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13-1

메마른 황무지 끝에서, 녹음이 우거진 수풀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전조는 곳곳에 나타나고 있었다. 발밑으로 마른 잎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바람은 부드러워졌으며, 타는 듯한 열기가 점차 그 기세를 잃었다. 점점 굵어진 모래 알갱이는 수분을 머금고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초록색을 발견했을 때의 감회가 남다르다. 여태 보아온 광경이 얼마나 삭막했는지 느껴졌다.

열지는 끝났다.

잊혀져가던 풀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벌레들의 모습도 늘어갔다. 세계의 윤곽이 눈앞에 또렷해졌다.

  “야아―, 시원하다.”

모래에 발이 묶이지 않도록 두꺼운 신발을 벗어던진 뮤아가 맨발을 풀밭 위에 내딛었다. 여기까지 끼워준 상인들은 열지에서 입은 장비들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했고, 중장비로부터 풀려난 토록들도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어쩌죠. 여기서 갈라질까요?”

닛카가 느긋해진 뮤아에게 확인했다. 뮤아는 조금 생각하더니, 결단을 내렸다.

  “음…, 그럴까. 숲은 익숙하니까 그렇게 할까.”

상인들은 이제부터 남쪽 아래의 마을을 목적지로 두고 있었다. 거기 따라가더라도 성산에 가는 데 멀어지지는 않지만, 남쪽으로 나아가다 보면 정화된 평원을 가로지르게 된다. 끝없이 이어지는 평지는 추격자들을 따돌리기엔 부적합한 지형이었다. 거기다 숲속이라면 안심이 된다.

  “그럼 제가 상인들에게 전하고 올 테니까, 뮤아는 세 사람한테.”

  “알겠어. 부탁할게.”

열지용 신발을 닛카에게 건네준 뒤, 짐 속에서 보통의 신발을 꺼내 신었다. 무척 익숙한 감각이 발에 닿아, 돌아왔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안겨다줬다. 열지에 있었던 건 고작 2주 정도의 기간인데, 들어가기 전의 일들이 퍽 옛날처럼 느껴졌다.

  “숲에 난 길로 가나?”

  “으악!”

일어서려던 뮤아는, 갑자기 등 뒤에서 그런 소리를 들어 깜짝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시드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듣고 있었어?”

  “잘못됐냐?”

  “잘못 했다고 한 적 없는데. 뭘 혼자서 찔리고 있어.”

  “아무 것도 아냐.”

불쾌함을 얼굴에 나타낸 시드를 향해 뮤아가 쏘아붙였다. 어쩐지 열지에 들어간 이래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걸 재현하게 된다. 제 말투도 좋지 않았다고는 생각하는데, 그 이상으로 시드가 과잉 반응을 하는 것만 같다.

  “시드는 숲이어도 상관없어?”

  “어디든 상관없어.”

  “그래, 그럼. 상인들한테 볼일이 있으면 정리해 둬, 당장.”

시드의 대답에 가시가 돋쳐 있었기 때문에, 뮤아는 받아넘기기로 했다. 아마 그게 제일 무난할 터였다.

  “근데 아피아랑 세피아는 어떠려나.”

  “모르지, 나야.”

뮤아의 혼잣말에마저 대답하는 시드는 역시 너무 과민하게 보인다. 뮤아는 못 들은 척 자리를 벗어났다. 술 문제로 심하게 나무란 게 원인인지 고민해봤다. 감정적으로는 용납하기 어렵지만, 앞으로도 이런 상태가 되는 것보단 어느 정도 묵인해주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아피아와 세피아는 조금 떨어진 비탈 위에서 발견됐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둘 다 잠깐 얘기 좀…….”

손을 흔들며 다가갔더니, 세피아가 돌아서서 입을 막는 시늉을 했다. 고개를 갸웃거린 뮤아는 가까이 가서 그 의미를 깨달았다. 아피아가 무릎을 껴안은 채 꾸벅 졸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안. 상인들이랑 여기서 갈라져서 숲으로 갈 생각인데, 문제없어?”

뮤아가 목소리를 낮춰 세피아에게 말을 걸었다.

  “음…, 괜찮지 않을까.”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사 둘게.”

  “아, 그럼 숫돌이 있으면.”

세피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요구였지만, 용도는 분명했다. 그의 허리춤에 언젠가부터 단검이 매달려 있는 덕이었다. 최근 벌어진 일을 잊은 건 아니나, 세피아가 날붙이를 가지고 다니는 건 어쩐지 뮤아에게 불길한 느낌을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요구를 거절할 것도 아니었지만.

  “알았어, 물어볼게. 그리고 아피아가 피곤하면.”

여기서 야영을 할까, 물어보려던 뮤아의 말은 아직 잠에 겨운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음, 아, 괜찮아, 괜찮아. 귀찮게 했네…. 어젯밤에 생각할 게 있어서…….”

  “아피아. 뮤아야.”

이름을 알아듣는지 반응하는 아피아에게, 세피아가 어쩐지 강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부르자마자 아피아는 의식을 되찾은 것 같았다. 고개를 저으며 눈길을 준다.

  “……아, 아. 뮤아. 미안. 좀 멍한 것 같아. 왜?”

  “상인들이랑 갈라져서 숲으로 가려고 하는데, 괜찮아?”

  “뮤아가 결정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응답은 부드럽고 미심쩍은 데도 없었는데, 뮤아는 오히려 그래서 싫었다. 처음부터 아피아는 수상한 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사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모든 걸 속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뮤아는 자신이 보는 눈이 달라졌을 뿐인지도 생각해봤다. 그 이후 어떻게 해도, 아피아와 얘기할 때마다 어른거렸던 것이다. 보고 말았던 것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는 거니까.

마치 바퀴에 모래가 낀 록차처럼, 저희들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13-2

열지를 경험한 뒤의 초원 여행은 놀라우리만치 편했다. 휘몰아치는 강풍도 없고, 밑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도 없다. 시야를 가리는 것도, 다리에 달라붙는 무거운 모래도 없다. 사흘에 걸쳐 대삼림 끄트머리까지 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세상이 달라 보여.”

이래서 순례에 모래의 신전에 예배를 드리는 게 필요한 거구나, 뮤아는 납득했다. 아무리 말로 해도 이 감각은 다 전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어쨌거나 최대의 고비는 넘겼다. 이제는 쭉 성산을 향해 가는 일만 남았다.

저 멀리 우뚝 솟은 성산의 모습은 나날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대로 여행을 한다면, 한 달도 되지 않아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세발족들은 안 보이네. 열지에서 어떻게 됐나?”

뮤아가 옆에서 걷는 닛카에게 말을 건넸다. 5명으로 돌아온 일행은, 앞에서 멋대로 나아가는 시드, 뒤에 붙은 아피아, 세피아, 그 사이에 낀 뮤아와 닛카라는 평상시의 배치를 자연스레 취하고 있었다. 지금은 오늘밤 묵을 마을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거라면 좋겠네요.”

살레타를 떠날 때, 서둘러 떠나는 척도 해보고, 숙소를 옮겨보기도 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척도 하고, 중간에 일시적으로 상인들을 떠나보기도 하는 등의 여러 시도를 했었다. 그 덕분인지 아직까지 그들의 습격은 없었다.

  “…그 사람들,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뮤아는 조금 망설이다 그렇게 운을 띄웠다.

  “벽을 넘어온 세발족이죠?”

  “그게 아냐. 알아들었으면서 얼버무리지 마. 닛카는 어떻게 생각해?”

서로 떠보는 듯한 물음을 주고받은 끝에, 닛카가 마침내 손을 들었다.

  “저희끼리 서로 탐색해봐야 소용없어요. 글쎄, 제 생각은 이래요.”

닛카는 손가락을 하나씩 세우며 생각을 늘어놓았다.

  “하나, 전원이 나름대로 교양을 가진 사람. 적어도 읽고 쓸 수 있겠죠. 둘, 난폭한 일에 익숙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전혀 발전이 없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셋, 이 나라에서 보낸 기간이 있다. 최소 1년.”

마지막 항목은 뮤아로선 예상 밖의 것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뮤아에게 닛카가 설명했다.

  “어디까지나 억측이지만요. 그 사람들, 온 지 얼마 안 됐다기엔 너무 익숙하게 지내는 것 같지 않아요?”

듣고 보니 열지를 대비한 장비라든가, 저희들보다 요령이 좋았다. 처음 봤을 때도 망토를 걸쳐 유우족을 가장하는 등, 여러 모로 눈에 띄지 않으려 궁리하고 있었다.

  “그럼 두 사람을 쫓아온 게 아니란 말이야?”

  “의심한다면 그것부터 의심돼요. 아피아와 세피아가 정말 벽을 넘어왔는지도.”

뮤아의 심장이 크게 뛴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호리라 태생의 세발족일 가능성이라니. 세발족이 이렇게나 숨어 살고 있다면 허무맹랑한 얘기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표식은.

  “뭐, 그건 농담인데요. 거기부터 의심하다 보면 오히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돼요. 그들이 정말 세발족인지 같은 것도.”

뮤아의 낯빛이 어두워진 걸 알아봤는지, 닛카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거기까지 의심해봤을 거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걸 입에 담을 수는 없다.

  “다만, 적어도 아피아는 그들이 쫓아오리라는 걸 알았을 거예요.”

닛카는 뮤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시 뮤아에게 물었다.

  “그게 배신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건…….”

닛카의 입에서 튀어나온 게 너무 불온한 단어라, 순간 뮤아는 어물거렸다.

  “그런 건 생각 안 해. 그래도 이대로는 오래 못 갈 거야. 할 수 있다면 털어놔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지금 그렇게 다가갔다간, 아피아에겐 책임을 돌리는 것처럼 느껴질 거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얘기를 해줄지 여전히 모르겠다.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닛카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면 아마…….”

  “안녕하세요.”

그 순간 문득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와, 닛카는 입을 다물었다. 뒤돌아봤더니 부녀 같은 두 사람이 빠르게 일행 옆을 앞질러 갔다. 저희들과 똑같이 마을로 향하는 것 같았다.

뮤아 옆을 지날 때도 딸은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커다란 모자 밑에 흘끗 보인 것은 긴 검은 머리를 하나로 땋아 올린 또래의 소녀라서, 뮤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시드에게 인사하는 아버지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잡고는, 나란히 길을 걸어갔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진 것 같군요.”

마을이 가까워진 것이다. 닛카는 일단 대화를 멈춰두기로 한 것 같았다. 확실히, 그 이상의 이야기는 좀 더 차분한 장소에서 하는 게 좋을 듯했다.

뮤아는 티가 나지 않게 뒤를 살폈다. 아피아가 세피아의 손을 잡은 채, 굳은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13-3

유인하고 있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는 없다. 집집 사이를 헤치고 모퉁이에 어른거리는 모습을 쫓는다. 의도적인 권유다. 역시나, 마을 뒤편, 인기척이 드문 숲속에 닿는다.

포위될 각오를 했지만, 아피아를 맞이하는 건 한 명뿐이었다.

  “…아피아.”

거기 선 소녀는 모자를 든 채, 머뭇대며 이름을 입에 올린다. 아피아에게 있어 그것은 못 알아볼 리 없는, 그리운 얼굴이었다.

  “사라리나트…….”

아피아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네가 올 줄은 정말 몰랐어.”

그 말에 사라리나트가 눈을 내리깔았다. 이후 어느 쪽도 본론을 꺼내지 못해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라리나트 쪽이었다.

  “내가 온 이유를 알죠?”

  “그를 위해서.”

아피아는 입술 끝에 미소를 걸었다.

알고 있다. 사라리나트는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리라. 벽을 넘어 이국의 땅으로 오는 것까지도. 그리고 거의 확신하고는 있었으나, 확실치 않았던 적의 모습이 뚜렷해졌다.

  “아냐, 라고 말해도 믿어주지 않겠지. 그래, 맞아.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냐.”

사라리나트가 호소하며 아피아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내가 여기 온 건, 무엇보다도 당신 때문. 그걸 알아줘요.”

그것은 믿고 싶었고, 믿어도 좋았다. 문제는 사라리나트를 보낸 자의 의도였다.

  “있지, 아피아. 이젠 그만하자. 이제 돌아가. 이런 일은 마무리를 짓자.”

친구의 설득에 넘어간다면 좋지만 아니면 별 수 없고,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놈들이 카드를 하나 내민 거다.

  “지난 200년 동안 우리에게 문제는 없었어. 앞으로 200년 동안도 똑같이 지낼 수 있어.”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럼 나랑 같이 돌아가. 당신 말고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지요?”

사라리나트의 말은 마음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옳다. 옳지만, 이제 아피아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라리나트는 모자를 내던졌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아피아의 손을 감쌌다. 따뜻함이 전해져 온다.

매사에 열심인 사라리나트의 모습은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피아, 부탁이니까.”

  “돌아가고 싶어.”

흘러나온 중얼거림에 사라리나트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아피아는 고개를 저었다.

  “달라. 이런 일이 생기기 전으로.”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조금씩 어긋나던 걸음이 모두를 빠져나올 수 없는 진창에 빠트리고 말았다.

  “이젠 돌아갈 수 없어. 제자리로는. 나티아 백부는 그런 방법을 골랐어. 이제는 누구도 돌아갈 수 없어. 알고 있지, 사라리나트. 모른다고는 말하게 두지 않겠어.”

똑똑히 말한 이름을, 사라리나트는 부인하지 않았다.

 

13-4

느슨해진 손으로부터 아피아가 조용히 자신의 손을 뺐다. 그러자 사라리나트의 손은 쫓아오려 했지만, 도중에 움직임을 멈췄다.

아피아는 한 번 결정하면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아직 늦지 않았어. 아피아만 돌아와 준다면…….”

지어낸 말에는 실려 있는 것이 없어, 말을 하는 당사자조차 속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피아는 그것을 듣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아예 가로막았다.

  “아버님은 어떻게 지내셔. 대답해 줘.”

어떻게든 알고 싶은 정보였다. 사라리나트라면 얼버무리지 않을 것이다.

  “그……, 병이 들어서…….”

사라리나트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태도가 말 이상을 얘기한다. 아직도 그런 걸로 돼 있다는 거다.

  “사라리나트는 모습을 본 적 없어?”

  “꽤 위중하다고…….”

  “그래.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군.”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사라리나트는 고개를 숙인 채로 굳어버렸다. 그 어깨가 떨리는 것을 알아본 아피아는 자기혐오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초조함을 부딪쳐봤자 뾰족한 수도 없는데.

  “미안. 미안해. 너를 탓하려는 게 아냐. 사라리나트, 너라도 알고 있을 거야. 날 데려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응.”

망설임 끝에 사라리나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너는.”

  “그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해?”

잘못한 건 없다. 그는 실수조차 하지 않고 하라는 대로 흘러가고 있을 뿐이니까. 사라리나트의 마음을 아는 주제에 이런 역할을 억지로 떠안기고, 본인은 태평하게 지내고 있을 게 틀림없다. 무엇 하나 책임질 생각도 없이 상냥하게 설치고 있을 거다.

디디스. 아피아는 그 이름을 입속으로 토해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그 새침한 얼굴을 때려눕혀 줄 텐데.

  “아피아는 자기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해?”

  “생각해.”

사라리나트의 작은 반격에, 아피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반드시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버님은 너무 서두르셨어.”

  “그러면…….”

  “사라리나트. 돌아갈 생각은 없어. 우린 이미 벽을 넘었으니까.”

  “넘었으니까 알아. 아네키우스의 뜻에 거역하는 짓이야.”

  “틀렸어. 그건 아네키우스의 수호 같은 게 아냐. 그건…….”

뒤틀린 거지.

아피아는 치밀어 오른 그 말을 얼른 삼켰다. 어째서 그런 표현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느껴졌다. 그것은 결코 은총 같은 게 아니다.

그건 무엇을 막으려고 있어?

  “그것은 신의 저주죠?”

그 목소리는, 사라리나트의 등 뒤에서 불쑥 끼어들었다. 뒤이어 숲의 어둠 속에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따르지 않는 자는 벌을 받는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것은 마을로 가는 길에, 사라리나트와 나란히 일행을 앞질러가던 남자였다. 키는 아피아와 다를 바 없이 작고, 나이를 알 수 없는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아피아의 손은 허리춤의 칼자루에 올라가 있다. 전신의 피부로 오싹함이 느껴졌다. 저 남자가 다가오는 게 몹시 싫다.

아피아가 긴장하자 사라리나트는 의아한 표정을 짓지만, 남자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경계하지 마세요. 인사뿐이에요, 오늘은.”

남자가 모자까지 벗으며 지나치리만치 깍듯하게 인사를 해 보여도, 아피아는 손을 검에서 떼지 않았다. 전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디부터 듣고 있었던 걸까.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신을 모시러 온 제난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가식에 응대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곁에서 당황하는 사라리나트에게 묻는다.

  “이건 누구야.”

이런 얼굴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새로 고용했거나, 아니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거나.

  “누구냐니……, 호위로 붙여주신 분이지만.”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대로 명령 받았으니까요. 두 분께는 상처 하나 입히지 말고 모셔오라고요.”

후자다. 아피아는 확신했다. 이 남자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는 사람이다. 언젠가 그런 추격자도 올 거라고는 생각했더니, 녀석들은 두 장의 패를 한꺼번에 내민 것 같다.

  “자, 사라리나트 님. 오늘은 이쯤에서.”

제난은 아피아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사라리나트의 어깨를 감싸며 발길을 돌렸다. 아피아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사라리나트, 그 녀석에게 넘어가지 마!”

순간, 생각지도 못한 속도로 제난이 뒤를 돌아본다. 숨을 삼키며 물러서려던 아피아는, 이미 그의 손에 자신의 오른 손목이 붙들렸다는 걸 깨달았다.

  “너무한 말씀을 하시네.”

손톱이 파고들며 힘을 가한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다.

  “당신도 지금 당장 같이 가실까요?”

  “……가버려.”

막힐 듯한 숨결 아래서 그 말만이 겨우 흘러나왔다. 제난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점점 깊어졌다.

  “제난, 억지로 데려가려고 하면…”

  “알고 있어요.”

사라리나트의 주의를 받은 제난이 아피아를 풀어주고, 다시 한 번 허리 숙이며 인사를 해 보였다.

  “동료들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세요.”

그러고는 사라리나트를 재촉해 숲속 깊이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거기 대기하고 있는 토니나와 록차의 모습이 보였다.

아피아는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붙잡으며, 얼굴을 가리려는 듯이 양손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13-5

  “오랜만입니다.”

고개 숙이는 토니나를 무시하며, 제난은 그를 찾았다.

  “도련님은 주무시고?”

  “예, 밖에 두 명 세워뒀어요.”

  “그거 괜찮군.”

간이침대가 마련된 록차 하나에 사라리나트를 밀어 넣었다. 평소와 비교하면 불편한 상황일 텐데도,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마을에 숙소를 잡아도 좋았겠지만, 섣부르게 표적과 만날 기회를 늘리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던가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토니나는 제난의 맞은편에 앉았다. 만난 건 무려 9년 만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제난이 서둘러 떠나는 바람에 만날 기회가 없었던 탓이다. 뭐, 그래도 토니나에게 딱히 옛정을 되살릴 생각 같은 건 없었지만.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아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까지 했다.

  “아이의 허세라는 건, 참 귀엽네.”

제난은 그리 말하며 킬킬 웃었다. 그 태도는 토니나의 기억 그대로였다. 세월이 제난에게 영향을 주지 않은 것 같다. 그는 토니나를 흘끗 쳐다봤다.

  “뭐야, 그 얼굴은. 난 고용주 명령은 잘 지킨다고. 알잖아.”

물론 안다. 그래서 토니나는 물었다.

  “무슨 말을 들었습니까?”

  “공작으로부터 하나. 그 두 사람, 특히 높으신 분을 사지 멀쩡하게 데려올 것. 도련님으로부터 하나. 납득시켜서 함께 오게 할 것.”

그가 말한 것 외에는 지킬 가치가 없다고 여기고 있는 걸, 안다.

  “왜? 할 말 있으면 해. 이래봬도 조금은 반성했어. 근신 생활이 길었으니까.”

제난은 토니나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했다. 그의 말에는 믿음이 가지 않지만, 저도 옛날처럼 미숙하지는 않다. 기 싸움에 밀려 고분고분해지는 것도 내키지 않아, 일단은 반론을 시도해 보았다.

  “저는, 다소 무리해서라도 두 사람만 끌고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일을 크게 벌이면 임무를 달성해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여기는 마물이 산다는 숲이잖아. 뭔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

  “하지만 그건…….”

토니나가 시선을 내린 그 순간이었다. 이마에 뾰족한 가지가 바짝 들이밀어진다. 닿지는 않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간 걸려들 정도의 거리에.

  “토니나, 아아, 토니나 씨. 머뭇거릴 때가 아니지?”

그 말을 하는 이의 얼굴엔 일렁이는 불길이 비춰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그 표정은 웃고 있는 것처럼도, 화가 난 것처럼도 보인다.

  “알잖아. 저걸 놓치면 분쟁이 일어나. 리탄트를 둘로 나누는 분쟁이지.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정색하며 말하고 있다.

  “타종족 어린애 한둘이 그에 비견될 사안인가?”

말하고 있는 바는 무척 성실하다. 토니나도 최종적으로는 그 결론에 닿아 마음이 정리됐다.

이성으로는 그렇게 판단해도, 감정이 심한 혐오를 불러일으키며 토니나에게 경고한다.

이 남자는 즐기고 있다. 그것도, 엄청 무정하게.

그가 닿은 것은 최후의 결단이 아니다. 자기 좋을 결정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에 잠긴 토니나의 이마에 통증이 일었다. 들이밀어진 가지가 조금씩 다가와, 그 끝으로 살갗을 찔렀던 것이다.

   “몇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마. 생각해볼 것도 없잖아. 여기 살면서 사고방식까지 물든 건 아니겠지?”

변하지 않았다. 일찍이 이 나라에 함께 있었던 때부터, 아무 것도.

  “배반은 한 번만 해. 버릇이 되니까.”

그리고 이 남자에게 단 한 가지의 지령밖에 내리지 않은 고용주는, 그것을 용인하고 있다.

토니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13-6

재촉을 받은 토니나가 품에서 종이뭉치를 꺼내 제난에게 건넸다. 제난이 그것을 훑어보는 한참 동안, 불꽃이 튀는 소리만이 주위를 메운다. 10년 가까이 수집된 정보는 간략히 정리돼 있어도 충분한 양이라, 제난은 반쯤 걸러내다시피 해서 종이를 넘겨갔다. 그러나 마지막 몇 장만은 훑으며 읽었다. 그의 눈썹이 어느 지점에서 찌푸려졌다.

  “어이, 타이카=솔은 뭐야.”

  “뭐라고 하셨죠?”

질문의 의도가 불분명했으므로, 토니나는 되물었다. 그러자 제난은 뭔가 납득한 듯한 얼굴로 거칠게 손을 흔들었다.

  “아―, 좋아, 좋아. 아무 것도 아냐. 그리고 한 사람만 가문명이 없는데?”

  “숙박부에 항상 이름만 쓰고 있어서…….”

  “근데 조사를 안 했어?”

속여 넘길 수 없나 했더니, 제난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토니나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완전히 믿을 만한 정보가 아니어서요.”

  “말해.”

제난의 어조는 말대꾸를 일절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토니나는 가급적 그냥 넘어가고 싶었던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톨라. 신스=톨라입니다.”

순간 제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언제나 표정으로부터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표정을 지운 지금은 더욱 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이름이 그의 가슴 속에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엇일지 상상하기조차 두려웠다. 토니나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다음을 기다리고 있자, 그제야 제난이 입을 열었다.

  “일부러 숨겼군.”

그 말과 동시에 얼굴이 허물어진다. 입술에는 미소가 돌아왔다.

  “뭐 좋아. 과연. 꺼림칙하지, 그렇지.”

  “확인은 해봤습니다. 공개적인 건 아닌 모양이나, 요즘 모습을 감췄다는 건 확실한 듯합니다. 아직 톨라 영지의 연락을 받지 못했으니 거기 있을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만.”

일단은 예상되는 경로의 마을마다 전서구를 보내 수배하고 있지만, 너무 늦거나 도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토니나는 직업상 잘 알고 있었다. 이동하면서 전서구를 사용하는 건 여러 모로 무리가 있다.

  “그런 확인 따윈 필요 없어.”

제난은 옆에 쌓아둔 나뭇가지를 불길에 던져 넣으며 중얼거렸다.

  “걸린 건 그 때문인가.”

갑작스레 불길이 커져, 불똥이 사방에 튀었다. 밤의 불빛 치고는 너무 거센 모닥불을 보며 토니나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난이 몸에 불똥이 튀는 것도 개의치 않고서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도 슬슬 자라. 당분간 지켜볼 테니까. 아, 도련님 수발은 앞으로 네가 맡는다.”

  “알겠습니다.”

명령에 따라, 토니나는 록차 쪽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는 그 뒷모습을 배웅한 제난은, 다시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졌다.

  “톨라에, 타이카=솔….”

그는 목구멍 아래로 그 이름을 되뇐다.

  “이거 대단하네. 누가 차린 밥상이야?”

생각보다 즐거울 것 같았다. 기대에 차 눈을 가늘게 뜬 제난은, 일어서서 눈앞에 이글거리는 불길을 발로 힘껏 내저었다. 몇 번이나 거듭 찬 끝에 사그라진 불씨를 짓밟는다.

그가 떠난 뒤에는, 뭉개진 그을음 자국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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