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등장인물은 주로 란테 조. 주역은 타낫세. 5화 완결."
*게임 본편과 연결되는 스포일러 有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3-1

아―, 형 화났다―.

발밑을 지나가는 두 개의 그림자를 쳐다보고, 레노는 옆에 선 형의 초조함을 톡톡히 느끼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치만 어쩔 수 없다. 들어온 놈들이 나쁘다. 어차피 옆 마을 놈들이겠지. 몇 번이고 여긴 우리 마을의 장소라고 선언해 뒀는데도.

  “어이, 거기 네놈들!”

기어코 형은 언성을 높였다. 나무 아래의 그림자가 움찔 멈춰섰다.

  “가자.”

형은 말을 내뱉고 나무에서 미끄러져 내려갔다. 레노도 허둥지둥 뒤따랐다.

가엾다. 된통 당할 텐데, 걔네들.

위에서 살펴보니 둘뿐이었고, 키도 비슷했다. 형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빨리 도망치는 게 좋아.

하지만 불러 세워진 침입자들은 도망치지 않았던 것 같다. 밑에서 기다리던 형과 합류하자, 그는 히죽 웃는다.

  “배짱이 좋아, 놈들. 여기서 기다려.”

수풀 너머에서 숨을 죽이는 기색이 느껴졌다. 이제 와서 그래봤자 소용없을 텐데. 숨는 법도 서툴러 레노는 탄식했다. 형은 수풀에 손을 넣고 단숨에 헤집었다.

  “네놈들, 전에 말했지, 여기는 우리들의 장소니까, 오지…말라고…”

형의 말문이 막힌 이유를, 레노는 금방 깨달았다. 저 역시 수풀 뒤에 숨어있던 두 명을 본 순간 무심코 숨을 삼켰기 때문이었다.

틀렸어. 이 녀석들은 옆 마을 녀석들이 아냐.

예상대로 우리들과 다르지 않은 나이의 2인조였다. 큰 쪽이 작은 쪽을 감싸는 형태가 되어 앞으로 나왔다. 째려보는 눈은 이쪽을 보는 순간 놀라서 뜨인 듯했다.

  “뭐, 뭐, 뭐, 뭐냐, 네놈들은!”

동요한 형이 당황해 묻는다. 단순한 형도 바로 알아볼 만큼 저 두 사람은 남달랐다.

처음에는 옷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비록 지저분하긴 하지만, 축제 때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레노는 다시 생각했다. 뭐라고 할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너희는… 이 근처에 사는 애들인가?”

큰 쪽이 경계를 늦추지 않으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 말투 역시 들어본 적 없는 부드러운 울림이었다.

  “이, 이쪽이 묻고 있잖아! 무슨 생각으로 우리 땅에…!”

  “미안하군. 지나가려던 것뿐이다. 허락해줄 수 없겠나.”

  “어…, 어. 그, 그렇게 숙인다면 생각해주겠어.”

  “관대한 조치에 감사한다. 덧붙여, 조금 물어볼 게 있다만….”

  “뭐, 뭔데.”

형은 상대의 지나치게 공손하고 난해한 말투에 완전히 기세가 꺾인 것 같았다. 근처 마을의 위치나 방향을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 버렸다. 목청을 높였던 처음의 질문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근데, 이 녀석들, 도대체 뭐야?

석연찮아 눈앞의 두 사람을 뚫어져라 살피던 레노는 큰 쪽의 옷을 붙잡은 채 입을 다물고 있는 작은 쪽을 눈여겨봤다. 나보다 한두 살 아래인가, 안색은 나쁘고 표정도 어둡게 가라앉아 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시선을 알아챘는지 이쪽을 쳐다본다. 그 눈동자의 깊은 빛에 레노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그 빛은 보이지 않게 됐다.

어떻게든 이쪽을 다시 보게 하고 싶어, 레노는 안절부절 못하며 윗도리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코끝에 상쾌한 냄새가 닿자, 조금 전에 들렀던 곳이 떠올랐다. 아껴둔 거지만, 어쩔 수 없다.  

  “어이, 어이. 너. 너 말이야.”

말을 걸자, 흠칫하며 이쪽을 본다.

  “너, 배고프지. 이거 줄게. 먹어.”

내민 건 리네크 복숭아다. 보통은 시어서 그대로 먹을 수 없지만, 우리들끼리 아는 비밀 나무 꼭대기 근처에서만은 굉장히 단 것이 열린다.

내밀어진 걸 처음에는 깜짝 놀란 듯 바라보던 작은 녀석은, 냄새에 이끌렸는지 곧 쭈뼛쭈뼛 손을 내밀었다. 큰 쪽이 뭔가 말하고 싶은 듯 노려보지만, 그만둘 수 없어서 그대로 건네줬다.

  “…고마워.”

감사 인사와 함께 짓는 미소를 보았고,

레노의 기억은 왠지 분명치 않다. 어쩐지 두근두근하는 기분이라, 껍질 벗기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먹는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형에게 머리를 쥐어 박힌 뒤였다.

  “야, 얘기 끝났어. 옷 벗어.”

바로 옆에서 하고 있었을 형들의 대화를 레노는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있었다.

 

그 뒤에 한 건, 무척 무서운 것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본진이라지만, 평소의 마물 놀이와는 딴판이다. 어설프게 넘어졌다간 잡힐 거라고 의식하면, 거꾸로 다리가 꼬이기도 한다. 가끔 뒤돌아볼 때마다 나무들 틈새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어린애가 아니라, 어엿한 어른 여러 명의.

  “얼마 안 남았어!”

그래도 형의 외침에 기운을 차리고 마냥 달려갔다. 수풀 속을 빠져나가고, 언덕의 개구멍에 기어들고, 나무줄기에서 줄기로 숨어들며 뛰었다. 험한 곳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추적자의 수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을 언저리의 오두막으로 뛰어들자, 형이 근처에 있던 곡물 봉투를 덮어줬다. 막대를 들고 오두막 앞에서 서로 때리고 있으니, 숲속에서 남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이, 거기 너희들!”

그들은 고압적으로 말을 걸었다.

  “여기에 너희랑 비슷한 애들이 오지 않았나?”

  “아, 그 이상한 녀석들? 저기서 뛰어가던데.”

엉뚱한 방향을 가리키는 형의 말을 의심도 않고 남자들은 다시 뛰어갔다. 그 등을 향해 형과 레노는 혀를 내밀어줬다.

  “꼴좋다, 악당놈들.”

곡물 자루를 벗어내자, 형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저 또한 마찬가지고, 옷자락이 짧은 게 부끄럽다.

  “근데 형, 걔네들 뭐였어?”

우왕좌왕하던 새에 옷을 바꿔 입고 달리게 된 레노가 다시 묻자, 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몰라.”

  “물어본 거 없어?”

아무래도 평상시처럼 속 편하게 상대에게 구워삶아진 것 같다. 그러면, 그 두 사람이 어디의 누구인지도 모르잖아, 레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근처에 사는 아이는 아니었고,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른다.

  “악당들에게 쫓기고 있다면 도와줘야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당당히 재촉하는 형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레노는 그만 비아냥대며 응수했다.

  “맞아, 건너편의 크랴나보다 귀여웠어.”

그 직후 얼굴이 발개진 형의 주먹이 레노의 머리에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3-2

잡초를 밟는 소리도 멀어져가고, 사람의 손이 아니라 바람만이 수풀을 건드렸다. 그래도 주위의 낌새를 신중히 살피며, 타낫세는 몸을 숨겼던 수풀에서 일어났다. 아무 반응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겨 작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

  “…응.”

바일은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이지만, 안색은 나아졌다. 방금 전의 일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말해 즐겁지 않다.

  “좀 전엔 어쩔 수 없었지만, 모르는 녀석이 주는 걸 곧장 입에 넣으면 안 된다. 뭐가 들었는지 모르니까.”

그렇게 주의를 주자 깜짝 놀란 눈이 이쪽을 돌아봤다.

  “그치만 그 두 사람은 딱히….”

  “아, 그 녀석들이 나쁜 사람인 건 아니겠지. 그래도, 조심성이라는 건 필요하다. 여긴 성 밖이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야.”

  “…알겠어.”

그다지 납득하지 않은 얼굴이면서도, 바일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자신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마음을 한층 더 강하게 했다.

  “정말이지, 성에 돌아갈 생각은 없는 거냐.”

재차 묻자, 일순 굳어버리지만, 바일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다. 손에는 옷을 묶는 빛바랜 띠가 들려있다. 아이의 배에 감기에 너무 긴 띠는, 묶는 방법이 어설펐는지 풀린 채였다. 타낫세가 손을 뻗자 바일이 움찔했다.

  “안 가져간다. 묶어주려는 거야.”

정밀한 자수가 놓인 장식띠는 지저분하긴 해도, 착각의 여지가 없다. 그날 멀리 떠난 숙부가 두르고 있던, 그리고 바일이 일찍이 그에게 선물했던 것이다. 덧붙여 지금 상황을 만들어 낸 원인이기도 해, 씁쓸하게 생각하며 꽉 조여줬다. 바일은 불편한 듯 꿈지럭거렸다.

  “왠지 간지러워.”

그것은 자신도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것이다. 옷을 바꿔준 건 좋지만, 이상하게 뻣뻣해 살갗에 닿는 곳이 따끔거린다.

  “어쩔 수 없지. 그 차림으로는 금방 들켰을 거야.”

  “이게 밖에서는 보통이야?”

  “아마도.”

그 두 사람은 잘 달아났을까? 머리는 별로 좋지 않아 보였지만 믿음직스러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길만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쫓기고 있다는 것까지 얘기해버렸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체형은 자기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안 잡혔겠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켰을까, 바일이 소매를 잡으며 물었다.

  “이 근처는 그 녀석들 영역인 것 같았으니까. 괜찮겠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모르는 거라고 해도, 생각하면 그 뻔뻔함이 묘하게 이상했다. 미데론 따위의 무례함보다 훨씬 나았다.

  “자, 얌전히 앉아있을 순 없지. 모처럼 녀석들이 시간을 끌어줬으니까, 얼른 멀어지자.”

들었던 대로의 위치를 상정하고 방향을 정한다. 사실은 동쪽을 향하며 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바일이 그렇게 바라지 않고, 게다가 순순히 성으로 향하면 금방 발각될 우려가 있다.

  “가자.”

그래서 결정했다. 진로는 서쪽이다.

란테 영지를 향해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3-3

그 소동에 휘말린 건, 정말로 우연이었다.

미라네가 떠나고, 유모를 잃은 바일을 염려했던 건 분명하다. 다만 그렇다고 생활의 전부를 함께 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오히려 함께 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만 했다.

그건 단순히 서로 공부하느라 바쁜 탓도 있었고, 귀족들의 견제 탓도 있었다. 이젠 바일도 약혼자를 골라야 할 나이였다. 최종적으로는 후견인인 리리아노의 승인 여부에 달렸지만, 당사자의 평가를 올려서 손해 볼 건 없을 게 뻔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방해되는 건 가장 유력한 후보라고 멋대로 정해진 자신이다. 그놈들의 뜻에 따르는 건 화가 났지만, 자연히 이쪽에서 바일에게 다가갈 기회는 줄어들었다.

우선, 그날은 요아마키스 저택에서 불렀고, 그대로 성에 돌아가지 않은 채 저택에서 하룻밤 묵을 예정이었다. 바일을 따라 성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놈들은 그 외출에 일부러 작전을 부딪친 것 같다. 혹시라도 휘말리지 않게끔. 그것이 화근이 된 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타낫세는 요아마키스 저택에서의 외박을 갑자기 취소했다. 귀성 도중에, 갑작스런 만남이 이뤄졌다.

  “웃기지 마! 그 녀석과 만날 마음이 있겠나!”

그렇게 내뱉으며 저택을 맨몸으로 뛰쳐나온 건, 요아마키스 일가의 속셈을 알아서였다. 어머니의 체면도 있고, 친척이고 하니 간 것뿐이었는데, 그 대화 중반부터 무엇이 이뤄질지 깨닫고 말았다. 그치들이 자신을 요아마키스 진영에 끌어들이려는 게 분명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 술수였다.

슬쩍 흘러나온, 놈의 도착이 늦어지고 있다는 말. 그들은 자신과 아버지를 만나게 하려던 수작이었다.

순간, 머리에 피가 솟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종자도 내버려둔 채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잡히면 이러쿵저러쿵 붙잡히고, 그새 놈이 도착해버릴지도 몰랐다. 견딜 수 없었다.

화가 난 채로 골목을 달렸다. 성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길을 잘 알지는 않지만, 건물 사이로 보이는 성까지 도착하는 데 크게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로 만나고 싶다면, 성까지 오면 된다…!”

추격자의 기색을 느낀 타낫세는 뒷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끌려가기라도 하면 최악이다. 혼자서 성으로 돌아갈 셈이었다. 그 뒷골목에서 예상 밖의 상대를 만나지 않았다면.

갑자기 옆에서 뛰쳐나온 작은 그림자가 사거리를 돌진하던 타낫세를 밀쳤다. 허리를 찌른 건 아니지만, 비틀거리며 벽에 손을 댄 그에게 미안한 목소리가 들린다.

  “저, 저기, 죄송합니다!”

너무도 낯익은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역시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이마를 가리고 있지만 틀림없고, 저쪽도 이쪽을 알아보고 놀라 눈을 크게 뜬다.

  “타나… 어째서…?”

  “그, 그건 이쪽이 할 말이다! 어째서 네가 이런 곳을 혼자서…!”

질문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바일이 가슴팍 앞에서 움켜쥐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오고, 타낫세는 숨을 삼켰다. 그 반응에 당황한 바일이 등 뒤로 숨기지만 이미 늦었다.

  “그건 어떻게 된 거냐!”

갑작스레 불안해하며 타낫세의 손을 뿌리친 바일이 몸을 틀었다. 작은 형체는 금세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어이, 기다려!”

바일의 태도는 타낫세의 예상을 확신으로 바꿨다. 앞서 달려간 바일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띠는 펄럭거리며 은실 자수를 빛냈다. 저건 여기에 있어선 안 되는 것이다.

  “어디 가, 바일!”

그 대답은 골목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숨죽인 듯 서 있던 록차 문이 유혹하듯 열리고, 바일은 순간 기죽은 듯 걸음을 멈췄다. 그러나 다가오는 기척에 쫓겨서인지, 각오하고 안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타낫세 역시 록차로 달려들어 닫히려는 문에 몸을 쑤셔 넣다가, 그만 팔을 붙잡혀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창문이 닫힌 차 안은 어두웠고, 안에 몇 명이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입 안에 뭔가가 욱여넣어진다. 얼굴은 부드러운 것에 덮였다. 즉각적으로 날뛰려 했지만 어깨를 눌려 꼼짝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타낫세는 록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입이 부자연스럽게 막혀서인지 점차 의식이 멀어져가는 도중에,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 것 같았다.

 

3-4

그 상태에서 벗어난 건 제법 시간이 흐른 뒤였다.

처박힌 곳에선 곰팡이 냄새가 났고, 침대 정도만 간신히 놓여있는 듯했다. 얼굴을 덮은 것으로부터 겨우 풀려났나 했더니, 허리께에 무언가 부딪쳤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뻗친 머리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미아…, 미안합니다….”

신경 쓰지 말라고 대답하려다 아직 입안에 욱여넣어진 게 남아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타낫세는 한 손으로 그걸 빼 내면서, 다른 한 손은 바일의 머리 위에 올렸다.

  “괜찮다. 뭔가 심한 짓은 당하지 않았나?”

물어보며 눈길을 돌려 방을 살폈다. 정면의 창가에 한 명, 자신들의 대각선으로 뒤쪽의 문 앞에 한 명, 힘센 남자들이 둘러싸고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정면의 남자가 일그러진 미소를 입술에 걸었다.

  “안심하쇼, 도련님들. 조금 난폭하게 굴었습니다만, 거기서 야단을 떨면 작은 도련님의 희망을 이뤄줄 수 없게 되니, 부득이한 일이었거든. 점잖게 굴어준다면 앞으로는 정중하게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에, 타낫세는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목적지는 어디냐.”

  “작은 도련님이 알고 계신다고요. 애초에 저희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니까요.”

어조는 정중하고 겸손하지만, 눈빛은 날카롭고 친근함도 비굴함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물어봤자 답을 들을 수 없다고 판단한 타낫세는, 우선 바일을 달래며 얘기를 듣기로 했다. 남자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바일을 침대에 앉힌 뒤 저 역시 옆에 앉았다.

  “아빠…, 집.”

참을 성 있게 기다리고 있으면, 바일의 입에서 간신히 사정이 흘러나왔다.

  “돌아왔다고… 다쳐서… 데려다준대… 그러니까….”

그 말을 믿었냐고 물으려던 타낫세는 겨우 질문을 삼켰다. 물어볼 것도 없다. 바일은 단지 믿고 싶었을 뿐이다. 그뿐이다.

  “그 장식끈은 누가 줬어?”

  “테녹크가 비밀이라면서… 아빠는 사실 바다에 나간 게 아니고, 목숨을 위협받아서 그렇다고….”

  “시종감이.”

바일이 실토한 이름에 타낫세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일을 빼돌리는 데 그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노골적으로 가담하고 있었다니. 그래도 확인 차 덧붙여 물었다.

  “그래서, 시종감은 어떻게 됐어.”

  “바깥에 데려다줬는데, 가게 뒤로 나가서, 좀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는 차에 타랬어.”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시종감은 바일을 배신하고 이놈들에게 팔아넘겼다. 그것도 아버지라는 바일의 약점을 이용해서.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못 들었지?”

연이어 묻자 바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에 하나라도 들통 나면 큰일 난다고 단단히 구슬려졌을 테지. 미라네나 유모가 있었더라면 분명 바일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눈치 챘을 텐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괜찮아. 어른스럽게 굴면, 심한 짓은 당하지 않아. 그렇지?”

넌지시 물어봤지만, 감시자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히죽대는 웃음뿐이었다.

누군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 초청자가 노리는 바는 바일의 후견인 자리일 터였다. 그렇다면 저를 포함해 위해를 가하는 일은 없겠지. 지금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그건 타낫세가 늘 하는 일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쉬는 것뿐이었다.

주어진 식사를 최대한 밀어 넣고, 어두운 얼굴의 바일을 불러 침대로 기어들었다. 눅눅하고 딱딱한 잠자리가, 이곳은 성이 아니라고 재차 말해왔다.

 

3-5

전환점이 찾아온 건, 이틀쯤 지나서였다.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여세를 꺾지 않고, 다그치듯 록차를 두드렸다. 반면 토록의 발은 영 나아가질 않는지, 차 안에는 초조한 기색이 흘러넘쳤다.

거역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아서일까, 그 이후로는 구속당하지도 않아 타낫세는 바일의 옆에 붙어 앉을 수 있었다. 여전히 꾸벅꾸벅 조는 바일의 손을 잡은 채, 지금쯤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단서라도 찾아보려 바깥의 기척을 살피던 중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들리는 것이라곤 빗소리와 토록을 채근하는 마부의 목소리뿐이라, 수확은 없을 것 같았다. 소리와 함께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떨며 바일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덮어주려던 그 순간.

이상하리만치 커다란 흔들림이 덮쳐와, 담요를 놓치는가 싶더니 사방이 기울었다. 자연스레 굴러 떨어지는 바일을, 타낫세의 몸은 반사적으로 막아내고 세게 끌어당겼다. 직후 숨이 막힐 정도의 충격을 등에 맞아, 눈앞이 깜깜해졌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가슴팍의 것을 끌어안고 있으니, 이번에는 뭔가 강한 힘에 끌려가 목이 죄였다. 저항하려고 해도 몸이 자유롭게 풀려나지 않고,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몽롱해진 의식을 다잡은 건, 다가오는 추위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덕분이었다. 서서히 되돌아오는 시야 속에 바일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 얼굴에 안도하는 기색이 드는 것도 인식했다. 보이는 범위가 넓어져가는 것과 동시에, 감각도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후드득 이마에 맞고 있는 건 빗방울이었다. 닿은 손의 감촉은 부드럽고, 숨이 막힐 만큼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체에서는 불쾌한 한기가 조금씩 스며들었다.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며 매달리는 바일에게 적당히 대답하면서, 타낫세는 곁에서 멀어지는 남자의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 앞에 낯선 것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게 록차의 밑면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한 박자가 걸렸다. 그 덕분에 비로소 상황을 파악했다.

바퀴가 진창에 처박혀 록차는 전복됐다. 아무래도 차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았고, 마부를 포함한 네 명의 남자들은 차를 바로 세우려 하고 있었다. 곁에 있던 남자도 자신이 의식을 되찾는 걸 확인한 뒤 힘을 보태러 간 것이다. 저와 바일은 조금 떨어진 나무 밑에 방치됐다.

   “저기, 타낫세, 있잖아….”

바일도 상황을 파악한 것 같았다. 그렇게 조용히 속삭이며 타낫세의 주의를 끌었다. 거기엔 록차에서 풀려나 잠시 나무에 매인 토록들이 있었다. 방금 전의 일 탓인지 흥분한 채 서성대고 있었다.

   “…가자.”

지금이 기회다.

그것만으로 바일도 알아차린 듯, 갑자기 휙 떨어져 달려 나갔다. 타낫세도 아픈 몸을 채찍질하며 뒤쫓았다. 남자들이 낌새를 알아채기 전에 토록에 도착해 끈을 풀었다.

토록은 올라타기에 적합하지 않다. 변덕스러운 기질과 넓지 않은 등이 그 이유다. 다만 아이 두 명이 조종하지 않고 대충 얹히는 것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바일을 먼저 매달리게 하고, 자신도 그 위로 덮듯이 매달린다. 처음엔 풀려난 걸 모르는 듯한 토록이었지만, 느닷없이 얹힌 무게에 화가 난듯했다. 떼어내려는 듯이 지면을 박차며 달려 나갔다.

   “이 자식들이…!”

그런 목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바람소리에 사라져 갔다. 일단, 지금의 타낫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떨어지지 않도록 토록의 긴 털을 움켜잡는 것뿐이었다.

 

3-6

그렇게 도망치는 날들이 시작됐다.

토록에 매달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지친 토록이 멈춰 선 순간 두 사람은 거기서 내려 숲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저 남자들의 기척으로부터 달아나듯 숲을 헤매다가, 어두워지자 수풀 속에서 쉬었다. 마을의 소년들을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소년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했다. 성에서 남서쪽으로 나온 듯한 이 일대는,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귀족의 영지였다. 그 귀족이 주모자라고 해도 놀랍진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하려는데, 바일이 말을 꺼냈다.

  “…성은, 싫어.”

장식끈을 움켜쥔 채, 쥐어짜는 목소리로.

  “바다…, 보고 싶다.”

물론, 그런 일이 허용될 리가 없다. 지금 필요한 건 안전한 장소로, 그런 장소는 성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으로 돌아가면 바일은 틀림없이 엄중히 갇히고, 그 소원은 절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감정이 판단을 흐리게 만든 게 분명했다.

여기서 피아칸트까지는 쉽게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추격자 입장에선 자신들이 성으로 돌아가려는 게 당연할 거고, 도망친 걸 알았다면 감시망도 삼엄할 터였다. 그리고 란테 영지까진 멀다고 해도 여기서 서쪽 근처는 시종장을 배출한 가문의 영지였다. 그 가문이 이번 일의 주모자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 있는 곳의 영주를 의지하는 것보단 안전할 확률이 높았다. 그럼 서쪽에 걸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게 최종 결론이었다.

그리고 지금, 타낫세는 숨을 죽이며 민가의 벽에 붙어있다. 작은 환풍구를 통해 안의 상황을 들여다봤는데, 사람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갈 수밖에 없었다.

반쯤 열린 문에 몸을 밀어 넣으며, 독특한 냄새가 나는 실내에 순조롭게 숨어들었다. 식량과 농기구를 넣어두는 창고답게 발을 디딜 때마다 마른 가루가 발밑에서 흩어졌다. 서둘러 창고 안을 물색해, 가장 작은 육포 덩어리와 말린 콩 한 봉지,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있던 주머니칼과 도자기병을 품에 넣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돌아가자, 수풀에서 기다리게 한 바일이 불안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얼른 가자.”

긴장감에 새삼 도지는 위통을 느끼며 타낫세는 바일을 재촉했다.

동쪽으로 가나 서쪽으로 가나, 당면한 문제는 물과 식량이었다. 지금까진 어떻게든 샘물이나 산딸기로 때웠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도 않았고, 둘 다 걸어갈 다리가 아파오고 있었다.

소년들이 말하던 이웃마을에 이르자 타낫세는 각오를 다졌다. 그 남자들의 귀에 들어가는 걸 조심하려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수단은 하나, 몰래 빌리는 것뿐이었다. 물론 그게 일반적으로 뭐라고 불리는 행위인지는 알고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의 마음을 타이를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쿡쿡 찔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바일의 손을 잡고 방금 전 들렀던 샘으로 돌아갔다. 병에다 물을 길어 배를 채우기로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가지고 있는 건 콩과 육포뿐이다. 오두막 안에는 그 밖에도 정체 모를 가루들이 쌓여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먹을 수 있는지 몰랐다. 하는 수 없이 고기를 조금 떼어내 콩과 함께 각자의 손바닥에 올렸다. 입에 넣자 고기는 짜고, 콩은 퍼석퍼석해서 맛이 없었다.

  “…먹기 힘들군.”

자연스럽게 불평하는 타낫세더러 바일도 맞장구를 친다.

  “맛이 이상해…. 그치만 왠지 배에 조금씩 퍼지는 느낌이 들어.”

  “그런가?”

  “응, 정말로 몸에 들어왔구나, 그렇게.”

듣고 보니 확실히 입에 넣은 하나하나가 뱃속에 쌓여가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왠지 신기한 기분으로 두 사람은 마른 콩을 계속 씹었다.

 

3-7

그러나, 그런 한가한 말을 할 수 있는 건 처음 하루뿐이었다.

해가 떠있는 동안에는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고, 인기척을 느끼면 옆으로 숨었다가, (해가) 달로 바뀌는 무렵이면 길을 벗어나 적당한 수풀에서 쉰다. 바일의 하찮은 가출에 휘말려 노숙한 경험은 있으니 괜찮겠지, 라던 생각은 너무 안일했다. 도망치던 초반에는 긴장감이 몸을 받쳐줬지만, 장기전이 되면 어떻게 될지, 성에서 자란 두 사람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몸이 아파.”

바일이 우는 소리를 낸 건 걷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밤이었다.

  “하는 수 없지. 어쩔 수 없어.”

호소를 듣는 타낫세도, 몸의 마디마다 삐걱거리고, 발바닥은 욱신대며, 등은 뭔가에 끌려가는 듯 무거운 데다가, 위는 계속해서 뒤집힌 것처럼 아파서, 무척 지친 상태였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대답할 것만 같아 간신히 삼켜냈다.

  “…식사 뒤엔 일찍 자. 한숨 자면 기분도 나아질 거다.”

아무래도 퉁명스런 말투가 됐다는 걸 자각하고, 콩이 담긴 봉투를 꺼내 바일에게 손바닥을 내밀라고 했다. 하지만 바일은 멍하니 이쪽을 쳐다만 볼 뿐,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왜 그래? 빨리 손을 대.”

강하게 말하자 바일의 눈동자는 당혹감에 흔들렸다. 그리고 그 고개는 옆으로 저어진다.

  “…필요 없어.”

  “뭐라고?”

  “딱딱하고, 퍼석퍼석하고, 목마르고…. 못 먹겠어.”

눈을 땅에 둔 채 쥐어짜듯 바일이 말했다. 그 모습은 타낫세가 더 안달을 내게 만들었다.

  “그렇게 말해도, 먹을 건 이것밖에 없다.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걸을 수는 없잖아. 참고 먹어라.”

타일러 봐도 바일은 고개를 숙이고선 가만히 있다. 먹을 생각 없다고 말하려는 모양이다. 당연히 이런 게 맛있을 리도 없고, 자기도 질렸지만, 그럼 대체 어쩌라는 거냐고 타낫세는 생각했다.

그 생각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면, 뭘 먹고 싶다는 거야.”

쏟아진 질문은 자못 냉정하게 들렸다. 움츠린 바일의 어깨가 덜덜 떨리는 게 눈에 띄어 타낫세는 언뜻 후회했다. 단 바일의 대답을 들을 때까지만이었다.

  “…그 복숭아, …맛있었어….”

순간, 이상할 정도로 머리에 피가 치솟는 걸 알았다. 좀 전에 느낀 꺼림칙함 따위는 날아갔고,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속을 태웠다. 남이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구해온 걸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럼, 그 마을에 가버리면 돼!”

정신을 차리니 타낫세는 바일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그렇게 쏘아붙이고 있었다. 한 번 폭발한 게 가라앉을 리도 없이 쌓아뒀던 불만은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그놈들한테 넘어갔지, 그렇게나 그쪽이 좋다면 빨리 가! 그리고 그놈들한테 잡혀버려!”

  “아니…, 그게, 아니라….”

  “틀려? 남의 고생도 모르고, 잘도 맛없다느니 어쩌니 트집이나 잡고!”

  “그게 아니라, 뭐냐면…, 그게….”

내뱉은 고함과 바일의 신통치 못한 변명이 흥분을 더 부추겼다.

  “애초에, 대체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네가 그런 시시한 얘기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건 확실히 진심이었다. 몇 번이나 마음을 스쳤지만 매번 삼켜온 규탄이었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도 삼켜야 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바일의 눈동자가 커지고 낯빛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리는 것을 본 타낫세는, 자신의 머리도 똑같이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후회해본들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다. 그것이 진심으로 한 말이라는 걸 알아서 가슴이 더 먹먹했다.

사과해야만, 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혀는 저린 듯 무거워 움직여주지 않았다.

서로 노려보는 듯한 긴 침묵 뒤에, 먼저 움직인 건 바일이었다. 말없이 느릿느릿 바닥에 누워 눈을 감는다. 그건 이 어색한 시간을 일단 흘려보내자는 의사표시로 생각돼, 타낫세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침이 되면 자신의 입도 똑바로 움직여 줄 거다. 바일도 배고픔을 참지 못해 말린 콩을 입에 넣을 거고, 그럼 말실수를 사과하고 화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해온 다툼도 그랬으니까.

타낫세는 조금 거리를 둔 자리에 똑같이 누웠다. 감긴 눈꺼풀 아래로, 아침의 빛을 마음에 그리면서.

 

3-8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았다.

되살아난 아침 햇살 아래서조차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바일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문 채 아침식사를 먹으려 하지 않았다. 처음엔 걱정하던 타낫세도, 그 고집불통에 다시금 위가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먹지 않을 거라면 좋을 대로 해라. 힘들어지는 건 본인이다.”

사과하려던 말은 어느새 으름장을 놓는 말로 변해있었다. 가슴의 찔림은 조바심에 밀려났다.

보란 듯이 식사를 해보였지만 바일은 말을 듣지 않아 끝내 그대로 떠나게 됐다. 뒤에는 더 심했다.

바일은 일부러 저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걸음이 느렸고, 아주 조금 나아갈 때마다 목이 마르다며 물을 달라고 했다. 그에 맞춰 타낫세의 조바심은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물을 달라는 소리를 다섯 번째로 들었을 때, 결국 그는 바일에게 병을 떠넘겼다.

  “그렇게 마시고 싶으면 알아서 가져가!”

억지로 쥐여 주고, 발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순간, 등 뒤에서 거슬리는 파열음이 울렸다. 돌아보자 우두커니 서 있는 바일의 발치에 파편 몇 개가 흩어져 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떨어트려 깨 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병은 하나밖에 없다. 앞으로 물이 필요할 때마다 형편 좋게 강이나 샘, 우물이 있을지 알 수 없는데. 게다가 그걸 찾아야 하는 건 틀림없이 자신이다.

저지른 본인은 무슨 짓을 한 건지도 모르는 듯싶은 얼굴로 멍하니 이쪽을 쳐다봤다. 사과하는 기색도 없는 그 눈빛이, 타낫세에게는 떠맡긴 네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그렇지, 성에서는 그렇게 용서된다. 어쨌거나 이 녀석은 소중한 총애자님이니까. 복도에 놓여있던 병을 깨트렸을 때도, 시종장은 정작 바일이 아니라 함께 있던 자신을 몰아세웠다. 여태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바일과 함께 있는 한, 계속 그럴 거다.

분노가 타낫세의 몸을 태웠다. 그는 바일을 등지고 혼자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간 뒤에야 뒤를 돌아보면, 여전히 느리게 따라오는 바일의 모습이 보였다.

  “…윽!”

타낫세는 충동적으로 성큼성큼 바일 곁에 돌아왔다. 그리고 뒤처진 손을 세게 잡아당겼다. 질질 끌어서라도 빨리 걷게 해줄 심산이었다.

반응은 거의 없었다.

저항도,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길 때마다 바일의 몸은 천천히 기울 뿐 되돌아가지 않았다.

흙먼지가 튀고 충격이 팔에 닿는다. 그제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타낫세는 알아차렸다.

사촌 동생의 작은 몸이 길 위에 엎드려 나뒹굴고 있다.

  “어, 어이…. 무슨…. 바일? 바일?”

불러도 대답이 없다. 흔들어도 반응이 없다. 멍하니 옆에 앉아서 고개를 젖히자 드러난, 반쯤 열린 동공에는 전혀 생기가 보이지 않는다. 몸은 가늘게 떨리고, 이마에 손을 대면 예사롭지 않은 열기가 느껴진다.

  “설마… 계속….”

바일은 확실히 이기적인 데가 있다. 보채며 주위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어제부터 보인 태도는 분명 이상했다.

머리를 식혀줄 물은 이미 수중에 없었다. 안정시켜 줄 장소도 근처에 없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곤란해진다는 건, 타낫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축 늘어진 몸을 간신히 업은 채,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한다는 초조함은 바일을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향하게 됐다.

 

3-9

들어가자마자 마른 풀 냄새가 타낫세의 코를 간질였다. 문을 닫은 반동에 의해, 손에 든 통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구두를 적셔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지붕을 덮은 이 빠진 판자 틈새로부터 들어오는 햇빛은 희미해 밤이 가까워졌다는 걸 알렸다. 

  “바일.”

오두막 구석에 쌓여있는 지푸라기 더미로 다가가 타낫세는 그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황금빛의 마른 풀들 사이로 뻗친 머리가 들여다보였다.

통을 바닥에 놓고, 이마에서 흘러내린 천을 집었다. 그 천을 길어온 물에 담갔다 짜서, 잠든 바일의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았다. 이마를 만져서 그런지, 차가워서 그런지, 감겨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알아보겠어?”

들여다보며 묻자, 속삭이는 듯한 쉰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타낫세….”

  “그래. 상태는 어때.”

  “머리…, 무거워.”

  “열이 많이 나니까. 일단, 물을 마시자.”

일어날 수 있는 상태도 아닌 것 같아, 다시 한 번 천을 물에 담갔다 가볍게 짜서 입에 적셔 줬다. 별로 마시는 기색은 없지만, 입술의 갈라짐은 좀 나아졌다.

  “언제부터 상태가 안 좋았어? 계속 무리한 건가.”

  “열…, 모르겠어….”

  “빨리 말해줬으면 좀 더….”

그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타낫세도 요즘 자신의 상태가 피곤한 탓인지, 배고픈 탓인지, 컨디션이 나쁜 탓인지 잘 몰랐다. 더군다나 바일은 이런 식으로 앓아누운 적이 없었다.

당연하게 생각했다. 내가 견딜 수 있다면 바일 역시 괜찮다고. 어쨌든, 그는 누구보다 강하고 우수한 총애자니까.

다시금 천을 물로 식혔다 짜서, 이마 위에 올려줬다. 반짝이는 선정인의 빛을 가리자, 거기 있는 건 몽롱한 어린애의 모습이었다.

  “자, 우선 푹 자둬. 하룻밤 지나면, 분명 열도 내리고 편해질 거다. 그러면 다시 바다로 가자.”

춥지 않게끔 지푸라기까지 그러모아 어깨를 덮어준다. 바일은 어딘가 불안한 빛을 머금은 눈으로 타낫세를 올려다보며 입을 움직였다.

  “바다….”

  “그래. 얼른 낫지 않으면 두고 간다.”

  “두고 가지 마….”

  “안 갈 테니까, 지금은 얌전히 자.”

  “…고 가지….”

열은 바일을 곧장 잠으로 끌어들였다. 중얼거림이 잠꼬대로 변한 걸 확인하고 나서야, 타낫세는 깊이 숨을 내쉬며 주위를 다시 둘러봤다.

도로변에 서 있던 오두막이었다. 지푸라기를 보관해두기 위해 세워둔 것으로, 지금은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것 같았다. 있는 것이라곤 마른 짚더미와 몇몇 농기구가 다였지만, 지붕과 따뜻한 짚과 나무통이 있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의식을 잃은 바일을 짊어진 채 달려, 마찬가지로 쓰러지기 직전에서야 간신히 여기까지 다다랐을 때는, 저도 모르게 신에게 감사하고 말 정도였다. 임시방편밖에 되지 않는다곤 해도, 물을 확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러나 약도 충분한 식량도 없어서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괴로웠다.

자신이 병으로 쓰러지면 뭘 받았더라, 타낫세는 새삼 떠올렸다. 의사의 진단, 따뜻한 잠자리, 영양가 있는 식사, 머리를 식히고 땀을 닦아주는 보살핌…. 일찍이 당연하게 주어졌던 것들이 지금은 얼마나 간절한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바일이 자연스럽게 회복해주길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타낫세의 마음에 뭔가 불쾌한 게 걸렸다. 열과 결부된 추억 속에서 자신은 뭔가 빌었다. 무엇을… 무엇을?

번뜩임이 답을 데려온 순간,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그게 자신의 입술로부터 새어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온몸을 떨게 만들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결말을 비웃지 않을 수 있을까. 신은 이제야 이 처사에 동정을 베풀어줄 마음이 들었나보다.

병상에서 행한 기도가 마침내 이뤄졌던 거다.

바일의 고통을 자신이 신에게 요구했으니까.

 

3-10

정신을 차리자, 오두막은 어두워진 채였다.

얼마나 웃었는지, 아니면 어느새 잠들어버렸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무척 찝찝한 피로가 온몸에 들러붙어 있었고, 목은 바싹 말라 있었다.

타낫세는 통 속의 물을 떠서 넘겼다. 따뜻한 감촉이 몸에 감돌자, 겨우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처음 한 일은 바일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잠들어 있는 듯했지만, 호흡은 얕고 증세는 호전되지 않은 것 같았다. 반쯤 마른 천을 떼어내 다시 적셔서 얹어줄 때, 스친 이마에선 변함없이 열이 전해졌다. 이래서야 과즙이 많은 것을 먹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자신이 줄 수 있는 건 퍼석퍼석한 콩과 짠 고기 조각뿐이었다.

그래도 먹지 않으면 약해질 따름이다. 잠에서 깬 바일에게 콩을 으깨 물에 반죽한 것을 줬지만, 삼키지도 못하고 목이 멘다며 단번에 포기했다. 결국 물밖에 먹일 수 없었고, 도로 짚더미 위에 눕혔다.

수척해진 얼굴은 이전보다 그늘이 깊게 드리운 듯해서, 지켜보는 타낫세는 안절부절못하게 됐다.

어쩌면, 이 오두막 주변에 뭔가 열매 같은 게 열려있을지도 모른다. 민가가 있어서 식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싸한 예정 없이 일어서려던 타낫세였지만, 아래서 잡아당기는 감각에 움직임을 멈췄다. 바일의 손이 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싫어….”

  “왜 그래?”

자연스레 잡은 손가락은 차갑게 떨리고 있다.

  “추워?”

물어보자 잠시 뒤에야 고개를 끄덕인다. 성에서였더라면 따뜻한 물주머니라도 가져오게 할 텐데, 당연히 여기 있을 리 없고 불을 땔 도구도 없다. 타낫세가 가진 따뜻한 것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짚더미 속에 기어들어 껴안기라도 하듯이 다가갔다.

  “자, 이러고 있을 테니 푹 쉬어 둬.”

  “응….”

바일은 그리 대답하면서도 금방 잠들지 못하는 듯 뒤척이다가, 이내 가슴에 이마를 기댄 자세로 안정된 듯했다. 웅크린 등을 쓰다듬으며 지켜보니, 바일의 미세한 떨림도 차츰 가라앉았다.

  “잠들었어?”

확인하려고 꺼낸 타낫세의 질문에, 뜻밖에도 대답이 돌아왔다.

  “…있잖아, 타낫세.”

  “왜.”

  “타낫세는, 성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 물음은 타낫세로 하여금 간밤의 대화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혀끝으로 씁쓸함을 느끼며, 그는 대답을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그 말실수를 되돌릴 수 있을지 생각해내야 했다.

곧 타낫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째서?”

  “나는…, 그곳은,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까,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다. 바다로 가자.”

바다에 가고 싶어 하는 바일의 마음에 맞춘 대답. 그와 동시에 입에 올린 생각이 지나치리만치 마음에 들어, 타낫세는 내심 놀랐다. 그래, 이건 자신의 진심이기도 했다. 어젯밤에도 자신은 성이 그리워 흔들린 게 아니었다. 지금 갖고 싶은 건 충분한 식량과 잠자리지, 성이라는 장소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바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에 두고 가진 않는다.

그리 전하듯 다정하게 등을 토닥이자, 바일은 졸리기 시작했는지 사그라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그렇구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품 안의 온기를 느끼며 타낫세는 새삼 옛일을 회상했다.

안뜰에서 지금과는 달리 평화로이 잠들었던 바일, 옆에서 그 머리를 쓰다듬던 숙부. 이제는 계시지 않은, 숙부님.

그는 자신이 사라진 뒤를 걱정해서 바일을 맡겼을까. 그때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숙부님이 나타나 같은 부탁을 한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답은 찾지 못했다.

찾기 전에, 서서히 스며든 졸음에 빠져, 타낫세의 의식은 어둠에 잠겼다.

 

3-11

뭔가, 무척 싫은 꿈을 꾼 것 같다.

하지만 그 기억은 눈을 뜨는 순간 사방으로 흩어져, 어디에도 보이지 않게 됐다. 그저 축축하고 불쾌한 감각만이 아직까지 피부에 달라붙어 있는 듯해, 타낫세는 그것을 털어내듯이 몸을 떨며 아침의 낌새에 이끌려 짚더미에서 빠져나왔다.

  “으응….”

그에 반응했는지, 등 뒤에서 작은 신음이 터진다. 통을 든 타낫세가 일어나려는 바일에게 말을 건넸다.

  “새 물을 떠올 거다. 잠시 기다려.”

내친 김에 개울에서 세수도 하고, 근처에 열매가 나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올 셈이었다. 그러나 타낫세의 발걸음은 오두막 문을 열기도 전에 멈췄다. 등 뒤에서 일어나는 기척을 느꼈기 때문에.

  “…지…마.”

뒤돌아본 타낫세의 시야에, 일어나려는 바일의 모습이 들어왔다. 비틀거리는 몸이며 머리와 옷에 들러붙은 짚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천장에서 들어오는 빛이 비춰 알 수 있었다.

  “…지마.”

그대로 다가오려던 듯했으나, 두 걸음도 걷지 못하고 무릎이 무너진다. 마룻바닥에 천천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서야, 타낫세는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주박에서 풀려난 것처럼 통을 바닥에 내려두고 황급히 달려갔다. 이마에 댄 손바닥으로부터 느껴지는 건 어젯밤과 다를 바 없는 열기였다.

  “뭐하는 거야. 좀 더 자고 있어.”

  “괜찮아…. 갈래…, 갈래….”

  “어떻게 봐도 괜찮지 않아. 뭐가 그렇게….”

  “갈까…. 두고 갈까… 봐….”

매달리는 바일의 떨림은 추위 때문이었을까,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타낫세에게도 충분히 전해졌다. 오해를 풀기 위해 다정하게 타일렀다.

  “물만 길어올 거야. 떠나려는 게 아니다.”

  “……가지….”

  “괜찮아. 금방 돌아올게.”

겨우 진정된 바일을 다시 짚더미로 돌려보내고, 타낫세는 오두막 밖으로 나섰다. 거세진 햇살이 드리워, 발밑을 웅크리는 그림자는 어둡고 무거웠다.

이대로는, 안 된다.

갈수록 불길한 예감이 강해진다. 하룻밤이 지나도 열이 내릴 기미는 없다. 아무 것도 입에 넣지 않으면 회복될 리도 없이 약해지기만 할 테다.

빠른 걸음으로 개울가를 찾아 타낫세는 주변의 나무들을 둘러봤다. 그러나 그곳에는 푸르게 우거진 잎만 있었다.

과일 따위는 찾을 수 없다. 아네키우스는 그런 기적을 주지 않는다.

무언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건 네가 진정으로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지하신 신께서는 네 마음의 모든 걸 들여다보고 계신다.

아니라는 반박은 싫을 정도로 나약하게 울린다. 속삭이는 소리는 그치지 않고 말을 잇는다.

너는 생각하고 있어, 저건 비열한 도둑이라고. 네게 주어져야 마땅한 것을 옆에서 가로챘다고.

아니야.

너는 저게 방해되는 거야. 치우고 싶은 거야. 그러니까 이런 데서…

아니야!

타낫세는 머리를 흔들며 힐난하는 소리를 떨쳐낸다. 그리고 개울에 통을 힘껏 내려쳐 물을 퍼 올렸다.

안 돼, 이대로는 안 돼. 여기 있으면 안 된다.

한계였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은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밖에 방법이 없다. 약해진 사촌 동생을 구하려면 그것밖에.

오두막에 도착할 즈음에 타낫세는 완전히 결심을 굳혔다. 햇빛은 점점 밝아져, 그의 그림자를 땅에 짙게 새기고 있었다.

 

3-12

그림자는, 죄의 증거다.

달리면서, 타낫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일찍이 한 남자가 있었고, 그는 마를 이용했다. 그 악의가 형태를 갖춰, 신의 빛 아래 드러났다. 한 번 저지른 잘못은 돌이킬 수 없었고, 두 번 다시 떠나지 않는 얼룩으로 남아 사람을 따라다녔다.

땅을 박차고 나아가면 그림자도 똑같이 따라온다. 유일한 길동무다.

타낫세는 혼자였다. 혼자서 계속 달리고 있었다. 옆에 사촌 동생의 모습은 없다. 두고 온 거다, 그 오두막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움을 청하러 가겠다고 알려줬을 때, 바일은 멍하니 타낫세를 쳐다봤다. 잘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아침의 그 일도 있어, 타낫세는 잘 이해하도록 설명했다.

이 상태로 둘이서 나아가는 건 무리다. 그러니까, 도움을 구하러 간다고.

그렇다고 해도 길을 지나는 상인들이나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정체를 알릴 생각은 아니었다. 그들은 성에서 보는 사람들과 어딘가 달라 무서웠고, 어떤 태도로 나올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둘이서 걷고 있을 때도 불편한 눈빛으로 다가올 때가 있었다.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처음부터 타낫세가 생각하던 것이 있었다. 걸어온 결과, 영지의 경계가 바로 근처였다. 서둘러 가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경계에 닿을 터였다. 착할지 나쁠지 모르는 행인이나 농민에게 거는 것보단, 거기 있을 경비 위사들에게 기대는 쪽이 확실했다.

그래서, 타낫세는 달리고 있다. 혼자서, 최대한 빠르게.

  “싫…, 싫어….”

바일은 역시나 내키지 않아했다. 하지만 남겨두는 수밖에 없었다. 업고 갈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눈에 띄고, 자신의 체력을 생각해보건대 함께 쓰러질 뿐이라고, 타낫세는 판단했다. 이 오두막에 도착할 때도 위험했었다.

  “어…, 무서워…. 무서워….”

매달리며 떠는 바일을 달래고 타일렀다. 밤이 될 때까지 돌아올게. 걱정할 것 없어. 자고 있으면 금방 끝나.

그래도 불안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재운 뒤 짚더미를 덮어주고, 바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근처에 통을 놓은 뒤 확인하니 아직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던 타낫세는 자신의 옷 속에서 차가운 감촉을 알아챘다. 식량과 함께 훔쳤던 주머니칼은 고기를 썰기 위해, 그리고 만약의 호신용으로 착용하고 있었다.

  “봐, 이걸 여기 둘 테니까. 괜찮아.”

바일의 머리 아래 짚더미로 주머니칼을 쑤셔 넣는다. 이렇게 하면 나쁜 꿈을 꾸지 않는다는, 오래된 주술이라고 누군가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혹시 모를 때 몸을 보호해주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하기야 지금의 바일에게 저항할 힘은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진다면 된다.

안심시키듯 이마를 쓰다듬어주자 바일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이쪽을 돌아볼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졸음이 쏟아졌을 것이다. 지금이 기회라고, 슬며시 곁에서 떠나 출구로 향했다. 문을 닫으며 움직임을 살폈지만, 일어날 기미 없이 조용한 채였다.

그리고, 타낫세는 달리고 있다.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로가 온몸에 몰려들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 무게는 커지는 것 같다. 스쳐가야 할 경치는 애가 탈 정도로 느려, 제자리걸음을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차츰 나아가고 있다.

성에서는 무용 수업도 있었다. 받으면서도 내심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막노동이 필요하다면 위사를 쓰면 된다. 그 위사들조차 힘을 쓸 데가 없어 일일 경비나 순찰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심정으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게을리 하기 일쑤였던 단련을, 지금 이때만큼은 제대로 받아 둘걸, 후회하고 있었다.

숨이 차고, 귓속은 아플 정도로 울리고, 메스꺼움에 목이 메어 다리에 힘이 들지 않는다. 멈출 순 없다. 멈추면 두 번 다시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멈추면 마음이 부러진다. 멈추면… 그림자에 따라잡힌다.

돌아가겠다고 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 반드시.

보살펴달라고 부탁받았다.

동생 같은 녀석이니까.

그런데, 그게 너의 진심인가?

쫓아와 현혹하는 질문을 떨쳐내듯 타낫세는 계속 달린다.

이윽고 그 방향의 끝에 우뚝 솟은 돌담이 나타났다.

 

3-13 [각주:1]

정신이 들었을 때는, 넓은 등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기분 좋은 그 조치에 몸을 맡긴 채, 타낫세는 막 의식을 되찾은 머리를 조금씩 움직였다.

주위에는 밤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자신을 짊어진 남자와, 양옆의 두 사람이 달리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하고 타낫세는 생각했고, 그제야 의식이 또렷해졌다.

덜컥 몸을 움직이는 게 전해졌는지, 자신을 업은 사람의 머리가 슬쩍 이쪽을 향했다.

  “깨어나셨습니까, 전하. 슬슬 말씀하셨던 장소라고 생각됩니다만….”

그 공손한 말투에 이끌려, 타낫세의 머릿속에서 몇 개의 기억이 왕래한다.

번화가에 도착해, 문지기에게 신분을 고했다. 그들은 당황하면서도 경비 동료를 불러 모았다. 그 중 몇몇이 나와서, 타낫세의 증언을 확인하기 위해 그 장소에 가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까지 자세히 알려졌을지는 몰라도, 두 명의 아이를 확보하라는 통지가 성에서 내려왔을 것이다. 남루한 행색의 아이지만 말한 내용을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세 사람도 확인을 위해 보내졌을 것이다. 이마의 표식만 확인하면 진위 여부를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쳐도, 라고 타낫세는 생각했다. 자신을 짊어지고서도 위사들의 걸음이 빠르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번화가에 도착한 건 낮이어도 꽤 늦은 때였을 거다. 자신의 발에 이 힘이 있었더라면 바일은 진작 극진한 간호를 받았을 텐데.

입술을 깨문 타낫세의 눈에 낯익은 광경이 보였다. 타낫세가 여기라고 위사들에게 알리자, 오두막 앞에서 땅으로 내려 보내져 그들보다 먼저 들어가게 됐다.

바일은 겁먹고 있다. 갑자기 남자들이 쳐들어오면 이상한 착각을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먼저 얼굴을 보여 안심시켜야 한다.

기억이 잘 나진 않는데, 자신이 많은 말을 한 것 같았다. 눈치 빠른 위사들이 복숭아와 포도를 건네줬다. 이걸로 바일을 훨씬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타낫세는 상쾌한 기분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상쾌한 기분은 맥없이 사라졌다.

처음 느껴진 건 냄새였다. 이상한, 그러나 확실히 어디선가 맡아봤던 냄새…. 문득 타낫세의 뇌리에 유리리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발에 걸려 넘어지고 코를 세게 부딪쳤을 때의 일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양의 코피가 터져 입안에 풍기는 비린내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그것과 같은 감각이다.

무심결에 추억을 돌이켜보던 타낫세는, 조금 늦게 그 의미를 눈치 채고, 몸이 얼어붙었다. 피. 누가. 누구의.

해질녘의 약해진 빛이 비추는 흙바닥에 붉은색이 번져 있다. 나무통이 있다. 그 가장자리에 같은 색의 무늬가 널렸다. 짚더미는 무너진 채다. 기척이 없다. 인기척이.

두 입술을 떼어도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눈앞이 흔들리고, 발밑이 휘청거린다. 여기서 당장 나가고 싶다. 마음은 그렇게 아우성치는데, 어째선지 자신은 한 걸음씩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간다. 땅에 묻은 흔적. 질질 끌린 듯. 안으로. 안으로.

가장 후미진 곳에 쌓인 짚더미 위에서, 그것이 설핏 보였다. 조그마한 가죽 신발. 본 적이 있다. 구두뿐이라면 눈에 띄지 않을 거라며 바꾸지 않았다. 더 나아가면 그 끝이 보인다. 이어진 생물의 발. 그리고 그것은 허리로 이어지고, 몸통으로 이어져….

  “…바일.”

겨우 목소리가 나왔다. 불린 이름에 반응은 없었다. 땅에 그어진 붉은색 줄기는 엎드린 얼굴로 이어졌고, 냄새는 한층 더 선명하게 코를 자극했다.

넘어졌다. 코를 다쳤다. 피. 얼빠진 얘기. 그때도 웃음거리가 됐다. 그렇다. 그렇게 정해져 있다.

갑작스레 괜한 기분이 가슴 속에 부풀었다. 이럴 때 쓸데없는 짓을. 정말이지, 이 녀석은 항상 엉뚱한 짓을 한다. 휘말리는 쪽의 마음도 모르고. 한 번 일러둬야 할 것이다. 그게 어른의 의무다.

타낫세는 그렇게 결심하며, 돌아보게 하려고 바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물론,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 건 알고 있었다. 바보 같은 몽상은 드러난 얼굴을 보자마자 부수어졌다. 정확히는, 그 이마를.

아직도 매달려있는 피부가, 함께 뜯겨나간 살점의 무게로 흔들렸다. 표식을 노리듯 벌어진 상처. 그 틈으로 피에 더러워진 채 들여다보이는 살의 표면에서.

타낫세는 녹색의 옅은 빛을 분명히 봤다.

순간, 반사적으로 움직인 그의 손이 벗겨진 피부를 제자리로 돌리듯 덮고 있었다. 전해져 오는 미지근한 감촉. 열. 살아있는 기색.

바일은 아직 죽음으로 끌려가진 않았다. 얼굴은 피에 젖고 의식은 없지만, 부둥켜안은 몸에선 맥이 뛰고 코와 입에선 숨이 새어나오고 있다.

…누가…누가 이런….

밖에 있는 위사들을 부르는 것도 잊고, 주저앉은 채로 타낫세는 자신을 향해 그렇게 묻는다. 벌써 눈치 챈 주제에, 받아들일 수 없는 대답을 찾아서.

타낫세는 이미 알아챘다.

피와 기름으로 더러워진 주머니칼이 바로 거기 떨어져 있다는 것을. 나동그라진 바일의 붉게 물든 손가락, 그 손톱 틈새까지 피와 살점이 들어가 있는 것을.

 

3-14

발을 들인 위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도로변까지 끌려나온 걸 타낫세는 기억하고 있다. 깨끗하고 차분한 방으로 인도돼, 달려온 위사장이나 자신의 시종감과 이야기를 나눈 것도. 다만 그게 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러서였는지, 자신이 그동안 뭘 하고 지냈는지 세세한 기억은 전혀 확실치 않았다.

기억과 시간이 이어지기 시작한 건, 그녀가 방에 찾아온 뒤부터였다.

  “타낫세….”

이름을 불리며 강하게 끌어안기고 나서야 비로소, 타낫세는 그것이 어머니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 순간, 돌연 찾아온 뜻밖의 상황에,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 버린다. 그 긴장이 리리아노에게도 전해진 듯, 몸을 떼어낸 그녀는 애매모호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아…, 갑자기 미안했다. 몸은 어떤가?”

염려하는 말은 어색해, 타낫세는 문득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러버린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저…, 딱히, 별로….”

얼버무리듯 우물쭈물 대답하는 게 고작이라서, 어머니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고개를 숙인 머리 위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가. 자네 몸만 괜찮다면, 내일이라도 성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문제없겠나?”

딱히, 라고 대답하려다 새삼 일깨워진다. 어머니가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것은,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대상을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던 자신을.  

고개를 번쩍 들자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눈에 담긴 것은 그녀의 이마에서 번쩍이는 빛. 그 당시의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것만 같아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이름이 순간, 툭, 새어나왔다.

  “바일은, 그….”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몇 차례 식사를 한 것 같긴 했다. 자신이 듣지 못해서였을까, 사용인들은 아무 말도 전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괜찮다. 괜찮을 것이다.

타낫세의 명확치 못한 물음에 리리아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함께 데리고 돌아간다. 약해지긴 했지만, 누운 채로 옮겨지는 정도라면 가능할 테니까.”

그녀의 대답은, 병세에 위급한 데가 없다는 것을 뜻해 타낫세는 안도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술렁이는 것을 견뎌냈다. 붉게 물든 손톱과 손가락이, 살갗 뒤에서 들여다보이는 빛이, 눈꺼풀 뒤로 어른거렸다.

  “어쩔까. 자네는, 같은 차에 타고 싶은가?”

그래서 묻는 순간 거부해버렸다.

  “아뇨!”

우스울 정도로 높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며 내지른 본인의 귀마저 찔렀다. 리리아노의 눈썹이 찌푸려지는 것을 알아차린 타낫세는 뺨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매정한 녀석으로 비춰지는 게 틀림없었다.

  “타낫세. 미리 말해두지만, 이번 일로 걱정할 것은 없다. 자네는 충분히 했어.”

타낫세의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부의 반향이 사라진 뒤, 리리아노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내용은 그의 기억과 다른 것이었다.

  “너무한 일이구나. 자네가 도움을 청하러 나간 틈에, 유괴범이 쫓아와 바일을 해치려 했다니. 불행한 흐름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군.”

경악해 다시금 들여다 본 리리아노의 눈동자에는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래서 타낫세도 깨달았다. 그렇게 되는 거라고. 

유괴범이 상처만 입힌 채 방치할 리도 없고, 의사가 보면 상처의 부자연스러움이 자명할 것이다. 리리아노가 그들의 보고를 받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 범인을 인정할 수 없다.

그녀는 왕이다.

새삼스럽게 들이밀어진 사실에, 타낫세 안에서 꿈틀대던 불온한 예감은 싸늘하게 굳어갔다. 여기 있는 건 결코 자신을 배려해서만이 아니다. 이번 일에 대해 발설하지 말라고 못 박으러 온 것이다. 왕 후보가 자신의 표식을 떼어내려고 하는 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그렇지만, 그러면, 그러면 바일은.

북받친 말들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입에서 흘러나오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척 약해진 바일을 내버려두고, 혼자만 달려간 자신이 무슨 말을.

그래, 너는 저게 방해됐던 거야.

다시 속삭이는 그 목소리를 향한 반론은 나약하게 사라질 것 같았다.

 

3-15

성까지 타고 갈 차는 바일과도 어머니와도 다른 것으로 골랐다. 과연 왕의 행차는 경계도 삼엄해, 별일 없이 성으로 가는 여정은 끝났다.

도중에, 이따금 바일의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건 대개 록차에 출입할 때로, 축 늘어진 채 위사에게 안겨있을 뿐이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것 같은 상황에 가슴이 아팠지만, 동시에 타낫세는 안심하기도 했다. 마주하게 되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피아칸트에 들어서, 록차의 창문으로 호수 너머에 우뚝 솟은 성을 본 순간, 타낫세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겠지만, 잠시 동안 그곳은 낯선 곳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성은 어딘가 데면데면한 표정으로 타낫세를 맞았다. 만나는 사람들은 타낫세에 대해 동정과 배려를 보이면서도, 왠지 살피는 듯한 눈빛으로 대해왔다. 처음엔 그들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당황하며 자신의 착각일 뿐이라 치부했던 타낫세였지만, 그 이유를 알았을 땐 분노와 실망으로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그들은 의심하고 있었다. 이 일에 자신이 관계가 있는 건 아닌가. 피해자가 아니라, 공범자로서.

시종감은, 바일을 데리고 나와 그대로 종적을 감춘 것 같았다. 그의 배신은 이유를 아직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소문은 여러 가지가 퍼지고 있었다. 거기 섞여든 게, 타낫세의 동행을 의심하는 목소리였다.

확실히 자신과 바일이 함께 있었던 경위는 거짓말 같다. 우연이란 말을 들어도 믿을 수 없다는 마음은 안다. 그렇다고 해서, 바일이 그런 일을 당하게 하려고 했었다는 식으로 여겨지다니.

자연스레 타낫세는 바일을 찾아가기 어려워졌다. 방에 틀어박히기 일쑤였고, 아직 몸이 안정되지 않았다며 공식적인 자리에 출석하는 것을 피하게 됐다. 그것이 괜한 억측을 불러일으킨다고 해도, 의심의 눈초리 앞에서 태연할 자신은 없었다.

바일의 상태는 하인의 전언과, 벽을 통해서 전해지는 옆방의 상태 따위로 짐작해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목숨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마의 상처를 얕볼 수 없는 듯했다.

발코니에 나가 바깥 공기를 마시고 있을 때, 옆방의 말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귀를 곤두세워, 그것이 흐느끼는 어린 시종을 달래는 이야기라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더는 못 버티겠어요. 방을, 바꿔주세요….”

그녀는 호소했다. 더 이상 바일의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다고. 이제 한계라고.

치료에는, 어떻게 해도 통증이 뒤따른다. 그 상태로는 덮인 것을 벗겨내고 상처를 씻고 약을 바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괴로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아프다고 울어주면 좋겠는데, 싫어서 날뛰면 좋겠는데…바일 님은 가만히 참고 계시고, 비명도 지르지 않고… 그게 오히려 애처로워서, 저, 저는…”

그녀의 띄엄띄엄한 오열을 듣는 타낫세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최근 바일의 방 담당이 연달아 그만두고 있었다. 원인이 시종감의 여파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날이 예리하다고는 할 수 없는 그 주머니칼로 수없이 주저하다 생긴 상처. 타낫세는 으스스한 마음으로 그때의 광경을 몇 번이고 회상했다. 살 안에 비친 표식의 빛은, 도리어 불길하기까지 했다. 결코 잃을 수는 없다고 보여주듯이.

그리고 다시 생각할 때마다 타낫세는 알 수 없게 된다. 과연 이 기억은 진짜일까?

그때는 자신과 둘뿐이었다. 바일은 무척 약해져 있었다. 자신의 품에 그 주머니칼이 있었다. 자신은, 바일을. 그 이마의 표식을. 사실은, 자신이.

그런 짓은 하지 않았어, 이성이 외친다. 하지만 악몽 속에서 바일은 겁먹은 얼굴로 자신을 보고, 가위에 눌려 벌떡 일어난 손 안에는 차가운 칼자루의 감촉이 남아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걸 타낫세는 알았다.

이 싸늘한 의혹이 사사건건 자신을 괴롭힐 것임을.

 

그 해에 잃어버린 많은 것들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았고,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때가 기점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왕의 동생의 행방불명, 총애자의 유괴사건, 그리고 국왕의 디톤 행차를 마친 후 왕성은 완전히 변하고 말았다고.

훗날 5대 국왕의 역사에 이렇게 쓰인다.

―여기서 안정의 시기는 끝나고, 차대의 왕을 향한 준비의 때가 찾아온 것이다.

 

 

 

  1. 유혈 묘사가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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