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등장인물은 주로 란테 조. 주역은 타낫세. 5화 완결."
*게임 본편과 연결되는 스포일러 有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4-1에서 나오는 '칩거용 오두막'의 원문은 籠り小屋로 여기서도 언급. 이런 느낌.
4-1
바다에 가기로 약속했다.
그 약속을 다하지 못한 채, 우리들은 다시 성에 갇혔다. 벽은 이전보다 높고 견고해졌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타낫세에게는 아직도 실감나지 않았다.
“있지, 있지, 저거 뭐야? 저거저거.”
침착성 없이 창문 너머로 밖을 쳐다보며 일일이 자신에게 묻는 바일을 향해, 타낫세는 불편한 심기를 안고 대답했다.
“저건 칩거용 오두막이다. 이제 곧 새해니까 준비하는 중이겠지.”
“헤―, 나도 저게 좋겠어. 성에서도 만들지 않을까나.”
“우리는 방에 틀어박히면 된다. 무의미하다.”
“쩨쩨해.”
흥, 하고 뾰로통해지며 도로 자리에 앉는 바일의 옆모습을 타낫세는 슬쩍 쳐다봤다. 이마에 감긴 천은 표식을 감추기 위함이 아니라 상처를 눌러두기 위함이다. 한 달 남짓으로는 다 낫지 않지만, 그래도 전처럼 고름이 나올 정도는 아닌 데다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약간 수척한 기색은 있어도 안색이 나쁘지 않고, 바일은 사건 전의 상태를 되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바다로 가는 록차 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다… 란테 영지에 도착하는 것은 마지막이다. 국왕의 순행 여정은 디톤을 시작으로 리탄트의 요지를 돌아 란테 영지에서 끝날 예정이었다. 지금은 왕성에서 출발해 남하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공식적인 첫 장거리 여행. 그런 일이 벌어진 뒤라 맹렬한 반대가 쏟아졌을 텐데도, 리리아노는 동행을 밀어붙였다. 오히려 그런 일이 생긴 뒤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타낫세는 생각했다. 갑자기 자욱해진 먹구름을 걷어내고, 울적해진 바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바일과 함께 가지 않겠냐고 물어왔을 때, 타낫세의 마음속에 오간 것은 당혹감과 두려움이었다. 그 뒤로 바일과 얼굴을 마주하는 일도 없었고, 수군대는 악평도 가라앉지 않았다. 분명히 바일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일이 방에 찾아왔을 때 그의 태도에 맥이 풀렸던 것이다.
“타낫세도 갈 거잖아. 준비 안 해도 돼―?”
방문을 거절할 짬도 주지 않은 채, 바일은 서슴없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입을 열자마자 그렇게 몰아붙였다.
“아니…, 나는, 아직….”
“타낫세는, 그게 필요하다느니 이게 아니면 싫다느니 시끄럽잖아. 모른다, 아슬아슬 서두르게 돼도.”
마치 그 사건이 없던 일인 양 구는 데, 타낫세는 기분이 몹시 이상해졌다. 저 이마에는 약 냄새 나는 천이 감겨 있는데.
“됐―지? 방해 안 할게. 알아서 준비해. 그럼, 나도 바쁘니까.”
멋대로 지껄이고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바일은 방에서 나가버렸다. 완전히 같이 갈 거라고 단정 지은 것 같았다.
결국, 타낫세는 그렇게 밀어붙여진 형태가 됐다. 일단은, 어머니도 바일도 없는 성에 혼자 남는 것도 질색이었으니까. 게다가, 성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바일과 느긋하게 보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긴 했다.
그리하여 타낫세는 여행길에 올랐고, 같은 록차에 바일도 타고 있었다. 긴 여행에 완전히 흥분해 연일 떠드는 바일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방황은 나쁜 꿈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자신이 실수했고, 바일이 상처 입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하고 타낫세는 생각했다. 얼른 만나러, 문병하러 얼굴을 들이밀어도 좋았을지 모른다고. 그랬으면 진작 이렇게 원래대로 말할 수 있었을 텐데.
그건 별 수 없는 재난이었던 거다. 바일이 살아서 제대로 잘 지낼 수 있으니 그걸로 됐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여정 속에서, 타낫세는 간신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4-2
디톤은 특별한 도시다.
당연히 왕의 통치 아래 있을 텐데, 누구라도 진정한 맹주는 따로 있다는 걸 안다.
성산에 붙듯이 세워져, 거리를 굽어보는 고색창연한 신의 아성.
고대 신전은 일찍이 손에 쥔 자치권을 지켜내, 지금도 리탄트에 반쯤 독립국처럼 자리를 잡았다. 무엇보다도 성가신 점은 그럼에도 왕을 향해 고분고분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 점이다. 아네키우스를 섬기는 자들을 매몰차게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리탄트 안의 거리와 마을마다 구석구석 세워진 신전은,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벽지의 마을에 이르면, 왕 따위보다 훨씬 강력하게 사람들의 생활에 파고든 채였다.
이런 기본적인 지식을 당연히 배워두고는 있었지만, 타낫세로선 실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왕성 귀퉁이를 차지하고는 있어도, 신전의 태도는 조용한 세입자 이상의 존재감이 없기 때문이었다. 성 아래의 신전도 장엄한 모습이지만, 호수 위에 떠있는 왕성 앞에서는 아무래도 눈에 띄지 않았다.
종국에는 신의 대리자인 왕에게 무릎 꿇는 신하겠지,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을 찌르는 성산을 마주한 지금, 아직도 멀리 떨어진 여기서조차 건물의 그림자가 보인다는 걸 알자, 타낫세는 연거푸 설명을 들은 신전의 두려움에 대해 갈피를 잡은 것만 같았다. 그것은 왕성보다 넓고, 높고, 오래된 것이었다.
“있지, 있지, 저기까지 올라갈 수 있어?”
압도당하고 있는 타낫세에게, 옆에서 똑같이 바라보던 바일은 태평하게 물어봤다. 뻗은 손가락은 건물의 맨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 무리일 거다. 고대 신전은 위계에 따라 출입할 수 있는 장소가 정해진다고 알고 있어. 분명 저기는 대신관장밖에 못 들어갈 게 틀림없어.”
“그런가, 재미없다. 분명히 굉장한 경치일 거야, 저기. 어쩌면 성까지 보일지도.”
아직 똑바로 배워두지 못한 걸지도 모르지만, 장차 왕이 되어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이래도 괜찮을까, 타낫세는 조금 걱정이 된다. 아직 도착까지는 이틀에서 사흘 정도 걸릴 터였다. 모처럼의 기회니까 지금 빨리 가르쳐두는 편이 좋겠다.
그러나 시작하려던 타낫세의 설교는 바일이 내지른 목소리에 곧장 가로막혔다.
“앗, 저기, 무슨 소리 안 들려?”
말하면서, 그는 허리를 곧추세운 채 귀를 기울이고 있다. 타낫세도 덩달아 따라해 봤지만, 특별히 이상한 소리를 포착해낼 수는 없었다.
“…바람소리 아닌가.”
“그래, 그런가봐. 그럴지도. 왠지 저쪽에서 들린 것 같았는데.”
다시 남쪽을 가리키는 바일은, 어쩌면 불온한 기운을 느껴 일부러 그렇게 굴었는지도 몰랐다. 그 증거로, 다음에 그가 취한 행동은 마음을 다잡고 신전에 대한 강의를 늘어놓으려던 타낫세를 내버려두고, 재빨리 록차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슬슬 출발―? 빨리 가자.”
뒤를 돌아보니 확실히 마부들이 록차에 다시 앉아있었다. 짧은 휴식시간도 끝난 것 같았다.
남겨진 타낫세는 당연히 울컥하면서, 새로이 결심했다.
어차피 같은 록차를 타니까, 이동 중에 바일의 머리에 신전이란 무엇인지를 단단히 박아두자.
그 결과, 다음날 바일의 모습이 차에 없어서, 타낫세는 그가 리리아노의 차로 도망갔다는 것을 알게 됐다.
4-3
여정은 순조롭게 진행돼, 마침내 록차는 디톤의 거리로 들어섰다. 즐비한 록차 무리와 거기 그려진 왕의 문장을 멈춰 선 도로변의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게 배웅했다. 이번에는 특별히 조심스러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관식 뒤처럼 당당한 피로연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귀한 손님일지라도, 내막은 단순한 시찰과 권위 표명이다. 차대 국왕인 계승자가 동행하고 있는 것도 숨겼다. 이마가 지금 같은 상태인 이상,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
전의 일은 아무래도 은밀히 덮인 것 같다는 걸 타낫세가 알아차린 건, 시종들의 태도에서였다. 당연히 사람들의 입을 막아둘 수는 없지만, 귀족들 중에서도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 늘어난 것 같고, 의도해서 정보를 통제하는 분위기는 간파할 수 있었다.
혼자서 타는 록차는 따분하다. 스쳐지나가는 오래된 거리를 커튼 틈으로 들여다보며, 타낫세는 새삼 의아해했다.
그 와중에 일부러 바일을 데리고 나온 건 어째서일까. 심지어 자기까지 데리고. 어머니의 순행은 원래부터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그 사람이 과연 바일의 기분전환이라는 이유만으로 움직일까?
품은 의구심에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록차가 디톤의 거리를 가로질러 목적지에 다다랐다. 재촉을 받아 차에서 내린 타낫세는, 그곳이 시내에서도 성산에서도 멀리, 디톤의 끝자락에 위치한 곳임을 알았다. 왕의 침소로 제공된 저택 치고는, 퍽 적적한 곳이었다.
그 의문이 얼굴에 나타난 모양이었다. 마찬가지로 내린 어머니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장난스런 미소를 입에 걸었다.
“왜 그러나. 두 사람 다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군.”
그 말을 듣고, 그녀 옆에 선 바일 역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뭔가에 정신이 팔렸는지, 왠지 건성인 느낌이다.
“아뇨…, 틀림없이 고대 신전부터 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거긴 꽤 귀찮은 곳이야. 왕이라고 해도, 아니, 왕이라서 선뜻 들어갈 수 없다.”
별안간 돌아선 리리아노를 따라 타낫세도 성산 쪽으로 눈을 돌렸다. 멀다고 해봤자 산기슭에 도착할 때까지의 시간일 뿐, 여기까지 다가서면 그 위용에 짓눌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초대를 받는 데도 대략 하루 정도 두고 봐야 하니, 디톤에 들어온 첫날은 여기 머무르기로 결정했네.”
그녀의 말에 어쩐지 타낫세는 상황을 깨닫고 있었다. 왕에게 허리를 굽히며 쌍수 들고 맞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는 신전은 입산 허가를 내세우고, 반면 일단은 신하인 신전에 숙이는 형태가 되지 않으려는 왕은 곧장 신전으로 향하지 않는다. 양측의 의도가 맞물려 이 유예기간이 생겨난 것이다. 자치권이 있는 신전에 고압적으로 나왔다간, 자칫 제2의 분열전쟁이 일어날 터였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는 아무래도….”
근방의 사정을 알았다고 해도, 타낫세가 마음에 담아둔 건 이 건물의 상태였다. 장식 같은 것은 아무래도 공들여 묵직한 게 격이 낮은 곳은 아닌 듯하나, 신전에 더 적합한 장소가 있을 텐데. 마치 왕을 변두리에 치워두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말끝을 흐리는 타낫세더러 리리아노는 기죽지 않고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 아냐. 착각하지 말게. 여기는 신전과 관계없어. 내가 고른 장소다.”
“그렇습니까?”
“그래. 여기는 세리크 후작의 별장이지. 늘 본채로 가달라고 하지만, 여기가 좋다고 억지를 부려 폐를 끼치고 있다.”
“어째서 굳이?”
확실히 거리의 소란으로부터 떨어진 이곳은 경비하기에 적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리아노의 모습으로 보건대 그런 데 주의를 기울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자네가 눈으로 보는 게 빠르겠지. 두 사람 다, 따라오게나.”
질문에 답하진 않고, 리리아노는 얼른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둥지둥 따라가려던 타낫세는 불려나온 또 한 사람이 오도카니 서 있는 걸 알아보고 옆으로 다가갔다.
“왜 그래, 가자.”
그 손을 잡으려던 타낫세는, 바일의 손끝의 차가움에 그만 숨을 삼켰다. 그에 반응한 바일이 다시 정신을 차리는 게 보였다.
“에…, 어, 뭐야?
“아니, 어머니가….”
뒤에서 일어난 일을 눈치 채지 못한 리리아노의 등은 건물 안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 광경과 타낫세의 태도로 바일은 금세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아, 알았어. 갈게. 가야지?”
상황은 뒤집혀서, 당황한 타낫세를 쭉쭉 끌고 걸어간다. 여기로 오는 록차 안에서 어머니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타낫세는 마음에 걸렸지만, 더 이상 알아볼 시간도 없어 일단 뒤따라가기로 했다.
건물에 들어가서, 계단을 올라, 복도를 걷는다. 그리고 문을 통과한 그곳에는, 바다가 있었다.
4-4
정면으로 들이치는 거센 바람에 밀려, 파도가 일었다. 그에 맞춰 쏴아, 쏴아, 하고 새겨지는 일정한 박자가 저 멀리서 다가와 귓가에 튀었다.
발코니 아래쪽에서 넘실대는 수면은 햇빛에 반질반질 빛나, 마치 생물 같은 기색을 발한다.
이야기로 듣거나 그림으로 본 적밖에 없었지만, 바로 알았다.
호수와는 전혀 다른 존재감. 이건, 바다다.
한편으로는 머리 한 구석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알고 있다. 여기 바다가 있을 리 없다. 여기는 디톤, 바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이니까.
그럼, 이건.
“이것이, 마의 초원이다.”
낭랑하게 울리는 리리아노의 목소리가 타낫세에게 답을 주었다.
“이 별장은 디톤의 영주가 마의 영역을 감시하기 위해 유지하는 보루 같은 곳이다. 습격 보고를 받은 적은 리탄트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없지만. 그래도 이곳은 있어야 한다.”
재차 내려다보면, 확실히 그 ‘바다’를 이루는 것은 전체가 이어진 물이 아니라, 한 올 한 올이 하늘로 솟아오른 풀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여행 중 보았던 어느 초원과도 다르게 기이하다. 마치 사람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품은 양 높고, 예리한 기색을 띄고 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버려졌다고 하는, 오래된 토지로부터.
순간 풀숲이 노랫소리를 내지른다. 일렁이며 몸을 맞대 일정한 박자로 하늘을 메운다.
여기가 끝이다, 타낫세는 실감한다. 여기서부턴 리탄트라는 나라를 벗어난 미지의 장소, 사람이 발 디딜 틈 없는 땅이라고.
그 앞으로 눈길을 주자 어렴풋이 숲과 산의 형체가 눈에 띄었다. 까마득한 옛날에 망했다는 마술사의 나라. 신이 봉해버린 그곳에는 지금도 마가 배회한다고 한다.
굳은 몸을 움직이게 한 것은 발치에서 기어오른 소름이었다. 주체할 수 없이 떨던 타낫세는, 느닷없이 허리를 붙잡혀 펄쩍 뛸 것만 같았다. 상대를 뿌리칠 필요가 없었던 건, 매달린 몸이 자신보다 작다는 걸 알아서였다.
꽉 붙들린 덕분에 바일의 몸도 가늘게 떨린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다. 푹 숙여진 고개는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소리를 내지 않는 것에서 그 두려움이 전해져왔다.
타낫세는 아주 조금 자신의 두려움을 잊고 리리아노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시선을 받자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여기 오래 있는 건 좋지 않아. 한 번 봐두는 걸로 충분하지.”
그렇게 건물로 돌아가라고 떠민다. 타낫세도 이의는 없어 바일의 등을 밀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바일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왜 그래.”
아까의 일도 있어 걱정된 타낫세는 얼굴을 들여다보려 했다. 그 찰나에, 바일은 갑자기 발코니의 난간에 매달렸다.
깜짝 놀라 달려갔더니 색이 거의 없어진 얼굴로, 그는 초원의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거.”
곧 그의 손가락이 그것을 가리켰다. 경계보다 가까운 장소에서 흔들리는 풀 사이로 하얀 것이 어른거렸다.
“저거, 뭐야.”
물어보는 목소리는 딱딱하고 갈라졌다. 덩달아 바라본 타낫세는 멀어 분명치 않은데도, 그것이 평평한 받침대 같은 돌이라고 생각했다. 풀 속에 파묻히듯 놓인 그 모습은 특별할 것도 없이 나뒹구는 돌에 지나지 않는데, 어쩐지 타낫세도 속이 메스꺼웠다.
아마 바일이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탓일 것이다. 뭐가 마음에 걸리는지는 본인도 확실치 않은 듯, 그 눈동자는 불안함에 흔들리고 있었다.
“흠. 나한테는 절로 저런 모양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가, 바일.”
달래듯 묻는 리리아노에게도 바일은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몰라…, 모르겠어. 모르겠어.”
눈동자에 차츰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자, 리리아노는 그를 여기서 떼어놓기로 한 모양이었다. 근처의 위사에게 명령해 바일을 안아들게 했다. 전혀 저항하지 않고 건물 안으로 끌려간 바일은, 풀의 바다가 보이지 않는 거실에 닿자, 조금 침착해진 듯했다. 그래도 식욕은 없는지 나온 과자에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았다.
“안심해라. 오늘밤은 여기에 머물지만 저게 보이는 곳은 아니니까. 저 발코니에서밖에 초원을 볼 수 없는 구조로 돼 있다. 아무리 나라도 밤새 마의 소굴과 대치하며 지낼 배짱은 없으니 말이야.”
농담에도 반응이 희미한 조카를 걱정스러운 듯 주시하던 리리아노는, 오히려 조금 전의 일에 대해선 별로 언급하지 않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평상시의 어조로 되돌아가 새 제안을 꺼내왔다.
“자, 우리는 여기서 손님을 맞이해야 하니 자네들은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 오게. 문장 없는 록차를 준비해뒀다. 디톤을 안내받는 게 좋겠군. 수도와는 달리 꽤 운치 있다네.”
4-5
번화가에 도착할 무렵엔 바일의 안색도 꽤나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래도 평상시에 비하면 눈동자에 호기심의 빛이 부족해 함께 있는 타낫세는 애가 탔다.
“봐라, 유명한 사탕세공 가게라고 한다. 저 꽃 모양은 어떤가, 아니면 저쪽의 새가 좋은가?”
“역시 이곳의 도자기는 본고장이라 공들여져 있군. 저 색은 어떻게 내는지….”
“저걸 봐라. 저 광장의 대좌 위에서 르란트가 당시의 대신관장을 맞이했다고 한다.”
걱정돼 자꾸만 말을 걸어도 바일의 입은 무거웠다. 차라리 아까 일에 대해 물어봐도 모른다고 고개를 저을 뿐이다. 이래서야 별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물러나, 안내인이 이끄는 대로 오래된 도시를 따라 걸었다. 여전히 차가운 손끝이 신경 쓰였지만, 타낫세로서도 처음 온 장소이자 첫 나들이였다. 신기한 물건들에 마음이 쏠리기 십상이었다.
“여기가 그 시에서 표현하던 곳인가!”
특히 얼마 전 읽고 감명 받았던 걸작의 무대를 소개받았을 때는, 옆에서 알아볼 만큼 흥분해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런 그가 건물 안에 사촌 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안내인은 금세 당황해 캐묻는 그를 달래야 했다.
“괜찮아요, 호위도 함께 있고, 바로 근처니까요.”
그 말마따나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바로 앞의 광장에서 모습을 찾아 타낫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시장이 열린 걸 구경하던 중이었는지 과일이 쌓인 천막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기 너, 나갈 거라면 나간다고 한 마디라도…!”
눈이 마주치자마자 설교하려던 타낫세의 입은 억지로 막혔다. 바일이 손에 쥔 뭔가를 억지로 쑤셔 넣었다고 인지한 순간, 생각하기도 싫은 과거의 사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 타낫세의 등줄기를 얼렸다. 그렇지만 혀에 닿는 감촉은 매끈하고,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는 평정을 유지했다.
다시 이로 확인해 보자, 부드럽게 파고들며 물기가 넘친다. 음식 같다고 생각한 순간 목구멍 깊숙이 신 맛이 퍼졌다.
“뭐, 뭐야 이건!”
미각의 기습에 내뱉은 그것은 돌바닥에 떨어지며 붉게 으깨졌다.
“아, 역시 시구나.”
주눅 들지 않은 바일의 손에는 같은 과일이 쥐어져 있었다. 반으로 가른 과육을 한 입 베어 문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이네, 시다.”
“너는 갑자기 무슨… 아니, 그것보다 마음대로 움직이면 안 되지.”
“말했어. 밖에 보고 온다고. 타낫세가 못 들은 거지, 내가 멋대로 움직인 게 아니라.”
“어….”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더 말하지 않았어.”
말하면서 바일은 다시 한 번 과육을 뜯어먹고 얼굴을 찌푸린다. 그게 리네크 복숭아라는 걸 타낫세는 그제야 알아챘다. 물론 먹을 수 없는 물건을 노점 주인이 권했을 리는 없고, 지금도 이쪽을 살펴보고 있다. 바일이 일부러 고른 것이다.
“다 봤지. 다른 데 가자.”
관광을 시작했을 무렵의 저조함은 어디 있는지, 개운한 얼굴로 바일은 그렇게 재촉해온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기운이 난 것이다. 그건 기쁜 일일 터였다.
하지만 타낫세는 견디기 힘든 기분으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4-6
뭔가 엇갈리고 있다.
침대에 웅크려 앉은 타낫세는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그것은 이 여정에 나선 뒤, 여러 번 느꼈지만 모르는 척했던 것과의 대면이었다.
어째서 그 일 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구는지 알 수가 없다.
펼쳐진 초원은 불길했지만, 그렇게까지 두려워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낮의 관광 중 보여준 태도에 담긴 의미 역시 모르겠다.
확실히 바일은 분별력 있는 아이라고 할 수 없었다. 멋대로 주위 사람을 휘두르는 일도 잦았다. 그렇지만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타낫세는 언제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쭉. 지금까지는.
겨우 기운을 차린 듯싶은 바일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다시 가라앉은 얼굴이 돼 말수도 줄어들었다. 여행의 피로 탓도 있을 거라며,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하던 아이들은 침실로 보내졌다.
타낫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몸을 뒤척이며 시트 안에서 옆 침대를 들여다봤다. 경비 문제로 두 사람은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나란한 침대에 누운 뒤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로 바일은 잠에 든 것 같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타낫세는 추억에 잠겼다. 시종의 눈을 피해 발코니를 넘어온 바일이 멋대로 침대에 기어드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유는 다양했지만, 돌려보낼 수도 없어 시시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시종들도 곧 알고서, 침대가 평소보다 불룩해도 일부러 확인하지 않고 내버려두게 됐다.
그런 일도 이제는 일 년 가까이 생기지 않았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으니 서로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여기고 싶었다.
그러나, 막연한 확신이 타낫세를 찔러댔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무언가 결정적으로 끝나버린 거라고.
그때 바일의 침대에서 묘한 소리가 흘러나온 것 같았다. 어물어물, 숨을 삼키는 듯싶은 소리가.
“…바일?”
코골이나 잠꼬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혹시 아직 깨 있는지 타낫세는 숨을 죽이고 살펴봤다. 대답하듯 다시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낯익은 울림이었다.
“너, 설마 울고….”
타낫세가 당황해 몸을 일으킨 순간, 그보다 더 빠르고 격렬하게, 바일의 침대 시트가 튀어 올랐다. 무심코 기세가 눌린 타낫세의 시야 구석을, 검은 그림자가 달려갔다. 이윽고 문간에서 벌어진 소동이 그게 누군지 말해주었다.
“바일 님, 어쩌시려고…”
“앗, 어, 어디로… 잠깐만!”
보초를 서던 위사들은 밖에서 침입하는 건 경계하고 있어도, 안에서 뛰쳐나오는 것까진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갑자기 문을 열고 나타난 최중요인물에 당황하는 틈을 타 작고 날렵한 몸이 그들의 발치를 빠져나갔다. 대기하던 시종들이 쫓아갈 틈조차 없는 날랜 솜씨였다.
그러니 기막혀하던 위사들이 사태를 파악한 직후 옆구리를 빠져나가려는 그림자를 반사적으로 잡아버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잡힌 쪽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없어서, 초조함을 드러내며 그들을 윽박질렀다.
“뭘 하는 거야! 잡아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녀석이다!”
질타에 기가 눌려 팔을 뗀 위사를 언뜻 보고, 타낫세는 눈을 좌우로 굴렸다. 복도에는 바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어머니의 방이나 건물 입구라면 그곳을 지키는 위사가 붙잡을 거다. 빈 방 같은 데 얌전히 들어가 있다면 문제되지 않는다. 염려되는 건….
달려가는 타낫세를 쫓아왔는지 위사들도 따라왔다. 그들을 거느리고 계단을 올라가 복도 모퉁이를 돌자 문이 열린 게 보였다.
“바일!”
이름을 부르며 뛰어 들어간 타낫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달빛에 드러난 사촌 동생의 등이었다.
4-7
흑의 달이라고는 해도, 하늘에 걸린 신의 잠든 모습은 주위를 희미하게 비출 정도로는 밝았다. 어슴푸레한 그 아래서, 바일은 기지개를 켜며 테라스의 난간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 뒤로 풀밭이 있다. 아직도 그치지 않는 바람에 이끌려 노랫소리를 내지른다.
순간 그 안에 여자의 목소리가 섞인 듯해 타낫세는 몸을 움츠렸다. 그런 건 잘못 들었을 게 뻔한데.
걸음을 멈춘 타낫세 앞에서, 바일의 등이 숙여지며 올라간다. 그가 테라스에 기어오르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건 힘에 겨워 미끄러졌을 때였다.
“바, 바보냐 너는!”
충동적으로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튕겨나간 타낫세는 그 등에 달려들었다. 그대로 자빠트리려고 하지만, 바일이 허우적대며 손발을 휘저었다.
“시…, 싫어, 싫…!”
“이봐, 나다, 그만해, 어이!”
“죄송합…, 갈게, 죄소…, 죄송…, 갈게…, 용서…!”
떨어지기 전에 따라온 위사도 가세해 바일을 붙잡았다. 흐느껴 울며 뜻 모를 헛소리를 외치는 모습을 타낫세는 멍하니 바라봤다. 간절한 호소로부터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사과하는 말.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도 가냘프게 사그라진다. 저항하는 힘도 줄어든 바일의 몸이 바닥에 털썩 누웠다. 거친 숨소리만이 귀를 맴돌았다. 붉게 상기된 뺨에 손을 대 보니 이상하게 뜨거웠다.
“무슨 일인가?”
바로 그때, 문 너머로 잠옷 차림의 리리아노가 나타났다. 보고를 받고 급히 일어났는지, 묶이지 않은 머리칼이 흐트러진 채 어깨에 늘어져 있었다.
“바일이… 갑자기, 이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타낫세는 보면 알 수 있는 것을 말해버렸다. 리리아노는 더 묻지 않고, 조카의 옆에 몸을 숙이고, 그 목덜미와 뺨에 손을 댔다.
“폐하, 제가 부디.”
그리고 앞으로 나선 의사가 교대해 상태를 자세히 살피는 모습에, 그녀는 매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역시 그쪽에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시 진찰한 의사는 리리아노를 보며 진언한다. 그러자 리리아노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미 사절은 보냈다. 긴급 사태니 거절당하진 않을 거야.”
순식간에 진행된 사태가 당황스러운 타낫세였지만, 흐름은 그를 봐주지 않았다.
“고대 신전으로 데려가주게. 지금의 바일은 거기서 치료가 필요할 거야.”
시종들에게 그리 지시한 리리아노가 이어서 남겨진 아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타낫세. 자네도 곁을 지키도록 해라. 해를 입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바일이 깨어났을 때 모르는 얼굴만 있으면 서운할 거다.”
“어머니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앞서 말했듯, 왕이 일방적으로 고대 신전에 들이닥칠 수는 없는 노릇이야. 이런 상황이니 억지를 부릴 수는 있겠지만…, 모든 이가 이 일을 미담으로 받아들여준다고는 할 수 없어. 날이 밝으면 허가가 내려올 거다. 당장 달려가지. 그때까지 이 녀석을 부탁하마.”
그 요청을 거절할 리도 없고, 어머니에게 부탁받았다는 자부심과, 자리에 누워있을 바일에 대한 걱정과, 앞으로 가게 될 고대 신전이라는 장소에 대한 불안감을 떠안은 채, 타낫세는 록차에 몸을 실었다.
밤하늘을 가를 듯이 솟은 성산은 서서히 커져, 기슭에 당도한 지금은 거의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신전 입구엔 등불이 걸려, 록차는 헤매지 않고 그리로 다가간다.
이윽고 훨씬 밝아져 어두운 틈에서 드러난 문과 야간 담당의 신전위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재빨리 록차로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해보였다.
“말씀은 들었습니다. 바일 계승자 전하와 타낫세 왕자 전하. 고대 신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처음으로 고대 신전의 문을 통과했다.
4-8
꽤 오래 걸은 듯했다.
안쪽 깊숙이 안내받아 복잡하게 뒤얽힌 통로를 따라가다 보니, 타낫세는 도무지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따라온 시종들도 이미 곁에 없다. 한 개 전의 관문 앞에서 붙잡혀버렸다. 위사들은 첫 번째 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
신관들 말로는, 이곳은 신관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치료 대상인 바일은 물론이고 타낫세를 들여보내는 것은 특례이며, 그 이상의 양보는 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물론 이의를 제기했지만 신전을 신용하지 않으실 셈이냐고 응수하는 덴 더 이상 의견을 펼칠 수 없어, 타낫세만이 바일을 돌봐줄 역할로 남았다.
장식은 적어도, 깔끔하게 잘 꾸며진 방이었다. 태우고 있는 향의 은은한 냄새에 섞여 이따금 코를 찌르는 이상한 냄새는 약재인 걸까.
아까부터 신관들이 찾아와 기구 따위를 놓고 가기도 하고, 바일의 땀에 젖은 잠옷을 갈아입혀주기도 했다. 조금 진정된 느낌은 들지만 아직 체온이 내려갈 기미도 없고, 바일은 침대 위에서 더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의사는 아직인가.”
물어보는 타낫세에게 시중을 들던 신관이 염려스러운 듯 대답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전하. 제법 멀기 때문에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립니다.”
“하지만 이러는 동안에도 바일의 몸은….”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어요. 이곳은 신의 영역입니다. 마의 유혹이 뻗쳐오는 일은 없으니, 더 심해지진 않을 겁니다.”
딱 잘라 단언하는 신관을 향해 타낫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자신감과 동시에, 그 말의 내용이 궁금했다.
“마…?”
의아해하는 모습에 신관 역시 깨달은 바가 있는 모습이다. 타낫세가 물어보기도 전에 말을 꺼냈다.
“못 들으셨나보군요. 이것은 마에 홀린 이들이 보이는 증상이에요. 꽤 격렬하지만… 역시 이마에 표식이 주어진 분이기 때문일까요.”
그는 새 향에 불을 지피며 말을 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희귀한 병도 아닙니다. 특히 감수성이 여린, 달리 말하자면 불안정한 아이가 잘 걸려들어요. 초원에 불렸다, 가야 한다, 그러면서 비틀비틀 가버리고 마는 겁니다. 대개는 가족이나 이웃이 발견하고 데려오지만, 가끔은 안타까운 일도.”
“그럼, 그때 바일을 따라잡지 못했으면.”
“이층 발코니에서 몸을 내밀고 계셨댔지요. 그럼, 아마 그대로 나아가려고 하셨겠네요.”
그런 바일을 기다리는 것은 까마득한 아래의 딱딱한 땅이다. 타낫세의 얼굴에서 금세 핏기가 가셨다. 한 번 판단을 잘못하면, 터무니없는 일이 되는 것이었다.
“이젠 괜찮습니다. 여기선 마의 소리 따윈 들리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렇게 열이 높으면 마의 기운이 아직 깊이 스며들었을지도 모르니, 여기서 치유하도록 폐하께서 요구하신 거겠지요.”
“…그런 것인가.”
그런 이치로 왕성의 의사가 선뜻 물러난 것이다. 아무리 기자재가 불충분하다고 해도, 그 정도 진찰로 차기 왕을 신전에 맡기기로 결정하는 것은 사뭇 이상했다. 의사도 어머니도 이 증상을 알고 있었던 거다.
“으….”
그때, 바일이 뒤척이며 작은 신음을 뱉었다.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발견해 닦아주려고, 타낫세는 이마를 식히는 천을 집었다. 그 아래서 드러난 상처가 여전히 심해 무심결에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죄송합니… 죄송….”
때때로 바일은 헛소리를 했다. 대개 누군가를 향한 사과였고, 들을 때마다 타낫세는 거북함을 느꼈다. 그 상대가 누구든간에 바일이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요.”
다 닦았을 즈음에, 시중을 드는 신관이 새로 짠 천을 건네줘 바꿔들었다. 신관들에게 상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 타낫세는 조심스레 이마를 덮었다.
“역시, 잔혹한 흔적이군.”
그 순간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건네져 와, 타낫세는 흠칫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방에 들어온, 흰 수염을 훌륭하게 기른 노인이 어깨 너머로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타낫세의 시선을 받은 그가 씩 웃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왕자 전하.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그것은 타낫세가 상상하던 의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걸친 의복은 묵직하고, 어깨에 걸친 천의 색깔도 낯설었다. 게다가 뭣보다 분위기가 남달랐다. 태도는 소탈하면서도, 그는 어딘가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시중을 들던 신관이 파리하게 질려 외쳤다.
“대신관장님, 일부러 당신께서…!”
“뭐야, 모처럼 처음 방문해 주셨잖나. 손수 환대해주러 온 거다.”
그제야, 타낫세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당대의 대신관장, 키아노라는 것을 알았다.
4-9
“바로 실례입니다만, 왕자 전하께선 방에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떨떠름해하는 신관들을 준비하는 일로 돌리고, 자신도 뭔가 품에서 꺼내기 시작한 키아노가 한 말은 그런 대사였다. 갑작스런 통지에 타낫세가 표정을 굳혀도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옆방에 침대를 준비했어. 거기서 아침까지 쉬는 게 좋겠다.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본인 안색이 나쁜 건 모르는 것 같으니까. 여기서도 계승자 전하는 나았는데 왕자 전하께서 쓰러지시면 국왕폐하께 면목이 없고.”
“잠시만요. 저는 어머니… 폐하로부터 보살피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눈을 뜨기 전까지 떠날 수 없습니다.”
이대로 따를 수는 없다고, 타낫세는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갑작스레 쏟아진 키아노의 눈빛에 입술이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의 소탈함이 사라진 눈동자 속엔 뼛속까지 추위가 치미는 빛이 담겨 있었다.
타낫세는 깨달았다. 이 신전이라는 나라에선, 오직 이 사람만이 왕이다.
“그럼,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해하실까. 앞으로 하는 것은 신전만의 치유 방법이다. 호락호락하게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이 비록 국왕폐하라 할지라도. 그게 아니라면 왕자 전하께선 장차 신을 섬기겠다는 결의가 있으신가?”
그런 말을 듣고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 이상 물고 늘어졌다간 이어질 회화도 보였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이렇게 말할 터였다. 그토록 신전을 믿지 못한다면 치료도 할 수 없다고.
그래서,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약간의 침묵을 견디며 타낫세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뒤통수가 툭툭 부드럽게 다독여진다.
“정신을 차리면 반드시 부릅니다. 그때까지 조금이라도 쉬어두세요.”
이제는 여기서 나갈 수밖에 없다. 안내역의 신관에게 재촉을 받고, 그래도 최대한 미적거렸다. 뒤를 돌아보고 방을 나서는 순간, 키아노의 작은 중얼거림이 귀에 들어왔다.
“불쌍하구나. 놓이는 자리만 바뀔 뿐 역할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니.”
문을 나서자마자 정면은 안뜰이었다.
어찌나 당황하고 있었는지, 데려와졌을 때의 일은 전혀 기억할 수 없었지만, 여기는 복도 옆에 방이 줄을 지은 구조로 돼 있는 것 같았다.
개방된 천장으로부터 들어오는 하늘의 빛과 일렁이는 복도의 등불에 의해, 그림자는 복잡한 문양을 땅에 새겼다. 뺨을 스치는 습한 바람이 멍해져 있던 머리를 상쾌하게 했다. 방 안은 제법 무더울 터였다.
“이쪽입니다.”
그래서 안내에 의해 객실로 들여보내지는 것을, 그만 거부해버렸다.
“저, 어차피 잠이 오지 않을 듯해서요. 여기서 잠시 바깥바람을 좀 쐬고 가겠습니다.”
물론 안내자는 그러면 곤란하다는 듯 잠시 물고 늘어졌지만, 끝내 이런 신전 안에서 위험한 일은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용건이 있거든 불러달라고 말해놓고서 대신관장의 곁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렇게, 타낫세는 혼자가 됐다.
시종도, 호위도 곁에 없는, 완전한 혼자.
안뜰을 마주하도록 세워진 복도의 벤치에 걸터앉은 그는 먼저 깊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하고 싶은 게 많았다.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분명 많았다. 다만 지난 1년간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슴에 쌓인 응어리가 차차 무겁고 예리해져서, 쏟아내는 법도 알 수 없게 됐다.
이것이 턱밑까지 차올랐을 때, 나는 숨이 막혀 죽겠구나, 그렇게 예감했다.
하늘에 걸린 아네키우스의 모습은 은은해지고, 빛이 고요히 곁에 내려앉았다. 갑작스레 눈가에 눈물이 고여, 타낫세는 고개를 숙이며 그것을 닦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 안심은 이내 뒤집어졌다.
“응? 뭐야 얘. 잘못해서 방에서 쫓겨나기라도 했어?”
난데없이, 저음의, 그러나 묘하게도 깊이 울리는 듯한 쉰 목소리가 안뜰의 정적을 깨부순 탓이었다.
놀라서 얼굴을 든 타낫세의 젖은 시야 안에, 그 여자가 우뚝 서 있었다.
4-10
타낫세가 순간적으로 대답도 못한 건 갑자기 말을 걸어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반대쪽 복도에 나타난 그녀가 도대체 누군지 얼른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이?”
그러나 그녀는 타낫세의 당황 따위는 개의치 않고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리낌 없이 거리를 좁혀왔다. 가장 짧은 길로, 즉 안뜰을 가로질러 금세 코앞까지 왔다.
“어이, 어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모습이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한 손은 책으로 찬 덕분에, 그녀는 비어있는 손으로 턱을 슥슥 매만져 보인다.
“잘 보니까 견습 신관 차림이 아니잖아. 게다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기억이 안 나네.”
“그…그쪽이야말로, 신관으로 생각되진 않습니다만.”
타낫세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든 건 여자가 걸친 옷이 신관복이 아니어서였다. 물론 신관이라고 해도 항상 같은 복장을 입는 것은 아니지만,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는 이 본당에서 일부러 눈에 띄는 모습으로 어슬렁거릴 필요도 없었다. 성인(聖印)도 하사받지 않았고, 감도는 퉁명스러운 분위기도 신관의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울고 있었어?”
그녀는 타낫세의 검문도 단박에 무시하며 그렇게 물었다. 어머니보다 약간 젊은 정도일까, 질긴 성질이 있는 빨간 머리가 턱선 근처에서 이리저리 뻗친 게 인상적이었다.
“별로… 그렇진 않은….”
지적을 받으니 왠지 찝찝해 타낫세는 재차 눈을 문지르며 얼버무렸다. 이 인물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왕자는 연약한 녀석이라고 신전에 퍼지는 게 싫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실수였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됐다.
“거짓말에 익숙해지면 만회하기 힘들어.”
“마, 만회라니, 무엇을….”
갑작스런 전개를 타낫세는 쫓아갈 수가 없다. 눈을 껌뻑이며 그녀의 말을 반복할 따름이었다.
“무엇이라고 생각해?”
되물어 봐도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입을 다물고 있는 타낫세를 내치듯 그녀는 답을 냈다.
“진실한 언어다.”
그와 동시에 잡혀있던 턱도 풀려난다. 여전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는 타낫세 앞에서,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책 한 권을 꺼내 들이밀었다. 사양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해 엉겁결에 받아버렸다.
“왠지 잠이 안 오나보지. 이거 빌려줄게.”
책의 표지는 닳아서 제목을 읽을 수 없었다. 꽤나 오래 된, 그리고 자주 사용한 책이라는 사실만을 알 수 있다. 멀뚱히 바라보는 타낫세의 머리 위로 목소리가 내려왔다.
“딱히 말하는 것만이 전하는 방법은 아냐.”
그리고 그녀의 기척은 멀어져 갔다. 황급히 고개를 들자, 그녀는 그 말이 마지막이었던 듯 발길을 돌려 입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무척이나 당황한 타낫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등에 대고 외쳤다.
“저, 저기, 저는 여기서 사는 게 아니니 빌려주셔도….”
“돌려주는 건 언제가 되어도 상관없어. 내용은 다 외우고 있으니까.”
뒤돌아보지도 않고 내뱉은 그녀의 등은 끝내 모퉁이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뒤쫓아가는 것도 망설여져, 타낫세는 그저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기척이 안뜰에 나타났다. 가벼운 발소리와 부르는 목소리.
“야니에 백작, 두고 가신 물건이에요―”
성인을 한두 살 넘겼을 견습 신관이 책을 한 손에 들고 입구로 향해 갔다. 그가 찾는 상대가 방금 전의 그 여자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
“저, 잠시 괜찮은가?”
불러 세우자 견습 신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쪽을 쳐다봤다.
“지금 다녀간 여성은 신관이 아닌 듯했는데.”
“아, 네. 백작님이에요. 자주 책을 빌리러 오십니다.”
“아니, 그렇지만 여긴 귀족이라도 출입이 제한된 게 아닌지…, 게다가 이런 시간에….”
“특례라는 것이에요. 어쨌거나 신전에도 그분보다 수사법에 뛰어난 사람은 없으니까요. 생각날 때마다 불쑥 찾아가기는 힘들거든요.”
“그런가…. 고맙다.”
사례의 말을 하자 그는 다시 여자를 따라 달려갔다. 그 발자국 소리도 정적에 잠긴 뒤, 타낫세는 힘이 빠진 듯 벤치에 주저앉았다.
왠지 강풍이 휩쓸고 간 것 같은 경험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의 감촉이 아직도 턱에 남아있는 듯했다.
그쯤에 타낫세는 손에 쥔 책을 알아챘다. 그녀가 남기고 간 손때 묻은 책. 매끈한 가죽의 감촉에 이끌려 무릎 위에서 훌훌 펼쳐봤다. 등불에 다가서자 읽기에 충분한 빛이 손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확인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내용을 알아가며 타낫세는 그 안에 빠져들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지금의 상황도 머리 한구석에 치워버릴 정도로.
그것은 까다로운 주석이 적힌 시의 교본이었다.
4-11
불려간 건, 아침의 기운이 감돌 무렵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자 앞에 선 신관이 이쪽을 걱정스럽게 살피고 있다. 덕분에 타낫세는 그제야 상황을 생각해 냈다.
“바일 전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깊숙이 자리 잡은 침실은 각종 냄새가 뒤섞여 있고, 숨이 막힐 듯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 안에 있는 탓인지 앓았을 때 특유의 핼쑥한 얼굴을 한 바일은 아직도 미열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의식은 또렷한지 타낫세의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그렇게 중얼거렸다. 타낫세는 머리맡에 앉아 옆에서 말을 걸었다.
“네가 사과할 건 아무 것도 없다. 곧 어머님도 오신다. 푹 쉬어두도록.”
“응….”
눈을 떴다곤 해도 아직 몸이 나른할 테다. 눈꺼풀이 무겁게 감기는 바일을 재워둔 뒤, 타낫세는 옆에서 한숨 돌리고 있는 대신관장 쪽으로 돌아섰다.
“감사합니다.”
공손히 말한 인사에 쾌활한 웃음이 되돌아왔다.
“뭐, 요즘은 전혀 실무를 보지 않았으니까.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할 대의명분을 챙겼으니, 이쪽이야말로 인사를 하고 싶군.”
“대신관장님.”
금세 그는 곁의 신관에게 주의를 받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나이일 텐데, 철야의 피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바일은 이제 걱정할 필요 없는 건가요?”
“어떤 상태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 적어도 열 때문에 시달리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면 마는….”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할 정도의 일은 아냐. 대수롭지 않은 근심거리 같은 거다. 심신이 약해진 틈에 속삭이는 마는 그런 거니까. 다만….”
거기서 말끝을 흐린 키아노가 약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타낫세의 시선을 알아채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그래그래, 이마의 상처도 순조롭게 낫고 있는 모양이고, 그것도 걱정할 필욘 없겠다. 좌우지간 자세한 이야기는 폐하께서 오신 뒤에 할까. 왕자 전하도 잠시 쉬는 게 좋겠어. 계속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키아노에게 다른 뜻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타낫세는 갑자기 꺼림칙한 기분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서 있었던 건 바일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어느새 그런 마음은 날아가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타낫세는 티나지 않게 품에 숨겼다. 들킨다고 해서 누가 나무랄 일은 없겠지만,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설프게 보이는 곳에 뒀다간 다시 읽어버릴 것 같았다. 바일은 아직 힘들 텐데, 그걸 잊고.
“…저, 어머님의 도착을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대신관장님께선 부디 쉬어주십시오.”
그렇게 재촉하는 타낫세더러, 키아노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얼굴을 했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는 남겨둘 신관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고 방에서 나갔다.
타낫세는 침대 옆에 앉아 바일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낮에도 그랬다. 제 일에만 열중해 바일의 움직임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때 납치됐다면 어땠을까.
결국, 나는 이런 인간이다.
중요한 순간엔 자기뿐이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염려하고 있는 건 그런 척하는 것일 뿐, 눈 깜짝할 새에 모른 체한다.
“…송…니다….”
잠든 바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중얼거림이, 자신의 불성실함을 더욱 몰아세우는 것만 같았다.
4-12
결국, 고대 신전에서는 이틀 정도 보냈다.
사실은 일주일 정도 디톤에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서둘러 떠나게 된 것이다.
이유는 바일의 상태가 좋지 못해서였다.
열이 내린 뒤로 이상행동도 사라졌지만, 그는 무척 우울해 했다. 정서가 전혀 안정되지 않아, 기어이 리리아노에게 이곳은 싫다고 직소했다. 신전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대신관장은 선뜻 그것을 좋게 이해해 줘, 왕의 일행은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이런 상태로 다른 영지를 돌아볼 수 있을 리도 없었으므로, 성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순행 예정은 행차가 돼 버려, 결국 우리들은 바다에 도달하지 못했다.
타낫세는 창문을 스쳐지나가는 경치를 보며 아련히 생각에 잠겼다. 함께 탄 바일은 준비된 침대에서 잠들어 이야기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긴, 깨어있어도 둘 다 입을 굳게 다물고 그다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바일의 기분전환 목적이기도 했을 이 먼 나들이는, 그의 우울을 더욱 깊게 만든 결과가 돼 버린 것 같았다. 어머니 역시 이런 결말을 예상했을 리가 없는지 바일을 걱정하며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그 결과, 일행의 공기가 무거워져, 가는 길이 유달리 길게 느껴졌다.
타낫세의 입에서 갈 곳 없는 마음은 한숨이 되어 흘러나왔다. 이것을 말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날 밤의 일을 아직 듣지 못했다.
무엇을 향해 계속 사과하고 있었던 것인가. 마의 유혹이란 어떤 것인가. 물어도 모른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조차 시도할 수 없었다.
알고 있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 사건 뒤에 피해 다녔던 것도 그 때문이다. 바일의 몸을 걱정하기보다는 자신이 책망 받을까 두려웠다.
자신의 일뿐이다.
뭐가 별 수 없는 재난이냐. 그 일은 피할 수 있었을 터였다. 제가 더 강인하고, 뛰어났더라면. 이번 일도,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분명.
“곧 왕성에 도착합니다.”
시종의 말에 타낫세는 정신을 차렸다. 듣고 보니 어느새 전해지는 흔들림은 돌바닥에 의한 것이었고, 창틈으로 보이는 경치는 낯익은 왕도(王都)의 거리였다.
시종이 바일을 흔들어 깨우는 것을 본체만체하며, 가까워지는 성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을 텐데, 왠지 모르게 왜소하게 느껴졌다.
록차는 별 차질 없이 성의 안뜰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리는 일행을 성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맞으며 수고의 말을 건넸다.
“두 분께선 방으로 돌아가 여행의 피로를 느긋이 풀라는 폐하의 지시입니다.”
깨워진 바일은 졸린 모양이었지만 걷기 힘들 정도는 아닌 듯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갈까, 타낫세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손을 뻗어…순간 강한 저항감에 휩싸여 손을 멈췄다. 이런 자신이 저 손을 잡는 일은 용서받을 수 있는가, 하며.
망설임은, 전해진 듯했다.
바일은 굳은 표정으로 타낫세를 주시하더니, 돌연 몸을 휙 날리며 그 자리에서 뛰어나갔다.
“졸리니까 먼저 들어가서 잘래―.”
황급히 뒤쫓아가는 시종과 위사들의 등을 배웅하며, 타낫세는 갈 곳 잃은 손을 제자리로 돌려 그 손바닥을 쳐다봤다.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것들의 잔재가, 아직 거기에 간신히 남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간 그마저도 느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타낫세는 알았다.
자기들이 여행을 간 동안 성에서는 큰 개편이 있었다고.
성에 머무는 사용인들의 모습이 확연히 달라졌으며, 특히 바일의 경우에는 시종감부터 의사까지 전과 같은 얼굴이 없을 정도였다.
부재중에 이뤄질 수 있도록 어머니가 준비해둔 것이다. 이만한 재배치라면 여러 모로 어수선했을 테고, 그 와중에 자기들이 없도록 하려던 것이 이번 동행의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벌써, 그 시절은 지나갔다.
아무리 원해도, 돌아오는 것은 없다.
예감은 이미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다섯 번째’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은 틀림없이.
이 작은 성에서 도망칠 것이다.
품에 넣어둔 채 가져와 버린 책 모서리가 이따금씩 가슴을 부딪치며 쿡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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