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기반 자캐썰
*수습 안 돼서 걍 드랍
아이는 곧 다섯 살, 다시 말해 이 생활도 대략 3년이 된다. 사내는 세상모르고 잠든 아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이에 걸맞게 포동포동한 뺨이 깨어있을 적보다 훨씬 따끈했다. 열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아이는, 어린애들이 원래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유난히도 열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가 부리는 어리광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어 늘 안고 다니는 덕택에 익숙해진 온기가 기꺼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온기가 그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많았다. 그는 기껏해야 네댓 살이나 먹은 아이한테, 아니,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고 해도 강행군일 수밖에 없는 생활을 강요하는 것이 미안했다. 그래서 사내는 문득 아이의 생일까지는 이 근처를 벗어나지 않는 게 어떨지 고민해 봤다. 아이의 생일은 꼬박 여드레 뒤였다. 평소에 비해선 꽤나 오랫동안 한 곳에 붙박이게 될 테고, 그것이 제게 어떤 불안을 야기할지도 짐작이 갔지만, 그래도 제법 견딜 만한 범주일 터였다. 그렇게 결론지은 그는 아이 곁에 누워 조그마한 등을 토닥거렸다. 아이는 조금도 웅얼대지 않고 색색대는 숨소리만 흘렸다.
아이는 사내가 처음 보았을 때도 그토록 양순했다. 사내는 그날을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그는 평소와 다르게 몹시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꿈 따위는 꾸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악몽에서 간신히 풀려났을 때와 비슷하게 전신을 감돌던 서늘한 감각이 아직도 생생했다. 분명 불쾌한 기분이긴 한데 막상 무엇 때문인지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예감에 사로잡혀, 꼭 어디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현관 앞에 놓인 그것을 맞닥뜨렸다. 처음에는 그저 희끄무레한 덩어리로만 보였던 그것은,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요람도 없이 강보에만 싸인 채 길바닥에 놓인 갓난애였다. 울거나 칭얼대는 일도 없이 곤히 잠에 빠진 그 아이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다시 발걸음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릴 수도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남들 입에서 웬 아이가 버려져 있었다느니, 안타깝게 되어 치웠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는 순간의 불편함만 잠시 견뎌내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얼굴을 들여다봤다. 깨달음은 불시에 찾아왔다.
단지 운 나쁘게 버려진 아이가 아니었다. 제 아이였다. 아이는 그와 똑같이 새카만 머리칼을 갖고 있었다. 사내는 알에서 깨어난 어린 새가 어미를 인지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을 역으로 겪는 듯싶었다. 그는 아이를 모르는 척 길에 내려놓는 대신, 그대로 품에 안아 집 안으로 데려갔다.
아이를 침대 위에 눕히고 불을 밝히는 사내의 등 뒤에서 울음소리, 무언가 가벼운 것이 바닥에 풀썩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가 깨어나 으앙으앙 울어대고 있었고, 아이 옆에 편지가 놓여 있었다. 누가 보낸 편지일지는 보지 않아도 대강 예상이 됐다. 사내는 서투른 손길로 간신히 재운 아이를 품에서 차마 내려놓지 못한 채, 한 손으로 어설프게 편지를 열었다.
편지는 그의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이를 낳은 이가 보냈고, 네가 싫어져서 아이도 책임지고 싶지 않게 됐으니 처분은 알아서 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혹여 놓친 말이 있을까 싶어 사내는 다시 한 번 편지를 천천히 읽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어미로부터 거부당했으리라는 사실은 짐작이 됐다. 아이는 무엇 하나 받지 못한 채 여기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사내는 당장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줬다.
“파이퍼.”
그가 얼마 전에 우연히 접한 이야기 속 인물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며 뺨을 톡톡 건드리자 아이는 그게 제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들은 양 자면서도 웃었다. 바로 그 순간에, 에단은 지금이 자신의 심상 중 가장 중요한 장면이 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제게 남겨진 모든 시간은 이 아이에게 얽힐 것임을 예감했다.
그날로부터 2년이 지나, 말문이 트인 날도 훌쩍 넘긴 파이퍼는 이제 곧잘 에단의 품을 찾아 달려드는 아이로 자라났다. 에단은 그런 아이를 안아드는 데 익숙해졌다. 파이퍼는 에단의 품에서 제가 아는 모든 단어를 늘어놓기라도 할 것처럼 쉴 새 없이 종알거렸지만, 단 하나의 단어만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에단이 일부러 그 말만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파이퍼는 에단을 이름에서 따온 애칭으로 불렀다.
“에디.”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는 에단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 애한테 아버지라고 불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파이퍼가 날이 갈수록 저를 낳아준 그 여자와는 전혀 다르게 자라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여자애니까 다 크면 어머니 쪽을 닮게 되려나, 하던 막연하고 불안했던 추측들은 모조리 무용해졌다. 파이퍼에게서 볼 수 있는 것들, 이를테면 새카만 머리칼과 짙은 보라색 눈동자, 그리고 드물게 웃음기를 지우면 금세 부루퉁해지는 인상 따위는 전부 에단의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그가 때때로 거울 너머로 마주치던 것들이었다. 에단은 그런 것들을 파이퍼에게서 다시 발견할 때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먹먹한 애틋함을 느끼고 말았다.
에단은 파이퍼가 어머니와는 조금도 닮지 않게 자라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이가 그녀를 닮아가는 순간, 그녀가 제게 저지른 것과 같이, 아이도 제게 불온한 끝을 선사할 것만 같았다. 그는 그렇게 고통스러운 순간을 두 번씩이나 견딜 자신이 없었다. 물론 에단은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잘 알았다. 다만 어떤 불안들은 허황한 몽상이라는 것을 알아도 잠재울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 에단은 불안에 시달리는 대신 아이에게 온 신경을 쏟았다. 올 때만큼이나 느닷없이 떠난 연인과 달리 평생토록 제 곁에 남아줄 아이를 분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저보다 여섯 살이 많았던 그녀와 다르게 저와는 스물다섯 해의 간극을 둔 아이, 풍성한 밤색 곱슬머리를 길게 풀어헤친 그녀와는 다르게 어깨에 닿을 정도의 검은 머리를 단정히 묶어둔 아이, 그리고…….
떠날 생각을 한 이유도 아마 거기 있었다. 그녀가 이 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이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자라며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적잖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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