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월 19일

번역/여름의 마왕 2020. 10. 17. 18:34

*출처: [각주:1]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07.19(토요일) 맑음.

여름방학까지는 비밀기지를 만들자고 소 군이 말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힘냈습니다.

그렇지만 곧 완성이었는데, 우리 앞에 적이 나타났습니다."

 

***[각주:2]

 

발단은 비밀기지에서였다.

그걸 세우자고 말하기 시작한 건 소타로(宗太郎) 군으로, 그는 이상할 만큼 열심히 우리를 졸라댔다.

  “꼭 필요해! 왜냐면 우리들은 특별하니까.”

  “특별한 게 왜 기지가 있는 건데.”

  “세상에 만연한 악과 싸우기 위해서지.”

  “헛소리야.”

모토나오(素直)가 언제나 그랬듯이 부정하고 봤지만, 소타로는 기죽지 않았다. 소타로는 스스로에게 도취하는 경향이 다분해서, 말을 하면 할수록 그 기세가 더욱 심해지다가, 뉴스나 만화 같은 데서 배운 어려운 단어들이 엄청난 빈도로 섞여들게 된다. 분명 말하고 있는 본인도 의미를 모를 거다. 소타로의 손짓이 커지는가 싶더니, 그가 등에 멘 책가방이 덜컹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세계의 환경파괴가 대단한 기세로 진행되고 있고, 오존층의 구멍으로부터 다크 매터가 흘러들어오고 있어. 그게 세계 파괴의 원인이 되는 거라고. 인간의 마음에도 그 소립자가 미묘한 영향을 끼쳐서 그렇게 차별을 낳는다고 하더라. 그걸 막기 위해선 한 사람 한 사람의 각오가 필요하대. 우리 같은 경우에는, 혼자서 백 명 분의 효과를 낼 수 있어. 이렇게, 잘만 하면 위에서 파앗―하고 빛이 내려와서 자….”

난데없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나름대로 정의감이 강한 것이다. 반면 나는, 내 입으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그럭저럭 분별력 있는 아이인 덕분에 소타로의 뜨거운 마음에 딱히 동조할 수 없었다.

  “아무튼, 만들자, 기지!”

  “그거야, 숨겨진 놀이터 같은 게 있으면 여러 모로 편하겠지만, 그래도.”

내 맞장구에 그가 금세 달라붙었다.

  “좋아, 결정, 결정! 여름방학까진 만들자. 안 그러면 의미 없어.”

  “야, 소타로. 멋대로 결정하지 마.”

  “뭐, 좋잖아. 재밌을 것 같은데.”

여태껏 잠자코 있던 신야(真哉)가 소타로의 편을 들어, 2대 2, 이 국면에서 내 승리는 없어졌다. 이 두 사람은 결정을 지으면 물러서지 않는 데에다가, 나 또한 비밀기지라는 말의 울림에 아무 것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눈앞의 두 사람과는 다르게 신중 파라서 시동이 늦게 걸리는 것뿐이었다. 결론을 지었다면, 그럭저럭 내키는 일이기는 하다. 이건 모토나오도 마찬가지로, 아까 부정하고 나섰던 것은 그의 버릇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다 만들 거야. 말을 꺼냈으면 정해둔 게 있겠지.”

모토나오의 물음에, 소타로가 거친 기세로 가슴을 펼쳤다.

  “물론 저기지.”

그는 뒤를 돌아 위쪽을 가리켰다. 나도, 신야도, 모토나오도, 그 앞에 뭐가 있을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일단은 그 방향을 올려다봤다.

거기에는 역시나 산이 있었다. 본디 산 속을 개척해 만들어진 이 마을 안에서도 가장 높은 곳,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 틈으로 낡은 콘크리트 건물이 여러 채 들어서 있는 게 보인다.

  “역시나 그런가.”

신야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모토나오가 반발했다.

  “저기다 기지를 만든 놈은 많고, 들켜서 쫓겨난 놈은 그 열 배도 넘을걸. 다른 장소에 두는 게 나을 것 같다만.”

거기에 더해 중고생들 중에서도 질 나쁜 집단의 아지트로써, 벽 한 면에 외설적인 낙서가 새겨졌거나 심지어는 방화를 당한 건물들도 있다. 게다가 휴일 전날 밤 같은 경우에는, 폭음과 요란한 불빛을 내는 오토바이가 산길을 오르는 일도 잦았다.

물론 신야도 그 사실을 알아서, 마음이 놓인 듯했던 얼굴이 모토나오의 지적에 도로 흐려졌다.

  “으, 응. 모톳치의 말도 일리는 있는 것 같아.”

신야는 단박에 입장을 바꿔 모토나오의 편을 들었다. 그러자 소타로가 불끈한 어조로 반박했다.

  “그까짓 것들을 두려워했다간 천년왕국의 창립이 요원해진다, 그렇다! 여름방학 전에 미리 준비해두고, 시기가 도래했을 때 즉시 그 힘의 연구에 들어가지 않으면 세계에 큰일이 일어나니까! 염려 따윈 필요 없어!”

  “알았어, 알았어. 찾아낸 곳이 정확히 어디야? 그놈들에게 발견되지 않을 것 같아?”

소타로의 발언이 더욱 지리멸렬해진 탓에, 나는 달래는 역할을 맡았다. 조금 전의 대사를 단번에 토해낸 소타로는 숨을 고르느라 바쁜 모양이었지만, 내 질문에는 만족하는 듯싶은 표정을 지었다.

  “괜찮다. 왜냐면 그 녀석들 주간에는 안 오잖나. 밤이 되면 무척 찾기 힘든 장소다. 지금까지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을 테고.”

진정한 소타로의 말투는 극히 정상적인 것이 된다. 우리 세 사람은 눈짓을 주고받고, 우선은 소타로의 계획을 얼추 들어보기로 했다.

비밀기지의 규모는 얼마나 되나. 무엇이 필요한가. 어떻게 필요한 것들을 입수할 것인가. 만드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결국 구체적인 장소는 어디인가.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만은, 우리들이 직접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며 소타로는 끝내 대답하려 들지 않았다. 놀랄 만한 장소일까, 우리 세 사람은 미심쩍게 생각했다. 다만, 저만큼이나 거드름을 피우면 역시 보고 싶어 못 배기게 되는 것도 당연지사다.

결국, 나는 한 수 접기로 했다.

  “알았어. 소 군이 말한 그 장소를 보고 결정하자. 모토 군도 그걸로 됐지, 신 군도.”

  “뭐, 좋아.”

  “이의 없음.”

모토나오가 수긍하면, 3대 1로서까지 신야가 반대할 리도 없다.

  “그럼, 내일 안내할 테니까, 학교 끝나자마자 집합. 알겠지.”

  “점심은 어쩌고.”

  “그건, 그럼 광속으로 먹고 집합.”

  “오케이―.”

우리는 공범자의 눈빛을 나누며, 그날은 그대로 헤어졌다. 여러 가지로 걱정되는 점이 많지만, 사실 나도 비밀 기지는 만들고 싶었고, 소타로가 어떤 곳을 찾아냈을지 상상하는 게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즐거웠다. 열기가 치솟는 아스팔트를 깡충거리듯 달리면서, 내일은 무엇을 가져갈지 머릿속으로 여러 번 생각했다.

그 발걸음이 늦춰진 것은, 모퉁이를 돌아 언덕 아래 집의 지붕이 보일 즈음이었다. 우리 집 벽은 칙칙한 물빛을 띈 함석이라, 주위 집들과는 살짝 동떨어진 느낌이 들기에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약간 흐린 날씨 속에서 그 모습은 평소보다 초라하고, 따분하게 보였다. 나는 발길을 돌려 저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진 뒤에나 집에 돌아갈지도 생각해봤으나, 집 앞에 있는 작은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그런 계획도 관두기로 했다.

그녀는 자줏빛으로 물든 구름 커튼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뭐야?”

내가 말을 걸자 니나는 황망히 고개를 숙인다. 그 순간 니나의 눈가에 어렴풋이 눈물이 글썽이는 걸 본 것 같아서, 나는 니나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무 것도 아냐. 별님 보고 있었어.”

니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말했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들게 만들지 않고, 대신에 아까까지 니나가 보낸 시선을 좇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서서히 남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더운 여름 공기 뒤로 깜빡이는 별들이 거기에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 새인가 니나도 나와 나란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나의 작은 손의 온기가 내 손가락을 감쌌다. 조심히 살펴봤더니, 금세 말랐는지 눈가에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있으니 하늘의 주황이 완전히 사라지고, 잿빛 구름도 어둠에 삼켜졌다. 언덕 위에서부터 가로등이 차례로 반짝 불이 들어와, 조금씩 이쪽으로 다가온다. 비 냄새를 살짝 머금은 바람이 나와 니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하늘에서 집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그 칙칙한 물빛은 알 수 없다.

  “자, 집에 가자. 같이 들어갈 테니까.”

  “응.”

니나를 재촉하자, 선뜻 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한다. 현관의 새시[각주:3] 문은 상태가 나빠서,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고서는 여닫을 수가 없다. 나와 니나는 거실에서 흘러나오는 TV 소리를 들으며 신발을 벗었다.

  “다녀왔습니다.”

니나가 집 안으로 던지는 그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내가 들어가서 거실을 들여다보니, 역시 여느 때처럼 어머니가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 기척을 눈치챘을 텐데도, 눈을 이쪽으로 돌리는 일 없이 그저 앉아만 있다.

나도 개의치 않고 부엌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비닐 봉투를 챙겨, 니나를 데리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안에 도시락이 들어 있을 터였다. 오늘은 잊지 않은 모양이다. 돈이 들어있는 날도 있어서, 그런 경우에는 최대한 값싼 것을 사서 해결했다. 아무 것도 두지 않은 날을 위해 모아두는 편이 좋기도 하고, 용돈도 된다.

나랑 니나는 불도 켜지 않은 채 2층 창문에서 밖을 내다봤다. 여기서 함석 벽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곤 하늘과 별과 집들과 저 우뚝 솟은 산뿐이다.

그리고 전차.

우리 집 앞 언덕을 다 내려간 곳에 선로가 가로놓여 있다. 밖에서 건널목의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면, 나는 창문에서 몸을 내밀고 지나가는 전차의 불빛을 쳐다보고는 했다.

  “오빠. 저 건너편엔 뭐가 있을까.”

창문을 열고, 니나는 팔을 뻗어 산 쪽을 가리켰다. 나도 창문에서 반쯤 몸을 내민 채, 니나의 귀에 입을 대고 굉장한 비밀을 속삭였다.

  “바다가 있지.”

  “그, 커다란, 바다?”

  “그래, 그래. 언젠가 같이 가자.”

내 말에 니나가 눈을 반짝였다.

  “정말? 약속할 거야?”

  “응, 할게.”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저 전차를 타고 산을 넘어 바다로 나갈 거라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나간 적이 거의 없고, 그래서 바다를 본 적도 물론 없지만, 그건 내 안에서 정해져 있던 일이었다.

  “그럼 약속.”

나와 니나는 서로 새끼손가락을 걸고서, 미소 지었다.

 

다음날 만남의 장소는 교문 앞이었다.

내가 빠듯하게 도착했을 때, 벌써 와 있던 모토나오는 늘 손에서 빼지 않는 손목시계를 똑똑 두드려 보였다.

  “역시 1등은 히로키인가.”

  “소 군이랑 신 군은…….”

  “신야는 언제나랑 같잖아. 소타로가 안 오는 건 의외지만.”

소타로도 나처럼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쪽이지만, 이번에는 길 건너편에서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님께 잡혀있는 걸까.”

  “그럴지도.”

소타로의 모친은 평소에는 상냥하고 온화한 분이시지만, 무심코 말려들면 터무니없이 끈질기게 된다. 우리도 한 번 놀러갔을 때 그런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다. 현관 앞에서 건넨 우리의 권유에 승낙한 소타로가, 친구와 함께 밖에서 놀다 오겠다고 어머니에게 말을 건 순간, 그 일이 일어났다.

  “잠깐, 뭔데!?”

그녀가 느닷없이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소타로에게 호통을 친다.

  “오늘은 숙제하느라 바쁘다고 말했었잖아! 그런데, 왜 나가!?”

그것은 아까 맞이한 사람과는 다른 인물이 아닌가, 라고 생각될 만큼 혼란스러운 태도라서, 놀란 우리는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서 쭉 서 있었다. 소타로는 어머니와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미안, 먼저 가 있어. 따라가면 쫓아올 테니까.”라고 우리한테 속삭이고, 문 밖으로 밀어냈다. 닫힌 철문 너머로 유리를 긁는 것 같은 고성이 들려왔다. 그날, 소타로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건 옛날에 어머니가 고추를 실수로 많이 먹어서 생긴 저주야, 라고 소타로가 후일 전해왔다. 저주는 그러다 풀릴 테니까 걱정 마, 라며 그는 계속 웃었다. 그래서 우리도 같이 웃고, 웃다가, 그렇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지만 괜히 모든 게 이상해져 배가 아파 속이 울렁거릴 때까지 웃었다.

그렇지만 아직 그녀의 저주가 풀리지 않았는지, 이따금 소타로는 크게 지각하고는 한다. 평소 같으면 그냥 먼저 모인 사람들끼리 그날의 목적지로 이동해버리지만, 오늘은 소타로가 없으면 안 되기에 곤란해졌다.

나랑 모토나오는 교문 옆에 기대 신야와 소타로를 기다렸다. 동아리 활동을 하러 온 학생들이 우리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약속 시간이 10분쯤 지났을 때, 모토나오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시간이 아깝잖아……. 나, 역 앞 서점에 가 있을 테니까, 모이면 부르러 와.”

  “알았어.”

모토나오가 손을 흔들며 떠나자, 나는 별 수 없이 혼자서 교문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앞으로 5분 정도면 신야가 와 주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내 앞에 불쑥 나타난 사람은 신야도 소타로도 아니었다.

  “여어, 히로키 쨩이네.”

내 앞에 죽 늘어선 이들은 셋이나 됐다. 그 중 두 명은 본 적 있다. 히죽히죽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언제 봐도 불쾌한 눈빛들이었다.

  “뭐야, 이 녀석 뭘까?”

새로운 얼굴이 한 발 물러선 채로 동료들을 돌아본다. 그를 향해, 나머지 두 사람이 각자 설명을 시작했다.

  “이봐, 시치미냐? 한 학년 아래의 괴짜 놈들.”

  “들어봤잖아, 너도.”

그것만으로, 그도 납득한 모양이다. 금세 히죽대는 웃음이 그의 얼굴에도 퍼져갔다.

  “아아, 그건가. 흠, 이 녀석이.”

  “히로키 쨩, 다른 놈들하고 집합?”

나는 물론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 숙인 채 땅을 쳐다보며, 그들이 물러나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이 5학년 그룹은 악질이다. 섣불리 대답했다간, 금세 손을 댈 핑계로 삼을 게 빤했다. 잠자코 있으면 떠나줄 놈들도 아니지만, 둘러싸인 채로는 도망치기에도 좋지 않다. 견딜 수밖에 없다.

  “여보세―요, 안 들리나요?”

  “듣던 대로 건방져, 얘.”

  “야, 딱 좋잖아. 확실히 해두자.”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다. 대화의 흐름이 명백히 불온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해,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망연자실한 내 얼굴을 본 놈들은 히죽대는 웃음이 더욱 심해져서, 옛날 읽었던 그림책에나 나오는 귀신처럼 변해 있었다. 황망히 다시 고개를 숙이고 달아날 틈이 없을까 하며 그들의 발치로 시선을 돌렸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 따위 저들에게 진즉 들킨 모양이었다. 내가 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멱살을 틀어 잡히며 움직임을 봉쇄당했다.

  “잠깐, 안 되지, 히로키 쨩.”

억지로 꾸며낸 듯싶은 섬뜩하게 간드러진 목소리에, 내 발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다음 일을 각오한 순간, 구원의 손길이 뻗쳐왔다.

  “히로키, 기다렸지.”

그 대사와 함께, 인간 울타리 너머로 크고 작은 그림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 중 큰 쪽이 서슴없이 다가와 나를 들여다봤다. 소타로는 5학년보다 머리 반쯤 컸다.

  “혼자?”

  “아, 모, 모토 군은 역 앞 서점에…….”

내가 간신히 그렇게 말하자, 소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늦어서 미안.”

그러고는 반 강제로 내 손을 잡아 5학년들 사이에서 나를 끌어냈다. 소타로의 체격 덕분에 그들도 즉각 반응하지 못한 것 같았다. 소타로의 손에 이끌려 막 떠나려는 참에서야, 시끄럽게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멋지네, 하나자키 군?”

  “우리 같은 건 안 보이나?”

  “상대 하지 마. 가자.”

소타로는 이런 경우에 있어선 매우 냉정하고 온건한 태도를 취한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도발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나의 구겨진 옷매무새를 고쳐주며, 신야에게도 여기서 떠나자고 재촉했다.

  “무시하기냐, 역시 ‘결함 가정’의 하나자키 군.”

그 순간 5학년의 입에서 그 말이 나직이 흘러나오는 것을, 나는 듣고 말았다. 소타로는 약간 입꼬리를 씰룩였을 뿐, 그 이상의 반응을 하지 않았다. 즉시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뒤에서 불쾌한 듯이 상급생을 노려보던 신야 쪽이었다.

  “뭐라고, 이……!”

달아올라 때리려고 나선 그의 목덜미를 잡고 붙든 것이 소타로였고, 나 역시 가세해 신야의 팔을 붙들었다. 5학년 무리는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며 히죽댈 따름이었다.

  “그만둬, 신야. 됐으니까 상대하지 마.”

  “무리잖아.”

우리 또래에는 1년만으로도 체격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데다가, 저들은 특히 난폭한 그룹이다. 애초부터 작은 신야가 덤벼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소타로라고 해도 싸움에 강한 편은 아니고, 세 사람 상대로는 무리다. 물론 신야도 그걸 알고 있어, 우리들의 저지로 머리가 식자 고개 숙인 채로 얌전해졌다.

  “어이, 안 하는 거냐. 상대해줄 텐데.”

5학년들은 도발을 하다가, 우리가 어울려주지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얼간이처럼 침을 뱉으며 손가락을 세워 보인다. 나와 소타로는 신야의 어깨를 붙들고 어떻게든 돌아서, 5학년들을 떠나기로 했다.

  “도망입니까, 도련님들은.”

  “전부 고추도 안 달렸지, 너희들.”

바보 같은 웃음이 등 뒤에서 쏟아졌다.

나는 신야의 어깨를 감싼 채 역 앞으로 이어지는 길을 달렸다. 소타로가 뒤따랐다.

  “젠장, 지금이 방학이면 저런 놈들은 일격인데. 젠장…….”

고개를 숙인 채 쥐어짜낸 신야의 목소리는 분함에 떨리고 있었다. 나와 소타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신야 옆에서 달렸다. 신야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만,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신야 스스로도 알고 있다. 비록 당장은 그들을 해치울 수 있다고 해도, 여름 방학은 언젠가 끝나는 거니까. 1년 열두 달 중에, 겨우 한 달 반.

  “자, 서두르자. 모토가 기다린다. 그러면, 비밀기지다!”

소타로가 뭔가를 털어내듯이 외쳤다. 우리는 이제 완연히 여름빛이 된 하늘 아래서, 한층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했다.

 

산에 들어서자, 벌써 매미가 울기 시작한 중이었다. 나와 신야는 배낭을 짊어지고 슈퍼의 봉투를 든 채, 산길에 오른다. 종업식이 끝난 뒤는, 아직 태양이 높아서 덥다.

  “여기랬지?”

  “……아마.”

돌아보며 확인하는 신야를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 사이로 낡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보였다. 이 길을 지나는 건 이번으로 다섯 번째인데, 아무래도 특징 없는 풍경 때문에 이 길이 맞다고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뭐냐고, 소 그 녀석. 오늘은 중요한 날인데 제대로 협의도 않고 급하게 돌아갔어. 그렇게나 급했나?”

신야가 투덜대며 머리 뒤로 팔짱을 꼈다. 그의 뒤에서 흔들리는 하얀 비닐에 든 콜라병이 파란 빛을 비쳤다.

나는 그를 뒤따르면서, 그날, 소타로가 우리를 안내했을 적의 일을 떠올렸다. 서점에서 순조롭게 합류한 우리들은, 5학년 녀석들이 따라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산으로 향했다.

  “어제 한 말 거짓말 아니지?

모토나오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서, 앞서 가는 소타로의 등에 대고 그렇게 말을 걸었다.

  “어, 뭐가?”

  “찾기 힘들고, 그래도 가기 힘든 곳은 아니고, 대단한 장소라던 거.”

걸으며 돌아보는 소타로를 향해, 모토나오가 언짢은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설마, 그것까지 항상 있던 허풍 같은 건 아니겠지.”

  “뭐, 보면 알아. 정의라는 게 넘치고 있으니까.”

소타로는 그의 의심을 단박에 흘려 넘기며 쭉쭉 산길을 올랐다. 모토나오는 나를 보며 노골적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안경을 쓱 밀어 올렸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주면 좋을지 몰라 곤란하게 웃어넘겼다. 그리고 10분쯤 지나서,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기다, 저기.”

소타로가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갈색 비탈을 가리키며 길에서 벗어났다. 우리도 따라서 풀숲으로 발을 들였지만, 어젯밤 내린 비 덕분에 땅이 질척여 걷기 힘들었다. 자연스레 소타로가 밟은 길을 뒤따라가는 형태가 된다. 나는 제일 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타로가 멈춰 섰다. 바로 뒤에 있던 신야가 오, 하고 작게 감탄했다. 나는 앞선 세 사람의 등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옆으로 한 걸음 빗겨갔다. 밟는 자리마다 물이 신발로 스며드는 감각이 전해졌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그것을 잊게 만들었다.

어두운 구덩이가 우리 앞에 뻥 뚫려 있었다. 입구가 나무틀로 짜여있는 게 분명 사람의 손길이 닿은 물건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게 무슨 흔적인지 당연하게 알고 있었다.

  “광산 터인가….”

이 동네는 이 광산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북쪽 산에 갖가지 폐허가 된 채 썩어가는 콘크리트 건물은 광부와 그 가족들의 거처였고, 산 아래의 거리는 그들을 상대로 하는 상가로 캐낸 광물의 운반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광부라고 하면 비참한 생활을 했을 것 같아도, 주거 시설은 당시의 최신식으로써 그땐 상당히 부유했다는 것 같다. 우리 조부모님 대의 이야기다.

물론 우리들은 그 시기의 얘기를 극히 단편적으로 들었을 뿐, 이 거리가 떠들썩했을 적의 일은 알지 못해서 실감도 나지 않았다. 우리에게 있어 이곳은 단지 쇠락해 갈 뿐인 시골 마을이었다.

  “역시 히어로의 기지는 산속에 있어야지.”

혼자서 납득한 소타로가 짊어진 배낭에서 손전등을 두 개 꺼냈다. 그리고는 한 자루를 모토나오에게 건넨다. 모토나오는 싫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받아들었다.

  “미로가 됐거나 하진 않겠지.”

  “좀 나눠져 있지만.”

  “소, 굉장하다, 굉장해!”

모토나오가 불평하고, 소타로가 흘려듣고, 신야가 감탄한다. 나는 멍하니 그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 쌓인 시커먼 어둠이 서서히 이쪽으로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속마음을 말하자면, 그다지 이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찰칵 하는 소리가 나더니, 소타로의 손전등이 어둠을 흩어 버렸다.

  “좋아, 가자. 나랑 떨어지지 마.”

소타로를 선두로, 신야가 뒤따르고, 나를 사이에 둔 채 후방에 모토나오가 또 하나의 손전등을 갖고서 돌입했다.

갱도 안은 눅눅한 냄새가 들이차 있었다. 어제 밤늦게 내린 비 때문이겠지. 길이 안쪽으로 향하면서 완만한 오르막길을 이룬 덕분인지, 바깥과는 달리 발밑이 젖지 않는 것만은 고마웠다.

  “근데, 이런 곳은 독가스라든가 나오지 않으려나. 위험한데.”

모토나오의 소곤대는 소리가 갱도 안에서 울렸다.

  “나, 몇 번이나 왔었거든. 대체로, 독가스가 나올 만한 구멍이 열려 있을 리는 없잖아.”

  “뭐, 그것도 그런가.”

그 순간, 갑자기 신야가 멈췄다. 나도 부딪칠 것 같아 서둘러 멈춘다.

  “이야!”

뭘 하나 했더니, 신야가 난데없이 그렇게 외친다. 물론, 소곤대는 소리조차 크게 울리는 상황이라, 신야의 고함은 곳곳에 반사돼 쩌렁쩌렁 울리며 멀리 퍼졌다. 거기다 대고, 모토나오가 가시 돋친 소리를 수군거렸다.

  “신야, 시끄러워.”

  “왜애, 대단한데, 이거!”

신야는 목소리를 낮추려 들지 않았다. 시끄러워서 나는 견디지 못하고 귀를 막았다.

  “너, 작작 좀 해!”

모토나오가 금세 험악한 기색을 띄우자, 끼어든 것은 소타로였다. 그가 돌아서서 신야의 귀에 대고 말했다.

  “안 되지, 여긴 비밀기지잖아, 신야. 비밀이라고. 적에게 들키면 어쩌게.”

  “봐, 히로키가 귀를 막고 있잖아. 너는 언제나, 언제나.”

이어서 모토나오가 마구 퍼붓는다. 그제야 신야는 너무 들떴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곧 그의 얼굴은 시무룩해지고,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 나는, 좀 신나서……, 미안. 미안해, 미안.”

나는 서둘러 귀에서 손을 뗐지만, 신야의 안색은 손전등 불빛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점점 파랗게 질리고 있었다. 소타로는 그런 신야의 어깨에 손을 얹고, 상냥한 목소리로 다시금 속삭였다.

  “오케이, 오케이. 다음부터는 조심하면 될 일이야. 걱정 마라, 걱정 마. 미국인들도 옛 속담에서 그렇게 말하잖나. 자, 모토, 히로키.”

  “미국인은 둘째 치고, 별로 화내지 않았어.”

  “응, 화낼 일이 아니니까.”

모토나오와 내가 맞장구를 쳐주자 신야의 안색도 조금쯤은 돌아온 것 같았다. 그렇게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고, 잠자코 있던 그도 5분 정도 지나자 도로 작은 소리로 너스레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도 안심하고 그의 뒤를 걸었다. 감정 기복이 심한 신야는 너무 자주 저래서, 고립되는 경우도 많았다. 화를 낼 때나 장난을 칠 때나, 머리에 피가 솟으면 아무래도 멈출 수 없는 듯했다. 만약 조금만 더 주위의 분위기를 살필 수 있었다면, 그는 결코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았을 거다.

  “자, 도착이다.”

내가 그런 걸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까지 온 모양이었다. 소타로가 그렇게 선언하며 손전등을 벽에서 천장까지 한 바퀴 휙 돌렸다.

그곳은 스무 명 정도는 너끈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무틀로 강화된 천장은 중앙이 뾰족하게 파여 있어서 꼭 새장처럼 생겼다. 이곳의 출입구는 다 해서 세 개인 것 같았지만, 그 중 하나는 토사에 파묻힌 채라서 도무지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흐음. 뭐, 기지로 삼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모토나오가 들고 있는 손전등으로 주위를 비추며 감상을 말했다.

  “여기, 불빛은 어쩌고.”

  “전기스탠드라거나…아. 콘센트가 없지.”

  “손전등으로 어떻게든 한다?”

우리는 저마다 트집을 잡으면서도, 내심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조금 어두운 편이 은밀한 분위기에 맞는다, 라는 걸 암묵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정의의 비밀기지라기보다는, 범죄자의 아지트 같은 분위기가 나버리는 것이었는데. 하지만 소타로의 잔꾀는 그런 점마저 짚고 있었다.

  “후후후.”

그는 겁도 없이 웃더니, 땅에 가만히 내려놓은 배낭 안으로 양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부스럭부스럭, 그 입을 벌려서는, 천천히 둥근 것을 끄집어낸다. 그의 머리 위로 들어 올린 그것은 손전등의 희미한 불빛에 의해 간간히 깜빡였다.

  “후후후, 스위치 온!”

그렇게 소타로가 머리 위에 든 그것을 작동시켰다. 곧 하늘색 불빛이 주위를 채운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건대 그건 침실에 놓이는 종류의 무드 등이었겠지만, 당시의 우리로서는, 정의의 아군 기지에 있는 작전기획실 한가운데서 의미 없이 빛나는 둥근 조형물로만 보였다. 오오, 하고 우리 셋이 크게 함성을 터트렸다. 그러자 소타로가 가슴을 폈다.

  “정의로워 보이지?”

  “대단하다, 대단해!”

흥분한 신야는 팔을 붕붕 휘저으며 외쳤다. 소타로가 그의 입가에 살짝 손바닥을 갖다 대자, 그는 낯빛을 바꿔 즉시 목소리를 낮추고서 소곤거렸다.

  “진짜, 정의의 편 같아, 이거!”

  “나는 이곳을 작전실로 삼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거친 콧김과 함께 소타로가 선언했다. 우리에게 이의는 없었다. 신야가 먼저 박수를 치고, 모토나오와 나도 덩달아 작게 손뼉을 쳤다.

  “여기가 작전실이라는 건, 혹시 더 있는 거야?”

  “모게모게 님의 예언은 틀림없지 않습니까―”

차츰 소타로가 묘한 방향으로 흥을 돋우고 있다. 모게모게 님이라는 건 분명 상상일 터다. 곧 늘 늘어놓던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겠지.

그렇게 다시 앞서 걷기 시작한 소타로를 우리가 따라갔다. 작전실에서 또 다른 출입문을 지나, 두 번쯤 길을 꺾자, 앞에 보이는 것은 빛이었다.

  “어라. 출구잖아.”

신야가 느닷없이 괴성을 지르자, 앞을 비추던 라이트의 불빛이 잘게 흔들렸다. 어쩐지 소타로가 또 낄낄거리는 모양이었다.

  “이번엔 뭐야, 소.”

  “보면 재밌을걸. 재밌어.”

소타로가 거들먹거려서, 자연히 마음이 설렌 우리들의 걸음도 빨라진다. 마침내 빛에 닿은 내가 본 것은 출구였다. 신야가 말한 대로 틀림없는 출구에 불과했다.

다만, 내 눈앞에 창문이 있었다. 창문은 활짝 열린 채였고, 노란 커튼에 바람에 펄럭였다.

  “저기가 본부다.”

말하자마자, 소타로의 몸이 공중에서 춤추듯이 날아간다. 그의 몸은 위태로울 것도 없이, 창문을 통과해 주거지 바닥에 착지했다. 분명 실패할 만한 거리는 아니지만, 문득 아래를 보면 거기가 4층이라는 걸 알 수 있고, 실패해선 안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딱히 그런 생각을 깊이 하지 않는 신야가 뒤를 잇는다. 물론 그도 시원스레 성공한 덕에, 나와 모토나오가 어느 쪽이랄 것도 없이 얼굴을 마주했다.

  “야아, 너희도 빨리 와!”

몹시 기쁜 얼굴을 한 신야가 양팔을 교차하듯이 크게 흔들었다. 이럴 때면 그의 긍정적임이 너무 부럽다.

  “히로키, 먼저 가. 만약 실패하면 잡아줄 테니까.”

모토나오가 착지 지점을 응시하며 조용히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망설였지만, 각오를 다지고 조금 뒤로 물러섰다가, 가뿐하게 도움닫기를 하며 도약했다. 맥 빠질 정도로 간단하게 성공이었다.

내가 자리를 벗어나자 곧장 모토나오가 창문으로 날아든다.

  “어서 와라, 본부에!”

소타로가 과장된 몸짓으로 나와 모토나오에게 인사했다.

여기는 아무래도 원래는 단지(團地)의 집회실이나 놀이실이었던 것 같았다. 벽에 붙은 형형색색의 종이 장식들이 벗겨져 축 늘어진 채였다. 우리들이 밟지 않는 구석으로는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다.

  “잠입하는 놈들도 3층 정도로 만족한다는 모양이다. 여기, 잠겨 있고, 제일 안쪽 건물이니.”

흡족한 소타로가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해설을 해온다. 거기에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저분해지긴 했어도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밝고 넓은 방에다,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갱도의 방, 그 두 가지에 우리가 만족했기 때문이었다.

곧, 우리들은 구체적으로 이 비밀기지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의 회의로 옮겨갔다.

  “그럼 어디에 어떤 물건을 둘지 정하자.”

  “역시 테이블은 있어야겠지.”

  “누울 수 있어야 의미가 있어.”

  “그리고 작전실 문을 닫지 않으면 비밀 이야기는 못 해.”

각자 바라는 것을 말하고, 각자 방 안을 돌아다닌다. 모두의 가슴이 스스로 마음에 그리는 이상의 비밀 기지로 가득 차올랐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라서, 창가를 거닐며 내 소지품에 대해 짚어보고, 여기에 가져오려면 뭐가 좋을지 머릿속으로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니, 문득 옆을 보지 않았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뭔가 빛나고 있어.”

창밖, 동네 너머 저 멀리, 산줄기 사이로 반짝반짝 빛나는 게 보였다. 내 뒤에 온 소타로가 내 시선을 따라가며 말했다.

  “헤에. 바다인가.”

그러고는, 흥미를 잃은 듯 신야와 모토나오 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거기서 떨어지지 않고, 잠시 그것을 바라봤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푸르지 않고, 그저 드문드문 햇빛을 반사할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의 비밀기지 조성 스타트다.

우리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비밀기지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가지고 모였다. 신야 같은 경우에는 자기 방을 옮길 기세로 가져왔기 때문에, 대부분은 기각당해 도로 가져가는 경우도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은 하는 수 없이 가는 것을 포기하고, 비를 원망했다. 작전실에 비가 흘러들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여름방학을 손꼽아 기다렸을 시간이, 이때만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이 드디어 종업식이자, 비밀기지 완성기념일인 것이다.

  “모톳치도 만나기로 한 장소에 없고, 앞으로가 불안해, 진짜―.”

하지만 그런 경사스러운 날인데도, 발맞추지 못하고 나와 신야 둘이서 산을 올랐다.

  “모토 군은 먼저 간 거 아닐까. 봐, 늦었으니까 언제나처럼.”

  “오늘만큼은 기다려도 되―잖아―.”

신야는 아까부터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로서는 풀이 죽었을 것이다. 그가 든 비닐봉지 안에는 콜라 페트병 두 개와 종이컵이 담겨 있다. 일단 이걸로 건배하는 거야, 라고 약속 장소에서 내게 웃으며 보여줬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기분은 알 것 같았다.

  “어, 입구는, 헉.”

길이 맞았던 모양이다. 우리는 각자 손전등을 들고 들어섰다. 작전실에 불은 들어와 있지 않았으므로, 누군가 있다면 본부 쪽에 있는 게 됐다. 신야가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부르면서, 쭉쭉 본부로 향하는 통로를 나아갔다. 마침내 본부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창 너머로 몇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모토나오나 소타로는 먼저 도착한 듯했다.

본부의 입구인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밑에는 판자로 만든 간이 다리가 대롱대롱 달려있다. 며칠 전, 역시 점프만으로는 드나들기 어렵다는 결론에 닿아 다 같이 만든 것이었다. 다만, 시간이 부족해서 아직은 본부에서만 세울 수 있다.

신야는 그걸 보고,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되돌아봤다.

  “어, 히로키, 이제 쓸 수 있잖아, 그거.”

  “어떨까.”

  “해봐.”

신야의 부추김에 나는 시험해 보기로 했다.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부채질하듯이 다리를 들썩여 본다. 그러자 한 쪽만 매달려 있던 나무다리가 기우뚱하더니, 이윽고 땅과 평형으로 떠올랐다.

신야가 탄성을 지르며 그 다리를 건넜다. 잠시 다리가 휘었으나, 그 이상 흔들리지는 않았다.

도착한 우리를 소타로가 맞이했다.

  “다리를 잘 쓴 모양이지.”

  “저건 풀어놓는 게 좋을까?”

  “됐어, 됐어. 돌아갈 때나.”

  “그런데 오늘은 왜 서둘렀어?”

문득 내가 그렇게 묻자, 소타로의 시선이 흔들렸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아보고 납득했다.

하지만 신야는 나와 소타로의 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짐을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고서 모토나오 쪽으로 달려갔다.

  “모톳치, 나도 잘 왔지?”

과장된 몸짓으로 한 바퀴 돌고는, 신야는 모토나오에게 재촉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모토나오가 안경 너머로 그의 얼굴을 흘끗 보더니 툭 내뱉듯이 대답했다.

  “응, 왔어, 왔네. 이젠 하늘도 날겠네.”

  “좋아, 즐거운 계절 시작이다!”

신야는 깡충깡충 뛰고 빙글빙글 돌다가, 마지막에 포즈를 취하며 멈춰 섰다. 그러고 나서야 구석에서 스케치북을 여는 소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신야가 입을 크게 벌렸다.

  “……어째서 치코가 있어?”

  “불만?”

치코(千衣子)가 스케치북을 덮으며 되받아쳤다. 어깨 위로 가지런히 정돈된 차분한 머리가, 그녀의 동작에 맞추어 너풀거렸다.

  “소 쨩이 알려줬는데.”

신야의 확인하는 시선에 소타로가 긍정해 보였다. 그래도 신야는 납득하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여자는, 응?”

그는 동의를 구하듯이 우리를 둘러봤다. 모토나오는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고, 나는 아마 곤란한 얼굴을 했을 거다.

  “……니나 쨩도 있잖아.”

그리고 치코가 반론한 부분은, 내게 있어선 충격적이었다. 허둥지둥 돌아보니 언제 따라왔는지, 니나가 내 뒤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내 경악하는 표정을 보자마자 얼굴이 흐려진 니나는 변명을 했다.

  “왜냐면 오빠, 놀아주지 않고.”

확실히 요즘은 니나를 내버려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장 여기로 와서는 밤이 될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았으니, 내가 어디에 갔는지 의심스러워해도 별 도리가 없다. 어쨌거나 나는 니나의 출현에 곤란해지고 말았다. 여름방학 내내 니나를 내버려두고 여기 놀러올 수는 없고, 그렇다고 니나를 여기 끼워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신야도 납득하지 않을 거다.

당황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 나를 구한 것은 늘 그렇듯 소타로였다.

  “뭐, 뭐. 치이도 친구잖아. 난 괜찮다고 생각해서 데려왔는데. 오는 건 막지 않는 걸로 되지 않나, 음?”

  “소가 말한 대로라면 상관없지만.”

신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입을 샐쭉 내민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렇게 치코 쪽으로 돌아서더니 가슴을 펼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올 거면 스커트는 관둬. 그러다 넘어지면 팬티 보이잖아. 징그러.”

  “냅둬!”

신야만 물러서면 다른 문제는 없다. 이렇게 니나의 출입 문제도 유야무야 허용된 분위기다. 소타로가 내 쪽을 보며 걱정 말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줬다. 들리지 않도록 가슴 깊이 한숨을 내쉬고, 나는 니나를 을렀다.

  “알겠지, 얌전히 있어야 돼. 모두에게 폐를 끼치면 다시는 못 와.”

  “알았어, 오빠.”

니나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치코를 향한 신야의 장난은 계속 됐다. 치코는 평소라면 얌전하고 한 발 물러나는 태도를 견지하는 여자애인데, 아무래도 신야와는 파멸적으로 궁합이 나쁜지 이런 말다툼이 벌어진다.

  “점 쳐줄게.”

치코가 신야를 노려보며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다시 열었다. 거기에는 네, 아니오의 선택지와 오십음도, 그리고 토리이鳥居[각주:4]가 그려져 있었다.

  “거기서 나쁜 결과가 나오면 실컷 웃어줄 거야.”

금세 신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황급히 모토나오를 돌아봤지만, 모토나오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안경을 쓱 올리는 몸짓으로 화답할 뿐이었다.

  “신야만 와 있는 것도 아니잖아.”

다음에 소타로를 봐도 쓴웃음을 지을 뿐이고, 나를 봐도 도울 수 있을 리가 없다.

  “흥, 나야 분명 좋은 결과가 나오겠지―.”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신야는 드디어 태도를 바꾸기로 한 모양이었다. 양손을 허리에 얹은 채로 가슴을 펴고서, 차근차근 준비해나가는 치코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치코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 그래. 기대해 주세요.”

쌀쌀맞게 내뱉고는 가볍게 쥔 볼펜을 스케치북에 내려놓으려고 한다. 그 때였다.

  “흐응, 재밌는 걸 찾았잖아.”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가 본부에 울렸다. 그 목소리를 돌아본 우리들은, 걸어진 채인 다리를 통해 차례로 넘어오는 침입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다리를 풀어버릴까 생각했다가, 그랬다간 건너오는 사람들이 떨어질까 봐 망설였다. 결국은 다리를 풀기도 전에, 5학년 그룹 다섯 명이 본부로 침입하고 말았다.

  “산으로 뛰어가는 게 뭣 때문인가 했더니.”

  “왕따 녀석, 이런 덴 눈치가 없다니까.”

  “노래까지 부르고, 굉장히 기분 좋았나 보지, 으응.”

그때와 같이 히죽대는 삼인방이 선두였다. 미행당한 것을 깨달은 신야의 얼굴이 금세 시퍼렇게 질렸다가, 곧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좋을지,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듯했다.

삼인방의 뒤에는 소타로보다 키가 큰 남자가 있었는데, 그 역시 흥미롭다는 듯이 본부를 헤집고 있었다. 아마 대충 평가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들어온, 언뜻 보기엔 몸집이 작은 남자야말로 제일 까다로운 상대였다.

  “나가미 요스케다.”

소타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도 그 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다. 실질적으로 저놈들을 지휘하는 보스인데, 몇 번인가 폭력사태를 일으켜 학교에서도 문제시되는 인간이라고. 중학생과 싸우는 일도 잦다는 것 같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보면, 키는 소타로보다 머리 반 정도 작지만, 몸은 탄탄하고, 러닝셔츠로 드러난 팔 같은 데 확실히 근육이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하의 부름에 답해, 기어이 나선 것 같았다. 요스케(庸介)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관찰하듯이 보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소타로에게 주목했다.

그리고 일행 넷을 제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네가 상대하는 놈이냐?”

  “그런 건 정해져 있지 않다.”

  “뭐?”

그리 대답한 소타로의 굳은 얼굴을 요스케가 빤히 쳐다봤다. 소타로는 말없이 그 시선을 받아들였다.

  “흐응. 뭐, 됐어. 여기는 우리가 쓴다. 불만이 있으면 들어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쪽의 주장을 듣지 않겠다는 태도가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소타로는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분쟁을 몹시 싫어했다. 하지만, 이곳을 쉬이 포기할 마음도 들지 않았던 거다.

그러니, 이 선택에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답한 것은 신야였다.

  “안 돼, 소!”

그렇게 외친 신야는 우리에게 말릴 틈을 주지 못했다. 그가 그 외침과 함께 땅을 박차는 순간, 2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3인방이 그의 전력투구를 받아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당한 세 사람이 버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들을 짓밟은 신야가 뒤이어 키 큰 사내에게로 달려든다.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매달려서는 사내의 머리를 벽에 부딪쳐댄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요스케는 일순간 어리벙벙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키 큰 사내가 당할 즈음에는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눈에 강한 투지를 깃들인 채, 그는 신야와 대치하듯이 돌아섰다. 그들 사이에는 성큼성큼 걸어서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지금의 신야라면 단번에 닿을 만한 거리다. 요스케는 좀 전의 사람답지 않은 움직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테고, 타이밍만 틀리지 않는다면 신야의 승리가 확정된다. 서로의 틈을 엿보듯이 두 사람은 적대하며 자세를 갖췄다.

  “신야, 엎드려!”

그때 갑자기 모토나오가 그렇게 외쳤다. 신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인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난데없이 커튼이 휙 날아갔다. 마치 누군가가 거칠게 쓰러트리기라도 한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이 녀석도 쓸 수 있어, 똑같다!”

모토나오가 가리키는 끝에는, 요스케가 오른손을 휘두른 자세인 채로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요스케에게 모이며 장소는 얼어붙었다. 거기서 먼저 움직인 것은 바로 요스케였다.

  “뭐냐?”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목표를 바꾼다. 신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으나, 왼손을 모토나오 쪽으로 내밀어 잡은 것이다. 순간 모토나오가 작게 신음했다.

물론 요스케의 손이 소타로 뒤에 있는 모토나오에게 닿을 리가 없다. 하지만, 모토나오의 옷은 누가 잡기라도 한 것처럼 격렬하게 구겨졌다.

  “똑같다는 게 뭐냐, 너희들.”

모토나오의 몸이 그대로 뒤로 질질 밀려, 열려 있는 창문에 닿는다. 모토나오의 상반신이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되어도, 요스케는 신야와 대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모토나오를 향해 뻗은 손에 힘이 분명하게 실려 있다.

  “보인다는 거냐!”

요스케가 그렇게 외치자, 모토나오의 상체가 기우뚱 흔들렸다. 이 상태에선 나도 소타로도 신야도 섣불리 손을 쓸 수 없고, 치코는 볼펜을 스케치북으로 향한 자세 그대로 얼어붙은 채다.

만약 모토나오가 떨어졌을 땐, 내가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했지만, 사람 한 명을 떠오르게 한 적은 지금까지 없어서 가능할지 잘 모른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해 소타로에게 눈길을 보내자, 그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신야가 언제 움직일지의 여부였다. 그랬는데, 사태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요스케!”

고성과 함께, 입구인 창문으로 자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날아든 것이었다. 그 그림자는 요스케와 모토나오 사이에, 무언가를 훅 내리쳤다.

  “윽.”

그러자 요스케가 신음하고, 모토나오의 가슴팍에 생겼던 주름이 곧장 사라졌다. 몸을 굽히고서 콜록대는 모토나오에게로 내가 황급히 달려가 상태를 확인했다. 가쁜 숨결 속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도, 똑같다…….”

모토나오가 지금 도와준 사람을 가리킨 것임을, 나는 금세 알아차렸다.

  “요스케, 뭘 하는 거야!”

그리고 내가 고개를 들었더니, 새로운 침입자인 그 소녀가 길고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요스케를 질타하고 있었다. 요스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분명하게 기가 꺾인 듯했다.

  “스즈노냐. 관계없잖아, 네놈한텐.”

  “관계있어. 당신의 어머님께 아무쪼록 잘 부탁한다고 들었으니까.”

  “그렇게 성실히 들어둘 일은 아니잖아.”

  “이 상황을 보건대, 들어두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스즈노(涼乃)의 째진 눈이 가늘어졌다.

  “시시한 짓은 적당히 졸업하는 게 어때? 어차피 성적표를 산에 묻으러 가는 길이었겠지.”

  “시끄러.”

아무래도 정곡을 찔렸는지 요스케의 뺨이 홍조를 띄었다. 하지만 스즈노는 추궁을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은 무슨 얘기야. 그건 되도록 안 쓰겠다던 얘기는…….”

  “야, 쿠츠나, 여자는 닥쳐!”

그 순간, 불현듯이 두 사람 사이로 초조해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신야가 쓰러트린 5학년 4명이, 이제야 겨우 끼어들 계기를 얻은 듯했다. 그들은 아까부터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뭐하는 거야, 요스케.”

  “할 거잖아, 해치워버려, 이런 놈들!”

  “뻗어있지 마!”

한 사람이 말문을 틔우자, 차례대로 요스케를 몰아붙인다. 말하는 기세는 드세지만 좀 전 신야의 움직임에 겁을 먹은 듯, 우리 쪽을 두려워하며 힐끔대는 게 어떻게 봐도 한심하다. 요스케는 그들을, 그 다음 스즈노를 곁눈질하더니, 끝내 마루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때 그의 어깨가 오르내리는 것을 본 나는, 그가 가슴 깊이 한숨을 쉬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요스케가 신야에게 돌아선다.

  “잠깐, 요스케!”

스즈노의 책망 어린 호소도 무시하고, 그는 신야에게 말을 건넨다.

  “우선은 결판을 지을까.”

  “좋아.”

신야도 수긍했다. 두 사람이 자세를 가다듬으며 방심하지 않고 자세를 취했다. 분명 가라테나 비슷한 것을 했을 듯 빈틈없는 요스케의 자세에 비하면, 신야는 적당해 보일 뿐이었지만. 좌우지간, 이 두 사람은 서로 한 번 때려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내 시야 끝에서, 소타로와 스즈노가 쓴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저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뤄진 모양이다. 일단은 시키고 보는 건가보다.

본부에 긴장이 흘러넘쳤다. 결말이야 처음부터 결정돼 있으리라는 것은 예상했다. 요스케의 단련된 움직임을 이기려면, 신야는 선제공격을 성공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이 둘의 싸움은 끝내 시작되지 않고 끝났다.

  “꺅…!”

그 긴박한 분위기 속에서 소녀의 비명이 터져 나와서였다. 치코의 목소리였다.

누가 그녀까지 건드렸나, 자리에 있던 모두가 반사적으로 돌아봤다. 하지만 그녀 곁에는 누구의 그림자도 없었고, 그녀의 시선은 바닥에 쏠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볼펜이 쥐어진 채였다.

  “……나”

그렇게 외치는 치코의 손이 커다란 호를 그렸다.

  “는, 마, 왕.”

그녀는 자신의 손동작을 쫓아 읽는 것 같았다. 이마에 맺힌 땀으로 미루어보아, 그게 스스로의 의지 여부를 판단하는 어려웠다. 그녀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너, 희, 들, 은…….”

펜이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쓱, 하는 소리가 부자연스럽게 울려 퍼졌다.

  “죽……어.”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도 치코의 예언은 끊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격렬해졌다.

  “여, 름, 의, 끝, 에, 서”

거기까지 갔을 때는, 멀리서도 그녀의 스케치북이 무수한 선으로 가득 찼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를, 찾, 아, 쓰, 러, 트, 리, 면…….”

  “멍청이들이잖아, 이놈들! 이상해, 같이 있고 싶지 않아!”

그녀의 신탁을 방해한 건 키 큰 5학년이었다. 치코와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던 그는, 그렇게 외치자마자 치코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후려쳤다. 자연스레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볼펜이 멀리 날아갔다.

  “그, 그래, 맞아! 시시해, 그런 짓!”

  “그런다고 우리가 무서워할 줄 아는 거냐, 겁쟁이들아!”

그들은 겁을 먹은 것처럼 그렇게 몰아붙였다. 얻어맞은 치코는 아무 것에도 반응하지 않고, 멍하니 볼펜이 없어진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야, 치코한테 손을 댄 거냐, 네놈들!”

대신 신야가 외치고, 후려쳤던 당사자는 황급히 동료에게로 달아났다. 상황은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그걸 잠재운 건 요스케의 한 마디였다.

  “야, 가자.”

눈을 부라리는 5학년 그룹에게, 요스케가 이렇게 덧붙였다.

  “이따위 시시한 거, 역시 필요 없잖아. 어린애 같고. 역 앞의 오락실이 더 재밌어.”

그 말에 5학년 그룹은 납득한 듯했고, 또, 이 장소나 우리를 기분 나쁘게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그렇지, 라고 서로 말하며 요스케의 말의 따르기로 하는 모양새였다. 그들은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느긋한 걸음걸이를 하고 창문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는 요스케가, 다만 그는 창밖으로 나갔을 때 문득 돌아서, 이쪽을 되돌아봤다.

  “다시 올게.”

그런 그의 목소리는 갱도에 닿을 정도로 크지 않았다. 그는 이쪽의 반응을 보지 않은 채로 허겁지겁 떠난다. 스즈노는 여기 남을지, 저들을 뒤쫓을지 망설이던 것 같았지만, 후자를 선택했는지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작게 고개 숙이고는 다리를 건너 갱도로 사라졌다.

그들의 기척이 사라지자 우리의 긴장도 단번에 누그러졌다. 특히 신야는 크고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신야, 무턱대고 달려들지 마.”

소타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신야는 고개를 들지 않고 답했다.

  “그치만 놈들 짜증나.”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뭐, 다행이다.”

그리고 소타로는 신야의 어깨를 달래듯이 두드렸다. 거기서 간신히 고개를 든 신야의 표정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밝았다.

  “치이는 괜찮아?

  “응…….”

반면 치코는 아직 정신을 다 차리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손 밑에는 빈틈없이 칠해져 검은 구름이 그려진 것만 같은 스케치북이 나뒹굴었다. 언제라도 잘 반응하던 소타로의 말을 듣고서도 건성이었다.

  “치이도 잘 했어.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해내다니 대단해, 정말.”

  “일부러가 아니야…….”

그건 낯선 사람 앞에 나서던 그녀의 평소 태도와 많이 닮았지만, 지나치리만치 생기가 없었다.

  “오빠, 저거.”

그때 니나가 가리킨 것을 보고, 나는 소름이 끼쳤다. 치코의 오른손이 여전히 펜을 든 채로 굳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왕.”

뒤이어 옆에서 그렇게 불쑥 중얼거리는 소리에, 내 등에는 닭살이 돋았다. 옆에 있던 모토나오 역시 치코의 손을 보고 마음이 어수선해진 듯싶은 상태였다. 그의 안색이 창백했다.

 

이렇게 우리의 마지막 여름방학이 시작된 것이다.

 

 

  1. 달력은 연재 당시인 2003년 7~8월을 참고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본문으로]
  2. 글상자 양식이 없어서 대충 구분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본문으로]
  3. 흔히 '샷시'라고 부르는 그거. [본문으로]
  4. 일본 신사 입구에서 볼 수 있는 그거. 솟대 같은 거. [본문으로]

'번역 > 여름의 마왕' 카테고리의 다른 글

07월 22일  (0) 2020.10.20
07월 21일  (0) 2020.10.20
07월 20일  (0) 2020.10.19
발단  (0) 2020.10.17
표지  (4) 2020.10.17
Posted by Double_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