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이르아노・파질・네세레의 에피소드를 산발적으로 적당히 휘갈겨 쓴 시리즈. 완결."
*게임 본편과 연결되는 스포일러 有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1-1

아이들

 

복도 너머에서 휘날리는 옷자락을 그의 눈이 잡아챘다. 이쪽을 알아봤는지 황급히 발길을 돌리는 그 모습에 그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작은 소리 덕분에 주위를 걷는 위사와 시종들 사이에 긴장이 감돌았지만, 그는 그런 일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볼 담력조차 사라졌는가.

수풀 너머로 애타게 달려가는 첫째의 모습을 상상하면, 씁쓸한 기분과 함께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충동이 뒤섞여 가슴에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3대 국왕, 파질의 아이는 결국 그 정도란 말인가.

당장 여기서 뛰쳐나가 그 목덜미를 잡아채면, 그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리 하면 분명 매일 아침마다 마주하는 낯익은 얼굴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즉 저것이 자신의 본성이라는 말이다. 다만 제게는 도망갈 장소가 없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을 뿐.

모퉁이 너머로 그림자가 보였다. 남들보다 확연히 키가 작은 형체에, 설마 돌아왔나 싶어 파질은 의아해했다. 하지만 역시나 나타난 모습은 좀 전의 것과 달랐다.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어린애 특유의 고음이 분위기를 해쳤다. 유모를 따라온 둘째가 어른들의 행동을 흉내 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갔겠지만, 그가 걸음을 멈춘 건 아까 전의 일 때문이었다. 뜻밖의 움직임에 함께 서있는 아이와 유모가 움찔 떠는 것이 보였다.

  “뭔가. 무슨 필요한 거라도 있나?”

  “저…아뇨, 그, 아버님, 그게….”

유창한 인사와 달리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대답이 돌아왔다. 머리는 숙여진 채였지만 그 눈이 이리저리 구르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래서는 아무리 기다려봤자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그래, 그럼 됐다.”

파질은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떠나며 돌아보니 아이는 여전히 머리를 수그린 채 굳어 있었다.

신하들 중에는 아직 어린데도 잘 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시시한 놈의 시시한 짓을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은, 개에게 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덕인지 어느새 옥좌의 방 앞에 도착했다. 정중히 열린 문을 통과한 파질의 눈에 다시 낯선 것이 들어왔다. 옥좌 앞에서 멀거니 위를 쳐다보는 조그마한 것의 모습이었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아이들 중 어느 누구와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게 당연한 일인데, 전원과 마주치다니.

  “뭘 하는 게냐.”

호통을 치자 막내는 뛸 듯이 놀라며 이쪽을 돌아봤다. 그대로 다가가자 쭈뼛대며 몸을 움츠리긴 했지만,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질문에 대답은 없었다.

  “저걸 보고 있었나?”

옥좌로부터 대각선 위의 벽에 걸려 있는 것은 한 점의 그림이었다. 한 인물의 뒷모습과 쏟아지는 빛. 전대 왕이 그림으로 남기게 했다는, 르란트가 선정인을 하사 받는 장면이었다. 특별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치우기도 귀찮아 내버려뒀다. 일일이 보러 올 만한 건 아니었다.

  “저게 좋은가?”

재차 물어도 아이는 역시나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호소하는 듯싶은 눈동자로 이쪽을 계속 쳐다볼 뿐이었다. 아까부터의 일도 있어 파질의 인내는 기어코 거기서 끝을 봤다.

  “됐다. 썩 나가!”

언성을 높이자 어린 막내는 놀란 얼굴이 되어 겁을 먹고 도망쳤다. 길고 긴 한숨을 내쉬며 파질은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 그 그림이 보였다.

신으로부터 선정인을 받는.

자신이 관을 받은 지도 벌써 7년이 지났다. 세 명의 자식을 보았고, 그 중 어느 누구도 표식을 받지 않고서 태어났다. 그리고 표식을 가진 다른 누가 나타났다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 선정인의 소유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괜찮겠다고 파질은 생각했다.

벽은 세워졌다. 이제 놈들도 쳐들어올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벽의 망루에 파견된 위사들에게선 단 한 번도 침입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다. 이제 건국왕의 위세에 기댈 필요는 없어졌다.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걸로 좋다. 자식들에게 자리를 물려줄지 어쩔지는 모르지만.

  “뭐가 신의 증거냐.”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중얼거리며, 파질은 옥좌 깊이 몸을 기댔다.

 

1-2

꿈자리(夢枕)

 

그는 홀로 옥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멀리 보아도 그 끝에는 아무도 없고, 공허한 침묵만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여기가 어딘지 알았다. 수없이 들렀던 장소였다.

눈을 살짝 치켜뜨자 걸려있는 그림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안에 서 있는 남자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이쪽을 노려봤다.

  “서두르지 마라, 선왕이여. 자네가 죽어버릴 그때 거기다 그렇게 초상화를 걸어주지. 뭐, 그리 먼 날도 아닐 거다.”

그렇게 대답하자 그림 속 사내는 무척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남자를 좀먹던 죽음의 병을 낫게 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 느끼기에는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을 것이다. 후계자 확보에도 실패한 지금으로선, 잔당이 복귀할 가망도 뿌리 뽑아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비를 베풀어줄 마음마저 들었다.

그런 농담을 하다 문득 등 뒤의 기척을 느꼈다. 이동해서 온 게 아니라, 솟아나온 기척.

  “또 나타났나, 마물 같으니라고.”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팔꿈치를 굽혀 주먹 위에 턱을 얹었다.

  “이런 살풍경한 자리의 어디가 재미있다는 건지 모르겠군.”

다가오는 기척을 향해 그렇게 내뱉는 순간, 달콤한 꽃의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기분은 어떠신가요, 사람의 왕의 아이여.”

그는 그 부름을 콧방귀로 갚아주었다.

  “아직도 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느냐. 멋대로 들이닥치고, 여전히 건방진 놈이야.”

그러자 낄낄거리는 웃음과 함께 양 어깨에 두 개의 희고 가는 팔이 걸쳐졌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몹시 차가운 감촉이었다. 그는 다시금 여봐란 듯이 숨을 내쉬어 보였다.

  “뭐 됐다. 신이 나타나는 것보다, 네가 나타나는 게 내게 걸맞다는 거지.”

이 여자의 첫 방문은 언제였던가. 돌이켜보니 별로 바라지도 않는 밀회를 몇 번이고 거듭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라는 건 안다. 느껴진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면 그 얼굴을 전혀 특정할 수 없었다. 남은 것은 어렴풋한 초조함뿐.

뺨을 바늘 같은 손가락이 기어간다. 다시 그 문답을 시작하려는 것이겠지.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여자는 속삭였다.

  “사람의 왕의 아이여,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정말이지 질리지도 않는군, 너는. 그게 몇 번째 질문인지조차 기억하지 않는 건가.”

그는 앞을 바라보며 명료한 목소리로 선언한다.

  “변하지 않는다. 계속 나로서 남아있는 것 이외의 바람은 없다. 나도, 나의 피와 살인 이 나라도,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겠다. 신이 됐건 마(魔)가 됐건.”

그와 동시에 여자의 손목을 잡았지만, 갑작스런 행패에 의한 동요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팔을 잡아당기며 그는 작게 물었다.

  “번번이 나에게만 따지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너도 슬슬 속내를 토해내는 게 어때.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냐, 마물아.”

힘을 풀지 않았는데 팔은 스르르 달아났다. 조롱하는 듯한 노랫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부질없네, 부질없네. 그대들은 무(無)를 모르기에 잊어버리고, 무(無)를 알기에 귀를 닫았으니. 그러니 나는 말하지 않으리. 오직 사람의 왕을 제외하고.”

  “이런, 그리로 돌아가는가.”

완곡한 말장난은 질색이었다. 그는 다시금 의자에 깊숙이 앉아 팔꿈치를 짚었다.

  “상관없다. 듣고 싶지도 않아.”

기척은 희미해져 간다. 그는 제 앞에 놓인 비단길을 바라보며 한 마디만을 중얼거렸다.

  “또 찾아올 셈이냐?”

대답은 없었다.

 

1-3

후계자

 

앞으로 5년 정도면, 자신은 이 자리에서 쫓겨난다.

파질은 옥좌에 앉아 다음 일정까지의 짧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것은 두 장의 그림. 표식만이 눈에 띌 뿐 왠지 모르게 인상이 희미한 남자와, 그에 맞춰 그리도록 한 자신의 초상화였다. 지금보다 젊은 자신이 도전적으로 이쪽에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머잖아 새로운 왕이 그들에게 노려보아질 터였다.

5년.

새삼스레 생각하지 않아도 무척 짧은 기간이다. 마음에 둔 여러 시책을 모두 실행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을 늦출 방법은 있다. 예를 들어, 신의 나라에서 마중 오기 전까지 양위를 실시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렇게 선언하기는 쉬웠다. 어쨌거나 (다음 계승자가) 성인이 되면 왕을 교체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였으니까. 게다가 후계자의 출신을 위해 그가 왕을 계속하는 데 공공연히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정한 것인 만큼, 그 규칙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일찍이 노이란트와 대치했을 때의 일이 기억났다. 성인이 되자마자 지지자들을 데리고 이 성에 뛰어들었다. 옥좌에 앉아 맞이하는 노이란트 일당에게 그는 선언했다.

  “이제 자웅은 가려졌다. 경애하는 르란트를 본받아 미련 없이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게 좋아.”

르란트 실종 후, 드니누스[각주:1]의 탈취 행보가 못마땅한 자는 많았다. 이곳의 내부 분열에 정신을 팔았다간, 그 두 종족의 칼날이 다시 겨눠지는 것도 버텨낼 수 없기에 온건하게 추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틈타, 드니누스와 그 추종자들은 곡창지대를 비롯한 요충지를 점거했다. 영웅들도 세대가 바뀐 지금,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안심해라. 너의 마지막 대사업도 물려받는다. 놈들을 가로막는 벽은 내가 완성한다.”

그리하여 3대 국왕은 옥좌에 올랐다.

영토의 선은 다시 그어져, 드니누스는 북쪽의 적설지대 근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은 곡창지대의 끝자락으로 자유로이 먹고 사는 데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원망을 살 이유 따윈 전혀 없었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그의 회상을 중단시켰다. 시종 한 사람이 기다리던 사람의 방문을 알림과 동시에, 그는 일어서지 않은 채 방문자를 맞이했다.

  “왔나, 네세레.”

파질의 부름에 돌아온 것은 날카로운 시선과 무거운 침묵이 전부였다.

이 후계자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처음 그를 접한 교사나 시종은 어김없이 당황하며 보고를 올렸다.

말을 못하는 건 아니다. 질문하면 대답하고, 말을 걸기도 한다. 단지 필요한 것 이외에는 철저히 말하려고 하지 않는 거다. 인사나 농담 따윈 당치도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하게 주어진 과제를 해치웠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전지식이 갖춰진 지금, 일주일에 한 번은 파질이 직접 왕으로서의 실상을 가르치는 시간을 갖게 됐다. 이 짧은 시간, 옥좌의 방으로 이어지는 골방에서 두 사람이 대치했다.

  “왕이란 무엇인가.”

자리에 앉아 그리 물은 것은 방금 전의 추상이 남은 탓이리라. 순식간에 앞에 앉아있는 네세레의 눈썹이 불쾌한 듯 찌푸려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입을 다문 채인 그의 반응을 잠시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내뱉기라도 하듯이 나직하게 대답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그렇군. 그럼 너는 그런 것이 될 생각이군.”

그 순간 노려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지만, 당연히 파질이 그런 것에 흔들릴 리가 없었다. 네세레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시 목소리를 쥐어짰다.

  “별로 되지 않아도 상관없어.”

  “왕을 폐할 건가.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려면 너는 왕이 되어야 한다. 고로 너는 네 말대로 아무 것도 아닌 왕이 될 거다.”

반박하지 못해 분한지 이를 빠득 갈던 네세레가 되물었다.

  “그럼 네가 생각하는 왕이란 뭐냐.”

그것은 예상하던 질문이었다. 파질은 단박에 대답했다.

  “간단한 것이다. 왕이란 나라다. 나라의 형태가 왕의 형태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표정을 더욱 험악하게 짓는 네세레더러 마음가짐을 일러줬다. 원래 지금은 그러는 시간이다.

  “스스로가 바라는 대로의 나라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왕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옥좌에 앉는 자다. 그렇다면 옥좌 따윈 당장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 된다. 후세에 전해지는 기틀을 잡은 왕은 언제까지고 계속 왕으로 남을 것이다.”

옥좌에 앉는 왕은 갈아치울 수 있는 존재여도 상관없다. 르란트는 떠났고, 노이란트는 쫓겨났다. 그럼에도 이 나라는 사라지지 않는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표식을 가진 자가 나타난다면 곧장 받아주면 된다.

주어진 시간 동안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자는, 아무리 시간을 끌어봤자 계속해서 이루지 못한 채로 있게 된다.

  “앞으로 5년이다. 너도 아무 것도 아닌 것 외에 달리 생각해두도록.”

  “…해 주지.”

악물린 잇새로 그 신음은 새어나왔다. 울화를 담아 다음 왕 후계자는 선언한다.

  “그렇다면 네가 남긴 모든 것을 없애주겠다. 네가 있었던 일 따위, 모두 잊어버리도록.”

파질은 그 말을 듣고 히죽 웃었다.

  “그런가. 그럼, 기대하고 있겠다.”

 

1-4

지나온 길

 

형제는 많았다.

하지만 한 명도 남지 않았다.

맏형은 왕명을 받아 아버지와 함께 국경 시찰에 나섰다가 전원 말할 수 없는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그 시찰 도중에 불운하게 기습당한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둘째 형은 어느 비 오는 날 저택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잘못 넘어졌다.

한 살 아래의 동생은 자신과 함께 독에 당했고, 이겨내지 못했다.

그 아래의 이부동생은 날 때부터 몸이 약해 철이 들기도 전에 산으로 떠났다.

막내 동생은 좀 더 나았지만, 결국 칩거를 넘기지 못했다.

아버지를 여읜 후 실질적인 란테의 당주로서 지휘하며 뒷배를 얻기 위해 재혼한 어머니도, 병을 얻어 그 무렵에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돼 있었다.

깨달았을 땐, 주변에 먼 친인척과 추종자들뿐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많은 이익을 챙겨가려 그에게 다가왔다.

그런 건 별로 상관없었다. 피차일반이다. 대가가 있어야 사람은 움직인다.

그들이 내민 것 중에서 배우자를 골라 자식을 낳았다. 아내를 잃었지만 자식은 남았다.

  "그리고 네가 넷째 아이란 얘기다."

그렇게 말을 마치자 심하게 찌푸린 얼굴이 되돌아왔다. 다소 언짢았지만, 그의 태도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드물게 네가 먼저 묻기에 대답해준 것인데, 지나친 태도로군."

  "네 가족에 대해선 별로 관심 없어."

  "그렇다면 왜 물어봤나."

  "네 약점이 없나 짐작했을 뿐이야."

  "그래? 있던가?"

대답이 없는 게 답이었다.

네세레는 표정을 무너트리지 않은 채, 얘기를 딴 데로 돌리려는 지 다른 것을 물었다.

  "…재혼은 생각하지 않았나."

  "그래, 그런 얘기가 있었다."

아직 충분히 젊은 왕이었고, 후계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말이 나오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네가 왔으니까. 흐지부지됐다.”

  “나, 남의 탓 하지 마!

  “네 탓을 하진 않았다만. 이상한 놈이군.”

지적하자 네세레는 부루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는 건방진 얼굴도 이럴 때만은 왠지 어린애 같다.

  “하나 재밌는 걸 알려주지.”

그러니 일부러 그렇게 운을 뗀 것은 덤을 쥐여 주는 기분에서였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엔 아직 분열 전쟁을 겪은 자들이 많이 살아 있었고, 르란트의 지휘를 직접 겪은 자도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나타나기 전의 삶을 아는 자도. 그런 자들 중의 한 사람에게 들은 얘기다.”

네세레의 얼굴이 이쪽을 향해 있지는 않지만, 귀를 기울인 기색만은 전해져 왔다. 이 나라에 르란트의 얘기에 관심 갖지 않는 사람은 적고, 네세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자는 머뭇대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대놓고 말할 수 없지만, 르란트가 일어섰을 때 반대 세력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중에 이런 소문이 떠돌았다.”

노인은 아무도 듣지 못하게끔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확실히 그 말이 혈기왕성한 사람에게 들어갔다간 큰일이 났을 법했다.

  “르란트는 초원에서 왔다, 갑자기 거기서 나타났다, 라고.”

르란트의 출신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그런 소문이 돌 여지도 충분했다.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뭐가 됐든 상관없는 일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르란트조차 그런 취급을 받았다는 거다.”

명백한 귀족 출신인 파질조차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부정으로 주워온 자식, 표식 조작 의혹까지 온갖 악담이 쏟아졌다.

  “우리는 그렇게 다뤄지는 존재다. 네가 가족을 약점으로 여긴다면 만들지 않는 게 제일이겠지.”

그렇게 말을 마치자마자 작은 방 안에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결국 그렇게 돌아가는 건가.”

네세레가 주먹을 책상에 내리치며 일어섰다.

  “잘 알았다. 너에게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 따윈 없었고, 없어. 가족도, 아이도, 물론 측근들도… 게다가 본인도. 그러니 그렇겠지.”

그는 계속해서 주먹을 책상에 내리치며 신음하듯 말을 이었다.

  “…너는, 나를 너처럼 만들고 싶은가.”

  “정말이지 오늘은 왜 그러는 거냐.”

  “내가 살해당하면, 틀림없이 너는 희희낙락 왕을 계속하겠지.”

  “신변의 위협을 느꼈거든 똑바로 그때의 상황을 말해라. 대책을 세우겠다.”

  “됐어! 난 너의 교체용 부품이 아냐!”

대꾸할 틈도 없이 네세레는 분노하며 방에서 나가버렸다. 남겨진 파질은 당연히 쫓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반쯤 열린 문을 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자신의 아이들도 저런 태도를 취한 적은 없었다.

  “어려운 나이라는 건가. 잘 모르겠다만.”

파질의 그런 중얼거림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고 사라져갔다.

 

1-5

시의(猜疑)의 순간

 

몸이 좋지 않음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나이를 헤아리면 벌써 쉰에 가까워, 오히려 늦게 알아차린 편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있어 내키지 않는 사실이었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기도 했다.

애당초 친족과 신뢰할 수 있는 사용인들만 남긴 저택이었다. 굳이 고집 부릴 필요는 없었겠지만, 스스로가 불편할 때의 처신에 익숙지 못했다. 그 결과, 원래부터 까다로운 경향이 있었던 그는, 그 경향이 더 심해졌다.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사용인에게 더욱 대하기 어려운 주인이 된 것이었다.

장난삼아 불합리한 요구를 해오거나 하지는 않지만, 업무의 질에 있어서는 한층 더 엄격해졌다. 그로 인해 사용인들이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지 않게 됐으니, 양측 모두에게 좋은 거리감을 유지하는 결과가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와중에, 오직 그녀만이 불려가지 않아도 그 곁을 드나드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여기저기 얼굴을 내미느라 집을 비우는 일이 잦은 남편 대신에, 그녀가 실질적으로 저택의 유지를 총괄하는 역할인 탓도 있었다.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그러며 찾아가는 그녀 역시, 그의 기분이 나쁠 때는 무작정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꺾이지 않고 계속해서 다녀가, 어느덧 그것은 당연한 광경이 되었다. 파질이라고 해서 기분이 나쁠 때만 있는 것은 아니라 말벗을 필요로 할 때도 있었다.

그런 변함없는 날들 중, 그녀가 불쑥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저는, 여기 있어도 괜찮을까요.”

  “뭐냐. 다른 용무가 있거든 빨리 가면 될 것을.”

쌀쌀맞은 답을 들은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 방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이 저택에, 말이에요.”

  “무슨 얘기 들었나?”

  “아뇨. 하지만 대를 잇지도 못한 이대로는 란테 가에 폐를 끼치기만 할까 봐.”

그녀가 란테에 시집을 온 지도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처음에는 당연히 기대하고 있던 후사의 탄생도 이 무렵에는 입에 올리기 꺼려지는 일이었다.

  “뭐야, 그런 일이냐?”

그러나 파질은 그런 우려를 코웃음 치며 일축했다.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란테는 망하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저는 좀 곤란합니다.”

  “너는 쓸데없이 정직하군. 뭐, 그땐 네 친정에서 혼인을 빙자해 란테를 삼키면 된다. 제법 먹을 만한 데도 있겠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무슨 뜻이냐고 눈짓으로 물어도 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채근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파질도 재차 묻지 않았다. 대신 기막히다는 듯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왠지 너는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구나. 놀랄 만큼 솔직한가 싶더니, 느닷없이 이해 못할 말을 하고 입을 다물지.”

투덜거리는 그의 말에 그녀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파질 님, 제가 처음 찾아왔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아니, 아마 후작이 성에 데리고 찾아왔거나 그랬는지.”

  “그렇겠죠…. 저희는 아마 닮은 부부일 거예요.”

더욱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으로 말을 흐려, 이제는 추궁할 마음도 사라졌다.

  “뭐 됐다. 네가 떠나고 싶다면 떠나도 돼. 그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한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어찌된 행운인지 바라 마지않던 것이 주어졌으니.

  “고맙습니다, 파질 님. 덕분에 제 소임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사하러 온 그녀를, 파질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맞았다.

  “아직 몸이 좋지 않으신가요?”

  “이제 슬슬 떠날 나이다. 어쩔 수 없지.”

  “너무 무리하시지 마세요.”

  “너희들한텐 유감이겠지만 아직 뻗을 생각 없다.”

  “예, 오래도록 잘 부탁드려요.”

  “리일은 어떠냐.”

  “변함없어요. 별로 영향이 없는 것 같아….”

  “그래, 나도 그랬으니까. 내력인지도 모르겠군.”

납득한 듯싶은 파질의 모습에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부디 아버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셨으면 하고.”

  “그런 건 너희들이 결정하면 되겠지.”

  “아뇨, 부디.”

거기서 재차 물러서지 않을 자세를 알아본 파질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별로 나쁜 기분도 아니었다.

  “알았다. 생각해두마.”

 

1-6

장송(葬送)의 섬

 

그 섬은, 제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한 바퀴 돌아보는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그러나 무성한 초목이 그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부터 슬그머니 숨기고 있었다. 게다가 그 초목들은 한없이 뻗친 것이 아니라서, 명백히 사람의 손길이 닿았음을 곳곳에서 느껴지게 만들었다.

어째서 이런 곳에, 이런 남자와 단둘이 있어야 하는지, 네세레는 알 수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서 억지로 끌려왔다. 당연히 그의 기분은 최악으로 치달아, 앞서 혼자 나아가는 남자의 등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도 걸음을 멈추고 투덜대면서도 여기저기 둘러본 건, 이게 좋은 기회인 탓도 있었다. 배에서 내린 뒤로 자기들 곁에는 단 한 명의 수행원도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무슨 목적인지 네세레는 미심쩍게 여겼다. 여기까지 발을 옮겨야 할 만큼 남들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은 얘기라도 있는 걸까. 성 안에서조차 안심하고 꺼내지 못할 말이라면 얼마나 중요한 얘기길래?

그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봤자 어차피 왕이 되면 어쩌고 하는 말일 게 분명하니까.

자연스럽게 찌푸려지는 미간을 느끼며 네세레는 땅바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찾아 곧바로 발길질을 하며 그 위에 쓰러졌다. 등 뒤의 이상한 낌새에 파질이 반응했지만, 걱정하며 다가올 리도 당연히 없었다. 슬쩍 돌아볼 때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는 예상대로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으므로 수상하게 여겨질 일도 없이 네세레는 그것을 입수할 수 있었다. 이제는 틈을 살필 뿐이었다.

하지만 배후를 노릴 기회는 곧 없어지고 말았다. 수풀을 돌았을 때 파질이 걸음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들통 난 건가 싶어 몸이 굳은 네세레는, 거기 있는 것을 보고 애초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커다란 두 개의 비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훌륭하게 장식된 그것은 잠시 신상으로 착각할 정도였지만, 새겨진 글자를 읽고 네세레는 그 정체를 알아봤다.

무덤이다.

마치 아네키우스 그 자체인 듯한 형태로 하늘을 바라보는 초대 국왕 르란트와, 그 뒤를 따르듯 세워진 2대 국왕 노이란트. 여기는 왕들이 잠든 곳이다.

그것을 인지한 네세레의 가슴 속에 솟구친 것은 강렬한 위화감이었다. 어째서 이 남자와 이런 자리에 서 있는 걸까.

남자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불손한 옆얼굴만 봐도, 설마 망자를 애도하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닌 듯싶었다. 애당초 그런 감정이 있을 리 없는 놈이었다.

그렇다면 목적은…과시나 계승일 것이다.

  “여긴 뭐냐.”

어느 쪽이든 실례겠지만, 말없이 서있는 것도 기분 나쁘다. 어차피 들어야 한다면 빨리 끝내고 돌아가는 쪽에 내기를 걸어보는 게 나았다.

네세레의 질문에 파질은 코웃음 쳤다.

  “보다시피. 모르겠나?”

  “건국왕의 유골도 담겨 있는 건가.”

  “설마. 안은 비어있다.”

그 말투는 실제로 본 것 같았다.

  “꺼내봤나?”

  “헛소리 마라. 내가 만든 거다.”

유골 없는 묘비를 이토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짓는 것 따위는 이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 소행이었다.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더니, 파질의 시선은 2대의 상에 쏠려 있었다.

  “놈을 끌어내릴 때 그럴싸한 무덤에 묻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지킨 것뿐이야.”

그런 이유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세운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로서 여기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끔씩 쳐다보며 만족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스스로의 상상에 메스꺼워진 네세레는 묘비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그러다 조금 떨어진 곳의 작은 비석을 발견했다. 방금 본 것에 비하면 작지만, 근처 마을에 있으면 꽤나 대단하게 보일 성싶었다. 마찬가지로 무덤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왕릉인 이 섬에 다른 쓸데없는 것을 둬도 괜찮은 건가.

아마 업적 같은 걸 기록해둔 비석일 거라며 새겨진 글자를 무심코 읽은 네세레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그것은 틀림없이 무덤이었고, 거기 새겨진 이름은 낯익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영영 잃어버린 사람의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다음 왕의 부모다. 문제는 없겠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주눅 든 데라곤 없는 목소리에 네세레는 말을 잃고 돌아섰다. 제게서 저들을 빼앗아간 장본인이 일말의 꺼림칙함도 없는 모습으로 우뚝 서 있었다.

  “뭔가 더해주고 싶으면 네가 왕이 된 뒤에 마음대로 해라. 이곳은 정기적 순찰과 청소부 이외엔 왕밖에 드나들지 않는다.”

  “너…네가 죽인 주제에…!”

간신히 내뱉은 비난은 스스로도 분명히 알 수 있을 만큼 동요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는 파질의 눈썹 하나 까딱하게 만들 수 없었다.

  “당연하지. 다음 왕을 납치하려 했던 대역죄인이었다.”

  “그럼 이런 어중간한… 흉내….”

묘한 동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분한 나머지 눈물이 흘렀다.

  “너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 죄는 벌로써 씻어졌다. 뒤에 남은 것은 나의 백성, 죽은 자에겐 죄가 없어 장례를 치렀다.”

제멋대로의 이론을 내뱉은 파질이 히죽 웃었다.

  “너 역시 내가 죽었을 때 조문하면 된다. 선왕을 장사지내는 것 또한 왕의 일이니까.”

  “시끄러워!”

외침과 동시에 네세레는 그만 품에 감추고 있던 돌을 욱하며 내던지고 말았다. 공격이 명중할 리도 없고, 돌은 간단히 파질의 굵은 팔에 튀었다.

  “얘기하지 않아도 너 따윈 묻어버리겠어! 거기다 굴욕적인 비문을 붙여줄 테니까!”

도발이 분명한 말에 파질은 꿈쩍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 부탁한다.”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 유일하게 맺어진, 그리고 실현될 수 없는 약속이었다.

 

 

 

 

 

  1. '드니누스'라는 인물은 게임 속 이벤트, 신전 44「성도」에서도 언급됨 [본문으로]
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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