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이르아노・파질・네세레의 에피소드를 산발적으로 적당히 휘갈겨 쓴 시리즈. 완결."
*게임 본편과 연결되는 스포일러 有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2-1
■발견
네세레・테이르후=리탄트=란테.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새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갖는 의미 이전에, 자신의 본래 이름조차 확실히 알지 못할 만큼 당시의 그는 어렸다.
그로서는, 뭐가 뭔지도 모르는 틈에 끌려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뜻 모를 말들을 듣고, 완전히 혼란스러웠을 따름이었다.
“저, 오늘의 추천은 덩굴장미로 짠 바구니예요. 그밖에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그렇게 말했더니, 다들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웃기만 했다. 말이 통하는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갖가지 음식을 주고는 목욕까지 시켜준다. 지금까지 비슷한 일이 없지는 않았다. 촌마을에서 번화가로, 번화가에서 촌마을로, 넘나드는 봇짐장수가 가져온 물건뿐만 아니라 이야기도 파는 것과 같은 일이다. 목청을 높이는 어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구석에서 음식을 받거나, 잠을 재워주거나, 그런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틀림없이 여기는 ‘자산가’의 집일 거야.
그는 그렇게 짐작하고 얌전히 있기로 했다. 그러면 분명히 부모님께 칭찬받을 터였다. 내일 아침이면 늘 그래왔듯이 데리러 와 줄 것 같았다.
물론, 그 예상은 빗나갔다. 다음날 방에 나타난 방문자는 완전히 낯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흠, 과연.”
키가 유달리 큰 그 남자는 나타나자마자 그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내뱉었다.
“그 이마에 빛나는 건 확실히 선정인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남자의 체구와 의복의 굉잠함에다 거느리고 있는 인원수까지, 네세레는 그에 압도되어 그저 눈이 휘둥그레질 뿐이었다. 그래도 이것이 ‘높으신 분’이라고 생각해 쭈뼛대며 인사를 했다.
“간밤엔, 감사했습니다…. 그… 촌장님?”
순간 네세레는 자리의 분위기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전전하며 살아온 그는 그런 기미를 알아채는 덴 서툴지 않았다. 뭘 잘못한 건지는 몰라도, 이럴 땐 어쨌든 사과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죄, 죄송하….”
“머리를 숙이지 마라.”
순간 머리통에 힘이 가해졌다. 억지로 고개가 들린 네세레는 더욱 영문을 알 수 없게 됐다.
“네가 배워둬야 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알아둬라.”
“…송구합니다만 폐하, 그건 좀 가혹하지 않습니까. 듣기로는 이 아이는 완전히 서민으로 자랐고, 게다가 여기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머저리인가, 네놈은.”
남자가 본인보다 제법 나이 많아 보이는 사람의 말을 딱 자르는 광경 또한 네세레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금까지는 대체적으로 나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
“이건 네 아이가 아니다. 다음 왕이지. 너는 무슨 연유로 그런 주제넘은 참견을 하는 거지?”
“예….”
여기는 이상하다.
네세레는 더 이상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고, 이 상황을 설명해줄 사람을 간절히 바랐다. 그 사람이란 물론 아빠엄마의 모습이었다.
여기는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 어디 있어?”
반쯤 울먹이며 중얼댄 그 목소리에 반응한 것은, 뜻밖에도 이 자리를 지배하고 있는 남자였다.
“아버지인가. 여기 있다.”
“어?”
자신이 못 봤던 건지 네세레는 남자를 둘러싼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둘러봤다. 하지만 낯익은 얼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있기는커녕, 너도나도 네세레와 눈을 마주치면 어색한 듯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또 머리가 잡혔다. 네세레의 눈앞에 다가온 그 남자의 준엄한 얼굴이, 완고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내가 이제부터 네 아버지다. 알겠나.”
물론, 어린 네세레로서는 그 진의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2-2
■해후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네세레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낯선 곳에 익숙해지기는커녕, 나날이 어색해지는 것만 같았고, 어느덧 당혹스러움을 나타내는 것조차 어렵게 돼 있었다. 처음에는 동정이 섞인 말투로 대해주던 시종들도 우울해 반응이 적은 네세레에게 애를 먹기 시작했다. 그들은 파질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제 자식조차 엄하게 다루는 파질이, 후계자라는 인간이 매일 울며 지낸다는 걸 용납할 리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종들은 어떻게든 네세레를 교육시키려 했지만, 그런 이해타산이 빤한 행위는 그를 더욱 위축시킬 뿐이었다.
그는 거의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힌 채 호수를 바라보며 지냈다. 식사도 점점 줄었고 안색도 좋지 않았다. 그에 비례하듯 시종들의 낯빛도 어두워져갔다.
그런 시종들의 얼굴에 약간 핏기가 돌아온 적이 있었다. 방에 손님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의사나 예인들보다 기대를 걸어볼 만한 작은 손님이.
“네가 네세레야?”
실제로 그런 말을 들은 네세레는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자기 또래 아이의 모습은 그를 놀랍게 만들고 대화를 이끌어내는 데 충분한 요소였을 것이다. 네세레는 머뭇머뭇 되물었다.
“누구…?”
“나는 리일. 셋째 왕자야.”
겁은 많아도 대범하게 행동하고 싶어 하는 첫째 왕자나, 무슨 일이든 소홀히 하지 않는 둘째 왕자에게 꼬드겨져 찾아온 거겠지만, 동갑내기인 데다 온순한 셋째 왕자는 친구 삼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보였다. 솔직히 이야기가 활기를 띈다고 보기는 어려워도, 도망치거나 침묵하진 않으니 대화는 성립된 듯싶었다.
“있잖아, 그건 신님께서 주신 거지?”
아무래도 셋째 왕자의 관심은 선정인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네세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받았어?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어?”
“저기, 이건…분명히 부딪혀서 그런 거라고 아빠가.”
“틀렸어. 그건 신께서 주시는 거라고 했으니까. 저기, 신은 어땠어?”
“어… 모르겠어.”
“신전에 있는 거랑 달라?”
“…모르겠어.”
“신전에 안 가봤어? 그럼 가자. 알려줄게.”
두 사람의 궁합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태 방에서 나오려 하지 않던 네세레의 손을 잡고, 리일은 밖으로 나왔다.
이걸로 어떻게든 기분을 바깥에 돌리지 않을까, 시종들은 기도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대로, 끌려가며 처음으로 제대로 밖에 나온 네세레는 새삼 자신이 있는 곳에 놀라게 됐다. 커다랗고, 돌로 가득하고, 사람이 많았다. 축제에서도 본 적 없는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뭔가 속삭이고 있었다.
지금 있는 신전도, 본 적 없는 천장의 높이에 압도돼 입을 떡 벌리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네세레에게 리일은 양각 부조를 가리켰다.
“봐, 신은 저렇게 생겼었어?”
“모르겠어…. 만난 적도 없고….”
“어? 없어? 표식이 있는데?”
“응―.”
여기 온 뒤로부터 몇 번이나 비슷한 얘길 들은 것 같았지만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곤란해하는 네세레의 모습을 보며 리일은 무슨 일인지 짐작한 듯했다. 그는 다시 네세레의 손을 붙들고 걷기 시작했다.
“자, 여기!”
왔던 길도 가물가물한 네세레는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무척 거대한 문 앞에 끌려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길게 이어진 융단 끝에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이상한 곳이었다.
“봐, 저거 말이야, 옛날의 왕.”
의자 근처까지 가자 한 장의 커다란 그림이 보였다. 리일이 해설을 시작했다.
“신께서 왕이 되라면서 주셨대. 네 그거랑 같은 거. 아버님께도 있어.”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이마가 신경 쓰이는 네세레였지만, 아무리 눈을 위로 올려도 문제의 표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곤욕을 치르는 네세레의 귀에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가 날아들었다.
“그러니까 너는 어른이 되면 왕이 되는 거야.”
“어른이 되면 어엿한 상인이 될 거라고, 아빠가….”
“아냐, 왕이 되는 거야.”
“아빠가….”
“내가 어쨌다는 거냐.”
별안간 큰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리일의 손이 움찔 떨리는 게 네세레에게 전해졌다. 네세레도 몸이 굳어져 있었다. 그 목소리는 그 남자의 목소리기 때문이었다.
문 건너, 많은 측근들을 거느린 거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슬슬 각오를 다졌나? 그럼 거기서 보고 있어도 상관없다.”
남자는 주저 없이 의자까지 다가와 털썩 앉았다. 여전히 위압적인 기세에 눌렸지만, 옆에 리일이 있다는 게 네세레에게 약간의 용기를 줬다. 그는 남자에게 목소리를 쥐어짜 호소했다.
“저, 아빠랑 엄마한테, 돌려보내주세요!”
그러나 돌아온 것은 싸늘한 시선이었다.
“아버지는 여기 있다.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재작년에 산으로 갔다. 게다가 너는 이제 곁에서 함께 잘 유모가 필요한 나이도 아니다.”
“달라요. 아빠는 아버지가 아니고, 아빠….”
“호오.”
공기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뭐가 잘못됐는지는 모르지만, 남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것만은 네세레에게도 분명히 전해져왔다.
“즉 네 아버지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
“달라….”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
위축돼 움직일 수 없게 된 네세레를 그 자리에서 구해준 것은 리일이었다. 단지 맞잡은 손을 놓는 걸 잊어버렸을 뿐인지도 몰랐다. 네세레는 도망치는 그에게 끌려가며 옥좌의 방에서 함께 굴러 나왔다. 남자는 쫓아오진 않았다.
“안, 안 돼, 아버님을 화나게 하면….”
리일의 충고는 너무 늦었고, 네세레는 무척 겁에 질려 울먹이느라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가자. 같이 갈 테니까.”
결국 네세레는 그 뒤로 다시 한동안 방에 틀어박히게 돼, 시종들의 낙담이 깊어졌다.
2-3
■주벌(誅罰)
그것은 난데없이 찾아온 희소식이었다.
“있지, 네세레의 아버지랑 어머니를 만날 수 있대!”
뛰어 들어온 리일에게 그렇게 귀띔을 받고, 글씨 연습을 하던 네세레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나서 입을 열어 되물으려 하자, 리일에게 가로막혔다.
“쉿. 아버님께 들키면 안 되니까. 비밀이야, 비밀.”
시종들의 귀를 피해, 두 사람은 방의 구석으로 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눴다.
“사용인 중에 한 명이 비밀이라면서, 알려주랬어. 네세레한테. 주일 예배 때 아버지랑 어머니가 뒷문에서 기다린대.”
“그치만… 아빠랑 엄마는 내가 필요 없어서, 그… 그 사람한테 보냈다고….”
“누군가한테 들었어?”
“응.”
“아냐. 네세레는 왕이 되어야 해서 여기 왔어. 네세레의 아버지랑 어머니는 훌륭하신 분들이야.”
리일이 딱 잘라 말하는 바람에, 고개를 숙인 네세레는 그제야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기운을 북돋아주려는 듯, 리일은 네세레의 손을 잡았다.
“그치만 틀림없이 아버님은 화내실 거야. 그러니까 비밀이야. 내 유모도 갑자기 없어졌는데, 보고 싶다고 아버님께 말씀드렸더니 혼났으니까.”
혼난다는 말의 네세레의 손이 조금 떨렸지만, 이어진 조언 덕에 곧 괜찮아졌다.
“그러니까 나, 몰래 만나고 있어. 네세레도 그렇게 하면 돼. 그러면 혼나지 않을 거야.”
“…응!”
‘아버님’께 혼나는 건 역시 무서웠지만, 그 이상으로 부모를 만나자는 권유는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예배 당일, 네세레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처음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척하며 리일이 데려다 준 하인의 뒤에 계속 보고 싶어 하던 모습이 있었다. 그들 역시 네세레의 모습을 알아보고 수척한 얼굴이 밝아졌다.
“아빠! 엄마!”
“네세레, 네세레! 무사했구나…!”
안긴 따스함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아, 네세레는 드디어 버려진 게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기쁜 나머지 그는 아빠에게 매달려 혀짤배기소리로 보고했다.
“아빠, 있잖아, 글을 읽을 수 있게 됐어. 어엿한 상인이 되려면 글을 읽을 수 있는 게 좋잖아, 그러니까 있지….”
“응, 알겠다, 알겠어. 이따 들을 테니 일단 여기 들어와.”
하지만 어째선지 부모님은 얘기를 들어주지 않고, 네세레를 짐칸 구석의 나무상자에 밀어 넣으려 했다.
“어, 뭐하는 거야? 뭐하는 거야?”
“여기서 도망치는 거다, 어서!”
그 일에 몹시 당황한 것은 구석에서 숨어 지켜보던 리일이었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네세레의 모습이 사라지고, 수레는 출발해버렸다.
“안, 안 돼, 나가면 안 돼, 네세레는 왕이 되어야 하는데!”
몰래 만날 때, 유모는 저런 짓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 사람들은 네세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라 나쁜 사람들이었을까.
파랗게 질린 리일은 성 안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곧장 순찰을 돌던 위사가 찾아왔다.
“크, 큰일이야, 큰일이야―!”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그 결말은 즉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
이 성에서 나가는 길은 단 하나. 들키면 끝장이었다.
달려온 시종장을 데리고 정문에 도착한 리일은 그곳을 울타리처럼 에워싼 사람들을 맞닥뜨렸다. 세게 얻어맞으며 연행 당하는 남녀의 모습. 그리고 등 뒤에서부터 붙잡힌 채 떼어지는 네세레의 울음소리.
리일이 거기 나설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도착한 직후에, 무거운 발소리가 인파를 가르며 울린 탓이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공포의 화신은 인파의 한가운데 우뚝 섰다.
“자신이 저지른 짓의 의미, 알고 있겠지.”
그것이 저를 향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 말에 담긴 차가운 울림은 리일을 얼어붙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덜덜 떨며 일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말단 상인이 어떻게 성에 들어왔나 했더니, 과연. 노이란트 잔당의 사주인가. 얄궂은 도박을 하는군.”
그리고 리일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었을 것이다. 바닥을 기는 남녀를 바라보는 파질의 눈에는 단 한 점의 자비도 깃들어있지 않음이 자명했으니까.
“그렇다면 걸맞은 반응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지.”
칼집이 울렸다. 땅바닥으로 떨어지며 큰 소리가 났다. 빈틈없이 갈고 닦인 칼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망설임 없이 그려진 궤적이 둔한 소리로 끝을 고했다. 근처에 서 있던 네세레의 뺨에 붉은 무늬가 흩뿌려지는 것을, 리일은 보고 말았다.
“성 밖으로 내던져라.”
그것이 길고 긴 악몽의 시작이었다.
2-4
■성인(成人)
“어머, 리일. 성인이 된 걸 축하해.”
불러 세워져 뒤를 돌아보자, 새침한 둘째 형의 모습이 보였다. 성인이 된 지도 1년, 완전히 여성의 행동거지가 몸에 밴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형. 남편도 함께?”
“응, 회합에 참석하고 있어. 그동안 나는 이렇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돌아보는 중이지.”
말하는 그녀의 입술에는 숨김없이, 빈정대는 미소가 걸렸다.
“뭐, 돌이켜보고 싶은 것도 별로 없긴 한데.”
“…천천히 둘러보세요. 저는 이만.”
그렇게 말을 끊고 지나가려던 리일이었지만, 둘째 형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확인할 게 있어.”
별로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이 무겁기도 해서, 리일은 다시 멈춰 서서 둘째형 쪽으로 향했다.
“너, 란테 가를 계승할 생각이라는 게 사실이니?”
역시 그 얘기였다.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둘째 형은 딱하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너만 남게 돼서 무슨 책임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버려둬도 딱히 상관없어. 그 사람은 지금까지처럼 자기 뜻대로 하겠지.”
사려 깊은 충고는 포기한 란테 가의 계승권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둘째형의 진심인 듯싶었다.
“뭐, 형처럼 철저하게 도망치는 것도 어떨까 싶네. 애초에 그 사람은 우리 같은 건 안중에도 없으니까.”
맏형은 성인이 되자마자 란테 가의 계승권은 물론이고, 성씨까지 버리고 신전으로 들어갔다. 이제 디톤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파질은 단 한 마디, “흠, 그런가.”라고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이후엔 입에 담는 일도 없었다.
“그 사람의 성격을 얕잡아보고 란테와 가까워지려는 무리들은 얼마든지 있어. 그들을 이용해서 도망치면 돼.”
“형처럼요?”
“그래, 그게 현명한 삶이야.”
그리고 둘째 형은 성인이 되자마자 금방 결혼해 란테의 이름은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당연하다고 할까, 파질의 반대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제 란테를 본성으로 가진 자는 당주인 파질과 막내 리일,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형, 역시 누군가는 맡아야 할 일이니까….”
그렇게 말하자 둘째형은 짐짓 큰 한숨을 내쉬었다.
“대응에 능숙하지도 않으면서 어째서 그렇게 목을 조르려고 해. 걱정이야. 이대로라면 너, 분명 좋게 풀리지 않을 거야.”
이 이상 있어봤자 이야기는 분명 제자리를 맴돌 터였다. 리일은 그렇게 판단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결심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특히, 지금으로선.
“죄송해요, 잠시 갈 데가 있어서.”
그래서 그렇게 사양하며 자리를 뜨기로 했다. 이번에는 둘째형도 붙잡지 않았다.
“포기하는 것도 용기야. 표식을 가진 사람은 우리와 다르니까.”
다만 등 뒤에서 그 말만이 쫓아왔다.
표식을 가진 사람.
리일은 침울한 기분으로 복도를 나아갔다.
계승자. 총애자. 르란트와 같은 가호를 받은 자. 우수한 자. 신에게 인정받은 자.
어째서 자신은….
안뜰로 벗어났다. 물가를 돌아 안쪽으로 헤치고 들어갔다. 분명히 이 부근에 있을 터였다. 성인이 되기 전엔 항상 그랬으니까.
그리고 리일은 그 모습을 발견했다.
“네세레.”
부름에는 무언의 반응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약간의 눈길로 저쪽이 알아봤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눈앞에 서 있는 것이 틀림없이 찾고 있던 인물이라는 것도.
“…정말로 남자를 선택했구나.”
이번 말에 대한 반응은 뚜렷했다. 네세레는 날카롭게 쏘아보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게 어때서?”
“아니…그냥 네가 여자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얘긴 한 적 없을 텐데.”
“응, 그러니까, 내가 멋대로.”
네세레의 짜증이 전해져왔다. 그래도 리일은 말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모조리 다 늦었으니까.
“그야…, 그야, 너는 아버님을… 그러니까.”
별안간 옆얼굴에 충격이 왔다. 얻어맞았다고 인지한 순간, 네세레는 수풀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욱신욱신 아픈 뺨을 만지며 리일은 씁쓸하게 되새겼다.
이것으로 이제 아이의 시간은 끝났다고.
2-5
■즉위
아네키우스력 7352년, 리탄트는 새로운 왕을 그 옥좌에 맞았다.
평민 출신이라는 왕의 탄생은, 귀족들뿐만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불안을 안겨다주었다. 그들은 겨우 안정된 생활을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3대 국왕의 등극 당시에 국내는 크게 어지러웠지만, 재위 기간 중에는 간간히 징용이 행해진 정도에 지나지 않아, 대체로 그들은 자기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특별히 기릴 만한 것은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외적에게 겁을 먹지 않아도 됐고, 일궈낸 밭에선 다음의 결실을 기약할 수 있었다. 왕이 어디 출신이든 어차피 상관할 일은 없을 테니까, 굳이 교대하지 않아도 되지 않냐는 것이 그들 다수의 의견이었다.
그런 와중에 가장 눈에 띈 것은, 안정된 유통을 확보할 수 있게 돼 존재감을 늘려가는 거상들이었다. 여기서 권리를 잡으면 다른 동업자를 누르고 단번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어김없이 새로운 왕의 탄생을 축복하며 조공을 내놓았다. 대귀족 출신으로 강경한 전 국왕보다는 간단한 상대라고 깔보인 것은 분명했다. 게다가 그들의 귀에도 전 국왕과 현 국왕의 불화에 대한 소문은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이변은 일어났다.
다음 해가 밝아오는 무렵, 새 국왕이 전 국왕을 왕성에서 내쫓았던 것이다. 전 국왕이 양위 후에도 성에 남아 안팎으로 영향력을 끼친 것은 사실이었으나, 주위에선 이로 인해 결렬이 확정되었다고 간주했다.
하지만 얼마나 큰 분쟁이 일어날까 주시하던 사람들의 음습한 기대는 배신당했다. 전 국왕은 단박에 자신의 영지로 들어갔고, 새로운 국왕이 직접 지휘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필연적으로, 이것을 호기로 삼은 상인과 신흥 귀족들이 새로운 왕에게 몰려들었고, 왕은 그 대응에 나날이 쫓기게 됐다. 사람들의 의도와 달리 새로운 왕은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그 태도는 완고해져만 갔다. 전대 왕은 특별히 편의를 봐주진 않아도 뇌물에 너그러웠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왕의 결벽에는 그런 회유책이 오히려 역효과라는 것을 깨닫기까지가 늦었던 것이다.
답례는 냉대가 되어 나타났다.
젊은 왕은 가감을 몰랐고, 충고도 그의 귀에는 두서없는 비난으로 들렸다. 전대 왕을 본받아 답습하라는 말은 금기였지만, 무심코 누설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지나간 시절은 유난히 좋아 보이는 법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나라를 움직이는 대귀족과 새 왕의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그들에게 전대 왕은 책임을 짊어진 우두머리이자 전우였다. 그런 그가 인정한 후계자이기에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던 이들이었으나, 전왕이 성에서 추방당한 것을 계기로 사태는 일변한다. 조정자 역할의 전왕을 잃어 불신을 품은 귀족들과 새 왕은 직접 대치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로 인한 결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귀족들이야말로 전왕의 치세가 지속되기를 가장 바라는 자들이었으니.
충돌은 눈에 띄게 늘어갔다. 골은 그때마다 깊어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당연한 귀결처럼 결정적인 파국의 때가 찾아왔다.
새로운 왕이 징벌로써 한 귀족의 영지를 거둬간 것이다.
물론 새로운 왕이 그러기까지의 경위는 있으나, 그것은 두지 말아야 할 금지된 수였다.
이리하여 긴 불화의 포문이 열렸다.
어느 쪽에게도, 돌아갈 길은 막혀 있었다.
2-6
■죄과(罪過)
토실토실하고, 윤기 있는 뺨을 붉게 물들인 아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가차 없이 끊긴 기한 그 자체였다.
그 이마에 새겨진 표식에 의해서.
아기는 축복과 계략과 이해타산 사이에서, 편안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앞으로 15년. 지금까지의 행보와 앞으로의 행보. 도달할 거리는 이미 정해져버린 게 아닌가.
앉기 불편한 옥좌 위에서 네세레는 몸을 움찔했다. 자세가 안정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자신을 위한 자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머리 위에선 두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성가신 그 시선이. 그리 멀지 않은 훗날 자신도 저곳에 얼굴을 나란히 한단 말인가. 그때 자신은 무엇을 이뤄낼 것인가.
―후세에 전해지는 기틀을 잡은 왕은 언제까지고 계속 왕으로 남을 것이다.
초상화의 입술이 서서히 움직이며 소리 없이 목소리를 퍼부었다. 예전에 그놈이 뱉은 말. 자신이 반박하지 못한 말.
확실히 놈은 지금도 왕이다.
귀족들은 놈의 뒷받침 없는 제 말은 듣지도 않았다. 요즘은 징세 보고도 똑바로 올라오지 않는다. 무능한 법무장을 파면하고, 서민 출신에서 자수성가한 인물을 그 후임으로 붙인 탓이었다. 그는 직접 법무관들을 주요 영지에 파견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등의 애를 썼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것이 놈이 바라던 나라의 형태인가. 그저 태생만으로,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닌 일부의 놈들이 주어진 먹이를 탐내고 살찌우는 것을 좋다 하는 형태가.
게다가 그 형태는 너무나도 견고하게 짜여 있었다.
앞으로 15년.
네세레는 무릎에 얹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갑자기 옥좌의 방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깔깔 비웃는 듯싶은 그 웃음소리는 높은 천장에서 메아리치며 방 안을 메웠다.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이토록 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바닥에 놓인 통통한 몸은 소리에 맞춰 흔들거렸다.
저 아기.
귀족에게서 태어난.
귀족의.
“설마 저희 아이가 표식을 받다니!”
“무척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계속해서 웃는 아기 옆에서 남자와 여자가 무릎을 꿇었다. 환희에 찬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아무런 의심도 없다.
자기들이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믿고 있다.
끔찍한 천진함으로 그 아기를 내밀었다.
…어째서 그때 자신은 내치지 않았을까. 그 아이는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가 키우면 된다고.
“이 아이는 어떻게 할까요. 역시, 전왕이 그랬듯이, 폐하의 양자로?”
어째서 자신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지 당신은 알고 있어요.”
등에 여자의 무게가 얹혔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당신은 알고 있어요.”
귓가에서 여자의 숨이 튀었다.
“누가 남아야 하는지 당신은 정했어요.”
가슴께를 여자의 손가락이 기었다.
“…너는 누구냐.”
물음에 답은 없었다.
아기는 아직도 흔들리고 있었다. 비웃는 소리도 그치지 않고 울리고 있다.
깔깔, 깔깔거리며.
수많은 목소리가 천장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당신의 마음을 따르세요, 사람의 왕의 아이여.”
네세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2-7
■접견
긴장하고 있다.
스스로의 대담함에 자신이 있는 그도, 역시 그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이제부터 자신은 판정을 받는 것이다. 쓸 수 있는지, 쓸 수 없는지를.
만약 쓸모없다고 판단된다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것은 가장 큰 굴욕이었다. 생각하기도 싫었지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모든 것이 쓸모없다는 얘기나 다름없으니까.
사용인들 틈에 섞여 이 안에 들어왔다. 요리사의 조수로서 자신은 불합격. 쓸모없다고 욕을 먹고 다른 부서로 가라며 쫓겨났다. 신경을 써주던 아주머니로부터 괜한 염려를 사서 불안했지만, 어느새 성에서 쫓겨났으려니 하고 잊어줄 것이다.
일부러 그런 절차를 밟은 것은, 여기에 침입하는 것이 무척 까다롭다는 반증이었다. 가장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은 귀족의 수행원으로 록차에라도 올라타고서 잠입하는 것이겠지만, 그는 그 수단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곳을 찾는 귀족들은 거의 사라진 탓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방법을 선택할 생각은 없었지만. 일 때문에 끌려갔을 때 그들의 멍청함을 지겹도록 봐 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에 아첨하는 짓은 견딜 수 없었다.
그러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단 거야.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결국은 시키는 대로 이런 곳에 와서 자신이 부정당할까 봐 벌벌 떨고 있다. 상대만 달라졌을 뿐, 하는 일은 같지 않은가.
그렇겠지. 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자신은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고, 그것에 이의를 제기할 권리는 없다. 그러니 다른 데 쓸데없는 기운을 쏟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도구는 도구. 잘 사용되는 것만이 숙원이다.
그러니 자신은 지금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셨다.”
옆에 서 있는 인솔자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서 그렇게 고했다. 알려주지 않아도 다가오는 기척으로 그 사실은 분명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며 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라깽이군. 그것이 그의 솔직한 첫인상이었다. 문에서 역광이 쏟아져 몸의 선이 강조된 탓도 있을 것이다. 키는 작지 않지만 크지도 않았다. 거리에서 엇갈려 지나가더라도 전혀 인상에 남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이게 주인인가.
그다지 단련하지 않은 듯싶은 동작으로 침실에 들어오는 남자를, 그는 바라봤다. 물론 정보는 사전에 머릿속에 넣어두고 있었고, 체격 따위는 필요한 조건이 아니었다. 알고 있지만, 그는 아직 미숙하고 스스로의 힘에 자신이 있었다.
“폐하.”
남자가 침대에 다가선 순간, 인솔자가 달빛을 헤치고 나아가며 그렇게 말했다. 남자는 놀라지 않고 이쪽으로 눈을 돌렸다.
“예전부터 말씀 드렸습니다. 새 사람이 도착했으므로 접견을.”
대답한 것은 기분이 처진 양 어딘가 켕기는 느낌이 드는 목소리였다.
“그런가. 막 성인이 된 사람이군.”
“네, 이름은….”
거기서 그는 앞으로 나서 인솔자를 가로막고 입을 열었다. 나중에 진절머리 날 정도로 혼나는 것은 각오한 바였다. 이 순간이 오면 이렇게 말하려고, 그는 예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편의상 붙여진 이름은 있지만 그 이상 의미는 없습니다. 편하실 대로 불러주시면.”
침묵이 자리에 떨어졌다. 당혹감 때문일까, 불쾌감 때문일까, 분노 때문일까. 그는 그것을 피부로 느꼈다. 남자의 얼굴은 방의 어둠에 가려져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일단 인솔자가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에서, 이 남자는 변명이나 얼버무리는 것을 싫어할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겨우 입을 연 남자의 태도는 맥 빠질 정도로 담담했다.
“…사람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건 그리 경솔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과연.
아까부터 맺혀있던 가벼운 실망이 가득 차올라 그의 손끝을 굳게 했다. 그것은 예상한 답 중의 하나였다. 신경을 썼는지 완곡한 표현이 이쪽을 짜증나게 만드는 줄도 모르고.
역시 귀찮은 것인가.
당연하겠지. 측근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막 들어온 꼬맹이 하나에게 귀중한 시간을 할애할 리가 없다. 답을 아는 질문이었다. 지금의 반응에서 적어도 이 남자는 성질이 급하지 않고, 나약하고 신중한 성격인 것을 알았으니 좋다고 쳤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다시 어둠 속으로 물러나려는 그를 쫓듯 남자는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네키우스의 야광을 받고서야 비로소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의표를 찔려 무심코 올려다본 그의 시선이 남자의 시선과 마주쳤다.
상상과는 달리 어둡게 자리 잡은 눈동자.
“하지만 그러길 바란다면 생각해두지.”
남자는 중얼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기다려왔다.”
남자가 그에게 말했다.
“그놈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될 날을. 그놈한테서 물려받은 놈은 입김이 닿아있어.”
곁에는 그 말고 아무도 없었다. 그만이 거기 불렸다.
“그걸 위해서 환경을 조성했다. 철들었을 때부터 그 안에서 자라는 자를 만들기 위해.”
남자의 눈동자는 먼 데를 보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하라드라는 이름을 받았다.
2-8
■침입
경비 대열이 약간 느슨해져 있다.
그건 아주 사소한 변화였으나, 여러 번 드나들며 관찰해온 그의 눈에는 확실했다.
보초가 순찰을 도는 시간도, 순찰을 도는 길도 눈에 띄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보초들의 걸음은 왠지 방심 같은 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저들의 마음을 약간이나마 해이해지게 만든 무슨 일이.
그 일은 아마도 저들의 주인에 관한 것이겠지. 그 주인이 저택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지 오래였다. 아무래도 몸이 호전되지 않은 것 같았다.
좀 더 시기를 기다려야 할까, 그는 생각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저택에 발을 들이는 데 실패하면, 경비는 날벌레 하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삼엄해질 터였다. 실패할 가능성은 최대한 배제하는 것, 이 일에서는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그의 어금니가 악물린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는 건 이쪽에 있어서도 좋지 못한 사태를 초래할 수 있었다.
모든 걸 끝마치기까지, 앞으로 반 년. 그 사람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어느 것도 잘 되지 않았다.
그는 꼭 그렇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지나간 세월에 비해 이뤄낸 것이 너무 작다고.
그것은 3대의 저주다.
그 사람은 거기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했다. 나라를 바꿀 일을 해야 한다고 초조해 한다. 이번 일을 성공하면…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라드, 지금 국가의 형태를 어떻게 생각하나.”
모시기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나 혼자서 곁을 지키게 됐을 무렵, 그 사람이 난데없이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물론 재치 있는 대답 같은 것을 준비해뒀을 리도 없어 솔직히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라고 하셔도. 죄송합니다. 저는 별로 그런 것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게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군. 묻는 방법이 좋지 않았어.”
얼버무리지만 않으면, 아무리 지나친 대답이라도 그 사람은 화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렇게 묻지. 이 나라의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왕과, 귀족과, 다스려지는 백성에 대해.”
“예, 그것도 어렵습니다만. 제가 느낀 대로만 말하자면.”
일단 말을 골라 그는 입을 열었다. 몇 년 새에 그만한 소양은 늘었다.
“모두 생활하는 데 큰 불만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 없고, 나쁘지 않은 건 아닐까. 옛날의 끔찍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덕일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이 잠자코 듣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이어갔다.
“귀족은 마음에 안 듭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주제에 잘난 척하며 당신의 방해만 하죠. 쓸모없는 건 없어지는 게 좋은데.”
“꽤 과격하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부정하지는 않지만.”
난처한 듯이 웃는 그 사람의 옆모습을 볼 일도 이제는 없다.
“그럼 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건…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그것은 그에게 곤란한 질문이었다.
“왜냐면 저는 당신 외의 왕을 모릅니다. 왕의 구조고 뭐고, 당신이 거기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대답에 만족할 리가 없을 텐데도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 한 마디만 빼고.
“고맙다, 하라드.”
하지만 만약 지금과 똑같은 문답이 오간다면. 반드시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었다.
“왕도 똑같아.”
입술에 미소 같은 것은 짓지 않고.
“쓸모없는 건 없어지는 게 좋아.”
그러나 그런 대화가 이뤄질 일은 없을 것이다. 시답잖은 대화도 어느덧 끊긴 지 오래였다. 모든 것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 그래. 근방에서 다음 후계자가 3대의 손자라는 게 발각됐을 때였다.
신이라는 게 존재해 정말로 왕을 선택하고 있다면,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신의 선택 따위는 속임수다. 그것을 증명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품속에 든 단검의 무게를 느꼈다.
아마, 저 역시 초조해하는 것이다.
자각하고 있어도, 그는 일에 착수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몰려오는 나쁜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고 해도.
2-9
■거절
발코니에는 그 말고 아무도 없었다.
그를 지키는 기척도 주위에 느껴지지 않아서, 도대체 뭘 하고들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화가 났던 하라드는, 그 우스움에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의 자신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형편이 딱 좋지 않은가.
함정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라드가 보기에 이 근처는 말 그대로의 정원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정도로 주도면밀하게 함정을 팔 사람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면, 이건.
이제는 물러설 수 없었다. 하라드는 천천히 나무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가지를 박차고 발코니로 뛰어올랐다. 갑작스런 출현에도 역시나 그는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아, 하라드는 억측을 확신으로 바꾸었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이 명령을 받고, 배신하기 위해 돌아오는 자신을.
“그녀는…어떻게 됐습니까.”
궁금한 게 있었다.
틈을 엿보며 정찰할 때, 그녀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요즘의 그는 남이 가까이 있는 것조차 기피하기 십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그녀와 자신만이 예외였다. 자신이 어둠 속의 존재라면 그녀는 겉으로 드러난 존재였다.
한 번도 제대로 접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하라드에게 있어 이 성 안에서 가장 친근한 인물이었다.
“나갔다. 고향으로 내려갔어.”
그러니 이 담담한 대답을 들었을 때, 가슴 속에 맴돈 기분에 실망과 납득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녀만은 이때 그의 곁에 있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다만 그녀가 그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멀리한 게 틀림없었다.
이제 그는 아무도 곁에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단 혼자서, 이 돌로 쌓여진 모형 정원에 갇혀있을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보름 전쯤, 그와 대치했을 때가 기억났다.
란테 저택에서 풀려난 뒤로 뻔뻔스럽게 돌아와 실패를 보고하는 것은 살을 베어내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래도 몸을 아끼지 않고 돌아간 건, 자신이 잡은 정보가 그에게 중요할 것이라고 이해해서였다.
실패를 책망 받고 욕먹을 것은 각오한 바였다. 하지만 되돌아온 하라드를, 그는 무척이나 태연한 얼굴로 맞이했다.
“죄송합니다.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무슨 일 있었나?”
하라드는 고개 숙이며 보고를 시작했다. 저택의 경계 상황, 침입에 성공, 대상을 오인, 그리고 그 원인이 되었던 3대의 죽음. 돌이켜보면 그쯤에서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실패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탓인지도 몰랐다.
새로운 계승자의 제안을 계속해서 말하려다, 머리 위에서 쉰 목소리에 가로막히고 나서야 알아챘다.
“…어째서, 숨통을 끊지 않았나.”
순간, 하라드는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뇨, 이건 저희한테도 이로운 조건이라고 생각해서, 한 번 들어볼까 하고….”
필시 연행 당했을 때 표적을 붙잡지 않았다는 것을 비난하는 거라 생각해, 그렇게 변명하면서 고개를 들었다가, 그제야 자신이 잘못된 해석을 했다는 걸 알았다.
그는 핏기를 잃고 분노한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그 얼굴에, 하라드는 분수에 맞지 않게 말을 머뭇거렸다.
거기에 무자비한 냉매가 덮쳐왔다.
“회유되었는가.”
그 말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어조로 나왔다.
“너는 그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하라고 회유됐다.”
“아닙니다. 선대는 이미….”
“그럼 어째서 칼날을 거뒀어! 사실 대역 따위는 없었던 거겠지, 아닌가!”
“아닙니다. 과거에 사산됐다던 계승자의 동생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만, 그게….”
“그렇다면 란테 놈이겠지! 멈출 이유 따위 없어! 전부 없애버리면 된다! 그 남자가 남긴 건, 전부!”
더 이상 입을 열어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말은 그에게 닿지 않고, 격앙만을 자아낼 터였다.
그래도 그에게 그 이상의 말을 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신께서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필요 이상의 희생을 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이 손쉬운 수단으로 나서려고 할 때마다, 그가 자주 그렇게 타일렀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진지한 눈이 좋았다.
“란테의 아이를 없애는 것은 필요한 희생입니까. 그렇다면…따르겠습니다.”
돌아온 것은, 불쾌한 침묵.
바라던 대답은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찾아온 것은 거부 의사였다.
그는 말했다.
“네 새 주인에게 가서 고해라. 속이 들여다보이는 덫에 넘어갈 만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는 하라드를 외면한다.
“배신자는 필요 없다.”
그 뒤에 어째서 순순히 란테 저택으로 향했을까. 그 행동은 그의 의심을 긍정하는 행위였는데. 새로운 계승자만이 다시금 하라드와 대면했다.
“어때. 답은 들었나?”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당당한 태도로 물었다.
“그분은…이제….”
말끝을 흐리는 그 모습으로, 계승자는 더 듣지도 않고 짐작한 듯했다.
“그런가. 그럼, 자네는 날 죽이러 왔나?”
그렇게 해서 그가 기뻐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았다. 하지만 아마도 그의 바람은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았다.
“그분은, 더 이상 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그래서 부탁이 있습니다. 부디 제게….”
“입에 담지 않아도 된다.”
무릎을 꿇은 하라드의 머리에 슬며시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약간의 무게가 실어졌다.
“그것은 나의…, 다음 왕의 몫이다. 그러니 자네에게 명한다.”
아직은 높은 목소리로 외쳐지는 명령.
“4대를 배반하고 새로운 옥좌의 초석으로 삼아라.”
그렇게 하라드는 이곳으로 돌아왔다.
주머니에는 차가운 단검의 무게가 있었다.
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의 시작.
모든 것의 끝.
하라드의 품에서 칼집이 슥 미끄러졌다.
2-10
■흔적
내려다보이는 안뜰에는 형형색색의 천막이 펼쳐졌고, 그 사이를 사람들이 살랑살랑 걸어간다. 뜰을 마주한 방에서 다음 회견까지의 얼마 안 되는 빈 시간을 보내던 리리아노는,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그 광경에 조금 눈을 팔았다. 오가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간간이 들려왔다.
2주에 한 번 있는 장날.
성 아래의 성인들이 물건을 들고 나와 성 안으로 들어오려는 야심에 도전하고, 사용인들의 즐거움이 되는 그런 조촐한 행사다.
성 안의 행사들로 인해 이따금 개최하지 못할 때가 있기는 해도, 큰 문제없이 여태껏 이어지고 있다. 일부 귀족들이 보기에 불편하다며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계속 퇴짜를 놨더니, 이제는 그들이 알아서 장날이면 성에 들르지 않는 것으로 평화롭게 해결되었고, 따로 불평하는 사람도 없다.
단 한 사람을 제하고는.
“…어째서 중지하지 않는 겁니까?”
측근들이 물러난 찰나에, 그 고언이 등 뒤에서 던져졌다. 희미한 기척에게서 이 질문을 받은 리리아노는 태연히 대꾸했다.
“왜 그러나. 경비가 그렇게 힘든가?”
“그야 물론 힘들지만.”
어딘가 부루퉁한 듯한 목소리가 리리아노의 물음에 답했다. 성 밖의 사람과 짐을 유입시키는 것이니, 당연히 발칙한 움직임도 생겨난다. 물어볼 것도 없이, 그 경비는 힘들 것이다.
“사용인들의 위안을 위해서라지만 그들 대부분이 성 밖에 나갈 수 있습니다. 상인들도, 장사를 하고 싶다면 해당 부서나 귀족들에게 직접 가면 되겠죠. 굳이 성 안에서 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논리적으로 진언하는 그의 마음은 그 말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을 리리아노는 알고 있었다. 말리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갖고 싶은 것뿐이다.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당한 이유를.
그럼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지 리리아노는 고민한다. 어쨌거나, 그가 의심하는, 바라지 않는 대답만은 잘 알았다.
그것은, 연민이다.
이 시장은 4대 때에 시작됐다고 한다.
사치스러운 물품들의 피로연이 아니라, 다소 비싸기는 해도 서민적인 물건들이 모이는 추세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즉위 초반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성에서 나오는 일도 전혀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 역시 이렇게 창문으로 들여다보며 귀를 기울였을까.
몹시 작은 안뜰에서 벌어지는 그리운 광경을.
그래,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런 감상만으로 일을 결정짓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리리아노는 충분한 간격을 두고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완벽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순간 의도를 알 수 없어 망설이는 낌새가 보였다.
“그건…아무튼 바람직하고, 목표로 해야 하는 거라고.”
“그런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그의 당연한 대답을 그렇게 단칼에 잘라내며 리리아노는 말을 이었다.
“이 성은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다. 일찍이 요새로 쓰였으니 당연하겠지. 마음만 먹으면 사람의 출입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야.”
“물론입니다. 그러니까….”
“그렇지만, 그게 바람직한 일일까.”
대답은 없었다. 반항으로 보이는 침묵에, 리리아노는 다시 물었다.
“반대로 생각해보게. 자네라면 그토록 빈틈없이 짜인 장소를 보면 어떻게 느껴질 것 같은가. 밀정조차 제대로 드나들 수 없다면.”
“글쎄요…. 괴롭고, 불안할 겁니다. 숨겨진 것에 대해,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봅니다.”
“그러니 빈틈이 있는 거다. 일단, 내겐 숨길 것도 없고.”
시치미를 떼자 다시 침묵이 돌아왔다. 그러나 거기에는 좀 전의 것과 다른, 이해의 가뿐함이 있었다.
“마지막 선만 지키면 된다. 나머지는 보여줘도 괜찮아. 사람은 완벽한 것에 경의를 가질지언정 호의는 품지 않아.”
“알겠습니다. 주제넘은 짓을 했습니다.”
“좋아, 또 뭔가 생각나는 게 있거든 말하게.”
그때 문 너머에서 사람이 돌아오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등 뒤의 기척은 사라졌다.
“…고맙습니다.”
어렴풋이 한 마디를 남기며.
그에 대해 리리아노 또한 입속에서 중얼거리듯 되받아쳤다.
“나는 자네 일을 늘리고 있어. 감사의 말을 들을 만한 이유는 없지.”
벌써 회견 시간이었다.
리리아노는 일어서 마지막으로 창밖에 눈길을 보냈다.
천막 한 군데서 어린 아이가 걸어 나와 행인에게 뭔가 말을 걸고 있었다. 부모를 돕는 건지 손에 작은 바구니를 든 채였다.
그들의 일을 눈에 새기며 리리아노는 성 안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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