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낫세x레하트(고유 설정 있음.)
*애정B 엔딩 이후: 두 사람이 레하트의 고향에 갑니다.
잠자리에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뜨고 만 타낫세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드문 일도 아니거니와 별로 놀랄 일도 아닌 선잠을 이어가기 위해 찾은 부드럽고 따스한―이를테면 곁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어야 할 아내가, 자리에 없었다.
“…레하트?”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마치 수면 위로 떠오르는 물고기처럼 펄떡 일어난 타낫세가 허공에 대고 이름을 불러도,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 치 앞이나 간신히 분간할 수 있는 어두운 방 안을 둘러본 타낫세는 황망히 램프에 불을 켰다. 그러나 환한 빛 아래서도, 레하트는 보이지 않았다.
타낫세는 난데없이 사라진 레하트를 찾아 나서려고 했지만, 정작 그의 발은 침실을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만 서성거릴 뿐이었다. 그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밤중에 저를 깨워서는 화장실에 혼자 못 가겠다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레하트가 대체, 어딜 갔는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평소에는 겁도 없는 녀석이 그깟 일로 우물쭈물하는 게 신기했었는데.
“사실 깜깜한 건 괜찮아. 정말 무서운 건……, 내가 다치면 타낫세가 너무 걱정하잖아.”
“그거야 당연히―”
“그러니까 어디 부딪치거나 넘어질 일 없게 같이 가 줘.
“…그래.”
길지 않은 회상이 그날의 대화를 복기하는 데까지 이르자, 타낫세는 레하트가 어디에 있을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램프와 담요를 챙겨 뒤뜰로 내려갔다.
레하트는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타낫세는 잠옷 한 장만 걸치고 서 있는 레하트를 보고서도 담요를 둘러주지 않았다. 아니, 둘러주질 못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레하트가……울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펑펑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더라면 진정하라고 달래주기라도 할 텐데, 입을 꾹 다문 채 보는 사람이 더 섧게 소리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만 있으니 차마 다가갈 수가 없었다. 타낫세는 저도 모르게 숨죽이고 레하트를 지켜봤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달빛이 그녀의 뺨 위를 흐르는 눈물에 빛을 냈다. 저녁 식사 때는 좋아하는 요리가 나왔다며 즐겁게 들썩이던 어깨가 이제는 우느라 잘게 떨리고 있는 모양이 퍽 안쓰러워, 타낫세는 결국 레하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람이 차다.”
“앗.”
그는 레하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함께 침대에 누워 인사를 나눌 땐 농담도 곧잘 하며 웃더니 왜. 왜 이런 데서 혼자 울고 있었어. 하지만 여전히 어둡기만 한 레하트의 얼굴을 슬쩍 들여다보고는, 그저 곁에 앉아 담요를 덮어주고 체온을 나눠주기만 했다.
“정말이지,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
“이만 들어가는 게 좋겠군.”
내내 묵묵부답이던 레하트는 그제야 웅얼거렸다. 먼저 들어가. 물론 타낫세는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조그마한 손을 감싸듯 쥐었다.
“…네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곁에 있으마.”
“응.”
짤막하게 대답한 레하트가 타낫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때 문득, 타낫세는 레하트가 꽤 오랫동안 여기 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레하트로부터 서늘한 바람 냄새가 풍겨 오는 탓이었다. 그것은 타낫세에게 익숙한 위통을 불러일으켰으나, 그는 당장 느껴지는 자신의 통증보다 레하트를 염려하며 입을 열었다.
“그―”
“꿈을 꿨어.”
동시에, 레하트도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악몽을?”
“아냐, 좋은 꿈. 어머니가 나왔는걸.”
레하트는 맞잡고 있던 손을 잠시 놓았다가, 깍지를 끼며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 타낫세는 잠자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날 업고 자장가를 불러주시던 때의 일이었는데…….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라는 걸 떠올려 버렸어. 그랬더니 바로 깨더라. 그게 뭔가 허무해서, 그래서…….”
“…그래서 여기에?”
“응. 그 마을에서도 이런 꽃이 피었거든. 보고 있으면 괜찮아져.”
레하트는 뒤뜰 한 켠을 차지한 노란 꽃밭에만 눈길을 주며 담담히 말을 마쳤다. 그러나 타낫세는 레하트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외로움을 엿본 것만 같았다. 그 고독은, 제가 아무리 애정을 부어준다고 한들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레하트에게 있어 자신은 겨우 2년 남짓을 함께 했을 뿐이나, 레하트에게 쓸쓸한 기분을 안겨다 준 존재는 그녀의 거의 평생을 함께 했으니. 더군다나 타낫세는 어떤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 꽃들을 심을 땐 거기서 자라는 것과는 다른 종이라고……”
“어쩔 수 없었어. 땅이 다르니까. 그래도 엄청 비슷한 거야.”
“……그럼, 조만간 네 고향에 가보지 않겠나?”
“…갑자기?”
레하트는 반문을 하면서도 이미, 작게나마 미소 짓는 중이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어느 벽촌의 노란 꽃밭에서 환히 웃는 그녀를 떠올려 낼 수 있었던 타낫세는 곧, 자신의 말을 실현할 계획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이번주 내로는 어렵겠지만 아마 다다음주 5일 이후라면……, 여행을 위해 자리를 비우는 며칠 동안의 대책은 어떻게…….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자니 옆에서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나 졸려. 들어갈래.”
“가자.”
타낫세가 레하트를 향해 자연스레 등을 내밀었다. 레하트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매달렸다.
“…무겁지 않아?”
“전혀. 오히려 너무 가벼워서 걱정된다만……. 분화 전보다 마른 것은 아닌가?”
“그럴 리가 없잖아, 바보.”
투덜거리는 듯하면서도 결국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레하트의 모습이 좋아서, 타낫세는 뒤뜰에서 침실까지 돌아가는 짧은 여정 내내 레하트에게 말을 건넸다. 정원에 심은 꽃과 그 마을에서 자라는 꽃은 어떻게 다르더냐, 어머니와는 가까이 지냈던 모양이지, 감기 기운이 있거든 반드시 말해야 한다, 뭐 그런 얘기들을 주워섬기다가, 레하트를 침대에 눕혀 주고서는 이렇게 일렀다.
“다음에는, 그, 혼자 울지 말고.”
“응…. 미안해, 걱정시켜서.”
“그게 아니라―”
타낫세는 레하트의 불안한 눈빛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물론 레하트가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단, 그게 레하트가 사과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그는 레하트가 어딘가에 숨어 남몰래 울 바에는 차라리 제 품에 안겨서 울기를 바랐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타낫세는 반려에게 마음 쓰는 게 뭐가 어렵겠느냐고, 당연하다 못해 기껍기까지 한 일이라고,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 대신에, 그냥, 얼른 자라는 말만 툭 내뱉었다. 제 눈치를 보고 있는 녀석을 나무라듯 굴고 싶지는 않아서 그랬다.
“……고마워.”
저 가냘픈 인사조차 어쩐지 애처롭게 보여서, 타낫세는 밤새도록 레하트를 토닥였다.
그리고 며칠 뒤, 두 사람은 정말로 리탄트 남동쪽의 작은 마을로 향하는 록차에 올라탔다. 타낫세는 곁에 앉은 레하트의 안색을 살폈다. 총애자는 일반인보다 강건한 신체를 지녀 잔병치레가 드물다고는 하나, 병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런 총애자를 앓아눕게 만들 만큼 지독한 감기에 걸릴 때가 없지 않았다. 그건 레하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이 지나자마자 어김없이 찾아온 감기로 인해 꼬박 이틀을 고열에 시달렸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과오로 레하트만이 부쩍 약해진 걸지도 모르고. 타낫세는 기묘한 자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레하트는 아픈 와중에 어머니를 보고 싶다고 했다. 예정보다 빠른 출발은 그렇게 시작됐다.
“며칠은 걸리겠네.”
“피아칸트에서 가는 것보단 멀지 않을 거다. 무리한다면 나흘 만에―”
“으응. 괜찮은데.”
처음이잖아, 이렇게 같이…여행 가는 건. 레하트가 정말이지 오랜만에 웃어 보였다. 다만 너무나도 희미한 웃음이었기에, 타낫세는 이 여행으로 그 웃음이 더욱 환해지길 기도했다.
다행히도 아네키우스는 기도를 들어줄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이레에 걸친 여정은 평탄했다.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던 건 이틀뿐이었고, 식사 또한 그 이틀을 제외하고는 매번 말리거나 절인 보존식 위주였지만, 레하트의 얼굴이 나날이 밝아지고 있었다. 타낫세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두 사람을 실은 록차는 별 일 없이 목적지에 다다랐다. 문제는 그 뒤에 나타났다. 국경과 맞닿은, 왕도까지는 수 주가 걸리는 벽촌에 외지인―그것도 비단옷을 입은 데다 호위까지 거느린 이들의 등장은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철모르는 아이들의 노골적인 시선, 그리고 그보다는 덜하지만 거슬리기는 매한가지인 성인 몇몇의 시선을, 레하트는 익숙한 듯 무시하며 성큼성큼 걸었다. 덜컹거리는 문이 달린 마을 어귀를 뒤로 하고, 우물가의 주홍빛 열매가 열린 나무를 지나자, 허름한 집 한 채가 나타났다.
“……무사했구나.”
벽에는 심란한 낙서들이 적혀 있다만. 그 부분을 지적할 때가 아닌데다가, 굳이 지적하고 싶지도 않았던 타낫세는 레하트를 돌아봤다. 기분 전환을 위한 여정이었는데 이런 꼴을 보고 마음이 상해버린다면 본말 전도일 테니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레하트는 웃고 있었다.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어조로, 레하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타낫세는 왕성에서 자랐으니 잘 모르려나? 원래 이런 조그만 마을에서는 빈 집을 내버려두지 않아. 조금이라도 쓸모 있어 보이는 것들은 죄다 가져가거든. 처음에는 버려진 물건들을 집어가다가, 창문이 해질 때쯤이면 문짝도 떨어지고, 벽에도 금이 가기 시작하는 거야."
“…….”
“그렇지만 나나 어머니는 다들 불편하게 대했으니까, 그 덕분에 오히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던 걸지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을 마치고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레하트는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괜찮은 건가?”
“응? 어차피 내 집인걸.”
타낫세가 물은 것은 그게 아니었지만, 그는―이번 여행 내내 그랬듯이―순순히 아내의 뒤를 따랐다.
1년 넘게 방치된 실내는 습한 공기가 감돌았고, 퀘퀘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타낫세는 이 작은 집에 대해 불쾌감을 표현하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고 드는 대신, 그 안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두 명만이 사용할 수 있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 그가 지내는 방에는 결코 들어올 일 없을 흉측한 짜임새의 서랍, 품고 있던 식물은 말라죽은지 오래인 듯한 화분, 벽 한 편에 널린 마른 약재들. 생기를 잃은 공간이었다. 타낫세는 레하트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에 보았던―왕성을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고향에 대한 향수를 내비친다기에는 너무나도 삭막했던―눈빛을 떠올려냈고, 이제야 비로소 그것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당장이라도 레하트를 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타낫세는 어느새 건넛방으로 건너간 레하트를 찾아 가까이 다가가, 충동이 이끄는 대로 레하트의 몸에 팔을 두르며 단단히 끌어안았다.
“타, 타낫세…?”
“내가 못 미덥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아니, 오히려 그런 취급을 받아 마땅한데도 과분한 아량을 받고 있지만…….”
타낫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레하트가 저를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분에 넘치는 일인데 더 욕심을 내어도 괜찮은가 싶어서. 하지만 자신을 마주 안아주는 가느다란 팔이, 그것의 선명한 온기가 타낫세로 하여금 객기를 부리게 만들었다.
“……네가 조금쯤은 나한테 의지해줬으면 좋겠다.”
“…….”
“물론 나는 네가 그리워하는 사람의 대신이 될 수 없고, 너를 완벽히 달래줄 수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바보. 멍청이. …미워.”
그 말에 머뭇거리며 한 발 물러난 타낫세는, 레하트가 답지 않게 싸늘한 표정을 지으려다 실패하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목도했다. 타낫세가 레하트의 손짓을 따라 그녀 곁에 앉자 먼지가 흩날렸다.
“실은 하나도 밉지 않지만. 응, 진짜 바보야. 내가 무슨 이유로 자길 선택했는지 생각해본 적 없지?”
“그건……”
“날 위해서 여기까지 같이 와 줬잖아. 그리고 이 침대가 먼지 투성이인데도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런 점이 좋은 건데. 그래서 기쁠 뻔했는데…… 갑자기 바보 같은 말을 하니까 좀 화가 났어.”
타낫세는 맥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너, 최근에는 혼자 울거나 내 눈치를 살피거나 하지 않았나…….”
“내가 힘든 티를 내면 지나치게 걱정하잖아.”
“그거야, 네가 내게 무척 중요하니까……”
“그런 수준이 아니었어. 소중한 사람을 걱정하는 것뿐이었으면 기쁘게 받았을 거야. 즐겼을지도 몰라. 그런데 타낫세는,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늘 엄청 어두워진 얼굴로 모든 게 다 자기 탓이라는 것처럼 행동하거든.몰랐지?”
몰랐다. …하물며 진즉 알았다고 해도 태도가 달라지지는 않았으리라고, 타낫세는 생각했다. 레하트의 몸이 약해진 것이나 분화를 마치고도 그다지 자라지 못한 것, 레하트가 외로움을 느끼거나 슬퍼하는 것, 전부 제 책임인 것만 같았다. 아니, 제가 책임질 일이 맞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수그러드는 타낫세의 얼굴을, 레하트가 붙잡고 시선을 맞췄다.
“체력이 떨어진 거, 그건 확실히 자기 탓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 내가 가끔 우울해지는 건 그냥 있는 일이야.”
“…….”
“타낫세는 자기 탓이 아닌 일까지 자책해야 마음이 편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힘들어하는 거 싫어.”
그러니까, 음, 걱정시켜서 미안해. 레하트는 사과의 말로 얘기를 갈음하며 타낫세를 풀어줬다. 그러나 타낫세는 레하트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느라 꽤나 오랫동안―장난기가 동한 레하트가 그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어보일 때까지― 한 자세로 멈춰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너는 너무 쉽게 용서해.”
볼품없는 고백이었다. 그렇지만 타낫세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품은 의문―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어리석은 자신의 과오로 비롯된 그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괜한 부담이라고, 더 이상 그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에 대해 묻기도 전에 주어진 답이 그에게 깨달음을 선사한 탓이었다. 당신이 힘들어하는 게 싫다고 다정히 선언하는 레하트는 (언젠가 타낫세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반려에게 마음을 쏟고 있어서, ……제가 책임을 짊어지려고 할수록 더욱 숨어서 울게 되리라는 것을. 그 사실은 타낫세에게 레하트의 애정을 아득히 실감하도록 만들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타낫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레하트.”
대답하지 않고 눈웃음만으로 반응하는 아내의 손을 잡으며, 타낫세는 조용히 속삭였다.
“확실히, 그동안의 나는 못 미더운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무 하나에 등을 기댈 때조차 부러지거나 썩은 곳 없는 부분을 찾아 기대는 법인데. 그런데도 네가 나를 의지해주길 바라고, 네가 그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서운해?”
“……그래. 우습게도.”
레하트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말을 고르는지 몇 차례 입술을 달싹이기도 했다. 그것이 못내 귀여워 멀거니 쳐다만 보고 있던 타낫세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되어보겠다는 거다. 물론 당장에 달라진다고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어울려주지 않겠나……?”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불현듯 몰려온 쑥쓰러움 탓에 헛기침을 하는 타낫세의 상태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레하트는 그의 허리에 매달리듯 하는 동작으로 타낫세를 깊이 포옹했다. 바보, 진짜 바보네, 하는 중얼거림은 덤이었다.
“내가 이제 와서 어울려주지 않을까봐 겁내는 거야?”
레하트는 그런 말을 하더니, 포옹을 풀지 않은 채 타낫세의 콧등을 가볍게 깨물고, 뺨에 입을 맞췄다. 하여튼,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 바랐던 대로 레하트가 환히 웃고 있었으므로, 타낫세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두 사람은 마을의 다른 곳(레하트의 어머니가 묻힌 묘지와 레하트의 추억이 서린 노란 꽃밭)에 들른 뒤 귀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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