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투를 줄이고자 의역한 부분이 많습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원문의 출처는 일어, 영어.
 


「어느 여행자의 궤적」 *일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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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끝에서 울려퍼지던 종언의 노래가 그쳤다.

그 놀랍고도 기쁜 소식을 듣고, 열두 신은 신역 옴팔로스에 모였다.

별의 미래를 두고 많은 논의가 오갔지만, 아마도 마지막이 될 신들의 회합을 끝낸 것은 정리를 맡게 된 남매신이 여행신을 향해 꺼낸 말이었다.

 

당신에게는 이것이 마지막 여행이 되겠군요.

부디 멋진 운명이 기다리고 있기를.

별의 신 니메이아가 별빛처럼 부드러운 미소로 말하자, 시간신 알디크가 소망을 담아 그 뒤를 잇는다.

우리의 비원을 위해서, 부디 그 사람을 옴팔로스로.

 

여행신 오쉬온은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신들 또한 저마다 고조되는 마음을 안고 있다.

지식신 살리아크는 인간의 역사가 소실되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하는 한편으로 그 역사를 잃지 않으려 분투한 이들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겼고, 태양신 아제마는 베네스의 소원이 이뤄졌다는 기쁨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전쟁신 할로네와 달의 신 메느피나는 마도선이 하늘 끝으로 날아가던 날 무운과 여행이 무사하길 바랐던 것을 기억해냈다.

 

신들은 또 자신들의 앞날에 대해서도 생각을 뻗쳤다.

이 별에 살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태어날 모든 사람의 삶이 조금이라도 더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지금껏 받아온 기도에 의해 쌓인 힘을 축복으로써 세계에 되돌려주고 싶다고.

그리고 기구가 되었던 자신들의 핵베네스와 뜻을 함께했던 자들이 바친 혼의 조각을 별바다로 돌려보내고, 이제는 사람으로서, 사람의 곁에서 살아가고 싶다고.

이 소원들은 사랑해 마지않는 인간 아이들과 전력으로 싸운 끝에 쓰러져야만 성취할 수 있다.

그렇기에 종말이 물러간 지금이, 행동에 나설 때라고 결론을 내렸다.

 

제작신 비레고와 파괴신 랄거는 벌써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싸움을 어떻게 만들면 좋을지 구상해나가기 시작했다. 반면 해신 리믈렌은 특히나 자신을 믿어주고 있는 바다의 도시 사람들의 북적임을 다시 한번 직접 보고 싶다며 바닷새의 모습으로 변해 뛰쳐나갔다.

그리고 계획의 요직, “그 사람을 인도하는 역할로 지명된 여행신 오쉬온은 데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형상을 취하고 조용히 옴팔로스를 떠났다.

 

산악을 관장하는 오쉬온이, 산신이 아니라 여행신으로 불려온 것은 인간들의 세상을 떠돌며 인간의 고독을 따르는 역할이 부여됐기 때문. 신역보다 인간 세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온 그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방식이 있었다. 세상으로 내려갈 때는 반드시 신역에 들어갈 때와 똑같은 장소…… , 여행자로서 마지막에 머물렀던 장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 별에는, 에테라이트를 사용하는 모험자들과도 어딘가 다른, 신출귀몰하고도 기묘한 여행자의 소문이 퍼졌을 터였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검은장막 숲으로 전이해 소근소근 덤불의 구석에 사뿐히 착지한다. 난데없이 나타난 데릭을 본 주변의 마물들이 놀라 달아나긴 했지만, 그밖의 목격자는 없다.

한숨을 돌린 뒤……, 그렇다고는 해도 여행자가 잠깐의 휴식을 마친 것처럼 걸어가기 시작할 따름이다.

 

화창한 오후,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를 통해 바람을 만끽하며 조금 걷다보면 소근소근 덤불과 오리나무 샘을 가르는, 술렁이는 강이 보인다.

옴팔로스에서 열린 회의에 소집되기 직전, 데릭은 여행자로서 숲언덕 공방에 머물고 있었다. 변두리의 작은 마을이어도 모험가들이 자주 찾는 모양인지, 불쑥 찾아온 그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어 느긋하게 며칠을 보냈다.

덕분에 주위 경비를 맡고 있던 귀곡부대 대원과도 정이 들어, 다리를 건널 때마다 경비병은 가면 아래로 미소를 지으며 배웅해줬다.

 

기울기 시작한 햇빛 아래서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숲의 오솔길을 걸으며, 데릭은 앞으로의 여정을 검토해봤다. 이대로 검은장막 숲 북쪽으로 가다 보면 커르다스를 경유해 모르도나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 근거지를 두고 있는 성 코이나크 재단의 연구자를 찾아내고, 탐험가를 자칭하며 접근한 뒤…… 환상영역의 입구를 발견했다고 이야기를 꺼낸다.

 

「……생각했던 것보다 짧은 여행이 되겠는데.

 

무심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데릭은 자신이 마지막 여행을 아쉬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사람에게 경계당하지 않으면서 의뢰를 부탁하기 위해선 자연스러운 만남을 꾸며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한낱 여행자인 데릭이 해산했다고 알려진 새벽의 혈맹에 기댔다간 의심을 사고 말 테고, 본인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능숙한 모험가답게 뛰어난 감을 가진 그 사람이니까, 함께 행동하다 보면 언젠가 정체를 들킬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처음부터 의심을 사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러면 어떡할까. 새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발데시온 위원회로 의뢰가 접수될 것 같은 안건을, 샬레이안 측의 연구기관으로 보내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자연스럽다. 이는 지식신 살리아크와 상업신 날달이 끌어낸 답이었다. 데릭은 그 계책을 따라 모르도나로 향하면서도 내심, 목적지가 조금 더 먼 곳이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유감스럽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걷고 있는 길 하나조차 수많은 이들의 왕래에 의해 흙이 다져진 곳이다. 이 별에는 그렇게 사람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 있다. 별바다로 돌아가 다른 영혼들과 함께 녹아들다 언젠가 또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 열두 신으로서는 그 흐름에 합류하기를 바라지만, 타고난 여행자이기도 했던 그는 데릭으로서 조금만 더 여행을 계속하며 사람이 살아가는 궤적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움직이는 사이, 물 위에 떠 있는 지역 가을박 마을에 도착했다.

숲의 나무를 베지 않으려고 가을박 호수 위에 지어진 이 마을은, 여관이 좋기로 유명하고 주민들도 방문자들에게 친절하다. 커르다스로 향하는 여행자나 행상인이 기력을 채우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인 데다가 광장에서는 모험가 같은 이들도 볼 수 있다. 느긋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마을의 모습을 본 데릭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게끔 에테라이트 옆을 지나가려는데,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여행자 양반, 혹시 이런 시간에 떠나려는 건가?

이젠 해도 져서 위험한데, ‘둥둥 뜬 코르크 여관에 머무르는 게 어때?

 

아무래도 이 마을에 사는 현지인 같았다. 확실히 주위를 둘러보니 가로등에 불이 들어와 있고, 하늘은 밤의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데릭은 친절한 마음으로 건네준 말에 인사했다.

 

……. 신경 써 줘서 고마워.

하지만 바빠서.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가 야영할 생각이야.

 

실제로 데릭은 최대한 빨리 그 사람과 접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방을 빌리는 바람에 여관에 묵을 수 없게 되는 사람이 나와서는 안 됐다. 사람의 신앙을 받는 에오르제아 열두 신의 이름을 받은 자로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친절한 주민이 데릭의 발밑을 흘끗 보더니 아직 뭔가 말하고 싶은 게 남아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데릭은 재차 감사의 말을 하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가을박 마을에서 벗어나면 풍경이 휙 변한다.

예전에는 거목이 무성하던 울창한 숲이었지만 제7재해 때 쏟아진 위성 달라가브의 파편들로 인해 초토화되다시피 해서, 남은 것이라곤 움푹 패인 지층과 거기서 뻗어 나온 뿌리들뿐이다.

그래도 행인들의 안전을 위해 도로 정비를 계속하고 보초까지 세워 놓았다. 거기다 갈라진 대지의 틈에서 광맥을 찾아 일확천금을 노린 이들도 몰려들고 있다. 정말로, 이 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씩씩하다.

그렇게 아직 어슴푸레한 초저녁에 커르다스로 들어가기 위해 데릭이 걸음을 재촉하려는데,

 

, 데릭.

당신이 검은장막 숲을 떠나기 전에 전해둘 말이 있어요.

 

갑작스런 부름을 듣고 돌아봤더니, 거기에는 이동성 식물의 어린 몸, 다시 말해 모습을 바꾼 대지신 노피카가 있었다. 둥실둥실 떠오르며 손과 비슷한 덩굴을 요령 좋게 턱에 괸 채였다.

 

네가 일부러 말을 건네다니 드문 일이네……. 무슨 일이야?

그 사태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군요. 발밑을 보세요.

 

재촉을 받아 발밑으로 시선을 돌린 데릭의 눈에 어린 오포오포가 들어왔다.

오포오포는 자그맣게 떨면서도,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애원하듯 작은 목소리로 우끼……하고 울었다.

 

……. , 언제부터……?

당신이 가을박 마을에 들어섰을 때 이미 발밑에 있었어요.

마물에게 공격받아 상처를 입고 혼자가 돼 버렸으니까…….

숲을 걷는 당신을 따라온 거예요.

 

숲의 주민들로부터 깊은 신앙을 받고 있는 노피카의 말이다. 계획대로 움직이기 전까지는 검은장막 숲에서 지내려고 찾아왔다가 자초지종을 보게 됐을 터였다. 말없는 오포오포를 대신해 노피카는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한다.

 

당신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해서……

그대로 커르다스에 들어가버리면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말을 걸었어요.

그럼, 제 용건은 이것뿐이니 이만 가볼게요.

 

그렇게 말하고서 노피카는 빛나는 구슬이 되어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데릭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오포오포를 쳐다보자, 저쪽에서도 마찬가지로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 커다란 눈망울은 이 사람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고 간파한 것 같았다. 부모를 잃고 무리에서도 떨어졌다면 숲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다. 무엇보다 억지로 떼어내는 건 이 신뢰를 저버리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사람으로서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나마 함께 지내며 해야 할 일쯤은 해주자.

그렇게 결론지은 데릭은 근처의 불빛에 의지해 걷기 시작했다. 이 길 끄트머리에 국경을 지키는 귀곡부대의 감시초소가 있다. 오포오포도 필사적으로 그를 따라왔다.

그렇게 해서 데릭은 감시초소에 있던 귀곡부대 대원에게 말을 건넸다.

 

지나가던 여행자인데, 미안하지만 잠시 불빛을 빌려도 될까?

이 녀석이 다친 것 같은데 잘 보이질 않아서.

 

그런 일이라면, 하고 대원은 흔쾌히 승낙했다. 감사를 표하고 모닥불 곁에 앉은 데릭은, 오포오포를 들어 올려 부상을 입은 듯싶은 다리를 꼼꼼히 살펴봤다. 확실히 발밑에 상처가 나 있었다. 야생동물은 포식자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 부상을 당했을 때조차 태연한 듯 움직이곤 하지만, 걸을 때마다 몹시 아팠을 게 분명했다.

데릭은 배낭에서 연고를 꺼냈다. 이건 오래 전 마주친 상인이,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가벼운 차림인 데릭을 걱정하며 준 물건이었다. 마지막으로 사용할 기회가 생겨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약을 발라주자, 오포오포는 안심한 것처럼 데릭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았다.

 

꽤 잘 따르네. 동행이 다쳤을 땐 고개를 넘는 일도 신중하게 생각하는 편이 좋아.

밤새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도 괜찮고,

가을박 마을로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겠지.

 

상황을 지켜보던 대원이 그렇게 제안했다.

그 말을 들은 데릭은 생각에 잠겨 하늘을 올려다봤다. 벌써 해가 완전히 저문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대로 커르다스행을 강행한다면 자신은 몰라도, 상처 입은 오포오포가 지칠 듯싶었다. 이 제안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불침번인 병사들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사막의 도시에서 주워들은 사건해결사라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해볼까. 아니면 해방된 알라미고에서 겪었던 이야기가 좋을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있으려니, 멀고 먼 옛날 여행지에서 만난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파편처럼 되살아났다. 그 사람은 각지에서 해결해야 할 문젯거리들을 찾아내면서도, 아직 보지 못한 대지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기쁨에 대해,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데릭은 과거, 지금,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미래를 생각했다. 별과 사람을 사랑했던 그 사람은, 뜻을 함께한 동지들은, 그녀가 뜻을 맡긴 그 사람…….

내 여행이 조금 더 길어지는 걸 웃으며 받아들여줄 수 있을까.

 

「여행자의 발자국」 *영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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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테리스에 거대한 파멸을 안겨다주던 종언의 노래는 단번에 그쳤다.

이 기쁜 소식을 계기로 여행신과 그의 동지들은 마침내 별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고자 신역 한복판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다 회의를 주관한, 떼려야 뗄 수 없는 남매가 오쉬온에게 건넨 말이 이야기를 끝맺었다.

당신의 마지막 여정이 충만하길.” 니메이아가 별빛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니메이아의 오빠 알디크는 희망 어린 목소리로 뒤를 이었다. “이 옴팔로스에서 그 모험가를 맞이할 수 있길 고대하겠다.”

오쉬온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오쉬온은 이때 감정이 벅차오르고 있었고, 다른 이들도 자신과 마찬가지임을 알았다. 살리아크는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리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싸운 사람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아제마의 가슴은 마침내 베네스의 계획이 성공했다는 기쁨으로 부풀어 올랐다. 한편 할로네와 메느피나는 인간 아이들의 용기에 열렬한 찬사를 보내면서, 라그나로크가 세계의 끝을 향해 항해하던 그날에 대해 애틋하게 이야기했다.

인간이 승리를 거두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리고 이제는 오래도록 간직해 온 소망이 이뤄지길 얼마나 바라는가. 수천 년에 걸친 기도로 축적된 에테르가 살아있는 사람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 모두를 위한 축복으로써 별에 환원되기를 소망하며, 베네스의 굳건한 지지자들의 영혼에서 비롯된 이 핵이 별바다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으로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들은 종언의 날을 피한 지금이사랑하는 아이들을 마주하고 쓰러짐으로써필요한 조치를 취하기에 적절한 때라고 결론지었다.

비레고와 랄거는 곧장 처음이자 단 한 번뿐인 전투가 벌어질 무대를 꾸미기 시작했다. 바닷새로 변한 리믈렌은 림사 로민사의 신실한 이들을 다시 바라보기 위해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오쉬온은 데릭이라는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계획의 핵심인 영웅을 끌어들이기 위해 옴팔로스에서 벗어났다.

 

오쉬온은 산악을 관장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별을 돌아다니며 인간의 고독에 함께한 여행신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여행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신들의 영역 바깥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낸 그는, 자신이 떠난 인간 세계로 돌아갈 때마다 주의를 기울였다. 에테라이트를 타고 이동하는 이 세계의 모험가들과 달리 갑자기 사라지거나 나타나는 기묘한 여행자에 대한 소문이 퍼지지 않게끔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엔 검은장막 숲의 소곤소곤 덤불 구석으로 전이했다. 난데없는 등장에 주위 마물들이 놀라긴 했지만, 다른 목격자는 보이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그는, 휴식을 마친 여행자처럼 태연하게 서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오리나무 샘으로 이어지는 장소인, 술렁이는 강의 졸졸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옴팔로스로 소집되기 직전에 데릭은 숲언덕 공방에 머물렀는데, 비교적 외딴 마을인데도 다행히 이곳을 수시로 드나드는 모험가들 덕분에 별다른 이목을 끌지 않고 여유롭게 며칠을 보낼 수 있었다. 또 지내는 동안 현지의 귀곡부대 대원들과 안면을 트게 돼, 다리를 건널 때마다 경비병들에게 따스한 미소를 받았다.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뜬 데릭은 숲길을 따라 나아가면서, 앞으로의 여로를 곱씹었다. 커르다스까지는 금방 도착할 테고, 그 다음 모르도나에 도착하면 탐험가 행세를 하며 신화 속의 환상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했다고 주장해 성 코이나크 재단에 접근할 예정이었다.

너무 짧은 여정인데…….”

그런 말을 입술 밖으로 흘린 데릭은 상심했다. 그의 목표 대상이 요구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선 만남이 자연스러울 필요가 있었다. 지금 시점에선 해체된 새벽의 혈맹은 물론이거니와 그 영웅을 대놓고 찾을 순 없었다. 그 사람의 예리한 직감을 고려해보면 비록 자신의 정체를 오랫동안 숨길 수도 없겠지만, 데릭은 처음부터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데릭은 관계된 조직을 통해 발데시온 위원회에 의뢰가 전달되도록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이는 살리아크와 날달이 구상한 계획이자 데릭이 지금 모르도나로 나아가고 있는 이유였다. 그래도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데릭은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을 내려다봤다. 무수한 발들이 지나가며 단단히 다져진 길은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겹겹이 쌓여 흐름을 간직하게 된 인류의 역사와 닮아 있었다. 데릭은 신으로선 별바다에 합류하는 영혼들 중 하나가 되기를 바랐지만, 한편 여행자로서 여전히 별을 계속 탐험하며 사람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데릭은 가을박 마을의 입구를 지나쳤다. 나무를 베지 않기 위해 호수 위에 지어진 이 마을은 여관의 환대로 유명했다. 위치 덕분에 커르다스로 가는 여행자와 상인들에게 인기 있는 경유지이기도 한 이곳은 지금도 마을 중앙에 있는 에테라이트 근처에서 모험가 한 무리를 볼 수 있었다. 데릭은 사람들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지만 그들의 시선을 피할 수는 있는 거리에서 미소 지었다. 그때, 누군가 그를 불러 세웠다.

이봐, 혹시 지금 떠나려는 건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선 데릭은, 아마도 마을 주민인 듯한 남자가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어두워지고 나면 위험할 텐데. 내 생각엔 코르크 여관에서 묵고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데릭은 다소 당혹해하며 고개를 들었다가, 정말로 날이 저물기 시작해 마을 곳곳에 벌써 가로등이 켜진 것을 봤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데릭은 간신히 대답했다. “하지만 가야 해. 바쁘거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데릭의 동지들은 최대한 빨리 그 모험가를 찾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의 침실을 빼앗을 수도 없었다. 열두 신 중 한 명으로서 자신보다 인간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친절한 주민은 데릭의 발치로 시선을 내리며 다른 할 말이 남아 있는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생각을 바꾼 듯 무사히 여행하길 빌어줬다. 그 친절한 주민에게, 데릭은 떠나기 전에 재차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가을박 마을을 떠난 순간 풍경이 극적으로 달라졌다. 이곳은 한때 검은장막 숲의 다른 장소들과 마찬가지로 울창한 숲이었지만, 언젠가 제7재해로 인해 쏟아진 달라가브의 파편들 때문에 많은 부분이 무너지고 말았다. 움푹 패여 지층을 드러낸 땅이 시선을 잡아끌었고, 너덜너덜한 그루터기와 뒤틀린 뿌리들 말고는 옛 흔적을 간직한 데가 없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검은장막 숲의 주민들을 위해 도로는 여전히 유지되고 순찰되었으며고, 부지런한 영혼들은 이제 갈라진 땅에서 광맥을 찾아내고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정말이지, 인간 아이들의 회복력은 굉장했다.

빛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커르다스에 도착하기로 마음 먹은 데릭은 걸음을 재촉하려고 했지만, 익숙한 목소리에 발목을 잡혔다.

당신이 더 멀리 가기 전에, 알려줄 사실이 있어요.”

뒤를 돌았다가 손처럼 생긴 덩굴을 턱에 괸 채 공중에 붕 떠 있는 묘목을 마주하게 된 데릭은 그게 노피카의 분신임을 곧바로 알아챘다.

네가 여기서 부를 줄은 몰랐는데.” 데릭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무슨 일인데?”

밑을 보세요.” 노피카가 즐거워하는 어조로 지시했다.

데릭은 시키는대로 했다가……발치에서 아기 오포오포를 발견했다. 오포오포가 잘게 떨면서 조그마한 손으로 망토 자락을 붙잡은 채, 데릭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애원하듯 낑낑댔다.

데릭의 눈이 놀람으로 크게 떠졌다. “날 따라오고 있었던 거야? 언제부터?”

가을박 마을에 도착하기 전부터.” 노피카가 오포오포를 대신해 대답했다. “그 아이가 있었던 무리는 숲의 짐승에게 먹혔고, 혼자 남은 그 아이도 다치고 말았어요. 그러다 당신이 지나가는 걸 보고 따라가기로 결심했답니다.”

그리다니아의 수호신이기도 한 노피카는 동지들이 계획을 준비하는 동안 신자들을 지켜보기 위해 이쪽으로 왔을 터였다. 그러던 와중에 데릭을, 그리고 데릭이 예상치 못한 동반자를 목격했을 게 분명했다.

당신이 그 아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아서. 너무 멀어지기 전에 그 아이에 대해 알려주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그게 다예요. 난 이만 가보죠.”

노피카는 더 말하지 않고 빛나는 구슬로 변해 어두운 숲속으로 사라졌다.

 

데릭은 아연실색하며 오포오포를 쳐다봤다. 그러자 오포오포는 물러서지 않고 순진무구한 커다란 눈에 신뢰와 기대를 가득 담아 그 시선을 마주 봤다. 혼자인 데다 상처를 입었다면 숲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할뿐더러, 이 시선을 외면하는 건 자신을 향한 믿음을 배신하는 것과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인간으로서 움직일 시간이 있으니까, 그 동안은 함께 할 수밖.

그렇게 결정한 데릭은 근처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곧 국경을 경비하는 탑이 시야에 들어왔다. 데릭은 저를 필사적으로 쫓아오는 오포오포를 데리고 그리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라, 모닥불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는 귀곡부대 대원에게 말을 걸었다.

지나가던 여행자인데 잠시 불을 빌릴 수 있을까? 이 녀석이 좀 다친 것 같아서.” 데릭이 손짓하며 사정을 설명했다.

웃으며 승낙한 경비병이 데릭에게 의자로 사용되는 나무 그루터기 위에 앉으라고 손을 흔들었다. 기꺼이 자리에 앉은 데릭은 오포오포를 품에 안고서 금세 엉덩이에 나 있는 깊은 상처를 찾아냈다. 야생동물들은 부상을 당해도 포식자들에게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멀쩡하게 움직인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이만한 상처라면 숨기는 것도 힘겨웠을 터였다.

데릭은 배낭을 뒤져서, 자신이 너무 가벼운 차림으로 여행하는 것을 걱정하던 상인한테 받은 선물인 연고 단지를 꺼냈다. 오포오포의 상처 위에 넉넉히 약을 발라준 데릭은 이것을 사용할 기회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오포오포가 더 이상 떨지 않고 무릎 위에 얌전히 앉은 것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신뢰받고 있구나.” 상황을 지켜보던 경비병이 싱긋 웃었다. “고개를 넘어갈 계획이라면 조금 더 쉬게 해주는 게 좋겠어. 가을박 마을로 돌아가도 될 테고,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다면 여기 머물러도 괜찮아. 우린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거든.”

데릭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이 깊어지며 드리운 검은 베일 위로 별들이 보석처럼 흩어져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 커르다스로 나아가는 건 새끼 오포오포에게 부담이 될 듯했다. 데릭은, 이번에는 제안을 따르는 게 현명한 선택일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럼,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들려줄 이야기는 뭐가 좋을까. 울다하의 선술집에서 우연히 들었던, 온갖 수수께끼를 다루는 사건해결사라고 알려진 사람들에 대해? 아니면 알라미고가 해방된 뒤로 며칠 들렀던 것에 대해? 아니면…….

일렁이는 불길을 바라보며 기억의 샘을 뒤지던 데릭은 문득, 야영지에서 함께 모닥불을 바라봤던 어떤 여성에 대한 아주 오래된 기억의 파편을 건져냈다. 마찬가지로 불꽃을 바라보던 그녀는, 해결해야 할 문제를 찾아 새로운 땅에 들어서 새로운 이들을 만나면서 별을 여행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데릭은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던 그녀, 그녀와 함께 꿈을 꾼 고결한 동지들, 그리고 그녀가 희망을 건 바로 그 모험가에 대해서. 그들은 마지막으로 여행을 조금 더 하고 싶다는 이 응석을 받아줄까?

오포오포가 데릭의 무릎 위에서 웅크리고 새근대기 시작했다. , 지금은 됐어.

데릭은 반짝이는 눈으로 주위에 모여든 대원들을 둘러보고, 목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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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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