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19-1
【다류라 분열】
아네키우스력 7200년대 후반, 통일국가 다류라는 세발족의 나라 리탄트와 유우족·생이족의 나라 호리라로 분열됐다. 분열전쟁으로 불리는 긴 전투 끝에 국경선을 따라 건설된 벽에 의해 양자는 완전히 절교한다.
분쟁 원인은 지금으로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마물과 손을 잡은 세발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호리라에서의 정설이다.
19-2
맥이 빠질 정도로 간단한 침입이었다.
누군가에게 검문을 받거나 캐물어지는 일 없이, 네 사람은 근처 마을 여관에 들어섰다.
“벗어도 괜찮겠지.”
창문을 닫으며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뮤아가, 닛카에게서 빌린 윗도리를 벗어던지고 날개를 펼쳤다.
“으―, 갑갑했어.”
평소에는 꺼내고 지냈던 만큼, 옷 아래 숨겨두고 있으면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는 노숙을 해온 탓에 섣불리 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성가시면 내가 뜯어줄….”
“됐어.”
시드의 놀림 섞인 제안을 뮤아가 냉정하게 거절했다. 아무 생각 없이 뜯어냈다가 등의 살점까지 함께 다친 바람에, 균형이 잡히지 않는지 때때로 넘어지는 시드를 따라했다간, 변변찮으리라는 게 자명해 보였다. 대체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옷 안에 날개가 있을 거라고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눈치였다.
“정말로 안 들키는구나.”
“아피아랑 세피아도 세발족이라고 간파당한 적 없었죠?”
뮤아의 탄식에, 머리에 천을 둘러 귀를 감춘 닛카가 대답했다.
그래,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벽을 넘는 자가 있을 거라고는. 마을에 살던 시절의 자신이 그랬듯이.
될 수 있는 한 마을을 피해 숲속을 지나온 것은 기우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물론 이종족이라는 걸 들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세피아의 모습을 최대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조심해서 나쁠 것도 없었지만.
여기서 마을로 들어오기로 한 건 체력 문제와, 뭣보다도 식량이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가능하다면 왕도에 대한 정보도 입수해두고 싶었다.
“우선은 장보러 가야지.”
무심코 그렇게 말하던 뮤아는 어딘가에 생각이 미치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그래요?”
그렇게 묻는 닛카에게 금방 정신을 차린 뮤아가 반응했다.
“그러고 보니 어쩌지…, 돈은.”
너무 순조롭게 풀려서 여기가 타국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호리라의 돈을 쓸 수 있을 리는 당연히 없는데.
세피아를 쳐다봤지만, 세피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처음부터 경비는 아피아가 관리했던 모양이고, 아마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는 숙박비조차 지불하지 못해 범죄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아, 괜찮아요.”
하지만 닛카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동전 한 닢을 내밀었다.
“시드가 좋은 걸 갖고 있었거든요. 비용은 전부 시드가 부담해도 괜찮죠?”
“맘대로 써.”
받아든 동전은 꽤 낡았지만, 금화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뮤아의 손을 들여다본 세피아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리탄트 돈이 아니야.”
“맞아요. 그건 다류라 시대에 쓰이던 옛 화폐니까.”
그 말을 듣고 자세히 살펴봤더니, 그런 글자가 어렴풋이 읽혔다.
“그러네, 이거라면 리탄트에도 남아있었을 테니까.”
“그렇지요.”
환금을 하더라도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다.
“그치만 애들이 가지고 있었다기에는.”
시드가 여태껏 써왔을 테니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짓은 어떻게든 지양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도 괜찮아요. 저희들은 여기서 어린애가 아니고.”
“아, 그러면 아이는 나뿐인 거구나.”
세피아가 손뼉을 치고, 뮤아도 뒤늦게 이해했다. 덕분에 여관도 손쉽게 잡았을 테다.
성별이 있다는 것은, 아무리 어려보이더라도, 리탄트에선 성인이라는 것이다.
“그거 좋네. 술도 문제 없다는 거고.”
신바람이 나서 다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한 시드를, 뮤아가 째려봤다.
19-3
“여기서부터 왕도까지는, 별일이 없다면 사흘 안에 도착할 거야.”
세피아가 지도에 길을 그려 넣었다.
“하지만 성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뒤이어 그려진 성의 조감도를 보아하니, 그 말대로 침입은 어려워 보였다.
성은 호수 위에 세워졌고, 성과 성 아래의 도시를 연결하는 것은 다리 하나뿐이었다. 당연히 마을에서 배를 준비해가는 건 용납되지 않을 거고, 대체로 호수를 나아간다면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제발 잡아주세요, 하는 짓이다.
“그보다 먼저 생각해둘 게 있어요.”
이럴 때 힘이 되어줄 닛카에게 시선을 돌렸더니, 뜻밖에도 닛카는 찬물을 끼얹었다.
“뭔데.”
“무슨 목적으로 성에 침입하는지요.”
“빤하잖아, 놈을 죽…”
“시드는 그렇다 치고, 아피아를 구하려는 거잖아?”
뮤아가 불온한 단어를 끊으며 대답했다.
“잘 구해냈다고 쳐요. 그 다음에는?”
“그건….”
그대로 호리라로 돌아가 성산을 향해 갈 수는 없고, 그럴 의미도 없다. 여기까지 발을 내민 이상, 성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버님을 찾아내서, 백부님을 고발한다. 그것밖에 없어.”
즉 이 머릿수로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설마 상대가 먼저 쳐들어올 거라고는 생각해두지 않았을 테니까, 비밀리에 얼마나 빠르게 행동하는지가 관건이다.
“아니면 성으로 잠입하는 건 포기하고, 여기서 다시 세리크 영지인 남쪽으로 가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세피아가 호리라에 있다고 확인됐으니 리탄트 안의 경계는 필연적으로 느슨해졌을 터였다.
“하? 뭐야. 나는 안 가.”
하지만 시드가 즉각 불만을 터트린다. 세피아 역시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여기까지 왔는데 방향을 돌리는 것도 무리 아냐?”
세 사람에게 모두 부정적인 답을 들은 닛카가 어깨를 움츠렸다.
“알아요. 확인한 것뿐이니까.”
만에 하나, 세피아가 남쪽으로 간다고 해도 시드는 따라갈 리 없고, 시드가 성에 들어간다면 리탄트의 경계는 금세 삼엄해질 것이다. 의미가 없다.
“다만, 앞으로 하려는 일이 가장 무모한 짓이라는 것만 알아주시길.”
말려봤자 별 수 없다면, 뛰어들 수밖에 없다.
“저희들에게 유리한 것도 몇 가지 있어요. 예컨대, 백성들에게는 반역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것.”
왕성에서 전염병이 돌아 성 안의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고, 왕족들도 몸져누웠다는 소문은 아직 거둬지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상층부에서만 협상과 회유가 은밀하게 이뤄져 탈취를 정당화하려는 기반이 다져지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라를 호리라에 개방할 생각이라면 반역을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겠죠. 그러면 세력이 나뉘고, 기다리는 것은 분쟁뿐이에요.”
반역자 측도 그 사태는 피하고 싶을 게 확실했다. 헛되이 나라를 망가트려봤자 이득이 되지 않으니, 평화롭게 권력을 빼앗아오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기에 눈에 띄는 짓은 그들도 피하고 싶다는 것.
“아마 성 안도 전부는 장악하지 못한 게 아닐까. 이에 대해선 왕도에 도착해서 다시 살펴봐야겠지만, 너무 크게 일을 벌여도 의심을 사니까요.”
성 안의 사람들을 전부 포섭하거나 갈아치우는 건 불가능하고, 병을 빌미로 죽여 놓는 것도 한계가 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채로, 세피아가 있었을 때와 똑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세피아에게 물었더니,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의 이름이 수십 명 가까이 언급됐다.
“너무 많지 않아?”
뮤아의 솔직한 물음에, 세피아가 얼굴을 붉혔다.
“…위엄이 없어서 그런 거라는 말은 자주 들었어.”
“아니, 별로 나쁘진 않지만.”
아마 세피아는 성에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딱히 어깨에 힘을 주고 거들먹거리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격상 안팎으로 귀여움을 받았으리라는 게 짐작됐다.
“이 명단만 있으면 성 안의 누군가랑 연결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필요한 것은 정보다. 선수를 빼앗기는 순간 승산이 없어진다.
우선은 왕도까지, 들키지 않고 이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19-4
호수를 건너온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와 얇은 커튼을 나부낀다. 약간은 축축한, 정겨운 냄새.
감금된 곳이 자신의 방은 아니었지만, 보이는 경치로 같은 탑에 있는 곳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꼼꼼히 점검해뒀는지, 가구를 이리저리 움직인 흔적이 보였다.
아피아는 침대 끝에 앉아 잠자코 밖을 내다보고만 있었다. 방 안에는 위사 두 명이 서서 감시의 눈길을 보낸다. 도착한 지도 어느 정도 지났건만, 사라리나트와 제난 모두 여기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용하던 복도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아피아는 간신히 몸을 바로 세우며 앞으로의 대면을 준비했다. 역시나, 열린 문 뒤에서 나타난 것은 백부와 사촌형제였다.
“어이, 뭘 하는 거야.”
나타난 나티아는 곧장 앞에 서 있던 위사를 힐난했다.
“손발의 족쇄를 풀어줘. 불쌍하게.”
당연히 위사가 멋대로 구속한 것도 아니지만, 위사들은 사죄하며 족쇄를 풀어냈다. 아피아는 고분고분하게 그저 고개 들어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백부님.”
“아, 얼굴을 본 지 얼마나 됐더라.”
“두 달 정도 됐지요.”
“그런가. 오랫동안 격조했군.”
천연덕스러운 대화가 흘러간다.
“조금 마른 것 같은데.”
“아무래도 병이 있으니까요.”
“아아, 너무하지. 너만이라도 나아진 건 다행이야.”
하지만 이러는 것도 한계다. 아피아는 곧장 나티아를 노려보며 쥐어짜듯이 물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건강은?”
“좋지 않아. 안타깝게도.”
“만나게 해줘.”
“그건 안 되지.”
“만나게 해주지 않으면, 너희에게 협력하지도 않겠어.”
금세 차오른 불온한 공기에, 위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던 나티아가 나서서 벽 쪽에 대기하도록 명령했다.
“우리 사이에 불행한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그러며 짐짓 어깨를 으쓱하더니, 달래는 어조로 말을 건넨다.
“심술을 부리는 게 아니야. 널 걱정하는 거란다.”
“고맙군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나봤자 병 같은 게 옮을 리는 절대로 없으니까.”
단조로운 시비에, 나티아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다, 알았어. 서로 툭 터놓고 얘기해볼까.”
아피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티아가 의자를 끌어와 앞에 마주 앉았다. 말을 고르는 건지, 잠시 침묵이 감돈다.
“…아피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는 확실히 솔직하게 말하기로 한 듯했다. 내뱉은 말에 진지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 녀석의 계획을, 벽을 연다는 것을 정말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하나?”
여전히 말을 듣고만 있는 아피아를 향해, 나티아가 거듭 말해왔다.
“이제 와서 이종족과 교류한다는 게 무슨 짓이야. 초래되는 것은 혼란과 몰락뿐일 텐데. 어째서 굳이 이 나라의 평온을 깨트리려는 거지?”
“…아버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건 일그러진 망집에 사로잡혀 있는 거야. 이젠 설득조차 되지 않아.”
쓰라린 한숨이 나티아의 입에서 크게 흘러나왔다.
“마술사를 자처하는 수상한 인물을 출입시키기까지 했다고 들었어. 더 이상은, 왕이라고 해도 멋대로 하게 둘 수 없지. 동생을 바로잡는 게 형의 일이니까.”
백부는 올바르다.
아피아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을 납득시킬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동시에, 그는.
“백부님, 대답해주십시오.”
아피아는 물었다.
“당신은 그렇게나 왕이 되고 싶었습니까?”
19-5
단 한 점의 흐림도 없이 올바른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하는 것만큼 행동도 올곧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괜한 트집이라며 성을 내도 당연할 아피아의 물음에, 나티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전혀 다른 대답을 돌려주었다.
“아피아, 나는 솔직히 말해서 너를 동정하는 거란다.”
들어도 곤란해질 사람은 없을 텐데, 그는 목소리를 약간 낮춘 채 속삭이듯이 말했다.
“너는 형이고, 재능이 넘치고, 심지어 표식을 받았는데도 가볍게 보이고 있어.”
아피아는 눈을 마주치는 것도 그만두고 고개를 숙였다. 섣불리 반응해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데리고 다니는 것은 그렇게 대인관계 외에는 별 볼일 없는 동생뿐이고, 너는 언제나 뒤에 남겨지지.”
나티아의 어조는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아피아는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형과 동생. 인정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이 성을 지키도록 했다는 듣기 좋은 말도, 내게는 동생 쪽을 아끼느라 너를 소홀히 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어. …그렇지 않아?”
아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을 쳐다 보며 침묵을 지켰다. 나티아 또한 아피아의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걱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피아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왕위는 네가 아니라 동생이 물려받을 거라는 소문마저 돌지. 얼마나 지독한 소문인가.”
얹어진 손 안에서 몸이 굳어진 게 전해진 탓일까, 그는 마침내 거기까지 파고들었다.
“그 사실을 느꼈으니까, 너도, 그 애를 좋아하지 않았지?”
“…나는.”
내뱉은 말은 주울 수 없다. 다음 말을 재촉하는 백부의 시선을 여실히 느낀 아피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 그렇지. 원망하고말고.
그것은 틀림없이 잘못된 원한, 어리석기만 할 뿐인 화풀이. 몇 번이나 그 애의 마음을 짓밟았던가. 그 아픔은 무엇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것.
그러니까, 나는. 무엇보다도 그 애를 위해서.
아피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더 이상 당신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 내 조건부터 들어. 어머님을 풀어줘.”
백부를 향해 거부의 말을 내뱉는다.
“들어주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들을 따를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라.”
잠시 후 머리 위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겨우 돌아왔으니. 일단은 편히 귀한 몸을 쉬어두도록 해. 그러면 마음도 안정될 테지.”
위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멀어졌다. 나티아는 오늘은 설득을 그만두고 물러나기로 한 것 같았다. 고개 숙인 아피아의 귀에 발소리,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닿았다.
그러다 고개를 든 아피아는 눈앞에서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보았다.
디디스였다.
19-6
본인의 아버지와 함께 방으로 들어온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뒤에 서 있기만 했다. 그래서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아버지를 따라 나가지 않고, 웬일로 남아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가지 않을 건가.”
당연히 그렇게 물어봤지만, 디디스는 얼굴을 찌푸리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할말이 있는 듯했다.
마침 잘됐다. 이쪽도 그에게 할 얘기가 있다.
상대가 먼저 나서길 기다려주자, 디디스가 서서히 다가왔다.
“머리 잘랐구나.”
그렇게 손을 뻗어 머리를 만지려 든다. 그러다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목에 그건.”
아피아가 손을 뿌리치며 디디스를 노려봤다.
“사라리나트를 제대로 봐줘. 그가 너희들이 바라던 대로 해냈으니까.”
모순된 소리라는 걸 아는데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벽 너머까지 보내고, 위험한 상황에 노출시키며 함부로 대한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를 말려들게 만들지 마. 알겠나.”
보상이 주어지면, 사라리나트가 나서서 가까워지려고 하겠지만, 그래도.
“이런 짓은 더 이상 용납 못해.”
사라리나트를 제난과 함께 파견한 의미를 모른다고 말하게 두지는 않겠다. 물론 설득을 위해서겠지만, 그 이상으로, 사라리나트는 인질로서의 역할을 맡았던 거다. 디디스의 발상은 아니었겠지. 하지만 사라리나트를 구슬릴 만한 인물은 눈앞의 그밖에 없다.
“아버지 말만 듣고 그런 짓을 저지르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
디디스는 언제나 이렇다. 디디스가 아버지를 거역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언제나 관심 없다는 얼굴로 아버지의 말을 따르기만 할 뿐이다.
옛날에는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 같다. 함께 놀았던 기억은 아득히 멀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곧잘 장난도 치고, 무엇보다 잘 웃었던 것 같은 추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돼 버렸을까. 지금의 디디스는 아버지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문을 연 것이, 아피아로서는 뜻밖이었다.
“딱히, 아버지가 바라서만은 아니야. 내가 원했던 것이기도 해.”
디디스의 바람.
몰랐다. 그는 지금까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갖고 싶은 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 주제에. 뭘 원해서 이러는 거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 그를 향해 아피아가 캐물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피하지 않았더니, 턱이 붙잡혀 위를 보게 된다.
“원하는 것은 쭉, 단 하나뿐.”
그는 보고 있었다.
이마의 선정인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손에 들어오지 않아.”
그 말은 즉, 그의 바람이 왕위라는 것이다.
“놔라!”
반쯤은 들이박기라도 할 것처럼 아피아가 손을 뿌리쳤다. 그 반동에 의해 저 역시 앉아있던 침대에서 쓰러졌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잘 되지 않는다.
“나가!”
다가오는 낌새에, 아피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서 내뱉었다.
“나가, 나가라!”
떼라도 쓰는 양 똑같은 말만을 반복하다보면, 기척은 어느새 희미해졌다. 이내 멀어지는 발소리와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려오고, 방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아피아는 몸을 일으키길 포기한 채, 힘이 들지 않는 손발을 아무렇게나 내버려두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분함으로 눈물이 고였다.
19-7
왕도는 그 권세를 분명하게 드러내야만 한다. 그것은 호리라나 리탄트나 다르지 않은지, 성과 도심을 분명히 분리해둔 이 피아칸트에서조차도, 도시의 건물은 성을 본뜬 듯한 석조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줄곧 상상해왔던 광경을 목도한 뮤아가 새삼스레 감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녀가 상상했던 것은 호리라의 왕도였지, 설마 리탄트의 왕도를 먼저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지만.
“리라스도 이런 느낌?”
“뭐, 비슷한가.”
시드에게 물었더니, 감흥 없는 얼굴과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돌바닥은 가끔씩 발에 걸려 넘어질 것만 같다. 흙을 죄다 덮어버린 그 모습은, 마치 마물의 침입은 조금이라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들자 집집의 지붕 너머로 우뚝 솟아있는 탑이 보인다. 그것이 바로 리탄트의 중심, 호수에 떠있는 왕성이었다.
저기에 침입한다.
왕도에 들어서기 전, 호숫가를 걸으며 모습을 확인했었다. 물에 둘러싸인, 높은 성벽을 보면 역시 기가 죽는다. 세피아의 말로는, 분열전쟁 무렵 본거지로 삼았던 곳에 세워진 거라 한다.
아무래도 힘을 써서 들어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여기에요. 여기, 여기.”
노리고 있던 가게 앞에서 말을 건 닛카의 손짓에 따라, 세 사람은 근처 골목에 몸을 숨겼다.
“그 사람은 아직 안 나왔어?”
“네, 아직요. 세피아, 확인해주세요.”
“응.”
지켜보고 있는 건 가게의 뒷문이다.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세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우레니!”
갑자기 이름을 불린 그녀는 당황한 듯 멈춰 서서 두리번거리다가, 골목에 나와있는 세피아의 얼굴을 알아보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 그게, 잘 지냈어?”
굳어버린 그녀를 향해 세피아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세, 세피아 님!”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왜 이런 데 계세요. 몸은 괜찮으시고요!?”
뒤이어 달려오려다 멈칫한다. 그녀가 망설인 이유를 알아챈 세피아는 대답했다.
“나, 병 같은 거 안 걸렸어.”
성에서 발생했다고 알려진 건 전염병이다. 무척 많은 사람이 걸려서 죽었다든가, 거리에까지 퍼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소문이 돌고 있었다. 처음에는 왕도를 벗어나는 이들도 있었다지만, 두 달 정도 지나도 그럴 기미가 없어 차츰 진정된 듯싶었다.
우레니는 세피아의 말에 탄식처럼 답했다.
“아, 역시. 역시나 그랬군요.”
그리고는 다시 세피아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서 꼭 껴안았다.
“그렇다면 아버님이나 어머님께서는….”
“아무도 병에 걸리지 않았어. 나 말고 모두 잡혀있어.”
“무슨 일이야?”
곧 우레니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죄송해요, 세피아 님. 저는, 도망치고 말았어요.”
19-8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요.”
언제까지고 골목길에서 얘기할 수는 없었다. 우레니의 인도에 따라 그녀의 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다섯 사람이 식탁 앞에 앉았다.
“병에 대한 얘기는 너무 뜬금없고 한정적이었어요. 폐하와 그 일가, 그리고 곁에서 그분들을 모시던 시종들이 자취를 감췄고, 저희는 성 안에 출입하는 게 금지됐죠. 저는 방 담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황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비슷했고요.”
그녀의 이야기에서, 세피아 형제가 도망친 뒤 성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전해져왔다.
“그리고 조금씩… 죽었다는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네테 선생님이나 리제안 시종장이나…, 열몇 명쯤.”
“선생님이랑 리제안이.”
이름을 듣고 파랗게 질린 세피아를 본 닛카가 주저하며 끼어들었다.
“실례지만…, 시체도 확인됐나요?”
“아뇨, 전염병이라서 서둘러 불에 태워 매장했다고.”
“안 죽었을 수도 있다는 거야?”
작은 희망을 품은 세피아의 물음에, 닛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아마….”
생사를 위장할 의미는 없어 보인다. 아마도 병으로 죽은 것은 아니라는 걸 숨기기 위한 조치다. 세피아가 입술을 깨물고 무릎 위로 주먹을 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고가 내려왔어요. 왕가를 간호하려는 사람들을 모집하는. 물론 저는 거기 지원할 생각이었는데, 알아차리고 말았어요. 뭔가 이상하다고.”
슬픔에 잠겨 눈을 내리깔고 있던 우레니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자신을 달래기라도 하듯이 말했다.
“이런 모집은 병이 발생한 초반에 해야 하지 않나요. 게다가 어째서 명령이 아니라 모집인지. 그래서 저는 거기 지원하지 않고…, 성에 있는 걸 견딜 수도 없어서 일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세피아의 말대로, 그녀는 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 만큼 왕가에 충직한 자를 골라내려는 것이다. 지원했더라면 이미 목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만둔 것에 대해 의심을 사지는 않았나요?”
“그만둔 사람들이 워낙 많았으니까요. 저도 병을 두려워한 걸로 보였겠죠.”
그런 이유도 없지는 않지만, 그녀가 자조하며 말했다.
“이런 소문도 돌기 시작했어요. …이 전염병은, 아네키우스의 벌을 받은 거라고.”
“어떻게 봐도 의도적으로 퍼트린 거군요, 그거.”
사정을 보아하니 기반을 다지고 있는 중인 게 틀림없다.
“어쨌든, 성 안이 어수선한 것도 분명해 보이네요.”
자세한 것을 알아낸 닛카가 턱을 매만졌다.
“정공법으로 갈까요?”
'번역 > Southwa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1장-사람의 장: 21화. 다다른 그곳 (0) | 2020.04.30 |
---|---|
제 1장-사람의 장: 20화. 이어가는 것 (0) | 2020.04.30 |
제 1장-사람의 장: 18화. 숲 밑에 사는 (0) | 2020.04.30 |
제 1장-사람의 장: 17화. 잃은 것, 되찾을 것 (0) | 2020.04.30 |
제 1장-사람의 장: 16화. 쫓는 자, 쫓기는 자 (0) | 2020.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