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이르아노・파질・네세레의 에피소드를 산발적으로 적당히 휘갈겨 쓴 시리즈. 완결."
*게임 본편과 연결되는 스포일러 有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3-1

■세계의 끝

 

이곳은 세계의 끝이다.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에게 그렇게 알려준다.

눈앞에 펼쳐진 수면은 고요하고 잔잔하나, 그 안에는 배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곳은 더 이상 아무도 살 수 없는 세계니까.

그래도 가끔 지나가는 배를 찾을 때가 있다. 좀 앞에 있는 섬에, 거기서밖에 나지 않는 풀과 꽃을 캐러 간다고 했다. 그것은 귀중한 약이나 향료가 된다고 한다. 배에 탄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마의 바다로 나아갔다.

  “왜 그래? 가자.

곶의 가장자리에 서 있던 그는, 그 말을 듣고서야 바다로부터 눈길을 거뒀다. 뒤를 돌아보자, 낚싯대를 든 형이 이상하다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갈게.”

고개를 끄덕이곤, 곶에서 내려가는 길을 걷기 시작한 형의 뒤를 따랐다. 그 사이에도 거센 바람이 휘몰아쳐 두 사람의 머리를 흩날렸고, 가지런히 이마에 감은 천 자락이 뺨을 툭툭 때렸다.

둘러보면, 두 사람 이외의 인영은 없었다. 돌아본 시야에 걸리는 건 나왔던 저택의 모습이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언덕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됐다.

그 권세에 비하면 란테의 저택은 무척 소박해 보일 것이다. 어째서 광활한 영지 안에서도 일부러 이런 끝자락에 자리를 잡았냐며 고개를 갸우뚱할 이도 적지 않을 터였다. 그 의문도 경위를 알고 실제로 방문하면 대체로는 납득했다.

이곳은 집이 아니다. 거점이다. 라고.

란테가 지금의 지위를 쉬이 쌓아올린 건 아니었다. 르란트가 잠적한 뒤, 아직도 승리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리탄트에 필연적으로 일어난 건 후계자 다툼이었다.

이마에 표식이 새겨진 아기를 내세운 드니누스 가문의 대두에 의해 막이 내렸던 그 조용한 내전은, 뒤이어 란테가 표식을 받으며 제2막을 열었다. 이 란테 저택도 그때쯤 준비됐다. 드니누스 측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막는 수단으로써.

그것이 지금 다시 사용되고 있다. 덕분에 형제 둘이서만 이렇게 외출할 수 있는 것이다. 형제에게 둘 말고 아무도 없는 광경은 낯설지 않았다. 간간히 바닷새의 지저귐 소리만이 주변을 건넜다.

  “아, 안 돼. 빨리 안 가면 사냥감을 새치기 당할 거야.”

그 소리를 듣고, 앞서 가던 형이 걸음을 재촉했다. 새들의 목표도 강어귀에 모여든 물고기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것을 알아챈 형 또한 이상하다는 듯이 멈춰 섰다.

  “아까부터 대체 왜 그래? 바다만 쳐다보고.”

그리고 돌아와 그의 옆에 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바다로 향했다.

  “…아무 것도 안 보이잖아?”

묻는 형에게 그는 수평선을 가리켰다.

  “저기, 저 건너편엔 뭐가 있다고 생각해?”

  “글쎄. 마물의 나라가 있다는 사람도 있고, 다른 종족이 산다는 사람도 있는 것 같던데. 사실이라면 어느 쪽이든 재밌을 것 같지만.”

웃으며 답하는 형의 옆모습은 왠지 모르게 시큰둥했다. 알고 있는 거다. 자기가 여기서…이 나라에서 나갈 일은 없다는 걸. 형은 장차 이 나라를 이끄는 주인이 될 테니까.

이곳은 세계의 끝이다.

불어오는 바람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럼 언젠가 다녀와서 알려줄게.”

  “그래. 그럼 기대해 두지.”

곧장 돌아온 형의 대답은 전혀 진담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3-2

■누군가를 위한 시간

 

가만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의 얼굴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커다랗고 투박한 손이나, 무척 커 보였던 키, 손쉽게 정돈된 머리는 금방 떠오르더라도, 어떤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 대신 강렬하게 떠오르는 것은 역광의 장면이었다. 할아버지는 늘 창가에 서서 형제의 방문을 맞이했다. 햇빛에 비춰진 윤곽이 희붐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실례합니다.”

가볍게 인사하고 문을 들어서는 형을 따라, 그도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형과는 달리 당연하게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저, 할아버님. 함께 해도 괜찮을까요?”

물으면 할아버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거절당한 적은 없었다. 단 한 번을 빼고는. 하지만 처음에 주어진 일격이 그에게 매번 묻도록 만들었다.

  “네가 왜 여기 있지.”

그에게 형과 함께 행동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날도 할아버지가 형을 부르는 데 따라갔다. 공부를 한다고 들었고, 배움은 항상 나란히 받는 것이었다. 설마 차가운 눈초리와 함께 그런 책망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부른 건 계승자다. 그 외의 사람에게 방문을 허가한 적은 없어.”

할아버지는 옥좌에서 물러난 뒤에도 한결 같이 왕으로 남아 있었다. 사전 통보 없이는 면회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상대를 마주보며 변명을 할 수 있을까.

  “나가.”

가차 없는 선고를 받은 그가 따르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형이 입을 열었다.

  “기다려주세요, 할아버님.”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서 형에게로 옮겨졌다. 그 시선을 겁내지 않고 받아들인 형은 말대꾸를 계속했다.

  “동생은 할아버님 말씀대로 했을 뿐입니다. 똑같이 하라고. 똑같이 하려면 똑같이 배워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의 미간이 짜증스러운 듯 좁혀져, 그는 이번엔 호통을 맞을 것을 각오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입을 열다가도 그대로 아무 말 하지 않고 다물어버렸다. 잠시 뒤 딱딱한 어조의 대답이 돌아왔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허락을 구해라. 여기 온 뒤로 그만한 시간은 줬을 거다.”

갑작스레 재촉당하기라도 하듯이 등을 몰래 얻어맞아, 그는 자신이 입에 담아야 하는 일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다. 오늘도 다시 아주 간단하게 허락을 받고서 그는 형의 옆자리에 앉았다.

배우는 것은 대체로 왕으로서의 소양이다. 이 나라의 역사, 현상, 과거의 싸움, 신전의 입지.

할아버지는 저택에서 거의 나오지 않지만 방문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온 덕분에, 그들에게서 많은 정보를 얻었을 터였다. 안부 인사와 4대 왕을 불평하러 온 귀족들이 대부분인 듯싶었는데, 어찌나 집요하게 매달렸는지 할아버지의 비위를 건드린 손님들이 두들겨 맞는 것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가끔은 그들 앞에 인사하러 나가기도 했다. 그때는 형이나 그 중에서 한 사람만이다.

그리고 둘 다 이름을 댄다. 리리아노, 라고.

그것이 5대 국왕이 되는 자의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의 어려운 성격 탓도 있어 귀족들은 그렇게 자주 다니지 않았다. 그와 형은 꼭 닮지는 않았지만, 성장 중이기도 하니 의심받을 만한 데는 별로 없었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공부에 힘쓰는 나날들.

사용인들도 차별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받은 처사로부터 비로소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할아버지를 찾아갈 때마다 그는 새삼 깨닫는다. 여기 있는 건 자신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고.

활짝 열린 창문으로 탁 트인 바다의 광경이 들여다보였다. 열심히 듣지 않아도 혼날 일 없는 그는 이따금씩 그 광경을 바라보며 지냈다.

 

3-3

■주어진 이름

 

독이 들어 있었다.

어린 그의 눈에마저 그 사실은 분명했다.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거품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그는 두고 보기만 했다.

긴장한 기색이 감도는 호위들과 당황해하는 이 집의 주인이며 사용인들. 마치 아까 정원에서 펼쳐지던 연극이 이곳에서 계속된 것만 같았다.

아무리 전왕을 뒤에 둔 차기 왕 후보라고 한들, 란테 저택에 틀어박혀있기만 하는 것은 용납 받을 수 없었다. 파질은 독선적이었으나 다른 귀족들을 업신여길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결코 비위를 맞춰주는 법이 없었지만, 그들의 영지 초대에 선뜻 응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파질 자신이 나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차기 란테 당주인 아들을 대리로 보내고, 거기에 종종 손자를 동반시켰다. 물론, 다음 세대의 왕으로서.

형제 중 어느 쪽을 고르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랐다. 방문 간격이 짧거나 눈치가 빠른 상대에게는 같은 사람이 나간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적당히 바뀐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차례였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를 따라가 환대를 받았다. 대체로 색다를 것 없는 지루한 경험이었지만, 이번처럼 노력을 보일 때는 달랐다. 유랑극단을 불러 저택의 정원에서 공연을 선보여준 것이었다. 외부 인물을 접근시키지 않는 데다 파질이 좋아하지 않는 탓에 란테 저택에는 그런 게 온 적이 없었다. 둘러싼 창문으로부터 내려다보이는 광경이 무척 즐거워서, 돌아가면 형에게 얘기해 주려고 들떠있었다.

갑자기 뒤에 서 있던 아버지가 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치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주위에는 깨진 컵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거기서 흘러나온 액체가 바닥의 나뭇결을 따라 천천히 퍼져나갔다. 준비된 음료. 공연을 보는 데 정신이 팔려 계속 손대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직 어렸다. 벌어진 일의 배경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악의가 실은 누구를 향해 있었는지는 확실히 깨달았다.

무서웠다.

아버지가 지금 눈앞에서 괴로워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도 그저 약간의 변덕으로 이렇게 된 것만은 아니었다.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건 제게도 언젠가 일어날 일이며, 자신은 그것을 위해 준비돼 있는 것이라는 게.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자신의 죽음조차 누군가의 ‘실패’에 불과하다는 게.

무서웠다.

  “그렇지만 자제분 혼자선 외롭지 않으실까요?”

방금 전까지 오고가던 대화가 귓속에 되살아났다.

  “그, 뭐라고 해야 할지. 역시 마지막에 의지할 수 있는 건 집안사람이라는 겁니다. 왕이 되실 분의 보좌에는 역시 혈연이 안심이라는 거죠.”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도 이런 나이인 데다, 알고 계시겠지만, 제 아내는….”

  “아, 아뇨, 아뇨. 물론 알고 있고, 두 분 다 무척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 다음을 생각해도 된다고 봐요. 아뇨, 저희 집 아들이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마음을 확실히 다잡질 못해서….”

아버지는 그런 대화를 빨리 끊고 싶었을 것이다. 보기 드물게 단호한 어조로 딱 잘라 말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제게 자식은 한 명으로 충분하니까요.”

분명, 자신도 그런 흥정을 듣고 싶지 않아 공연에 열중하고 있었을 것이다.

란테 가의 아이는 단 한 명.

그것은, 반드시, 누구에게나.

  “얘…, 얘야.”

문득 쓰러져 있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붉게 물든 입술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는 튕겨진 듯 움직이며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너에…전하지 못한…”

가쁜 숨을 더욱 몰아쉬며 아버지는 말을 이었다.

  “…그녀와…둘이서, 붙인 이름.”

그때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탁해서 알아듣기 어려운 아버지의 목소리가 거기서만 몹시 선명하게 울린 것 같았다.

  “이르아노…. 언젠가 때가 되면, 그렇게… 될….”

목소리는 점점 쉬고 작아져 간다. 이젠 그의 귀에도 미미하게만 닿았다.

  “…너만이…, 나의 단 하나뿐인…아이….”

그러고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란테 가로 돌아와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하자 할아버지는 딱 한 마디, “그런가.”라고만 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3-4

■시간의 끝

 

그날은 아침부터 고요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저택을, 들판을, 바다를, 소리도 내지 않고 부드럽게 두드리는 비.

그에 맞춰 모두가 숨을 죽인 듯, 저택 안도 적막이 깔려 있었다. 이런 날 크게 소리를 냈다간, 금세 물의 장막 너머에서 숨어있는 뭔가에 머리를 먹혀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 분위기가 감도는 날이었다.

리리아노는 문득 책에서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돌아봤다. 그와 동시에 방 문가의 종이 울렸고, 사용인 중 한 명이 얼굴을 내밀었다.

  “실례합니다, 리리아노 전하. 오늘은 없어도 된다고 하셔서….”

  “아, 역시. 내가 가지 않아도 괜찮은가?”

  “네, 다른 한 분이 가신다고 하셨어요.”

  “그렇군. 그럼 다음에는 내가 가지.”

사용인은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고, 다시 침묵이 돌아왔다. 집중이 풀린 리리아노는 무료함에 손에 든 책을 팔랑팔랑 넘겼다.

이런 날씨는 할아버지의 기분을 언짢게 만든다. 요즘 들어선 자리를 보전하는 일이 많아 더욱 그랬다. 제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앞으로 1년 남짓.

  “…아마 견디지 못할 거야.”

중얼거림은 놀랄 정도로 크게 방 안에 울렸다.

최근 할아버지의 병세는 악화 일로에 있었다. 이제는 자리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손님도 모두 물렸다. 특히 오늘처럼 쌀쌀한 비 오는 날에는 마디마디가 아픈지 무서울 정도로 언짢아졌다. 그럴 때면 오랫동안 시중을 들던 사용인들조차 다가가기가 어려웠지만, 손주에게만은 약간이나마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그래서 식사는 어느 한 쪽이 나르기로 했다.

  “하지만 이제 할아버님은.”

분간을 하지 못한다.

그 징후는 할아버지의 언동 구석구석에 나타났다. 눈도 쇠약해졌을 터였다. 얼굴도, 표식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적었다. 성인이 되어 즉위할 때까지 뒤에 남아계시길 바랐고, 본인도 그럴 생각이었겠지만.

동생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할아버지에게 식사를 나르고 있을까.

리리아노는 떠올렸다.

몸은 쇠약해졌다고 해도 머리는 아직 비교적 건강해, 상태가 괜찮을 때는 전과 다를 바 없이 훈계를 듣기도 했다.

그런 어느 날 갑자기 저택을 떠나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할아버지께 양해를 구할 틈도 없어 기분이 상하셨을 거라 생각하며, 귀가 후에 얼굴을 내밀었더니 별다를 것 없는 태도로 대해져 맥이 풀린 적이 있었다. 대화도 아귀가 잘 맞지 않아 뭔가 이상하다는 불안감을 느꼈는데, 그 의심은 다음 훈계 시간에 풀렸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 지난번 숙제를 추궁 당해서였다.

  “급한 일이 생겼다고 알려드리러 갔었어.”

캐물어보자 동생은 불쑥 그렇게 말했다.

  “그랬더니 냉큼 앉으라고 하시더라. …허락을 구하기도 전에.”

어느새 할아버지와의 공부에 따라오지 않게 된 동생으로선 오랜만의 회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점점 대하기 어려워졌고, 동생은 나서서 그 뒤치다꺼리를 떠맡게 됐다. 성인의 때가 가까워지면서 자신이 준비에 쫓겨 바빠진 탓도 있었지만, 대신해서가 아니라 예전보다 적극적으로 다가선 게 분명했다.

예컨대 오늘처럼.

리리아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좁혀진 미간을 알아채고, 손가락으로 천천히 풀었다.

그렇게까지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얼마 남지 않은 상대에게 헌신적으로 대해주고 싶다는 건 당연한 심정일 것이다. 본디 마음씨가 고운 그에게는.

문득 열린 창문으로 눈길을 돌리자 비는 한결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마 오늘은 그치지 않을 듯했다. 예상대로 날이 어두워질 무렵이 되어도 물의 장막은 내려온 채였다. 슬슬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손에 쥔 책을 선반에 넣어두고, 리리아노는 방에서 나갔다. 부엌에 얼굴을 내밀자 사용인 한 명이 말을 건네 왔다.

  “어머나, 무슨 일이신가요? 배가 고프세요? 그럼 바로.”

  “아니, 할아버님께 식사를 갖다드리려고.”

  “아, 그거라면 이미.”

아무래도 늦은 모양이었다. 모처럼이니까 저 역시 얼굴을 내밀어두려고 할아버지의 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저택의 방마다 경비 당번 따위가 있는 건 아니었으므로, 용건을 추궁당하는 일 없이 리리아노는 문고리에 손을 댔다. 초인종을 울리지 않은 건 왠지 모르게였다. 어차피 할아버지의 귀에는 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분명히 낮에 생각한 게 마음에 걸린 것이었다. 동생이 어떤 얼굴로 할아버지를 대하고 있는가, 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방을 들여다봤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응접실에 동생의 모습이 있었다. 식탁에 식사가 담긴 쟁반을 놓고 뭔가 하고 있었다. 가져오는 동안 그릇이 흐트러진 걸 바로잡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 리리아노는 무심코 소리를 질렀다.

  “뭘 하고 있어!”

그 순간 돌아선 동생의 경직된 표정에서, 그가 손 안에 쥔 작은 병의 내용물이 조미료 같은 것이 아님을 확신했다.

  “…설마.”

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설마.”

리리아노는 비틀거리며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할아버지의 맥을 짚고, 이번에는 복도로 서둘러 나갔다. 의사를 불러야 했다.

나가려는 순간에도, 동생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그저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날 밤의 반이 지나, 할아버지는 신의 나라에서 온 마중을 받았다.

 

3-5

■심판의 말

 

방 안에는 그밖에 없었다.

곁에 사용인들이 있기를 바라지 않아 내보낸 그는 침대 안에 혼자 누워 있었다. 입구에서는 그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들어가도 괜찮겠나?”

잠시 적막이 감돈 뒤에야 답이 되돌아왔다.

  “그러세요.”

그 자그마한 허락을 받아, 리리아노는 처음으로 그의 침실에 발을 들였다. 별안간 약품 냄새가 강하게 코를 찔렀다.

침대까지의 거리는 불과 몇 걸음이면 충분할 텐데, 몹시 길게 느껴졌다. 천장을 향한 옆얼굴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뺨에 흘러내린 머리칼 탓에 표정을 파악할 수 없는 것도 발걸음을 늦추는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미뤄도, 얼마 지나지 않아, 리리아노는 거기에 서게 됐다.

그의 머리맡에.

  “…….”

입을 열었지만 거기서 먼저 나와야 할 말은 주어지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는 틈을 두고, 리리아노는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미안해.”

거기에 반응해 그는 그제야 눈길을 줬다. 남겨진 쪽의 눈동자를 움직여서.

그의 얼굴 절반은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미안해….”

이어질 말을 찾지 못해 리리아노는 다시 한 번 그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대답이 없었더라면 침묵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쉰 목소리에 의해 사과는 부정당했다.

  “계속한 건 나야.”

  “거부해야 했어.”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어.”

  “그렇지만….”

그는 고개를 젓는 리리아노에게, 흐름을 끊으려는 듯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그 남자는… 풀어줬다.”

그래, 이번 일의 범인은 이미 여기 없었다.

침입자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침대 옆에 서 있어 금방 잡혔다. 위사들에게 끌려온 남자를, 리리아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맞이했다. 젊은이라고 불릴 무렵에서 조금 지나간 정도의 나이일 성싶은 그 남자는 얄미울 정도로 침착해보였다.

  “내가 리리아노·셀가=리탄트=란테다.”

제 이마에 초점을 맞춘 남자의 눈이 얄망궂게 좁혀지는 것을, 리리아노는 알아보았다.

  “이름을 대라.”

  “거절한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남자의 대답에 자리는 금세 살기가 감돌았다. 리리아노 역시 즉각적인 거절에 기분이 나빴으나, 그것이 남자의 술수라는 걸 깨달았으므로 애써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그런가. 그럼 누구의 수하인지도 대답하지 않겠군.”

  “당연하지.”

물론 누구의 부하인지는 명백하고, 이 남자도 그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추궁해도 결코 인정하지 않으리란 것을 남자의 태도가 표명하고 있었다. 무의미한 짓을 일일이 시험할 생각은 없었다.

  “어째서 도망치지 않았나.”

  “진작 도망칠 수 없게 됐다는 것쯤은 어지간한 얼간이라도 알 거다.”

질문을 바꾸자 답이 돌아오기는 했다. 넉살좋게 굴진 않아도, 묵비를 행사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어째서 일격을 가하지 않았지?”

  “내가 상대를 틀린 어지간한 얼간이였기 때문이다. 틀린 시점에서 모두 끝났어.”

과연, 리리아노는 납득했다.

애초에 이 남자에게 돌아갈 생각은 없었던 거다. 설령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도 남자의 분위기가 한 번 쓰고 버릴 장기 말의 것이 아니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원래부터 수하들이 별로 많지도 않을 터였다.

그 생각에 잠시 틈이 생긴 탓이었는가.

  “그럼 내 차례다. 그 빌어먹을 영감은 언제 뒈진 거지?”

자신의 입장을 분별하지 않은 남자가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당연히 위사가 분개해 바닥에 자빠트렸지만, 얼굴만은 꼿꼿이 들고 있었다. 남자의 대담한 시선을 받으며 리리아노는 입을 열었다.

  “연초쯤에. 할아버님께서 계시지 않아 방심했는가.”

반응을 기대하지 않은 도발이었는데 효과를 거둔 것은 뜻밖이었다. 자조인지 허세인지, 입술을 일그러뜨리는 그의 얼굴을 리리아노가 내려다봤다.

역시 이 남자는 돌아오지 못할 임무에 내놓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도 보내졌다는 것은….

리리아노는 그를 구속하는 위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들은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구속을 풀었고, 갑자기 자유로워진 남자 또한 미심쩍은 얼굴로 리리아노를 돌아봤다.

  “풀어주겠다. 빨리 돌아가라.”

자포자기한 투로 리리아노는 남자에게 말을 뱉었다.

  “대신 주인에게 전해라.”

  “…고용주에게 순순히 돌아갈 것 같나?”

아마 남자는 의심하는 것 같았다. 본인 신변의 위험이나 고용주가 특정될 위험을. 하지만 추적할 생각은 없었다. 추격자의 기미를 느끼지 못하면 결국 돌아갈 터였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돌아갈 거라 생각하지만.”

입을 다문 남자의 양해를 기다리지 않고, 리리아노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언은 이렇다. 그 자리에 계속 앉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알려주기 바란다.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금으로선 우리가 다른 형태의 관계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이냐.”

  “제도를 바꿔 성인이 되자마자 자리를 넘겨받는 것을 막는다면 조급해 할 일은 없겠지. 내게도 시간은 고마운 것이야.”

남자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는 심기가 불편한 듯한 얼굴로 일어서며 불쑥 중얼거렸다.

  “확실히 받았다.”

그리고 위사와 사용인들의 적대적인 시선을 받으며 이쪽을 등지고 출구로 걸어갔다. 그대로 사라지는가 싶더니, 그는 문득 도중에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그 대역은 어떻게 됐지?”

슬쩍 돌아보는 그의 오른쪽 눈을 리리아노가 재차 노려보았다. 풀어준다고 해서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생명에 지장이 있었다면 널 풀어주지 않았다.”

  “그건 네 동생인가.”

  “그렇다.”

그 이상 쓸데없는 말을 했다면 리리아노는 다시 한 번 남자의 구속을 명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화는 거기서 끝났고, 남자는 저택을 떠났다.

리리아노는 동생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복수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타산을 우선시한 자신을.

경위를 묻는 그의 표정은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았고, 그저 어느새 한쪽 얼굴을 가린 천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도 들었을 것이다.

깊지는 않지만 그의 오른쪽 눈은 상처를 입었다. 다시는 예전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리리아노는 기다렸다. 그가 할 심판의 말을.

원망하고 욕하는 게 당연하니까.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단지 입술에 미소를 지으며 한숨처럼 속삭였다.

  “…이걸로 이제 대역은 못하겠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두 번 다시 너를 대역으로 두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리리아노는 동생을 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것은 무척 그리운 감촉이었다.

 

3-6

■버려서 얻은 만남

 

  “도련님, 제발 다시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노년의 남자는 앞서 걷는 아직 앳된 아가씨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것으로 똑같은 호소가 벌써 몇 번째인지. 마침내 그녀는 멈춰서 남자를 돌아봤다.

  “할아버진 끈질겨.”

어릴 때부터 변함없는 눈빛은 높이가 제법 높아졌다. 그래도 할아버지라고 불린 남자와는 제법 차이가 나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난 결정했어.”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무는 그녀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물러선 적 없다는 걸 할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새삼 항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번엔 상황을 호소하는 정도에서 그쳐주세요. 어쩌면 상황이 나아질지도 모르고요. 안 되더라도 한 번쯤 시도해보는 게 나쁘진 않겠지요.”

  “할아버지도 알잖아. 이런 높으신 분이 우리 같은 걸 챙겨줄 리가 없다는 거. 진정서가 받아들여진 것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그런 일을 해 버리면 이제 그 저택에는….”

  “괜찮아. 당신들의 위로금 정도는 상환해달라고 부탁할 테니까. 지금까지 일해준 것에 비하면 한참 부족할 지도 모르지만….”

  “그런 얘길 하는 게 아닙니다. 저희는 도련님의 앞날을 걱정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물론 그녀도 그것을 알면서 얼버무리는 것일 테다. 할아버지가 정면에서 우려를 표하자 띄엄띄엄 대답했다.

  “아버님도, 어머님도, 형님도, 내 자수가 굉장하다고 칭찬해주셨어. 게다가 새랑 토록도 돌볼 수 있고. 땅돼지는 조금 무섭지만.”

  “정말 그런 생활을 계속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영주 따위는 도저히 못 하겠어. 형의 전철을 밟을 뿐이겠지.”

거기에 대해선 할아버지도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부모가 죽은 뒤 대를 이은 형도 몸이 병들어 산에 올랐다.

  “형은 상냥한 사람이었으니까, 마음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던 거구나.”

이제 그녀는 의지할 친척도 없이 홀로 남겨졌다.

  “할아버지, 있잖아. 나도 그렇게…강하지 않아.”

작은 영지였다.

다스리는 것이라고는 고작 마을 두 개뿐. 영주라고 해도 얌전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고, 밭일까지 하는 건 아니더라도 자질구레한 협상이나 중재, 강과 영지 내에서 생산할 수 없는 것들을 확보하는 등 할 일에 쫓기는 규모였다.

누구나 그렇다고 인정하는 영세 귀족, 그것이 그녀의 출신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가진 자’였으며, 틈이 생길 때마다 자리를 빼앗아가려는 자들이 적지 않다는 걸 성인이 되어 뼈저리게 깨달았다.

영지 없는 몰락 귀족, 이름을 원하는 중소자본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진영을 늘리고 싶은 주변의 영주들….

후견인도 없는 젊은 처녀 따윈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우쭐대는 그들의 본심은, 거드름을 피우거나 아첨하거나 해도 뚜렷해, 그녀는 그런 상대에게 마음 깊이 지쳐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과거 건국왕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를 내놓는 것은, 하고 할아버지는 가슴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증조부에게서 분열 전쟁 당시의 무용담을 듣고 자란 몸으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너무 쓸쓸한 결말이었다. 니엣나 가문은 이렇게 역사책에 한 문장도 실리지 않고서 사라지는 거라고.

  “알겠습니다. 도련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이 할아범도 각오를 다지겠습니다. 만일 상대방이 망설이는 것 같으면 전부 다 줘 버리세요. 그 뒤에는 할아범이 어떻게든 하겠습니다.”

  “…고마워, 할아버지.”

물론 아무 계획도 없이 여기까지 온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잘 해 준 마을 사람들을 내팽개칠 수는 없어, 지금 이상의 처지를 기대해봄직한 상대를 사전에 조사했다. 그 결과 가장 기대할 만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현왕을 배출하고, 그 위력을 등에 업은 대귀족 란테 가.

그들에겐 경계를 약간 접하고 있는 마을 두 곳이 늘거나 말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처럼 내버려 둘 거란 예상이 됐다. 이웃 마을 공무원의 징수 범위만 늘어날 뿐이겠지.

어쨌든, 일단은 상황을 호소해 보자고 글을 보내, 란테의 본거지까지 갔다. 근처의 거리에서 잠시 기다린 뒤에야 면회 허가가 나왔다.

저택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곳곳의 살림살이를 보면 도저히 긴장을 풀 수 없을 것 같은 장소임을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옆에서 기다리는 작은 주인의 모습을 보자, 역시 긴장한 듯, 아무리 정돈해도 뻗치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정리하는 동작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이 불린 두 사람은 응접실로 향했다. 창문에서 내리쬐는 빛을 등에 진 한 인물이 그들을 맞았다.

  “니엣나 가의 분들이셨지요.”

그는 서류에 눈을 떨군 채 부드러운 어조로 그렇게 물었다.

꽤 젊구나, 라고 할아버지는 언뜻 생각했다. 순간 무시당했다는 것처럼도 느껴졌지만, 애초에 중요히 여겨질 리가 없기도 하거니와 젊은 영주 아래선 비슷한 나이의 사람이 쓰이기도 할 것이다.

  “네, 그… 현 당주인 뷔리시·쿠아모=니엣나입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그녀가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에 맞춰 고개를 든 남자의 머리칼이 흔들렸고, 그 밑으로 엿보이는 것에 할아버지는 무심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처음 뵙는 분께는 인사차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빛을 잃은 한쪽 눈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리 촌뜨기 사용인이라도 들어본 적 있었다.

  “현 당주인 이르아노·셀가=란테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3-7

■하사받은 운명

 

아까부터 뚜벅뚜벅 구두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벽을 사이에 두고 있어 그다지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멀어졌다 다가왔다 멀어지는 반복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생각하니, 역시 저대로 방치해둘 수 없었다.

듀이유는 문을 열고 복도를 서성이는 그 뒷모습을 향해 호통을 쳤다.

  “미라네!”

그러자 움찔한 그녀가 돌아본다. 막 성인이 된 앳된 눈빛이 불안해하며 이쪽을 쳐다봤다.

  “당신이 시트를 안고 서성거린다고 해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어서 그것들을 세탁장에 내던지러 가세요.”

그렇게 충고해도, 그녀는 망설이는 듯 제자리에서 하소연했다.

  “그치만 사모님께 상처 하나라도 나면, 언젠가 산에서 만났을 때, 할아버지한테 엄청 혼날 거예요.”

  “그럼 포기하고 혼나세요. 상처 정돈 납니다, 출산할 때는.”

  “역시 그쵸…. 두 분 다 힘든 것 같고, 힘든 일이네요.” 

미라네는 시트를 가슴팍에 꽉 움켜쥔 채 맥없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틀림없이 할아버지의 화난 얼굴이라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손자보다 ‘도련님’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여러 번 들어왔고, 듀이유 역시 그 본인과 1년 정도 함께 일해본 적 있기 때문에 그 말이 그렇게 호들갑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먼 미래에 혼날 일 따위는 지금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튼 걱정된다는 건 알겠지만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 당신은 일단 눈앞의 일부터 정리하도록!”

아직은 꽤 오래 남아있는 일이니 익숙해지지 않으면 별 수 없다. 일단 지시를 따르긴 해도 여전히 못마땅한 미라네를 향해, 듀이유는 추격을 겸한 잔소리를 거듭한다.

  “그리고 이제 어린애도 아니니까 말투에 좀 더 신경을 쓰세요. 이곳은 란테 저택이라 높으신 분들이 들르기도 한다고요.”

  “네, 알았어요….”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의도한 대로 미라네는 자리를 벗어나는 걸 우선한 것 같았다. 간신히 포기하고 빨래터 쪽으로 달려가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듀이유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사실 미라네의 걱정은 근거 없는 게 아니었다. 그녀도 마을에서 지낼 무렵에, 출산의 과정을 두세 번 정도 가까이에서 봤을 것이다. 그것들에 비하면 이번 것은 분명히 중하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괜한 가르침이었으리라.

1년쯤 전에 태어난 왕의 첫 아이에게는 표식이 없었다. 허탕을 친 귀족들은 이제 자기들로부터 새로운 왕이 태어나지 않을까 하는 은밀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괜한 걱정이야, 듀이유.”

반쯤은 농담이 섞인 우려를 전하자 그녀의 주인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확실히 란테는 두 명의 왕을 배출했지만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닐까. 신은 분명 합당한 자의 옆에 후계자를 보내실 테니까.”

듀이유는 그런 그의 태도가 내심 불만스러웠다.

이 젊은 주인은 란테 가의 당주라는 중책을 맡은 뒤, 아무도 트집을 잡지 못할 정도로 착실하게 그 역할을 해냈다. 그러나 대외적인 평가는 현왕의 대리로서 란테 영지를 맡아 그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그 경향은 숱한 혼담을 걷어차고 영세 귀족을 배우자로 맞아들이며 더욱 강해졌다. 귀족들은 단지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성인이 될 때까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예상 밖의 존재들이 모든 걸 싹쓸이해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 평판은, 그가 지위에 걸맞은 강경한 태도로 나오기만 해도 어느 정도 사라질 텐데.

하지만 듀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바라는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무사히 출산을 마치고 별실에서 쉬는 그에게 뭐라고 첫 마디를 건네야 할지 망설였다.

물론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지만.

  “추… 축하드립니다. 무사히 태어나셨습니다.”

신께서 자신의 주인을 알아봐주셨다는 자랑스러움과 동시에,

  “이마에 표식을 받으신, 다음 왕이 될 자제분이십니다.”

그것이 이 부부를 행복하게 하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예감을 받으면서.

 

3-8

■건너편에서 부르는 소리

 

저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난다.

매달리며 괴로워하는 듯한 목소리다.

그녀의 것일까, 알 수 없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라 이제 귓속에 그 메아리만을 남길 뿐이었다.

발아래 까마득히 멀리서, 물은 흐린 색을 띄고서 평소와 다름없이 출렁였다. 그 밑바닥에 있다는 마의 나라의 모습은 어둠에 가려져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곳에 떨어졌다.

그 광경은 멀리서만 목격됐다. 그래서 그녀가 납치만 당했을 뿐, 아직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떨어졌다.

그날 밤의 추위는 아직 살갗에 남아 있었다. 성을 떠나기 위해 어떤 큰일을 마치고 그만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을 때였다. 내일이면 영지로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긴장에 풀렸을 것이다. 출산의 연결도 있어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밤중에 홀로 서 있었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뺨을 두드리며 발밑의 잎을 흔들었다. 그리운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쭉 살아왔던 곳. 앞으로도 살아갈 예정이었던 곳.

눈앞에는 달에 비친 잔물결이 여러 번 생겼다가 사라졌다. 그 물결이 가끔은 작은 손으로 보일 때도 있어서, 어릴 적에는 밤의 바다를 보는 게 거북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가슴의 이 술렁이는 느낌은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집 근처를 함께 걷고 있을 때, 그녀도 신경 쓰이는 것을 말했다.

  “혼자서 밖을 걷고 있으면 가끔 누가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녀는 그다지 바다를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당연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데. 이상하지.”

그건 혹시 이런 게 아니었을까.

저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난다.

철썩대는 수면을 건너와 겨우 귀에 닿는 조각난 소리.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소리는, 확실히 여기에 호소하기 위해서 생겨난 것으로 느껴졌다.

알아듣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가까이 다가가면 분명 더 확실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안 돼.

그 순간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쪽으로 가선 안 된다. 거기엔 땅이 없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꾸만 몸이 앞으로 나아갔다. 힘을 주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이건, 설마.

이건, 자신이 아니라….

발이, 허공을 밟았다.

머리를 흩날리는 바람, 내리치는 충격, 몸을 감싸는 섬뜩한 흐름. 그리고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도 가까이.

―기다리고 있어.

그 순간 그는 벌떡 일어났고,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사라졌다.

그날로부터 여러 해가 지났다.

벼랑 위에 선 그는 이번엔 해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선 곧 완성될 배의 모습이 보였다. 이 땅은 왕성에서 멀고, 사찰도 쉽지 않았다. 들켰다간 의심을 살 터였다. 목적에 비해 너무 크지 않냐고.

그녀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라고 허락을 받았으니 말이다.

저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난다.

그것은 어딘가 구슬프고, 얻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듯싶은 목소리였다.

 

3-9

■이 세계의 중심

 

침대에서 슬며시 나가려는데, 옷자락이 걸리는 감각을 느끼고 그는 움직임을 멈췄다. 처음에는 테두리 장식에라도 걸린 줄 알고 돌아봤다가, 작은 손을 발견했다. 꼭 움켜쥔 그 손은 여간해선 놔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것에 주의를 기울일 틈조차 없이, 달빛에 비친 어린 얼굴이 이미 눈꺼풀을 열고 있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 그대로, 작은 아들은 예상 밖에도 야무진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어디 가?”

  “가지 않아.”

  “…가려고 했잖아.”

  “밖에서 바람을 좀 쐬려고 했어. 금방 돌아올게.”

  “나도 갈래….”

비어있는 쪽 손으로는 금방이라도 감길 것만 같은 눈을 문지르면서, 잡은 손은 결코 떼어내려 하지 않는다. 이대로 재우려고 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그는 제 자식의 가벼운 몸을 들어 올렸다. 작은 함성과 함께 아이는 바짝 매달린다.

  “정말로 잠깐만 밖에 나갔다오는 것뿐이니까.”

  “응!”

이곳의 경치 따윈 매일 봐서 눈에 익었을 텐데, 무척 기쁜 듯 작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폭 안긴 몸에서는 높은 체온과 빠른 고동이 전해져 왔다.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가자 축축한 밤바람이 뺨을 쓸고 지나갔다. 달은 하늘 높이 휘영청 걸린 채 부드러운 빛을 발하고, 호수는 작게 일렁였다.

되도록 차가운 바깥 공기로부터 아이를 지키듯 감싸며, 그는 바깥이 잘 보이는 위치에 섰다.

  “바일은 아직 성에서 한 번도 나온 적 없어?”

  “응, 아직 없어.”

조금 쓸쓸한 듯 팔 안에서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밖이 어떻게 돼 있는지 잘 모르겠네.”

  “그렇지 않아. 아빠랑 유모랑 미라네가 얘기해 주니까. 많이 알아. 바깥에 대해.”

질문을 받고 싶은 듯 짐짓 가슴을 펴는 아이의 반응에, 그는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 그럼 저기 뭐가 있는지 기억해?”

  “어… 그건… 마을이 있고, 숲도 있고, …농교지가 있고, 산이 있어.”

  “맞아. 그리고 또?”

  “그리고…어…, 그리고…저택!”

  “맞아, 란테의 저택이야. 그리고 또?”

  “그리고… 그리고….”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 듯 미간을 좁히며 주름살을 만들고 묻는 말을 반복하는 아이를 향해,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아이의 말을 받아 이었다.

  “그리고 바다가 있어.”

  “바다.”

  “그래, 세상의 끝이.”

  “끝이… 뭐야?”

  “아무 것도 없는 곳.”

이 아이는 아직 모른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떻게 없어졌는지. 그 끝에 가버렸을까. 언젠가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 침울한 고민은 유독 뚜렷한 부정의 말에 의해 깨졌다.

  “있잖아, 그건 거짓말이야.”

쳐다보니, 아들이 확신에 찬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늘 그랬어. 여기엔 아무 것도 없다고. 그러니까 들어가면 안 된다고. 그치만 그건 거짓말. 왜냐면 들어가면 여러 가지 많으니까. 아무 것도 없지 않아.”

  “…그 말은, 들어가면 안 된다는 얘길 들은 곳에 몰래 들어간 적이 있다는 건가.”

그렇게 지적하자 앗, 하고 숨을 삼키며 작은 입을 가리지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다. 허둥대며 눈을 굴리다 곧 풀이 죽은 모습으로 물었다.

  “나쁜 아이…?”

  “착한 아이는 아니지.”

  “싫어졌어?”

  “그렇지 않아. 아빠도 가끔은 착한 아이가 아니었어.”

  “그래?”

  “그런 거야. 누구든지.”

  “그런가….”

대답하며 아이는 팔 안에서 작게 하품을 흘렸다. 아직 한밤중이니 슬슬 졸음이 돌아올 무렵일 것이다. 꾸벅꾸벅 고개를 흔드는 그 모습을 지켜본 후, 그는 재차 호수에, 숲에, 마을에, 초원에, 그 끝에 눈길을 준다.

  “아무 것도 없다는 건, 거짓말, 인가….”

더는 대답이 없었다. 품에 파고드는 작은 머리를 향해 그는 속삭였다.

  “있지, 바일. 언젠가 바다 얘기를 해줄게. 거기에 정말 아무 것도 없는지 확인해보고 올게.”

그러자 아직 완전히 잠에 들지 않았는지 불분명한 작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응, …약속….”

  “약속이야.”

 

바다가 세계의 끝이라면, 여기가 세계의 중심이었다.

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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