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8-1

그리고 세 살을 헤아릴 나이가 되었다.

벌써, 인가. 겨우, 인가.

테피아는 괴로운 머리를 누르며 절실히 생각했다. 길었던 것 같기도 하고, 눈 깜짝할 새였던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은 지금 이 순간을 신에게 감사해야 했다.

  “아빠―”

쿵쿵, 발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테피아가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작은 얼굴이 아래서 들여다보였다.

  “아빠, 또 머리 아파?”

그 이마에서 빛나는, 자신과 같은 증표.

테피아는 걱정하는 어린 아들을 향해, 안심시키기 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 아프지만, 괜찮아. 이건 필요한 아픔이니까.”

  “필요?”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들에게 그렇게 알려줬으나, 아들의 걱정은 더욱 깊어진 듯했다.

  “아픈 거 싫어. 중요하지 않아.”

얼굴을 찡그리며 호소해오는 아들이 사랑스러웠고, 그 말 뒤에 담긴 것이 애처로웠다. 테피아는 아들의 이마부터 머리까지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맞아. 아피아에게는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아프면 바로 아프다고 하는 거야.”

  “아프지 않게 해줄 거야?”

  “응, 도와줄게.

그 말을 듣고서야 아피아는 찡그린 표정을 풀고 활짝 웃었다. 테피아 역시 따라서 미소를 지었지만, 동시에 가슴 한 켠으로 통증을 느꼈다.

어째서 하필이면 이 아이가, 하는 생각이 강해진다.

  “아빠?”

아무래도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한 듯했다. 다시 의아한 표정이 되어가는 아피아를 발견한 테피아는, 말을 돌리려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방금 뭐하고 있었어?”

  “아, 아빠, 저쪽에 있지, 이상한 벌레님이.”

그러자 다가왔던 목적이 생각났는지, 손을 쭉쭉 잡아당긴다. 안뜰 한쪽의 수풀에 얌전히 있다고 생각했더니, 무언가 관찰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물론 거스르지 않고 따라갔다.

  “여기, 여기.”

대기하는 위사들의 모습이 나무들 사이로 얼핏 보이는 것을 확인하며 테피아는 아피아를 따랐다. 주위를 빙 에워싸고 있는 덕분에, 이렇게 단둘만이 들어올 수 있다.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앗.”

작은 목소리와 함께, 앞에서 가던 아피아가 붙잡힌 것처럼 멈춰섰다. 황급히 들여다봤더니 아피아의 목덜미에서 빛나는 줄이 하나 튀어나와 있었다. 그 줄이 무엇인지 인식한 순간, 테피아의 심장이 펄쩍 뛰었다.

  “아피아, 움직이지 마!”

예민하게 경고한 테피아가 그 줄을 잡았다. 금속의 차가운 감촉이 더욱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체인은 수풀 낮은 곳에 튀어나온 가지에 걸린 듯했다. 엉키지 않게끔 조심스레 풀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채로 멈춰 선 아피아의 가슴팍에 그것을 정돈해주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됐다, 하고 말을 걸자 아피아가 조심스레 감았던 눈을 떴다.

  “조심해. 이건 절대 잃어버리면 안 돼.”

  “네….”

그만 언성을 높여버린 탓일까, 아피아는 명백히 풀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피아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냥, 정말로 중요한 거라서.”

  “알았어.”

아피아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안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트인 장소에 멈춰서 곳곳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난처하게 고개를 저었다.

  “벌레님 없다….”

떠드는 사이에 도망가 버렸을 것이다. 아피아는 더 살펴봤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돌아갔나보다. 또 조만간 나올 거야. 우리도 슬슬 돌아가자.”

손을 잡고 재촉하자 아피아가 올려다보며 물었다.

  “엄마, 문병?”

  “아니, 오늘은 안 가. 엊그제 좀 피곤했나봐.”

  “네에.”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이해심 있게 대답하는 아피아의 정수리를 내려다본 테피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피아는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하고, 물론 그가 잘못한 것도 아니지만, 다만, 아피아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메이의 마음에 부담을 주고 만다.

지금 뱃속에 있는 아이도 똑같으면 어쩌나, 하는.

 

8-2

부름을 받아 귀빈실에 얼굴을 내민 아피아는, 그곳에서 금세 아는 사람의 얼굴을 발견해 얼굴이 밝아졌다. 곧장 그에게로 다가간다.

  “아, 디스다.”

  “디디스.”

  “디스, 놀자.”

정정하는 보람도 없어진 5살 연상의 사촌 형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붙잡힌 채로 방의 구석에 끌려갔다. 그 뒷모습을 배웅한 나티아가 조심스레 동생에게 말을 건넸다.

  “봐라, 본인들도 저렇게나 사이가 좋지 않으냐.”

기쁜 듯이 말을 건네는 나티아와는 달리, 테피아의 표정에는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기색이 있었다.

  “균형부터가 딱 좋다. 네가 뭘 싫어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군.”

  “별로 싫다는 게 아냐. 아직 이르다고, 그것뿐인 얘기야.”

  “이런 건 빨리 결정해두는 게 여러 가지로 좋아. 딱히 언약만이라도 상관없다.”

나티아는 떨떠름해하는 동생을 다그치듯이 승낙을 재촉했다.

  “파다는 그 출신부터가 너무 남쪽에 치우쳤다고 야유받기 십상이다. 왕배도 남쪽 세리크 출신이니. 이쯤에서 북쪽의 트리프라트와 맺어둬서 손해 볼 것은 없어.”

거듭되는 흥정에도 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주저하는 얼굴로 우물거리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 태도에서 무언가 깨달은 듯, 나티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 잔소리 많은 측근들에게 또 들었겠군. 왕의 형이라고는 해도 간섭이 지나치다, 조심해라 같은.”

  “형님, 그런 게 아니야.”

테피아의 반박을, 나티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해버린다.

  “아, 속이지 않아도 돼. 흥. 녀석들도 알랑거릴 기회는 놓치지 않으려는 것뿐이지. 오히려 믿음직하다.”

그는 입술에 비아냥거리는 미소를 걸고 혼잣말을 했다.

  “옛날부터 변하지 않았어. 아니, 후계자의 탄생 덕에 더욱 노골적이게 됐나. 이젠 종자로서의 기대조차 않는다는 얘기야.”

  “형님!”

그만두게 하려고 일어서던 테피아는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꼈다. 팔걸이에 손을 얹으며 어떻게든 쓰러지는 것을 막았다.

  “윽.”

서둘로 달려온 시종이 그의 몸을 받치며 의자에 앉혔다. 물을 입에 머금자 눈앞이 아찔해졌던 것은 그럭저럭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티아가 충고하듯 내뱉었다.

  “무리는 마라. 네 연결이 불안정하면 메이에게도 부담이 간다.”

그러고는 몸을 흔들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역시 이곳은 불편하군. 슬슬 돌아가야겠어.”

옷차림을 갖추는 나티아를 보며, 테피아는 후회 같은 희미한 통증을 느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게다가, 분명, 싫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버렸다.

  “실례했습니다. 조심하죠.”

  “그렇게 하시는 게 좋을 거요, 국왕 폐하.”

거리를 두는 말에, 그래도 테피아는 인사를 거듭했다.

  “……약주 고맙습니다.”

  “나는 협상에 나선 것뿐이다. 간단한 선물 정도는 가지고 와. 대체로 저런 건 남는 물건이지.”

물론 자신을 위해 골라서 입수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의 말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디디스는 저녁때 다시 데려가겠다. 그럼 이만.”

테피아는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재차 관자놀이를 눌렀다.

형을 욕하는 시종들이나 귀족들은 많았다. 확실히 그는 옛날부터 고집스럽고 거만하다. 야심도 숨기려 하지 않고, 지금도 북쪽의 귀족들을 모으려고 암약한다는 소식이 귀에 들려온다.

하지만, 그가 안고 있는 상실의 아픔을, 지금의 자신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8-3

그리고 저녁때가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정무를 보러 돌아가던 테피아에게 시종이 난처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입실을 허락하자, 들은 대로 희게 질린 아피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손을 맞잡은 디디스의 얼굴도 약간 창백했고, 디디스는 어두운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머님께서 어디 갔느냐고 끈질기게 물어보시는 바람에 그만….”

  “엄마는 동생한테 끌려간 거야?”

디디스의 변명을 중단시킨 아피아가 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이뤄졌을지는 자명했다. 테피아는 아피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그런 일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디스의 엄마는 끌려갔었대.”

  “그건…….”

당사자를 앞에 둔 채 이쪽은 괜찮으니까, 하는 위로의 말을 하는 것도 망설여져 테피아는 어물거리고 말았다. 거기서 불길한 냄새를 맡았는지, 아피아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필요 없어.”

눈물과 동시에 그 말이 흘러나왔다.

  “동생 같은 거 필요 없어. 필요 없어, 필요 없어!”

  “아피아.”

뺨에 손을 대도 고개를 저으며 거부한다. 언제나처럼 이해심 있게 굴어주는 것은 기대할 수 없을 듯했다.

  “엄마를 데려가 버리는 건 필요 없어!”

  “동생은 메이를 데려가지 않아.”

테피아는 끈질기게 어린 아들에게 말을 건넸다.

  “게다가 아피아한테도 함께 놀 수 있는 상대는 필요하지?”

  “디스 있잖아.”

  “디디스는 언제나 여기에 있지 않으니까.”

  “그치만….”

아직도 납득하지 못한 듯싶은 아피아를 향해, 다그치듯이 타일렀다.

  “괜찮아. 만나게 되면 반드시 좋아할 거야. 어쨌거나 단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꼭 그럴 수만은 없다는 걸 테피아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강하게 들었다.

  “…응.”

말을 건네는 게 효과가 있었는지, 간신히 아피아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안심한 테피아가 머리를 다시 쓰다듬어주자 간지러운 양, 몸을 살짝 떨었다.

그러다 맞닿은 손이 테피아에게 아피아의 몸의 화끈거림을 전했다. 재차 이마로 확인해봤더니, 조금 열이 있는 모습이었다.

  “나른하지는 않아?”

물어보자 아피아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다음의 왕이니까, 괜찮은 거야.”

  “그래, 아피아는 훌륭해. 그래도 오늘은 그만 쉬자.”

평소와는 다른 흥분 때문에 몸이 아파진 것일 수도 있다. 시종을 불러 그를 보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잘 자.”

문 너머로 사라지는 아들을 배웅한 테피아는, 이어 말없이 서 있던 디디스에게로 돌아섰다.

  “저, 오늘은….”

  “오늘은 아피아와 놀아줘서 고마워. 이래저래 곤란하게 해버린 것 같네.”

디디스에게 사과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 역시 아직 어리고, 오히려 돌봐져야 할 나이였다.

  “조금 있으면 마중을 올 테니 객실에서 차와 과자라도 드는 게 좋겠다. 이번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상냥하게 들리도록 말을 건네자, 디디스도 사과를 요구하는 게 아님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순간 마주친 시선은 어딘지 모르게 말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그 진의를 묻기도 전에 디디스가 꾸벅 절을 하고 문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형의 말마따나, 그가 상대가 되는 데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저희들 쪽이었다.

다시 아파오기 시작한 관자놀이에, 테피아는 얼굴을 찡그렸다.

 

8-4

신의 표식을 받은 총애자라 할지라도 미래는 알 턱이 없다. 그저 주어진 일에 일희일비할 뿐인, 남들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다.

  “아피아, 이리 와. 메이랑 동생을 만나러 갈 거야.”

테피아는 아피아를 부르고 나서야 목소리가 생각보다 들떴다는 것을 깨달았다. 쭈뼛거리며 다가온 아피아가 물었다.

  “만나러?”

  “응, 이젠 괜찮아. 오래 기다렸지.”

내밀어진 손을 잡은 테피아가 성 안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메이의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게끔, 출산의 달 동안은 요양 목적의 방을 마련해서, 사람의 출입도 최소한으로 해두고 있었다. 한 달 전에 출산의 달은 끝났으나, 그녀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좀 더 상태를 지켜보는 기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아피아에게 대답한 말을 테피아가 자신의 속에서 다시 되뇌었다. 아피아도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 그 사실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도착한 문의 초인종을 울리자, 바로 얼굴을 내민 시종이 침실로 안내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부터 햇빛을 받으며, 반쯤 몸을 일으킨 메이가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안도에 찬 부드러운 미소가 다시 자신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의 팔에 자랑스럽게 안긴 작은 몸의, 더욱 작은 이마에 보이는 것은, 틀림없는 신의 증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두 번째 계승자의 탄생이었다.

이 때문에 태어난 직후의 메이가 겪은 혼란은 끔찍했다. 이전번과 같은 몸 상태가 아닐까 하는 우려는, 건강한 몸이라는 의사들의 보증을 받았음에도, 가라앉히는 데 시간이 들었다.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서인지 움찔하며 입구에서 멈춰버린 아피아를 향해, 테피아가 다정하게 재촉했다.

  “이제 됐어. 이제는 괜찮으니까.”

  “이제, 됐어….”

기쁨이 스스로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이리하여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굴러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고말고. 너는 이제….”

이쪽의 의도와는 달리, 그 말이 그에게 어떻게 들릴지 고려하지 못했다. 이쪽을 올려다보는 그의, 그 절망에 잠긴 눈동자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는.

사고가 얼어붙었다.

  “이제, 필요 없어?”

그러니까, 순간적으로 대답 같은 걸 할 수가 없었다. 굳어진 사고 때문에 생겨난 침묵을, 그는 아마도 대답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물음에 긍정하는 대답이라고.

다음 순간 손에 들린 무게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주 작은 아이의 너무 가벼운 체중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맡긴 그것은, 너무나도 사물 같은 감촉이었다.

  “아피…아?”

대답은 없었다.

맥이 풀린 몸이 맞잡은 손에서 그저 축 흘러내렸다.

  “아피아!”

재차 부르는 데 딸려온 것은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아니라, 먹먹한 비명이었다. 방금 전까지의 침착함은 거짓인 양, 메이가 안색을 잃은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팔에 안은 아기를 떨어트릴 것 같다는 걸 알아차린 시종이 서둘러 부둥켜안았다. 거기다 또 구석에 서 있던 의사들이 몰려들었다.

건강한 둘째의 탄생. 이것으로 아피아에게 계승자라며 무리시킬 것도 없고, 메이에게 부질없는 부담을 끼칠 일도 없고, 이 나라에게도 왕을 거스를 여지는 주지 않는다고. 이것으로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향한다고 생각했는데.

주위의 소란은 아득해, 테피아는 우두커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 뒤로, 아피아가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까지는 1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8-5

동경이었다.

언제나 씩씩하고, 무엇이든 충분한 이상을 해내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무척 멋있었다. 왕자라는 역할에 그토록 어울리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다.

저와는, 다르다. 그러니까 형이 제게 짜증을 내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저기, 형님.”

다가가자마자 말없이 노려보는 덕분에, 그 호칭에는 대답해주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저기…. 저기, 아피아.”

  “뭐.”

말을 고치자 퉁명스런 물음이 돌아왔다.

잘 알고 있다. 이런 나를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아버님께서 부르셨어요.”

  “알았어.”

간결한 대답과 함께, 아피아는 휘두르던 검을 칼집에 집어넣고 훈련장에서 걸어 나왔다. 그 뒷모습을 배웅하는 세피아에게, 근처에서 훈련하던 위사가 말을 걸어왔다.

  “세피아 님, 너무 담아두지 마세요. 이전보다 더 훈련을 했기 때문에, 분명 피곤해서 과묵해지셨을 거예요. 제게도 자주 있는 일입니다.”

  “응….”

배려하는 듯싶은 위로의 말에, 세피아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진정되는 듯했는데, 난데없이 옆에 있던 다른 위사의 반론이 꽂혔다.

  “그래도 하나뿐인 동생한테 저런 태도는 어떨까? 그래도 괜찮은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들어.”

그 역시 어린 왕자에 대한 호의로 야유하는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효과였다. 세피아는 금세 그를 쏘아봤다.

  “형…이 아니라, 아피아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아, 죄, 죄송합니다.”

뜻밖의 강한 어조를 돌려받은 탓인지, 사죄하는 위사를 뒤로 하고 세피아는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아피아가 나쁠 리가 없다. 나쁜 것은, 그가 짜증을 내게 만들어버리는 자신이다. 같은 표식을 받았는데도, 어째서 이렇게나 다른 걸까.

세피아는 한숨을 쉬며 감정에 이끌려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야 인정받는 게 무리일지도 몰랐다. 좀 더, 좀 더 노력해서, 따라잡지는 못해도 나름대로 생각해준다면. 하지만 그런 생각에 열심히 하면 흉한 소문이 귀에 들려온다. 제가 옥좌를 빼앗을 작정인 거라고. 아버지가 자신을 돌봐주는 것 때문에 우쭐해 있는 게 아니냐고.

아피아는 그런 시시한 소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불안은 가시질 않았다. 악의적인 소문을 건드려봤자 좋은 영향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왜 나한테 표식 같은 게 있을까.”

이런 게 없다면 이상한 소문이 나지도 않았다. 다음 계승자가 아피아라는 데 두말할 것도 없고, 두 번째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제게 그런 그릇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터덜터덜 옥좌의 방 앞까지 걸어왔다. 안쪽 방에서는 아버지와 형이 대면하고 있을 터였다. 요즘은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에 긴장이 감도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엔 어쩐지 자신의 존재도 관계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쓰잘데기 없는 소문에 신경을 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순간 눈앞에서 문이 거칠게 열렸다.

  “그럼, 좋을 대로 하세요! 내 의견 따윈 들을 필요 없잖아!”

엉겁결에 세피아는 멈춰 섰고, 문 뒤에서 외치며 뛰쳐나오던 아피아가 그 모습을 알아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묘한 침묵이 감돈 뒤, 세피아의 손이 슬쩍 잡혔다.

  “와라.”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로 방 안에 끌고 간다. 따라 나온 듯싶은 아버지가, 갑작스런 난입에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왠지 꺼림칙한 예감이 든 세피아가 형과 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다시 한 번 아까의 얘기를 해볼까요, 아버님.”

아피아의 딱딱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아피아.”

아버지의 간곡한 부름에 아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세피아를 방 안, 옥좌 앞으로 힘껏 끌고 갔다.

  “나를 위한 옥좌는 준비되지 않았다는 얘기잖아요.”

평탄한 어조로 이뤄진 그 말과, 느닷없는 힘이 더해진 손가락의 통증이 세피아의 숨을 막히게 만들었다. 거기서 형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었다.

 

8-6

대답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닥에 눈을 떨어뜨린 채인 세피아는 아버지의 표정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가 전해져왔다. 하지만 계속 입을 다물 수만은 없었는지,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피아,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게 아니야. 나는 그저….”

  “저보다 세피아가 왕에 걸맞다는 건 인정합니다.”

머뭇거리는 아버지의 말을 아피아가 단칼에 잘랐다.

  “그럼 저를 제1계승자로 삼지는 말아야지요. 부적격이라고 밝히고 없던 일로 하면 되잖아요. 어째서 이렇게 애매한 상태를 방치하십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걸까.

세피아는 복잡한 심정으로 두 사람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옥좌 얘기. 자신이 걸맞다. 아피아가 부적격.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알고 싶지 않다. 소문. 그 소문. 안 좋은 소문. 안 좋은 예감. 막연하기만 했던 불안이 세피아의 속에서 뚜렷한 형태를 갖기 시작했다.

  “부적격하다거나,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런 몸으로 왕의 소임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휴양만을 권하는데요.”

자신의 손을 움켜쥔 차가운 손가락이 다시 힘을 줬다. 거기서 전해진 약간의 떨림이 불필요하게도 세피아의 등골을 식혔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이젠 가망이 없잖습니까.”

  “그렇지 않아!”

되돌아오는 반박이 크게 울려 퍼져, 세피아는 반사적으로 아버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아피아도 아버지를 바라봤고, 두 아들의 시선을 받은 아버지 역시 자신의 목소리에 당황한 듯이 다시 한 번 작은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렇지, 않아.”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그저 떨어지는 침묵만이 아버지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해주었다.

아피아가 작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손이 풀려났고, 세피아는 그제야 형을 돌아봤다.

  “…이제 됐어요. 그럼, 이렇게 하는 편이 훨씬 나아.”

눈 깜짝할 새에 그것을 목에서 빼낸 손이 머리 위로 휘둘러졌다. 아피아는 제지할 틈을 주지 않았다.

창밖으로 내던져진 그것이 한순간 햇빛을 받아 반짝였지만, 이내 발코니 난간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아피아!”

  “두 명의 계승자라니, 혼란을 일으킬 뿐입니다. 필요가 없어진 것은 바로 퇴장해야만 해요.”

아버지의 비통한 울부짖음. 형의 굳은 대답.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금방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앞서 몸이 움직였다. 그래야만 했다. 충동 같은 것이 등을 떠밀었다. 저것을 놓치면 안 된다. 그것만은 안 된다. 그것만은.

어느새 발코니에 나와 있었다. 조금 힘을 줬을 뿐인데 몸이 난간 위로 가볍게 올라갔다. 땅은 까마득히 아래로 보였지만, 그렇다고 망설임이 일지는 않았다. 망설일 틈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남의 일처럼, 세피아는 난간을 박차고 떨어지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8-7

정신이 번쩍 들게 해준 것은 이마를 스치는 바람의 차가움이었다. 머리에서부터 급속히 피가 도는 느낌이 들고, 희미했던 시야가 점점 색을 되찾았다. 귀에 들어오는 소리에 의미가 담겼다. 이름을 부르고 있다.

  “세피아, 들려!?”

얼굴을 돌렸더니 애매하게 먼 거리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아피아가 서서, 똑같이 굳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다.

그 가슴 앞으로 움켜쥔 두 손에서 비어져 나온 체인을 발견한 세피아는, 그제야 지금까지의 흐름을 되돌아봤다. 난간에서 뛰어내려 저것을 찾아 움켜쥐고, 발코니로 되던지고, 그리고….

  “악.”

세계가 휘청거리며 흔들려서 저도 모르게 엉뚱한 소리를 냈다. 당황해 잡았던 것은 뾰족해서 살갗을 찌르는 데에다가, 시들어서 의지가 되지 않았다. 그 이전에, 높다.

  “움직이지 마. 가만히 있어.”

아버지의 거듭된 호소가 더욱 상황을 들이밀었다. 하늘 높이 뻗은 커다란 나무의 꼭대기 근처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이 상황을.

움직일 리가 만무했다.

결국 위사들을 총동원한 소동 끝에 땅으로 내려선 것은, 태양도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끌어안는 아버지에게, 세피아는 모기만한 소리로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건 없어. 그런데 저기 걸렸다는 걸 용케 알았구나. 어떻게 찾았어?”

  “…전혀 기억이 안 나.”

다시 생각해보면 알아서 뛴 게 아닌 것 같았다. 땅에 떨어졌거나 다른 가지에 걸렸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결말을 맞았을 터였다. 상상했더니 볼이 화끈거렸다.

그러다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보았다.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는 형의 모습이.

세피아는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 그 앞에 다가갔다.

  “저기…, 있잖아. 아피아, 나는….”

  “그런 걸 바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하지만 건넨 말이 튕겨져 나온다. 여전히 가슴 앞에 움켜쥔 아피아의 손 안에서 튀어나온 체인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세피아는 알아차리고 말았다.

전까지만 해도 여기서 꺾여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세피아는 말을 이었다. 말하지 않으면 안 됐다.

  “…있잖아, 아피아. 나는 아무 것도 빼앗지 않아. 빼앗을 생각 없으니까. 그러니까 안심해. 그러니까, 저기….”

곁에 있어달라고 말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다시 머리에 피가 치솟아 어지러운 기분이 돌아왔다.

  “저기….”

말을 잃어 달려 도망치려던 세피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느닷없이 붙잡히고, 뺨에 부드러운 것이 눌렸다.

꼭 껴안긴 거라고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건, 얼굴 옆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덕분이었다.

  “미안…. 미안해, 세피아.”

등을 감은 손은 어쩐지 어색해, 아까 아버지가 해줬던 것처럼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한 것처럼 따뜻하고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세피아가 계속 바라던 것이었다.

  “미안해….”

어깨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이건 바라던 게 아니다.

  “아피아, 아피아, 울지 마. 부탁이야, 울지 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세피아는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지만, 몸을 감싸안은 팔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8-8

안뜰을 에워싼 회랑에서 모습을 발견한 세피아가 들뜬 발걸음으로 달려갔다. 저쪽 또한 이쪽을 알아보고는 부드러운 미소로 맞이했다.

  “예법 공부는 진전이 있었어?”

  “으응. 뭔가.”

  “그건 익숙해지는 거니까. 실제로 몇 번 하다보면 위화감이 없어져.”

그리고 아피아는 동생의 손을 잡고, 둘이서 나란히 걸었다.

  “그럼 오늘은 호수까지 나가볼까.”

  “…되려나. 뒤집히거나 하지 않아?”

  “괜찮아. 전에도 잘 됐으니까.”

아피아가 그렇게 격려하더니,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덧붙였다.

  “만약에 뒤집히면 수영 훈련으로 바뀌겠지.”

  “으.”

키득키득 웃는 아피아에 덩달아 난처하게 웃던 세피아는,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던 이 광경이 점차 당연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겨우 여기에 닿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처음에는, 무척 기뻤다.

아피아가 얘기를 들어준다.

아피아가 웃어준다.

아피아가 챙겨준다.

아피아가 함께 있어준다.

기쁘고 기뻐서 어쩔 수가 없었다. 들뜬 마음이 귀를 막아서, 마음속에서부터 들려오는 그 말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째서 지금에서야 이렇게 해주는지, 어째서 지금까지 이렇게 해주지 않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아도 되겠냐는 그 말을.

생각하기가 싫을 뿐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눈을 돌린다고 해서 아피아의 몸이 나을 리가 없다는 것 역시도.

그리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도.

자신은 그저 알아주길 바랐던 것뿐이었다. 아피아를 얼마나 좋아하고, 아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지.

지금이라면 안다.

아피아가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건, 절망을 안팎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임을.

그때부터 아피아는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맞서기를 포기한 거다.

  “세피아가 왕위를 잇는 거야.”

이제는 그렇게 결정됐음을 받아들이고,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응, 힘낼게.”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아피아에게 그런 역할을 떠넘기면서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짊어질 수 있는 일이라면 맡고 싶었다. 그러는 게 아피아를 얕보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까.

얼버무리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올 날을 두려워하는 채로 기다렸다. 몸이 아픈데도 사실을 깨닫지 못한 척 행동하는 아피아의 모습을 보기가 너무 괴로웠다. 그런 빈도가 점차 높아지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호리라에서의 도피 여행은 놀라웠다. 몇 번인가 발작을 일으키기는 했어도, 대체로 좋은 상태로 그 거리를 전부 이동했기 때문에.

물론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 탓도 있다. 하지만, 거기서 아피아는 분명히 다시 생각해봤을 것이다.

죽고 싶지 않다, 고.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르나, 분명 그럴 터였다. 그리고 그건 자신을 위한 생각이 아니었다.

세피아는 다시 무릎 위에서 주먹을 꾹 주었다.

  “가, 아피아.”

모두와의 이별 뒤, 실이 끊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피아는 몸져누웠다. 사흘 동안이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고, 이레를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비로소 진정된 아피아에게 그렇게 호소했다.

  “같이 가. 아피아가 정말 원하는 대로. 부탁이야. 부탁이니까.”

굳은 얼굴로 듣고 있던 아피아는, 단지 이웃나라에 대한 사절을 맡는 형식으로밖에,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신의 인도일까, 지금은 함께 있다.

전서구의 알림, 그리고 시종들의 보고를 들었을 때 가슴을 졸이는 외로움과 안도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계속 방법을 찾고 있었어. 하지만 온 나라를 뒤져도 발견되지 않았고. 마술사라고 자칭하는 자를 끌어들이기도 했었지. 방법이 된다면 뭐든 상관없었으니까.”

그때 아버지의 말소리가 귀에 들려와, 세피아는 오랜 몽상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고개를 들자 아버지의 어깨 너머,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는 백부가 보였다.

  “그리고…꿈이 내게 속삭였어. 세계는 이 나라뿐만이 아니라고.”

 

8-9

거기서 이제 됐다는 듯이, 백부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입을 열고 물었다.

  “벽 너머에 희망을 걸었느냐. 무슨 방법이 있을 거라고.”

  “원래부터 조사에 사람을 보내고는 있었어.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제시간에 닿을 수 없어.”

나티아가 노골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어리석어. 역시나 국왕에는 걸맞지 않았다.”

결국 그가 꺼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절의 말뿐이었다. 몸을 굳히는 테피아를 향해, 나티아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다만, 지금도 너는 왕이야. 그것을 뒤집지 않았으니.”

그리고 입을 다문 동생을 향해 충고처럼 말했다.

  “테피아. 설마 이제 와서 망설이는 것은 아니겠지.”

그 어조는 어딘가 부드럽고, 타이르는 듯했다.

  “청취는 이미 끝났다. 나는 숨김없이 얘기했고, 다른 이들의 증언과도 모순되는 부분은 없을 거야.”

일을 저지른 이상, 나티아가 살아날 길은 없다. 그의 말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거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그의 소망이 아니었다.

  “어서 형을 집행할 낙관을 찍어라. 애달파하는 취미는 없으니.”

나티아의 내뱉음에 테피아가 신음하듯 질문을 던졌다.

  “형님. 뭔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더 없나요.”

  “의견이라면 얼마든지 있지만. 네가 결코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입에 담을 의미가 없다.”

그런 선언을 들으면, 더 이상 이야기를 질질 끌 이유도 없어진다. 당황해 입을 다문 동생에게, 형이 불쑥 중얼거렸다.

  “다만, 하나. 용납될 수 있다면.”

나티아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빈 틈 없는 자세로 왕과 마주앉았다.

  “아들의 목숨만은 넘어가줘. 어리석기 때문에 아버지를 순순히 따랐을 뿐이지, 본인의 의사는 없었어. 이렇게 보기 흉한 결말을 맞았으니 더 이상 왕가에 보복을 할 수도 없을 테고.”

그러자 디디스가 크게 숨을 들이켜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버지를 돌아봤다. 뭔가 말하려는 디디스를 침묵시킨 것은 아버지의 날카로운 눈총이었다.

  “그것만 부탁한다.”

그리고 묶인 자세 그대로, 나티아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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