 메테이온은 이 광경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다행히 메테이온은 파이퍼와 비슷한 감상을 느낀 것 같았다. 배 위에서도 반짝이던 새파란 눈동자가 여전히 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성실하게 이방인들을 경계하러 다가온 병사들과 잠깐이나마 대치하고 나서도 메테이온은 그저 왕도의 모든 것이 신기한 듯 웃음을 잃지 않은 채였다. 덕분에 파이퍼는 마음을 내려놓고 우크라마트의 안내를 따라 쿠루루까지 합해 넷이 함께 거리를 거닐 수 있었다.
 북적이는 시장의 알록달록한 색채는 언뜻 라자한을 닮은 듯싶으면서도 확실히 달랐다. 라자한에서조차 볼 수 없었던 낯선 종족들이 도처에 있었고, 점포에 진열된 물건들 역시 이색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구경하던 파이퍼는 문득 메테이온이 어느 상인의 주의를 끌었다는 걸 알아채고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메테이온은 더듬대는 말투로 요령 좋게 바다 건너 먼 땅에서 왔다고 말하고 대화를 이어 가더니, 기어코 연갈색 과일 몇 알을 받아오기까지 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청과상한테 눈인사하면서 메테이온을 쓰다듬은 파이퍼는 일행과 과일을 나눠 먹으며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은 에테라이트 광장 북동쪽에 있는 초소와 사카 투랄로 이어지지만 당분간은 열리지 않을 거라는 관문에 들렀다. 오래 걸어서 지쳤을 테니 잠시 쉬자며 서 있던 내내, 파이퍼가 고대 세계에서 봤던 건물들에나 어울릴 듯싶은 거대한 문 너머를 궁금해하자 메테이온이 이렇게 물었다.
  “새로 변해서, 건너편, 보고 올까?”
  “아냐, 직접 보는 게 좋으니까 열심히 할래.”
곁에서 둘의 얘기를 들은 우크라마트가 호쾌하게 웃고선 이제 서쪽을 소개해주겠다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쿠루루와 파이퍼, 메테이온은 그 뒤를 따라갔다. 왕궁, 거주구, 그리고 커다란 북과 기구 발착장을 지나 개선문까지 왔지만, 메테이온이 관심을 보인 건 오는 도중에 보게 된 알파카였다. 엘피스에서 지낼 때 봤던 ‘비쿠냐’라는 생물이 이 애들과 비슷하게 생겼다나.
 그러나 메테이온은 우크라마트가 알파카 근처를 얼른 떠나고 싶어 하는 바람에 끝내 알파카를 쓰다듬지 못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그게 영 아쉬운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메테이온의 모습을 본 쿠루루가 쿡쿡 웃었다.
  “너희 둘, 정말 많이 닮았어.”
파이퍼와 메테이온은 쿠루루를 쳐다보다가, 서로를 마주 보고 사이 좋게 미소 지었다.
  “메티랑 난 가족이니까 당연하지.”
  “맞―아―.”

#2-2. 마음이 향하는 곳
 왕도 유람 중 알파카 다음으로 메테이온의 반응을 가장 크게 끌어낸 건 이 나라의 연대기를 돋을새김으로 그려 넣은 석탑이었다. 역사가 기록된 유적 같은 건 다른 별에서도 여럿 보지 않았냐고 파이퍼가 묻자, 메테이온은 여기 담긴 마음은 아직 살아 있으니까 그것들과 전혀 다르다고 했다. 오래전에 세워졌을 이 석탑은 새롭게 새겨질 그림을 기다리면서 지금 주위를 오가는 사람들 곁에 있다고, 그래서 돌봐 주는 이 없이 삭아 버렸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든다고 했다. 메테이온의 얘기를 이해한 파이퍼와 쿠루루는 나란히 흐뭇하게 웃었다.
 비록 각자 정도는 다를지언정 두 사람도 사물에 깃든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뜻대로 제어하기가 몹시 어려운 힘이긴 하나, 파이퍼는 이렇게 벽이 허물어지는 듯싶은 순간을 겪을 때면 이런 힘을 가졌다는 게 기꺼웠다. 다만 이 능력이 매번 긍정적인 마음만을 전해 주지는 않아서 문제라는 것도 잘 알았다. 짧은 관광을 마치고 요기를 하러 간 곳에서 목도한 불한당의 적의도, 그놈과 마찬가지로 왕위 계승 의식의 경쟁 상대 중 한 명이라는 인물의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마음도, 전부 고스란히 닿았다. 그래도 파이퍼는 이런 것들을 흘려넘기는 데 익숙했지만…….
  “메티, 여기 봐.”
메테이온은 여전히 타인의 마음에 쉽게 휩쓸렸다. 조라쟈를 보고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숙인 채 굳어버린 메테이온의 양손을 잡고 거듭 이름을 부르던 파이퍼는, 그래도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아예 메테이온을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 메티. 내 소리 들려?”
  “응…….”
  “거기 집중해.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이건 메테이온과 함께 지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인파로 뒤덮인 광장에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산발적으로 느끼고 어지러워하던 메테이온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르쳐 준 방법이자, 초월하는 힘을 각성한 다섯 살배기 파이퍼가 혼란을 겪을 때마다 아버지가 사용한 방식이었다. 들려오는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마, 제일 중요한 건 너니까……. 다행히 메테이온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약간 빠르게 뛰고 있는 파이퍼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제게로 향하는 파이퍼의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차츰 안정을 되찾는 듯싶었다.
  “삐삐, 나, 이제 괜찮아……!”
  “정말?”
  “정말.”
메테이온의 얼굴을 들여다본 파이퍼가 피식 웃으며 새파란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듯 쓰다듬었다가, 메테이온이 손길에 방긋 미소 짓는 것을 보고서야 부스스해진 머리를 다시 정돈해 놓았다. 그리고 메테이온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인물을 경계 대상으로 점찍었다.

#3-1. 여행의 방식
 메테이온이 마음에 들어 하는 존재라면 그 어떤 논리보다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만큼, 메테이온을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존재는 당연히 경계하는 게 옳다. 그건 파이퍼의 마음 깊숙한 곳에 아로새겨진 몇 안 되는 규칙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어진 여정은 날을 세울 준비를 해둔 것이 무색하게 순조로웠다.
 시련을 치르기 위한 여정이라지만 애당초 그 시련들은 모두 동행 중인 우크라마트를 위해서 안배된 몫이었으므로, 파이퍼 헤이든은 지난 모험들과 다르게 그저 한 발 뒤로 물러나 닥쳐오는 상황들을 만끽하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파이퍼는 그 사실이 몹시……즐거웠다! 구세의 책임 따윈 지지 않은 채 오롯이 유랑객 행세를 하며 지내는 것, 그게 바로 파이퍼가 바라던 일이었으니까.
 덕분에 파이퍼는 우크라마트가 코자말루 카와 오르코 파차 두 지역에서 각각의 고비를 넘기는 내내 느긋한 태도로 일관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흉작을 해결하란 과제에 대한 답으로 내밀게 된 축제를 열기 위한 준비물 중 특별한 깃털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자 괜스레 메테이온을 쳐다보며 히죽 웃는다거나, 구름 위까지 닿은 거대한 영봉 ‘워코 조모’의 꼭대기까지 올라갈 기회가 과연 있을지 궁금해하는 식이었다.
 그런 여행의 설렘을 떠안은 채로도 파이퍼는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고 해냈지만, 어쩌다 잠시 짬이 날 때면 꼭 메테이온과 함께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마주친 이들 모두에게 인사 한마디씩 건네고는 했다. 그러다 사람을 데려와 달라거나 물건을 전해 달라는 자잘한 심부름을 하며 부족에 얽힌 역사를 대략이나마 알게 되기도 하고, 이방인의 견해가 궁금하단 물음에 답변을 돌려주며 시작한 이야기 속에서 상대와 그가 속한 종족의 긍지를 엿보기도 했다. 그리고 메테이온은 이 모든 순간이 신기하고 즐거운 것 같았다. 누구보다 명확하게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파이퍼는 덕분에 이 여행이 더 좋아졌다.
 물론 여정이 마냥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일이 결실을 거두려는 차에 어느 누가 습격당하기도 했고, 경계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인물과 마주치기도 했다. 단지 어느 쪽이든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은 채 소강됐기에 파이퍼는 전부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떨떠름했던 기분을 바람결에 실어 저 멀리 흘려보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메테이온한테는 이렇게 말하면서.
  “여행에선 기념할 만한 것들만 챙겨 가는 거야.”

#3-2. 숨 돌리기
 다음 장소는 얼마 전 들이닥친 폭풍으로 인해 길이 무너진 상태라 곧바로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사실을 전해 준 에렌빌이 방법을 모색해 올 때까지 잠시 여유가 생기자, 파이퍼와 메테이온은 미처 소개해주지 못한 곳을 알려주겠다던 우크라마트와 잠시 동행한 뒤 여관으로 발을 돌렸다. 조금 더 도시를 거닐며 사람들과 안면을 트는 것도 괜찮았겠지만,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다리가 땅기는 지금으로선 푹신한 침대와 소파에 몸을 기대는 일이 더 끌렸다. 메테이온은 바다가 보이게끔 가로놓인 소파 위로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은 파이퍼의 곁에 딱 붙어 앉았다.
  “어땠어?”
  “응?”
  “뭔가, 기억에 남는 일은 있었어?
파이퍼가 이렇게 묻는 건 메테이온에게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울티마 툴레에서 아이테리스로 돌아온 이래 쭉 함께 지내면서, 파이퍼는 같이 여행을 다니자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려는 듯 메테이온과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매일 밤 똑같은 질문을 했다. 메테이온은 처음엔 어떤 식으로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했지만, 며칠 내내 비슷한 질문을 받으며 파이퍼는 제가 어떤 식으로 대답하든 귀를 기울인다는 걸 알게 됐더니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샘솟았다.
 메테이온은 손가락을 꼽아 가면서 대답했다. 새를 닮아서인지 친숙하게 느껴졌던 가마, 샛노란 빛깔로 풍요롭게 생육한 갈대밭, 모닥불 앞에서 다 함께 나눴던 대화, 마침내 한 번쯤 쓰다듬어 볼 수 있었던 알파카, 왠지는 몰라도 헤르메스가 떠올라서 가슴이 시큰해졌던 마블루와 토블리의 이야기 등등. 가벼운 마음으로 입을 열고 꺼낸 말들이 봇물이 터진 양 장황해졌는데도 파이퍼는 적당한 때에 맞장구를 치고 추임새를 넣었다. 메테이온은 그게 좋았다. 그래서 기세를 타고, 싫었던 일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어두운 마음, 매번, 불편해…….”
무수한 절망과 악의를 몸속 가득 담은 적이 있으니까, 세상에는 그런 감정도 흔히 존재한다는 걸 모르진 않지만…….
  “그런 일에 익숙해질 필요는 없어.”
앞서 얘기를 들을 때와는 달리 단호하게 말을 자른 파이퍼가 메테이온을 꽉 끌어안았다. 난데없는 몸짓이었지만 포옹을 자주 받아본 데다 살갗을 통해 전달된 온기가 반가워 메테이온은 어리광을 부리듯 파이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악의에 적응하면 남들을 의심하게 돼.”
  “의심하는 거, 좋지 않아.”
  “신중한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을 믿을 수 있는 세상이 더 좋잖아.”
그 말에 메테이온이 동의하자 파이퍼는 웃었다. 웃고, 어색한 정적이 찾아오기 전에 메테이온을 간지럽히며 더 크게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난 뒤에는 이렇게 말했다.
  “음……, 편지 쓸까?”
  “데릭한테?”
  “응. 링크펄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안 닿는 것 같더라.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쓸 수 있을지 모르고.”
메테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퍼한테 했던 이야기들을 데릭한테도 똑같이 들려주고 싶었다. 데릭은 메테이온이 파이퍼만큼이나 믿고 있는, 아끼는,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이니까. 데릭도 자기 이야기를 듣고 즐거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메테이온은 연필을 찾아 가방을 뒤적거렸다.

#4. 누군가의 아버지와 누군가의 딸
 이후이카 투무의 물살을 거스르며 다다랐던 어슨샤이어에서 주어진 과제의 해결을 목전에 둔 참이니 또다시 쉴 틈이 생겼다 싶었는데, 뱃머리 선실의 주인은 이번엔 파이퍼를 방이 아니라 전령 앞으로 안내했다. 연왕궁에서 온 전령이었다. 파이퍼는 사랑스러운 새의 모습으로 변한 메테이온을 어깨에 태운 채, 전령이 일러준 대로 왕궁을 찾았다. 그리고 옥좌에 앉아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던 굴루쟈쟈가 이러쿵저러쿵 말을 늘어놓으면서 청한 대련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파이퍼는 쏟아지는 맹공 앞에서 주의를 잃는 일 없이 정확하게 주문을 왰다. 파이퍼가 체내에서 넘쳐흐르는 에테르를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감싸는 견고한 막으로 변형시키거나 무기에 흘려보내 불꽃과 전격을 만들어 내는 모습을, 메테이온은 휘말리지 않을 만한 거리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봤다. 메테이온이 그러면서 보낸 응원이 효과가 있었는지 파이퍼가 확실하게 승기를 걸머쥔 바로 그 순간, 대련은 끝이 났다. 메테이온은 모습을 드러내고 얼른 파이퍼의 곁으로 톡톡 뛰어갔다.
  “혼자 온 줄 알았다만?”
  “그럴 리가……요. 얘는 내 반쪽인데.”
  “우리, 항상, 함께 있어요.”
파이퍼와 메테이온이 연달아 꺼낸 두 마디에 굴루쟈쟈는 더 이상 의문을 표하지 않고, 본래 말하려던 주제로 돌아갔다. 왕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꺼내는 이야기로. 우크라마트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해 계승 의식의 의미를 밝히고, 다시 우크라마트를 잘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끝맺은 그 이야기를 듣던 파이퍼는 문득 제 아버지를 떠올렸다.
 제 7재해가 휩쓸고 지나간 뒤 신생한 에오르제아에서 행방불명이 된, 세상을 떠돌며 찾아내려고 했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했던, 아이티온 별현미경에서 혹시 다른 망자들 사이에 있을까 연신 눈을 돌려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아 어딘가에 잘 살고 있겠거니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그 사람을. 이젠 그 사람을 떠올려도 아프지 않았다. 단지 애틋하고 먹먹한 기분이 가슴께에 머물렀다가 삽시간에 흩어질 뿐이었다. 파이퍼는 곁에서 제 손을 잡아주는 메테이온의 부드럽고 따스한 손을 맞잡으면서, 굴루쟈쟈에겐 결과를 기대하라고 호언장담했다.

#5. 나아가기 위해선
 어슨샤이어 서쪽에서부터 시작된 산길은 생각했던 것만큼 길진 않아도 제법 가팔랐다. 그런데도 메테이온은 아무런 문제 없이 일행 중 가장 빠르게 앞장서 가는 파이퍼와 발걸음을 맞춰 나란히 걸으며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대개가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반응하느라 튀어나온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는데도, 파이퍼는 메테이온의 말에 빠짐없이 반응했다. 바로 뒤에 있던 알리제나 에렌빌도 드문드문 끼어들었고, 알피노는 산소가 희박한 고지대에 들어설수록 버거워하는 우크라마트를 신경 쓰느라 다소 뒤처졌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에테라이트가 보였다. 곧 마을에 닿는단 뜻이었다.
 마을은 에테라이트도 멀쩡히 작동하는 데다 건물들 역시 깔끔히 가꿔져 있었지만, 파이퍼는 어쩐지 이곳에는 고즈넉하다는 표현보단 쇠락해 가고 있다는 표현이 알맞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뭐, 앞서 찾은 마을들과 달리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어서 선입견을 갖고 만 걸지도 모르니까. 이곳에 온 목적을 도로 떠올리고 감상을 훌훌 털어낸 파이퍼는 일행들과 함께 움직였다.
 과제를 내 줄 심사관을 찾아 들른 카료쟈 전당에서 여태껏 말로만 들었던 거대한 생물 발리가르만다가 봉인된 얼음을 목격하고, 저 녀석의 붉고 푸른 깃털도 하나쯤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가, 발리가르만다보다 저를 더 지긋이 쳐다보는 메테이온한테 “물론 메티 깃털이 백배 천배 더 예뻐!”라고 이유 모를 변명을 한 뒤, 결국 이번에도 심사관을 찾아내는 것 자체가 과제의 일부라는 것을 알아내고 전당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과제를 풀기 위해 물어물어 도착하게 된 묘지 ‘멈춰 선 자증’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죽는 것, 심장이 멈췄을 때가, 아니라, 마음에서 사라졌을 때…….”
파이퍼가 상투적인 얘기로 느껴 흘려들었던 내용을 메테이온은 오래도록 곱씹은 모양이었다. 처음 이 마을에 올 때와는 다르게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더니, 워코 조모 중턱에서 맞닥트린 괴조와 봉인에서 풀려난 발리가르만다를 토벌하고 기어이 그 녀석들의 깃털을 손에 넣어 히죽 웃는 파이퍼한테 불쑥 이렇게 물었다.
  “아까, 그 말대로면, 헤르메스, 살아 있는 거잖아.”
  “그렇지? 네 마음속에 살아 있지.”
  “멸망한 별들도?”
  “네가 기억한다면.”
  “그러면……, 잊어버리지 말아야겠네.”
굳게 다짐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메테이온 앞에서 파이퍼는 무슨 말을 해 줄까 고민하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떤 일들은 그 과정에서 남의 도움을 받을지언정 결국은 오롯이 혼자서 소화시켜야만 하는 법이고, 애도는 그런 일들 중 하나였다. 파이퍼는 메테이온이 자기만의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될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수 있었다.

#6. 바람은 어디서든 불고
 황금향을 둘러싼 소문을 조금 더 자세히 듣는 것으로 요카후이족과의 만남을 일단락짓고, 일행은 툴라이욜라로 돌아왔다. 많은 일이 연이어 일어났으므로 곧장 다음 장소로 가기보단 재정비를 위한 시간을 갖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파이퍼는 메테이온의 손을 잡고 뱃머리 선실로 향했다. 돌아다니다 잃어버릴까 싶어 아예 맡겨 놓았던 객실 열쇠를 도로 받으면서, 혹시 그동안 편지가 오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자 여관 주인은 아직 없다고 일러주더니 설명을 보탰다.
  “삼대주는 엄청나게 먼 곳이니까요. 이전에 보낸 편지가 지금쯤 도착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편지의 수신자는 한곳에서 얌전히 지낼 사람이 못 되니까 도착이 더욱 더뎌진대도 별수 없는 노릇이고. 편지가 무사히 닿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을 듯싶어, 파이퍼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 방으로 들어갔다. 
  “삐삐, 편지 없어서, 그거, 실망했어?”
바로 옆에 놓인 소파와 선베드도 마다한 채 마룻바닥에 걸터앉은 파이퍼를 쳐다보면서, 그 뒤를 졸졸 따라온 메테이온이 물었다. 파이퍼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면서 외쳤다.
  “실망했어―!”
그러나 메테이온이 되묻기 전에 냉큼 이렇게 덧붙였다. 서운하진 않다고. 오히려 기다리는 것 자체로 또 두근두근해서 괜찮다고. 메테이온은 그 대답에 수긍하며 파이퍼 곁에 딱 붙어 앉았다. 바닷가에서 불어온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뺨을 어루만졌다.
  “데릭,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글쎄? 아직까지 올드 샬레이안에 있진 않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예전엔 에오르제아를 벗어나 본 적이 거의 없다고 했으니까, 이번 기회에 북해 제도를 돌아보려고 할 것 같기도 하고.”
  “편지, 얼른 받았으면……, 좋겠다.”
  “그러게―.”
파이퍼의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깔려, 메테이온은 다시 밖을 내다봤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바람은 여전히 부드럽게 불었지만, 태양은 잠깐의 작별조차 아쉬운 것처럼 선명한 주홍빛 색채를 내뿜으며 하늘을 물들였다. 메테이온은 파이퍼를 한번 들여다보고, 데릭을 떠올리고, 그리고 이 풍경을 마음속에 꼼꼼히 그려 넣었다. 지금 이 순간은 메테이온이 훗날 몇번이고 꺼내 볼 추억 중에 하나였으므로.

#7. 모든 꽃은 비를 맞으면서 피어나
 계승 의식이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 남아 있는 두 가지 과제 모두 야크텔 밀림이란 곳을 무대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는 길은 걸어갈 만한 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행은 기구에 올라탔다. 매번 태풍이라든지 습격 따위의 사건이 벌어졌던 배와 달리 기구는 순풍만범으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높이에 겁먹어 밖을 내다보지 못한 채 한복판에 앉아있는 우크라마트 옆에서, 메테이온은 비행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떠들더니 아예 새의 모습으로 변해 기구와 나란히 날았다. 파이퍼는 메테이온이 들떠서 너무 멀리 가지 않도록, 간간이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곁으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야크텔 밀림은 ‘푸른 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장소였다. 짙은 풀내음을 만끽하며 기지개를 켜는 파이퍼와 경치를 구경하느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알피노를 본 에렌빌이 세노테에 대해 주의를 줬다. 이 일대는 먼 옛날 떨어진 운석으로 인해 지반이 약하고, 길 여기저기 구덩이가 생겨 있으니 발밑을 조심하며 다녀야 한다고 했다.
   “운석.”
   “내 잘못 아냐.”
   “그렇지,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일행 중 파이퍼와 메테이온의 만담에 쓴웃음을 짓지 않은 건 여전히 울렁이는 속을 달래는 데 집중하느라 얘기를 듣지 못했던, 들었다고 해도 사정을 모르니 고개나 갸웃거리고 말았을 우크라마트뿐이었다. 여하튼 계속 기구 발착장에 서 있을 수만은 없었으므로, 일행은 이 근처에 있는 마을 이크브라샤로 향했다.
 거기서 주어진 과제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도중에 전쟁으로 파괴돼 폐허만 남았다는 마을에 들르게 됐을 때, 파이퍼는 과연 메테이온을 그런 곳으로 데리고 가도 좋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어도 메테이온을 혼자 두지 않기로 했던 다짐을 되새기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메테이온은 동요하지 않았다. 산 사람들이 곁에 있어서 그랬는지, 이번 여행 속에서 메테이온이 조금쯤 갈피를 잡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파이퍼는 어쩐지 벅찬 마음으로 메테이온의 손을 잡았다.
 그 이후로도 메테이온은 한참이나 꿋꿋했다. 쿠루루나 훈무루크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그랬고, 우크라마트가 어느새 훌쩍 앞으로 나아갔다는 걸 알게 됐을 때도 그랬고, 바쿠쟈쟈의 사연을 대강이나마 알게 됐을 때도 그랬다. 어쩌면 파이퍼와 함께 여행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차곡차곡 모아 두는 데 익숙해진 덕분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위령소 ‘하늘심연 세노테’ 부근에 다가간 순간, 한계에 다다른 듯싶었다. 파이퍼는 메테이온이 연거푸 입술을 깨물고 있는 걸 기민하게 알아채고는, 시선을 끌지 않도록 조용히 손을 붙잡고 소곤거렸다.
  “메티, 기억나? 적당히 걸러 들으라고 했던 거.”
  “하지만, 들려……. 여기, 슬픔이 넘쳐흘러서…….”
  “제일 중요한 건 너야.”
  “…….”
  “귀를 기울이는 건 나쁜 게 아냐. 오히려 대단하지. 그치만, 그러다 넘어지면 전부 놓쳐 버리게 되잖아.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해.”
나름의 논리를 늘어놓은 파이퍼는, 메테이온이 머뭇거리다가 맞잡은 손에 힘을 줘서 더 단단하게 붙드는 것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래서 자세를 다시 한번 정돈하고선 어서 저 안으로 가자고 씩씩하게 목소리를 냈다. 땅에 흐르는 고통을 견디고 설 만큼은 굳세졌지만, 그 고뇌를 디디고 앞으로 걸어 나가기에는 아직 부족한 메테이온의 이정표가 돼 주고 싶어서였다. 메테이온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고, 적당히 거리를 둔 채로 파이퍼를 뒤따랐다.

#8. 기약期約
 짧지 않은 여정 끝에 황금향에 이르는 문 앞까지 다다라 계승 의식이 마무리되는 것까지 지켜보고 돌아온 파이퍼에게, 여관 주인은 대뜸 봉투 하나를 건넸다. 얼마 전에 온 편지인데 기다리던 게 맞냐는 물음과 함께. 파이퍼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봉투 귀퉁이에 눈에 익은 글씨체로 적혀 있는 발신자의 이름이 반가웠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그 이름 위에 쪽 하고 입을 맞췄을 만큼. 파이퍼와 마찬가지로 편지를 기다렸을 메테이온이 얼른 편지를 읽어 보자고 성화를 부렸다.
 마음이 앞선 탓에 지저분하게 찢은 봉투에서 꺼낸 편지에는 데릭의 근황이 적혀 있었다. 데릭은 파이퍼에게 편지를 받을 때까지 올드 샬레이안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아직도? 아니면 이 답장을 보내고 나서는 다시 버릇처럼 훌쩍 떠났을까. 어쨌거나 제 기별을 받으리란 보장도 없었는데 왜 그때까지 떠나지 않았는지 궁금해하며 고개를 기울이는 파이퍼의 모습을 예상한 듯, 데릭은 그 사정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적어 놓았다.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에오르제아를 벗어나는 건 거의 처음이다시피 해서 들뜨고 말았다고 하면 될까. 와 본 적 없었던 장소에 자꾸만 발목을 붙잡히는 마음은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게다가 항구에서 널 배웅했던 날, 그라하 티아도 내가 조금 더 머물러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거든. 그럼 며칠만 더 있다 가겠다고 했는데, 바로 그 며칠 사이에 너랑 메테이온이 보내준 편지를 받았지.’
 그러고선 파이퍼가 메테이온과 즐겁게 여행하고 있는 것 같아 제가 더 기쁜 마음이 든다며 이러쿵저러쿵 말을 건네더니 짤막한 한 마디로 편지를 끝맺었다. ‘보고 싶어.’ 파이퍼는 그 부분을 거듭해서 읽었다. 드물게 말이 없어진 파이퍼를 대신해 메테이온이 옆에서 조잘거렸다.
  “나도, 나도 보고 싶어.”
파이퍼는 메테이온의 말을 따라 했다. 
  “나도 보고 싶어. 편지 써야겠다.”
  “같이, 같이 가자고 해.”
  “그럴까? 당분간 이쪽 대륙에 있을 거니까.”
흔쾌한 대답을 들은 메테이온이 활짝 웃었다. 그러나 뒤에 덧붙은 말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편지를 보내고 답을 받는 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응? 그럼, 같이, 못 가? 못 만나……?”
  “나중에 같이 다닐 수 있을 거야. 느긋하게 말야.”
  “같이 다니고 싶었는데…….”
  “다음에! 이번엔 우리가, 음, 그렇지, 답사라도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야 같이 다니게 됐을 때 이것저것 알려줄 수 있지. 메티는 안내도 잘하잖아. 엘피스에서도 그랬고.”
파이퍼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그제야 메테이온은 다시 웃었다. 파이퍼는 메테이온이 얼른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무언가 꾹꾹 눌러쓰는 걸 보면서 생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저도 그 곁에 앉아 제 몫의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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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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