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1998년 작품……?
"술사 파레트와 그의 호위 루린. 두 사람은 여행 중 들른 마을에서, 예언자를 구해달라는 말을 듣는다.
「운 좋은 자의 마을」「거룩한 어명(御名)」「신의 능력」총 3화."
*지금의 그라드네라 설정과는 꽤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만, 호기심에 번역해보았습니다. 문제시 삭제합니다.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1. 운 좋은 자의 마을
……무언가 커다란 것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멀리서 나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술렁임은 파도 소리 같다.
아, 그래도 겁먹을 건 없다.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이제,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파레트와 루린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저희가 호기심 어린 시선에 둘러싸였음을 깨달았다. 시선의 주인들은 곳곳의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언가 수군수군 속삭이며 두 사람을 흘끔댔지만, 결코 말을 걸거나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저기, 파레, 우리 있지, 그렇게 이상한 모습이었나?”
루린은 아무래도 불안해진 듯 자신의 모습을 돌아봤다.
두 사람 다 나이는 20세 가량, 파레트는 엷은 쪽빛蒼 머리에 갈색 눈동자, 루린은 갈색 머리에 금빛을 띈 갈색金茶 눈동자, 어느 쪽이든 이 그라드네라에선 그다지 눈에 띄는 색이 아니다. 생김새도, 파레트는 눈동자가 온화한 빛을 띄워 자못 건실해 보이는 청년이고, 루린은 눈썹이 굵어 다부지게 보이지만, 험상궂은 얼굴은 아니다.
복장에 대해서는, 파레트는 한색 바탕의 긴 옷 위로 어깨에는 하얀 천을 두르고 있다. 이건 술사라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의 차림새는 개중에서도 그다지 요란하지 않고, 어지간한 거리에서는 드물지 않게 찾을 수 있는 복장이다.
루린 쪽은 움직이기 편한 가죽옷 한 벌로, 그 밑으로도 기능성이 뛰어난 흰 셔츠와 바지를 갖춰 입었다. 장검을 차고 있는 게 조금 특이할지 모르지만, 호신용이라면 그렇게 호들갑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즉 두 사람 모두, 확실히 마을에서는 눈에 띌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경계를 받을 정도는 아닌 외양이다. 사실, 지금까지도 기껏해야 「조금 특이한 손님」정도로 끝나곤 했다.
그런데 이런 광경이다.
“싫은 분위기.”
루린이 콧등에 주름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파레트도 난처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좀 폐쇄적인 곳이라고 듣긴 했는데.”
“묵어갈 곳, 있을 것 같아?”
“글쎄, 나는 예언자가 아니니까 미래의 일에 대해선 모르지.”
“아, 진짜!”
담담한 파레트의 말에 루린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항의했다. 느슨히 땋아 하나로 묶은 머리칼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
“똑바로 해. 안 그래도 영 미덥잖게 보이니까.”
루린은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으려다가, 순간 파레트의 어깨 너머로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파레트도 눈치를 채 뒤돌아봤다.
다가온 것은 열 살쯤 된 소년이었다. 억센 아마亞麻색 고수머리 위에 튀어나온 고양이 귀가 생이족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소년은 두 사람 앞에 멈춰 서더니,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슨 용무?”
그 시선이 어쩐지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듯해, 루린은 약간 경계한 채로 소년에게 물었다.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먼발치에서 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여러분은 술사인가요?”
소년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정중한 어조로 질문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했다가, 이내 파레트가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는 술사입니다.”
“그럼 아마 문제없습니다.”
소년이 그렇게 단정 짓자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당신이 예언자님을 구해주실 분이에요.”
“자, 잠깐 기다려 봐. 예언자님이라니?”
난데없이 달아오른 주변의 모습에 당황한 루린이 허둥지둥 외쳤다. 그러나 소년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툭 대꾸했다.
“예언자님입니다.”
“하아…….”
두 사람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다시 얼굴을 마주보았다.
대삼림은 그라드네라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광활한 삼림지대의 명칭이다. 그 북쪽, 니디아 산맥과 맞닿은 곳에 제라·니드 마을이 있다. 대삼림 내의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숲을 개간한 농업으로 근근히 먹고 사는 곳이었다. 당연히 마을의 분위기는 검소했지만, 다른 마을들에 비해 여유롭게 느껴졌다.
파레트와 루린이 안내를 받은 촌장의 집 역시 그런 분위기였다. 루린은,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꼼꼼히 정돈된 침대에 걸터앉아, 혼잣말을 했다.
“수상하잖아!”
강한 어조에 파레트가 다시금 곤란하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당사자를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냐.”
“그치만 예언자래, 예언자!”
루린은 끝내 침대에 드러누워, 손발을 퍼덕이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파레트도 옆에 앉아,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
“뭐, 그렇지.”
“파레는 술사지만, 치료 전문은 아니잖아. 낫게 할 수 있어?”
“그러게.”
파레트는 루린의 말에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 촌장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두 사람에게 말을 건 소년은 촌장의 아들로, 이름은 ‘라테스’라고 했다. 소년을 따라 여기, 촌장의 집에 온 두 사람은, 환대를 받으며,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얘기인 즉, 이 마을에는 예언자님이라고 불리는 예언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예언자가 자신을 구해낼 사람이 곧 오리라고 예언했다는 것.
듣기로는 예언자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듯한데…….
“예언자.”
루린의 투덜거림은 진작 들리지 않게 되었고, 파레트는 혼자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예언자를 자처하는 이들 중, 진짜가 있었던 경우는 없었다. 그런 건 전설 속에서나 존재한다. 신이 아니고서야 미래를 알 턱이 없다.
분명 이 마을의 예언자라는 것도, 점쟁이의 일종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
다만, 파레트에게는 궁금한 것이 있었다.
“여기 봐, 파레!”
느닷없이 뺨을 얻어맞은 파레트는 루린이 얼굴을 들이밀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겨우 깨달았다. 그녀는 파레트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으며 눈동자를 마주했다.
“또 빠져 있었어, 정말.”
“아니, 생각을 하던 것뿐이야.”
“정말? 이러니까 술사란 놈은 성가신 거야.”
눈살을 찌푸리자 루린이 그제야 파레트에게서 손을 뗐다.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는 거지?”
“……이 마을에 대한 소문인데.”
파레트가 한 차례 숨을 내쉬었다.
“여기 온 건 그 소문을 들어서야.”
“설마, 예언자?”
“아냐. 그런 소문은 전혀 못 들었어. 난 그래서 의심하고 있지만.”
마을에서 이렇게나 중요하게 여겨지는 듯싶은 사람의 일이, 이웃마을 등에 새어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얘기다. 사람들은 대개 추잡한 이야기들을 퍼트리고 싶어 한다. 예언자 등은 구설수 삼기에 더없이 좋은 재료다.
이 경우, 생각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요컨대, 두 말하면 우스운 허풍이거나, 마을 사람들이 일부러 숨기고 있거나.
“마을 사람들은 진심으로 믿고 있을지도.”
자연스럽게 파레트 곁에 다가온 루린이 반박했다.
“나도 그건 생각해봤어. 궁금한 건 소문이야.”
“예언자가 아니라면 뭐야?”
“이 마을이 이웃 마을들에선 어떻게 불리는지 알아?”
파레트가 노래하듯 말했다.
“운 좋은 자의 마을.”
“그건…….”
“이 마을, 최근 몇 년간은 자연재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대.”
태풍으로 근방의 농사가 망했을 때도 일찍 수확해서 재해를 피했고, 기근이 들 때도 그 전해부터 허리띠를 졸라맨 덕분에 큰일은 되지 않았다고. 이전의 호우 역시 잽싸게 고지대로 피난했다고 한다.
마치 미리 알고 있는 것 같았다고, 파레트에게 얘기해준 남자는 말했다.
“예언자, 네…….”
루린이 기가 막히다는 듯 대답했다. 파레트 역시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어쨌거나 내일이야. 본인을 만나볼 때까진 판단을 미뤄두자.”
“네에네에, 어울려줄게요.”
루린이 익살스런 말투로 말하며 파레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더니 불쑥 중얼거렸다.
“그치만, 나였다면, 미래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아…….”
파레트는 거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예언자님이라는 자의 오두막은 마을에서 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저기, 라테스. 그 예언자님은 왜 마을에서 함께 지내지 않는 거야?”
길을 지나던 루린이 안내를 맡은 라테스에게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그야 속세에 더럽혀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하아…….”
라테스의 눈동자에 뒤섞인 존경과 동경을 본 루린은 거기서 추궁을 그쳤다. 라테스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아이라고 해도, 예언자 얘기에선 나이에 걸맞은 어린 티가 난다.
그런 고로 라테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는 없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마을을 떠나 있다고 볼 수도 있는 탓이다. 루린이 파레트를 쳐다보자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을에서 20분 정도 걸어 오두막에 닿았다.
마을과 마찬가지로, 검소해 보여도 세세한 데까지 손길이 미쳐 있다. 주변의 숲에 자연스레 녹아들게끔 덤불과 나무로 만들어졌다.
라테스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중년의 부인 한 사람이 나와 얼른 들여보내줬다. 그 모습을 본 파레트와 루린은 확신했다. 적어도 마을 사람들은 믿고 있다고 보는 게 좋겠다.
“예언자님은?”
“변함없으십니다.”
오두막 안은 방 두 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앞쪽의 방에서 집안일 따위가 꾸려지는 것 같았다. 시중 들어줄 사람의 침대나 응접용 의자와 테이블 따위를 볼 수 있었다.
“마을의 부인들이 교대로 대기하고 있어요.”
라테스가 두 사람에게 간단히 부인을 소개하고, 다음 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가냘픈 소리가 대답해왔다. 그 소리를 들은 라테스가 문을 밀어서 열었다.
“예언자님입니다.”
방 안에 마련된 침대 위, 청년이 누워 있었다.
나이는 두 사람과 비슷한 정도인가. 수척하고 창백한 얼굴에선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엷은 물빛 눈동자는 초점이 맺히지 않고, 손발도 힘없이 늘어진 채였다.
도저히 ‘예언자님’이라 불린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빈약한 청년이었다.
“그가……?”
믿을 수 없었던 루린이 라테스에게 묻자, 레테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다더니, 설마 쭉 이 상태였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대답은 뜻밖의 방향에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있던 청년이, 쉰 목소리기는 해도, 또렷한 어조로 말을 건넨 것이었다. 라테스가 허겁지겁 머리맡으로 달려들었다.
“저는 날 때부터 손발을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시력도, 청력도……약하고요.”
청년이 띄엄띄엄 말했다.
“그렇지만, 볼 수 있습니다.”
루린은 황망히 파레트를 돌아봤다. 파레트는 진지한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더니, 이내 침대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청년의 눈동자가 파레트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는 환하게 웃었다.
“아아……, 당신입니다.”
청년의 손은 야위어서, 자칫 실수를 했다간 부러질 것 같았다. 파레트가 그 손을 양손으로 쥐었다. 피가 흐르는 것 같지 않을 정도로 차가웠다.
루린은 그런 파레트의 모습을 한 걸음 뒤에서 바라봤다.
청년은 열에 들뜬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당신을 봤습니다. 제 눈은 당신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없지만, 알 수 있습니다. 당신입니다. ……부디, 저를 구해주세요.”
파레트의 얼굴에 서린 수심이 깊어지는 것을, 루린은 보았다. 그리고, 파레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무엇을, 봤습니까?”
“당신을 봤고, 들었습니다.”
라테스는 두 사람의 대화를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좀 전부터 끼어들려고 하지만, 긴장된 분위기 탓에 틈을 잡지 못하는 듯했다. 침착하지 못하게 귀를 만지작댄다. 그렇지만 그 얼굴에는 왠지 자랑스러운 듯한 기색도 엿보였다. 어쨌거나 파레트가 구원자라고 판정한 것이 라테스였으니까.
“무엇을?”
“……그 자가 너를 구한다, 라고.”
파레트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당신은.”
그리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결국, 파레트는 마을로 돌아와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호기심에 찬 마을 사람들을 대하는 일은 모두 루린이 도맡아야 했다. 뭐, 흥분한 라테스도 있었기에 루린의 부담은 꽤나 가벼워졌지만.
그렇게 밤이 오고 겨우 두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 루린이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자세를 잡자, 파레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에게 갈 생각이야.”
기선제압을 당한 루린은 우선 눈을 끔뻑였다가, 한숨을 내쉰다.
“알겠어요. 당신의 터무니없는 행동에는 익숙하니까.”
말끝을 늘이며 말한 루린이 침대 옆에 세워져 있던 검을 집었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간다니까.”
“아니, 루린은 여기서…….”
“무슨 소리야! 짐승은 당신의 주문 따위, 기다려주지 않아요.”
제 주장을 단박에 일축당한 파레트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다툼에서 루린을 이겨본 적이 없다. 결국 루린에게 끌려가는 형태가 되어, 몰래 촌장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두 사람은 파레트가 만든 등불을 앞세워 밤의 숲을 걸어갔다. 숲속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시끌벅적한 기척들로 가득하다. 이미 인간의 세계가 아니었다.
“……진짜였구나?”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루린은 주변을 살피며 파레트에게 물었다.
“아.”
“구한다는 게 무슨 뜻?”
“루린은 어떻게 생각해?”
되물음을 받은 루린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띄엄띄엄 말을 고르며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부자연스러워. 어딘가 뒤틀려 있어. 그건 바람직하지 않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파레트가 루린의 말에 수긍했다.
“낫게 할 수 있어?”
“아마. 다만…….”
파레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다만, 그게 도움이 되는 일일지는 모르겠어.”
루린의 검이, 대형 날벌레를 내리쳤다.
마법의 불빛이 방안을 비출 때, 예언자 청년은 이미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의 청년은 마치 망자 같았다.
“돌봐주던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가벼운 최면을 걸어뒀어요. 아침까진 깨어나지 않을 거예요.”
파레트가 대답하며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얘기를 듣는 건 저희뿐이에요.”
“마을 사람들로부터의 해방, 입니까.”
청년은 빈정대기라도 하는 양 입을 씰룩거렸다. 그 모습에 루린은 청년이 성자도, 망자도 아님을 직감했다. 그녀는 말없이 파레트의 곁으로 다가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당신에게 한 가지 묻고 싶어 왔어요.”
파레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중하게 얘기를 계속했다.
“무엇을 봤습니까?”
그건 낮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그 자가 너를 구한다. ……그것뿐만이 아니죠?”
청년은 파레트의 말에 동요하지 않았다. 표정은 한결같이 온화했다. 그리고 그가 덧붙였다.
“그 자가 너를 구하지만,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당신은 알고 있었군요.”
루린은 파레트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것을 봤다.
“예언의 힘이 당신을 그 상태로 약화시킨다는 걸.”
자리에는 무거운 침묵이 떨어졌다.
청년은 생각에 잠겨 천장으로 눈을 돌렸고, 파레트는 잠자코 그를 바라봤다.
마침내 침묵을 깬 것은, 참견해야겠다고 생각한 루린이었다.
“무슨 뜻이야?”
“……예언의 힘은 인간에겐 너무 거대해…….”
파레트가 대답했다.
“예언의 힘이 그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있어. 균형은 전부 깨졌어.”
청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당신은 무엇을 바라나요?”
파레트의 물음에 대답하는 청년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당차고, 또렷했다.
“낫게 해주십시오, 이 몸을.”
그게 무슨 뜻인지는, 루린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이 낫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예언의 힘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바로 파레트가 고뇌하는 연유라는 것도.
“……당신은, 그래도 괜찮은가요?”
“저는 그저, 푸른 하늘을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한 청년이, 처음으로 웃었다.
그 웃음은 수줍음과도 비슷한, 순수한 동경을 비추고 있었다.
“저는 분명 어릴 적에, 나무들 틈으로 새어나오는 푸른 하늘을 보았습니다. 아름답고,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그것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알겠습니다.”
파레트가 일어났다.
청년의 의지는 도무지 꺾일 것 같지 않았다.
“내일, 모두의 앞에서 그 힘을 봉인하죠. 제가 당신을 낫게 해줄 수는 없지만, 그 정도 도움은 드릴 수 있어요.”
“당신이 책임질 일은 없습니다.”
청년의 말에 파레트는 고개를 저으며, 루린을 불러 방에서 빠져나갔다. 청년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숲은 아직 어둡고, 밤공기는 차가웠다.
“망설이는구나.”
“아아.”
“그는 절대로 마음을 바꾸지 않을 거야.”
“알아.”
말없이 숲속의 오솔길을 걷던 파레트는, 서서히 멈춰서는 루린을 돌아봤다.
“아직 모르겠어. 낫게 해주는 게 그 사람을 구하는 일이 될까? 물론 그는 그렇게 바라지. 더군다나 이미 충분할 정도로 예언의 힘을 마을을 위해 써왔어. 하지만…….”
“거기까지야, 파레.”
루린이 팔짱을 낀 채 무서운 기세로 우뚝 섰다. 금갈빛 눈동자가 파레트를 노려본다.
“충분하다는 건 없어. 그건 핑계지. 그 사람이 푸른 하늘을 보고 싶어 해. 그거면 되잖아.”
“루린.”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할 권리가 있어.”
루린의 어조는 단호하다. 그런 목소리로 질타를 받은 파레트는 비로소 알아차렸다.
자신이 말하고 있던 건 예언자 청년에 대한 일이 아니라, 그것에 빗댄 자신의 사정이었다고. 또한, 루린도 마찬가지다.
“……미안.”
“알았으면 됐어.”
솔직하게 사과하는 파레트를 향해, 루린은 팔짱을 풀었다. 그 얼굴에는 문득 쓸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있지, 왠지 그 사람 마음을 알 것 같아. 마을 사람들을 싫어하는 건 아냐. 아무래도 좋다는 것도 아니고. 그치만 물러날 수 없는 게 있는 거야.”
루린의 눈동자는 약간 촉촉했지만, 거기에는 굳건한 빛이 있었다.
“나는……, 나는 세계의 모든 것을 희생하게 되더라도, 파레트를 잃고 싶지 않아.”
파레트는 대답하지 않는다. 루린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내가 물러날 수 없는 부분이야.”
무척이나 좋은 날씨였다.
울창한 대삼림의 숲속마저 환하고, 볕뉘는 지면에서 살랑살랑 춤을 춘다. 여느 때보다 강한 햇볕은, 사막도 우스울 정도의 눈부심으로 다가왔다.
파레트는 그런 숲속을, 홀로 거닐었다.
숲은 조용하다. 생물의 기척이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뜻밖에도, 파레트는 청년이 홀로 우두커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음을 알아챘다. 그에게 기척이 없는 것은, 그가 이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늘, 인가요.”
파레트가 그에게 다가가 가만히 물었다. 청년은 파레트를 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가, 뒤늦게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동조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파레트의 말에 청년은 웃는 듯, 우는 듯,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당신의 예언의 힘을 봉하겠습니다.”
‘네.’
“정말 괜찮은 거겠죠?”
청년은, 끄덕인다.
파레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저 손을 하늘로 뻗어, 한 마디 던졌다.
숲의 잎들이 떨어지고, 나뭇가지들이 부서진다.
박(箔)이 하나하나 벗겨지는 것처럼, 풍경이 무너지고, 흔들리며 쌓여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봉인이 아닙니다.”
“이건 해방입니다.”
“당신 스스로 두른 봉인으로부터의.”
“예언의 힘은 사람의 힘이 아니죠.”
“사람의 힘은 거기까지 닿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고서야.”
“그러므로 이것을 푸는 건,”
“실은 당신 스스로의 힘.”
“당신의 소원.”
“그것은 바깥에서 주어진 힘이 아니라…….”
“안에서 오는 힘.”
‘정말 어리석은 이유였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바깥의 광경 중에서 떠오른 것은 이것뿐입니다. 이렇게나 단순한 욕망이 저를 움직입니다. 이렇게나 단순한.’
세계는 와해되고, 오직 창천만이 남았다. 흰 구름이 바람에 나부낀다.
‘모든 것과 맞바꿔도 좋다고 생각해버립니다.’
그것은 바라던 해방.
예언자의 오두막 주위에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모두 숨죽인 채 기다렸다. 거기에 불안은 없었다. 예언자의 예언이 큰 오류를 범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촌장이 얼굴을 내보였다. 촌장은 일이 성공했음을 고하고, 2~3일 내에는 예언자가 보통 사람들처럼 행동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보증했다.
마을 사람들은 납득했다.
예언자의 예언에는 역시 틀린 곳이 없었다고.
일은 끝났다.
“이런 데 있었구나.”
루린이 누워있는 청년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그는 가늘게 눈을 떴다. 그리고 웃었다.
마을 변두리의 하늘이 탁 트인 언덕에서, 예언가 청년이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상태도 괜찮은 것 같네.”
“감사합니다.”
의식이 끝난지 나흘 만에, 청년은 부축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게 됐고, 눈과 귀도 잘 쓸 수 있게 됐다. 덕분에 혼자서도 여기까지 올 수 있다.
“마을에선 실종이라고 난리야.”
루린은 청년의 옆에 앉아 하늘을 쳐다봤다.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당신들은 어서 이 마을을 떠나야 합니다. 남은 건 제 책임이니까.”
청년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루린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내일이면 떠날 거야. 그전에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무엇입니까?”
“예언은 어떻게 찾아오는 거야?”
청년이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루린은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어째서 그런 걸?”
“알고 싶어서.”
루린의 눈은 진지했다. 청년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다가도, 꺼내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끝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제대로 설명할 순 없지만, 여럿이서 속삭이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 안에서 목소리를 꺼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알 수 있는 건, 제 주변의 일뿐입니다. 이 마을 밖의 일이라면 확실치 않습니다.”
“그 여럿은, 사람?”
“사람이 아닙니다.”
청년이 다시 하늘을 우러러본다.
“그게 신인지, 다른 무엇인지……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나쁜 느낌은 들지 않는군요.”
“나랑 파레트는 여행 중이야.”
불현듯 루레트는 그렇게 내뱉었다.
“왜냐면, 어떤 목소리를 들었거든. 그건, 목소리가 아닌 소리. 누군가 우는…울고 있는 듯한 목소리.”
“예언……?”
“그 정도로 확실한 건 아냐. 그치만 분명 같은 거야.”
고개를 흔드는 루린의 얼굴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리고, 나한텐 그거랑은 좀 다른 예감이 있거든.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냐. 분명 내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건데. 그게 예언일까 봐 불안했어.”
루린은 다소 안심한 듯 일어났다. 청년은 말없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루린은 바지에 묻은 풀들을 털어내며 청년을 향해 돌아섰다.
“그래서, 당신 말을 듣고, 그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고마워.”
루린이 진정 확인하고 싶었던 건, 그 부분이었을 것이다. 루린의 웃는 얼굴에는 아직 그늘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그 얼굴이 문득, 굳어진다.
“방금……누군가 울었어.”
“……제게는 더 이상 들리지 않습니다.”
예언자라 불리던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한 줄기 바람이 언덕 위를 지나쳐 갔다.
파레트와 루린이 제라·니드 마을을 떠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대삼림의 남쪽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었으므로, 숲속의 도로를 지나, 그 길에 있는 여인숙에서 머무르는 중이었다.
그 이야기는, 식사 도중에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왔다.
“전멸했대, 그 ‘운 좋은 자의 마을’ 말이야.”
“산사태랬지?”
“뭐, 그렇지. 행운도 끝났단 건가.”
루린은 파레트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는 것을 봤다. 그 뒤로 벌떡 일어난 파레트를 따라 방으로 돌아간다. 파레트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무너져 내렸다.
“……왠지 모르게 알고 있었어…….”
예언의 힘을 향한 의존.
그 힘이 없다면, 자연재해에 대항할 수 없다. 사람이란 그토록 작고 연약한 생물이다.
그렇다면, 그 힘을 빼앗을 권리가 자신에게 있었던 것일까?
“후회해, 그를 낫게 해준 것.”
“잘못된 소식일지도 몰라…….”
파레트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청년은 해방을 원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시에 예언의 힘을 빼앗는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산사태는 면했을지도 모른다.
루린은 그 모습을 늘 그랬듯 가만히 지켜보다가, 곧 파레트의 앞에 다가가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파레, 나는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해.”
루린이 의연하게 선언했다.
그녀는 질릴 만큼, 씩씩하고 강하다.
“푸른 하늘을 보고 싶다던 그 사람의 소원이랑 마을 사람들의 생명, 어느 쪽이 더 귀한지, 나는 모르니까. ……물러날 수 없는 게, 있는 거야.”
예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미래를 알 수 있다면, 미래는 정해진 것인가. 모두 누군가의 계획대로 이뤄지는 것인가. 모두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루린은 어두운 의구심이 웅성대며 가슴에서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건, 어떻게든 떨쳐버리려고 해도 소용없던 예감.
‘파레트는, 분명 나보다 먼저 죽는다. 그런 예감이 든다.’
루린은 그것이 예언이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자신을 위하는 것은 죄인가?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은 오만한가?
몇 번이고 자문하며, 푸른 하늘을 우러러본다.
이제, 예언은 들리지 않는다.
2. 거룩한 어명(御名)
우리의 주인, 아네키우스께서 주창한다.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을 지키리라. 내 힘이 땅에 닿아,
사악한 영혼은 그 땅 밑으로 가두리라.”
그리하여 봉인이 이루어지니, 땅 위로 평화가 도래한다.
칭송하라, 우리의 위대한 주.
그 어명을 널리 부르리라.
태어난 이래로, 그 소리는 결코 루린의 귀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도움을 청하는 듯한, 탄식하는 듯한 목소리.
그것은 결코 사람의 말이 되지 않는다. 마치 신음과 같이, 비명과 같이, 마음을 잡아 찢는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쓸쓸해질 뿐이다.
철이 든 무렵부터 루린은 그 소리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필사적으로 호소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인지, 다들 상대해 주질 않았다. 집요하게 말했더니 이상한 것이라도 보는 듯싶은 시선을 받았다.
지금까지, 그 목소리가 들린다고 말해준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모두의 말처럼 자신이 잘못 듣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을 만큼, 목소리는 무겁고 서글펐다.
루린은 부모가 없다. 그러니까, 이름을 루린·아네=사마니라고 한다. 아네는 주 아네키우스에게 바쳐진 아이라는 뜻. 보통 부성에는 배우자의 주성이 들어가지만, 신의 집에서 자란 사람에게는 그런 이름이 붙여진다. 주성 사마니는 마을의 이름이다.
신의 집은, 교회에 딸린 고아원이다. 재원(財源)은 마을 사람들의 기부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자라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마을 사람들에게 빚을 지게 돼 있었다. 어른이 되어 신의 집을 나올 때 성직자나 마을 방범대에 지원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이를 증명한다.
루린도 예외는 없어서, 재작년, 15살로 성인이 된 이후에는 교회의 경비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은의에 얽매인 게 아니었다. 하물며 이 마을에 애착이 있지도 않았다.
루린에게 있어, 이 사마니라는 마을은 오히려 지내기 힘든 곳이었다. 뭔가 거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건 이 마을의 지리적 조건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 마을 주변은 농지로는 부적합하다. 아무리 작물을 심어봤자 뿌리를 내리질 못해서, 황무지만이 드넓게 펼쳐진다. 그런 땅에 조그맣긴 해도 마을이 있는 건, 여기서밖에 자라나지 않는 귀중한 식물이 있어서였다.
게다가 그라드네라 북쪽 끝에 가까운 이곳은, 1년 내내 온난한 기후를 유지하는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 춥다. 강설 지대에는 들어가 본 적 없는 루린도, 몇 번인가 눈을 본 적이 있을 정도로.
그럼 루린은 왜 이 마을을 떠나지 않는가.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외부적인 것으로, 이 나라에선 소속된 마을을 허가 없이 떠나면 범죄자 취급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부적인 것으로, 그 목소리 때문이었다.
루린은 차마 목소리를 무시하고 이 마을에서 떠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범죄자 취급은 그다지 무섭지 않다. 이웃나라로라도 도망치면 해결될 테니까. 하지만 그 목소리는 예의 서글픈 울림으로, 루린의 마음을 붙들어 맸다.
그래서 루린은 여기에 있었다.
사마니 마을은, 며칠 전부터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매년 있는 일이지만, 루린에게는 우울한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풍요제.
이는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행사로, 이 행사 덕분에 이 마을이 존속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다시 괴로워 해.’
루린은 속으로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축 처진 얼굴을 하고, 무슨 일인데?”
갑자기 어깨에 손이 올라와, 루린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낯익은 얼굴이 히죽거리고 있었다. 신관, 테쿠루다.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쉽게 손대게 하지 않았을 텐데, 역시 주의가 산만해진 듯했다. 곧장 뿌리치기도 뭐해서, 루린은 테쿠루를 노려봄으로써 이 행동에 항의했다. 하지만, 그는 모른 체했다.
“축제도 가까운데.”
축제가 가까우니까, 하고 루린은 마음속으로 항의했다. 입밖으로 내밀면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잠자코 있었지만.
풍요제는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로 그치지 않고, 결혼할 상대를 정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루린 역시 적령기였지만, 도무지 결혼 같은 것을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타고난 남자다운 성격이나 가련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다부진 외모 탓에, 다행히 루린에게는 들어오는 얘기도 없었다. 신의 집에서 자라, 마을의 유력자와 맺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다만 루린의 이런 무관심한 태도를 곡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게 테쿠루였다. 이미 약혼자도 있는 그는, 장난삼아 루린에게 집적댔다.
“슬슬 가봐야.”
혐오감을 견디지 못한 루린은 어깨에 얹힌 손을 풀어내며 방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테쿠루가 루린의 손을 붙잡고 저지했다.
“어디 간다는 거야.”
“……묘지. 오늘밤 당번은 나라서.”
루린이 테쿠루의 손을 뿌리치며 교회에서 뛰쳐나왔다. 뒤에서 테쿠루가 말을 걸어와도 단단히 무시했다.
묘지는 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언덕이다. 원래는 고작 흙이 솟아오른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기도소와 방금 뛰쳐나온 초소의 존재가 이곳을 특별한 장소로 만들었다.
밤의 달빛 아래서 보는 묘지는 검게 솟아올라 숨막히는 위압감이 있었다. 아니, 명색이 교회의 경비라면 거룩하다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
여기는 신이 봉인한 곳이다.
전승에 의하면, 아네키우스에게 종속된 신이 사람에게 해로운 마물을 퇴치, 봉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묘지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 사마니 마을의 유래라고.
풍요제의 기원도 그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신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다.
“어라……?”
묘지를 멍하니 바라보며 그런 것을 돌이키고 있던 루린은, 갑작스레 묘한 위화감에 사로잡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신경에 걸려든 것은 시각이나 청각처럼 명확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감각적인 것이었다.
‘뭔가 평소와는 달라.’
심지어 그건, 나쁜 예감이 아니었다.
그렇게 느낀 순간, 루린의 눈동자는 분명한 차이점을 잡아냈다. 묘지에 창백한 빛이 떠올라 있다. 그리고 사람의 그림자.
“……누구?”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루린은 그 그림자에 말을 걸었다. 경계심이 생기지 않는 것이, 누군가 축제의 준비라도 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돌아본 얼굴은 아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갈색 눈동자의 빛이 유난히도 짙은 게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루린과 나이도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아마 잊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루린에게 그를 본 기억은 없었다. 결국, 신성한 묘지에 숨어든 수상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루린은 그 소년을 나무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전히 경계심이 들지 않아서였다. 소년은 여자인 루린보다도 선이 가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루린을 마주한 얼굴에는 어쩐지 슬픈 기색을 띠고 있었다.
“이 묘지는?”
그 소년은 루린의 누구냐는 물음에는 아무런 대답도 않은 채로 되물었다. 그렇지만 루린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고분고분 대답할 수 있었다.
“신의 묘지야.”
“봉인된 것은, 마물?”
“맞아.”
루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은 얼굴을 찌푸렸다.
“심한 목소리야…….”
목소리, 라는 단어에 루린은 움찔했다. 설마,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루린이 거기에 대해 묻기도 전에, 소년이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역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건가, 이 탄식은.”
“아…….”
틀림없다.
그는 그 목소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루린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것처럼 가슴이 벅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소년이 최초이자 유일한 이해자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감회에 젖어들 시간은 루린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뭐냐, 너는!?”
날카로운 질타가 루린의 뒤에서 날아왔다. 놀란 루린이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테쿠루가 굳은 표정으로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호루라기를 불었다.
“신의 묘지에 침입자다!”
순간 후방의 초소가 소란스러워졌다. 이대로는 소년이 붙잡혀 심한 꼴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 자명했기에, 루린은 눈짓으로 소년에게 달아나라고 전했다. 소년도 깨달았는지, 몸을 돌려 달려 나갔다.
그러나 테쿠루도 놓치지 않겠다며 필사적이었다. 루린이 들고 있던 창을 낚아채 소년의 등을 향해 던졌다. 창은 똑바로 궤도에 올라서, 소년이 맞게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예상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창이 소년 근처에 다가간 순간, 마치 벽이 세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튕겨 나온 것이었다.
“술사인가!?”
테쿠루가 분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소년이 돌아보며 말했다.
“파레트. 파레트·사니스=웨렌. 봉인사다.”
테쿠루에게는 마치 선전포고처럼 들렸을 테다. 그렇지만 루린에게는 다른 의미였다. 왜냐면, 파레트는 루린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으니까.
“……봉인사.”
경비들이 초소를 빠져나와 시끄러워진 묘지 앞에서, 루린은 그 낯선 단어를 혀 위로 굴려봤다.
봉인사.
파레트라는 소년의 수색은 다음날까지도 이어졌지만, 그 소식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출신을 알 수 없는 자가 신성한 묘지에 침입했다는 것이 그를 구속할 이유였는데, 묘지에 아무런 이상이 없어 수색은 금세 흐지부지되었다. 애당초, 축제를 앞두고 있어 경비들도 바쁘다. 테쿠루만이 소년은 술사라는 것을 내세우며 수색의 지속을 요청했지만, 그것이 실현될 것 같지는 않았다. 술사는 그다지 특별한 존재도 아니었다. 정작, 테쿠루도 그러니까.
요구가 관철되지 않은 테쿠루는, 곧 루린을 끈질기게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목격자는 그들뿐이었다.
“왜 바로 사람을 부르지 않았지?”
몇 번째인지도 모를 문답에, 루린이 지긋지긋해하며 대답했다.
“위험해 보이지 않았고, 나만으로도 충분했을 테니까.”
“그런데 놓쳤잖아.”
“당신이 떠들어댔으니까.”
루린이 차갑게 쏘아붙이자, 테쿠루는 눈을 흘기며 코웃음을 쳤다.
“과연. 일부러 놓친 것 같기도 한데."
루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이 그랬고, 이 시비도 지겨웠다.
테쿠루는 파레트와의 사이에서 흘렀던 미묘한 분위기를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결국, 네까짓 건 낙오자라는 거지.”
아무 말 않는 루린을 향해 테쿠루가 내뱉듯이 말했다.
“그래. 그래서 아무에게도 공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거야.”
루린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테쿠루는 재미없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테쿠루가 듣고 싶은 대답은 그런 게 아니었다.
“……아는 사람인가?”
마침내, 테쿠루는 곧장 그렇게 물었다.
“그놈이랑 네가 함께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
“설마. 전혀 몰라.”
루린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날이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이미 결론을 내린 테쿠루는 개의치 않았다.
“네가 축제를 싫어한단 건 알고 있어. 축제를 망치려는 거잖아. 아냐?”
“시비는 그만뒀으면 좋겠는데.”
이 이상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다. 루린은 발길을 돌려 테쿠루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테쿠루의 외침에 걸음을 멈췄다.
“그럼 어째서, 너는 여성을 선택한 건데!?”
윽박지르는 듯싶은 그 외침은, 어쩐지 분노를 머금고 있었다.
“경비가 된다고 정해져 있었으면서, 어째서 여성을 선택한 거냐고!?”
루린도, 테쿠루도 모두 세발족이라 불리는 종족이다. 이들은 15세, 성인이 될 때 자신의 성별을 고른다.
“적당히 좀 해. 대체 만날 틈이 언제 있었다고 그러는 건데?”
루린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일부러, 무심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게다가 이제는 신경써봤자 소용없잖아. 발견되지 않는다는 건, 그 애는 진작 이 마을을 빠져나가 멀리 간 거라고 생각되는데.”
하지만, 돌아온 것은 테쿠루의 자신만만한 말이었다.
“아냐, 놈은 온다. 반드시.”
그 말이 예언처럼 울렸다.
신이시여, 위대한 아네키우스여.
그 은혜에, 그 자비에,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이가 요구합니다.
그 위대한 힘,
그 빛을 주소서.
결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사마니 마을은 풍요제를 맞았다.
이 축제는 다른 것들과 달리 마을 주민들만의 행사라, 경비들은 바깥과 이어진 입구에서 눈을 번뜩이게 된다. 이날만은 마을의 출입도 금지다.
루린은 교회의 경비이므로 묘지를 감시하는 일에 차출됐다. 바로 근처에 테쿠루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사주일지도 몰랐다. 이 배치는 루린에겐 좋지 않았다.
‘작년까진 교회를 감시했는데…….’
마음속으로 혀를 차본다.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의식을 치르는 건 고통뿐이었지만, 루린에게는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묘지 가까이 마련된 의식의 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수군대는 기도가 공간을 가득 메운다.
그리고, 루린에게는 거기에 맞춰 커지는 예의 그 신음이 전해져 왔다. 이러니까, 풍요제가 싫다.
목소리의 주인이 이 묘지에 있음을 깨달은 건 몇 살 때였더라. 목소리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축제와 관련돼 있다고 깨달은 순간부터, 이 마을을 좋아할 수 없게 됐다.
그렇지만 루린의 생각과는 별개로, 기도 소리는 기세를 더하는 중이었다. 귀를 막고 싶지만, 그런다고 해서 탄식을 듣지 않을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견딜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관장이 등장하며 의식이 시작됐다. 루린은 그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고개를 숙였다. 테쿠루가 이쪽을 찌릿찌릿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갑자기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선은커녕, 기도 소리마저 멎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든 루린은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묘지를 올려다봤다.
거기에는, 본 적 있는 모습이 있었다.
“막는 거야.”
파레트가 묘지 위를 가로막은 채였다.
“이 축제를 해서는 안 돼.”
그 모습을 알아본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쨌거나, 그는 신성한 묘지를 짓밟고 있다. 일순 당황해 우두커니 서있던 신관들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경비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자, 잡아라, 어서!”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은들, 경비들도 곤란할 뿐이다. 감히 똑같이 묘지에 오를 수도 없고, 섣불리 화살을 쐈다가 묘지에 맞히면 모독 행위가 된다. 얼굴을 마주보는 이들을 테쿠루가 밀어젖혔다.
“각색의 빛이여, 내리쬐어라!”
그의 주문에 맞춰 한 줄기 섬광이 하늘을 갈랐다. 하지만 그 빛은 파레트의 앞에서 꺼졌다.
“주술을 쓸 수 있다면 사용하고, 유우족들은 하늘로 올라가서 끌어내려라!”
그 행위 덕에 겨우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유우족 경비들이 허공을 날고, 신관들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세에 밀린다.
그렇게 생각한 루린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날개도 없고, 주술도 쓸 수 없다. 요컨대 파레트에게 다가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루린은 묘지를 달려서 올라갔다. 뒤에서 노호가 울리지만 개의치 않았다. 묘지 꼭대기에서 파레트가 기다리고 있다.
“여어.”
“반갑게 인사할 때가 아니지요!”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모습에, 루린이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이 묘지는, 대체 뭐야?”
“네가 말한 대로야. 신의 봉인이지.”
“무엇이 봉인돼 있어?”
“그가 도대체 무엇인지는……나도 알 수 없어.”
“봉인을, 풀 거지?”
하지만 루린의 물음에, 파레트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신의 봉인이야. 인간이 마음대로 풀 수 없어.”
“그럼…….”
“그래도, 봉인의 방식을 바꾸는 정도라면 괜찮겠지. 하지만…….”
그 순간, 테쿠루의 “역시 한패였구나!”라는 노성이 들려, 루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 소리가 신호가 되었는지, 다시 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공중에서 대기하던 경비들이 덤비려는 자세를 갖췄다.
“하지만 주문을 욀 동안에는 무방비해지니까, 나 혼자서 그와 제대로 접촉할 수 있을지는 몰라. 그렇기에 너를 기다렸어.”
“어?”
“내가 동조하는 동안, 바깥의 결계를 유지해 줘. 괜찮아, 내 걸 맡아두는 것뿐이니까.”
“그런 말을 들어도…….”
루린은 당황했다.
자신에게 주술을 쓸 수 있는 재능이 없다는 건 지금까지의 생활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결계를 유지하라고 해도, 방법을 모른다.
그렇지만 파레트의 다음 말이 루린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탄식하는 소리는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거기다, 여기서 포기한다면 이 목소리는 계속해서 탄식할 것이다.
루린은, 이번에는, 똑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 내가 널 지킬게.”
그것은 어딘가 그리운 말이었다.
테쿠루는, 달려든 경비들이 연달아 튕겨 나가는 것을 봤다. 마법 역시 아무리 발해도 무효화되는 듯했다.
‘아무리 강력한 결계라고 해도, 이 정도로 유지되는 게 있었나……?’
테쿠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묘지 위를 노려봤다. 루린이 호전적인 눈으로 남자의 앞에서 창을 겨누고 있었다. 남자는 뭔가 외치는 듯했다. 아마 결계를 강화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결계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지.’
하지만, 테쿠루는 틀렸다.
불현듯이 기묘한 느낌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감각을 자극한다. 그것은 확실히 이질적인 느낌으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깨어나는 듯했다.
“저, 저거!”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가 숨을 삼켰다.
묘지가 주르륵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질척한 진흙탕의 흐름이 되어 이곳을 삼키고 있었다. 찰싹찰싹 흐른 진흙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일제히 달아났다.
“놈이다. ……그놈 짓이야.”
사람들에 떠밀리면서도, 테쿠루는 두 사람이 있는 곳을 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렇지만 그 노력은 보답 받지 못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루린이 기억하는 건, 오로지 파레트의 주술이 완성될 때까지다.
주문을 외기 시작한 파레트를 보호하기 위해 창을 겨누고는 있지만, 접근하는 이들 모두 결계에 의해 튕겨져 나가는 중이었다. 그 결계를 자신이 유지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아서, 조금 전 파레트의 말은 어쩌면 은유 같은 게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스스로의 힘을 다해 자신을 다스리고 그 몸을 맡겨라!”
파레트의 주술은 완성됐다.
순간, 눈앞이 하얘지며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됐다. 발밑이 푹 가라앉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느꼈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게 뜻밖이었다.
돌연, 아득히 펼쳐진 평원이 보였다.
거기에는 어떤 인공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나 풀도 드물어서, 몹시 황량하다고 말하는 게 좋겠다.
그렇지만 을씨년스러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건, 이 대지 자체가 어쩐지 따뜻한 탓이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래도, 상쾌하다.
‘혹시, 이게 봉인돼 있던 것……?’
루린은 소리를 내지 않은 채로 생각했다. 술렁대는 마음이, 예의 그 탄식과 같은 감각을 고해왔다.
그렇다면 파레트의 주술이 성공한 것일까.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평원은 태평하고 조용하다.
루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눈을 떴더니 파레트도 근처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잠시 멀거니 쳐다보자 파레트 역시 머리를 흔들며 일어난다.
그제야 루린은 주변의 풍경이 낯설다는 걸 알아챘다. 적어도 사마니 마을 근처는 아니다.
“여기……어디야?”
그 중얼거림에 파레트가 답했다.
“그 마을과는 꽤 떨어진 곳인 듯해. 꽤나 실려 왔으니까.”
“실려?”
“그가 놓아준 거야, 분명히.”
“저게, 그?”
들릴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루린은 되물었다. 파레트가 ‘그’라고 부르는 봉인돼 있던 것은, 그 광경에 대한 것이다. 어쩌면 그저 환상이었거나.
“도대체 그게 뭐야? 사람은 아닌데…….”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다. 몹시 이질적이다.
파레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아냐. ……하지만 분명, 신도 아니지.”
그러더니 도리질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모르겠어.”
루린도 덩달아 어깨를 으쓱했다. 왠지 모르게 그와 제가 같은 것을 마주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럼, 당신은 뭐야? 생각해 보니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잖아.”
“나……, 나는 별 볼 일 없는 술사야.”
“하지만 봉인사라고…….”
“아, 그건 그때의 기세. 대충 둘러댄 거.”
아무렇게나 지껄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루린의 맥이 풀렸다. 그렇게 되니, 조금 전까지의 불가해함이 느껴지기는커녕, 되려 어딘가 미덥지 못한 분위기의 소년으로 보였다.
“그보다, 이쪽은 이름도 못 들었어.”
파레트가 역으로 되물어 루린이 답했다.
“루린. 그냥 루린이야.”
그 말을 들은 파레트는 더 물을 게 없다는 듯이 웃었다. 묘한 느낌이었다. 파레트의 출신 역시 모르지만, 달리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아서였다. 파레트도 같은 생각일까.
일어선 파레트가 루린의 손을 당겨 일으켜주고는,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그러다 되돌아보는 것처럼, 루린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럼, 어쩌지?”
“어쩌냐는 말을 들어도, 이젠 돌아갈 수 없고……따라가도 괜찮겠지?”
그건 물음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그렇게, 루린은 파레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도움이 되지 않고 있었어.
남성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야.
신의 어명을 당당히 말할 수 없어.
그 행위로 상처받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게 나한테 걸맞다고 믿어.
3. 신의 능력
……망설이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 사람이다.
사실은 마지막까지,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결말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구원인가, 나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인가…….
대삼림을 빠져나올 쯤부터 햇살이 갑자기 강해졌다. ‘사막’과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그라드네라 동부에 존재하는 ‘사막’은, 땅 전체가 1년 내내 온난한 기후를 유지하는 이 세계에서 무척 특이한 지역이었다. ‘사막’과 북부의 ‘강설지대’는, 거기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것을 칭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북서부 태생인 루린에게도 처음 겪는 장소였다. 사방의 모래와 죽을 듯한 더위라는 게 어떤 건지 무척 궁금했다.
“대체 어떤 곳일까나.”
루린은 파레트에게 말을 걸었다가, 그가 반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눈살을 찡그렸다. 파레트는 시선을 슬쩍 내리깐 채 어딘가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파레트!”
파레트는, 루린의 질타를 듣고서야 그녀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야?”
그가 내뱉은 그 긴장감 없는 말투에 루린의 기분이 상했다. 루린은 파레트에게 삿대질을 하며 마구 떠들었다.
“알겠다. 아직 그 마을 일을 신경 쓰는구나.”
“응…….”
“몇 번이나 말하지만, 이제 와서 신경 써 봤자 소용없어. 이미 벌어진 일들은 더 이상 바꿀 수 없으니까.”
“……알고 있어.”
그래도 파레트의 말투는 시큰둥했다. 루린은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파레트의 상태를 살펴보기로 했다. 여태껏 찝찝한 일들은 몇 번이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파레트가 신경을 쓴 적은 없어서였다.
‘찜찜한 기분…….’
루린은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지평선 부근에 반짝이는 모래먼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막’에 들어서자, 루린은 완전히 토라지고 말았다. 이유는 파레트와의 다툼이었다.
‘사막’의 외곽에 도착한 두 사람은 중앙에 존재하는 마을, 베레스로 향하기 위해 사막새를 동반한 길잡이를 고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파레트가 막판에 와서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유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은 탓에, 루린은 울컥 화가 났다. 결국은 루린이 불평해댄 탓에 파레트는 마지못해 고용에 대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 기분이 풀릴 리가 없었다.
무사히 베레스에 도착해 숙소를 잡은 지금도, 루린은 제대로 말하지 않고 있었다.
“온 거구나…….”
파레트는 홀로 거리를 거닐며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고용을 거절하려던 이유를 들려줄 수는 없다.
그는 시내의 좁고 복잡한 길을 헤쳐, 광장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금 확신했다.
‘……역시,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
파레트는 거리 한복판의 가득 채워진 수반(水盤)을 들여다보며 혼잣말했다. 귀중한 공용 샘터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이 사이에서 누군가를 집어내기란 어렵다.
‘다만 명백한 악의……까딱했다간 살기였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알 것도 같은데 전혀 짚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주술을 사용해봤자 소용없을 터였다.
파레트는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샘터에서 떠났다. 역시나 기척이 따라왔다. 지금까지도 전혀 참견해오지 않는 게 찜찜했다.
루린은 아마 눈치 못 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까지 위험해지기 전에 어떻게든 해야 한다.
휩쓸고 지나가는 듯한 건조한 바람 속에 아득한 저주의 신음이 섞인 것을 느껴, 파레트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두 사람의 목적은 이 베레스 마을에는 없다. 이 마을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거리, “염지炎地”라고 불리는 곳에 있다. 거기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건대, 그곳 역시 신의 봉인일 터였다. 마을에서 하루 묵은 뒤 그곳으로 향할 예정이었는데……
“안 가.”
루린이 단언했다. 이런 상태의 그녀라면 아무리 설득한들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는 걸, 파레트는 경험으로 알았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루린에게 말을 건넸다.
“알았어. 그럼 일단 상황을 보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줘.”
루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녁까진 돌아올게.”
역시나 대답하지 않는 루린을 뒤로 한 채, 파레트는 숙소에서 나왔다. 미행의 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적 드문 곳에서 정체를 확인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렇게 결정한 파레트는, 사막새는 빌리지 않기로 했다. 애당초 ‘염지’로 향하는 이에게 빌려줄 만큼 이상한 사람도 드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실을, 파레트는 ‘염지’에 도착해 새삼스레 실감했다.
‘염지’는 사막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황폐한 곳이었다. 어쨌거나 사막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런 게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뜨거운 바람들이 휘감긴다. 동시에 발밑의 모래먼지들도 땅에서 떠올라, 마치 모래벽처럼 시야를 가린다. 그리고, 울리는 목소리.
“지독하네…….”
그 절규에, 파레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상태로 방치된 것인지. 그걸 생각하면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파레트의 그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전례 없는 명백한 살기가 등에 꽂힌 탓이었다. 뒤를 돌아본 파레트는, 숨을 들이켰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파레트가 마주보고 있자, 모래먼지 너머로부터 그 인영이 나타났다. 본 적 있는 모습이었다.
“……라테스.”
파레트는 눈앞의 소년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어린 생이족 소년은 나이에 걸맞지 않는 냉담한 눈으로 파레트를 노려봤다.
“어떻게.”
그 뒷말을, 파레트는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라테스로부터 압도적인 힘의 파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여태껏 겪어본 적 없는 강렬한 힘의 감촉이었다.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했어?”
마침내 입을 연 라테스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했다. 거기서, 제라·니드 마을에서 만났을 때와는 다른 울림을 느낀 파레트는 전율했다. 마을에서의 라테스는 까치발을 든 채 애쓰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의 라테스는 전혀 그렇지 않다. 뭔가 당연하다는 듯한 상태다.
어른스러워졌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꼭 갑작스레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
“그런 짓이라는 건?”
기세에 눌린 파레트가 무심코 대답하자, 라테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치미 떼지 마!”
라테스는 입술을 희게 질릴 만큼 꾹 깨물고 있었다.
“모두, 죽었어. 모두가.”
그 얼굴은 조금 전까지의 묘함이 어느 정도 사라져 있는 덕분에, 파레트는 어떤 의미로 안심했다.
“봉인을 풀면 그가 예언의 힘을 잃는다는 건, 나도 알고서 한 일이야. ……속죄는 하겠어.”
“……속죄.”
느닷없이 라테스가 냉소했다. 등줄기가 저릿해지는 웃음이었다. 그는 다시, 낯선 라테스로 변해 있었다.
“속죄?”
반쯤은 크게 웃는 듯한 미소를 지은 라테스가 파레트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할 건가? 다 끝난 일을 축소할 수는 있나? 너는 대체 뭘 속죄라고 하는 거냐.”
“그건…….”
“너희 같은 족속은 원래부터 죄인이다. 그런 분별도 없이 속죄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거냐. 도대체, 분수를 모르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10살짜리 아이가 이런 대사를 내뱉을 리가 없다. 파레트는 누가 라테스의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해보기도 했지만, 힘의 분위기가 라테스의 것과 똑같았다.
“애초에, 너는 스스로 죄를 거듭하고 있다.”
라테스가 파레트를 째려봤다.
“……이곳의 봉인도 풀 셈인가.”
두 사람 사이로 열풍이 분다. ‘염지’의 목소리가 피리처럼 울렸다. 라테스는 그게 성가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반면, 파레트는 순간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고서도 믿지 못했다.
자신이 봉인을 바꿔두고 있다는 걸, 라테스는 어떻게 알고 있는가? 본래 이곳의 봉인은 사마니와도 달라서, 봉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을 터였다. 실제로, 마을에서도 그런 얘기는 일절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신의 봉인이다. 사람이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죄야.”
그러나 라테스는 단호하다.
“……하지만 봉인된 것이 괴로워하고 있어.”
“어리석구나. 그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신벌이다. 괴로움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지.”
라테스의 비웃는 듯싶은 말투에 파레트 역시 기분이 상했다.
“어떤 이유든 도움을 청하고 있잖아.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거야.”
파레트가 의연히 단언했다. 거기에 주저는 없다.
그런 파레트를, 라테스는 냉담히 바라봤다.
“……너는 신을 거역하는 반역자다.”
불현듯이 미풍이 파레트의 뺨을 쳤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아니라, 라테스에게서 쏟아져 나온 힘의 격류였다.
거기에 생이족 소년의 모습은 이제 없다. 머리의 귀가 사라지고, 등 뒤로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자가 있었다. 라테스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자.
그것은 사람이 신이라 부르는 자의 모습이었다.
“단죄의 필요가 있다.”
파레트는 그대로 서 있었다.
역시, 너무 쌀쌀맞게 굴었다.
루린은 침대 위를 뒹굴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조금 후회했다.
생각해 보면, 파레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것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라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난 그런 것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철없는 애였나, 하는 생각에 루린은 짜증이 났다.
“같이 지낸 지 몇 년째더라…….”
사마니 마을을 떠난 지는 5년, 정식으로 혼인한지는 이미 2년이다. 파레트는 꽤 어른스럽게 됐지만, 자신은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가볼까.”
루린이 중얼대며 옆에 놓인 검을 집어 들었다. 서두른다면 ‘염지’에서 파레트를 만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혹시라도 엇갈리는 경우를 대비해 전언을 쓰던 도중, 루린은 갑작스런 불안에 휩싸였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결국은 전언도 하는 둥 마는 둥으로 마치고, 루린은 방에서 뛰쳐나왔다. 한시라도 빨리 따라잡으려면 사막새를 빌릴 필요가 있었다.
빛의 다발이, 파레트를 향해 쏟아졌다.
“수호의 벽이여!”
파레트의 주문에 맞춰 투명한 벽이 전개됐지만, 빛은 그것조차 뚫고 쏟아졌다. 몇 줄기의 빛이 파레트의 몸을 꿰뚫었다. 모래에 피가 튄다. 비틀대는 파레트를 향해 두 번째 공격이 가차 없이 덮쳤다. 막을 도리가 없으니 파레트는 이어지는 충격을 받으며 신음했다.
압도적이다. 상대는 주문조차 없이,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의 기술을 거듭한다. 이것이 신의 힘이라면, 인간이 발하는 주술은 애들 장난 수준이다. 벗어날 수가 없다.
파레트는 목 안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것을 뱉어냈다. 핏덩어리였다. 몸 안을 당한 듯했다. 빛에 꿰뚫린 부위 역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꽤 끈질기군.”
라테스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는 봐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어서 끝내자.”
대수롭지 않게 내뱉으며 파레트를 가리켰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뒤에서 빛의 다발이 나타난다.
한편, 파레트는 이미 반쯤 죽어 있었다. 피가 멎을 틈도 없지만, 반격할 기회는 더더욱 없다. 힘이 소모되어 그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휘청대던 다리가 달궈진 모래 위에 무릎 꿇고 말았지만,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희미해지는 시야 안으로 다시금 빛이 보였다. 저것을 맞고서도 무사하리라는 보장은 역시 없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눈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멀리서 무슨 파열음 같은 게 들렸다.
“파레트!”
귀에 들어온 건, 그 목소리였다. 파레트가 경악하며 눈을 뜨자, 루린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파레트를 향해 루린이 떠들었다.
“무슨……, 무슨 일이야! 누가…….”
루린은 그러면서 고개를 돌렸다. 라테스가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막았다고……?”
“저건, 라테스?”
루린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뜬다.
“어째서 파레트를 이렇게…….”
“너희의 죄 때문이다!”
라테스는 예상을 벗어난 전개에 조바심이 난 것 같았다. 루린을 노려보며, 책망한다.
“너희들 때문에 마을이 멸망했다!”
“뭐야, 그게!”
하지만 루린은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맞서 외친다.
“그곳이 붕괴한 건 산사태 때문이었다며! 그럼, 그런 건 그저 원한이잖아!”
루린의 기세에 되려 라테스가 주춤했다. 루린에게는 신의 모습 같은 것도 전혀 상관없는 듯했다.
“그, 그러나, 너희가 오지 않았다면 예언자님의 예언을 듣고 피할 수 있었겠지.”
“뭐든 남에게 기대는 게 잘못됐어! 애초에, 너희는 그 사람을 치켜세웠지만 존중해주진 않았잖아. 당신, 그의 이름은 알고 있어!?”
라테스는, 은연중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체니얼이라는 이름을 꺼냈어…….”
루린이 얼굴을 찡그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언자 청년을 떠올려낸 것이었다. 단지, 푸른 하늘이 보고 싶다고 말한 청년.
그것은 라테스도 마찬가지인 듯 순간 울 것 같은 표정이 됐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신음처럼 말했다.
“……신의 봉인을 해치는 자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다.”
“이쪽이야말로, 저렇게 괴로워하는 걸 내버려둘 수 없거든!”
루린이 곧장 반격했지만, 이번엔 라테스도 쉬이 꺾이지 않았다.
“인간 따위가 멋대로 굴지 마라! 그것은 해롭기 때문에 봉인된 것이다. 너희는 너희 스스로 목을 조르는 것이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둘의 시선이 얽히듯 부딪쳤다. 두 사람에게 합의란 불가능했다.
“더 말한들 시간낭비다.”
그렇게 말하는 라테스의 눈은 냉정을 완전히 되찾은 채였다. 그는 손을 하늘로 뻗었다.
“죽어버려라.”
충격이 두 사람을 덮쳤다.
왠지, 조금 전 파레트가 당했던 것처럼 강렬하진 않다. 그렇지만 그 기세는 두 사람을 뒤흔들었다. 루린이 파레트를 비호하듯 끌어안았다.
그리고, 파레트는 라테스와 루린이 서로 외쳐대는 동안, 한 가지 결심을 했다.
“……그를, 봉인하겠어.”
그 결심을, 파레트가 루린의 귀에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루린의 눈썹이 순간 움찔한다.
“무슨 소리야! 그 상태로 봉인술을 쓸 순 없어!”
한시라도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파레트는 죽음에 이른다. 큰 기술을 사용한다는 건, 그런 귀중한 시간을 깎아먹고 체력도 소모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 않으면 안 돼.”
그러나 파레트의 어조는 강하고, 분명했다.
“그게 올바른 일일지는 몰라. 그의 말처럼 터무니없는 죄를 저지르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
파레트는 짙은 갈색 눈동자로, 루린의 금갈빛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그러더니, 말했다.
“난 너를 지키고 싶은 것뿐이야, 루린.”
그 동안에도 충격은 이어진다. 라테스는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곧 당하고 말 거야. 해야만 해.”
“……치사해.”
루린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글썽거렸고,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루린은 파레트의 옷을 붙들며, 쥐어짜듯 말했다.
“그런 이유를 들이밀다니 치사해. 파레트는…….”
죽을 작정이잖아.
루린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알고 있다. 파레트는 자기보다 먼저 죽는다. 그건 이미 결정된 일이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마을에서의 일을 질질 끌고 온 것뿐이잖아.”
고개를 젓는 루린을, 부드럽게 타이른다.
“루린, ……그 사람도, 결손아였어.”
“……체니얼이?”
“그래. 나랑 똑같아.”
결손아란 이종족 간의 혼인을 통해 종종 태어나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아이다. 때문에 ‘결손’이라 불리며, 완성되지 못한 것으로 본다. 얼핏 보면 세발족과 같은 외모라, 루린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는 예언의 힘을 잃는 걸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어. 그 힘이 그를 지탱해줬기에, 망설이고 있었어. 나는 그게 구원이 될지 알 수 없었어.”
그 마을에서, 파레트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린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를 확실하게 결정했어. 나는 정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덕분에 그의 방황을 그대로 가져와버렸어…….”
그 결과가 이것이다.
파레트는 끝내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언제나 스스로 결정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루린의 말에 지지받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은 언제나 망설일 뿐이다.
사마니 마을에서도, 루린이 제게 와주지 않았다면, 봉인을 바꾼다는 결심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僕는 이제…….”
그제야 루린이 고개를 들고서 반쯤 웃었다.
“돌아왔구나. 1인칭, 결혼 이후로는 계속 나私였던 주제에.”
그러더니 붙잡고 있던 파레트의 옷을 놓았다.
“당신은, 한 번 정하면 번복하지 않으니까.”
라테스는 효과가 전혀 없어 초조해졌다. 좀 전과 비교해보더라도, 위력은 덜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뿜었던 빛이 모두 장벽에 가로막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대체 무슨…….”
라테스는 귀를 만지작대려다, 그건 이제 없다는 걸 깨달았다. 황망히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는다.
조금 전과 달라진 건, 루린이 왔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루린은 주술을 쓸 수 없고, 사용한다고 해도 결국은 사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파레트의 주문이 귓가에 닿아도, 라테스는 아무렇지 않았다. 느껴지는 힘이 너무나도 미약했다.
“온갖 힘, 온갖 혼, 온갖 령, 온갖 연이여.”
루린은 파레트를 떠받치듯 세웠고, 파레트는 눈을 감은 채 주문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라테스에게 동조해, 라테스의 힘으로 그를 봉인할 것이었다.
그게 파레트의 봉인이었다.
“왜곡의 안에 자신을 담지 말지어다, 자신을 다스리고 자신을 아는 것조차 바르지 않으니.”
이 무렵에야 라테스는 자신의 변화를 알아챘다. 시야가 일그러져 있었다. 서둘러 그 왜곡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지만, 늦었다.
“스스로 왜곡을 담아, 그대를 봉한다, 그대를 봉한다!”
자신의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온갖 힘, 온갖 혼, 온갖 령, 온갖 연이여…….”
봉인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돌연 땅에서 하늘로 불기둥이 솟아올라 라테스의 모습을 지켜보던 루린을 눈부시게 했다. 그것은 라테스의 몸을 굽고, 창공을 태웠다. 환희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뜻밖의 사태에 어리둥절해진 루린의 품에서, 파레트는 눈을 떴다.
“파레……, 저건…….”
“신의 봉인이 약해진 거야. ……조금, 동조, 했어.”
파레트가 입에 피거품을 문 채 쉰 목소리로 답했다. 라테스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불꽃이 모든 것을 그을렸다.
“라테스는, 우리와 같아……. 하지만, 저건 달라…….”
파레트는 마지막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역시, 다르구나…….”
불기둥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루린은 파레트를 끌어안은 채 그 광경을 지켜봤다.
불길이 작아짐과 동시에 환희가 다시 고통스러운 신음으로 변해가는 것을, 루린은 약간 슬프게 생각했다.
라테스는 그것이 해롭다고 말했다. 체니얼은 나쁜 느낌은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파레트는 다르다고 말했다.
어느 것이 맞는지, 자신은 알 수 없고, 어쩌면 모두 다 맞는 걸지도 모른다.
결국,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
목소리가 들렸기에 파레트를 만났고, 목소리가 있었기에 파레트와 함께 할 수 있었는데도.
“파레……, 나는 알고 싶어.”
무엇이 우리를 이끌었을까.
대답 없는 파레트에게 말을 건넨 루린은, 조금 울었다.
바람이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를 실어온다.
루린은 파레트를 안은 채,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온갖 힘, 온갖 혼, 온갖 령, 온갖 연이여
왜곡의 안에 자신을 담지 말지어다
자신을 다스리고 자신을 아는 것조차 바르지 않으니
스스로 왜곡을 담아
그대를 봉한다
그대를 봉한다
그대가 바깥 아닌 안이 된다면
그대의 봉인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봉인사에 대해 언급한 잡문은 여기
2005/09/10일자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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