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14-1
그 벽은, 신의 은총.
그 벽은, 신의 계시.
그 벽은, 신의 가호.
그 벽은, 신의 자비.
그 벽은, 우리 모두의 앞에 선다.
결코 그 앞을 볼 수 없다.
결코 그 앞을 넘을 수 없다.
그 벽은,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것.
결코 넘어와서는 안 된다.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우리와 그들은 다르다.
잊지 마라, 우리와 그들은 다르다.
14-2
그곳은 황량한 마을이었다.
버려진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 건물은 제법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티가 곳곳에서 났다. 풀은 무성하고, 창틀과 문은 떨어져 나갔으며, 바닥에는 흙먼지가 쌓여 있다.
이래서야 실패라고 생각되지만, 지금 다음 마을로 향해갈 시간은 없었다.
“어디든 집을 빌려서 하룻밤 보내는 수밖에 없겠다.”
추격자들 문제도 있어 노숙은 최대한 줄이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열지를 나온 뒤로 아직까진 토니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어떻게든 잘 풀린 게 아닐까 생각하던 뮤아가 제안했다.
“옆 마을, 꽤 가깝지 않나요?”
하지만 화답해온 닛카는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깝진 않았던 것 같은데. 지도대로라면 반나절은 걸리잖아. 아무리 서둘러도 한밤중이 될 테니까, 지붕과 벽이 있는 여기가 낫지.”
“…그렇네요.”
“뭔가 신경 쓰이는 점이라도 있어?”
“아뇨, 딱히.”
“그럼 결정이네.”
닛카의 미적지근한 태도가 이상했지만, 언제나 변죽을 울려보는 그의 나쁜 버릇이라고 생각한 뮤아는 의심을 그냥 흘려보냈다. 시드와 아피아도 순순히 승낙했으므로, 일행은 상태가 양호한 집을 정리해 사용하기로 했다. 시트 같은 천 종류는 너덜너덜하고, 가재도구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으나, 화덕이며 가구 일부는 쓰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룻밤 정도는 나름대로 쾌적하게 보낼 수 있을 듯싶었다.
각자 자신이 쓸 방을 청소하고 있는데, 둘러보니 시드가 보이지 않았다.
“나가는 거 봤어?”
닛카에게 물어도 고개를 젓는다.
“근처를 탐험하고 있지 않을까요.”
“한 마디 남기고 가면 좋겠는데.”
“찾아올까요?”
“아냐. 저녁 먹기 전까진 돌아오겠지.”
시드의 여기저기 얼쩡거리는 버릇도 별 수 없다. 이러는 게 세피아라면 신변의 위험을 염려해 보겠지만, 시드에 한해서는 걱정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 시드는 마을 안을 마음 가는 대로 쏘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특별한 목적 없이 눈에 드는 곳에 다가갔다가, 싫증이 나면 떠난다. 헛간 안이라든가, 본 적 없는 도구들이 잔뜩 방치된 곳을 파헤치다 보면 꽤나 몰두하게 된다. 먼지가 날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발굴 작업에 착수한 그의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재밌는 거라도 찾으셨나요?”
뒤를 돌아봤더니, 헛간 입구에 웬 남자가 서 있었다. 목덜미에 찌릿찌릿, 기묘한 술렁거림이 끼쳐와 시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야, 너.”
모르는 사람일 텐데, 어디서 만난 것 같기도 하다. 최근인지, 더 옛날인지. 생각이 나지 않아 답답해진다.
“잠시 얘기를 하고 싶은데, 시간 좀 내 주시겠어요?”
사내는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누군지도 모르는 놈이랑 말할 시간 없어.”
시드의 성격상, 거절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남자를 무시하며 벽에 난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어라, 그렇습니까.”
하지만 남자의 말에 발목이 잡혔다.
“당신의 어머니와 관련 있는 얘기라고 해도?”
그 말에, 시드가 멈춰 서지 않을 리가 없었다.
“뭐야, 너.”
눈을 부라리며 재차 묻는 시드에게, 남자가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인사가 늦었군요. 저는, 제난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14-3
열린 2층 창문으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빠른 행차다. 아피아는 새근거리는 세피아를 찬장 안에 숨겨두고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침대 위에 놓인 검을 보며 잠시 고민하더니, 집어서 허리에 찼다.
1층에선 뮤아가 부엌에 들어가 저녁을 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피아는 사용한 컵을 거기 돌려놓으며 말을 걸었다.
“잠시 장작이라도 구해오지.”
“아, 살았다. 부탁해. 그리고 시드 찾으면 빨리 돌아오라고 해.”
“알았다. 세피아를 잘 봐줘.”
“다녀와.”
뮤아는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작게 손을 흔드는 뮤아를 돌아보고, 아피아는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집 뒤쪽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돌아가자마자 상냥한 말이 건네져 와서, 아피아는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던 듯싶은 제난이 옆집 뒤에서 아피아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저 집에서 보이지 않는 곳을 원하시죠?”
아피아는 그 유도에 순순히 따르며, 제난에게 다가갔다. 겨우 다섯 걸음 정도까지 간격이 좁혀졌을 때, 아피아의 손은 검을 빼어들고 발은 땅을 걷어찼다. 목에서 흘러나온 가느다란 호흡은 피리 같은 소리를 냈다. 칼날은 아래서부터의 궤도를 그었다.
다음 순간, 시야가 흐릿해졌다. 아피아는 자신이 땅에 팔꿈치를 짚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복부에는 묵직한 통증이 있었다. 아마도 발에 맞은 것 같다. 손에서 놓친 검은 조금 떨어진 곳에 나뒹굴었다.
“위험한 짓은 그만뒀으면 좋겠네요.”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서려던 아피아는 갑작스레 울컥했다. 울컥 치밀어오른 것이 그치지 않아, 땅바닥에 토사물이 쏟아졌다.
“무리하지 말아요. 당신이 다치면 이쪽이 혼나니까.”
숨 막히는 답답함에 거칠게 기침하는 아피아를 달래기라도 하는 말투였다. 안 된다. 아피아는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남자는 상대를 곧장 무력화시키는 데 뛰어나다. 림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 남자는 서 있는 무대가 아예 다르다.
그렇다고 해도.
겨우 진정된 아피아는 입가를 닦았다. 다리가 휘청거리는 걸 억누르며 일어서서는, 고개를 들고 제난을 노려보았다.
“좋아, 나 이외의 사람들에게 손을 대기만 해봐. 그런 짓을 했다간, 나는 결코 너희들을 따르지 않겠어.”
그런 위협적이지도 않은 협박에 풀죽을 상대가 아니다. 알고 있어도, 할 수 있는 말이 얼마 없었다.
말을 들은 제난은 호들갑스럽게 눈썹을 들어 보였다.
“알아들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참이지만, 유감이네요. 아까 만나고 말았거든요.”
누구를 만났는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집에 없던 건 한 사람뿐이다. 그리고, 그 만남은 최악의 결과가 나올 뿐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무슨 짓을 했어.”
“혈기 왕성한 분은 곤란하네요, 정말이지.”
“어디야!”
“아, 그 녹색 지붕 집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자 아피아는 칼도, 제난도 내팽개친 채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남겨진 제난이 어깨를 늘어트렸다.
“저런. 이러니까 혈기왕성한 분은 곤란하다고 했는데. 남의 말은 끝까지 들으라고 배우지 않았나?”
그도 떨어져있는 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걷기 시작했다.
“그런 시시한 짓을 처음부터 벌일 리가 없잖아.”
목적지는 아피아가 나왔던 집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제난은 그 창문에 다가가, 옆 벽을 두드리며 주의를 끌었다.
안에 있던 소녀는 난데없이 나타난 낯선 얼굴에 놀란 것 같았다. 창문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선 제난이 다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제난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14-4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방을 돌아봐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귓속이 찡 울린다.
제난에게 속은 거라면 괜찮다. 그런데 대답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거라면.
현관으로 되돌아왔을 때, 바깥에서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내다봤더니 집 옆으로 난 헛간이 보였다. 혹시 저기에.
“시드?”
그는 있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입구를 등지고 서 있었다. 부르는 게 들렸을 텐데,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괜찮나?”
이상한 낌새에, 아피아가 말을 건네며 다가갔다. 내딛는 땅은 질척한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움푹 패였다. 시드는 움직이지 않는다. 아피아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시드.”
어깨를 건드리려던 찰나, 시드의 몸이 손길을 피하며 휙 돌았다. 그리고, 휘둘러진 팔. 팔은 아피아의 목을 잡았고, 아피아의 몸은 헛간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너, 알고 있었지.”
어둡고 쌀쌀맞은 목소리다. 목을 조르는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공포가 아니라, 분노로. 고개를 숙인 시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제난이 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제난 일당이 따라오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아피아는 사과하기 위해 말을 꺼냈다.
“그놈들이 쫓아오는 건…….”
“그런 걸 물은 게 아냐!”
하지만 입을 열자마자 목이 졸리며 발이 허공에 떴다. 높이 들어올려진 아피아는 아래서 노려보는 시드와 겨우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제난이 시드에게 무엇을 불어넣었는지를.
“어머니를 누가 죽였는지 안다는 게 사실이냐!”
숨이 찬다. 하지만 그것보다 저런 시선을 받는 게 더 괴로웠다. 알고 있었는데. 각오하고 있었을 텐데. 사실을 알면 시드가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걸. 그런데도 자신은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답하지 않는 아피아 때문에, 시드의 손아귀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처음 만났을 때의 곱절은 되는 살기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아피아의 목에서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손발은 의지와 무관하게 꿈틀거렸다. 시야는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말해.”
말할 수 없어, 그 이름은. 그 사람은 나쁘지 않으니까.
“어떤 녀석이 그런 일을 벌였어!”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추측에 불과할 뿐. 하지만 분명 틀리지 않은 추측.
8년 전 시드의 어머니를 죽인 것은, 분명.
“……나다.”
그 대답을, 시드가 납득할 리 없었다.
“웃기지 마!”
그 순간 등 뒤에 닿았던 벽의 차가운 감촉으로부터 떨어졌다가, 곧장 거기에 내던져진다. 눈앞이 명멸한다.
“진실을 말해! 말하지 않는다면 널….”
“죽이면 된다.”
그 말에 목을 조르는 힘이 약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아피아는 쉰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너는 언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네가 나에게 질 리 없지. 붙잡힌 내가 네게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넌 언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어. 너는 강하다. 모든 것에 있어서 나 같은 것보다 훨씬 강해. 이제 됐겠지. 이젠 끝내자. 눈속임도 그만둬라. 놀이도 끝내고. 이제, 나는.”
“닥쳐!”
노성과 함께 아피아의 몸이 땅바닥에 메다 꽂혔다. 충격으로 숨이 막힌다. 목이 화끈거리고 몸은 무겁다.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쨌든, 일어설 기력 따위도 생기지 않을 듯했다.
“두 번 다시 그 얼굴 내밀지 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드는 발길을 돌린 모양이었다. 아피아는 차가운 지면에 뺨을 댄 채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시드의 기척을 느낄 수 없게 되었을 때도, 목에는 통증이 남아 있었다.
14-5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신의 눈꺼풀이 감기기 시작한다. 따스한 바람이 사라지고 찬바람이 땅을 스친다.
어딜 가나 똑같은 밤. 어딜 가나 똑같은 어둠.
“……아버님.”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리 닦고 닦아도 흘러넘쳤다.
“아버님, 아버님. 아버님.”
아피아는 단말마와도 비슷한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어디에도 없었어요. 신의 나라도, 마술사의 나라도. 아무 데도 없어요, 그런 방법은. 기적이란 건 일어나지 않습니다.”
벽을 넘어봤자 거기엔 사람이 사는 땅이 있고, 벽을 넘어봤자 거기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있고, 벽을 넘어봤자 정해진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벽은 신의 의지라고, 그는 말했다.
벽은 신의 저주라고, 그놈은 말했다.
벽은 뒤틀린 거라고, 자신은 느꼈다.
“넘지 말았어야 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열에 타오르던 그 도시에서, 쫓아온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눈치 채셨을지도 모르지만… 저희는 원래 당신의 아군이었습니다. 저희가 벽을 넘은 건 당신의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거예요. 그 당시엔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지금은 잘못됐다고 느낍니다.”
그 말을 들으며 벽을 넘던 순간을 떠올렸다. 금세 되살아난, 그 끔찍한 냉기.
“이제는 잘 아셨겠죠. 이런 짓은 쓸데없는 혼란만 만들어 낼 뿐이라는 걸. 대체 누가 바라겠나요…. 벽을 넘는 일 같은 걸.”
하지만.
어찌 아버지를 탓할까.
자신이 바라던 바를 흘려듣지 않은 아버지를. 그를 흔든 것은 저였다. 자신이 어린애였다는 것이 무슨 핑계가 될까.
어찌 어머니를 탓할까.
밤새 제 손을 붙잡고 울며 사과하던 어머니를. 어머니가 사과할 이유도 없는데.
어찌 동생을 탓할까.
쌀쌀맞게 대하던 자신을 순수하게 존경해준 동생을. 동생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이미 닳아버렸을 것이다.
어찌 신을 탓할까.
이 세상에 좀 더 남아도 괜찮을 거라고 용서해준 신을. 지금도 가슴에는 신의 은총이 매달려 있다. 제게는 과분한 은혜다.
탓할 것은 단 하나.
지금에 이르러서도 각오를 세우지 못하는 자신의 한심함이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약함이다.
때가 왔다.
스스로의 손으로 막을 내려야 한다. 그 외에는 이제 바라지 않는다.
다시 얼굴을 닦자, 눈물은 더 나오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 굳은 손발을 짚으며 아피아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깥에는 밤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검이 떨어진 그 모습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아피아는 그것을 주워들고 집으로 눈을 돌렸다.
열린 창문 너머로, 뮤아와 닛카의 모습이 보였다.
14-6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집 뒤에서 거울을 만지작거리던 닛카는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기분 탓이었는지, 그럴듯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일단 작업은 잠시 중단하기로 하고, 닛카는 집으로 들어갔다.
“도와드릴게요.”
그렇게 부엌을 들여다보며 말을 걸었다. 그 순간 창을 내다보던 뮤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 니, 닛카. 그럼 빵 좀 구워줄래?”
노골적으로 동요하는 뮤아의 안색이 나쁘다. 닛카는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치만 아직 장작이 없어서 불을 못 피워요. 주우러 갈까요?”
하지만 따지는 것은 곧 그만뒀다. 뮤아가 진정하고 먼저 털어놓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을 성싶었다.
“그런가, 장작. 음, 그건 괜찮아. 지금 아피아가 가져온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그럼, 물 좀 더 길어다 줘.”
“알겠습니다.”
우물이 가까이 있는 집을 골랐기 때문에 물은 금방 보충할 수 있었다. 워낙 황폐한 마을의 우물이라 처음에는 오염을 걱정했지만, 집 안을 살펴보니 그런 갑작스러운 이유로 마을이 버려진 것도 아닌 것 같아 그냥 사용하기로 했다. 물을 길어 가는 도중에, 건너편 집 사이를 가로지르는 시드를 발견했다. 말을 걸까 하던 닛카는, 시드가 험악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집에 돌아왔더니 뮤아는 말없이 육포를 자르고 있었다. 닛카도 짐에서 냄비를 꺼내 물을 옮겨담고 저녁 준비에 착수했다.
“아피아, 늦네요.”
주변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근처를 돌면서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모으기만 하는 거라면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아직은 괜찮을 거라고 여겼는데, 어쩌면 곤란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고 닛카는 생각했다. 일단 여기가 버려진 마을인 것부터 계산 밖이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견제될 줄 알았더니.
“……세발족이 왔어.”
뮤아가 불시에 말했다. 뮤아는 손을 멈춘 채 발밑으로 눈을 떨구고 있었다.
“두 사람에 대해 경고했어.”
“어떻게 말하던가요?”
“정체를 숨기고 있으니까 믿지 말라고.”
“그놈들의 말을 믿어요?”
“아냐. 그냥 그랬다는 것뿐이야.”
말이 격해지는 뮤아의 모습으로 미루어보면, 그저 이상한 것을 주워듣기만 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피아네가 신원을 숨기고 있는 거야 말하지 알아도 아는데, 뮤아가 그런 것으로 흔들릴 리가 없었다. 닛카는 뭐라 나무라는 대신 무언으로 나머지 말을 재촉했다.
“……나, 봤었어. 그건 분명히.”
뮤아는 잠시 주저하더니, 닛카의 얼굴을 보며 확실하게 말했다.
“아피아의 이마에 있던 건 분명히 죄인의 표식이었어.”
“뮤아, 그건….”
닛카가 자세히 물어보려고 입을 연 순간이었다. 닛카는 창문 너머에 우뚝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목소리가 들리기엔 충분한 거리.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그 그림자가 몸을 돌렸다.
“기다리세요!”
갑자기 외치는 큰소리에 놀란 뮤아를 아랑곳하지 않고, 닛카는 창문을 뛰어 넘었다.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며 밖에 달려 나갔다.
“기다려!”
불러도 대답 않는 그림자를 닛카가 전력으로 쫓았다.
14-7
숲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추격전은 끝났다. 앞서 달리는 아피아가 걸음을 멈춘 덕이었다. 닛카는 겨우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아니, 달리는 것도 이젠 질색이에요.”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숨을 고르며 푸념하는 닛카를 등진 채, 아피아가 한 마디 했다.
“닛카, 돌아가.”
“아피아도 함께 간다면 돌아가죠.”
“됐으니까, 돌아가.”
“싫으니까 안 가요. 뮤아는 거짓말에 현혹돼 오해하는 것뿐이에요. 제가 알기로 그 표식은, 당신은 아마도….”
들으려 하지 않는 아피아더러, 닛카는 어쨌든 이쪽을 봐 달라며 말을 계속했다. 사실 확증을 잡고 난 뒤에 얘기하고 싶었지만, 하는 수 없다. 하지만 닛카의 노력은 끼어든 목소리에 무산됐다.
“거짓말 같은 건 안 했는데.”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남자가 나무그늘 아래서 느긋하게 나타나는 순간, 근처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닛카는 이것이 토니나가 언급한 지원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뮤아를 괜한 말로 부추긴 것도 이 남자다.
“뭐라고 했어.”
아피아가 거칠게 묻자, 제난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너는 표식이 새겨진 죄인이라는 거, 그것뿐이야. 뭔가 다른 말도 했었던가?”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은 속이려는 수법이다. 잘 알고 있는 닛카가 아피아에게 경고하려고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아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거짓말은 아니군.”
“난 거짓말이 싫어서.”
거짓말이 아니라고 모두 진실인 것은 아니다. 이 남자는 거짓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면책 삼아 진실을 왜곡하기 좋아하는 족속이다. 닛카는 불쾌감이 뱃속에 들끓는 것을 느꼈다. 즉, 이 남자는 자신과 같은 부류다.
닛카는 결연히 나서서 아피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단호한 어조로 아피아에게 말했다.
“아피아, 더 들을 필요 없어요. 돌아가죠.”
말을 하면 할수록 나쁜 쪽으로 굴러가는 게 분명하다. 다소 무리해서라도 아피아를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좋겠다. 최악의 경우로, 질질 끌고 가게 되더라도.
“아피아.”
움직이지 않는 아피아의 이름을 부르던 닛카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제난이 닛카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실실 웃으며, 흐뭇하게 지켜보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하지만 눈동자에 담긴 차가운 빛을 알아차린 닛카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저 남자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우위를 점했다고 믿고 있다.
제난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아피아가 아니라, 닛카를 향해서.
“타이카=솔, 이제 됐어. 수고했다.”
그 순간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어 갸우뚱하는 닛카에게, 제난이 몰아붙였다.
“이제 걱정하는 척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야.”
거기 담긴 악의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리고 그 말은 전부 거짓말인 게 아니었다.
“네 정보가 없었다면 소중한 그들을 놓쳤을지도 모르니까.”
사실이 아니라고 잡아떼 봤자 얼마나 믿음이 갈까.
“아버지랑 마찬가지로 일을 잘 하는구나.”
배반은 깨끗이 폭로됐다. 동시에, 요구했던 정보의 파편이 제난의 입에서 튀어나와 닛카를 동요하게 만들었다. 아피아의 어깨에 얹은 자신의 손이 떨리는 게 저 때문인지, 아피아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달라……, 나는…….”
“그는 감쪽같이 양쪽을 속였으니까. 짊어지고 있는 걸 확실히 알았고, 정말이지 믿음직했어.”
닛카의 변명은 미욱했고, 제난은 그것을 짓눌렀다. 제난이 두 사람에게 다가와 닛카의 손목을 아피아의 어깨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제난의 손은 목을 덮은 아피아의 머리를 쓸어올렸다.
닛카는 거기서, 빨갛고 뚜렷하게 남은 손자국을 보았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람, 얘는? 얘가 다치면 혼나는 건 이쪽이라니까.”
이렇게나 고압적인 말투를 해도 아피아는 제난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제난은 어조를 바꿔 아피아에게 속삭였다.
“불쌍하게도. 누구한테 당했어요? 귀하신 몸에 상처 입힌 놈들한텐 걸맞은 복수가 필요하죠. 그쵸?”
겉보기에만 정중하도록 과장된 말투는, 오히려 깔보는 기색이 강했다.
“자, 돌아오세요, 아피아 님.”
아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닛카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이 남자에게서 아피아를 떼어내야 한다. 하지만 다가가려던 닛카의 움직임은 노려보는 눈길에 의해 견제 당했다.
폭력적인 냄새를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서, 제난이 닛카를 위협했다.
“너도 같이 와야지?"
그것은 물음이 아니라, 강제하기 위한 말이었다.
14-8
“안 된다.”
거부하는 대답은, 닛카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같이는 안 가.”
그것은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아피아가 꺼낸 말이었다.
“네 말대로는 되지 않아.”
그렇게 선언한 아피아는 곧장 닛카에게 돌아서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남겨진 제난은 잠시 그 모습을 배웅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저런.”
제난은 숲의 그늘에 대기시켜뒀던 남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지시를 내렸다.
“어이, 저거 잡아. 난 계속해서 자제분을 설득할 거니까.”
네 명쯤 되는 남자가 뿔뿔이 흩어져 달려갔고, 제난도 빠른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이보다 더 열심히 해줬으면 좋겠다. 제난은 걸음을 옮기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뭉개버리는 과정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일이니까.
“아피아, 이대로는.”
나무들 사이로 추격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해, 닛카가 아피아에게 주의를 줬다. 걸음이 느린 자신을 데리고 가다간 금세 따라잡힐 거다. 아피아 혼자라면 어떻게든.
그렇게 생각한 닛카가 둘로 갈아져 달아날 것을 제안하려는데, 아피아가 멈춰 섰다. 그리고 닛카에게 뭔가를 억지로 쥐어줬다.
“이걸 써.”
건네진 무게가 닛카의 팔을 늘어트리게 한다. 칼집에 넣어진 시드의 검이 손에 들려 있었다.
“대충 휘두르기만 하면 될 거다. 기선제압으로 충분하니까. 마을이 가까우니 분명 어떻게든 되겠지.”
그러며 아피아는 니카를 보호하기라도 하듯, 추격자가 오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먼저 가. 난 뒤에 간다.”
“그럴 수 있겠어요!”
승낙할 수도 없는 제안에 닛카가 목청을 높였지만, 돌아온 것은 따끔한 일침이었다.
“짐이잖아. 먼저 가지 않으면 나도 도망칠 수 없어.”
할말이 없다. 함께 도망가든, 함께 멈추든, 자신은 아피아의 발목을 잡는다. 그렇다면 아피아 말대로 먼저 도망치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이성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감정이 닛카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이 상황을 초래한 것이 자신인 탓에.
닛카가 고개를 저었다.
“아피아가 먼저 가세요. 제가 그들에게 정보를 넘겼어요. 저는 그의 말대로 배신자예요. 제가 여기 있겠습니다.”
말하는 동안에도 남자들이 가까워진다. 당장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붙잡힐 거리다.
“믿는다.”
초조해하는 닛카의 귀에 그 단어는 당돌하게 들렸다. 저도 모르게 돌아봤더니, 아피아가 다시 닛카를 보고 있었다.
“닛카, 나는 믿고 있어. 너를, 너희들을. 그러니 부탁이다. 먼저 가라. 저놈들은 나를 해치지 못하지만, 너에게는 그렇지 않아.”
여기에 머물러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닛카는 깨달았다. 그대로 붙잡혀 아피아를 위협하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둔다.
“……바로 시드를 데려오겠습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닛카는 반발심을 억누르며 아피아에게 그렇게 말하고, 검을 든 채로 달려 나갔다. 미소를 머금고 배웅한 아피아가 남자들에게로 돌아섰다.
“멈춰라!”
입 밖에 낸 명령은 의외의 크기로 주변의 공기를 떨게 만들었다. 그 기세에 남자들의 발이 잠시 멈췄다. 남자들을 흘겨본 아피아는 다리를 어깨 너비로 벌리고 서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거기 쫓아온 제난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왜 멍청하게 멈추는 거야, 네놈들. 자, 쫓아가, 쫓아가.”
내모는 손짓에 쫓긴 남자들은 다시 가려다가도, 아피아의 눈총을 받고는 당황한 것처럼 걸음을 멈췄다.
“내 말은 안 듣겠다는 거야?”
팽팽한 긴장이 흐르는 자리에서 아피아의 위압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제난뿐이었다. 제난은 히죽거리며 물었다.
“굉장한 강경책이네. 왜 우리가 네 말을 들어야 하지?”
아피아는 기죽지 않았다. 그는 이마에 감긴 천을 풀어냈다.
“이 표식과 내 이름에 걸고.”
거기에는 뮤아가 봤던 표식이 지워지지 않은 채 새겨져 있다. 복잡한 형태를 그리며, 조금 빛나는 듯한 기묘한 자국.
“아피아=세리크=리탄트=파다의 이름을 걸고, 너희에게 명한다.”
아피아는 다시 스스로에게 붙여진 이름을 꺼냈다.
“그를 쫓아간다면 용서치 않겠다.”
침묵을 털어낸 것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폭소였다. 제난이 배를 움켜쥐고 웃으며 남자들에게 지시했다.
“너희들, 물러나.”
“하지만……”
“됐으니까 물러나. 도망간 놈은 됐어.”
납득이 되지 않지만, 제난이 그렇게 말한다면 별 수 없다. 쫓겨난 남자들은 숲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제난은 눈물을 훔치며 여전히 전투태세를 풀지 않은 아피아에게 말을 건넸다.
“허세도 그 정도면 훌륭한데.”
그리고, 제난은 아피아에게 손을 뻗었다.
“자, 갈 거지?”
14-9
얼마나 달렸는지 모르겠다. 평소 해본 적 없는 전력질주에 비틀거리며, 닛카는 마을로 달려갔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
하늘에는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드도 집에 돌아왔을 테니 빨리 데려가야 한다.
하지만 집으로 달려가던 닛카는 집에 닿기 전에 사람의 그림자를 알아봤다. 그건 분명히 시드의 모습이었고, 시드는 어째선지 초록 지붕 집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닛카가 그에게 달려가며 불렀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나요?”
“아무 것도 아냐.”
그는 여느 때보다 기분 나빠 보였다. 잘못 건드렸다간 터질 것 같다. 하지만 평소처럼 가라앉기를 기다리거나 술을 마시게 할 시간은 없었다.
“함께 가주세요.”
닛카는 반쯤 강제로 시드의 손을 잡아당기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뭐야, 어디 가는데.”
“숲이요. 서두릅시다.”
“무슨 일로?”
“빨리 가지 않으면 아피아가 놈들한테….”
설명하려던 순간, 닛카는 갑자기 뒤로 잡아당겨져 쓰러졌다. 멈춰선 시드가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표정으로 닛카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 가―.”
“어째서요?”
“……나랑은 상관없잖아.”
그러며 닛카의 손을 뿌리치고는 슬렁슬렁 마을로 돌아가려고 한다.
“시드!”
닛카가 포기하지 않고 시드 앞으로 다가와 그를 붙잡았다. 평소와 다른 닛카의 모습에 시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구하지 않는 건, 아피아가 세발족이기 때문입니까?”
“그래. 그게 당연하잖아.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내가 뭐하러.”
“그럼 세피아는 왜 구하러 갔죠?”
“그때는… 아, 젠장. 아무려면 어때, 그딴 거. 녀석이 숨겼던 거야, 알고 있었으면서! 그러니까 나는 나쁘지 않….”
“저도 당신에게 숨기는 건 많아요. 일단 저도 반은 세발족입니다.”
시드가 움직임을 멈췄다. 니카가 다짐이라도 하듯 거듭 말했다.
“저는 생이족과 세발족 사이에서 태어났죠. 그리고 제가 살레타에서 그 세발족들에게 위치를 알려줬어요.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
“이 자식이!”
닛카는 멱살을 잡혀도 기죽지 않고, 꿋꿋이 시드를 쳐다봤다.
“왜 그딴 짓을 했어!”
“알고 싶었으니까.”
자신의 행동은 언제나 그런 이유에 닿는다. 결국 저와 아버지는 같은 족속이라고, 닛카는 생각한다.
“아버지에 대해, 저에 대해, 그리고 아피아와 세피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저런 놈이 올 줄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건 변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토니나로부터 경고를 받았을 때 단념했어야 했다. 괜찮을 줄 알았다. 저라면 모두에게 계속해서 숨기는 것도, 세발족들을 협력하는 척하며 속이는 것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한심하다.
“그놈이냐?”
닛카가 말하는 놈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챈 시드가 혀를 찼다.
그 말투도, 지껄이는 것도 최악이었던 남자.
때리려고 덤벼들어도 적당히 다뤄지고, 화날 만한 말을 들어 기분이 무척 나빠졌을 때 아피아가 왔었다.
“시드도 만났었나요?”
“그 구역질나는 놈이라면 말이지.”
“그럼 아시겠죠. 그놈에게 아피아를 넘겨줘선 안 돼요. 분명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 겁니다. 시드, 제발. 같이 가주세요.”
그 남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때려줄 수 있다면 가겠다.
시드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녀석 앞에 어떤 얼굴로 나가야 하지? 그 눈. 정말 싫은 그 눈. 짜증나는 그 눈. 그 눈을 들여다보게 된 건 언제부터야?
죽이라는 말을 들은 건 언제부터야?
“시드!”
“쫑알쫑알 시끄러워! 적당히 좀 해! 가면 되잖아!”
죄다 뿌리치듯이 시드가 외쳤다. 이런 말싸움은 딱 질색이다.
“알겠냐, 이번엔 봐주지. 하지만 난 이제 너희들이랑 안 가. 여기서 작별이다. 알겠냐.”
닛카가 그 말에 멍청히 고개를 끄덕일 리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아피아만 구해내면 시드는 필요없다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걸어가는 시드를 향해 닛카는 물었다.
“잠깐…, 헤어진 뒤엔 어떻게 하려고요?”
“맘대로 할 거야. 도대체가, 같이 있을 이유가 어디 있어.”
완고하게 입을 다물고, 그저 앞만 보며 나아가는 시드는 무슨 말을 해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닛카는 일단 포기하기로 했다. 시드를 설득하는 건 나중에도 할 수 있다. 아피아를 구출하는 쪽이 더 시급하다. 모처럼 내준 의욕을 꺾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그 의욕은 허무해지게 된다. 도망쳐 왔던 그 자리에는 이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장소를 잘못 찾았을지도 모른다며 주위를 아무리 뒤지고 불러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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