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등장인물은 주로 란테 조. 주역은 타낫세. 5화 완결."
*게임 본편과 연결되는 스포일러 有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5-1

몸 아래 깔려 꿈틀거리는 감촉은 부드럽고 포근하다.

맞닿은 피부는 점차 달아오르고, 목덜미를 간질이는 숨도 마찬가지의 열기를 담고 있다. 억눌린 목소리는 모두 말이 되지 못하며, 그것이 더욱이 이쪽의 불길을 부추긴다.

갈증이 난다.

그래서인지 좀 전부터 자신의 거친 숨소리만이 귀에 들어온다. 올라오는 목소리는 거기 가려져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을 꼬여낸 이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귓속이 더욱 간질거린다.

그래.

그래.

이렇게.

이렇게 하면.

무언가 자신의 뒤에서 속삭인다. 바라본다. 조종한다.

알고 있지만, 멈출 수 없다.

흥분과 불안이 함께 고조되어, 한층 더 영문을 알 수 없게 된다. 눈앞은 뿌옇게 흐려지고, 오직 몸만이 계속 움직인다.

부드러운. 살결. 더운 입김. 교성. 이게 뭐지. 이게…누구지?

그 순간, 불안이 흥분을 넘어섰다. 퍼뜩 시트를 쥐고 있던 손을 떼어내자 둘 곳이 없어진다. 뭔가 매달릴 것을 찾아 손이 주위를 맴돈다.

이윽고 그 손은 찾아낸다. 같은 형태의 것을.

마음이 진정되기도 전에, 몸이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는다.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자연스레 얽는다. 그 감촉을 겪은 적 있다고 깨달은 순간, 목구멍에서는 저도 모르게 고성이 터져 나왔다.

 

일어난 것은 자신의 목소리 덕분이었다. 

방에 남은 잔향과 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위사가 자신을 쳐다보는 표정에서 타낫세는 깨달았다. 일어서려는 옆의 위사를 괜찮다고 제지하며, 그는 자신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꿈이다.

창밖에서 동이 튼 호수의 광경, 새가 지저귀는 소리, 침대에 놓인 제 모습. 좀 전까지의 일이 현실이 아니라는 건 명확했다. 나쁜 꿈, 재미없는 꿈, 그렇지만.

생생한 감촉과 숨결이 되살아나, 타낫세는 몸서리쳤다. 끈적거리는 피부가 잠옷에 엉겨 붙었다.

무슨 꿈을 꾼 건가.

불현듯 피어오르는 혐오감을 참지 못해 그는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냄새가 신경 쓰여 얼른 고개를 들었다.

몸을 깨끗이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게 우선이다. 그러다보면 마음도 진정될 것이다.

위사에게 눈짓해 문을 열도록 하자, 언제나 하던 절차대로 대기하던 시종들이 아침 준비에 착수한다. 옷을 벗은 채, 땀을 닦고 있으니, 아무래도 제 몸이 눈에 들어왔다.

남성의 몸. 반년 전에 고른, 성인의 모습이다.

별다른 후회 같은 건 없을 테지만, 아무래도 아까의 꿈이 머릿속을 어른거려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세세한 사항까지 기억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분명하게 기억이 났다면, 자신은 수치스러운 나머지 발코니에서 몸을 던졌을 것이 틀림없었다.

타낫세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5-2

몸이 가뿐한 덕도 있어, 객실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차와 과일이 나올 무렵에는, 타낫세의 기분도 조금쯤 나아져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방에서 식사를 할 텐데, 그 침실 근처에 있다간 아무래도 꿈 생각이 날 것 같아 일부러 이리 나왔다. 항상 성가시다고 느꼈던 주변의 시선이나 말소리도 오늘 아침에는 기분전환이 돼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성인이 된 지도 반 년, 이전에는 우회적이었던 귀족들의 자신을 향한 태도도, 요즘은 점점 노골적이게 되었다. 무슨 일을 꾸미는 건 아닌지 살피는 사람, 마침내 왕배 자리에서 미끄러졌다고 바보 취급하는 사람, 그래도 왕자라고 아첨하는 사람, 아직 기회는 충분히 있다고 선동하는 사람…. 이놈이고 저놈이고 부아가 치밀어 못 견디겠다.

알 수 있는 건, 어김없이 누구나 자신을 업신여긴다는 것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알맞은 대응을 마구 해주었더니, 최근에는 말을 걸어오는 일조차 뜸해졌다. 에둘러 소곤소곤 비아냥거리기나 한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소수의 구제할 수 없는 바보거나, 또는….

  “어―, 없어―!”

갑자기 높은 소리가 객실에 울려 퍼지는 바람에 타낫세는 얼굴을 굳혔다. 무척 익숙한 목소리였고, 동시에 오늘 아침만큼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야, 이미 다 먹어버렸는걸. 아직 객실에 가면 남아 있을지도 모른대서 왔는데 말이지.”

그 목소리는 시종을 상대로 퐁퐁 불만을 늘어놓는다. 당장 도망칠까 하는 생각이 타낫세의 가슴을 스쳤지만, 그것은 곧 무산되었다. 목소리의 당사자가 객실 입구 쪽에 진을 치고 있는 탓이었다.

그렇다면 별 수 없이 들키기 전에 떠나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적어도 지금만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타낫세는 무척 자연스러운 태도로 입구에서 시선을 떼고, 눈에 띄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것이 화근이 됐다.

소란이 가라앉은 듯해 단념하고 가버렸을까,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 뒤에서 갑자기 그것이 부딪쳐온 것이다.

  “아―, 아직 남아있네―. 좋겠다 좋겠다―”

어깨에 얹힌 손이 뻣뻣하게 가슴께를 잡았다.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무게를 기울이는 바람에, 옷 너머로나마 체온이 전해져온다. 얼어붙은 타낫세의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 걷잡을 수도 없게, 되살아나는 그 감촉.

  “있지―, 그거 안 먹을 거면, 나한테 좀….”

생각보다 앞서, 입과 몸이 움직였다.

  “마, 만지지 마!”

일어서자마자 다짜고짜 뿌리친다. 그게 생각보다 강한 힘이었다는 걸, 뒤이어 발생한 넘어지는 소리가 알려왔다. 허둥지둥 돌아보자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바일의 모습이 보였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얼굴은 놀람과 당혹스런 기색을 가득 띄우고서 얼어붙은 채였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그 표정은 익살스럽게 불만을 표현하는 표정의 안으로 숨어들었다. 타낫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바일이 목청 높여 항의했다.

  “먹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되잖아! 과일 정도인데, 어른스럽지 못해!”

그리고 뛰어오르듯이 일어나 말문이 막힌 타낫세에게 연이어 공격한다.

  “쩨쩨해, 쩨쩨해. 타낫세는 쩨쩨해!”

대관절 입장에 어울리지 않는 야유를 보내고는 불러 세울 틈도 주지 않은 채로 바일은 객실에서 뛰쳐나갔다. 남겨진 타낫세는 멀거니 그 등을 배웅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키득대는 웃음이 그를 더 찔리게 했다.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타낫세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것만으로 눈치 챈 위사가 그를 따라 걷기 시작해, 두 사람은 복도를 걸어 나갔다. 객실에서는 지금 일어난 사소한 일을 안주 삼아, 사용인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할 터였다.

  “사람이 모처럼… 기분을 돌리려고 한 때에…!”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혼잣말은 수치심 탓인지 분노 탓인지 당사자도 알 수 없었다.

대체로, 바일이 나쁘다.

요즘은 점점 더 건방지게 돼서, 아무리 주의를 줘도 품위 없는 행동거지를 고치려 하지 않는다. 칩거하느라 눈을 뗀 게 실책이었는지, 종래에는 스스로를 나(俺)라고 부르기 시작한 형국이다. 마치 평민 어린애나 다름없지 않냐고 몇 번이나 불평했던가. 주변에서도 응석을 받아주니 갈수록 기세를 탄다.

그 녀석은 계승자다. 한도라는 게 있다. 타낫세는 이를 갈았다.

  “누가 어른스럽지 못하단 거야, 저렇게 어린애처럼 굴면서, 잘도 말하지…!”

그러나 홧김에 신음한 그 말은 타낫세를 찌르는 칼이었다. 타낫세는 금세 숨이 막혀 걸음을 멈췄다.

그래, 녀석은 아직 어리다.

그런 애를 데리고, 꿈이라고 해도 나는….

되살아난 혐오감은 막 일어났을 때보다 더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삽시간에 치밀어 오른 그것을 다룰 수도 없어, 타낫세는 벽에 기댄 채 잠시 움츠러들었다.

 

5-3

결국, 환경이 나쁘다.

무척 침울해있던 타낫세가 내놓은 약간이나마 긍정적인 결론은 그것이었다.

자신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그런데도 어릴 적과 같은 환경에서 지내고 있다. 그것이 필시 좋지 않다, 라고.

그래도 갑자기 크게 바꿀 수 있는 건 없다. 당장 손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한정적이었다.

그 결과로, 이날 오후에 타낫세의 시종들은 예정 밖의 일을 지시 받았다. 그들의 주인이 침실을 리모델링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네, 귀찮게. 평소엔 조금만 위치가 틀어져도 화내면서 말이야.”

구석에서 뒷말을 속삭이는 신입 시종을 향해 질타가 쏟아진다.

  “미야리스·디트=카랴사. 입을 움직일 틈이 있으면 손을 움직여라.”

방 안쪽에 자리를 잡은 타낫세가 보기엔 그녀가 틈을 타고 수다를 떠는 게 일목요연했다. 꾸지람을 들은 그녀는 싸늘하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무언가 구시렁구시렁 중얼거리며 업무로 돌아갔다. 아마 마물의 귀라든지 뭐라든지 내뱉는 거겠지만 그냥 내버려뒀다.

타낫세의 지시에 따라 침대가 위치를 바꾸고, 필연적으로 세세한 것도 이동됐다. 매일 부지런히 청소를 해 정돈돼 있다고는 해도, 계속 고정돼 있던 걸 움직였으므로 품이 많이 들었다.

  “이쪽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책이 든 찬장을 둘 곳을 물어와 타낫세는 어물거렸다. 물론 미리 정해놨고 그 위치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었지만.

문득 타낫세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느슨한 석벽. 침대가 놓여있던 곳. 저런 것,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망설일 이유가 없을 터였다. 틀림없이 저게 원인일 터였다. 희미하게 들려오던 건넛방의 숨소리가 좋지 않은 효과를 끼쳤을 게 분명했다.

  “…저기다 둬.”

그래서 결국 타낫세는 그렇게 지시했다. 시종들은 별다른 의문 없이 따랐다. 시종들이 일단 책을 다 빼낸 뒤에 찬장을 옮길지 의논하기 시작했으므로, 얼른 끝내고 싶은 타낫세는 옆에 있던 위사의 이름을 불렀다.

  “모르.”

불쑥 나선 그는, 역시 가볍게는 아니었지만, 책이 고스란히 담긴 찬장을 들어 지정한 장소에 내려놓았다. 이렇게 하면 찬장 뒤에 가려진 돌은 더 이상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그걸로 좋았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채로 작업이 끝나 안도한 타낫세는, 숨을 고르며 별 뜻 없이 창가로 눈을 돌렸다. 햇볕에 따스해진 잔잔한 호숫가는 언제나 그랬듯이 마음을 가라앉혀줄 터였다. 그를 방해하려는 양 발코니에 그것이 서 있지만 않았어도.

처음엔 착각인 줄 알고 섬뜩해진 타낫세였으나, 그것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걸 알고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바일은 눈이 마주치자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뭔가, 덜그럭거리고 시끄러워서.”

이런 대낮부터 바일이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을 줄도 몰랐고, 울리는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뭐가 됐든 이만한 대규모 재배치라면 옆방에도 기척이 새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만.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지금의 움직임을 봤다는 건데, 그렇지만 봤다고 해서 딱히 나쁘다고 따져 오지는 않을 테고, 그런데도 이상하게 꺼림칙한 기분이 엄습해,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 어떻게든 열린 입으로 튀어나온 것은, 익숙한 잔소리였다.

  “너…, 제대로 입구에서 찾아오라고 몇 번을 말해야…!”

순간 바일의 볼이 불룩해진다.

  “시끄러워―, 정말! 이쪽이 빠르니까 괜찮잖아!”

계속 제 할 말만 내뱉더니 금세 몸을 돌려 사라졌다. 다시 발코니의 난간을 넘어 자기 방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뒤쫓을 기력도 솟지 않아 타낫세는 그저 어깨를 늘어뜨렸다.

  “뭐라는 거야,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보면 최근 반 년 동안 비슷한 일뿐이었다. 태도는 나빠지기만 하고, 남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수록 화가 난다. 거기다 오늘 아침 같은 일이 또 있으면….

한계일지도 모른다고, 타낫세가 강하게 실감한 것은 이때였다.

 

5-4

  “…해서, 여기까지 도망쳐왔다, 라고.”

그것은 오히려 어이가 없어졌다고 생각될지도 모르는 억양 없는 표현을 쓰고 있었지만, 슬슬 타낫세도 알 수 있게 됐다.

분명, 이 사람은 굉장히 재밌어하는 중이라는 걸.

  “너, 그런 얘길 남한테 하는 게 부끄럽지 않아? 근성 없네.”

  “수, 숨김없이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다가오지 마라 강요한 건 야니에 스승님이잖습니까!”

말대꾸해도 안색이 변하지 않는 야니에를 향해, 타낫세는 약간의 반항을 시도했다.

  “야니에 스승님이야말로, 수사법의 전문가라면 좀 더 그럴 듯한 말을 고르는 게….”

  “어리석은 놈. 말이란 우선 올바르게 전달되는 게 우선이다. 수사 따윈 필요할 때만 사용하면 돼. 사사건건 주물럭대는 건 어린애의 흙장난만도 못하고. 알겠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다람쥐 녀석.”

그러나 깔끔하게 반격당해 끽 소리도 못 내게 됐다. 확실히 말하고자 하는 바는 쨍쨍 전해져 오지만, 어른 여성이 이래서 괜찮은 건가.

야니에 백작의 저택 안 어느 방이었다.

여기 드나든지 일주일 정도 됐다.

어머니로부터 사전에 미리 요청은 받아뒀겠지만, 괴짜로 유명한 백작이 왕자라고 해서 순순히 제자로 받아준다고는 할 수 없다. 긴장감에 몸을 굳힌 채 예전부터 빌린 교본을 품에 안고서 문을 통과한 타낫세를 기다린 것은, 난해한 수사법 시험이 아니라 시큰둥한 한 마디였다.

왜 디톤까지 왔는지 알려줘, 라고.

물론 그 경위를 자세히 말하고 싶을 리가 없었으므로, 타낫세는 적당히 야니에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기 때문이라고 교본의 예를 들어가며 열심히 호소했다.

그 자리는 그렇게 끝나 내일도 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제자가 되는 걸 인정받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다음날 얼굴을 내밀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래서, 여긴 왜 왔어, 라고.

그런 날들이 계속돼 어영부영 말끝을 흐리며 도망치다 마침내 궁지에 몰린 게 오늘이었다. 어차피 쓰는 걸 읽어보면 안다, 말하지 않으면 멋대로 해석하겠다, 라고까지 얘기한다면 이제는 협박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할 수 없이 실토한 끝에 이런 말을 들었다.

  “좀 떨어져서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딱히 도망친 건 아니고.”

우물거리며 변명하는 타낫세를 야니에가 지긋이 응시했다.

  “그래서, 머리는 식었어?”

  “아마도, 조금은.”

  “그래? 그럼 성으로 돌아가.”

  “잠깐…딱히 그것뿐만이 아니라, 야니에 스승님께 지도받고 싶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로, 그 교본을 빌린 뒤부터 줄곧 생각해왔습니다.”

매몰차게 대해진 타낫세는 초조해하며 그렇게 늘어놓았다. 잠자코 있다가는 진짜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말이 너무 노골적이라 가끔 괴롭다.

  “구애의 말 같은 건 못 가르쳐.”

  “바라지 않습니다!”

  “뭘 원해?”

  “뭘 원하냐고 하셔도….”

혹시 자신이 심심풀이 장난감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타낫세에게 의심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런 그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니에는 잘도 말을 이었다.

  “너, 어차피 지금까지 써둔 건 있겠지. 오늘은 그걸 두고 가.”

  “그 말씀은…!”

그 의도를 헤아리고 얼굴을 빛내는 타낫세더러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멋대로 해석하고 즐거워하려고.”

  “그만둬주십시오.”

 

5-5

그러나 두고 가지 않는다는 선택은 없었다. 만약을 위해 방문할 때마다 늘 들고 다니던 종이 뭉치를 건넨 뒤 타낫세는 야니에의 저택을 떠났다.

디톤의 거리는 언제나와 같이 온화한 활기로 가득했다. 왕도의 소란스러움이나 조급함은 없었다. 여기 쌓인 것은 무척 오랫동안 쌓여온 시간의 기척이었다. 피어나는 과거의 잔향 사이를 누비듯이 깔린 길을, 타낫세는 나아갔다.

데리고 있는 것은 한 명의 호위뿐이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왕성과 멀리 떨어진 이곳에 계승권 없는 왕자의 얼굴 따윈 전해지지 않았고, 뭣보다 그런 왕자에게 손을 대봤자 마땅한 이익도 없다. 납치당하거나 다쳐도 현 왕권에 대한 괴롭힘 정도의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왕도에 있을 때도 위해를 두려워할 일은 거의 없었다. 바일과 함께 있을 때를 빼고는.

좁은 곳까지 들어가는 록차도 필요 없다. 그의 행동범위는 대개 번화가 중심이라 일일이 끌고 오는 쪽이 더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그는 고도古都의 공기를 피부로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과묵한 위사 한 명만을 데리고, 타낫세는 거리를 마음껏 거닐었다. 겉으로 보기만 해도 귀족임이 분명한 탓에 종종 험상궂은 시선을 보내는 치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행위는 없었다. 여기서는 귀족이라는 존재의 그늘도 희미하다. 보다 으슥한 데로 파고들면 얽힐 지도 모르지만 일부러 그런 곳에 갈 생각 따윈 없었다.

거리에 종소리가 울렸다. 저녁을 알리는 신전의 통지다. 점차 해가 저물며 밤이 찾아올 터였다.

체류를 위해 마련된 저택으로 가는 길을 따라 시장이 열린 광장을 지난다. 문 닫을 채비를 하는 가게 앞에 전시된 것이 눈길을 끌어 타낫세는 발을 멈췄다.

  “…아, 잠시 기다려.”

그리고 아름답게 세공된 숟가락을 산 뒤 자리를 벗어났다. 역시 유서 깊은 도시라고 생각될 만큼, 뛰어난 장인들과 오래되고 진귀한 물건이 많아, 이런 노점에서도 가끔은 고풍스러운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다만 타낫세의 마음은 만족스럽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어서 오십시오.”

성에서 따라온 시종감의 마중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간다. 먼저 돌아본 탁자 위엔 섬세한 자수가 놓인 서피(북커버)와 정갈하게 염색된 찻잔 등이 놓여 있어, 그 옆에 좀 전에 산 숟가락을 꺼내놓았다. 그것들을 비교하며 타낫세는 잠시 신음했다.

역시 좀 아닌 것 같다. 마음에 들 거라는 자신이 없다.

이것들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니었다. 

  “선물 제대로 사와.”

배웅 받을 때 태연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내 맘에 드는 거 사기 전까진 안 돌아와도 돼. 성에 안 들여보내줄 거니까.”

녀석은 무척 가벼운 어조로 그렇게 명했다. 홀로 성을 떠나는 이쪽의 불안함도 모르고, 주인 행세를 하면서.

순순히 따르는 건 분하지만, 막상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으면 시끄러워 못 견딜 것이 빤하기에 이렇게 검토하고 있다. 보고 있지만, 다시 생각하면 상당히 어려운 주문이었다. 왕도에서 쉽게 입수할 수 있는 건 안 되고, 그렇다고 책이나 예술품 종류는 기뻐하지 않을 거다. 결국 이렇게 눈에 띄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구입하고선, 잘못 골랐나 의심하는 나날이다.

그리하여 매번 도달한 것은, 이것저것 생각해도 별 수 없으니 전부 줘 버리면 하나쯤은 마음에 들 거라는 체념이었다.

 

5-6

그런 사소한 고민은 있지만, 디톤에서의 나날은 별 탈 없이 지나갔다. 유학기간이라고 스스로 정한 것은 1년, 짧지는 않아도 배우기에도 충분치 않은 나날이었다.

야니에 백작은 한결같았으나, 저택을 방문했을 때 쫓겨나는 일은 없었고, 이쪽에서 질문하면 여러 가지로 대답해줬다. 두고 간 물건에 대해선 “그래서, 그게 네가 쓰고 싶은 거냐?”라고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좀 불안하긴 했지만. 턱없는 실력이냐고 물어보자 “아니, 재밌어.”라는 말을 들었는데, 일단 칭찬 받은 거라고 생각해도 좋은 걸까. 알 수 없었다. 뭐가 재밌는지는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 식이라서 결국 제자로 인정해 준 건지조차 불분명했다. “야니에 스승님”이라고 의식해서 부르는 호칭은, 부정하진 않지만 흘려듣는다는 인상을 받아 감당하기 힘들었다.

어쨌건, 하는 수 없이, 타낫세는 오늘도 그녀의 집을 찾아 시를 지었다.

  “너, 티파린을 좋아하나.”

가끔씩 훑어보곤 그렇게 묻는다.

  “아, 네. 그 단어 선택의 명료함과 동시에 때로는 대담한 조합을 하는 부분이 무척.”

  “하지만 그의 기법은 뒤죽박죽 독선에 빠질 위험성이 무척 높다. 동떨어진 것을 이어붙이는 것만으로 신기한 표현이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네….”

짚이는 데가 몇 군데 있어 타낫세의 표정이 흐려졌다. 자신의 시는 원체 미숙하고, 그녀의 지적은 언제나 적확하다. 역시나 그 교본을 외울 정도로 읽었지만, 아직 몸에 붙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시상으로 보이는 것이 문득 눈앞을 가로지른다 해도, 제겐 아직 그것을 잡아챌 힘이 없다는 것이다.

나한테 힘이 있다면, 하고 바란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놓치지 않고 단번에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는 힘이.

그리 되면 자신은 분명 어떤 장소에서든 가슴을 펴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래, 그 성에서조차도 분명.

  “어이, 멍청이.”

생각에 잠긴 타낫세의 머리가 덥석 잡혔다. 곧 그대로 숙이고 있던 얼굴이 억지로 앞을 보게 됐다. 기다리고 있던 것은 스승의 깊이 빛나는 눈동자였다.

  “하나 기억해둬.”

그녀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말은 너를 반드시 배신한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 알겠어? 반드시.”

그녀는 그에게 엄숙하게 경고했다.

  “너는 아직도 순진하게 그 힘을 믿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예언할 수밖에 없지. 호되게 당하고 나서야 이 말의 뜻을 알 거다, 너는.”

말대꾸할 배짱도 없이 기에 눌린 타낫세는 그 말을 새겼다.

  “네가 그 힘을 믿는 한, 말은 너의 편이 되지 않아.”

그렇게 예언은 끝나고, 타낫세의 머리는 풀려났다. 그리고 방금 일을 물을 틈도 주지 않은 채 야니에 백작은 연이어 통고해 왔다.

  “오늘은 돌아가. 지금부터 고대 신전에 볼일이 있어.”

그런 말을 들으면 버틸 수도 없다. 아까 들은 말을 다 소화하지도 못하고 쫓겨난 타낫세는 석연찮은 마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아직은 날도 밝아 곧장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었다.

걸음은 자연스레 가게가 모여 있는 시내의 광장 쪽으로 향했다. 뭔가 좋은 걸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바일의 구미가 돌게 할 법한,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 그걸 구하면 나는 당당하게….

문득 타낫세는 멈춰 섰다.

그의 다리를 붙든 건 불현듯이 커지는 의구심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의심할 여지 없는 일이다. 여기 온 건 유학이고, 즉 일시적인 것으로,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끝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그럼 다시 결정할 수도 있다.

…나는, 성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있을 곳 없는 그 성으로, 정말?

 

5-7

힘은 얻지 못했다.

디톤 행차에서 돌아온 뒤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5년을 요약하면, 그것만이 떠오른다.

자신은 여전히 약하다. 바라던 만큼 강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라는 것조차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누가 봐도 명백하게 밝혀진 것은 어전 대회였다. 경기 전의 여흥이라는 듯이, 바일이 억지를 부려, 금세 끝난 그 시합.

엉망으로 때려눕혀졌다. 아직 팔도 가느다란 세 살 아래 아이한테.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차기 국왕을 상대로 봐주지 않을 수가 없었으리라는 동정적인 시각이 있다는 건 안다. 자기라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확실히 처음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칩거 전까지는 추월당할 것 같았던 키도, 나와서 보니 이쪽이 상당히 자라나 있었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꾸만 덤벼드는 바일이 묘하게 당혹스러웠다. 언젠가 그는 리리아노에게 다가가 어전 시합 전에 자기들끼리의 개막 시합을 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남자를 선택했으니까, 설마 도망가진 않겠지?”

그런 도발에, 이걸로 기분이 풀린다면 하고 넘어가버린 게 좋지 않았다. 5년의 성과를 과신한 탓도 있었다. 처음부터 이길 생각은 없으니 적당히 봐주면 될 거라고.

그런 여유는 몇 번의 반격에 무너졌다.

아는 사람이 보면 알아볼 거다. 자신이 진심이었는데도 바일을 상대로 손도 대지 못했다는 걸. 경기 후에 보내진 위사들의 측은한 시선만 봐도 그랬다. 뭐가 단련이냐. 자신이 해온 것은 놀이 같은 것이었다.

이후 무용 수업은 중단했다. 성장할 가망이 없는 것을 교육 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바일은 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다. 자신의 역량이 훨씬 위라는 걸. 그 말인즉슨…이쪽을 망신 주고 싶었다는 뜻인가.

그 계획은 훌륭하게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그 일로 입지가 더욱 좁아졌으니까. 이제 왕자로서의 위엄 따위 자신은 조금도 인정받지 못할 터였다.

어차피 양위가 이행돼 어머니가 왕이 아니게 되면 나가야 할 처지다. 그리고 그건 먼 훗날의 일이 아니었다. 예정을 조금 앞당겨봤자, 아무도 붙잡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타낫세의 안에서 그 생각이 분명하게 자라났다.

  “안 돌아와도 돼.”

그래, 그런 말을 들었다.

  “내 맘에 드는 거 사기 전까진.”

그런 걸 찾고 있던 제가 바보 같았다.

  “…저기, 괜찮습니까?”

문득 옆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회상에 잠겨 있던 타낫세는 그제야 현실로 되돌아왔다. 목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자, 곤란한 얼굴의 청년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게 앞에 가만히 서 있었던 것 같았다. 장인처럼 보이는 청년은 불편해하다가 쭈뼛대며 말을 꺼낸 모양이었다. 확실히 무척 묵직한 호위를 거느린 귀족 같은 인물에게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을 터였다.

  “아… 아아, 그렇군, 그게….”

얼버무리듯이 타낫세는 중얼거리며 매대 위를 바라봤다. 뭔가 적당히 사면 되겠거니 싶었는데, 그중 하나에 저절로 눈길이 끌렸다.

이 가게는 도자기 인형 따위를 만드는 공방인 것 같았다. 명품다운 품격은 떨어져도, 정교한 세공에 공을 들여 장인의 솜씨가 좋아보였다.

관심이 간 건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장식용 소품이었다. 새 모양을 한. 그 작은 날개를 한껏 펼치고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처럼 보였다.

  “이걸로.”

기분대로 망설임 없이 타낫세는 그것을 골랐다. 깨지지 않게끔 천으로 싸서 품에 넣었다. 그리 무겁지도 않아 걷다 보니 금세 익숙해졌다.

결국 자신은 이렇게 선물을 샀다.

저택으로 향하는 길을 나아가면서 타낫세는 탄식했다.

그 얘기는 즉,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적어도 이번에는 1년을 약속하고 나왔다. 일단 돌아가서 보고하고, 여기로 돌아올지 어쩔지는 그 뒤에 결정하는 결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후련했다. 이제부턴 유학기간 내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일도 없었다. 끝났을 때 고민하면 되는 거니까.

그의 불행은, 그 결론이 완전히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시종감이 당황하며 그에게 알렸다.

  “타낫세 님, 바로 성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바일 님께서…!”

 

5-8

초조함 속에, 귀성길은 지나갔다.

토록의 다리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느렸고, 스치는 풍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 듯싶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아가게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은 곳도 있어 일주일 남짓을 허비했다.

상상은 최악으로 치닫기 쉬웠으며, 관문에서 받을 수 있었던 편지만이 그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타낫세는 록차에서 뛰어내려 집무실을 향해 달렸다.

  “어머님!”

그리고 대면 절차도 밟지 않은 채 그 안으로 들이닥쳤다.

  “돌아왔나. 빠르군.”

일어선 어머니의 얼굴에는 피로가 엿보였지만 상상 이상으로 평온했다. 그만 물어뜯듯이 타낫세는 물었다.

  “바일은, 바일은 어떻게 된…!”

  “잠시 기다리게.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도록 해.”

달래는 어머니의 태도는 매정해 보일 지경이라 상상하기도 싫은 의심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무리해서라도 자세를 바로잡고 물을 마시게 됐을 쯤에는, 타낫세의 머리에도 다소 냉정함이 돌아와 있었다. 사건은 일주일도 더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직까지 동요하고 있을 리가 없으니, 허둥대는 것은 성을 떠나 있던 자신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당사자가 아니다, 라는 게 강렬히 느껴져 타낫세는 입술을 깨물고 말을 삼켰다.

어째서, 하필이면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이런 일이.

  “안심하게. 바일은 괜찮다. 완치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분명 차도가 있으니.”

  “무슨 일이…벌어진 겁니까? 경기 중의 사고였다고, 편지에 적혀 있었는데….”

  “흠. 그렇군….”

리리아노는 잠시 주저하는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자네가 나간 뒤로 바일이 불평했네. 어전 시합에 나가고 싶다, 전처럼 들러리 취급이라도 상관없으니 위사와 상대하게 해 달라, 라고. 물론 기각했지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위사들에게 폐라고 생각하면서도 허가를 내 버렸다. 그걸로 바일이 만족해줬으면 해서. 왕이 되고 나면 그런 고집도 용납 받지 못하니까.”

  “그래서 이런 일이.”

  “아니, 처음엔 문제없이 지나갔다. 봐주고 있다고는 해도 1회전에선 바일이 꽤 멋진 몸놀림으로 승리했을 정도야. 역시 2회전에서는 가볍게 져 버렸지만 말이다.”

큰 한숨과 함께 리리아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좋지 않았어. 다음에도 당연히 나가고 싶어 했고, 거절할 이유가 보이지 않았네. 이번에도 적당한 상대가 오려니 하고 나는 다시 허가했다. 그리고 1회전에서였지. 바일이 상대의 맹공에 칼을 떨어트리고 끝났다고 생각된 순간….”

타낫세는 어전 시합에 끌려 나갔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짓밟혀 일어나는 흙냄새, 위사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열기, 위에서 쏟아지는 시선, 맞부딪치는 쇠 소리. 그때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검의 기세는 그치지 않고 바일의 어깨를 내리쳤다.”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바일은….”

  “곧장 조치를 받아 지금은 무사하다. 그 뒤에… 아아.”

그 순간 이야기를 나누듯 리리아노의 측근이 그녀의 귀에 뭔가 속삭였다. 표정으로 미루어보면 나쁜 소식은 아닐 것이라며 지켜봤더니, 그녀는 다소 온화한 기색을 머금고 이쪽을 돌아봤다.

  “깨어났다고 하니 지금이라면 만날 수 있을 거다. 막 도착해서 피곤하겠지만 한 번 얼굴을 내밀어주는 게 좋겠어.”

권유받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인사하며 물러난 타낫세가 탑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쨌거나 자기 방 옆이니까.

 

5-9

그러나, 바일의 방을 찾아온 타낫세를 맞이한 것은, 재회의 기쁨도 아니고 벌인 일에 대한 반성도 아닌, 자못 불만스러운 투정이었다.

  “우와, 진짜로 돌아왔어?”

잘못 들었나 싶어 놀라며 걸음을 멈춘 그에게 거침없이 말이 쏟아졌다.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이런 별것도 아닌 일로 돌아오다니 바보 같아―.”

느닷없이 퇴짜를 놓고, 옆의 시종은 난처한 얼굴로 애매하게 웃고 있다. 얼버무리려는 듯 그릇에서 으깬 딸기와 크림을 떠서 주인에게 내민다. 이쪽은 보려고도 하지 않고 숟가락을 무는 바일의 모습을 타낫세는 멀뚱히 쳐다봤다.

침대에 세워둔 등받이에 기대 상체를 일으키고 있는 바일의 얼굴에선 확실히 수척해진 기색이 엿보였지만, 건방진 말을 뱉으며 태연스레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그 자세는 제법 뻔뻔해 보였다. 편지로만 들었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뭐, 그렇게 얼굴도 내밀었으면 의리는 다 했잖아. 애써 눈치 보지 않아도 아무도 험담하지 않는다니까. 안심해, 부재중일 때 일어난 거니까 이것저것 의심 받지도 않고.”

게다가 이쪽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쏘아붙인다. 돌아온 건 자기보신을 위해서일 거라면서.

제 손끝이 떨리고 있다는 걸 그제야 타낫세는 깨달았다. 몸을 휩싸던 열기는 어느새 그 움직임을 멈춰버렸는지 발밑까지 차게 식었다. 그 열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바일의 다음 도발 덕분이었다.

  “됐으니까, 빨리 디톤으로 돌아가지 그래?”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한 순간 타낫세의 머리에 피가 치솟았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네…네 녀석, 네 녀석은 사,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여기까지…!”

  “그러니까 난 부탁하지 않았다니까. 멋대로 연락해 버리고.”

  “자, 장난삼아 시합에 멋대로 나오고, 네 녀석은 자신의 입장이라는 걸 알아야…!”

  “아―아―. 저거 봐. 그러니까 싫었어, 알려주는 거. 저렇게 하나하나 시끄러우니까. 애써 기분 좋아지고 있었는데.”

  “닥쳐…닥쳐!”

스스로 알 수 있을 만큼 목소리가 높아져 보기 흉했고, 그 점이 타낫세를 더욱 흥분시켰다. 반면에 얄미울 정도로 침착한 바일 또한 불을 붙였다.

  “네 녀석은, 네가…. 너, 네 녀석의…!”

  “저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데. 그런 걸 배우러 갔어? 그럼 제대로 공부하는 게 낫지 않아?”

  “까불지, 까불지 마!”

사태는 악화되기만 했다. 사용인들은 만류할 수도 없어 지켜보며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살피고, 방 한 켠의 호위들에겐 긴장감이 감돌았다. 확실히 그대로 말싸움이 진행됐다면, 끝내 타낫세는 바일에게 덤벼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를 이 공기를 환기한 것은 찾아온 사용인이었다.

  “실례합니다. 진찰 시간입니다만. 비켜주시겠습니까.”

그는 주눅 드는 일도 없이 그렇게 말을 걸고, 문을 가로막은 타낫세를 아무렇게나 밀어젖히며 방으로 들어갔다. 다소 무례하게 대해지는 데 익숙하다고는 해도, 이렇게까지 매몰차게 대해진 것은 역시 드물어, 타낫세는 어리벙벙해하며 나타난 인물을 쳐다봤다.

젊은 남자였다. 제 담당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까진 기억나지 않지만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고, 뭣보다 의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여기에 무슨 일로 나타났는지는 명백했다.

  “아, 의사 선생님. 시간이 그렇게 됐어?”

  “면회는 허락했지만 몸에 해로운 상대는 삼가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내가 부른 거 아냐. 게다가 저쪽이 멋대로 떠든 것뿐이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자신을 무시하고 대화를 시작한 두 사람을 바라보는 타낫세는 속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 금세 격앙이 가라앉았다. 대신에 나타난 것은 흐트러진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이었고, 바일의 방금 전 태도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타낫세는 어느새 사용인들이 방에서 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저기, 못 들었어? 진찰시간이니까. 바이바이.”

그렇게 재촉을 받고 나서야 의사와 바일 말고는 자신과 호위만이 방에 남아있다는 걸 눈치 챘다. 왜 사용인들을 방에 남겨두지 않는지 의아스러운 동시에, 타낫세는 순순히 물러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여기서 견디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면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어. 딱히 지장은 주지 않는다. 여기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그 순간 돌아온 것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한숨이었다. 그러자 돌아서서 치료도구를 열던 의사가 얼굴만 반쯤 이쪽으로 향하며 냉담하게 단언했다.

  “치료에 방해가 됩니다. 나가주시겠습니까, 왕자 전하.”

물고 늘어질 데가 보이지 않았다. 불만은 있지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깨물며 방에서 나서는 타낫세 뒤로 문이 쾅 닫혔다.

그것은 마치 바일의 거절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5-10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이유도, 적의를 드러내는 이유도.

뭔가 거슬리는 말이라도 했나 싶지만, 들어선 순간부터 저랬다. 짚이는 데가 있을 리 없다. 다쳐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거라 쳐도, 사용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평소 같았다. 게다가 태도가 이상했다면 어머니도 한 마디쯤 주의를 줬을 것이다.

일단 화풀이라고 보기도 이상하다. 명백히 자신을 향한 악의가 느껴졌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헤어질 때의 인사는 그 선물 주문이었다. 디톤에서 보낸 편지는 경과보고 정도였고, 바일에게 특별히 연락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토라진 건지도 생각해봤지만, 오히려 편지 교환 같은 건 바일이 싫어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편지를 주고받자는 약속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모르겠다. 뭔가 심한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예컨대…이번 일을 이쪽에서 꾸며낸 건 아닌가 하는.

  “모르, 돌아간다.”

그리고 타낫세는 결심했다. 역시 지금 물러나서는 안 된다. 바일의 상태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오해가 있다면 빠른 시일 내로 풀어두는 게 좋았다.

어떻게 들어갈 건지 눈짓으로 묻는 모르를 향해 타낫세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저 녀석의 수법은 실컷 봤어. 따라하는 것뿐이다.”

바일의 방 문지기에게 명령하자 초인종을 누른다. 얼굴을 내민 시종이 수상쩍어하며 묻는 데, 타낫세는 고압적으로 단언했다.

  “왠지 장식용 핀을 떨어트린 것 같다. 침실이겠지. 들여보내줘.”

그런 거라면 나중에 전해주겠다는 시종의 말은 듣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이, 금방 주워들고 나오겠다며 억지로 몸을 비틀고 그대로 침실로 들이닥쳤다. 말리려는 사용인들은 모르가 자연스럽게 막는다.

  “바일, 들어간다. 분실물이 있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타낫세는 손수 침실 문을 열었다.

순간 숨을 삼키는 기색이 역력했다. 홀린 듯이 타낫세의 시선이 침대에서 치료를 진행하는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방 안은 그윽한 약초 향기 사이로 피 냄새가 살짝 섞여있었다.

바일은 상체를 드러내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였다. 그 창백한 얼굴에는 이쪽을 알아본 눈동자가 크게 떠져 있다. 그 안에 비치는 자신도 아마 같은 표정이리라고 타낫세는 문득 생각했다.

바일의 몸에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에 걸쳐 퍼진 검붉은 선. 그 주변은 약 때문인지 노랗게 물들어 있어서, 그게 더욱 위화감을 도드라지게 했다. 바닥에 떨어진 붕대에는 군데군데 검은 얼룩이 스며들어…….

  “보지 마!”

비명 같은 고성에 타낫세는 정신을 차렸다. 휙 쳐다보자 바일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지 마, 보지 마!”

  “바….”

이름을 부르며 다가서려던 타낫세의 이마에 무언가 부딪쳤다. 붕대 덩어리라는 걸 알 틈도 없이, 이번에는 딱딱한 것이 발밑에 튀었다. 이어서 오른쪽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다.

  “보지 마, 나가, 나가!”

  “바일, 기다려, 그만둬!”

바일이 근처에 있는 것을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어깨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위사의 비호를 받느라 반쯤 가려진 시야 너머로 바일이 젊은 의사에게 짓눌린 채 몸부림치는 것이 보였다.

  “바일 님, 진정하세요. 상처가…!”

  “싫어, 싫어, 타낫세 따위 싫어! 나가, 나가, 나가!”

아우성치는 바일을 어떻게든 제압하며 의사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의마저 느껴지는 시선이 타낫세를 꿰뚫었다. 그 호소는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졌다.

변명의 여지도 없이 타낫세는 위사에게 붙들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분명 스스로 걸어왔을 텐데 땅을 밟은 감각은 없고, 정신을 차리니 거의 쓰러지듯 침대에 걸터앉은 채였다.

방금 일은 뭐였을까.

생생한 상처, 약과 피 냄새, 창백한 얼굴, 그리고,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

지금도 귓속에 메아리치는, 가슴을 찌르는 거부의 말.

  “나는…무슨 짓을 한 거지?”

뭔가 잘못했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좋은지, 모르겠다.

돌아오지 않으면 좋았을까? 문병을 가지 않는 게 좋았을까? 이야기하러 다시 가지 않는 게 좋았을까?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다. 선택의 여지도 없다.

불합리하다.

돌연 조바심이 타낫세의 마음을 스쳤다. 그것에 호응하듯이, 뭔가에 부딪힌 어깨가 욱신욱신 아팠다.

지나친 말들을 하기는 했지만, 느닷없이 달려든 건 바일이었다. 왜 문병하러 가서 야단을 맞아야 하는지. 이상했다. 제게는 잘못이 없었다. 어째서 반성 따윌 하고 있는 걸까. 오히려 이쪽에서 화를 내야 마땅하다. 뭐가 싫다는 거야. 이쪽이야말로.

  “너 같은 거, 싫다.”

흘러나온 말은, 놀라우리만치 순순히 위장에 들어왔다. 다 익은 과실처럼 금세 찌부러져 서서히 속에 퍼져 나갔다.

그래, 계속 이렇게 생각했다.

재능을 타고난,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응석을 부리는, 그리고 무엇보다 신에게 인정받아 옥좌가 약속된,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는.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추한 마음을 모르는 체하며 속이고, 동정하고 염려하는 척했다. 이게 그 결과다.

  “너 같은 건… 너 같은 건….”

어깨가 아프다. 가슴이 술렁인다. 목이 멘다. 숨쉬기가 힘들다. 치밀어 오르는, 말. 자신의, 거짓 없는 마음.

그것을 털어버리고 싶은 건지, 삼키고 싶은 건지 몰라 타낫세는 반사적으로 가슴팍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순간 손바닥은 이상하게 딱딱한 것을 움켜쥔다. 자연스레 이게 뭐냐는 의문이 떠올라 마음을 다잡았다. 품에 손을 넣고 꺼낸, 나타난 그것에 그는 얻어맞았다.

작은 새 모양의 장식용 소품. 잊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날, 주머니에 넣어둔 채 돌아보지도 않았다. 떠올릴 여유 따위가 없었다. 만사 제쳐놓고서, 록차를 타고 그저 이 성까지 달려왔다. 애가 닳던 초조함과 걱정이 타낫세에게 되살아났다.

확실히 나는 바일을 미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위로의 마음도 결코 거짓은 아니다.

어지럽던 머리가 서서히 식어갔다. 자신의 얕은 생각에 눈길이 갔다.

얼굴을 내밀었을 때 바일이 보인 태도는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무리하게 침입한 건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진정되자 자신이 목격한 것의 의미도 떠올랐다.

생각보다 심한 상처였다.

대수롭지 않은 척 굴지만,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 생기는 화풀이도 어쩔 수 없다.

마음에 들진 모르나 이렇게 선물도 가져왔다. 오늘은 찾아가봤자 들여보내주지 않을 테니까, 내일, 이걸 주면서 사과하고, 그리고 물어보자.

이걸로 성에 들어오는 걸 허락해 줄 거냐, 라고.

 

5-11

침대를 옮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타낫세는 뒤이어 생각했다.

아마 자신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돌을 빼내 옆방의 움직임을 살폈을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 이변을 눈치 챘을 것이다. 하지만 연결되는 길은 막혔고, 건넛방이라고 해도 그 거리는 무척 멀다. 발코니를 뛰어넘는 날렵함 역시 더 이상 아이가 아닌 몸으로 발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정직한 방문이다. 시간을 재고, 기회를 봐서 옆방으로 향한다. 복도를 걷는 그의 손에는, 작은 새 장식이 들려 있다. 핀잔을 듣기 전에 선수 쳐서 내밀고, 이쪽의 기세에 맡겨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뭐 하러 오셨어요?”

적의는 침실도 아닌, 방 입구에서 벌써 들이닥쳤다. 복도로 이어지는 문을 슬쩍 열고 그 안에서 얼굴을 내비친 작은 시종의 눈초리는, 살갗에 박히는 것처럼 맹렬했다. 얼굴을 보이자마자 던지는 그 질문은, 도저히 왕자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문병인 게 당연하잖아. 뭘 하는 거냐, 어서 문을 열어라.”

당황하면서 내린 명령은 놀랄 정도의 기세로 거절당했다.

  “안 됩니다. 되겠습니까?”

  “네놈은…누구한테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당연하죠. 타낫세·란테=요아마키스 전하! 당신이야말로 본인의 입장을 알아두세요!”

그 순간 그녀 안에서 뭔가 깨진 것이 눈에 띄었다. 순식간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녀는 목 멘 소리로 하소연한다.

  “모처럼, 거기까지 회복되셨는데! 사흘 전까지 아무 것도 목을 넘어가지 않아서, 과일만 겨우 드실 수 있어서, 일어날 수 있게 되신 것도, 간신히, 간신히, 그런데…!”

점점 오열로 무너지는 말을 타낫세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채로, 어렴풋한 불안만이 쌓여갔다. 캐물으려 해도, 그녀의 귀에는 부름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문이 더 크게 열렸다. 높은 위치에 놓인 가늘고 긴 손가락이 문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시종 뒤에서 그는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 다름없는 냉담한 젊은 의사의 모습에, 이제야 사태를 설명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타낫세는 안심했다.

그 안도 역시, 뒤에서 대기하던 모르가 웬일인지 앞으로 걸음을 옮길 때까지만이었다. 지시하지 않은 움직임에 당황하는 타낫세를 향해, 말이 건네진다.

  “왕자 전하.”

그것은 도리어 평온한 어조의 목소리였다. 다른 이가 들어도, 지극히 태평한 부름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타낫세에게는 느껴졌다. 어제 향한 살기는 기분 탓이 아니며, 보다 더욱 무시무시해졌다고.

  “바일 님께선 지금 안정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일부러 방문해주신 데 죄송하지만, 면회는 허가되지 않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냉정하고 설명은 정연했다. 그것이 더욱 으스스해 타낫세의 혀를 둔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모르의 비호를 받으며 물러나지 않은 것은 그의 고집이었다. 온 힘을 쥐어짜 의사에게 물었다.

  “기다려. 바일은 대체 어떻게 된….”

  “격한 움직임 때문에 상처가 벌어졌습니다.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상황이죠. 어서 돌아가세요.”

격한 움직임의 원인이 뭐였는지, 그는 말하지 않는다. 그게 더 깊은 분노를 나타낸 것만 같아 타낫세는 얼어붙었다. 물론 알고 있다. 어제의 그 일 때문이라는 걸.

  “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지른 말은 바로 끊긴다.

  “돌아가세요.”

그 정적 틈에 곧장 의사가 다그친다.

  “나는, 그런….”

  “돌아가세요.”

  “그런 짓을….”

  “돌아가세요.”

말은 전해지지 않는다. 여기서 아무리 되풀이해도 문 너머에 있는 바일에게는 닿지 않는다.

  “그런….”

우두커니 서 있는 타낫세의 눈앞에서 문틈은 가늘어지고 사라졌다. 아무리 초인종을 울려도 이젠 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 순간 싫은 감각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부지불식간에 쥐어버린 주먹 안에서, 뭔가 움직였다. 깜짝 놀라 손을 펼치자 손가락 사이로 조그만 파편들이 흘러내렸다.

  “그저….”

손 안에 든 것을 바라보며 타낫세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날갯짓하던 새의 날개가 뿌리부터 부러져, 이제는 어디 갈 수도 없는 몸통과 함께 힘없이 나뒹굴었다.

 

5-12

바일에게, 신의 나라에선 마중을 오지 않았다.

한 번 무너졌던 몸 상태도 곧 다시 회복돼, 얼마 뒤에는 안뜰 같은 데서 그 모습이 보이고, 정신을 차려보니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경과의 자세한 것을 타낫세는 몰랐다. 그 뒤로는 방에 찾아가려 하지 않아서였다. 모든 게 그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진행됐고, 바일을 상대한 위사가 성에서 쫓겨나듯 떠난 것이며 돌아간 고향에서 죽었다는 듯한 것도, 모두 일단락된 뒤에 소문으로만 들었다.

조금씩 흘러가는 채로, 디톤은 정리하게 됐다. 야니에 백작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무례를 사죄하는 글을 올리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앞으로도 작품을 보내라는 답장이 왔다. 여전히 그녀는 친절한지 차가운지 잘 모르겠다.

회복된 바일과 점차 얼굴을 마주할 기회도 늘어났다. 바일의 태도는 디톤 유학 전보다 더 거칠어 보였다. 왜 이 성에 있는 거냐는 듯싶은 분위기를 말끝마다 풍겨대, 무척이나 무례한 그 태도에 이쪽에서도 그만 응수하고 말았다.

어느덧 성에는 왕자와 총애자의 불화가 알려졌다.

그것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타낫세는 생각했다.

자기와 엮이면, 바일은 다친다. 그걸 잘 알아버렸다. 그렇다면 이 거리두기는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른다. 바일도 그것을 원한다면 더욱이.

정신을 차려보니 바일이 성인이 되기까지도 2년이 채 남지 않았다. 성은 양위 준비에 들었고, 들뜬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머잖아 지위를 잃는 왕자의 자리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불화의 소문은 귀족들의 귀에도 들어가, 뒤에서 떠돌던 야유는 이제 숨을 필요조차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런 장면을 맞닥뜨릴 때마다, 악의 어린 말들이 가슴에 쌓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덧 양위 날을 손꼽아 헤아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손가락질 받는 일 없이, 여기를 떠날 수 있는 그날을.

날이 갈수록, 해방의 날이 다가온다는 안도와, 정말 그걸로 좋은 걸까 하는 불안감이, 커져만 갔다.

옛날 이 성에는 두 가족이 살았다. 한 명씩 사라졌고, 이제 세 명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곧.

바일만 남겨진다.

오직 혼자서, 계속.

그 직무를 마칠 때까지.

그렇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당연한 일이다. 바일은 유일한 선정인의 소유자, 신에게 선택받은 차기 왕이니까.

신의 선택을, 자신이 어떻게 거스를 수 있을까?

 

이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숨죽인 채, 타낫세는 그저 계속해서 기다린다.

머지않아 찾아올, 이 성을 떠날 순간을.

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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