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낫세x레하트(고유 설정 있음.)
*애정B 엔딩 이후: 저희집 2세 등장합니다.
*원작과 상충되는 설정은 전부 망상. 보고 싶은 장면을 이어 붙인 것뿐이라 내용은 없어요.
*5,480자.
페넷 저택을 장식하던 호박 조각들이나 검은색과 주황색의 천들이 치워지자마자, 레하트는 다시금 저택을 녹색과 붉은색으로 꾸미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정원사를 불러 말채나무들과 솔송나무, 포인세티아, 시클라멘 따위로 앞뜰을 채우는 청사진이며 실내에 놓아둘 전나무에 관한 얘기를 나눴고, 각 부서의 장들에게는 귀향을 바라는 사용인이 몇이나 되는지 파악해두라고 지시했으며, 저택 안팎으로 보내야 할 물품 목록을 추렸다. 그 모든 준비는 월동을 앞두면 으레 늘어나는 갖가지 일들과 함께 처리되고 있었지만, 그렇게 함박눈 쌓이듯 늘어나는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레하트에게서는 피로한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레하트는 할 일이 많을수록 생기를 얻는 것 같았다. “벌써?” 하고 놀림 섞인 물음을 던지는 타낫세에게 “크리스마스잖아.”라는 단답을 하면서도 쉴 새 없이 대바늘을 놀리는 모습만 봐도, ‘레하트는 이 모든 순간이 즐거운 바람에 계속해서 일을 늘리고 있다’라는 사실이 명백해 보였다.
그래, 크리스마스였다. 사용인들이 저택에 들어와 일하기 시작한 지 몇 년째 되는 날들까지도 일일이 기억하고 챙기는 레하트가 한 해의 마지막 기념일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더군다나 올해는 올해만의 특별한 사실―첫째 아이가 10살이 됐다는 점까지 레하트를 더욱 들뜨게 했다.
그 아이에 대해 떠올릴 때마다 레하트는 아주 많은, 그리고 그 아이가 없었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감정이 가슴 깊숙한 데서 따스하게 휘몰아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름은 제게서 더 많이 받아 갔는데도 빼닮기는 타낫세만을 작게 오려 붙인 듯이 쏙 빼닮은 테레하는, 이런저런 얘기를 재잘대는 것은 곧잘 하면서도 정작 이게 갖고 싶다느니 그게 하고 싶다느니 요구하는 적이 드물었다. 오히려 수시로 레하트나 타낫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네 살배기 동생 옆에서 “그러는 거 아냐.” 하고 말리는 때가 훨씬, 훨씬 더 많았다. 그런 아이에게 평생 떠올릴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진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데…….
“테레하, 갖고 싶은 게 정말 없어?”
“음…….”
테레하는 레하트가 아무리 캐물어도 뺨을 발갛게 붉힌 채 수줍게 웃기만 했다.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미소지만 레하트는 역시 조금 애가 탔다.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선물도 골라주지 못할 일은 없었으나, 아이를 위한 특별한 순간을 기획해놓고서 지난날들과 같은 선물을 주기는 꺼림칙한 탓이었다. 아직 두어 달이나 남았으니 천천히 알아내면 되겠지. 레하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테레하를 품에 안고 토닥였다. 귓전을 스치는 조그만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러나 레하트의 생각과 달리, 테레하는 그 짧은 대화 이후로 레하트를 슬슬 피하는 것 같았다. 매일 아침 문안을 올릴 때나 가족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식사할 때를 제하면 테레하는 도무지 레하트 곁으로 다가오질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걱정돼 지켜본 며칠 동안, 레하트는 테레하가 동생 라넷타의 치근덕거림을 의젓하고 다정하게 받아주거나 타낫세 옆에서 종알거리는 모습, 가족 외의 사람들에게도 평소 같은 태도로 행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피하는 건 엄마뿐이네. 왠지 배고플 때를 빼고는 늘 타낫세 품만 찾아 울던 젖먹이 시절의 테레하가 떠올라 레하트는 쓰게 웃었다.
“그래도 테레하가 자긴 잘 따라서 다행이야.”
레하트가 그렇게 운을 떼자, 타낫세는 대답 대신 눈썹만 까딱해 보였다.
“애가 나한테는 좀 뻗대는 것 같아서.”
“그건…….”
“뭐, 그럴 만한 나이기는 해. 알지. 나도 그 나이 때에는 비슷했는걸.”
거짓말이다. 레하트는 문득 10살짜리 레하트가 얼마나 어머니를 잘 따랐는지 떠올려봤다. 한 주머니 안에 든 땅콩처럼 긴밀한 사이였다. 또래 친구도 사귀지 않았다. 아니, 사귈 수 없었다. 친구를 만들 만한 시간이 주어지기도 전에 거처를 옮기며 살았고,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머무른 마지막 마을에선 시간은 충분했지만 남들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말을 건네려다가도, 어머니가 다시 피로한 얼굴로 짐을 쌀까 봐 입을 다무는 것이 버릇처럼 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분은 레하트를, 레하트의 이마에 새겨진 것을 탓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모든 사정―제 이마에 새겨진 것―을 알게 된 레하트는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려볼 때마다 서글퍼졌다. 결코 그분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닮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 그래서 아이 갖기를 주저하는 타낫세를 설득했다. 끈질긴 시도 끝에 테레하가 이 집에 왔다. 어떤 말로도 담아낼 수 없는 마음 앞에서 약간의 서운함 정도는 자연스레 뒤로 미뤄졌다.
“자기한텐 무슨 말 안 해? 고민 같은 거?”
“테레하가? ……별말 안 했다만.”
저 망설임. 무슨 얘기를 하기는 했구나. 레하트는 타낫세의 짧은 침묵만으로도 그 사실을 간파해냈다. 비록 타낫세가 십수 년 전보다 뻔뻔하고 대담하게 굴 수 있게 됐다고는 해도, 그동안 침대를 같이 쓰며 그렇게 변하도록 만들어 온 아내를 속일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도 레하트는 둘이서만 무슨 얘기를 속닥거렸냐고 묻지 않았다. 타낫세가 무언가 언질 받은 게 있다면 그는 분명 적당한 때에 말을 옮겨줄 터였다. 레하트는 가물거리는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며칠이 지났다.
테레하도, 타낫세도 별말이 없었다. 레하트는 스웨터를 뜨는 데 열중했다.
며칠이 더 지났다.
라넷타가 레하트의 치맛자락에 매달린 채 자기만을 위한 록차를 갖고 싶다고 했다. 레하트는 그만한 아이가 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토록을 주면 어떨까 생각해봤다. 나쁘지 않아 보였다.
몇 주가 지났다.
스웨터 네 벌이 완성됐고, 테레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레하트는 타낫세의 선물도 골라야 했다. 취향을 속속들이 아는 상대의 선물을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커프 링크스와 마음 안정에 효과적이라는 향낭 제작을 의뢰하는 편지들을 적었다.
크리스마스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여태껏 손에 잡고 있었던 일들이 모두 끝나거나 막바지에 이르렀는데도 테레하는 묵묵했다. 타낫세에게 물어도 “네 안목으로 고른 거라면 테레하도 만족할 텐데.” 따위의 쓸모없는 대답만 돌아왔다. 레하트는 입술을 비죽였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레하트는 테레하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봤다.
책 읽는 걸 좋아했지.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책을 읽어준 덕분인지 아이를 위한 동화든, 아직 그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할 디레마트이의 시집이든, 항상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니는 테레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야말로 타낫세와 제 사이에서 나온 아이라는 게 확실해서 무심코 웃음이 나올 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책은 지난 생일에도 일곱 권이나 선물했는데. 다른 걸 생각해보는 게 나을 듯했다. 예컨대 자랑스럽게도 편식하는 것 하나 없으면서도 새콤한 맛이 나는 음식을 먹는 순간 절로 환해지는 표정을 얼굴에 띄우기 위해, 크리스마스 파티에 차려질 메뉴를 다시 한번 확인해본다거나. 선물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기억에 남는 하루를 선사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또, 테레하는 한번 외출하면 눈에 들어온 모든 것을 확인하기 전까진 도통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원에 심어둔 나무와 꽃의 이름을 전부 물어보기도 했고, 정원 안의 연못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이나 축사에서 먹이를 질겅거리는 토록들과 종종대는 전서구들에게도 반드시 인사를 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말을 다 들어주면 얌전히 발길을 돌려주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애완동물을 깜짝 선물로 주고 싶지는 않고. 화분은 괜찮으려나? 그러고 보면 테레하는 제 방 구석구석에 자잘한 소품을 늘어두는 것도 좋아했다. ……물량 공세를 해야겠다. 그게 레하트의 결론이었다.
마침내 모든 물건과 함께 크리스마스가 도착했다. 초록색과 빨간색, 그리고 흰색의 식물들로 채워져 색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앞뜰의 풍경도 조금씩 낯이 익어갈 무렵이었다. 레하트는 가족들에게 손수 만든 스웨터를 입혔다. (흉측한 무늬는 찾아볼 수 없는 스웨터인데도 라넷타만은 자기가 고른 옷을 입겠노라 떼를 쓰며 거부했지만.) 어쨌거나 매년 그래왔듯이 옷을 맞춰 입은 네 사람은 식탁 앞으로 모였다.
너무 커서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기다란 식탁은 녹색 줄무늬 테이블보와 함께 명백한 축제 분위기로 꾸며진 채였다. 꽃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과일들을 트리 모양으로 쌓아 올린 센터 피스가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고, 거기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바로 옆에 놓인 오리 통구이를 볼 수 있었으며, 그 밖에도 씨겨자와 꿀, 요거트를 섞어 만든 드레싱이 끼얹어진 브로콜리 샐러드, 그레이비소스, 각종 허브로 향을 입히고 오리 기름으로 구운 감자 따위가 차려졌다. 또, 아직 나오지 않은 디저트로는 베리가 들어간 생크림 케이크도 준비돼 있었다. 크리스마스마다 페넷 가의 식탁에 올라오는 메뉴 그대로였다.
음식이나 지나간 날들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을 새도 없이 의자 위에 서서 손을 뻗으려는 라넷타를 붙들어 매는 것을 시작으로, 식사는 여느 때와 같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그러던 와중 레하트는 묘한 시선을 느꼈다. 가만히 있는 법을 잊어버린 듯싶은 라넷타와 씨름하며 입 안에 음식을 채워줄 동안 타낫세가 테레하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고 있었는데, 테레하는 그릇보다 레하트의 표정을 더 많이 살피는 것 같았다.
“테레하,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으응…, 이따가요.”
이제는 말을 붙여줄 마음이 좀 생겼을까. 레하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테레하가 포크를 쥐는 것을 쳐다봤다. 그리고 드레싱이 잔뜩 묻은 브로콜리를 입에 넣은 테레하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순간을 마음속 어딘가에 새겨넣은 뒤, 작은아이에게로 다시 주의를 돌렸다. (라넷타는 그 잠깐 사이에 잔을 엎지르고 까르륵 웃고 있었다.)
식사가 마무리되자 레하트는 선물 상자를 꺼냈다. 아이들 간의 질투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당장 내민 상자들은 한 사람당 하나뿐이었다. 제 방에 쌓인 선물들을 발견한 테레하가 안방으로 찾아와 배시시 웃어주는 모습을 보려면 아마 밤까지 기다려야 할 터였다. 그런데도 레하트는 테레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민을 시키지 않은 두 사람은 제 몫의 선물에 충분히 만족해주는 것 같았지만, 테레하는 스노 글로브를 양손에 쥐고만 있었다.
“마음에 안 드니?”
“아, 아니요! 좋아요. 예쁘고…….”
“그럼?”
“저기, 있잖아요, 둘이서만 얘기할래요.”
“그럴까?”
테레하가 비밀 얘기라도 하려는 듯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서 소곤거린 덕에, 레하트도 덩달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하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쫑쫑 걷기 시작한 테레하를 따라갔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테레하는 역시나 구석에 쌓인 상자들을 발견하고 놀란 듯 잠시 멈춰 서는가 싶더니, 이내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꽃 네댓 송이로 만들어진 작은 꽃다발이었다.
“……선물이에요.”
“어머, 엄마한테?”
“지금까지 많이 받았으니까, 이번에는 저도 주고 싶어서 아빠랑 얘기했는데, 어머님이 꽃을 좋아하실 거래서….”
평생 떠올릴 추억을 받은 건 아무래도 이쪽인 모양이다. 레하트는 테레하를, 어느새 제법 묵직하게 자라난 사랑스러운 온기를 품에 끌어안았다. 행복한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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