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등장인물은 주로 란테 조. 주역은 타낫세. 5화 완결."
*게임 본편과 연결되는 스포일러 有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1-1.

달려든다고 생각하자마자, 작은 손이 자신의 손을 꽉 쥐었다. 늘 있는 일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안다. 슬쩍 한숨을 내뱉으며 타낫세는 책을 덮었다. 좀 더 읽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돌아와 주십시오.”

시종감의 배웅을 받으며 방을 나섰다. 날씨가 맑으므로 향하는 곳은 정문에 가까운 안뜰이다.

  오늘은 뭐했어?”

  , 지도를 봤어. 북쪽은 중요하고, 남쪽은 중요하지만 성가시고, 동쪽에는 아무 것도 없어.”

  그런가. 나는 시를 배웠다.”

  ?”

  그래. 언어로써 모든 것을 표현하는 기술이지. 심도가 있어.”

  흐음.”

세 살 터울의 사촌 동생은 관심 없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는 휙휙 손을 잡아끌며 복도를 걸어간다. 얼른 가고 싶은 거겠지.

서둘러 가본들 그가 기다리는 것은 찾을 수 없을 텐데도. 돌아온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란테 영지에서 여기까지는 아무리 서둘러도 한 주의 반이 걸리는 거리다.

그래도 이 안뜰에 들르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됐고, 이런 걸로 바일의 기분이 나아진다면 상관없겠지 싶어, 타낫세는 포기한 지도 오래였다.

  이런, 전하들 아니십니까. 안녕하신지요.”

지나가는 귀족들은 이쪽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인다. 타낫세는 인사에 섞인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싫었다. 그들은 꼭, 제가 바일과 함께 있는 것을 비난하는 듯싶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곤 했다.

딱히 저라고 원해서 옆에 있는 게 아니다. 바일이 멋대로 다가온 거다. 일단, 이 성 안에 또래라고는 서로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발설되지 않은 말에 속으로 반론을 계속하며 사촌 동생에게 끌려 다니던 그는,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 귓가에 희미한 소리가 닿는다. 동물의 울음소리다.

이미 목적지인 안뜰은 다음 모퉁이만 돌면 도착할 만큼 가깝다. 그곳은 성 밖에서 온 록차가 잠시 머무르는 장소로, 다가오는 토록의 기척은 누군가의 방문을 뜻했다.

바일도 알아챘는지 맞잡은 손은 기대에 차 세게 잡힌다. 하지만 그 기대는 곧 깨질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삼촌은 아직 란테 영지에 있을 터다.

그 사고 이후, 이르아노는 왕성과 란테 영지를 몇 달 주기로 왕래하게 돼 있었다. 왕의 동생이자 차기 왕의 아버지인 그는 동시에 란테의 당주이기도 했다. 자신의 영지에 정기적으로 귀환해야 함이 도리였지만, 그런 어른의 사정이 아이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꽤 침착하다.

눈앞에서 비틀비틀 오르락내리락하는 정수리를 바라보며 타낫세는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의 이 녀석은 기다릴 수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유모와 시종들이 얼마나 애를 먹었을까. 그로부터 4, 나이든 유모는 차츰 주름이 깊어졌고, 아이 태가 남아있던 시종은 완전히 어른이 되었다. 두 사람에 대해 바일이 따르는 것으로 말하자면, 대화 중에 유모미라네라는 단어가 섞이지 않은 날이 없었다.

  .”

갑작스레 작은 탄성과 함께 머리의 흔들림이 멈췄다. 타낫세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다시금 숙였던 고개를 든다. 안뜰은 바로 앞이라, 멈춰선 록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색, 모양, 그리고 차체에 걸려있는 문장.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식는 것만 같았다.

  , 돌아간다!”

거의 반사적으로, 타낫세는 왔던 길을 돌아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강한 힘에 붙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자신을 붙잡는 것이 잡고 있던 손이 아니라 목덜미를 붙드는 손가락임을 안 순간, 그는 오늘의 평온을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마중, 수고했어.”

돌아본 곳에는 또 다른 사촌 형제의 무서운 미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1-2

  그러니까 나랑 타낫세는 사촌이잖아.”

  .”

  타낫세와 유리리에도 사촌이고.”

  그렇지.”

  그러면 나랑 유리리에도 사촌이겠네.”

  아니야.”

  ?”

  나의 아버님과 저것의 아버님은 형제고, 저것의 어머님과 바일의 아버님도 형제고, 그렇지만 나의 부모님과 바일의 부모님은 형제가 아니니까.”

  , 으응.”

그다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인지 유리리에의 대답에 바일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 유리리에랑 나는 뭐야?”

  타인. 지금으로선.”

  지금은?”

  예를 들어서, 결혼하거나 그러면 부부니까. 타인이 아니야.”

  쓸데없는 이야기는 적당히 관두는 게 어때. 누가 사촌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일이다.”

옆에서 얌전히 흘려듣던 타낫세도 거기선 결국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 것을 바일에게 불어넣고 싶지 않았다. 유리리에는 해가 지면 성을 떠나니까 괜찮겠지만, 그 뒤에 끈질긴 질문 공세에 시달리는 것은 자신이다.

바일은 이것저것 물어보는 버릇이 있다. 요즘 들어 더 심해졌다. 궁금한 게 몹시 많을 나이겠지만, 대답하기 곤란한 것도 자꾸만 물어본다.

예컨대, 왜 타낫세한텐 표식이 없어, 같은.

  헤에, 남의 이야기를 쓸데없다고 하다니 타낫세도 꽤 훌륭해진 모양이네.”

타낫세의 회상은 부드러운, 그러나 차가운 목소리에 의해 끊겼다. 방해할 어휘를 잘못 골랐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틀림없이 재밌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겠지?”

유리리에는 웃는 얼굴을 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사냥감을 보는 맹금류의 눈이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응징을 해줄지 여러 가지 계획이 이뤄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 그게, 글쎄, 시 이야기라든가.”

  그런 건 교사를 상대로 해. 적어도 이 자리에선 흥미롭지 않은데.”

  , 일주일 전의 거센 바람이라든가.”

  뭔가 유쾌한 일이 있었어?”

  그런 건 딱히그냥 대단했다고.”

  흐응.”

이젠 무엇을 제안하든 소용없다. 타낫세는 경험으로부터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해가 질 때까지 자신은 유리리에에게 여러 가지로 당할 것이다.

각오를 다지는 순간, 구원의 손길이 타낫세의 소매를 붙잡았다.

  저기, 결혼 말이야.”

작은 사촌 동생은 형제들의 조용한 다툼에 개의치 않고, 좀 전의 화제를 잇는다. 이렇게 되면 타낫세도 거기 끼어들 수밖에 없다. 말을 꺼낸 사촌 동생에게 어울려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유리리에로부터 달아났다.

  있지, 결혼은 중요한 거라고 유모가 말했어. 아주 중요한 일이래.”

  그래.”

  계속 같이 있고 싶은 사람하고 한대.”

  , 그렇구나.”

  그래서 나 정했어. 결혼할 사람.”

신난 듯 말하는 바일은 아마 누군지 물어봐줬으면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타낫세는 왠지 답을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망설이는 그를 대신해 유리리에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그래, 누구?”

  아빠!”

, 하고 유리리에가 뿜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리에는 흘끔흘끔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웃음을 참고 있다. 아무래도 네가 가르쳐주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이 이상 반항했다간 지독하게 당할 것이 뻔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안 돼. 결혼할 수 없어.”

  ?”

  남이 아니니까. 결혼은 타인과 한다.”

  그럼 유모하고 미라네하고 할래.”

  둘은 안 돼.”

  ?”

  결혼은 한 사람하고밖에 못한다. 게다가 그 둘은 나이 차가 너무 커.”

타이르는 타낫세의 뇌리에 좀 전에 목격해버린 광경이 스쳐지나갔다. 안뜰에서 바일의 시종이 보이던 수줍은 미소. 그것은 함께 있던 사용인 남성을 향하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관계는 명확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바일과 그녀가 결혼할 수는 없다. 그 정도의 분별은 타낫세도 하고 있었다.

연거푸 주장을 반박당한 바일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좁혀진 미간을 보건대 뭔가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사촌 동생은 사촌 형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결혼은 남들하고밖에 할 수 없는 거야?”

  그래.”

  사촌끼리도 못해?”

  사촌지간은가능하다.”

타낫세는 대답하면서도 다음의 전개를 예측할 수밖에 없었다. 유리리에의 눈길이 따갑다. 그리고 예상대로의 반응이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럼 타낫세랑 할래!”

결국 견디지 못한 유리리에가 낄낄거리며 웃고, 타낫세는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입을 다문다. 바일은 그런 둘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봤다.

  역시 안 되는 거야?”

  할 수 있어. 그걸 원한다면 말이야.”

유리리에는 지금까지 손 놓고 보고만 있었으면서 이런 순간에는 지체 없이 대답해온다. 슬쩍 화제를 바꾸려던 타낫세였지만 완전히 늦어버렸다. 이제는 참견할 기운도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짓을 하면 이게 왕배야. 그건 좀 너무한 것 같은데.”

  잠깐, 그건 무슨 뜻

  왕배?”

  그래. 바일은 차기 왕이지?”

  . , .”

  그 왕과 결혼한 사람은 왕배가 되는 거야. 이 나라에 있어 중요한 사람 말이야.”

타낫세의 가냘픈 항의는 완전히 묵살됐고, 유리리에는 바일에게 괜한 것을 불어넣고 있다. 아직까지는 제대로 된 지식이지만, 곧 변변찮은 것을 채우기 위한 준비임을 타낫세는 더 의심하지도 않았다.

유리리에는요아마키스는, 다음 왕배의 자리도 노리고 있다. 이것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거의 기정사실로 알려져 경계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돈, 정확히는 전() 사돈의 입장을 이용해 성에 놀러오는 것은 필시 불편할 거라고 타낫세는 짐작하지만, 정작 유리리에는 태연한 얼굴을 하고 이렇게 드나드는 것이다. 뻔뻔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총애자의 출현이 확인된 그 순간부터 왕배 싸움은 시작됐다. 자신이 그 싸움에 던져졌다는 걸 깨달은 건 언제였을까. 타낫세는 슬그머니 한숨을 내쉬었다. 바일과 노는 것은 싫지 않지만, 그때마다 따라다니는 귀족들의 시선은 견딜 수 없다. 그들은 입을 다문 채 웅변한다. 너도 왕배를 노리는 거지, 본성(이름)처럼 너 역시 요아마키스니까, 라고.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유리리에처럼 잘 할 수는 없지만 무시하면 그만이다.

문제는바일이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 금방 일어날 일이었다.

다시 한 번 짧지만 깊은 타낫세의 한숨이 쏟아진다.

그렇게 되면 바일은 오늘의 이 허무맹랑한 대화를 어떻게 떠올릴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별안간 등에 무게가 실려 타낫세는 또 생각의 구렁에서 빠져나왔다. 새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있지, 이제 탐험하러 돌아가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매달린 바일은 이쪽의 몸을 흔들고 있다. 슬슬 휴식도 지겨워진 것 같다.

  그래, 돌아갈까.”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느긋한 편이 맞는 성미지만, 지금 이것은 이야기를 중단할 수 있는 기회다. 타낫세는 얼른 찬동했지만 문득 옆에 앉은 사촌 형의 얼굴을 보고 후회했다.

그의 눈은 아까 들은 실언을 잊지 않는다고 당당히 말해왔으니까.

 

1-3

까진 팔꿈치에 연고를 바르자 금방 스며들었다. 별로 혼나지 않은 것은 저 스스로 나서서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걸 시종감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맞는 얘기지만, 그래도 꼴사나운 건 틀림없었다. 나무타기를 실패해 가지에서 떨어졌다니.

그 이후로 유리리에는 실컷 멋대로 굴었다. 물가에서 떠밀지를 않나, 등 뒤에서 나뭇가지로 찌르며 몰아대지를 않나, 끝내는 그 나무타기였다.

마침 2층의 발코니에 가지를 뻗은 나무를 발견한 유리리에가 거길 통해 성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최악의 경우로, 바일이 솔깃해하게 된 바람에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말을 꺼낸 유리리에는 무난히 성공, 그 뒤를 따라 바일도 아슬아슬하게 도착, 그리고 저만이 실수했다. 발코니 근처까지는 겨우 기어올랐지만, 뛰어야 하는 단계에 이르러 나뭇가지에 옷이 걸리고 말았다. 지상에 떨어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행운이었다.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타낫세는 따끔거리는 상처를 감싸듯이 침대에 눕는다. 내일은 평온무사한 하루이길 바라면서.

그러나 그에게는 편안한 수면조차 얼른 주어지지 않았다.

침대 너머 벽에서 똑똑, 하고 언제나의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뒤이어 흐릿한 목소리도 들려온다.

타낫세는 별 수 없이 일어나 벽의 한 구석에 손을 댔다. 그리고 벽돌 하나를 떼어내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 돌은 다른 것과 달리 얄팍해 아이의 힘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무게였다.

  타낫세, 괜찮아?”

돌을 빼 생긴 구멍에서 목소리가 넘어왔다. 팔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틈새에 타낫세는 입을 갖다 댔다.

  별 것 아니다. 까졌을 뿐이야.”

  아파?”

  아프긴 하지만 곧 나을 거다. 걱정할 정도는 아냐.”

묻는 것은 바일의 목소리다. 그 역시 침대를 덮는 장막 속에서 몰래 돌을 빼고 이 장치에 입을 대고 있을 터였다.

서로의 방을 잇는 이 구멍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원래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른다. 여기가 요새였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처럼 방끼리 전령을 주고받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고, 무언가 통과시키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됐든, 이를 발견한 두 사람은 침대로 들어간 뒤에도 몰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됐다.

  그치만 깜짝 놀랐어. 타낫세 둔해 빠졌고.”

  미안하군.”

타낫세는 울컥해서 대꾸했다. 고양이도 아닌데 저렇게 깡충깡충 올라가는 쪽이 이상한 것이다.

  이거, 이거. 병문안 선물.”

언짢아하는 목소리가 전해졌는지 바일은 구멍으로부터 팔을 내밀었다. 이쪽에서도 팔을 넣고 받아들자 달콤한 냄새가 퍼져 선물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냥 뒀어. 줄게.”

바일은 득의양양하게 말하지만, 이건 저녁식사에 나왔던 살구다. 자신은 이미 먹었다.

  , 고맙다.”

그래도 마음의 문제니까, 일단은 감사 인사를 하고 받기로 했다. 먹고 싶은 걸 참고 몰래 챙겨뒀던 거겠지. 침대로 가져올 때 움켜쥐고 있었는지 묘하게 따뜻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다. 칼도 수중에 없어서 껍질을 애써 손으로 까고 있는데, 다시 바일이 말을 걸어왔다.

  있잖아, 알려줘.”

  뭐냐.”

  타낫세는, 왕배가 싫어?”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거지.”

  그야 싫은 얼굴을 하고 있었어. 낮에.”

나는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나.

저도 모르게 타낫세의 입에선 큰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차, 싶어도 이미 늦었다.

  그렇지 않아. 딱히 왕배가 어떻다는 게 아니다.”

황급하게 이은 말이 바일의 귀에는 그럴듯하게 닿았을까. 두꺼운 벽을 사이에 두고서는 안색을 똑바로 살필 수도 없다.

  다만 너는 경솔하게 그런 말을 꺼낼 입장이 아니란 거다. 게다가 꽤 먼 훗날의 이야기고.”

그 말은 절반만 사실이었다. 반은 거짓말이다. 자신은 왕배의 일을 신경쓰고 있다.

도망쳤다는 말을 들었다.

네 아버지는 결국 왕배의 그릇이 아니었다, 그래서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 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라고 대꾸하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이유가 있어서 외출한 것뿐이고, 조만간 다시 돌아와 함께 성에서 살 것이라고.

왕배라는 입장과 절연의 의미를 알게 된 지금으로선 그런 반격을 할 수 없다.

그 뒤로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성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요아마키스 영지에 틀어박혀 사교장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놈들이 지껄이는 걸 인정하는 건 억울하지만 알아버렸다.

그는 도망친 거다. 이 성으로부터, 왕의 무거운 관을 함께 받쳐줄 책임으로부터. 그리고표식 없는 아이로부터.

왕인 어머니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왕배가 싫은 게 아니면

  , . 뭐라고?”

그런 것을 생각하는 사이에 바일이 말을 걸었던 것 같다. 허둥대느라 건성으로 대답했더니 왠지 벽 너머의 사촌 동생은 말끝을 흐린다.

  으응. 아무 것도 아냐. 이제 잘래. 내일 봐.”

  내일 봐.”

인사와 함께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타낫세 또한 장치를 원상태로 되돌리고, 결국 먹지 못한 살구를 협탁에 두고서야 비로소 누울 수 있었다.

왠지 목이 메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피로에서 비롯된 졸음이 모든 것을 쓸어낸다.

얼굴 바로 옆에 놓인 살구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만이 계속해서 코에 남았다.

 

1-4

오늘의 바일은 어딘가 다르다.

뭐가 다르냐면, 신이 나 까불거리는 정도가 다르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마주하니 그 소란스러움에 다소 진저리가 난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있지, 아직? ?”

오전 수업도 일시 중지됐다. 도착은 어김없이 오후가 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 상태로는 수업이 될 리 없기 때문이다. 이쪽은 단순히 말려든 것뿐이지만.

  떠든다고 토록의 발이 빨라지는 게 아니다. , 난간에 올라가지 마라, 위험하다!”

타낫세의 외침에 위사가 급히 달려와 발코니 난간에 기어오르려는 바일을 붙잡았다. 안도의 숨을 내쉬려니 시종 미라네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바일 님, 간식을 가져왔어요. , 자리에 앉아주세요.”

그녀가 재촉하자 끈질기게 난간에 매달리던 바일은 금세 얌전히 탁자로 돌아왔다. 과자에 홀린 것도 있겠지만, 바일은 그녀와 유모가 하는 말은 순순히 들었다.

  제대로 꿀 잔뜩 뿌렸어?”

  , 물론이죠. 바일 전하의 분부대로.”

키득키득 웃으며 미라네는 바일의 목에 턱받침을 매주었다. 시종 겸 놀이 상대인 그녀의 바일을 다루는 솜씨는 훌륭하다고, 타낫세는 생각했다. 또 다른 교육 담당인 유모도 나름대로의 훌륭함이 있지만, 오늘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방에서 쉬고 있다. 유모 대신에 자신이 감시 역할을 맡아 이 다리가 보이는 발코니에 파견된 거다.

내어진 차를 입에 대며 타낫세는 눈앞의 사촌 동생을 쳐다봤다. 일단 자리에 앉아는 있지만 한 입 먹고는 고개를 돌리고, 한 입 먹고 벌떡 일어나고 싶은 듯 다리를 향해 시선을 보낸다. 너무 안절부절못한다.

  도착하면 위사들이 알려줄 거다. 초조하게 굴지 말고 먹어라.”

주의를 주자 바일은 볼을 부풀렸다.

  정말, 폐하 흉내 내서 야단치지 마.”

  , 딱히 나는 어머니를 따라한 게 아니다!”

뜻밖의 반격을 받아 기가 꺾인 타낫세에게 거듭 타격이 들어왔다.

  따라했잖아. ‘꼭 닮으신 게 그야말로 폐하의 아이다라고 말하던걸.”

바일에게는 전혀 악의가 없다. 하지만 바일과 달리 타낫세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말이 떠도는 장면까지 상상이 됐다. 귀족 중 누군가가 낄낄대며 내뱉은 말일 게 틀림없었다.

  그런가.”

굳은 입술로 겨우 그런 대답을 하니 바일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뭔가 물어보려고 한다. 그때였다.

  왔습니다. 란테의 록차입니다!”

다리를 지키던 위사의 한마디가 분위기를 싹 바꿔 버렸다. 바일은 방금까지 일어난 일은 완전히 머리에서 내보낸 듯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단숨에 방을 뛰쳐나갔다.

  이봐, 기다려!”

이런 때 바일의 순발력은 만만치 않다. 위사들의 발밑을 사뿐히 빠져나가 순식간에 복도로 사라지고, 허둥대는 위사들이 뒤를 쫓았다.

물론 웬만해선 성 안은 안전하고 갈 곳도 뻔하다. 서두를 필요가 없지만 입장 상 천천히 쫓는 것도 겸연쩍다. 타낫세 또한 될 수 있는 대로 서둘러 뒤를 쫓기로 했다.

결국 따라잡은 곳은 안뜰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멈춰선 타낫세의 눈에 비친 것은 키 큰 남자에게 매달리는 조그만 사촌 동생의 모습이었다.

  아아.”

남자는 타낫세의 기척을 알아챘는지 오른쪽에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자연스러운 동작이 언제나 상기시킨다. 그의 오른쪽 눈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아무래도 이 녀석이 또 폐를 끼쳤나 보네. 언제나 고마워.”

  아니요.”

부드러운 미소를 받아, 타낫세는 그만 눈을 피했다. 아마도 어딘가 어머니의 모습이 느껴지는 탓이다. 하지만 그건 어머니가 자신을 향해 지은 적 없는 표정이라 왠지 모르게 가슴이 내려앉는다.

  폐 끼치지 않았어, 착한 아이니까!”

그 틈에 뻔뻔하게도 당사자가 폴짝폴짝 뛰며 그렇게 항의했다. 하하하, 남자는 웃더니 자식의 머리에 손을 얹고 살며시 머리를 만지작거린다.

  알았어, 알았어. 바일은 착한 아이야, 언제든지.”

왕의 동생이자 란테 당주, 이르아노·니엣나=란테는 이렇게 왕성에 찾아왔다.

 

1-5

다음날부터 바일은 방을 찾아오지 않게 됐다. 이유는 뻔하다. 초대받은 다과회에서 타낫세는 그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됐다.

  이봐, 똑바로 제자리에 앉아.”

  괜찮잖아, 여기서도 먹을 수 있는걸.”

  평소에 바일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은데. 분명 예전보다 능숙하게 먹을 수 있게 됐겠지?”

그 말을 듣자 바일은 마지못해 아버지의 무릎에서 내려와 자기 자리로 향한다. 그리고 나서도 얼굴은 오른쪽즉 아버지만을 향하고, 거의 왼쪽타낫세 쪽으로는 향하지 않는다. 없는 것 취급이다.

이렇게 계속 아버지에게 찰싹 달라붙었을 것이다. 제 존재 따윈 생각지도 못하게 된 게 분명했다. 그토록 기다린 귀환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타낫세에게 있어 재밌는 일은 아니었다.

  저기, 있잖아. 미라네가 새를 가져다줬는데, 이게 란테까지 날아가는 새래. 그래서 부탁했어. 제대로 날아가서 전해달라고.”

  , 제대로 받았어, 바일의 편지. 꽤 많은 글을 쓸 수 있게 됐구나.”

  공부했어, 많이많이. 왕이 되려면 필요한 거잖아?”

  훌륭하네, 바일은.”

섣불리 끼어들었다간 원망을 살 것 같아 잔뜩 첨삭했던 일은 묻어두기로 하고, 타낫세는 대신에 차를 마셨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까부터 계속 차만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배가 부르는 것 같았다.

  타낫세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르아노는 이쪽도 신경을 써서 간간히 말을 건네지만,

  항상 책을 읽어. 재미없어. 맞다, 전에 읽은 책은…….”

하며 대답하기 전에 죄다 바일이 끼어든다.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으로 타낫세는 구운 과자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간 저녁식사를 못 먹어 시종에게 꾸중 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말을 몇 번 주고받은 뒤로, 이르아노는 천천히 컵을 내려놓는다.

  , 뜰에서 놀 거면 슬슬 가야지. 곧 어두워질 거야.”

  어라? 벌써 그렇게 됐어? 그럼 가자, 가자.”

이렇게 겨우 이 서먹서먹한 공간에서 해방되어 타낫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그에게도 손길이 내밀어졌다.

  타낫세도 오렴. 평소처럼 놀자.”

  저는사양하겠습니다. 방해가 될 테고.”

  아니, 평소의 모습이 보고 싶은 거야. 타낫세만 괜찮다면 꼭 같이 와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온화하게 부탁을 받으니 거절할 도리도 없다. 이리하여 타낫세는 두 사람과 함께 안뜰로 향하게 됐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르아노에게 한 손을 잡힌 채 걷고 있었다. 당연히 반대쪽 손은 바일이 꽉 잡고서 뛸 듯이 나아가고 있다. 왠지 이 구도가 묘하게 부끄러워 얼굴을 숨기게 된다. 그래, 분명 그 사람 손도 비슷한 감촉으로.

  이런.”

그러나 타낫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마치 생각을 꿰뚫은 듯한 등장에 환청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저뿐만 아니라 삼촌도 바일도 걸음을 멈췄기 때문에 정말로 어머니가 거기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이 자신을 맞았다.

  셋이서 외출인가? 부럽구나.”

  함께 하시는 건 어떤가요. 필요하시다면 낚싯대를 준비하도록 할게요.”

  그러고는 싶지만 여기서 종적을 감추면 문관장에게 혼날 거다. 다음 기회에 보지.”

그런 기회는 오지 않을 거다.

타낫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것을 바라는 건 헛된 일이고, 바라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아이들을 잘 돌봐줘, 부탁하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종들을 거느린 채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타낫세는 멍하니 바라봤다. 그래, 그런 건 알고 있다. 저 손은 잡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여전히 바쁘네. 하루쯤 쉰다고 나라가 없어지거나 하진 않을 텐데.”

그래서 야유하는 듯한 삼촌의 말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반박하고 말았다.

  어머님은 왕입니다. 왕이 그러면 본보기가 되지 않습니다.”

  흐음?”

그것은 생각보다 강한 어조가 돼 버려, 삼촌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 움찔했다. 그런 타낫세를 도와준 것은 어린 사촌 동생이었다.

  가자니까, 어두워질 거라고!”

물론 본인에게 도와줄 의도는 없고, 단지 기다릴 수 없어졌을 뿐일 것이다. 그래도 분위기는 확실하게 바뀌었다.

  네네, 왕의 분부대로. 갈까요.”

머리를 상냥하게 토닥이는 삼촌의 손이 그런 건 신경 쓰고 있지 않다고 전해주는 듯했다.

 

1-6

그리고 그 손은 지금 자식의 짧은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다. 손가락이 이마에서 멈추자 쓰다듬을 받던 인물은 칭얼대듯 무언가 중얼거렸지만, 이내 잔잔한 숨소리로 바뀌었다.

  이런, 이제야 조용해졌네.”

무릎 위에 누운 자식에게서 눈을 떼고 이르아노는 물어본다.

  언제나 이런 느낌이니?”

  , 조금은요.”

어깨를 으쓱하며 타낫세는 그렇게 되받아쳤다. 사람을 억지로 끌어낸 주제에 혼자 법석을 떨다가 깜빡 잠이 드는 건 예삿일이다. 그럴 때는 별다른 도리 없이 옆에 앉아 그가 깨어날 때까지 챙겨온 책을 읽는다. 때로는 끝내 일어나지 않아 성까지 업고 돌아온 적도 있다. 세 살 차이라고는 해도 가볍게 들 수 없고,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지치곤 했다. 오늘은 삼촌이 있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가. 타낫세에게는 항상 폐를 끼치고 있구나.”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솔직한 타낫세의 대답에 이르아노는 하하 웃는다. 그 모습이 타낫세의 가슴에 다시금 복잡한 마음을 스치게 했다. 삼촌은 어머니와 많이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조금도 닮지 않은 것 같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그게 형제라는 걸까.

  미안하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바일에게는 형제나 다름없으니까.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거고.”

단순한 우연이었겠지만 마치 자신의 마음을 간파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튀어나온 그 단어가 타낫세를 흔들었다.

  하지만 저랑 바일은 전혀 닮지 않았어요.”

말을 뱉은 뒤, 대화의 맥락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삼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돌아온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은 걸 물어본다.

  이마에 표식이 없는 건 타낫세에게 괴로운 일이니?”

  저는, 그런.”

대답하는 목소리는 스스로도 알아차릴 만큼 상기돼 있다. 그런 생각으로 방금 같은 대답을 한 게 아니다, 오해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말이 이어지질 않았다.

  속이지 않아도 괜찮아. 네 기분은 분명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 거라고 생각하니까.”

삼촌은 다시 잠에 빠져있는 자식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앞머리를 걷자 살짝 빛을 발하는 기묘한 표식이 나타났다.

선정인.

왕의 증거. 신의 은총. 제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

  그 기분을 형은 모를 거야. 이 애도 모르겠지. 알 수 있을 리가 없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가끔 무척 답답하게 느껴져. 그렇지?”

  저는

그런 말을 누구에게나 할 수 있을까.

입 밖으로 꺼내면 바보 취급이다. 업신여겨진다. 그 남자의 아이니까 당연하다고 비웃음을 받는다. 어머니의 귀에 들어가면 기막혀하겠지. 그런 마음가짐이라 표식을 받을 수 없었던 거라고, 자신의 자식이라 생각할 수 없다고.

그래도 나는, 현왕의 유일한 자식이다.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는 타낫세의 머리가 툭툭 다독여진다. 그래도 고개를 들지 않자 손가락이 머리를 헤집는다. 그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 형의 아이 역할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나는 동생일 뿐이지만, 그래도.”

문득 이르아노는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쓴 것을 머금은 것처럼 느껴져 타낫세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삼촌의 얼굴을 엿보고 만다. 그는 이쪽을 보지 않고, 무릎의 자식을 보지 않고, 시선의 끝에는 나무를 비추는 호수가 있었지만, 그것조차 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동자를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왠지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숙부님.”

그의 시선을 돌리려고, 타낫세는 말을 건다.

  숙부님도 있나요. 자신에게 표식이 있었다면, 하고 생각한 적이.”

물음에 반응해 이쪽을 돌아보는 왼쪽 눈동자에 자신이 비치는 것을 확인하자 타낫세는 마음을 놓았다.

  생각해 본 적 없어, 라고 하면 거짓말이지.”

그런 불안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르아노는 대답하며 씁쓸하게 웃는다.

  어릴 적의 나와 형은 무척 닮아서, 왜 그 부분만은 다른지 이해할 수 없었어. 란테 저택의 하인들은 차별 없이 대해주려고 한 것 같지만 분명 벽이 있었고.”

  어머니는 옛날부터 그런 분이셨나요?”

  형은 조부님한테 철저히 교육 받았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어릴 땐 철없는 장난이나 실패도 많았는데.”

  왠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모습 그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란 거야. 왕을 만드는 것은 표식이 아니다. 그걸 둘러싼 사람들이지.”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바스락바스락 잎을 흔들며 스쳐간다. 게다가 그게 자극을 줬는지 바일도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확실히 이 아이한텐 표식이 있고, 타낫세에겐 표식이 없어. 이 아이는 머지않아 왕이 되고, 타낫세는 결코 왕이 될 수 없겠지. 그건 바꿀 수 없지만 그것뿐인 일이야. 그 정도로 바꿀 수 없는 일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래, 이 아이는 나의 아이고 타낫세가 형의 아이인 것처럼 말이야.”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았을까. 알아차렸을 때 타낫세는 무릎 위에서 두 주먹을 쥐고 있었다. 쉰 듯한 중얼거림이 자신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남이 말하는 것인 양 듣는다.

  저는어머니에게 어울리는 아이가 되고 싶어요.”

입에서 나온 그것은 실현될 리 없는 소망이라고 느끼게 된다. 완벽한 국왕의 유일한 오점은 표식이 없는 자신이라는 존재다. 옥좌를 계승하지 못하는 자신이 인정받는 일이 있을 리 없다.

  자식에게 어울리고 말고 할 것은 없어. 바일의 이마에 표식이 없었다고 해도 나한테는 변함없이 소중한 아이였을 거야.”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겠죠.”

왕의 일은 바빠 얼굴을 마주할 일도 거의 없다. 만날 때라고는 식탁을 사이에 둔 식사 자리뿐이었다. 타낫세는 흘끗 시선을 옆으로 흘린다. 이르아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바일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삼촌이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것은 잘 알았지만,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와 어머니는 다르다.

  .”

타낫세의 태도에 이르아노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타낫세를 보고 있으면 아버지가 떠오르네.”

  아버지? 제 할아버지 말씀이신가요?”

  그래. 파질 조부님과는 달리 그다지 얘기를 들어본 적 없을 거야. 내가 타낫세만할 때 돌아가셨으니까.”

확실히 마음에 둔 적 없는 인물이었다. 귀족이나 하인들은 물론 어머니의 입에서도 얘기가 나온 적이 없었다.

  파질 조부님께는 세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어느 누구도 표식을 받지 않았어. 그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무척 거대한 아버지에게 대항하려고 했지. 그렇지만어땠을까. 그들이 바라던 대로 행복해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이르아노의 손가락은 거기서 딱 멈춘다. 선정인의 빛을 손끝에 비추며.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 표식이 없는 것이야말로 가능성이라고. 우리는 왕이 될 수 없지만, 그 밖의 것은 뭐든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왕 밖에 되지 못해.”

바일에게 일어날 낌새는 없다. 입을 크게 벌리고 누워있는 모습이 능청맞다.

  오늘은 있지, 사실 부탁이 하나 있어서 불렀어.”

  무엇입니까?”

  타낫세가 여유 있을 때만이라도 괜찮아. 조금만 이 아이를 신경 써 주지 않을래?”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한숨과 함께 타낫세는 대답했다.

  제가 싫다고 해도 그 녀석이 달려드는걸요. 늘 그래요.”

매정한 반응에 이르아노는 다시금 곤란한 미소를 입술에 머금는다. 어디서 본 듯한 표정이 타낫세의 가슴을 뻐근하게 쑤셨다.

언제였더라.

어머니께 반드시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게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어쩔 수 없이 옥좌의 방 앞에서 기다리다가 나온 어머니를 데려가려고 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어리석었다. 옥좌의 방에 온다는 건 알현 시간이지, 어울려줄 리도 없다. 그래도 자신은 끈질겨서, 어머니는 똑같은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었다.

역시 이 두 사람은 형제다. 그러면 언젠가 어머니의 손이 내 머리에 얹힐 때도 있을까.

  부탁하지 않아도, 돌봐주는 정도는 하겠습니다. 동생 같은 녀석이니까요.”

덧붙인 대답에 삼촌은 안심하는 기색을 보인다.

  고마워. 잘 부탁해.”

그건 어머니에게선 생소한 표정이었다.

  , 슬슬 깨워둘까. 어두워졌을 때 돌아가면 시종이 시끄러우니까.”

이야기를 끝낸 이르아노는 바일을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그래도 바일은 도저히 깨어나질 않아, 결국 이르아노가 안고 돌아가게 됐다.

뒤늦게 돌이켜보면, 이때 이미 삼촌은 마음을 정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로선 그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1-7

방으로 돌아온 순간 바일이 손을 꽉 잡았다. 좋지 않은 예감을 느껴 물러나려고 한 타낫세였지만, 단단히 붙잡혀 그럴 수 없었다. 노려보듯 이쪽을 향한 눈동자에 어렴풋이 눈물이 고인 걸 발견하고 그는 저항을 포기했다.

  뭐야. 왜 그래. 숙부님은 오늘.”

  가자!”

이쪽의 사정은 조금도 묻지 않고 방에서 끌고 나간다. 앞뒤를 재지 않고 달려드는 건 아닌 듯해서, 그냥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때 바일은 말해봤자 듣지 않는다.

탑에서 나와, 복도를 지나고, 안뜰로 들어간다. 나아가는 바일은 이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다. , 한숨을 쉬며 타낫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침부터 날씨가 좋지 않아 구름이 두텁게 걸렸다. 너무 깊숙이 들어가지 않는 게 좋을 듯싶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냐? 옷을 더럽히면 또 혼날 거다.”

일단 말을 걸어봤지만 역시 이쪽을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손등을 파고드는 손톱만이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말없이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어울려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일은 안뜰의 오솔길조차 벗어나 수풀 속을 들어가려고 한다. 역시 그것만은 견딜 수 없어 타낫세는 억지로 멈춰 섰다. 전에도 술래잡기라고 할까, 쫓기던 중에 옷이 덤불에 걸려 찢어졌고, 시종감에게 혼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이봐, 적어도 어디 가는지는 알려줘. 그러지 않으면 난 돌아가겠다!”

그래도 끌고 가려는 바일에게 강한 어조로 말하자 바일의 입에서 툭, 그 말이 흘러나왔다.

  .”

  잠깐, 어디라고?”

  밖으로!”

겨우 뒤를 돌아본 바일은 굵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새빨개진 얼굴에 타낫세는 사태를 깨달았지만, 갑자기 핵심을 찌르는 것은 관두기로 했다.

  밖이라니 어디야. 여기가 이미 야외다.”

  여기의 바깥!”

  성 밖이라니, 정문을 통과하지 않고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어. 이대로 가봐야 벽에 부딪칠 뿐이다.”

  갈 거야! 집에서 나갈 거니까! 아빠 따위 싫어!”

예상대로의 전개에 타낫세는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이건 일련의 의식이나 다름없다.

  숙부님이 돌아가시는 건가.”

그리고 마침내 원인을 알게 됐다.

찾아오는 순간이 있으면 떠나는 순간도 있다. 그 일은 바일도 알고 있을 테지만, 막상 아버지가 방문하면 언제까지나 있어 준다고 믿어버리는 것 같다. 매번 그는 투덜거렸다. 심지어 어째선지 자신도 매번 어울려주게 된다.

지난번에는 단식투쟁을 한답시고 사흘을 버텼다. 첫날부터 말려들어 휘청거렸던 바람에, 이틀째부터는 바일이 오기 전에 아침식사를 든든히 해두는 작전으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끝내 이르아노는 성에서 나가버렸고, 애써도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바일은 식사를 했다는 결말이다. 덧붙여 본인은 몹시 팔팔했으므로 휘둘린 건 주변뿐이었다. 총애자는 터무니없이 튼튼하다.

그런 그가 이번에 선택한 항의 방법은 가출인 모양이다.

  하필이면 어째서 가출인가.”

중얼거리자 가슴을 쭉 펴고 대꾸한다.

  미라네가 들려줬어. 장난꾸러기 왕자의 모험!”

  원인이 그거냐.”

시시한 이야기다. 장난꾸러기 왕자가 꾸지람을 듣고 가출했을 때, 성이 마물에게 습격당하고 만다. 소란을 피한 왕자는 마침내 무사히 성을 되찾는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불어넣었구나, 타낫세는 탄식했다.

  말해두겠는데, 이 성벽에 틈 따위는 없어. 만에 하나 있다고 해도 호수로 향한다. 바깥엔 나갈 수 없다.”

정확한 지적을 하자 바일은 푹 볼을 부풀린다.

  그래도 집에서 나갈 거야. 아빠 따윈 마물에 잡아먹혀버려!”

별 수 없다. 잠시 이 가출 놀이에 동참하며 질리기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려던 타낫세의 콧등에 차가운 것이 튀었다. 이내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물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꽤 본격적으로 내릴 것 같다.

  이래서야 가출은 무리다. 돌아가자.”

황망히 손을 잡아당겨도 그 이상의 힘에 의해 제자리가 된다.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 바일의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알았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일단 비를 피하자. 흠뻑 젖은 채로 가출할 순 없어.”

달래듯 타이르자 그제야 바일이 움직였다. 수풀을 헤치고 안쪽으로 더 들어간다. 그러는 동안에도 빗줄기는 점차 거세진다.

  이봐, 어디 피할 곳은 있는 거냐?”

  없어.”

  없다니 네 녀석은.”

좌우지간 성에서 멀어지고 싶었을 뿐이겠지. 도중에, 커다란 나무 아래서 잠시 지낼 수 있는지 확인해 봤지만, 생각 외로 가지가 듬성했는지 비가 그대로 쏟아져 그럴 수 없었다. 구두를 진흙으로 더럽히며 두 사람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때였다.

  .”

작은 탄성을 내지르며 바일이 멈춰 섰다. 무슨 일이 있는지 타낫세가 어깨 너머로 살펴봤는데, 거기엔 단지 넓은 터에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나무뿌리가 있을 뿐이었다. 오래 전 무슨 이유로 부러진 건지 반쯤 썩어 있었다.

여기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려 발을 한 걸음 내딛은 타낫세는 사촌 동생이 목소리를 낸 이유를 알게 됐다.

이곳은 왠지 약간 따뜻했다. 비도 때때로 굵은 방울이 떨어지는 것 말고는 잘 새지 않았다. 올려다보니 주위의 가지가 뻗어 지붕처럼 된 모양이었다. 우연이겠지만 신기한 공간이었다.

  여기라면 당분간은 괜찮겠군.”

이 이상 빗줄기가 거세지면 어떻게 될지 몰라도, 다른 데보단 나을 거다. 바일은 어째선지 멈춰있지만, 이번에는 타낫세가 손을 잡고 그를 이끌었다.

커다란 나무 밑동은 이끼로 약간 축축했으나 융단 같았다. 두 사람은 거기에 나란히 앉았다.

  춥지 않나?”

  괜찮아.”

젖은 몸은 체온을 빼앗아가지만 닦을 것이 없어 서로 몸을 맞대고 버틸 수밖에 없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위에서 소리만이 쏟아진다.

  왜 그래. 조용하네.”

  .”

역시 피곤한 걸까. 기력 없는 모습이 걱정된 타낫세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어깨에 무게가 실렸다. 곧 눈앞에서 뻗친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냐.”

  이야기해줘. 이야기 듣고 싶어.”

여전히 요구가 뜬금없다. 작게 한숨을 내뱉고, 타낫세는 되물었다.

  무슨 얘기를 할까.”

  장난꾸러기 왕자의 모험.”

  듣지 않았나?”

  끝나기 전에 잠들었으니까.”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괜찮아.”

잠자코 있는 것보다는 괜찮겠지. 할 수 없이 타낫세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금은 아닌 언젠가, 여기는 아닌 어딘가에, 어떤 왕이 다스리는 작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미리 일러둔 대로, 세세한 부분은 기억하고 있지 않으니 적당하게 이야기를 잇는다. 성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왕자는 국경 근처까지 헤매다 이웃나라의 왕자를 만난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지만, 장난꾸러기 왕자의 장난 탓에 결국 싸우고 헤어지고 만다. 그리고

기억에 의지해 어떻게든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잠꼬대가 귀에 들려왔다. 곁눈질로 확인해보니 역시나 바일은 잠들어 있었다. 이런 식으로는 평생 결말까지 갈 수 없을 텐데, 타낫세는 슬며시 웃었다.

아직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머리 위에서 울리는 단조로운 빗소리가 졸음을 불러온다. 귓가를 간질이는 바일의 숨소리 탓도 있어, 타낫세 또한 천천히 잠에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1-8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것은 추위였다.

등줄기를 타고 오른 추위가 온몸을 떨게 하며 억지로 잠에서 깨워낸 것이다.

타낫세는 고개를 흔들며 흐릿한 시야를 원래대로 되돌리려고 했다. 이마에 다시 한 번 차가운 감촉이 떨어졌다가 볼을 타고 가슴팍까지 흘러내렸다.

비가 거세지고 있다. 나무 지붕도 쓸모없을 만큼. 뿐만 아니라 주위는 묘하게 어둡다. 구름 때문만이 아니라 태양이 약해지는 무렵인지도 모른다.

  어이, 일어나. 일어나라.”

몇 번 흔들자 바일은 못마땅한 소리를 내면서도 눈을 떴다. 눈꺼풀을 손으로 비비며 올려다본다.

  뭐야?”

  뭐야, 가 아니다. 이제 돌아가자. 기분은 나아졌겠지.”

그렇게 재촉하자 멍하던 바일의 눈에 긴장이 감돌았다.

  싫어.”

  싫다니 너, 해가 졌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면 혼날 거야.”

  혼나도 돼.”

  숙부님께서 걱정하실 거다.”

  걱정 안해.”

  유모랑 미라네가 걱정할 거다.”

  나중에 미안합니다 할게.”

  애당초, 이런 곳에서 밤을 샐 수 있을 리가 없지.”

조금 약해진 바일에게 단번에 다그치듯 타낫세는 말을 뱉는다.

  밤이면 마당에 개를 풀어. 금방 들킬 뿐이야.”

  개는 비가 오면 냄새를 못 맡아. 배웠어.”

쓸데없는 것만 잘 기억한다. 다음에는 뭐라고 설득해야 할지 궁리하는 타낫세의 머리로 후두둑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차가워.”

바일도 똑같이 맞은 듯하다. 몸을 움츠리는 사촌 동생에게 나무라듯 말이 격해졌다.

  그것 봐. 여기 있으면 흠뻑 젖는다. 하룻밤조차 견디기 힘들 거야.”

  .”

불만스러운 듯 바일이 일어나 비가 내리지 않는 데를 찾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내리는 동안에는 무리일 것이다. 아까도 겨우 여기에 도착했고.

  , 이제 그만 포기하고 성으로 돌아가자. 지금이라면 그리 혼나지 않을 거다.”

타낫세가 승리를 확신한 그때,

  있다!”

바일의 들뜬 목소리가 그 기대를 부숴버렸다.

그는 아까부터 나무 뒤로 돌아서 부스럭대다가, 고개를 내밀고 손짓해온다. 마지못해 돌아보니, 그곳엔 그럴듯한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공간의 절반 정도에 바일은 웅크려 앉은 채였다.

  , 여기라면 젖지 않아.”

남은 절반에 그가 무엇을 넣고 싶어 하는지는 명백했다. 길게 한숨을 내쉰 타낫세는 똑같이 몸을 움츠리며 틈으로 파고들었다. 거절해봤자 바일이 여기서 나와 성으로 돌아갈 리도 없고, 그렇다면 밖에 있어봤자 자신만 젖을 뿐이니까.

나무 안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전해져오는 바일의 체온 때문만은 아닌 듯, 몸이 닿지 않은 반대편도 춥지 않았다. 썩어가고는 있어도 커다란 나무라는 생물 안에 있는 덕분일까.

  정말 여기서 밤을 보낼 생각인가?”

  집에서 나왔잖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숙부님이 란테 영지로 돌아가야 하는 건. 조금만 참으면 다시 이리로 돌아오실 거야.”

  …….”

그것을 지적하자 금세 언짢은 듯 바일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마 본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어쩌면 며칠 정도 출발을 미룰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것뿐이다.

  기분 좋게 보내드리는 게 숙부님한테나 너한테나 좋은 일일 텐데.”

  그치만!”

갑작스레 바일은 목청을 높이지만 말이 이어지진 않는다.

  그치만.”

같은 말만을 반복하다 다시 입을 다문다.

  무슨 일있었나?”

재촉하자 꽉 다물려 있던 바일의 입술이 느슨해져 말이 흘러나왔다.

  있지, 아빠가 말이야,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알아.”

  아아.”

  그래서 말했어. 그럼 나도 같이 가자고. 저택으로 가자고.”

  그건.”

  그치만 안 된대. 절대절대 안 된대.”

당연히 그렇겠지. 소중한 총애자를 쉬이 성에서 내보낼 리도 없다. 자신이 비슷한 요구를 했다면 어떨까, 하고 타낫세는 무심코 생각했다가, 황망히 그 생각을 머리에서 쫓아낸다. 그러는 동안에도 바일은 계속 불만을 쏟아냈다.

  아빠는 싫어하는 거야.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어서. 그러니까 바로 가 버려. 여기 있어주지도 않고.”

  그럴 리 없잖아.”

며칠 전 안뜰에서의 대화가 생각났다. 싫은 상대를 그토록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바일은 고개를 흔들었다. 좁은 공간에서 어깨가 부딪쳐 조금 민폐였다.

  아빠는 화내고 있어. 계속 화내고 있어. 나 때문에 엄마랑 같이 못 있었으니까.”

호소하는 그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가끔 엄청 무서운 눈을 하고 쳐다봐.”

그런 건 바일의 기분 탓이겠지. 빛을 잃은 눈은 감정을 읽기 어렵다. 어떤 이유가 됐든 그렇게 보였을 뿐인 거다.

문제는 바일이 그리 믿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 상태로는 무리하게 돌아가도 꼬이기만 할 테다.

차분해질 때까지 어울려줄 수밖에 없다. 타낫세는 각오를 다졌다.

바닥을 더듬다 바일의 손을 찾아 잡는다. 말 이외의 의사표현을 생각해봤는데, 이 좁은 장소에서는 그게 고작이었다. 바일은 순간 놀란 얼굴로 이쪽을 보더니 곧 손을 꼭 맞잡아온다. 따스한 작은 손.

  춥지는 않아?”

  괜찮아.”

  추워지면 말하도록 해.”

  . 있지, 이야기 해줘.”

  무슨?”

  장난꾸러기 왕자의 모험.”

  어디까지 들었는지 기억나?”

  또 한 명의 왕자랑 만난 부분.”

  싸우기 시작한 건?”

  아마 그쯤이야.”

  그런가. . 장난꾸러기 왕자와 이웃나라 왕자는 결국 싸우다 헤어져버렸어. 옆집 왕자는 말했지. ‘내가 왕이 되면 너희 나라를 해치우겠다!’ 장난꾸러기 왕자도 대꾸했고. ‘, 내가 왕이 되면 네 왕관을 빼앗아 바다에 던져버릴 거니까!’ 그리고.”

  저기, 이 이야기 이상하지.”

갑자기 말이 꺾여 타낫세는 울컥했지만, 이어진 바일의 말에는 숨이 막혔다.

  그야, 왕자는 왕이 되지 않잖아. 그렇지?”

  그래. 그렇다.”

  장난꾸러기 왕자한테 표식이 있었어? 이웃나라 왕자한테도?”

  아니, 그렇지 않다. 옛날엔, 이 이야기 속 나라에는 표식 같은 게 없었어.”

  , ? 어째서?”

  왜냐고 해도. 그렇게 돼 있어.”

  그럼 누가 왕이 되는 거야? 왕이 될 사람은.”

거기서 바일은 짐작한 것 같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타낫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왕자?”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는 걸, 타낫세는 알아챘다.

 

1-9

  타낫세는왕이 되고 싶어?”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했을까. 당시의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무리 회고해도 알 수 있는 건 없다. 단지 대답만은 잘 기억하고 있다.

  나는, 왕은, 왕이라니.”

뺨을 찌르는 바일의 시선을 따갑게 느끼면서도, 우물쭈물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표식이 있으면 자신은 명실상부한 왕의, 어머니의 자식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험담을 듣지 않고, 누구에게도 차가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그 생각이 말끝을 흐렸다.

불분명한 태도에 바일은 침묵했다.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뛰쳐나가려던 타낫세를 붙든 것은 한층 강하게 맞잡은 손이었다.

  있잖아.”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진지했다.

  아빠가 말했어. 데려갈 수 없다고. 유모가 말했어. 바깥은 위험하다고. 미라네가 말했어. 그건 내가 왕이 되기 때문이래.”

당연히 그렇게 만류할 것이다. 바일은 아직 어려 납치당하거나 부상당하기 쉽다. 성 바깥에 그의 안식처는 없다.

  표식이 있으면 왕이 되고, 표식이 없으면 왕이 될 수 없어. 그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타낫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붙어있는 상황인데도 바일은 더 다가온다.

  그럼 이거 필요 없어. 타낫세에게 줄래. 이거 줄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타낫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일순, 아주 가까이에서 바일의 눈동자가 노려본다. 그리고 그 바로 위의 선정인. 심상치 않다고 알리듯 부드럽게 빛나는 신의 증거.

그것이 이마에 들이밀어진다.

  기다려, 무슨!”

  줄게. 이거, 줄게!”

바일은 더 세게 문지른다. 얼룩도 아닌데 그런다고 옮겨질까, 말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기세에 눌려 뒤통수가 자꾸 벽에 부딪힌다.

  이봐, 그만해. 그만하라고!”

영문 모를 상황에 비명처럼 항의하자 바일은 그제야 물러났다. 어떻게든 원래 자세로 돌아가려 하지만,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압박받은 탓에 목이 아프다. 바일이 다시 얼굴을 들여다보며 반쯤 우는 소리를 냈다.

  안 옮겨졌어.”

  당연하지. 바보냐, 네 녀석은.”

타낫세는 그만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일갈해버린다. 시야의 끝에, 바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야 표식이 있으니까 아빠가, 없으면 데리고 가, 왜냐면 왕자가 왕이고, 그러니까.”

  알았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울지 마.”

바일의 기분을 생각하면 엄하게 다룬다고 좋은 게 아니었다. 잡힌 손을 놓지 못했기 때문에 억지로 몸을 틀어 다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럼, 표식, 받아줘.”

  그건 안돼.”

  ?”

  그것은 너의 것이야. 너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납득하지 못한 태도인 바일을 끈기 있게 타일렀다.

  신은 널 선택했어. 네가 왕이 된다. 내가 아니라.”

  왕자인데?”

  왕자인데. 이야기는 이야기, 현실은 현실이다.”

  , 그렇구나.”

침울해진 바일에게 괜한 위로를 건네는 건 그만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바일이 감내해야만 한다. 표식은 사라지거나 하지 않고, 새로 주어지거나 하지도 않는다.

대신 다짐을 받아둔다.

  들키면 제대로 돌아가는 거야.”

  .”

  아침이 되어도 돌아갈 거다.”

  .”

빗소리는 그치지 않고 찾아오는 인기척도 없다. 좁은 공간에서 두 사람은 서로 몸을 맞대고 추위로부터 서로를 지켰다.

마치 모두가 마물에 먹혀버린 듯싶은 고요함이라고, 타낫세는 생각했다.

장난꾸러기 왕자는 훌륭한 왕이 되어 해피엔딩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럼 자신은 무엇이 되어야 해피엔딩을 낼 수 있을까?

표식이 있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감내해야 할 일이다.

 

1-10

새소리가 들린다.

그 지저귐이 무슨 뜻인지 떠올리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빗소리는 나지 않고, 구멍으로 부드러운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눈을 비비려다가 그 손이 잡혀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촌 동생의 자는 얼굴이 바로 옆에 있다.

  어이, 아침이다. 아침이야. 일어나. 일어나라에취.”

깨우려고 꺼낸 말이 재채기에 의해 끊겼다. 급히 고개를 돌려 계속 나오는 기침을 멈추려고 하는데, 방해가 됐는지 바일이 꿈틀거린다.

  시끄러

  인사도 받았고. 아침이다. 이제 돌아가자.”

바쁘게 재촉하니 그제야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챈 것 같다. 손을 놓았으므로 먼저 구멍에서 빠져나왔다.

땅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지만 비는 그쳤다. 일어서자 발밑에 차가운 아지랑이가 들러붙었다. 등줄기를 타고 기어오르는 한기에 타낫세는 다시 기침을 했다. 어제 자꾸만 부딪힌 탓인지 기침을 할 때마다 머리 어딘가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가지와 잎 틈새로 보고 있어 확실하진 않지만 햇빛은 아직 약하게 느껴졌다. 아침이라 하기에도 이른 시간일 것이다.

  배고파.”

똑같이 빠져나온 바일은 열린 입으로 그 말부터 내뱉는다.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쏘아붙일 뻔했지만 간신히 그 말을 삼켰다.

  기분은 풀렸겠지.”

  .”

  좋아, 그럼 돌아간다.”

내민 손을 바일은 순순히 잡아왔다.

그리고 그 뒤의 일은 특별히 생각날 것도 아니었다.

성에 다가갔다가 수색 중인 위사에게 발견돼 끌려갔다. 바일은 시종감에게 엄청나게 야단을 맞았고, 지친 얼굴의 유모와 미라네의 마중을 받아, 상당히 지친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자신도 간곡히 설교를 들었고, 둘이서 어머니 곁으로 끌려갔다. 옥좌에서 기다리던 그녀는 자신을 한번 쳐다보더니 씩 웃었다.

  기분은 괜찮아졌나?”

자신은 그저 말려든 것뿐이라고 주장하고 싶었지만 소용없을 것 같아 그만뒀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풀려난 우리들을 이르아노가 기다리고 있었다. 삼촌은 탑으로 가는 길에 사과하고, 바일을 타일렀다. 그때 눈치 챘다. 그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오늘 갈 생각이었겠지. 그리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바일은 바보라고 생각한다. 함께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밤을 그런 일로 날려버렸으니까.

도착한 문 앞에서 문득 멈춰서 돌아봤더니, 부자父子는 손을 꼭 잡은 채 옆방으로 들어간다. 떠나기 전까지의 시간은 저렇게 보낼 것이다.

어째선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이 최악이었다. 계속 느꼈던 두통은 밖이 아니라 몸 안에서 왔다.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밥을 먹는 동안, 증상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해져 타낫세는 해가 뜨기도 전에 침대로 들어가게 됐다. 열이 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젖은 채로 바깥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아프지 않을 리가 없다.

  어라왜 자고 있는 거야, !”

더군다나 머리가 지끈거리는데도 이 상황을 만들어준 장본인이 찾아와 귓가에 새된 목소리를 들려준다. 삼촌이 떠난 뒤에야 이쪽이 생각났다는 얘기다.

  바일 님, 제대로 사과하셔야죠.”

시종이 그리 말해도, 삼촌이 떠나버려 불쾌한 기분이 우선인지, 성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난 아무렇지도 않아. 이런 건 타낫세가 약해서 그런 거야.”

지나친 말들에 항의할 기운도 없다. 결국 시종에게 꾸지람을 듣고서야 마지못해 사과해줬지만, 더 짜증날 뿐이었다.

내친 김에 타낫세는 기도해주었다. 머리도 몸도 잘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선 그 정도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신이시여, 당신은 불공평하다.’

그것은 기도라기보단 항의에 가까웠지만.

  표식은 이제 얘기하지 않겠다. 하지만 최소한 그 녀석도 자기가 한 일의 대가는 치러도 좋을 거다. 제발 그 녀석도 나와 같은 꼴을 겪게 해주세요. 신관들 말처럼 당신이 공평하다면.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당신은 터무니없이 불공평하니까, 나의 부모인 아네키우스.’

그리고 신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으며 아주 약간 홀가분해진 그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떠올릴 만한 일은 없었다.

없을 터였다.

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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