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낫세x레하트(고유 설정 있음.)
*애정B 엔딩 이후: 두 사람이 2세 얘기를 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완전 사족. 그래도 자기만족용으로 쓴 글이니까 남겨둔(웃음)
*애정은 무엇으로 굳어지나요?


 
 타낫세는 레하트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레하트와 마주보듯이 하며 나란히 누웠다. 그새 초가 다 타들어갔는지 방 안은 어둑했지만,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뺨을 발그스름하게 붉히고서 저를 쳐다보는 레하트 덕분에, 타낫세의 얼굴도 비슷한 붉기로 달아올랐다. 몇 차례 몸을 섞은 뒤의 나른한 분위기가 두 사람 곁을 맴돌고 있었다.
 타낫세가 다소 어색한 손길로 레하트의 머리칼을 어루만지자, 레하트는 그의 팔을 붙잡아 제 어깨에 두르게 하면서 품으로 파고들었다. 타낫세는 그제야 레하트를 꼭 끌어안았다. 익숙한 살결의 촉감과 온기가 기묘한―안심이 되는 동시에 그것을 더욱 원하게 만드는 갈증 같은―만족감을 가져다줬다. 레하트의 머리칼이 제 목덜미를 간질이는 것도 마음을 퍽 벅차게 했다.
 관계를 갖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결혼을 한 지도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가므로, 초야는 진작 치렀던 데다 그 이후로도 숱한 밤을 함께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낫세는 이런 순간에 꺼낼 만한 말을 잘 찾지 못했다. 저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배시시 웃어주는 레하트의 얼굴을 보면, 벅찬 마음이 목구멍을 틀어막는 듯해서였다. 그러니 이 페넷 저택의 침실에서 대화를 주도하는 것은 언제나 레하트였고, 이번에 먼저 입을 연 사람 역시 레하트였다.
  “왜 그렇게 보고만 있어? 쑥스럽게.”
  “…미, 미안하다. 아무래도 네 상태가 신경 쓰여서…….”
  “괜찮은데. 타낫세는 늘 걱정이 너무 많아. 오늘도 내가 먼저 졸랐잖아.”
레하트가 칭얼대듯 투덜거렸다. 그러나 타낫세로서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걱정할 만한 것이니 걱정하고 있는 거다, 답해주기엔 제 과실이었던 탓이다. 한두 해 전쯤에 저질렀던 사술이든, 오늘밤의 일이든, 레하트의 상태에 관한 것은 전부.
  “네가 괜찮다면 다행이지만…….”
때문에 말을 하면서도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은 별 수 없다. 멋쩍어진 타낫세는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려고 했으나, 그러기도 전에 레하트가 타낫세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을 꺼냈다.
  “저기, 타낫세. 있잖아―.”
  “응.”
  “타낫세는, 아이 갖고 싶지 않아?”
  “…………뭐?”
그 말을 듣고서도 타낫세가 벌떡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너무 놀라면 오히려 몸이 바싹 굳어버리는 현상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몸으로 직접 겪고 있는 남편의 상태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레하트는 혼잣말처럼 얘기를 계속했다.
  “나는 슬슬 아이 있으면 좋겠는데. 여기, 이 저택은 넓으니까 한 명 정도…, 아니. 두셋은 더 생겨도 될 것 같아. 타낫세를 닮은 애들이면 귀여울 거야…….”
어물어물 들려오던 목소리가 차츰 작아져 돌아봤더니, 밀려드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한 듯 레하트는 어느새 제 납작한 배 위에 손을 얹은 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타낫세는 이불을 잡아당겨 레하트와 제 턱밑까지 덮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쉬이 잠들 수 없어, 그는 부인의 등을 토닥이며 고민에 잠겼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란테와 요아마키스의 피를 반씩 잇고 태어나 자란 타낫세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의무와도 같이 인식되는 일이었다. 물론 왕성에서 지내던 무렵의 타낫세는 인지와 별개로 순순히 그 의무를 수행할 생각 따위 없었지만. 당시 드물게나마 들어오는 혼담이 저를 노골적으로 총애자를 낳아낼 씨내리 취급만 하고 있어 질린다는 것도 그 결정에 크게 일조했고, 또 다른 이유 중에는 단지 그럴 마음이 가는 상대가 없다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레하트의 등장으로 얘기는 달라졌다. 레하트는 타낫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언동을 보일 때가 잦아, 타낫세로 하여금 그 자신은 결코 할 리가 없으리라고 믿었던 짓들을 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적대적인 마음밖에 들지 않았던 레하트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것도, 깊은 우애에도 불구하고 일그러진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던 것도, 그런데도 용서를 받아 결국 속절없이 애정을 품고 말아 버린 것도, 그로 인해 과오를 저지르기 위한 단초에 지나지 않았던 약혼에 매달리며 애정의 확인을 갈구했던 것까지도. 타낫세로서는 죄다 거대한 흐름에 휘말린 것만 같은 일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시기엔가 겨우 안정을 되찾은 타낫세가 이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들에 대하여 시선을 달리 한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순이었다. 그는 오명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작 지위를 하사받은 두 번째 총애자에게 영지를 봉헌하는 절차를 밟았고, 두 사람의 결합에 쐐기라도 박으려는 양 화려한 결혼식을 치렀다. 바로 그 결혼식의 준비 과정으로 레하트와 얘기를 나누며, 후사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타낫세는 거기서 들은 레하트의 대답을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했다.
  “모르겠어.”
  “그렇군. 부담을 줄 생각에서 물은 건 아니었다. 다만….”
  “응, 알아.”
미소를 띤 레하트가 타낫세의 손을 잡아왔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게 좋으니까. 지금은 잘 모르겠어. 이래저래 불안하기도 하고…. 난 우리 둘만으로도 괜찮아.”
그 대답으로 결론이 났다. 타낫세 역시 레하트의 말에 동의했다. 부부의 연을 맺었다고 해서 무조건 아이를 가질 필요는 없었다. 결혼 직후에야 레하트에 대해서밖에 보이지 않았다지만, 그 이후로도 두 사람만의 생활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덕분에 타낫세는 이미 거절한 적 있는 레하트를 구태여 무리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증상을 함께 겪는다고 한들, 결국 아이를 몇 달이고 몸 안에 품은 채 지내야 하는 것은 레하트였다. 거기다 그렇게 레하트를 고생시키면서까지 기껏 아이를 갖는다 한들, 좋은 부모가 되어줄 자신 역시 별로 없었다. 제게 표식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유년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별다른 도리 없이 입맛이 씁쓸해졌다. 타낫세는 저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제 부모인 리리아노나 쿠렛세와의 관계는 여전히 어색할 뿐이었다. 아니, 정정하자. 타낫세는 레하트의 도움으로 두 사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해했다고 해서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사라졌다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 사정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된 이후로는 쿠렛세와도 이따금 편지를 주고받았고, 리리아노와는 왕성을 떠나기 전에 예상했던 것과 달리 주기적이진 못해도 제법 꼬박꼬박 만남을 가졌다.
 심지어는 다음 주말에도 란테 저택에 방문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거기서 타낫세가 할 일이라고는 리리아노와 레하트가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주일 테지만, 되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상적인 시간이 조금쯤은 기대가 됐다. 레하트에게서 느껴지는 들뜬 기색이 전염된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레하트는 리리아노를 꽤 잘 따랐다. 타낫세는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춘 인물에 대한 동경이나 총애자끼리의 동질감 때문이려니 여겼는데, 실상은 타낫세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양위를 마치고 돌아갈 날을 세는 중에 있던 리리아노를 향해 대뜸, “이제 폐하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앞으로는……,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나요.”하고 묻는 레하트를 봤을 때 타낫세는 뒤로 넘어갈 뻔했다. 다행히도 그가 10년도 넘게 받아온 예절 교육이 얌전히 앉아있는 데 도움이 됐다. 리리아노가 흔쾌히 허락을 했을 때는 끝내 의자 끄는 소리를 내고 말았으나, 레하트의 까르륵대는 웃음소리에 묻혔다. 그리고 이내 웃음을 그친 레하트는 타낫세의 귀에 대고, “이해해 줄 거지?”하고 소곤거렸더랬다.
 그러니까… 레하트는 어쩌면 가정이라는 것을 동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돌아가신 어머니와는 누구보다도 사이가 좋았다는 얘기도 들었으니. 거기서 지낼 적에는 내내 떠날 생각밖에 못한 고향이 종종 그리워졌던 것도 그 덕분이라고 했다. (레하트는 타낫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하는 말도 잊지 않고 덧붙였었다.)
 하물며 타낫세가 알기로, 레하트는 어린애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두 사람이 점심식사를 마치면―비가 오지 않는 이상―어김없이 나서곤 하는 산책에서 간혹 영지의 어린 주민과 맞부닥뜨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레하트는 날랜 동작으로 아이를 낚아채 안아 올리고선 해사하게 웃었다.
  “앞도 안 보고 뛰어다니면 넘어져.”
  “고맙습니다아.”
그러면서 태연히 이름은 뭐고 나이는 얼만지, 좀 전까진 뭘 하고 있었는지 같은 질문을 몇 마디 주고받다가, 아이를 뒤쫓아 왔을 보호자가 놀라 굽실대는 것을 한사코 말리며 아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칭찬하고, 도로 내려놓은 아이에게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런 일이 있은 날 밤의 레하트는 부쩍 칭얼거림이 늘었었다.
 타낫세는 그제야 레하트가 꺼낸 말이 단순히 어떤 여흥이나 잠결에 취해서 흘린 말이 아니라, 언젠가부터 속에 담아두고 있다가 겨우 털어놓은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럼…… 침대에서 말고, 한 테이블에 마주앉아서 좀 더 진지하게 얘기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것이 타낫세가 내린 결론이었다.
 
 하지만 일이 어디 그렇게 뚝딱 풀린 적이 있던가. 요 며칠간 타낫세는 레하트가 대화를 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예 말을 섞지 않는 건 아니었다. 레하트는 여전히, 매일 아침 타낫세의 손길을 받으며 힘겹게 눈을 떴고,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면 제가 처리해야 할 볼일들을 해치운 뒤, 둘이 함께 식사하고 산책에 나섰다. 그러나 오히려 이렇게 변함없는 일상을 영위하는 중이었기에 타낫세에게 닿는 위화감은 더욱 강렬할 따름이었다. 레하트는 틈만 나면 타낫세의 곁에서 많은 얘기를 재잘거리면서, 정작 타낫세가 아이 얘기로 화제를 돌리려고 할 때마다 은근슬쩍 또 다른 주제를 꺼내 그가 하려던 말을 가로막고는 했다. 더군다나…….
 아무튼 그런 식으로 아흐레인지 열흘인지, 짧지 않은 나날이 흘러 란테 저택에 방문하는 날이 되었다. 록차에 올라 차창 밖으로 고개를 두고 있던 타낫세는, 창 너머로 바람이 불기 시작한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제 어깨에 실리는 무게를 느끼고 설핏 웃었다. 나들이를 약속한 꼬마처럼 전날부터 부산을 떨고 잠까지 설치던 레하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타낫세가 요령 좋게 담요를 끄집어 내 둘러주자, 레하트는 제 베개가 움직이는 게 불편했는지 ‘으응…….’ 잠꼬대를 했다. 타낫세는 결국 한참이나 레하트를 들여다봤다. 오물거리는 입술이나 둥근 뺨은 잠에서 깨울까 차마 건드리지도 못하고, 손만 가볍게 깍지를 끼면서.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창밖은 익숙한 장소로 변해 있었다.
  “레하트, 도착했―”
  “…좋은 아침, 에헤헤.”
  “…일단 정신부터 차려라.”
별 소득은 없었다. 타낫세는 웃음기 섞인 한숨을 내쉬며 레하트의 손을 잡아, 그를 록차에서 내리게 했다. 이후는 정해지다시피 한 일련의 수순이었다. 리리아노가 두 사람에게 환영인사를 건네면, 두 사람은 예의상 준비한 선물로 답한 뒤, 자리에 앉아 무난한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오고가는 말의 팔 할은 레하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리리아노는 레하트에게 적당히 대답하는 정도였고, 타낫세는 그런 풍경 속에서 느긋하게 찻잔을 비웠다. 그러나 그 여유는 금방 깨지고 말았다.
  “―그럼 타낫세는 어릴 때 어떤 느낌이었어요?”
  “너, 너는 갑자기 무슨 말을…….”
  “갑자기 아닌데. 안 듣고 있었구나. 그리고 난 그냥, 사랑하는 사람의 옛날이 궁금해서―”
  “후후. 그 녀석을 너무 놀리지 말게.”
  “네에.”
  “일단 묻는 말에 대답해줘야겠지만, 글쎄, 자네가 만족할 만한 대답은 해주지 못할 것 같군.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 아이와 함께 지낸 시간이 별로 없었으니까.”
  “어머님께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해해줘서 고맙네. 허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도….”
후회가 전혀 남지 않는 것은 아니거든.
 타낫세는 리리아노의 그 말을 곱씹느라 이후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바다가 보일 정도로 최서단인 란테 저택과 초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쪽의 페넷 저택을 하루 만에 왕복하는 강행군은 아무도 생각지 않았으므로, 그새 바깥이 어두워진 것을 확인하고 세 사람 중 가장 이르게 잠자리에 드는 레하트가 먼저 객실로 올라가는 것을 배웅하자, 거실에는 타낫세와 리리아노 둘만이 남아 있었다. 조금 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어색해진 분위기가 금세 거실 안에 차올랐다. 눈치를 보며 슬며시 자리를 벗어나려던 타낫세를, 리리아노의 말이 붙잡았다.
  “자네가 올해 스물이던가.”
  “예.”
  “아까 레하트와 얘기하던 중에 생각났다네. 내가 자네를 가졌을 때가 딱 그맘때였어.”
  “…제가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저희 일이니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니, 나무라려던 게 아니야. 그런 일은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할 일이라, 남이 참견해서야 좋은 꼴을 못 보는 법이거든. 당연히 자네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러면 갑자기 왜….”
  “지금 자네가 옛날의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네. 나도 아이를 갖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어.”
타낫세는 그 말에 무심코 리리아노의 얼굴을 쳐다봤다. 리리아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도, 왠지 애수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타낫세가 리리아노에게서는 본 적이 전혀 없던 표정이었다. 리리아노는 타낫세의 시선에 반응하지 않고 여상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짐작하고 있는 그 이유가 맞아. 다만 아이를 가졌을 때, 나는 남들과는 다른 것을 바랐네. 내 아이가……표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결과야 따로 말할 필요도 없겠지. 자네를 처음 본 그 순간, 나는 내심 안도했어.”
  “…바라시던 대로 됐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그저 무사히 태어나준 것이 기뻤어. 다른 것은 처음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네.”
  “…….”
  “자네가 내 아이로 태어나고, 내게 무엇보다도 소중해졌다는 사실은, 표식 따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야. 그래, 덕분에 멀리 두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어 답지 않게 고집도 부렸었지…. 다만 내 어중간한 고집 탓으로 자네가 겪었을 일들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군. 미안하네.”
  “어머니, 저는….”
타낫세는 다시금 말끝을 흐렸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쩐지 흙을 삼킨 듯 목이 깔깔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게나. 자네가 망설이는 것에 어느 정도 내 책임이 있는 것 같아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게다가, 후후…, 자네들은 나와는 다른 결과를 맞이할 걸세.”
  “……레하트라면 그럴 수 있겠죠.”
  “자네도 그럴 수 있어. 그러니 그 아이를 너무 서운하게 만들지 말고.”
이만 물러가게. 레하트가 기다리겠군.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리리아노 나름의 신호를 알아들은 타낫세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목례했다.
 
 뜻밖에도 레하트는 잠들지 않은 채였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레하트가 방으로 들어오는 타낫세를 보자마자 밝게 웃으며 손짓해, 타낫세는 그리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먼저 자지 그랬나.”
  “혼자 잠들기가 좀. 별로 졸리지도 않았고.”
누가 봐도 졸음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눈으로 그런 말을 해봤자 설득력이 없다는 걸 모르는 건가. 하지만 타낫세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몸을 돌려 레하트의 양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손 아래로 레하트가 당황하는 기색이 전해졌다.
  “어머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타낫세는, 레하트가 피하고 있다는 핑계로 여태껏 미뤄두었던 말들을 풀어낼 수밖에 없는 순간이 닥쳐왔음을 직감했다. 레하트도 그것을 알아챘는지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 타낫세는 조바심을 억누르며 레하트의 안색을 살피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거기 담긴―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올곧게 저를 쳐다보는―눈빛이 타낫세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그래, 타낫세가 아는 레하트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문제들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기어이 이겨낼 줄 아는 사람. 타낫세는 한 차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입을 열었다.
  “옛날 얘기를 약간. 전에 네가 했던 그 말과도 관련―”
  “저기, 있잖아, 난 싫다는 거 강요할 생각 없어. 나한테 맞춰주려고 하지 마.”
타낫세는 제 말을 다급히 끊는 레하트의 손목을 놓았다가, 이번에는 손을 잡았다. 레하트가 손을 꾹 맞잡아왔다.
  “나는 아직까지도 네가 바라는 것을 전혀 모를 만큼 둔하진 않아.”
  “……응.”
  “물론 네 말대로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어. 이유로 댈 수 있는 건 많지만, 역시, 내 각오가 부족했으니까. 혹시라도 내가 실책을 범하게 되는 것이, 그래서 네게 부담이 되는 것이 싫었다. 원하지 않은 결말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변수를 만드는 것이 두려웠던 거야.”
  “…….”
  “하지만 돌이켜보면, 지금 너와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것도 한때는 바라지 않았던 일이었지. 그리고 너와 함께 한 순간들은, 내게 예상치 못했던 행복을 가져다줬어. 어떤 일들은 다 그런 식이었다. 도저히 통제할 수 없고, 무슨 결과를 불러올지 한 치 앞도 모르고. 그래도 어쩌면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란 생각이 들더군.”
  “타낫세는 바보니까. …난 그런 바보를 좋아하지만.”
타낫세의 뺨에 입을 맞춘 레하트가 히죽 웃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괜찮을 거야.”
  “그래. 괜찮을 거다. …그리고, 레하트, 나는 널 닮은 아이가 더 귀엽겠던데.”
말을 마친 타낫세가 곧장 레하트에게 깊이 입을 맞추며, 그를 뒤로 눕혔다.
  “잠깐만, 여기서? 지금? 진짜?”
  “네가 꽤 오랫동안 피했잖나. 그날부터 계속.”
  “아니, 그거는, 그런 얘길 해놓고 그러면 정말 강요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싫은가?”
  “싫은 게 아니라! 나도 하고 싶어! …그렇지만 여기선 조금…. 내일, 내일 돌아가서…!”
  “알겠다.”
약속한 거야. 선뜻 물러나는 타낫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레하트는 반 박자 늦게 쏘아붙였다. 방금 놀렸던 거지? 아니, 진심이었다. 거짓말…. 시시덕대는 두 사람의 위에서는, 아네키우스가 눈을 감고 있었다.

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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