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18-1
그 숲의 깊이는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빽빽이 우거진 잎에 가려 하늘이 보이지 않고, 낮인데도 어두운 데다 냉기마저 감돈다. 눈앞에 하얀 안개도 곧잘 껴서, 방심하면 어디를 걷고 있는지 모르게 된다.
세피아는 혼자 그 숲을 헤치고 있었다.
북쪽으로.
지금까지와는 반대 방향으로.
짙은 공기 속에서 자칫하면 잊어버릴 목적.
벽을 넘기 위해서.
그저, 북쪽으로.
그리고 그 앞에, 그 남자가 나타났다.
무성한 초목들 사이로 남자가 슬며시 모습을 보인다. 놀라서 멈춰 선 세피아가 처음 느낀 것은 ‘하얗다’는 것이었다. 그의 긴 머리와 피부색, 입고 있는 옷 때문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그의 종잡을 수 없는 분위기 탓이었다. 색채가 희박한 인상을 두른 남자가 세피아를 쳐다본다.
아니야.
순간 그것만이 찌르르 전해져온다.
만난 장소 때문일지도 모른다. 두려움을 지나치게 느끼고 있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이성적인 생각이 압도적인 감정에 의해 밀려난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당신은 누구예요?”
물음에 물음이 되돌아왔다. 남자는 맑고 온화한 목소리를 지녔다.
“당신이 보기엔 무엇으로 보이나요?”
이전에 나눴던 대화가 세피아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정말 안쪽에 마물이 있을까?’
‘있을지도. 마술사도 있을 거야.’
“혹시 마술사…라거나?”
세피아의 대답에,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아요.”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긍정이라고 생각해도 좋았다. 이 그라드네라에서 마술사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인간은 없을 테니까.
다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 세피아에게서 눈길을 거둔 남자가 홀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왔군요, 그 순간이.”
“마술사님은 왜 이런 곳에?”
대삼림 한복판. 마의 초원만큼은 아니더라도, 발을 디디기가 망셜여지는 금단의 땅.
그래서 시드가 그 말을 꺼냈을 때 찬성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 그런 터무니없는 말만 하는 거야!”
뮤아가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넌 휴식이 필요한 부상자고, 숲을 넘을 길도 없고, 벽을 넘어가고 나선 어쩔 건데!”
“시끄러워.”
반면 시드는 뮤아를 흘끗 쳐다봤을 따름이었다.
“나는 안 죽어. 숲이 어쨌다고. 넘어가고 나서? 놈을 죽인다.”
늘어놓은 말은 설득 따윈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 뮤아가 골머리를 앓게 만들기에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안―된―다―고. 뭐야, 내 평온했던 13년은 어디 갔어?”
“시드와 만난 순간부터 이미 평온하지 않게 됐는데요.”
“냉정하게 따지는 건 저쪽에나 해줘.”
“그것도 냉정하게 말해서 무리예요.”
닛카의 말대로, 애초에 시드를 말리는 건 무리다.
결국 네 사람은 숲을 가로지르려는 시도를 했고, 훌륭하게 길을 잃었다.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중, 세피아 앞에 나타난 것이 이 하얀 남자였다.
“저는, 그렇네요. 그저 단순히 숨어있는 것뿐이에요.”
“도망쳐서?”
“그런 걸까요.”
남자의 미소가 살짝 흐려진 바람에, 세피아는 더 이상 캐묻는 것도 망설여졌다. 그런 자세한 사정은 알지 않는 쪽이 좋을지도 모르고,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느냐다.
“나를 어떻게 할 거야?”
그래서 직접적으로 물어본다.
“…환영하지는 않지만, 내쫓지도 않아요. 이리 오세요.”
남자는 몸을 휘날려 안개 낀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세피아는 잠시 망설였으나, 여기 있어봤자 꼼짝도 못할 게 분명했기 때문에 따라가기로 했다.
18-2
기다리는 데 지치기 직전에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그 남자와 뮤아가 있었다. 뮤아는 세피아를 알아보고 안도했다.
“그럼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겠어요.”
뮤아를 안에 들인 남자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다행이다. 따라와도 되는지 한참 망설였거든.”
안내받은 곳은 남자의 집으로 보이는 장소였다. 꽤 오래된 건물인지 꾸밈은 없지만 잘 짜인 구조와 사용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래도 역시 사람 사는 냄새는 희미했다.
뮤아가 세피아의 옆에 앉아, 테이블에 팔꿈치를 짚었다.
“시드랑 닛카를 찾으러 간 걸까?”
“그런 것 같은데. …저기, 그 사람, 누구?”
세피아는 뮤아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어떤 위화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짐작했다.
“마술사라고 불러도 된댔어.”
“응, 마술사…. 이런 숲속에 숨어 산다니 그게 제일 딱 들어맞긴 하는데.”
뮤아는 잠시 말을 고르는가 싶더니, 그럴듯한 것을 찾지 못한 듯 마구 뱉어냈다.
“어떻게 말하면 좋지. 너무 딱 들어맞는다고 할까.”
그 위화감은 세피아도 잘 알고 있다. 상황이 너무 술술 풀려서 오히려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이다.
“…뭔가 등이 찌릿찌릿해.”
그 말에 들여다본 뮤아의 등은 닭살 같은 게 나 있었다.
“왠지 소름이 돋아.”
“나쁜 사람처럼은 안 보이지만, 뭐랄까, 좋은 인상도 아니야.”
뮤아는 스스로의 팔을 끌어안고, 탁자에 뺨을 댄 채 엎드려 탄식했다.
“으, 머리도 아프고.”
“괜찮아?”
“그러고 보니 그 사람한테 뭔가 말했어?”
“별로…. 사정이 있어서 숲의 북쪽으로 나가려고 했다는 것 정도.”
“나도 거의 말하지 않았어. 인원수는 얘기했고?”
“아, 동행자가 있다고는 했는데…, 몇 명인지는 말 안 했어.”
“나도. 그런데.”
뮤아가 잠시 입을 다물고 문 쪽을 쳐다봤다.
“그 사람, 두 사람 더 있다는 걸 알고 있더라.”
게다가 신원을 확인하지도 않고 뮤아를 세피아에게 데려왔더랬다.
“어떻게 우릴 찾은 거지?”
“…마술?”
“그건가….”
마술이라고 해 버리면,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다. 두 사람 모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마술사에 대해서는 이야기 속 악당이라는 인상밖에 가지고 있지 않고, 마술은 신을 거역하는 마물의 일이라고만 알고 있다.
묘한 침묵이 방 안을 감도는 그 때, 갑자기 문이 열려 뮤아가 펄쩍 일어났다.
문 앞에 그 남자와 닛카가 있었다.
18-3
남자는 금방 다시 나가버려 집 안에는 세 사람만이 남겨졌다.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은 닛카는 두 사람처럼 얌전히 기다리겠다고 들지는 않았다.
“여기서 움직이지 말라는 얘긴 안 했죠?”
“기다리라는 얘기는 했는데.”
“금지한 건 없고.”
확인을 하더니 곧장 집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예의가 없잖아.”
뮤아는 어이없어하며 부엌을 들여다보는 닛카에게 말을 건넸다.
“예의나 차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사람이 어째서 우리를 모아두는지도 모르겠고.”
“그럼 닛카 선생님의 생각은?”
“이 거실만 봐도 명백하게, 이 집은 혼자 숨어 사는 마술사를 위한 공간이 아니에요.”
커다란 테이블과 여섯 개 정도 늘어놓은 통나무 의자. 방 한 켠에 마련된 크고 텅 빈 선반.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크고, 아무 것도 없다.
“부엌을 보면 더 잘 알 거예요.”
그 말에 뮤아와 세피아도 일어나 부엌을 들여다봤다. 그곳은 사용된 흔적은커녕 먹을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그 사람이 여기 살지는 않는다는 거네.”
“안심할 요소인지 불안해할 요소인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요.”
자신이 거주하는 영역에 들이지 않았다는 건 경계하고 있다는 말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서로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말은 즉 어설프게 손을 내밀었다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마…괜찮을 텐데.”
중얼거리던 세피아가 닛카와 뮤아의 눈길을 받고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저기, 그냥 직감일 뿐이지만. 뭔가 하려면 뿔뿔이 흩어져 있을 때 했을 것 같아서.”
입막음 같은 정리가 목적이라면 일부러 전원을 한 데 모아둘 의미가 없다.
“저도 뭐, 지금으로선 그 의견에 일단 동의합니다.”
“맞아. 만에 하나, 그 사람이 정말로 마술사라서 괜찮지 않다면, 어떻게 해도 소용없을 것 같기도 하고. 마술로 몰살당하려나.”
테이블 앞에 털썩 앉으며 비관적인 견해를 밝히는 뮤아를 향해, 닛카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완전히 이상한 방향으로 나섰으니.”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시드요.”
닛카는 자리에 없는 사람에게로 책임을 전가하며 출입구 쪽을 쳐다봤다.
“그나저나 반드시 싸우게 될 것 같은데, 같이 가지 않아도 됐던 걸까요?”
“그러고 보니 좀 늦는 것 같기도….”
세피아도 덩달아 문을 바라보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뮤아도, 닛카도 숨 돌릴 틈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빨리 데려왔지만, 지금은 아직 남자가 돌아오지 않았다. 시드 성격상 느닷없이 나타난 남자의 따라오라는 말을 순순히 들어줄 리도 없었다.
“싸우고 있는 거지, 이거.”
“그 시합은 누가 이길까요.”
“어느 쪽이 이겨도 곤란한 것 같은데.”
무심코 잊기 십상이지만, 시드는 부상자다. 그것도 꽤 중상의. 걷는 것만으로도 아플 텐데,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뭐랄까, 귀찮을 정도로 튼튼하지.”
보통은 앓고 있으면 숲을 넘는다는 소리는 일절 하지 않을 것이다.
“…세피아, 미안. 괜찮지?”
뮤아의 확인에 세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건 이제 싫으니까….”
“응.”
뮤아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문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나 세 사람 모두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문 너머에 있는 것은 역시나 그 남자였지만, 그 뒤에 시드는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의 시선을 받은 남자가 난처한 듯 웃었다.
“잠깐 잠들어 버려서요. 누가 깨워주시겠어요?”
말을 듣고 내려다본 남자의 발밑에 낯익은 머리가 있다.
“제가 깨웠다간 성가신 일이 될 것 같거든요.”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쉬이 짐작돼, 예상대로의 전개에 뮤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8-4
곯아떨어져 있던 시드는 흔들었을 뿐인데 바로 눈을 떴다.
“뭐냐 네놈은!”
일어나자마자 그렇게 호통을 친 시드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세피아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어? 그 하얀 놈은 어디 갔어?”
“뒤에 있어요.”
닛카의 지적에 당황하며 돌아본 시드를 향해, 남자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적이 아니에요.”
“그럼 뭐야. 아군?”
“아군도 아니겠죠.”
부드럽게, 그러나 서슴없이 남자는 질문을 부정한다. 시드는 더욱 더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뭐야 이 녀석.”
그러고는 세피아에게 묻는다.
“저기, 마술사님이라고.”
“하, 마술사라고? 그럼 갑자기 있는 곳이 바뀐 건 마법으로 이동해서냐?”
“너 자고 있었어.”
아직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싶은 시드에게, 뮤아가 따지고 들었다.
“왜 내가 잤어?”
“아니 뭐, 마술이라도 당한 거 아냐?”
시드는 잠시 회상이라도 하는 것 같더니, 이내 남자를 향해 물었다.
“그러냐?”
“글쎄요, 마술이라고 불러도 돼요.”
남자는 여전히 모호한 말투로 긍정했다. 시드는 조금도 납득하지 않았는지, 그저 콧방귀를 뀌었다.
“갑자기 졸렸었나요? 지금 기분은?”
“반짝반짝했었어?”
“기억 안 나. 뭐야.”
흥미진진하게 다가와 물어대는 닛카와 뮤아는 뒷전으로 한 시드가 남자를 정면으로 노려봤다.
“마술사놈, 사람을 재우는 것 말고는 뭘 할 수 있어.”
여전히 쓸데없이 거만한 말투지만, 그를 대하는 남자는 겁내거나 기분 나빠하는 기색도 없이 담담히 대답했다.
“당신들을 여기서 내보내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네 사람에게로 눈을 돌렸다. 색채가 희미한 그의 외모 중에서도 유달리 짙은 보라색을 가진 눈동자는, 노려본다기보다는 응시하는 듯싶은 시선으로 네 사람을 똑바로 꿰뚫는다.
“당신들은 이곳에서 영원히 방황하겠죠. 당신들은 침입자, 뒤늦게 찾아온 자. 정적을 훼방한 자. 그러니 저는 그렇게 하겠어요. 제가 관장하는 것은 미혹.”
방의 온도가 갑자기 서늘해진 듯한 느낌이 들어 세피아는 몸을 떨었다. 옆의 뮤아도 등에 소름이 또렷이 돋아있다.
“저는 그럴 수 있어요.”
잠시 동안의 침묵. 시드조차 침묵을 깨트리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이 주변을 가득 메운다. 제난이 만들어내는 긴장과는 다른, 하지만 좋지 않은 기미.
그는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다.
세피아는 분명히 알았다.
그는, 아니니까.
다시 그 말이 세피아의 머릿속에서 울린다.
그런데, 무엇이 아닌가?
“그럼 너는 적이냐?”
일행 중 가장 먼저 적의를 드러낸 것은 역시나 시드였다. 그는 주먹을 손바닥에 부딪쳐 보였는데, 대답하기에 따라 주먹을 날릴 작정임이 자명했다.
“대답해. 너는, 내 적이냐?"
제난과 대치했을 적의 광경이 세피아의 뇌리에 선명히 되살아났다.
멈춰야만 해. 그렇게 해야 이 숲을 건너는 걸 허락받을 텐데.
그러나 세피아가 움직이기 전에 충돌은 사라졌다.
“…농담이에요.”
남자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시드의 질문을 받아 넘긴 덕분이었다.
“제가 당신들에게 할 수 있는 것도, 할 생각도 없어요.”
시드와는 다른 의미에서 이 남자도 끝내 자신의 페이스를 무너트리지 않을 모양이다. 남자는 문득 턱에 손을 대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조언은 해줄까요.”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당장 벽을 넘으세요.”
시드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이 저도 모르게 서로를 번갈아 봤다.
물론 듣지 않아도 안다. 그런 얘기를 남자에게 했을 리가 없다. 말할 이유도, 의미도 없다. 시드가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것인지, 아니면 넘겨짚은 것인지. 어느 쪽이든, 반응이 긍정적인 것도 그렇다.
남자는 입가에 조그만 미소를 건 채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당신들의 방황이 그리로 향했으니까요.”
“방황이고 자시고, 넘어가려고 여길 돌아다녔는데.”
“구멍 같은 건 필요 없죠. 그냥 넘어가면 될 뿐이에요.”
그는 어디까지나 평온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고한다.
“그건 당신이 만든, 그저 돌담에 지나지 않으니까.”
18-5
“…정말 아무 것도 안 하는 거겠지.”
시드는 아직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기분은 안다. 대화를 하고 난 뒤로도 남자의 정체를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안 해요.”
문 뒤에서 배웅하는 남자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그렇게 대답해준다.
“벽은 저쪽에 있고.”
“네.”
시드의 거듭된 질문에도 시원스레 수긍한다. 그 의도는 전혀 알아낼 수 없다. 시드는 코웃음을 치더니, 남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런가. 그럼.”
“시드, 멋대로 가지마. …좀.”
여전히 일행을 기다려주지 않고 달려가는 시드 때문에 한숨을 내쉰 뮤아도 그의 뒤를 쫓아갔다. 또 놓치면 곤란해지는 탓이다.
거의 말할 틈을 얻지 못한 닛카는 아쉬움이 남은 것 같았다.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요. 예를 들면… 정체라든가.”
“정체라고 해도.”
최후의 저항 같은 질문을 해도, 간단히 피해진다.
“당신들이 느낀 대로라고밖에.”
거기에 세피아가 재차 질문했다.
“…당신의 이름은?”
그러고 보니 묻지도 않았고, 소개받지도 않았다. 그런 정직한 절차를 떠올려낼 만한 상태가 아니었던 탓이다.
“서로 이름은 밝히지 말아요. 지금은 그게 나을 테니까.”
“지금은?”
자꾸만 묻는 세피아에게 남자는 결국 웃고 말았다.
“당신들은, 머지않아 진짜 벽 앞에 도착할 테니.”
그리고 다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걸 넘어선 뒤에,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그 의미를 묻고 싶지만, 슬슬 가지 않으면 시드를 놓치게 된다. 그리고 아마 물어본들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잘 지내세요.”
남자의 배웅을 받은 세 사람은 숲속 깊이 발을 내딛었다.
“저 사람, 어떻게 시드를 옮긴 걸까요?”
그 집이 보이지 않게 됐을 때, 닛카가 물었다.
“보아하니 힘이 세 보이지도 않고, 시드는 흔들면 금방 일어나는 상태였던 데다, 질질 끌려온 흔적도 없었어요.”
“…마술 아냐?”
“그렇게 결론지으면 전부 끝이네요.”
“생각해봤자 별 수 없는 일도 있다고 생각해.”
“그건 그렇습니다만….”
“우리들의 수호자, 아네키우스는 언제고 어느 때고 우리들을 지켜보나니!”
돌연 성서를 왼 뮤아에게 생각에 잠겨있던 닛카가 또 물었다.
“갑자기 뭘 외우시는 건가요.”
“그럴 기분이었어.”
“그런가요.”
모르는 기분도 아니었기 때문에, 닛카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18-6
그리고 남자는 홀로 움막 앞에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네 사람의 모습은 나무들 사이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불온한 바람이 나무를 타고 내려와 남자의 긴 머리를 흩날렸다.
“…눈 감아주셨으면 좋겠는데.”
그의 중얼거림은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있다.
“보시다시피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하기야, 섣불리 행동해서 위험해지는 건 이쪽이지만.”
웃는 얼굴로 말한 남자는 이내 그 표정을 지웠다. 변함없이 땅에 떨어져 있는 눈길은 날카롭게 찌르는 듯한 것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이라면 모를까, 당신 혼자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니.”
그의 발밑에서 냉기가 와글와글 피어올랐다. 그 냉기는 금세 하얘져, 남자를 감싸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한참이나, 고요가 주위를 지배했다.
“…갔나요.”
그 기색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남자는 숨을 내뱉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된 긴장으로부터 벗어난 깊은 안도의 숨결이었다.
“어쨌든, 살아났나요.”
이끌어줘서 살았다. 시위 행위는 아무래도 성미에 맞지 않는다. 질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자신이 도망친 것은 싸움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님.”
남자는 작게 그 이름을 부르며 아스라이 먼 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에서 깰 때가 온다.
두려워하던 그 순간, 그녀의 끝이.
“저는 당신의 말을 따르겠어요.”
그러나 아직 알 수 없다.
함께 살아가는 것은 역시 분명 즐거웠지만, 그녀가 그들에게 요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잡히지 않는다.
사람의 왕.
그렇게 부르던 그녀가 떠올랐다.
이제는 시간이 없다. 차라리 그녀와 똑같은 시도를 해봐야 할까?
결론은 쉽게 날 것 같지 않았다. 고개를 가로저은 남자는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의 고통이 어서 끝나기를….”
그는 움막으로부터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문 사람들의 방문에 소란스러웠던 숲은, 다시 미혹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아 갔다.
18-7
벽이 있다.
우두커니 선 네 사람 앞에, 벽은 확실히 서 있다.
낡고 색이 바랬으며, 겉이 벗겨졌고 금이 간 데도 있었지만, 압도적이었다.
저쪽과 이쪽을 나누는 것.
여태껏 단 한 번도, 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뮤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저 돌담과 다를 바 없이 만들어진 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은 바다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끝을 고하는 선이다.
“…좋아, 가자.”
시드 치고는 드물게, 조금의 주저가 섞인 구령이었다. 그렇게 외치고 벽으로 다가가려는 그를 뮤아가 불렀다.
“시드, 가면 안 돼.”
“왜.”
“우리는 벽을 넘지 않아.”
멈춰서 눈을 부라리는 시드를 향해, 다른 세 명도 제자리에서 대항한다.
“넘을 생각은 없었어. 처음부터.”
이래서야 하는 수 없어, 뮤아는 시드에게 모든 것을 똑바로 알려주기로 했다.
“널 보내지 않으려고 숲을 지나는 데 동의한 거야.”
“무슨 말이야.”
“너는 집에 가서 치료를 받고, 세피아는 톨라 공작가, 나아가 호리라 왕가의 협력을 얻어 성산까지 바래다진다. 그 얘기지.”
시드를 무리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시드를 뺀 채로 성산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선택지는 많지 않다. 시드의 반응이 빤히 예상된다고 하더라도.
“웃기지 마, 임마!”
시드는 금세 격앙해 멱살을 잡았다. 뮤아도 기죽지 않고 똑바로 노려보며 되받아쳤다.
“뭘 할 수 있는데, 그런 몸인 데다 고작 네 명이면서!”
“그놈을 죽이러 간다고 했잖아!”
“그 상대한테 간단히 죽을 뻔한 주제에!”
멱살을 잡은 시드의 손아귀에는 더욱 힘이 들어가고 비난도 거세진다. 끝이 나질 않는 두 사람의 말다툼을 멈춘 것은, 시드를 뒤에서 부둥켜안은 세피아였다.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
세피아는 시드를 말리기 위해 붙든 채로 호소한다.
“내가 부탁했어. 그렇게 해달라고. 모두 다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앞뒤 분간 없이 때려눕힐 수 없는 상대가 끼어들어서인지, 시드는 험악한 얼굴이면서도 뮤아를 놓아줬다.
그리고 더듬더듬 이렇게 말했다.
“그럼, 너희는 그렇게 해. 나는 간다.”
“혼자 가서 어쩌려고!”
시드가 그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뮤아, 포기해요.”
마침내 어깨를 늘어트린 닛카가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저희끼리 시드를 여기서 숲 밖까지 끌어내는 건 불가능해요.”
그래서 어떻게든 톨라 영지까지 데려갈 생각이었던 거다. 이런 숲 한복판에서 벽을 넘게 될 줄은 몰랐다. 마술사를 자처하던 그 남자가 정말이지 귀찮은 상황으로 이끌어줬다.
“보낼지, 같이 갈지, 고르세요.”
그렇게 또 다시 뮤아 일행에게는 적은 선택지만이 주어졌다.
18-8
보란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쉰 뮤아가 시드에게 말을 걸었다.
“시드, 몇 가지 확인할 게 있는데.”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올 거라는 기대는 않지만.
“일단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알아?”
“성 같은 데.”
“그게 어디 있는지는 알고?”
“가면 알겠지.”
역시나 터무니없다.
“무엇보다, 리탄트에 들어가서 그 날개는 어떻게 숨길 건데? 세발족이 여기로 오는 거랑은 사정이 달라.”
부족한 것은 속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무리다. 들키면 괴물 취급을 면치 못하리라.
옷으로 가린다는 정도의 대답을 예상했던 뮤아는, 아직도 시드의 바보 같음을 낮잡아보고 있었다는 걸 실감하게 됐다.
“이게 뭐 어쨌다고.”
시드가 그렇게 내뱉고 갑작스레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거기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슬며시 자신의 날개를 움켜잡고, 말릴 틈도 없이 쥐어뜯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아무렇게나 근처 수풀에 휙 내던졌다.
“이제 문제 없네.”
자랑스럽게 가슴을 편 소년을 멍하니 바라보던 세 사람. 당연히, 그에게 먼저 쏟아진 말은 칭찬이 아니라 매도였다.
“바, 바, 바, 바, 바보야? 바보! 멍청아!”
머리에 피가 솟았는지 자꾸만 똑같은 말을 내뱉는 뮤아를 향해 시드가 냉큼 내뱉었다.
“좀 지나면 다시 날걸.”
“나…, 날지도 모르지만. 그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제 귀는 봐 주세요. 아마 다시 안 날 거라서.”
닛카가 얼른 귀를 누르며 시드로부터 약간 거리를 뒀다.
“뭐, 그렇지만 이 상황에선 다행스럽게도 저, 꼬리는 없으니까요. 숨기기 쉽겠어요.”
머리만 가리면 어떻게든 얼버무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다.
이런 흐름이 되자 자연스레 눈길들은 뮤아에게로 향한다. 불온한 공기를 느낀 뮤아가 자신의 날개를 숨기듯, 등을 나무로 밀어붙였다.
“뜨, 뜯거나 하진 않을 거니까! 옷으로 가리거나, 그러면 괜찮아!”
“조심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드가 너무 성급했죠.”
“너희가 하나하나 시끄러우니까 그렇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완전히 함께 갈 기세인 대화가 돼 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뮤아는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이대로 혼자 보내면 무슨 짓을 벌일지 노심초사하게 될 게 빤하다.
이번에는 우리들이 아피아와 세피아의 입장이 되는 걸까. 낯선 나라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이종족이라는 것이 들키지 않도록.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문득 그 일이 떠올라 중얼거렸다.
“잠깐… 잠깐만. 그럼 그 사람은 뭐였어?”
귀는 없었다. 꼬리도 없었다. 머리에 가려졌던 걸지도 모르지만, 날개 역시 보이지 않았다.
다른 데가 너무 수상했던 탓인지, 요 근래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그렇게나 부자연스러운 것을 깜빡 지나쳐버렸다.
세발족 마술사가 호리라의 숲에서 뭘 하던 거지?
그 의심을 따져볼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뮤아가 나무에 붙은 채 생각에 잠긴 사이, 다른 이들의 대화가 엉뚱한 곳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넘는 방법은 상관없어. 구멍이야 만들면 되지.”
갑자기 들려온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더니, 시드가 벽으로 슬쩍 다가가고 있었다. 말리기엔 이미 늦었다.
주먹 한 방.
확실히, 그것은 돌담에 지나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의 타격에 우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진다.
“봐라, 됐지?”
흙먼지가 가라앉은 뒤에 있던 것은, 더 이상 앞을 가로막지도 않는, 그저 일부가 잔해로서 남아있는 벽의 모습. 그 너머에 있는 것은 처음 보는 곳, 리탄트. 세발족의 나라.
그러나 거기서 보이는 건, 지금 있는 곳과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똑같은, 나무들이 우거진 숲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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