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9-1

어둠 속에서는 어느 쪽이 물가인지 분명하지 않아, 오로지 밀려드는 파도를 통해서 짐작할 수밖에 없다. 달을 뒤덮은 구름은 꼼짝할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금기를 어긴 그들을 벌하기라도 하려는 양.

  “아마 아직요.”

  “보여?”

  “눈이라든가 코라든가 귀라든가, 나쁘지 않으니까요.”

세피아로서는 맞은편에서 귀를 기울이는 닛카의 모습을 간신히 인식할 수 있었지만, 더 멀리는 그저 칠흑으로만 보였다. 소리 또한 파도가 섞여 멀리서 나는지 가까이서 나는지 알기 어려웠고, 냄새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저나 바다에선 불을 켜선 안 된다는 건 생각보다 성가신 일이네요.”

밤에는 바다로 나 있는 창문을 닫고, 바다에서 들여다보일 자리에 불빛도 두지 않는다. 바다 근처 마을에서는 단단히 지키는 풍습 같았다.

바다에서 오는 것은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밤에는.

그 탓에 물가의 방향뿐만 아니라, 지금 육지와 얼마나 가까운지조차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옆으로 떠내려가다가 물가에 표착하는 상황이 돼 버릴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건 더욱 암담하다.

  “그놈들이 쫓아올까?”

결국은 현상 유지가 무난한 것 같았다. 노를 잡은 손을 가만히 하며, 세피아는 보이지 않는 저편을 흘끗 쳐다봤다.

  “일단은 배를 찾을 수 있는지에 달려있고, 다음은 노를 저을 수 있는지에 달려있고. 뭐, 무리겠죠.”

닛카의 말대로, 세피아가 밝을 때 찾아낸 배도 이 한 척뿐이었다. 처음부터 준비해놓지 않은 이상, 이 어둠 속에서 배를 찾아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앞으로는 인내심 시험이네요.”

이쪽이 포기하거나 저쪽이 포기하거나. 어느 쪽도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는 만큼, 장기전이 예상됐다.

  “아침이 되기 전에 포기하겠지, 그치…?”

날이 밝으면 저쪽에서 단념할 수밖에 없겠지만, 아피아에게 이런 상황을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 빨리 떠나주는 편이 바람직했다.

  “글쎄요. 저들이 얼마나 필사적일지는 모르니까요.”

세피아의 긴장을 닛카는 남의 일처럼 보았는데, 그건 정말로 여기 휘말려들기만 했을 따름이어서였다. 잠시 바다에 나가보려고 한밤중에 숙소를 빠져나온 세피아가 잡힐 뻔했고, 우연히 지나간 닛카가 도와준 상황이었으며, 두 사람이 배를 탄 것은 그 일련의 흐름에 속했다.

  “그건 그렇고, 노 젓는 법을 알고 있네요.”

그런데 왜 이런 시간에 우연히 지나가던 건지 돌이켜보며 의아해하던 세피아는, 자기가 묻기도 전에 상대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아, 응. 배웠으니까.”

  “강 근처에라도 살았어요?”

  “그게, 저, 호수가 있어서….”

  “그렇게 들은 것도 같군요.”

  “그치만, 이거, 상황이 조금 다르고.”

호수에서는 이렇게 파도가 밀려오는 일이 없다. 물살을 거스른 탓인지, 노가 이따금 지나치게 엄한 곳에 부딪치기도 해서, 세피아로서는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데만도 꽤 필사적이었다.

  “앗.”

또 엉뚱한 흐름에 휩쓸린 것처럼 노가 끌려갔다. 비틀거리던 세피아의 손길이 느슨해지자, 노는 금방 바다로 떨어졌다.

  “죄, 죄송해요.”

줍기 위해 반사적으로 물에 손을 댄 세피아는, 돌연 작은 비명을 지르며 움츠러들었다.

  “왜 그래요?”

  “뭐, 뭔가….”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본인도 알고 있었다. 물속에서 차가운 무언가가 손가락을 얽으며 끌어당기려고 했던 것이다. 게다가 사실은 ‘무언가’가 아니었다. 누군가라는 느낌이 들어 별 수 없었다.

  “보이진 않네요.”

세피아가 손을 감싸쥔 채 겁에 질려있는 동안, 닛카가 손을 넣고 첨벙첨벙 수면을 휘젓는다. 태연해 보이는 모습이 세피아의 얼굴을 붉혔다. 분명, 노를 놓치게 만든 그 파도의 감촉을 착각했던 모양일 것이다. 아피아가 알기라도 하면 또 겁쟁이라고 놀릴 터였다.

이래서는 안 된다. 아피아처럼, 혼자서도 다 해낼 수 있어야 한다. 혼자서도.

그 울림에 세피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자연히 흐릿해지는 눈을 손등으로 누른다. 사실이라면, 여기엔 나 혼자밖에 없는 거다.

이런 바다 위에, 어둠 속에, 그저 혼자.

세피아는 닛카가 함께 있어줘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9-2

바다는, 어둠이자 무(無)이고 죽음이다.

일찍이 풍요로운 은혜로 그라드네라를 휘감았던 이곳은, 신을 소홀히 한 사람들의 아둔함 때문에 마물의 손에 넘어갔다고 한다. 마물은 이후 토벌됐음에도 여전히 그라드네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죽음의 손길을 뻗고 있다. 그 손길이 파도다.

실제로 바다 너머를 건너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신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라고도, 바다 건너에 있는 것이 마물의 나라였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설화 속에서조차 그 진위를 확인한 사람이 없다. 보물이 있다는 뜬소문에 홀려 선단(船團)을 이끌고 출항했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는 5대 왕의 동생에 대한 얘기 같은 것을, 세피아는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먼 바다에까지 나갈 생각은 없었다. 이 배의 주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선미를 긴 밧줄로 묶어둔 채 줄을 풀지 않고 사용하는 형태로 돼 있었다. 공들여 손질한 기색도 보이지 않는 게, 아마 급할 때나 사용한 것 같았다.

물론 그 밧줄은 지금 풀린 채다. 추격자가 있는데도 줄에 묶인 채 도망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으니 그랬지만, 그렇게 해두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돼 버렸다.

놓쳐버리고 만 노를 찾지 못했다. 파도에 떠내려갔거나 가라앉기라도 했는지, 둘이서 배 주위를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풀죽은 세피아는 선미 쪽에서 고개를 떨궜다.

  “뭐, 어차피 놈들이 뭍에서 진을 치고 있는 동안엔 뾰족한 수도 없는걸요. 되는대로 느긋하게 갈까요. 아무리 최악이래도 밝아지면 어떻게든 될 거예요.”

닛카가 그렇게 말해주는 건 다행이지만, 대범한 자세로 있어도 좋은 상황인지 모르겠다. 세피아는 안절부절못하고 일어섰다.

  “저기, 나, 헤엄칠 수 있으니까, 뭍까지 줄을 잡고 헤엄치면…….”

  “잠깐만요. 진정하세요. 이렇게 깜깜한 데선 무리예요.”

그러나 닛카가 강력히 만류해 다시 주저앉았다. 왠지 아까부터 폐를 끼치기만 하는 것 같다. 세피아는, 저는 늘 이 모양이라며 참담해졌다. 아피아였다면 분명히 금방 해결했을 텐데.

  “적어도 달이 나올 때까지는 기다려요. 교대로 쉴까요?”

  “아, 내가 깨 있을 테니까, 닛카가 자고…….”

  “저기 있죠, 저한테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끝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하는 말을 듣고, 세피아는 더욱 얼굴을 붉혔다.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세피아는 항상 그런 느낌이에요?”

닛카의 말에, 아피아로부터 똑같은 말을 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 세피아.”

아피아는 곤란하다는 듯한 미소와 함께, 세피아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달래줬었다.

  “우린 주위에 조금 기대는 쪽이 나아. 다들 그쪽이 안심이라니까. 자, 당당히 있어.”

하지만 세피아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한 아피아가 얼마나 무리하고 있는지. 지금도 그랬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다. 바다를 건너 돌아갈 수 있을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다 이렇게 닛카까지 말려들게 만들다니.

  “나는 아피아처럼은 못 하니까…….”

말은 언제나 마음을 따르지 못한다. 흘러나온 대답은 이상하리만치 설명이 부족한 주제에,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아피아였다면 여기서 머리를 쓰다듬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있는 것은 닛카였고, 그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태평한 표정을 무너트리지 않은 채 말했다.

  “못 해도 딱히 상관없어요. 형제라고 해도 다른 사람인걸요. 제가 시드 흉내를 내는 게 어려운 거랑 똑같은 거예요.”

시드의 흉내 따위는 그야 아무도 못 한다. 지나친 비유에 눈을 홉뜨는 세피아에게, 닛카가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되풀이했다.

  “똑같은 거예요. 완전히요.”

그러며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턱 아래에 손을 괸다.

  “다 잘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잠깐 얘기라도 할까요?”

세피아에게 닛카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9-3

  “봐요. 바다는 땅보다 바닥이 깊죠. 그래서 바다 밑에는 마물의 나라로 이어지는 구멍이 있다는 말도 있어요. 이렇게 실제로 보니까 꽤 설득력 있네요.”

  “너머가 아니라 밑에 있어?”

바다에 대한 말들을 늘어놓던 닛카가 그렇게 마무리 지었다. 노를 빠트렸을 때의 일을 떠올린 세피아는 몸을 떨었다. 그대로 끌려갔다면 마물의 나라로 갔을까. 그러다 이 작은 배도 통째로 바다 밑에 끌려들어가지 않았을까. 지금도 이 배 밑에서 끌고 갈 기회를 노리고 있지는 않을까.

갈수록 무서운 생각만 드는 것 같아 세피아는 화제를 돌리려고 했지만, 생각나는 게 달리 없어 조금만 비틀어보기로 했다.

  “마물이란 건 어째서 땅에서 나오는 거지?”

  “보아라, 땅에서 마가 솟고, 하늘에서 신이 온다.”

닛카가 대답 삼아 암송한 것은, 성서에서 아네키우스가 강림하는 장의 한 구절이다.

  “이렇게, 신이 하늘에서 온다면, 그 적은 밑에서 오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실은 전에도 같은 얘기를 신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마물 이야기 같은 건 하는 게 아니라고 들어서, 세피아의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 닛카가 진지하게 들어주는 덕에, 세피아는 얘기를 계속했다.

  “그치만 땅에서는 꽃이나 채소, 과일 같은 것도 자라지요? 마물과 채소는 같은 데서 오는 거야? 그건 마물의 나라에서 나는 거야?”

그런 거라면 매일같이 마물의 나라에서 나는 걸 먹고 있다는 거니까, 기분이 나쁘다.

  “작물이 자라나는 씨앗은 얕게 심겨서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아, 그래도 땅에서 난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마를 물리친다는 주장도 있어요. 북방산맥 어딘가의 신전에서 그런다던가.”

  “어…, 뭘 먹는 거야?”

  “토록이나 땅돼지의 젖과 고기 같은 거요. 물고기도 포함되려나.”

  “그치만 다 풀 같은 걸 먹고 자란 거잖아.”

  “그럼 궁극적으로는 아무 것도 먹지 않는 쪽이 맞다고 생각해요.”

  “무리지?”

  “무리겠죠. 참, 그러고 보니 말린 과일을 갖고 있었어요. 먹을래요?”

출렁거리는 배 위에서 둘이 함께 말린 과일을 오물거리는 건 맛있지만 이상한 기분이다. 구름이 걷힐 기미나 뭍으로 떠내려가는 낌새도 없고, 시간 감각도 없어지고 있다. 아침이 되려면 아직 멀었을까.

  “듣고 보니 말인데, 마물이 나오는 장소는 평범한 상태의 땅이 아닐지도 몰라요. 바다도, 열지도, 마의 초원도. 대삼림은 고목들이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다는 게 특이한 점일까요. 거기다 하늘의 빛이 닿지 않는 점도 있을지 모르고요.”

닛카는 아무래도 아까의 궁금증을 좀 더 생각해준 모양이었다. 세피아는 사례를 검토하고 분류하는 그 방식의 대단함에 감탄하고 말았다.

  “리탄트에는 마물에 대한 전설이 있는 땅이 없어요?”

  “어……. 그, 북쪽은 곡창지대라고 하는데, 옛날에는 엄청 메마른 땅이었대. 그건 마물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 마물을 아네키우스가 물리쳐줬기 때문에 곡식을 재배할 수 있게 됐다고.”

  “역시 땅에 뭔가 있네요. 다른 것도 있나요?”

  “으음.”

질문을 받은 세피아는 머리 한구석에서 맴도는 무언가를 알아챘다. 그건 지금 상황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땅, 하늘, 마물, 바다, 배, 아피아, 벽…….

그 연상 작용은 갑자기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세피아 앞에 나타났다. 떨어지는 하얀 조각. 아버지와 본 광경.

  “눈! 눈을 본 적 있어!”

느닷없이 그렇게 말을 꺼내자 의아해하는 닛카에게, 세피아가 황급히 설명을 보탰다.

  “거, 거기서 더 북쪽은 눈이 내려…. 그, 왠지 하얗고, 차갑고, 보슬비처럼 위에서 내리는 거.”

  “아, 들어본 적은 있어요.”

  “그건 있지, 곡창지대에서 쫓겨난 마물이 우는 흔적이랬어.”

그렇게 알려준 건 아버지였다.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나쁜 짓을 하는 거라는 전설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세피아는 아버지의 말이 더 믿을 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이 내려 쌓이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거기에는 악의나 적의 같은 것 없이, 그저 평온한 정적이 놓여 있었다.

 

9-4

새하얗게 얼어붙은 그곳은 움직이는 것의 그림자가 드문, 적적한 죽음의 땅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동식물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아, 인접한 곡창지대의 풍요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두려운 곳이다.

그렇지만 그 고요함 속에 서 있으면 왠지 모든 것을 용서받고 잠드는 듯싶은 안도감이 절로 피어난다.

아피아도 이걸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 품었던 생각이, 세피아를 ‘바다를 건너 돌아갈 수 없을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했다.

  “그러면 북쪽으로 돌아가는 건 무리야…….”

하지만 세피아는 다시 지도를 떠올리고, 어깨를 늘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벽의 북단은 적설지대와 맞닿아 있다. 벽을 넘지 않고 바다를 건너 리탄트로 돌아간다고 해도, 도착하는 곳은 아무도 없는 눈의 땅이다.

역시 언제나 아피아가 옳다. 남쪽으로 내려가, 벽을 넘고, 세리크 측에 보호를 요청해야 한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나는 틀렸다.

  “……남쪽으로 가는 건 왠지 싫어.”

아피아에게는 꺼낼 수 없었던 말이었다. 근거 따윈 없다. 세피아가 아는 것이라고는 가슴 속에서 꿈틀대는, 어수선하게 술렁거리는 감각뿐이었다.

  “어째서요?”

  “모르겠어. 그치만 뭔가 있어. 안 좋은 게. 가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건 아직…….”

무서워.

말하면서 알 수 있는 감정도 있다. 자신은 무서워하고 있다. 남쪽에서 기다리는 것을. 그로 인한 변화들을.

자신이 서 있던 자리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석조 건물이 아니었음을 그날부로 깨달았다. 바닥 하나만을 사이에 둔 그 앞에는,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어둠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저만의 얘기가 아니다. 그라드네라의 대지 아래에 마물이 숨죽이고 있으니까.

이렇게 겁먹은 건 자신이 겁쟁이기 때문이다. 손이 떨린다. 어깨가 떨린다. 아까부터 닛카가 말없이 있는 것도, 분명 어이없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제가 보기에는…. 남쪽이라는 건 상당히 애매한 표현이죠.”

닛카가 불쑥 이렇게 입을 열었다.

  “따져봐야겠어요. 그럼 일단, 마의 초원은 무서워요?”

  “어…. 아, 응.”

난데없는 질문에 세피아는 어리둥절해 하며 대답했다. 마의 초원을 무섭게 여기지 않는 건 시드 정도일 것이다.

  “성산은 무서운가요?”

  “음, 조금.”

  “정화된 평원은?”

  “…무섭지 않다, 일까.”

  “대삼림 남쪽.”

슥슥 넘기다보면 도리어 어디가 무서운지 골똘히 생각해보다가, 정말 무서운지도 잘 모르게 된다. 불안함이 사라지고 떨림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닛카의 의도를 깨달은 세피아가 작게 웃으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뮤아는 이러면 인정머리 없다고 화내던데요.”

닛카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며 대답했다.

  “뮤아도?”

  “남쪽이 왠지 궁금하다고 그러던걸요. 이것도 전부터 생각하던 건데, 세피아랑 뮤아는 어쩐지 비슷하네요.”

  “그런…가?”

  “아피아보다 형제 같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말에 생각보다 상처받지 않은 건, 닛카는 별 뜻 없이 말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닮지 않았다는 말은 자주 들었다. 세피아는 부모 중 어느 쪽을 닮았다든가 하는 외모의 문제가 아니라, 더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즉, 자신이 쓸모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어째서 아피아가.

세피아는 생각에 잠기려다가, 황망히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날려 보냈다.

그건 이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피아를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슬프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제야 세피아는 지금 상황을 떠올렸다. 이대로 발견되는 건 걱정을 끼칠 게 분명했다.

  “저기…. 아직도 그놈들이 있을까?”

  “글쎄요.”

닛카가 귀를 기울였을 때였다. 세계의 어둠이 갑자기 엷어졌다. 검정에서 잿빛으로. 그리고 옅은 색을 입은 풍경으로.

하늘을 뒤덮고 있던 구름을 바람이 떠밀어낸 것이다. 붉은 달이 그 은은한 빛을 하늘에서 지상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9-5

슬쩍 살펴봤더니, 뭍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물론 어딘가에 숨어 잠복하고 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그들이 세발족인 이상 어둠 속에서 세피아 쪽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을 테고,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은 낮았다.

문제는 어떻게 돌아가느냐다.

물가와 멀지도 않지만, 가깝지도 않다. 배는 애매한 균형을 이루며 물살 위에 떠 있다. 가만히 둔다고 뭍에 다가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시 노를 찾아봤지만, 그렇게 쉬이 찾아질 리도 없었다.

  “역시 내가…….”

헤엄쳐보겠다던 세피아의 말문이 막혔다. 빛이 비춘 바다는 일전의 어둠을 깊이 받아들인 것처럼 보여서, 그것이 투명한 물의 집합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닛카 역시 고개를 저으며 세피아를 말렸다.

  “허튼 짓 마세요. 새벽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

그 말에 응석부릴 뻔한 세피아는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도 쓸모없다며 침울해질 뻔한 주제에, 금방 주저앉아 편한 쪽으로 도망치는 스스로가 정말 싫어졌다.

  “갈게!”

세피아는 망설이는 마음을 뿌리치듯이 선언했다. 기세 좋게 옷을 벗어 개어두고, 선미에 달려있는 밧줄을 허리에 동여맸다.

  “위험할 것 같으면 끌어당겨.”

부탁을 받은 닛카는 무척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사람이 헤엄치다니 부자연스러워요.”

  “닛카는 헤엄쳐본 적 없어?”

  “기껏해야 연못 정도밖에 연이 없었으니.”

일반적으로 나서서 헤엄을 치는 사람은 없으니까, 닛카의 반응도 이상한 건 아니다. 수영 연습을 하는 건 괴짜 짓인 데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결국은 도움이 됐고, 지금도 도움이 되려고 하지만.

  “대체로 물에 들어가는 건 싫어요. 네. 평생 안 들어갈 거예요.”

왠지 거드름이라도 피우는 것처럼 주장하는 닛카를 두고, 세피아는 그러면서 잘도 배에 올랐구나 감탄하고 말았다. 배가 뒤집히는 경우는 생각해보지 않은 건가. 어쩌면 아까부터 말이 많아진 건 심란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여간, 세피아는 이제는 자신이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결의를 다졌다. 바다는 변함없이 새카만 몸으로 놓여있었지만, 풀죽은 채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탁합니다.”

아직 얼굴을 찌푸린 채인 닛카에게 고개를 숙인 뒤, 세피아는 과감히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먼저 느껴진 건 살갗을 감싸는 미지근한 감촉이었다. 아까 손을 넣었을 땐 차갑게 느껴졌는데, 아예 전신을 집어넣으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수영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호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한 파도 때문에 움직이기 어렵지만,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기는 했다. 잠시 나아가 뒤를 돌아봤더니, 닛카가 배 위에서 이쪽을 걱정스러운 듯 보고 있었다. 손을 흔들며 여유를 보인 세피아는 다시금 뭍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아피아에게 안기다시피 해서 물속을 헤쳐 나갔다. 갑작스런 일들로 혼란스러워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스스로의 힘으로 목적지를 향해 물살을 가르고 있다.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가까워지는 육지의 풍경이 세피아에게 성취감을 안겨다준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뭍과 배의 중간쯤까지 와 있었다. 이대로 아무 문제없이 헤엄칠 수 있을 터였다.

세피아가 그렇게 안심한 순간이었다.

오한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 당황해 소리칠 틈도 없이, 눈앞에 보이던 물가의 풍경이 갑자기 사라졌다. 어둠. 거품. 숨이 막힌다.

누군가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다.

공포에 질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비명을 질렀더라면 물을 먹어 더 위험해졌을 것이다. 대신에 세피아는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고 신, 아버지, 어머니, 아피아의 이름을 되뇌었다. 눈을 감고 있으니 피부 위로 찬물이 흘러가는 감촉이 두드러졌다. 붙잡힌 발목 쪽이 유달리 차갑다.

누구야? 이 손은 누구 거야?

그 물음이 머릿속에서 퍼뜩 빛났다.

너는 누구야?

갑자기 솟아난 초조함과 비슷한 감정은 세피아가 눈을 뜨게 만들었다. 눈앞에는 끝없는 어둠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형체를 한 것처럼 보였다. 커다랗고, 강하다. 저쪽의 얼굴도 휙, 하고 이쪽을 쳐다봤다.

눈꺼풀이 벌어진다. 어둠 속에서 구르는 눈알이 보인다. 눈이, 마주친다.

순간 스며드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세피아는 알 수 없었다.

괴로움, 슬픔, 절망, 분노. 그 모든 게 섞인 것 같았다.

세피아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거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싫어.

머릿속에서 여러 개의 빛이 번쩍이고, 등이 욱신거린다.

  “놔, 저리 가!”

엉겁결에 외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은 소리가 되지 않고, 물이 입으로 흘러들어온다. 가슴이 미어진다. 괴로움에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귀가 울린다. 싫어. 싫다.

그리고, 너무나 어이없게 그 상황은 끝이 났다.

훅, 머리가 수면 위로 튀어나왔다. 아주 깊숙이 끌려가 발버둥치기만 했을 뿐, 전혀 나아가지 못한 것 같았는데도, 세피아는 난데없는 빛 아래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바다는 고요했다.

굽이치는 파도는 따뜻하고, 달빛에 비친 수면은 곳곳이 빛난다. 그 차가운 감각은 이제 어디에도 없고, 다만 목덜미에 움찔움찔 한기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몸은 오히려 안쪽에서 열이 솟아나는 것처럼 느껴졌고, 아까보다 피로도 풀린 느낌마저 들었다.

무엇이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피아의 귀에, 뒤에서 파도와는 다른 물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닛카가 흠뻑 젖은 채로 배에 매달려 있었다.

 

9-6

  “죄송해요…….”

  “사과할 일은 아니네요.”

세피아와 닛카는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물가의 자갈 위에 앉아 있다. 젖은 상태로 숙소에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몸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원래는 젖지 않은 닛카가 닦을 것을 가져오기로 했지만, 닛카마저 젖었기 때문에 별 수 없었다.

  “멋대로 뛰어든 건 이쪽이니까요. 따지자면 제가 사과해야죠.”

세피아의 머리가 가라앉아 줄을 잡아당겼는데도 반응이 없었고, 무심코 뛰어든 것까진 좋았지만 헤엄칠 수 없었다고 했다.

  “죽음을 각오했어요. 이 이상의 위기는 제 인생에 더 없기를 바라야겠네요.”

귀에서 물을 빼내며 정색하고 말하는데, 웃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세피아는 ‘물이 들어가기 쉬운 귀구나’ 하며 멍하니 자신에게 없는 기관을 쳐다봤다. 바로 옆에 있던, 같지만 다른 사람들.

  “닛카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어?”

세피아가 문득 그렇게 물었다.

그가 세발족 아버지를 뒀다는 것은 아피아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피아는 억측을 받고 있는 것 같지만, 저는 닛카의 부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도 했었다. 그 벽을 저희들보다 훨씬 더 전에 넘은 사람이 있는 데다 이곳 사람과 결혼하기까지 했다니. 세피아에게는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무슨 이유로 이 나라에 왔을지 무척 궁금했다.

  “여러 가지 알고 있고, 여러 가지 남기고 싶어 하던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닛카의 대답은 너무 추상적이었다.

  “탐구욕과 과시 욕구는 비례하는 걸까요.”

  “알고 싶어서 여기로 왔대?”

  “음. 그런 얘기는 못 들었고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피아에게 닛카가 대답을 이어갔다.

  “사라질 때까지 세발족인 줄도 몰랐어요. 눈치 챈 건 어머니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으니까, 어머니한테도 물어볼 수 없었죠. 알고 있다고 하기엔 좀 미묘한가.”

  “어, 그럼 어떻게 알아차렸어?”

  “쪽지를 남기고 갔거든요. 젠 체하는 사람이에요.”

어디서 젠 체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세피아는 복잡한 사정을 너무 파고들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시드의 경우에도 그러다 실수했었다.

  “결국 어째서 벽을 넘어왔는지는 모른다는 거죠. 평범한 결손아였을 뿐이고, 세발족이라는 건 망상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있었어요. …뭐, 사실이었지만.”

  “어째서?”

  “당신이 눈앞에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바다 너머에 눈길을 주던 닛카가 여기서 갑자기 세피아를 돌아봤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세피아는, 바다 속에서 생긴 일들이 떠올라 가슴이 내려앉았다.

  “슬슬 두 분의 사정을 얘기해줄 생각은 없나요?”

거기다 닛카의 물음은 세피아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두 사람만으로 해결하려는 것보단 도움이 될 지도 몰라요. 저를 믿어달라든가, 그런 건 역시 뻔뻔하게 말할 수 없지만. 뮤아라든가……시드는 저 모양이지만, 저 모양이니까 적어도 친구를 배신하는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어진 말들엔 무게가 실려 있다. 믿지 않아서 말하지 않는 게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오히려 이쪽에 있다.

그 남자들, 추격자임이 명백한 이들이 나타난 뒤에 아피아와도 얘기를 했었다. 이대로 모두와 함께 있어도 괜찮은가. 세피아는 털어놓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지만, 아피아가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아피아가 옳으니까.

세피아는 대답을 기다리는 닛카를 속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우리가 정말 나쁜 사람이고, 나쁜 짓을 해서 도망치는 중일 수도 있는데.”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

  “글쎄요. 예를 들면, 당신들은 이름을 속이려고 하지 않았죠. 뮤아가 그랬어요. 그럼 아피아네한테 켕기는 건 없을 거라고.”

거기서 닛카는 가만히 성서의 구절을 암송한다.

  “들어라, 이름이야말로 그이며, 거짓된 이름에는 어둠이 깃든다.”

그런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세피아는 발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름을 속이지 않고도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까, 닛카는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이유 따위는 뭐라도 댈 수 있으니까, 필요 없다고.

알고 있어도, 그건 세피아에게 고발이나 다름없었다. 저희들은 어둠 속에 있다.

  “죄송해요…….”

떳떳할 수 없어 꺼낸 사과는 거부의 말로 들린 것 같았다. 닛카가 다시 바다로 눈을 돌렸다.

  “사과할 일이 아니에요. 멋대로 물어본 건 이쪽이니까.”

그리고,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9-7

하늘의 빛은 어느새 그 힘이 제법 강해져 있었다. 아침이 밝아온다. 결국 하룻밤을 꼬박 바다에서 보내고 만 모양이었다.

주택가 쪽에서 낯익은 목소리를 들은 세피아가 허둥지둥 뒤를 돌아봤다.

  “들키면 이래저래 곤란해지겠어요. 저는 물러갈까요?”

일어선 닛카가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을 하자, 그 큰 귀도 덩달아 뒤로 눕는다.

  “뮤아한테 떠나는 건 내일로 하자고 부탁해둘게요.”

  “어떻게 얘기하지.”

  “무심코 밤새 바다를 서성거렸다. 라든가. 그렇지. 저 혼자서.”

왜 굳이 수상쩍은 사정을 지어내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즐거운 것 같았다.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이 사라지는 걸 보며 세피아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달려갔다.

바다에서 빠져나올 때 나타났던 열은 아직도 몸속에서 사라지지 않아, 몸이 가볍고, 신기하게 졸리지도 않았다. 이런 상태라면 어떻게든 속여 넘길 수 있을 듯했다.

새벽녘은 붉은 빛이 강해지고, 반대로 달은 그 색을 잃으며 희붐한 태양으로 모습을 바꿔간다. 하늘이 밝아짐에 따라 지상으로 내몰린 어둠이 어슴푸레하게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세피아가 목청을 높였다.

  “아피아, 여기!”

세피아의 모습을 알아본 아피아는, 안도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달려온다.

  “다행이다…. 끌려갔으면 어쩌나 싶어서.”

  “잠에서 일찍 깨서, 바다를 보고 있었던 것뿐이야.”

역시 거짓말은 망설여졌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그럼 한 마디 말이라도 하고 가면…….”

  “미안해, 금방 돌아올 생각이었어.”

  “괜찮다. 그치만 그놈들이 있으니 조심해.”

앞으로 몸을 숙여 세피아의 머리를 끌어안은 아피아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세피아는 그 손끝이 무척 차갑다는 걸  알아차렸다. 항상 침대 안에서 잡는 그 손처럼.

세피아는 이런 순간이면 늘 그래왔듯이 아피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댔다. 그러나 그 순간 아피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천이 젖은 것 같은데?”

세피아의 심장이 갑작스레 쿵쾅거린다. 닛카 앞에서 풀어낼 수 없었던 탓에 맨 채로 헤엄쳤는데, 아직 다 마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바다 근처에서 넘어져서…….”

엉겁결에 꺼낸 변명은 구차하고 설득력 없다. 그래서 아피아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세피아가 선수를 쳤다.

  “그렇지, 아피아도 바다 보러 가자, 바다!”

아피아의 손을 잡고 억지로 바다에 끌고 간 것이었다. 기세에 휩쓸렸는지, 아피아는 딱히 묻지 않고 따라왔다. 세피아는 앞으로 어떻게 얘기할지 고민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타난 풍경 덕분에, 그런 사소한 고민은 날아가 버렸다. 거기 있는 것은 뜻밖의 것이었다.

서광(曙光)을 받은 바다가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잔잔한 소리를 내며 넘실거리는 파도는 해안에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간다. 그것은 멸망의 저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처럼만 보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다에서 불어온 부드러운 바람이 두 사람의 뺨을 간지럽혔다.

  “있잖아, 아피아.”

생각이 절로 입에서 흘러나온다.

  “나, 계속 이렇게, 같이 여러 곳을 보고 싶었어.”

그 호수를 건너고, 숲을 지나고, 벽을 넘어서. 거기엔 모르는 나라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거대한 나무와, 시끌벅적한 거리와, 녹색의 초지와, 출렁대는 바다. 그리고 뜨거운 땅, 높다란 산.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닌 건 알면서도.

  “……왠지, 기쁘다.”

이뤄지지 않을 줄 알았던 일이 이뤄졌으니, 진정한 소원도 이뤄질지 모른다.

  “응, 그러네.”

아피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세피아는 자신의 열을 옮겨지도록, 아피아의 손을 꼭 잡았다.

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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