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등장인물은 주로 란테 조. 주역은 타낫세. 5화 완결."
*게임 본편과 연결되는 스포일러 有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2-1.

작물을 담아두는 통 속에서 녀석이 끌려나오는 것을, 나는 보고 있었다.

녀석은 발견된 것이다.

  싫어!”

버둥버둥 날뛰며 저항하는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나는 녀석을 배신하지 않았어.

하지만 협력도 하지 않았다.

나는 도망쳤다. 선택으로부터.

  싫어, , !”

그 질문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지만, 견딜 수 없어 무심히 외면했다. 만약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대답해야만 할 것 같아 두려웠다.

유일하게 그 물음에 답을 가진 인물은 조금 곤란한 듯 눈썹을 찡그릴 뿐, 가만히 서 있었다.

  왜야, , 아빠, 아빠!”

완전히 끌려나온 녀석은 위사의 손을 뿌리치고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녀석을 가만히 두면서도, 그는 대답은 하지 않는다. 문득 침대에 덮이는 천 같다고 생각했다. 가볍게 잡으면 감싸이지만, 세게 쥐면 훌쩍 달아나는, 그런 감각.

그의 손은 녀석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그는 분명 상냥하다.

그리고 아마 녀석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떠날 것이다. 비통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여태 그래왔듯이.

  가지 마, 가지 마!”

매달리는 녀석의 얼굴은 눈물콧물로 뒤범벅됐다. 말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눈물콧물이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사그라진다.

  정말, , 안 돼, 싫어싫어싫어!”

아무도 끼어들지 못한다.

저와 마찬가지로 조금 떨어진 채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어머니조차도.

흘끗 얼굴을 들여다봤다가 그의 표정에 깜짝 놀랐다. 올라간 눈썹과 의중을 알 수 없는 잔잔한 빛이 깃든 눈동자.

닮았다. 이 형제는 이런 순간마저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 모습에 만류할 생각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왕이다. 마음만 먹으면 구속해 묶어둘 수 있을 텐데.

어째서.

마음속에서 누군가 그렇게 외쳤다.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어머니?

그 질문은 결코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올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어머니를 규탄할 용기가 있을 리 없다.

  진짜……!”

주위의 바람은 알아채주지도 않고, 녀석은 계속 호소한다.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을 계속 입에 올린다.

  같이, , 데려가, 데려가줘!”

그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

녀석은 단 하나뿐인 차기 왕 후보로, 대신할 사람도 없다.

그래서 나는 녀석에게 협력하지 않았다. 화물 사이에 숨어들어 함께 가려던 녀석에게.

동시에 배신도 하지 않았다. 녀석이 숨은 곳을 일부러 고하지는 않았다. 안 해도 아버지나 나, 시종 곁에 녀석이 없으면 누구라도 이상하다고 여길 테니까.

생각대로 모두 녀석을 찾았다. 예상대로 녀석은 들켰다. 기대대로 녀석은 잡혔다.

그리고 녀석은 이제 갈 수 없다.

바다에 가지 않아도 된다.

그가 녀석을 데리고 갈 리 없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예상한다. 나는 기대한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

 

2-2.

아네키우스력 7396년에 이르러, 왕성이 술렁였다. 그리고 무척 당혹스러워 했다.

누구도 그의 결단의 의미를 알지 못했고, 그의 짙은 그림자를 보지 못했다. 날이 거듭될수록 악의는 과장된 상상을 마구 뿌려댔으며, 선의는 거기 현혹돼 헤매었다. 그와 가까운 관계자들은 계속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그 관계자 중 한 명이라고, 타낫세는 막연히 생각했다. 그 감회가 어딘가 생경한 것은 숙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타인이 아는 것과 같다.

숙부님은 바다로 가버렸다. 어머니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그리고 바일을 자신에게 맡겼다.

그게 전부다.

숙부의 심경을 알지도 못하고, 어머니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바일을 위로할 말도 없다. 그것이 무척 어중간한 자신의 처지였다.

  바일 님!”

창밖에서 시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라고 생각하며 타낫세는 발코니가 이어진 창가로 다가갔다. 아마 자신이 나설 차례는 없겠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난간을 뛰어넘어 달려갈 수 있게끔.

옆 발코니에서는 바일이 난간을 붙들고 그 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건 성을 잇는 다리다.

  오늘은 바람이 거세서 위험해요. 방으로 들어와 주세요.”

시종감도 따라 나와 안으로 들어가도록 재촉한다. 란테의 방계 출신인 그는 정직을 그림으로 그려낸 듯한 성격으로, 바일에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 바일이 유모와 시종을 잘 따르는 탓도 있는지 약간 존재감이 옅어보였다.

두 사람의 설득에도 바일은 응하지 않았다. 난간을 움켜쥔 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공부도 전혀 하지 않는다고, 교사가 한탄하고 있었다. 거의 방에 틀어박혀서, 놀자는 말은 고사하고, 방에 숨겨둔 구멍을 통해 말을 걸어도 가끔밖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그때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으니까. 매달려 애원하는 바일의 편을 들지 않았으니까. 떼어트리고, 그를 보내버렸으니까.

바일은 화가 난 거다.

비스듬한 뒤켠인 이 위치에선, 난간 사이로 고개를 내민 바일의 표정을 알 수 없고, 거센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간간히 드러난 목덜미만이 눈에 띈다. 두 사람의 호소에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 모습을 보며 타낫세는 깊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신도 저 설득 행렬에 합류해야 할 것이다.

끼어들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바일의 방에서 나타나는 그림자가 있었다.

작고 비틀거리는 그 모습은 바일의 늙은 교육 담당, 유모다.

요즘 들어 부쩍 공식 행사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돼, 바일의 방에서 반 은거 상태가 됐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시종의 부축을 받으며, 바일의 곁으로 다가갔다.

  바일님, 이 할머니도 같이 기다릴게요.”

그녀의 기척에 비로소 바일은 반응했다. 휙 돌아서 깜짝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쳐다본다.

  안 돼. 몸에 나빠.”

  아니요, 바일 님이 괜찮으시다면, 할머니도 괜찮습니다. 함께 할까요.”

  

바일은 당황해 유모와 미라네, 시종감을 바라보고 마침내 단념한 것 같았다. 난간에서 떨어져 유모 쪽으로 다가간다.

  알았어. 안에서 기다릴 테니까, 유모도 들어와.”

  알겠습니다. 그럼, 할머니도 함께 하죠.”

  뭔가 이야기도 해줘.”

  , 그렇게 할게요. 이 할머니가 알고 있는 거라면 뭐든지.”

아무래도 나갈 기회를 놓친 것 같다. 타낫세는 몸을 숨긴 채 가슴을 쓸어내렸다. 역시 그녀의 바일을 다루는 솜씨에는 견줄 수 없다.

모두들 방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엇갈리듯 발코니로 나가봤다. 축축한 바람이 순식간에 몸을 때린다.

역시 포기하고 돌아왔다, 라며 언젠가 숙부의 록차가 건너오지 않을까.

그렇게 바랄 수밖에 없었다.

 

2-3

바일이 여전히 틀어박혀있든, 숙부가 돌아올 기미가 없든, 어김없이 시간은 흐른다. 상황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흘러가는 나날들이 바일의 마음에 서서히 체념을 키워둔 것 같았다.

  분명히, 내가 제대로 왕으로서 공부하면, 아빠가 돌아와서 훌륭하다고 칭찬해줄 거야.”

오랜만에 주일예배에 얼굴을 내민 바일은 옆자리의 타낫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다음엔, 바다 너머 이야기를 잔뜩 해줄 거야. 괜찮아, 위험해지면 아네키우스님이 아빠를 도와줄 테니까. 방금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아무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헤어지는 날 숙부는 자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몇 번이고 타일렀다. 훌륭한 왕이 되는 거야, 라고. 바일이 이 결론에 이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가. 그럼 제대로 공부해둬라.”

  !”

타낫세의 애매한 반응에도 바일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라면 걱정할 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저와 달리 바일은 강하다. 엄마를 잃었을 때처럼 아빠를 잃은 것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 필요한 건 시간뿐이다.

예배가 끝나자 바일은 시종감을 따라 신전을 빠져나간다. 지금까지 밀린 진도를 만회하기 위해 특별수업을 받는 것 같았다. 반동 같은 의욕에 불안해하지 않을 수도 없지만, 방에서 훌쩍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게 분명했다.

바일의 뒷모습을 배웅한 뒤, 타낫세는 제단을 향해 흘끗 눈을 돌렸다. 어머니가 아직 신전장과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숙부가 떠난 뒤로 어머니를 제대로 접한 적이 없었다. 가뜩이나 바쁜 어머니 곁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어 뭔가 옥신각신하는 기색이었다. 란테의 이름을 가진 먼 친척이거나 유력 귀족인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과 바일을 대하는 시선에서 어렴풋이 파악했다.

숙부는 란테 당주였다. 그가 사라진 지금 그 자리는 유일한 자식인 바일에게 계승되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바일은 옥좌를 계승할 운명에 있으며, 무엇보다 그는 아직 어리다. 후견인의 지위는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한 과실일 것이다.

어머니는 왠지 피곤해보였다.

말하는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한 마디 인사 정도, 가능하면 대화를 약간 하고 싶지만, 자신을 위해 그런 시간을 쓰게 할 수는 없다. 어머니의 시간은 귀중하니까.

포기하고 신전 밖으로 나가 기다리던 호위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도서실에 들러 책 몇 권을 둘러보고 갈 심산이었다.

그러던 도중, 안뜰에 인접한 복도를 걷고 있는데, 타낫세의 시야 끝에 낯익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쪽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그 모습은 안뜰의 수풀 속으로 사라져갔다.

어째서 그날은 그런 부끄러운 짓을 하려고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타낫세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호위더러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명령하고, 낯익은 얼굴의 뒤를 쫓고 있었다.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무척 고뇌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랬으리라.

  역시 안 되겠어. 그런 건 무리야.”

수풀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도 단단히 굳어있었다.

타낫세는 슬그머니 가지와 이파리를 헤치고 그녀와 그 상대의 모습을 확인했다.

거기에 있던 것은 예상대로 바일의 시종인 미라네, 이전에 그녀와 함께 걷는 것을 본 적 있는 사용인 남성이었다.

 

2-4

  무리라고 해봤자, 앞으론 어쩔 셈이야. 별 수 없잖아.”

미라네의 말에 남자 역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에는 그렇게까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입은 차림새로 보건대 문관인 것 같다. 그 밖에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는,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다.

  네 마음은 잘 알아. 일찍 상황을 알았더라면 미룰 수 있었겠지. 근데 이미 늦었어.”

그는 절절히 호소했다.

  잘 생각해 봐. 한 달만 더 지나면 우리는 지금같이 일할 수 없게 돼. 그런 상태로 만족스럽게 모실 수 있을 리도 없지. 오히려 폐가 될 거야.”

  그렇지만, 저런 상태의 바일 님 곁을 떠나는 건.”

  전보다는 많이 나아지셨어. 걱정하지 마. 분명 예전처럼 돌아오실 거야. 게다가 슬슬 네 손을 떠나는 게 좋을 나이잖아.”

남자는 해쓱한 안색으로 침묵하는 미라네의 어깨에 손을 걸치며 부드럽게 재촉했다.

  너도 마님의 권유로 여기 오고 나서부터 꽤 노력했지? 마님도 분명 이젠 충분하다고 말해줄 거야. 네 손은 태어날 아이를 위해 비워두면 돼, 안 그래?”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는 명백했다. 타낫세는 목이 막히는 감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그냥 땅으로 눈을 떨어트렸다.

미라네는 시종을 그만두려 한다. 저 남자와 나가려는 거다. 자신의 시종 중에도 그런 식으로 성을 떠난 사람은 여럿 있었다.

그건 분명 기쁜 일인 게 틀림없다. 하지만바일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무래도 떠오르고 만다. 아버지에게 매달려 울부짖던 그 모습이. 문관인 저 남자는 그 광경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침묵이 주위를 감돈다. 분명 미라네도 떠올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다. 보아하니 배 위에 얹힌 그녀의 손은 떨리는 듯했다.

타낫세는 나가서 무언가 말해주고 싶은 충동에 쫓긴다. 그렇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만류할 권리도 이유도 자신은 갖고 있지 않다.

  알았어.”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타낫세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숨죽이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시종감에게는 이미 예전에 얘기해뒀어. 그러니까 남은 건 바일 님뿐이지만, 납득하신다면, 당신 뜻대로 할게.”

순간 남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가 곧 흐려졌다. 성에서 일하는 만큼 머리 회전은 나쁘지 않은 듯했다.

  잠깐, 그럼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실 거야. 아이도 여기서 낳아.”

  말도 안 돼. 그 다음엔 어쩔 건데. 성에서 시종이 아이를 키운다니 허락될 리가 없어.”

  그건그때 가서 생각하자. 결정했어. 그 뒤는 바일 님에게 달렸어.”

그 대답에 타낫세는 무심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녀는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토록 따르던 미라네의 이직을 바일이 받아들일 리 없다. 매달리는 것으로 정해져 있으니까.

남자는 당연히 용납할 수 없는 듯 다시 설득에 나섰지만, 수풀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는 더 이상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서 타낫세는 자리를 뜨기로 했다. 엿듣는 것은 오랫동안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대기하고 있던 호위는 갑자기 안뜰을 헤집고 들어간 작은 주인의 귀환을 의아해하며 맞이했지만, 타낫세가 걷기 시작하자 따로 묻는 것도 없이 뒤따랐다. 그는 왕의 자식에 대해 제대로 선을 긋고 임무를 수행하는 우수한 호위였다. 자신을 둘러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타낫세는 아까부터 자신의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설령 자신의 시종이 그렇게 그만둔다 하더라도, 자신은 반드시 신경 쓰지 말고 붙잡는 척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2-5

그날 밤 피곤하니 자겠다고 말해두고, 타낫세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진짜 자려는 건 아니다. 천막을 잡아당겨 가린 채로 벽의 돌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기대듯 앉았다. 건너편 돌에 막혀 잘 들리지 않지만, 그래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틀림없이 미라네는 오늘 밤에 말을 꺼낼 것이다. 그녀는 결단을 내리면 빠르게 해치우는 성격이었고, 그 남자와도 얼른 결착을 짓는 게 좋을 테니까.

이렇게 상황을 살펴봤자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건 알지만, 아무래도 진정이 되질 않아 일이 어떻게 풀리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한동안 건넛방은 무척 조용했다. 간간히 나는 인기척도 금방 사그라지는 게, 잠자리 준비를 하는 시종인 듯싶었다. 방의 주인은 아직 거실 쪽에 있을 터였다. 다른 때보다 침실에 드는 시간이 더뎌져 타낫세는 무언가 예감했다.

곧 문이 열리는 희미한 소리와 함께 여러 개의 발소리가 다가왔다. 먼젓번 것은 빠르고 가볍고, 뒤이은 것은 더디게 끌리는 듯 둔했다. 이불을 걷는 소리, 몸을 내던지는 소리, 그리고흐느끼는 소리.

구멍에 갖다 댄 타낫세의 귀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닿았다. 그건 예상하고 있던 젊고 상냥한 목소리가 아니라 쉬고 늙은 목소리였다.

  바일 님, 훌륭하셨습니다.”

교사로 평생을 살아왔다는 유모의 목소리는 작아도 희한하게 잘 꽂힌다. 거기 대답하는 바일의 목소리는 심하게 웅얼거리고 있어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라네는 이제 힘든 시기에 들어갑니다. 바일 님의 곁을 떠나는 것도 몹시 걱정스러웠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성장하신 모습을 봤으니 안심하고 출산 준비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유모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 왕다운 태도셨어요.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하늘에 계신 아네키우스 님도.”

그러나 금방 이해됐다. 어째서 바일은 칭찬받고 있는지. 어째서 미라네가 직접 위로하러 오지 않는지.

  괜찮습니다. , 할머니는 계속 옆에 있어요. , . 바일 님을 남겨두고 어디에도 가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바일은, 분명, 매달리지 않았던 것이다.

  , 안녕히 주무세요, 바일 님. 이 할머니가 곁에 있을게요.”

옆방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타낫세는 벽의 구멍으로부터 몸을 떼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문 앞을 지키는 호위더러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슬며시 발코니로 가는 창문을 열었다.

건너편의 발코니가 보인다.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달빛 아래 서 있었다. 어두워 확실히 보이지는 않지만 그게 누구고 뭘 하는 건지는 분명했다. 난간을 붙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는 그 모습.

그녀는 줄곧 바일을 돌봐왔다. 성에 와서부터 시종으로 발탁된 지 오래였다. 엄마를 잃었다는 걸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바일을, 영지를 오가는 아빠 때문에 토라지는 바일을, 그리고 이번 일로 무척 울적해하는 바일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떠받치고 달래줬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바일은 지금처럼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잘 된 걸까, 타낫세는 고심했다.

물론 그녀의 앞일을 생각하면 놓아주는 게 맞았다. 시종은 시종이다. 이대로 왕이 될 때까지 곁에 있으면 분명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그러니 유모도 바일을 칭찬했고, 어느 누구도 이 흐름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자신도 간섭할 처지가 아니다.

아침의 주일 예배가 생각났다. 바일이 웃는 얼굴로 말했던, 제대로 된 왕이 되기 위해 노력할 거라는 말. 그땐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본다.

제대로 된 왕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고.

어머니는 훌륭한 왕이라고 누구나 말한다. 하지만 바일이 어머니처럼 되기를 바라는 건가?

답이 나오지 않아 타낫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시선 앞에서 희미한 그림자는 자신의 배를 조용히 쓰다듬고 있었다.

 

2-6

미라네가 성을 떠난 무렵에는 역시 기운이 없던 바일이었지만, 그 기색을 알아챈 것은 늘 옆에 있는 일부뿐이었다. 그건 일전에 왕의 동생이 실종된 후 침울해진 것이 격렬했던 탓도 있고, 방에 틀어박히지 않은 채 적극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공부하는 짬짬이, 전처럼 놀자고 찾아온다. 실없는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입에서 더 이상 미라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 타낫세는 착잡함을 느꼈다.

그래도 그것은 평화롭게 흘러가는 시간이었다.

타낫세에게 있어서는 유리리에가 찾아오지 않는 것도 정신적으로 도움이 됐다. 그는 벌써 반 년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요아마키스 영지로 돌아가 잠시 그곳에 머물고 있다고 들었다. 거기 있는 인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동요하지만,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날들은 흘러가고, 달의 색은 변해간다.

진심으로 노력하는 덕분인지, 그럴 시기였는지, 바일의 성장 상태는 괄목할 만하다. 분야를 막론하고, 마치 메마른 대지가 물을 머금듯 순식간에 흡수해간다.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은 역시 총애자님이다, 차기 국왕이다 하며 극찬했다.

그런 상황이니 타낫세는 자신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함께 있으면 모두 바일에게만 말을 건다. 무도회에 나와 춤을 추면 똑같이 췄는데도 바일만 잘 췄다며 추어올린다. 세 살 위인 자신이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려 해도, 가슴의 울렁거림은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뭐야, 들러붙는 날파리가 보여서 와 봤는데, 총애자님은 없잖아? 이게 무슨 일이람?”

거기에 더해 자신에게 관계되는 부류는 이런 녀석들뿐이다. 동갑인 이 아이는 제 아비를 닮아 비위에 거슬리는 말만 잘하지, 다른 특기는 전혀 없다.

  미데론·파이프=테리제, 네 헛소리에 어울려줄 시간은 없다. 용건이 없다면 당장 어디든 가 버려라.”

당연히 타낫세의 말에도 가시가 돋친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거다.

  용건도 없이 말을 걸 리가 없지. 그런 것도 몰라? 이쪽이야말로 왕자 전하를 챙겨줄 겨를이 없어. 아버님으로부터 총애자님께 분부를 받은 거니까.”

  또 시시한 잡무를 떠맡기러 왔나. 바일은 어머님의 시찰에 동행 중이다. 시종감에게라도 맡겨둬라.”

그렇게 말하자 미데론은 호들갑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이런이런, 하고 고개를 저었다.

  질투는 추하고 무서운 거로군.”

  네 어디를 질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만.”

  나한테가 아니야. 아직 눈치 못 챘나.”

바보 같은 말투로 얘기하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타낫세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기로 했다.

  멋대로 지껄여라. 난 이만 가봐야겠다.”

그렇게 내뱉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의 말이 쫓아와 귀에 닿았다.

  아무리 사촌 동생이어도, 차기 국왕을 그렇게 부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나, 타낫세 전하? 뭔가 앙금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도 당연하지.”

 

2-7

시시한 트집이다.

미데론의 말을 끊고, 무심코 정문 근처 안뜰에 도착한 타낫세는 눈에 띄지 않게 구석에 앉아 입술을 깨물었다.

단지 예전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뿐이다. 누구한테도 주의를 받은 적 없고, 바일도 갑자기 격식 있는 호칭으로 불리면 이상하게 여길 거다. 이상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단 그렇게 부르는 건 자신만이 아니다. 유리리에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타낫세는 헉, 숨을 삼켰다. 분명 유리리에는 거친 태도를 고수하지만, 그건 자기들끼리만 모여 놀 때의 경우다. 주변에 어른이 있으면 제대로 형식을 갖춰 부르고 있던 것 같았다.

가슴 속의 울렁거림이 올라와 쿵쿵 목을 울렸다.

나는 제대로 처신하지 못했던 건가. 하는 후회와 평소 같은 견제일 뿐이니 흘려들어도 된다는 오기가 맞부딪쳤다. 테리제 후작을 필두로 왕배를 노리는 귀족들은 자신의 얼굴을 보면 반드시 우회적으로 비아냥거렸다. 요약하자면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었다.

너는 왕배에 걸맞지 않다, 빨리 포기해라, 라고. 

포기고 뭐고, 애초부터 그럴 생각은 없다. 놈들이 멋대로 몰아붙이고 눈엣가시라 여기는 거였다. 그렇기에 담아두지 않고 흘려들었던 거지만, 오늘 들은 말은 유독 마음에 걸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시시한 트집이다.

다시금 타낫세는 그 말을 되뇌었다. 찌르는 방법이 달라져 동요했을 뿐이다. 자신이 바일을 부르는 방식에는 어떤 의미도 담겨있지 않다. 그건 확실하다. 그저 여태껏 그래왔기 때문에 계속 그랬던 것이며, 원한다면 언제라도 완벽하게 행동할 것이다. 차기 국왕에 대한 경의를 갖추고, 완벽하게.

비열한 억측을 신경 쓸 이유는 없다. 바일은 아직 어리고, 동생 같은 녀석이고, 질투도 아부도 받을 대상이 아니니까.

그렇게 납득하다 보면 차츰 머리가 식어 초조함도 가라앉았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했다고, 타낫세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서려고 했다.

그 순간 갑자기 안뜰이 소란스러워졌다. 위사나 시종들이 달려가는 낯익은 광경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금방 짐작이 갔다. 자리를 벗어날 틈도 없이 록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시종이 공손히 문을 열자 껑충 뛰쳐나오는 것은 사촌 동생이었다. 뒤이어 그 당당한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구석에 서 있는 자신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시종들이 건네는 수고의 말을 듣고 있다. 그리고 답답한 듯 기지개를 펴는 바일을 불러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역할을 잘 해냈구나. 훌륭했어.”

그 칭찬을 받아 의기양양하게 미소 짓는 바일의 얼굴을 보는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날카로운 통증이 타낫세의 가슴을 찔렀다.

그래, 분명히 3년 전이었다. 지금의 바일과 같은 나이였다. 어머니의 시찰에 따라가고 싶다고 했고, 간단히 기각됐다. 노는 게 아니니까 데려가면 안 된다고. 물론 놀러가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바일은 용납되고, 자신은 용납되지 못한다.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머리로 알고 있지만가슴의 통증은 더욱 심해진다.

알아버렸다.

지금은 아직 미약한 이 욱신거림을, 언젠가 참을 수 없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것을.

그때 자신은 반드시 여기서 도망칠 것이다.

아버지처럼.

 

2-8

한 번 생겨난 불안한 예감은 사그라지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 깊숙이 밀어 넣을 수는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늘을 드리웠던 왕의 동생에 대해 잊으면서, 성은 예전의 평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쁘다. 바쁜 이유를 타낫세는 잘 알았다. 그는 무수히 많은 바일의 후견인 후보를 모두 걷어차고 직접 그 자리를 꿰찼다. , 왕국의 통치뿐만 아니라 란테 영지의 세세한 결재까지 도맡아야 한다.

그 일에 대해 탐욕스럽다는 험담을 듣는 것도 알고 있다. 틀림없이 자식을 왕배로 앉혀 놓고, 퇴위 후에도 조카를 마음대로 조종해 이 나라를 움직일 생각이라고. 분해서 반박하고 싶지만, 당사자가 그런 짓을 하는 건 불씨에 장작을 던져 넣는 격이다. 귀를 막고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타낫세, 놀자.”

전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변함없이 작은 사촌 동생은 그렇게 말하며 목에 달려든다. 이 천진난만한 모습은,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모르는 건가, 몇 번이나 입 밖으로 꺼낼 뻔했지만 참았다. 그런 걸 신경 쓸 나이가 아니다. 당연하다.

그래도 타낫세로서는 신경 쓰이는 문제다. 자신만의 일이라면 모를까, 어머니의 평판에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눈에 띄지 않으려 주의를 기울였다.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다. 방 안에서라면 괜찮지만.”

  그래? 그럼 내 방으로 와. 좋은 거 받았어.”

옆방에 가는 것 정도는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시종들의 입에 오르내리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길을 걷다 비아냥거림을 듣지는 않을 테니까.

바일을 따라 자리를 옮기자 유모가 생긋 웃으며 맞이한다.

  저기, 어제 받은 거 보여주고 싶어.”

  , , 그것 말씀이시죠.”

부탁을 받은 유모가 가져온 건 한 장의 종이였다. 펼치자 선명한 세상이 드러난다.

지도다. 심지어 지리 강의에 사용하는 것보다 세밀하고 정확해 보인다.

  있지, 서재? 라는 곳에 갔을 때 가지고 싶어서 보고 있었더니, 같은 걸 줬어.”

과연. 법무 부서에라도 간 모양이다. 그리고 발견한 이 보물에 매달린 그의 환심을 사려고, 누군가 신경 써서 새것을 준비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세하면 오히려 알아보기 어렵지 않나?”

  그렇지 않아.”

  너라면, 여기저기 정신이 팔려 제대로 머리에 들어가지도 않았겠지.”

  심술궂어. 좋아, 그럼. 문제 내 봐. 맞힐 테니까.

, 뺨을 부풀리며 바일은 책상 위에 턱을 얹는다. 타낫세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 권유에 넘어갔다. 

  그럴까. 그럼, 이 성은 어디에 있지?”

  놀리는 거야? 여기.”

  처음엔 기본부터 짚는 거다. 그럼 란테 저택은 어디에 있어?”

  , 이 근처.”

  정답이야. 서쪽 끝이지. , 다음이다. 란테 영지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인가?”

  , 그게, , 여기 있는 산까지 하고, , 동쪽은.”

지도 위를 짚던 손가락이 빙빙 헤매기 시작했다. 거리나 특정 장소는 기억해도, 범위를 묻는 건 예상 밖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패배를 받아들이기 분한지 이쪽을 흘끔거리며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인다.

  그게, 확실히 이 주변은 복잡해서, 유모, 있잖아, 유모 집은 여기지? 유모?”

그리고 끝내 유모의 도움을 청하려 그녀를 불렀을 때였다. 고개를 든 바일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타낫세 역시 반사적으로 그쪽을 돌아봤다. 입구 근처 의자에 앉아있던 유모의 허리가 무너져 자신의 무릎 위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괴로운 신음이 들려왔다.

  이봐, 누구, 거기 누구 없나!”

고함소리에 밖에서 대기하던 시종들이 황급히 몰려들었다. 그들이 유모를 옮기는 동안 바일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얼어붙은 듯 미동도 없는 자세로 쳐다보기만 했다.

 

2-9

결국, 유모는 잠에 든 채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얼마 전부터, 몸이 많이 좋지 않다고 푸념하고 계셨으니까.”

서둘러 도착한 의사도 보자마자 어두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급여하는 정도밖에 방법이 없다고 한다.

꼬박 이틀 밤이 지나, 간병한 보람도 없이 그녀는 산으로 떠났다.

  마지막까지 성실히 일 해줬다. 극진히 매장해 줄 것을 약속하지.”

리리아노도 직접 찾아와 애도의 말을 했다. 시신은 곧바로 수습돼, 아들 세이테나 백작이 도착하기 전까지 신전에 안치하기로 했다.

그동안 타낫세는 최대한 바일의 곁에 있으려 유의했다. 반쯤 억지로 손을 잡고 그가 나아가는 곳을 따라갔다.

그가 가는 곳은, 신전이다. 바일은 온종일 신전에 눌러앉아 유모의 관을 쳐다보며 지냈다. 뭔가 하는 것도 아니고, 멍하니 웅크린 채다. 타낫세는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그를 달래 의자에 앉게 하고, 해가 지면 어떻게든 방으로 데려가는 역할이었다. 잡아당기거나 말을 걸면 일단 대답은 하지만, 반응이 지나치게 둔해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자연히 타낫세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따금 엿본 옆모습에는 슬픈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유모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이 자리에서, 단지 망연하게 꽃으로 둘러싸인 관에 눈길을 줄 뿐이다. 이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요즘의 타낫세에게 아침을 알리는 것은 시종이 아니라 위장의 통증이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는 땅거미가 그렇게 먼 줄은 처음 알았다. 오늘도 그 시간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니 아침 식사도 잘 안 넘어간다.

하지만, 마침내 해방의 때가 찾아왔다.

그날, 여느 때처럼 바일의 손을 이끌고 신전으로 향한 타낫세는, 붙든 손이 갑자기 굳어지는 것을 느끼고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평상시에는 조용했던 관 주위에 하인들이 몰려들고, 그것을 한 인물이 지시하고 있었다. 그는 이쪽을 발견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바일 전하, 타낫세 전하. 오랫동안 격조했습니다. 어머님께 이토록 성대하게 조의를 표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장년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세이테나 백작이 영지에서 도착한 것이다.

그는 계속 감사 인사를 하는 듯했지만, 타낫세에게는 그 말들을 듣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잡고 있는 손은 여전히 굳어있고, 이제는 서서히 떨리기 시작하는 것이 전해졌으니까. 표정을 살피려 해도 바일이 고개를 숙여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골은 고향으로 돌려보낼 생각입니다. 무슨 일이 있거든 들러

백작의 그 말이 불을 지폈다. 바일이 그 순간 타낫세의 손을 뿌리치고 관에 달려들었던 것이다.

  거짓말쟁이!”

새된 고함소리가 신전의 높은 천장까지 울린다.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총애자를 상대로 손을 써도 좋은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하인들을 헤치고, 바일은 유해를 감싼 천에 매달렸다. 비난의 소리는 내질러질 때마다 눈물에 번져 흔들렸다.

  계속 곁에 있겠다고 말했으면서, 어디에도 안 간다고 했으면서,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뒤늦게 달려온 타낫세와 백작도 얼른 손을 대지 못한 채 떨리는 작은 등만을 바라봤다.

  싫어, 유모 같은 거 싫어, 거짓말쟁이는 싫어!”

그러나 바일의 분풀이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백작은 결심한 듯 등 뒤에서 말을 걸었다.

  외람되지만, 바일 전하,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그치만 거짓말쟁이잖아, 거짓말쟁이야. 사라져버렸는걸. 그러니까 싫어!”

예상대로 돌아오는 것은 날카로운 반발이었다. 그래도 백작은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면 어머니가 너무 불쌍하잖습니까. 슬슬 소임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차였는데, 이 성에 남았으니까요.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일 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를 위해.”

  , 어머니는 고향을 무척 그리워하고 계셨어요.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바일 님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부디 알아주십시오.”

간곡히 타이르자 바일의 기세는 금세 꺾였다. 유해를 감싼 천에서 맥없이 손이 떨어졌다.

  유모데려갈 거야?”

  적어도 안식처만은 고향으로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어머니의 소망이었어요.”

  돌아가고 싶어 했어?”

  바일 님이 없었더라면, 분명히.”

  알겠어.”

툭 중얼거린 바일이 관으로부터 물러났다.

  고마워, 유모.”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출구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회화를 지켜보던 타낫세는 황급히 따라붙어 다시 뛰쳐나가지 않도록 손을 잡았다.

바일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옆모습에서 어떤 감정을 읽어낼 수도 없었다. 그저 손끝의 차가움만이 타낫세의 마음에 남았다.

 

2-10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한 해도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호수에 둘러싸인 작은 모형 정원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자신의 눈은 최근 반 년 사이에 많이 변한 것 같다고 타낫세는 생각했다.

어릴 때 이곳은 세상의 전부였다. 호수 바깥에 펼쳐진 땅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으로, 거기 사는 사람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출렁이는 수면은 바다가 아니다. 성 밖으로 출항한 사람들은 무사히 돌아와 각종 전리품과 여행담을 가져오니까. 그렇게 알았다. 호수와 맞닿은 이곳은 결코 세상의 끝이 아니었음을.

사람들은 찾아오고, 지내고, 떠난다. 그들은 여기서 태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이곳에 묻히지도 않는다.

오직 왕만이 여기에 남는다.

느닷없이 날갯소리가 울려, 타낫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풀려난 전서구들은 날갯짓하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만약 저 눈동자를 빌린다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조금이나마, 이르아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이 세계에 대해, 비슷한 기분이 돼 버렸을지도 모른다. 세계의 모습을 보려면 거기서 나오는 수밖에는 없으니까.

호숫가를 떠나 성으로 돌아온다. 오후 일정은 비어있으니 바일을 만날 예정이었다.

그 신전에서 폭발한 후, 바일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왕으로서의 수행에 열심이었다. 이제는 시종도 교육을 전담하는 유모도 필요 없다. 그의 어린 시절은 끝나가고 있다.

약간의 쓸쓸함이 가슴을 스쳐, 그것을 털어내듯 타낫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 기세를 몰아 바일의 방 초인종을 누르려던 그는 안에서 나온 인물과 부딪칠 뻔했다.

  , , 전하, 죄송합니다!”

방에서 나온 것은 문관으로, 눈을 번뜩이며 사과하더니, 송구한 모습으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소란을 들은 시종감이 이 모습을 보고 문을 열어 들여보내줬다.

  어서 오십시오, 타낫세 전하. 바일 님께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맞이하는 그의 손에는 어째선지 편지(鳥文)가 들려있다. 눈짓으로 묻자 그는 왠지 주저하며 미소를 지었다.

  , 안으로 들어오세요. 더 이상 기다리게 했다간, 찾으러 뛰쳐나가셨을 거예요.”

재촉을 받아 들어간 거실에는, 벌써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 위로 손가락을 짚던 바일은 문이 열리는 낌새에 얼굴을 들고 볼을 부풀렸다.

  늦었어. 벌써 해가 지잖아.”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오후라고 약속했지만, 자세히 정한 것도 아니었어.”

  그런 건 궤변이야.”

바일의 말투도 차츰 나아지는 것 같다. 요즘은 말싸움에 질 때도 있어 조금 분하다.

  죄송하지만, 잠시 괜찮으십니까? 바일 님 앞으로 편지가 왔습니다.”

쓸모없는 언쟁으로 번지기 전에 시종감이 끼어들었으므로, 타낫세는 얼른 그에게 차례를 넘겼다.

  누구야? 암부 편지라면 필요 없어.”

  안부.”

  그렇게 말했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아뇨, 그게, 미라네로부터 연락이.”

그 이름이 나오자 실내의 공기가 삐걱이는 듯한 느낌을 받아 타낫세는 몸이 굳었다. 시종감은 눈치 못 챘는지, 작게 헛기침하며 계속한다.

  무사히 출산을 마쳐 모자가 전부 건강하다는군요. 다행이네요.”

시종감은 활짝 웃었다. 그의 표정에 걸맞는 밝은 소식이다. 다만 타낫세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던 이유는, 정작 바일이 무표정으로 시종감을 돌아봤기 때문이었다.

조마조마해 하면서도 말을 건네지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으니, 바일은 확인하듯 조용히 묻는다.

  그런가. 성에서 나가서미라네는, 행복하구나.”

  , 이것도 바일 님의 관대한 마음 덕분이라고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 다행이다.”

대답을 들은 바일의 입술에 그제야 피식 웃음이 떠올랐다. 그 미소에 안도하는 게 보여, 타낫세는 좀 전의 긴장은 자신의 지나친 생각이었나 싶어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바일은 약하지 않다. 자신과는 다르니까.

지난 반년 사이 너무 많은 것이 변했고, 그것은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격변 속에서도 바일은 꺾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게 바로 표식이라는 것의 특징이다.

저 따위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표식을 가지지 않은 저 따위가.

그리고 자신은 생각으로부터 도망쳤다.

지금 돌이켜보면 두려웠던 거다.

울어봤자 어머니는 두고 간다.

매달려봤자 아버지는 바다로 간다.

받아들여봤자 시종은 머무르지 않는다.

약속해봤자 신이 정한 유모의 시간을 바꿀 수 없다.

나는 두려웠다.

다섯 번째가 되는 그때가.

그와 동시에 언젠가 그 유혹을 이길 수 없게 될 때가 오리라는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그 예상은 곧 빗나간다.

다섯 번째가 모습을 드러내, 자신은 물론 바일까지도 이 성에서 데리고 나갔으니까.

 

아네키우스력 7396년 적의 달, 그 사건이 일어났다.

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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