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12-1
이명과 비슷한, 웅웅대는 소리가 주위 일대를 가득 메웠다. 그것은 천장에 솟아 메아리치는 시끌벅적함으로, 아무리 조용한 곳이라 한들 이만한 인원이 모이면 절로 생겨나는 소리였다. 기도가 비처럼 쏟아지는 그 아래, 뮤아와 아피아는 나란히 서 있었다.
“오늘은 도착할 거야, 반드시.”
“음, 고맙다.”
“위로가 아니라, 슬슬 나타나도 좋을 때야.”
사흘 전 전서구 가게 중 한 곳에서 세피아의 연락을 받은 아피아의 안색도 제법 좋아졌다. 여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면, 두 사람도 슬슬 도착할 것이다. 시드가 날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역시 열지 한복판에서 합류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리겠다 싶으면 살레타에서 만나자고 약속해뒀었다. 그 뒤로 토니나 일당은 이쪽을 놓쳤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뮤아 일행은 인근 마을로 접어들어, 상인들에 껴서 순조롭게 살레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는 엿새째 두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늘도 문 앞에 서 있으려고?”
“그럴 생각이다만.”
“전에도 말했지만 교대해줄 테니까. 무리하지 마.”
“괜찮다. 한 번 쓰러진 정도로 과장이 심하군.”
아피아는 곤란한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몸 상태도 있지만, 그렇게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있다간 토니나 일당에게 들킬까 걱정된다. 뮤아가 그렇게 말하자, 아피아는 조금 머뭇거린 끝에 털어놓았다.
“그건… 이미 들켰으니까.”
“어, 그러면.”
“그래도 괜찮아. 그들은 눈에 띄는 걸 싫어하니 이런 곳에선 아무 짓도 안 해.”
물론 그런 말을 들어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미간을 좁히는 뮤아에게 아피아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완전히 말려들게 만들었군.”
“피차일반이지. 아피아네를 억지로 동행하게 만든 건 닛카고.”
“그렇다면 뮤아는 쭉 말려들기만 한 셈이다.”
“아, 그러네. 그치만 그 닛카를 순례에 끌어들인 건 나야.”
따지고 보면, 이건 뮤아의 여행이다. 뮤아가 원했고, 뮤아가 결정했고, 뮤아가 이끌어온 길이다.
지금까지 의식하지 않았던 만큼, 그렇게 생각할수록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응, 그러니까 피차일반.”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서 있는 줄이 나아가고 있다. 천장에 구멍이 나 있어 부득이하게 고이고 마는 모래를 밟으며, 두 사람은 예배당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갔다.
살레타 중심에 있는 모래의 신전.
도시의 문이 열리는 것보다 이른 시간, 날이 밝아오면 사람들은 거기 모여들어 예배를 차례로 기다렸다. 열정적인 그들의 기도는 곧장 신에게로 향한다.
여기 온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도, 뮤아는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신과 함께 산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라드네라의 어디를 가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나, 역시 이런 황무지에서는 느껴지는 정도가 완전히 다르다. 이 땅의 물은 신의 물, 이곳의 태양은 신의 모습. 단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전해진다. 자연이 곧 기도가 된다.
뮤아는 이 생태를 본 순간 감격해 전율했지만, 닛카는 오히려 한 번 체험해본 뒤 다시는 신전에 다가오지 않았다. 그의 말로는, 왠지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잘 모르겠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으나, 적극적으로 기도할지는 개인차다. 시드라면 신전을 한 번 찾는 것조차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다.
아까부터 계속 쏟아지던 울림이 갑자기 멀어졌다. 복잡한 형태로 세공된 채광창은 바닥에 물결 비슷한 무늬의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뮤아는 고개를 들었다.
한층 더 높아진 천장에서 모래와 함께 아침 햇살이 내리쬐고 있다.
일찍이 땅을 파내고, 동시에 물을 가져와 살레타에 주춧돌을 놓았다는 신의 거대한 동상이 반짝이는 모래를 입은 채 거기 서 있었다.
12-2
제법 오래됐다고 한다.
온통 모래로 뒤덮인 이곳에서 이만한 물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석재는 어떻게 구해왔는지,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죄다 수수께끼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 동상의 얼굴은 신답게 자애롭지만, 어딘가 험상궂다. 빛이 비치는 정도에 따라서 화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런 사소한 것들부터 시작해, 신상에는 수많은 전설들이 얽혀 있다. 이것에 이변이 생기면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단언하는 것마저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기도를 그 몸으로 받아들이는 동상은, 단지 침묵한 채 빛 아래 서 있다.
“볼 때마다 여기까지 잘도 왔구나 싶어져.”
기도를 마치고 회랑으로 나온 뮤아가 그렇게 푸념했다.
“전혀 각오가 안 섰다는 얘기지. 싫어지네.”
마을에서 나온 뒤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성장했다고는 별로 생각되지 않는다. 결국 일깨워질 만한 경험을 구하는 것 자체가 틀렸다. ‘구슬을 닦아서 빛나는 것은 그것이 이미 빛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며, 모래는 아무리 닦아봤자 사금이 되지 않는다.’라는 말이 누구의 것이었더라.
“그치만 각오가 설 때까지 여행하려다 보면 할머니가 되고도 계속될 것 같아. 모두 함께 있는 건 즐거우니까 그것도 싫지 않지만.”
뮤아의 농담을, 아피아는 모호한 미소로 반응했다.
“아피아는 성인이 되면…….”
뭐할지 정했냐고 자연스레 물어보려던 뮤아는, 그 순간 갑자기 오두막에서 본 것이 떠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아피아가 의아해하자, 뮤아는 황급히 둘러댔다.
“아, 성인이 되면, 어느 쪽을 고를 거야?”
“남자.”
아피아는 질문에 미심쩍어하는 눈치였지만, 더 파고들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다.
“흐응. 벌써 정했구나. 나라면 마지막까지 고민할 것 같아.”
“약속해 뒀으니까.”
“어, 누구랑? 누구랑?”
이야기가 뜻밖에도 흥미로운 방향으로 흘러가, 뮤아가 자꾸만 물었다.
“어릴 적 친구.”
“우와, 그런 거구나. 좋네. 약속이라니 멋져.”
눈을 빛내는 뮤아를 본 아피아가 흠칫하더니, 혼자 들뜬 뮤아를 향해 머뭇머뭇 얘기를 바로잡았다.
“……저기, 오해한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니니까.”
“응, 그치만 그 상대는 여자를 선택할 거지?”
“그야 그렇지만…….”
아피아가 말끝을 흐렸다.
저도 모르게 대답했더니 묘한 전개가 되고 말았다.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전에 왠지 들어줄 것 같지도 않다.
별로 문제될 건 없나, 아피아는 설명을 포기했다. 좀 더 진정된 뒤에 자연스럽게 정정해주자.
아피아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소꿉친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에 따라 그리움도 외로움도 될 수 있는 감각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는 괜찮을까. 말려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접근하는 남자들은 아직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지 않았다. 이쪽뿐만 아니라 저쪽까지 궁지에 몰리는 수단이 될 수도 있어서겠지만, 그들 또한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누굴 잡는 건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도 섞여 있는 듯했다.
“저기, 아피아. 저거.”
생각에 잠겨있던 아피아는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간신히 입구 쪽에 있는 얼굴을 알아봤다. 닛카도 아피아 네를 알아본 듯 뒤돌아 뭔가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닛카의 그림자 뒤로 또 다른 작은 그림자 하나가 이쪽을 쳐다봤다.
그 순간, 아피아는 인파를 헤치며 달려 나가고 있었다.
“세피아!”
힘들게 뒤쫓은 뮤아가 겨우 입구에 다다랐을 때, 세피아는 이미 아피아의 품에 안긴 채였다. 뮤아는 곁에 있는 닛카에게 물었다.
“그렇게 오래 걸렸어?”
신전에 줄을 서기 위해 도시가 문을 열기도 전부터 비집고 들어오는 건 예삿일이지만, 그렇게 일찍 오는 건 현지인들이지 상인들이 드나들 시간은 아니었다. 오늘만 특별히 시간이 걸린 것 같지도 않았다.
“도시 문이 열린 건 조금 전이에요. 아무래도 밤을 새면서 올 것 같았고.”
예배하는 동안, 만약을 위해 닛카가 기다리도록 한 건 잘 한 것 같았다. 북문 외의 곳으로 들어오는 것도 염두에 뒀는데, 기우에 지나지 않은 듯했다.
“어쨌거나 안심이네.”
“그러게요.”
이 이상 기다렸다면, 아피아가 찾으러 간다며 나설 뻔했다. 일주일 만에 재회한 두 형제는 잠시 뭔가 얘기하더니, 이내 아피아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시드는?”
그러고 보니 활약한 주인공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 시드라면 피곤하다고 해서요.”
“그럼 먼저 숙소로?”
“아니, 한 잔 하러.”
깔끔히 책임을 다한 시드를 칭찬해주려던 뮤아의 기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뮤아는 이마에 손을 짚고 신음했다.
“피곤한 거랑 마시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어.”
“시드가 보기엔 관련 있나보죠.”
“뭐든 갖다 붙이잖아, 시드는.”
“그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고요.”
시드와는 달리 확실히 졸려 보이는 세피아를 데리고, 일행은 일단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밤이 되면 오랜만에 다섯 명 모두가 모일 터였다.
12-3
뒷골목 벽에 어깨를 짓눌리면서도, 아피아는 상대를 노려만 봤다. 저 입에 떠오른 비웃음은 반격당할 거란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시선을 옆으로 흘리자, 모퉁이에 황급히 몸을 숨기는 그림자가 보인다. 제대로 따라오고 있다.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은가.
그렇게 판단한 아피아는 일단 공격을 보류했다.
이 마을은 번영하는 만큼 그늘도 깊다. 빈틈을 보이자마자 그늘에 사는 주민들이 몰려든다. 지금 눈앞에 있는 세 사람도 그런 부류였다.
“가지고 있는 거 다 내놔.”
속셈이고 의도고,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돈 냄새를 맡은 것뿐이다.
보이지 않게 체인을 풀려고 했는데, 저 치들의 후각을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목걸이를 매단 채 가게까지 달려가는 건 또 어떤가 싶어지니, 이래서야 피할 수 없었던 사태였다. 잠든 세피아를 뮤아에게 맡겨두고 혼자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여비가 떨어진 것부터 문제였다. 이제 수중에 바꿔먹을 만한 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었던 데다 애당초 귀금속을 몸에 두르고 다니는 습관도 없었다. 한순간의 판단으로 집어든 것들 덕에 어떻게든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돌만 있으면 된다고 해도 목걸이에 손을 대는 건 망설여졌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목걸이의 체인만으로도 웬만한 값이 나와 좀 더 싼 줄을 사서 돌을 매달았다. 옷 아래로 몰래 한 작업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가게 주인이 지켜보고 있던 것 같기도 했다. 아직 비싼 물건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한 걸지도 모르고, 체인 값으로 지불한 돈이 아까워진 것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놈들과 가게 주인은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너희한테 내놓을 건 없다.”
그리고 어느 쪽이 정답이든지, 이쪽이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더 이상 불쾌한 얼굴을 들이밀지 마. 얼른 물러가라.”
자, 도움의 손길이 올까 오지 않을까.
화내는 무뢰배들을 무시하며 아피아는 다시금 모퉁이로 눈을 돌렸지만, 도움은 거기서 오지 않았다.
“솔리츠!”
불의의 기습이 머리 위에서 찾아왔다.
담벼락 위에서 발을 구르며 외치는 그 소리와 함께, 모래가 후드득 쏟아졌다. 아찔해진 아피아가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너.”
아피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건 이쪽이라고 생각했다. 이 남자는 어떤 타이밍에 나타나는 건지.
“한 잔 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마셨지.”
뭐가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는데도, 시드는 가슴을 펴며 대꾸했다.
“모처럼 기분 좋아졌는데, 그 망할 놈이 도중에 도망쳐서.”
짐작컨대 말하고 있는 사람은 세피아가 얘기했던 또 다른 동행자일 것이다. 본인은 내키지 않았다는 것 같지만, 시드에게 살레타까지 질질 끌려온 모양이다. 여기 와서야 겨우 도망쳤단 말인가.
“근데 넌 뭐하냐.”
“보면 모르나?”
“모를 것도 없지.”
“이해했다면 찾으러나 가라.”
이미 분위기도 흐지부지됐고, 모든 게 엉망이었지만 아피아는 일단 시드부터 쫓아내고 봤다. 사태가 더 복잡해지는 건 싫었다.
하지만 아피아는 간과하고 있었다. 시드가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리가 없다는 점을.
“……뭐, 너도 괜찮으려나.”
입 밖으로 흘리는 말의 뜻을 따져볼 겨를은 없었다. 그러기도 전에 시드가 벽을 딛고 섰다. 멋진 날라 차기가 아피아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남자에게 먹혔다.
뒤이어 나머지 두 사람의 멱살을 잡아 벽 너머로 내팽개친 시드는 아피아의 목덜미를 거머쥐었다.
“좋아, 가자.”
정신을 차려보니 아피아는 시드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행선지를 깨달아 저항하려 했지만, 힘의 차이가 너무 크다.
“놔라!”
“싫은데. 너도 뮤아한테 잔소리나 들어.”
“취, 취했군!”
“그랬겠냐.”
모든 저항은 공허하고, 아피아는 골목에서 끌려갔다.
12-4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있던 소년은 태평하게도 직원에게 차를 주문했다.
“고맙습니다.”
그는 가볍게 인사하며 말을 걸어왔다.
“큰일이네요, 감시 역도.”
짐짓 눈을 흘겨도 그는 전혀 풀죽지 않았다. 그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피아는 이제 여기 안 올 거예요.”
“……알고 있어.”
손에 든 컵을 놓은 토니나가 마침내 닛카에게 대답했다.
“그야 뭐 미행 정도는 붙였으려나.”
“뭘 하러 온 거야?”
그건 당연한 물음이었으므로, 대꾸도 여유롭다.
“차를 마시는 김에 얘기도 하러.”
“남을 속여 놓고 배짱이 좋군.”
“그런 말을 듣다니 의외네요. 전 거짓말 같은 건 안 했어요. 아, 고맙습니다.”
닛카는 점원이 건넨 잔에 향신료를 집어넣고 휘휘 젓는다.
“넘겨줘도 상관없지만, 그때는 그럴 마음이 없었던 것뿐이에요.”
“뻔뻔하군. 지금도 그럴 마음은 없겠지.”
“뭐, 어떨까요.”
북문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 이 찻집 앞은 상인들이 드나드는 시간을 맞아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이런 곳에서는 요란한 짓을 벌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소년은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당신들, 누굽니까?”
닛카가 직설적으로 물어온다. 토니나는 거기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이쪽이 할 말이다. 너희는 그 둘을 어쩔 생각이야?”
“글쎄요. 그냥 같이 여행하는 것뿐인데요.”
“아직 모른다고 우길 셈인가?”
“정말로 몰라요, 유감스럽게도. 알고 있다면 전 여기 없었을 거예요.”
소년의 말뿐이라면 믿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엊그제 같은 자리에 앉은 아피아도 같은 말을 했었다.
그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말려들게 하지 말라고.
솔직히 말해서, 아쉽게 된 일이라고 토니나는 생각했다. 아버지가 길을 잘못 들지만 않았어도 성실한 후계자였을 텐데. 그렇기 때문에 아직 설득의 여지가 남아있고, 그러니 확보하라는 명령이지만.
그가 바라는 대로 좋은 인상을 남겨도 손해는 없을 것이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지난번에도 듣긴 했지만 흘려들었던 이름을 토니나가 다시 물었다.
“닛카. 닛카=타이카=솔입니다.”
웬일인지 그 이름은 기억의 저변을 자극했다. 하지만 너무 사소하게 걸렸을 뿐이라서, 토니나는 그 꺼림칙함을 무시했다.
“그럼 닛카. 한 가지 충고해주지.”
토니나의 말에 소년의 눈이 경계심으로 가늘어졌다.
“우리가 튀어나오는 동안 그 두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게 좋아.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면 말이야.”
“그건 어째서죠?”
“우리가 제때 도착했다는 뜻이니까.”
토니나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우린 원래 이런 일에 적합하지 않아. 그래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야. 그런 것은 그도 알고 있겠지. 게다가 앞으로는 견뎌낼 수 없고.”
아피아에게는 알렸다. 머지않아 올 지원군의 존재를.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거든 이쪽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그는 시선을 떨군 채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자신의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헤어지는 게 좋겠다. 애들에게 독한 짓을 할 생각은, 나도 없으니까.”
그것은 협박하기 위해 엄포를 놓는 것이 아니라, 토니나의 진심이었다.
12-5
아무 것도 마시지 않았는데 벌써 속이 쓰린 것만 같아서, 아피아는 카운터에 앉아있었다. 낮인데도 만원인 가게 안은 온갖 술 냄새와 피어오르는 향, 심지어는 사람과 짐승의 체취까지 어우러져 독특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냄새다.
“어디서 이런 곳을 찾아냈지?”
“상인 아저씨한테 배웠어.”
어수선한 아피아에 비해 시드는 이상하리만치 친숙해 보였다. 가게 주인이 말을 걸자 강하고 맛있는 놈이라는 애매한 주문을 했다. 아피아는 하여간 빨리 나가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시드가 있다고 딱히 대화가 활기를 띄는 것도 아니었다.
시드의 기분을 망가뜨려서라도 나가기 위해 아피아가 일어서려던 순간, 때맞춰 두 사람 앞에 잔이 나와 버렸다. 입을 대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독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찌르는 바람에 아피아의 기가 꺾였다. 무심코 시드를 쳐다봤더니 똑같이 노려본다. 마시지 않는 한, 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드는 아피아의 눈앞에서 똑같은 잔을 단번에 마시고, 새로 주문하고 있다. 보기만 해도 골이 아프다.
“뭐야, 마셔. 꽤 괜찮은데.”
그 말투에 악의는 전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더 나빴다.
“이, 이런 건…….”
아피아는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핑계를 찾았다.
“이런 건 마시면 몸이 망가진다.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시끄럽네. 뮤아 같은 소리 하지 마. 한 번도 취한 적 없고.”
“그럴 리가 없잖나.”
아피아가 울컥 응수했다. 이렇게 마셔대면서 멀쩡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저를 데려온 것도 평소라면 있을 리 없는 일이고, 자각하진 않아도 취해있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하지만 시드는 딱 잘라 말했다.
“안 통하거든, 나는. 아무 것도 효과가 없어―. 술도, 독도, 약도 말이야.”
“어째서?”
“그런 거 알겠냐. 그때부터였지.”
그리고 아피아는 그것이 꺼내서는 안 될 질문이었음을 깨달았다.
“너희들이 어머니를 죽였을 때부터.”
그 이야기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때, 우린 둘뿐이었어. 저택의 마당이었으니까. 그래도 칸막이라곤 나무 울타리뿐이고, 벽은 없었지. 벽 따위는. 그래서 쉽게 쳐들어오더라. 피투성이였는데. 필사적이었고. 어머니가 그놈한테 달려갔지. 난 당연히 그놈이 직접 말하기 전까지 몰랐어. 그게 세발족일 거라고는.”
시드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늘어놓는 듯했다. 아피아는 추임새조차 넣지 못하고, 그저 말하지 않아도 되게끔 잔에 입을 댔다.
“계속해서 다섯 명 정도 왔어. 다섯 명인가? 지금은 적어보이네, 젠장. 난 왜 그렇게 작았었지? 이해가 안 돼. 어머니는 그놈을 넘기라는 녀석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어. 당연하지. 나는 도망가라고 했는데, 안 됐어. 잡혔다. 배를 찔렸고. 간단하게. 깨어나 보니까 다 끝났더라. 어머니가 죽었댔어. 나는 살아있는데. 이미 묻었다고 했어. 왜 보름이나 자버렸지. 그래도 그건 아니잖아. 쫓기던 녀석이고 쫓아온 녀석이고 못 찾았어. 그걸로 끝이야. 전부 끝. 아버지는 뭔가 아는 것 같아. 그치만 얘기하기 싫어.”
감정의 응어리는 내뱉어도 가라앉지 않고, 마음 깊숙이 소용돌이칠 뿐이었다. 몇 번을 되돌아봐도 그 불합리함에 가슴이 타들어가기만 했다.
“기억해. 나는, 너희들이 정말 싫다.”
단언 끝에 자리에는 침묵이 떨어졌다. 시드는 혀를 차고, 딴 데를 보며 술을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이런 얘기를 할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퍼붓기 시작한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뭔가 결정적으로 이상해질 거란 느낌이 들었다.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그저 한 가지, 술맛이 떨어졌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12-6
아무리 답답한 공기가 흐른다 해도 그것은 두 사람 주위뿐이고, 술집은 그런 것도 모른 채 전반적으로 떠들썩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여도 돼.”
그 목소리는 웅성거림 속에선 너무 작고 꽉 잠겨 있어서, 시드의 귀에 거의 닿지 않았다.
“뭐라고 했어?”
들은 이상 무시할 수는 없어서, 시드는 아피아를 쳐다봤다. 하지만 아피아는 고개를 숙이고 있고, 머리칼에 가려 얼굴도 전혀 보이지 않고, 시드의 물음에 반응하지도 않는다. 시드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을 때, 아피아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시드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전부 끝나면.”
그리고 다시 그 말이 흘러 나왔다.
“나를, 죽여도 돼.”
허를 찔렸다.
“……뭐야, 그게.”
그래서 시드는 그렇게 내뱉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싫은 기분이다. 심란해지는 것 같다. 지금까지도 이런 일은 있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애초에 네가 허락하고 자시고 나는…….”
술을 마시며 푸념을 늘어놓는 것으로 진정한 시드는 다시 되받아쳐주려고 아피아 쪽을 돌아봤다. 하지만 아피아는 더 이상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카운터에 엎드려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시드는 머금은 술을 내뿜을 뻔한 걸 어떻게든 참아냈다. 어깨를 흔들며 불러봤더니, 숨소리가 되돌아왔다. 손을 댄 볼은 차갑기는커녕 살짝 홍조를 띈 채였다. 아무래도 평소의 발작이나 상태가 나빠졌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취했나, 이 녀석?”
앞에 놓인 잔은 거의 줄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마셨다고 해도 한두 모금 정도. 아무리 독한 술이래도 그 정도로 취할 것 같지는 않은데, 도저히 자는 척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제기랄.”
욕을 해도 들어줄 상대가 없다.
이곳에 내버려두고 갈 수도 없다. 시드는 한숨을 쉬고, 계산을 마치자마자 아피아를 옆구리에 낀 채 가게에서 나섰다.
머물고 있는 숙소의 이름과 위치는 닛카에게 들어뒀다. 데려가서 방에 처박아두면 문제는 없겠지.
12-7
다행히 헤매지 않고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방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뮤아의 모습을 찾았기 때문이다.
“아피아, 늦네.”
잠든 세피아를 보살피고 있었던 것 같은 뮤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쭉 내다보던 창문에서 눈길을 거뒀다. 시드는 발견되지 않도록 서둘러 문에서 멀어졌다. 아피아를 두고 다시 한 잔 하러 가려고 했는데, 잡히면 망한다.
일단 새 방을 잡아서 두고 가기로 한다. 일어나면 알아서 자기 방에 돌아갈 거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아피아의 몸을 던지고, 손발을 대충 편다. 정신을 차릴 기미는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뮤아가 떠들어대기 전에 어떻게든 일어나주지 않으려나, 하는 바람도 이뤄질 것 같지 않았다.
위로 이불도 덮어주지 않고서, 시드는 얼른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뮤아와 마주치지 않게끔 먼저 복도를 살폈다.
“귀찮아, 젠장.”
혼나는 것도, 술에 대해 더욱 까다로워질 것도 분명해서, 시드는 앞일을 상상하며 탄식했다. 폐를 끼치려는 게 아니니까 술 정도는 맘대로 마시게 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축 늘어진 아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와 사고가 하나로 정돈됐다. 이건 폐가 되겠지, 아마도.
변명조차 막힌 시드의 조바심이 더욱 격해졌다. 집을 나오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잔소리는 심해졌고, 결국 마물 퇴치도 뭣도 못 하게 됐다. 본의 아닌 것들 투성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알 수 없게 된다.
왜 나는 이 녀석들과 같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술렁이던 마음이 갑자기 가라앉았다.
시드는 열었던 문을 닫고 침대로 돌아갔다.
세발족.
그 숲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 떠올랐다. 아찔한 분노와 흥분.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히, 무척 기뻤다.
“나는…….”
간신히, 그때 놓친 것을 되찾을 수 있어서.
아피아의 몸 위로, 무릎을 침대에 두고 팔을 뻗는다. 양손이 아피아의 목을 붙들고, 시드는 그 감촉이 기분 나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가늘다.
이래서야 필요한 건 아주 작은 힘이다.
“……죽여도 되잖아.”
아피아의 머리가 시트에 처박혔다. 손가락 끝에 뼈가 닿아 딱딱한 감촉이 전해져 온다. 저항은 없다. 목소리도 내지 않는다.
약간 힘을 줄 뿐.
“제기랄.”
시드는 곧 다시 들어줄 사람 없는 욕을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목에 걸었던 손가락을 느릿느릿 떼어냈다.
이 녀석이 아니다.
그런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저와 동갑인 이 녀석이 그때 그놈들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묻혀버린 일은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쯤은.
그런데도 나는.
시드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온몸의 움직임이 어색하게 느껴져, 그것을 뿌리치려는 듯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토해낸다. 건조하고 더운 공기가 가슴에 퍼져, 입안이 깔깔하다.
시드는 무언가가 자신의 안에 들러붙어 있다고 느꼈다. 제 안의 분노의 불길이 사그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이다. 아직 그걸 없앨 수는 없다.
갈증이 그의 움직임을 재촉했다. 시드는 발을 돌려 술집으로 향했다.
그것이 초조함이라는 것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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