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6-1

그렇다.

알고 있다.

알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다.

거짓말 같은 걸 할 리가 없다, 그 성격에.

그걸 거짓말이라고 치부해버린 건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5년 가까이 대화가 멈춰 있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자세히 듣지는 못했어도, 내심 상상하고는 있었다. 무언가 큰일이, 받아들여지는 데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사실이라면, 미워하는 건 당연하다.

……지금, 어머니가 살해당해 있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인 공상이 아니다.

마음이 차게 식는, 이 상상.

만일 그렇게 돼 있더라면.

 

나(僕)는 역시 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6-2

그날 아침이 되어서야 뮤아는 효과적이고도 평화로운 시드 사용법을 찾아냈다. 열지로 가기 위해 사들인 짐들은 지금까지보다 커져서, 일행의 발걸음을 늦출 것이 확연했다. 그것을 해결하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단순한 짐꾼 취급이지만.

  “상관없어.”

문제라면 시드의 반항이었지만, 본인은 그런 대우도 선뜻 받아들이고, 특히 무거운 것들을 모아둔 자루를 손쉽게 등에 멘다.

  “우와. 역시. 난 그거 못 드는데.”

  “그렇겠지.”

칭찬을 하면 싫지는 않은 눈치다. 닛카의 말마따나 뿌리는 곧아서, 뮤아로서도 어르는 법을 알기 쉬웠다.

어제 그대로 사라질까 싶었던 시드는 아침이 되자마자 어김없이 방에서 나왔고, 함께 갈 마음도 충만했다. 시드에 관해서는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쪽이 손해였다. 다만, 걱정되는 게 하나 있었다.

  “저기, 그런데, 뒤에 계신 분은 누구셔?”

스무 살 전후일까 싶은, 저희들보다 머리 하나쯤 키가 크고 늘씬하지만 다부진 체형의 청년이, 벌레를 씹은 듯이 난처해하는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것이었다.

  “아, 림 선생님. 따라온대.”

  “하아.”

  “좀 지나면 지겨워지겠지.”

시드의 대답은 너무 간결해서 무슨 소린지 추측밖에 할 수 없다. 뮤아의 눈초리를 받은 청년이 다가온 뒤에야 상황이 확실해진다.

  “처음 뵙겠습니다. 림=데니테=톳테아라고 합니다. 톨라 공작가의 위사를 맡고 있어요.”

  “뮤아=테에레=스피크예요.”

뮤아는 내밀어진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돌려줬다.

  “시드 님의 가정교사도 도맡고 있어, 불편하시겠지만 잠시 동행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싫다고 말할 수가 없다. 뮤아의 허락을 받은 림은 다른 일행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닛카가 인사를 마치자, 뮤아는 그의 옆으로 가서 소곤거렸다.

  “저기, 시드를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겠지.”

  “그런 선언이나 다름없죠.”

  “시드는 알고 있는 걸까?”

  “글쎄요. 알든지 모르든지 똑같잖아요. 그가 순순히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해요?”

  “생각 안 해.”

시드가 올곧은 것은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에 한정된 것이지, 남의 명령에 대한 게 아니었다. 본인이 돌아갈 마음을 먹지 않는 이상,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은 림이 계속해서 따라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별일 없으면 좋겠지만……. 문제가 있네요.”

닛카의 시선 끝에는 악수를 나누는 림과 아피아가 있다. 위사는 곧 질서의 수호자다. 세발족이라는 게 들키면 구속당해도 별 수 없다. 림 자체는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지만, 그게 곧 비밀을 납득해줄 인간이란 뜻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여정에 또 다른 불씨가 더해진 모양이다.

  “어제 일로 시드랑 아피아의 싸움이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수상해요. 돌아왔다는 거.”

  “그러네.”

림이 시드에게서 짐을 빼앗으려다 거절당하는 것을 보며, 뮤아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짐꾼은 충분한 것 같다.

 

6-3

호리라의 지형은 동쪽으로 갈수록 기복이 심해져, 길을 걷는 이들의 속도도 자연스레 느려진다. 일행은 타이나에서 남쪽으로, 대삼림을 따라 열지 부근까지 나아가기로 했다. 타이나에서 곧장 동쪽으로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대삼림의 길을 따르는 게 더 안정적일 거란 생각이 그런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대삼림도 풍경이 좀 다르다. 평지 위로 나무들이 울창한 곳들은 드물고, 대개 울퉁불퉁한 땅에 나무가 제멋대로 자라나 있었다. 저 너머를 알아보는 것조차 어려운 데다가, 어중간하게 발을 딛었다간 벼랑 따위를 맞닥뜨려 곤란해질 게 예상됐다.

  “시드 님, 길에서 벗어나지 마세요.”

그리하여,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휘뚜루마뚜루 궁금증을 해결하러 나가는 시드의 성질도 억눌러졌다. 여태까지는 내버려두면 잠시 뒤 돌아오고는 했지만, 이제는 헤매게 될지도 모르는 탓에 림이 곧장 목덜미를 붙들고 돌아오는 식이었다.

  “그런 점잖은 말투 관둬.”

  “둘만 있는 게 아니니까, 구분은 필요해요.”

뮤아는 그런 대화를 반복하는 두 사람을 보며 탄식했다.

  “역시 시드는 공작님의 아들이구나.”

  “새삼스럽네요. 저희가 시드에 대해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뮤아의 기억 덕분이었는데요.”

  “그 기억을 좀 의심한 거야.”

  “그건 이해합니다만.”

생각해보면, 이 일행은 모두 스스로 신원을 밝힌 사람들로 이뤄져 있다. 뮤아의 기억과 림의 출현으로 시드의 신원이 어느 정도 보장됐다고는 해도, 뮤아의 기억이 잘못됐거나 림이 가짜라고 상정하면 끝이 없다. 마을 안의 모두가 서로를 아는 환경에서 자란 뮤아로서는 이런 관계가 신선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생각에 잠긴 건 경치가 색다르기 때문이다. 낯익은 대삼림의 사소한 차이들이 마음에 걸린다.

나무들은 서쪽에 있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그 푸르스름한 손을 뻗고, 옹이 진 뿌리를 땅 밑으로 펼친 채 휘어져 있지만, 역시 마을에 있던 나무는 아니다.

여기에 자신의 뿌리는 없다.

문득 뮤아는, 멀리 왔구나, 라고 생각했다. 단순하고, 닛카의 말처럼 새삼스럽고, 아무래도 좋은 감상인 데다, 어쩌면 오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 길은 절반도 가지 않았다.

아직 이 세계에는 먼 곳이 있다.

나아가는 내내 이 마음에 이끌리는 것일까, 아니면 이 마음이 언젠가 사라지는 것일까.

  “닛카는 성산까지 가고 나선 어쩔 거야? 돌아가나?”

  “어디로요?”

질문은 되물음으로 넘겨지고, 그 농담 같은 얼버무림을 나무라기도 전에 그 말로부터 무언가 거슬리는 것을 깨달았다.

귀환의 길은 순례에 정해져있지 않다는, 그저 그것을.

 

6-4

해가 질 낌새가 보이면 야영 준비를 해야 한다. 숲의 중심을 벗어난 이곳 역시 안쪽은 어두워서, 달빛에만 의지해 밤을 맞는 것은 너무 무모하다. 길에서 너무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불을 피우고, 그 범위를 신의 가호로 삼는다. 어둠에 맞서기 위해서는 이 작은 의식이 필요했다.

그런 준비 도중, 야영과는 거리를 둔 장소에서 두 사람이 어김없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만 이번 상황을 이끈 것은 시드가 아니었다.

  “할 얘기가 있는데.”

준비를 돕느라 감시가 느슨해진 림으로부터 떨어져 어슬렁거리는 시드를 향해, 아피아가 그렇게 운을 뗐던 것이다. 말을 건 것은 좋았지만, 사실 아피아는 나름 곤란했다. 돌이켜보면 제대로 얼굴을 맞대고 얘기해본 적이 여태껏 없었다. 무심결에 발걸음을 내딛었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으로, 그는 각오를 다졌다.

  “잠깐 확인할 게 있다만…….”

  “내가 틀렸어.”

아피아가 망설이며 꺼낸 말은 난데없이 끊긴다. 사죄처럼 들리기도 하는 그 말 자르기는, 화자의 표정에 의해 부정됐다. 입술 끝을 올리며 미소를 지은 시드가 말을 이어나갔다.

  “확실히 널 봐줄 필요는 없지. 내가 틀렸어.”

  “그러니까 딱히 싸울 생각으로 부른 게 아니…….”

하지만 그 퇴짜는 시드의 귀에 전혀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불린 순간부터 싸울 마음으로 가득했던 시드인데, 들어줄 거라고 생각한 아피아가 안일했던 것이다.

황급히 자리를 잡는 아피아에게 시드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 멍청이가!”

매도는 사태를 수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 번 시작된 것은 끝을 볼 때까지 계속할 수밖에 없다.

달려드는 시드를 받아넘기며 틈이 생긴 곳에 반격을 내리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이만큼이나 싸워대다 보면 움직임이 읽혀, 아피아도 예전만큼의 여유는 가질 수 없게 되어가고 있었다. 시드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타격은 절망스러울 만큼 가볍다. 마무리되기까지의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주변에는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 순간, 어떤 생각이 아피아의 머리를 스쳤다.

그것은 마가 끼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시드에게 한 번 맞아야 할지도 모른다, 따위를.

그렇게 해서 생길 일을 곧장 눈치 챈 육신은 도망치려고 했다. 망설임이 그것을 말렸다. 피하는 방법이 완벽하지 못해 자세는 불안정해졌다. 주먹을 맞은 건 아니지만, 말려든 몸까지 돌릴 수는 없었다.

부딪치며 엉킨 몸뚱이가 기세에 휩쓸려 뒤로 비틀거렸다. 그제야 아피아는 어째서 자신이 여기 멈춰서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떠올려냈다.

그 끝이, 벼랑이기 때문이었다.

 

6-5

꽤 높은 데서 떨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침 가시덤불이 눌어붙은 것처럼 빽빽하게 솟아나 있는 곳을 헤집으며 떨어지게 되어, 지면에 내팽개쳐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살갗이 드러나 있는 곳은 가시에 긁히고 상처투성이가 되는 바람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전신에서 느껴졌다. 옷도 잘게 찢어진 데가 여러 군데 생겨서 너덜너덜하다.

잠깐 의식을 잃었던 아피아는 곧 자신의 상황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덤불에서 기어 나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머리카락이 가시에 엉켜 진저리가 났다.

함께 떨어진 시드도 같은 심정인 듯했고, 그것이 그의 전의를 꺾은 모양이었다.

  “살아있었나.”

먼저 밖에 나와 있던 시드는 팔에 박힌 가시를 뽑으면서, 아피아를 흘끗 쳐다봤다. 가시를 뽑아낸 자리에서, 피가 몇 방울 새어나와 땅바닥에 튄다. 하지만 아피아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그게 아니었다.

  “그 날개는 문제없고?”

시드의 등에 있는 날개 역시 가시들의 공격을 면했을 리가 없다. 자잘하게 찢어진 데가 많이 생긴 모양새는, 제게는 없는 부위인데도 신경이 쓰였다.

  “아­. 역시 찢어졌네.”

  “음.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은데.”

  “나으려면 좀 걸리겠지.”

시드는 분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유우족의 날개는 귀찮은 부분인 것 같다. 그다지 단단한 것도 아니고, 단련되는 것도 아니고,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달려있는 것도 아니고, 다쳤을 땐 회복이 늦다.

  “제일 비슷한 다른 곳이라면 머리카락인가.”

뮤아에게 물어봤을 때, 뮤아는 그렇게 비교하며 알려줬다.

  “약간 틀어지거나 부러진 정도는 자연적으로 낫는데, 잘리거나 하면 쉽게 나지 않고.”

시드의 날개도 자연적으로 치유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통증은 없을 것 같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돌아갈 길을 찾아볼까.”

시드는 가시들을 대충 뽑아내더니, 그렇게 선언하고는 서둘러 이동하려고 든다. 덤불을 헤치며 길도 없는 곳으로 들어서려는 시드에게 아피아가 말을 걸었다.

  “굳이 찾지 않아도, 넌 날아가면 되지 않나?”

떨어진 지점은 가시덤불이 무성하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올라가는 데 방해되는 건 나뭇가지 정도다. 그러나 시드는 아피아를 째려보며 쏘아붙였다.

  “이 상태로는 제어가 될지 모르거든―”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어쨌거나 날 수 없는 아피아는 위로 갈 수 있는 길이나 기어오를 만한 곳을 찾아야만 했기 때문에, 그의 뒤를 쫓기로 했다.

그 순간 찡, 하는 통증이 가슴을 찔렀다.

아피아는 불길한 예감에 반사적으로 가슴에 손을 댔다. 과연, 그 감은 틀리지 않았다.

가슴팍을 더듬는 손끝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6-6

아무리 헤치고 지나가도 사람의 손길이 닿은 곳은 나오지 않고, 오르막길에 닿을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시드는 일단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은 붉은 빛이 강하고, 머지않아 그 빛을 잃어갈 터였다. 이대로 가봤자 어둠 속에서 꼼짝 못하게 될 공산이 크다.

  “어쩔 수 없나. 어이, 어딘가 탁 트인 곳에….”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시드는 자기 혼자 나아가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뭐야, 안 따라왔어?”

고시랑고시랑 불평을 늘어놓으며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헤집고 지나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지체 없이 원점으로 돌아온다.

  “귀찮지만 날아갈까. 넌 어떻게든 돌아서 가고.”

그러며 남아있을 아피아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냐, 멋대로 어디 간 거야, 하며 또 한바탕 볼멘소리를 하던 시드는 문득 무언가를 눈에 담고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말없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가시덤불에 양팔이 처박힌 자세 그대로, 아피아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창백한 안색과 차가운 뺨이 예전에 있었던 밤을 떠올리게 했다.

  “야, 뭐하냐, 야!”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몇 번 뺨을 때리는 것으로 아피아는 눈을 떴다. 처음에는 흐릿하던 눈동자에 초점이 맞기 시작한다. 아피아는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

시드의 반박을 무시한 아피아는 비틀거리면서도 걸으려다가, 근처 벽에 기대듯이 주저앉아버렸다. 고개를 숙이고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움직이지 않는다.

  “야.”

시드가 팔짱을 끼고 그의 앞을 막았다.

  “진짜 싫은데, 내버려두면 뮤아가 시끄러울 것 같으니까. 데려다줄게.”

그 제안에 아피아가 고개를 들어 시드를 보다가, 도로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생기 없는 그 모습에 시드는 점점 안달이 났다.

  “듣고 있냐?”

따지듯 묻자 다시 고개를 드는 아피아에게, 시드가 손을 내밀었다.

  “어이, 갈 거니까 잡아.”

  “시끄러워.”

하지만 그 손은 쳐내졌다.

  “너만 가도 돼.”

거부의 말은 생각보다 단호하게 울린다.

  “두고 가. 난 신경 안 써. 딱히 도와달라고 한 적 없고.”

  “아, 그래.”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시드가 계속할 리도 만무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아피아를 째려봤다.

  “세발족 따위를 걱정한 내가 틀렸어. 맘대로 해라.”

화가 나 되는대로 내뱉은 시드는, 아피아를 등지고 날개를 펼쳤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

그걸 붙잡는 작은 목소리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야.”

  “세피아한테, 이런 순간에 미안하다고 전해줘.”

  “내키면 말이지.”

더 이상 말을 주고받았다간 때려눕히게 될 게 자명했기 때문에, 시드는 건성으로 답하며 땅을 박찼다. 균형을 잡는 게 조금 어설펐지만, 큰 문제없이 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벼랑 아래의 광경은 튀어나온 나뭇가지들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됐다.

  “바본가. 그냥 죽어.”

초조함으로 바싹 메인 목구멍에선 욕지거리가 쏟아졌지만, 어째선지 그것은 가슴속의 가시를 더욱 자라나게 할 뿐이었다.

 

6-7

시드의 모습이 나무 너머로 사라지자, 아피아는 다시금 가시덤불 쪽으로 흐릿한 시야를 돌렸다. 이 안에 걸려있는 게 틀림없다. 찾지 못하면 전부 끝장이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

이 마음에 거짓은 없지만, 날카로운 통증이 극심하고, 손발의 끝은 잘게 떨린다.

이런 곳에 세피아를 두고 갈수는 없다고도 생각했으나, 찾아봤자 어떻게 회수할지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하다.

  “미안해, 세피아. ……아버님, 어머님.”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중얼거림으로는 후회밖에 할 수 없다.

아버지를 더욱 강하게 말렸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런 이국의 땅을 밟지 않고서도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았을까. 애당초, 이런 몸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가장 큰 잘못이었다.

시드 화내고 있었지, 하며 조금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역시 안 될 일이었다. 같이 있던 게 뮤아나 닛카였다면, 혹시 도움을 청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드에게만큼은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걱정했던 건가.

본인은 아마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왠지 묘하게 우스워서 조금 웃었다.

돌연, 밀려든 통증이 왼쪽 가슴을 관통했다. 점점 간격이 짧아진다.

하늘의 태양은 빛을 잃어 땅에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이제 가시덤불은 하나의 시커먼 덩어리에 불과하게 됐다. 끝이다. 어떤 의미로는, 기다렸던 순간.

  “……우리의 인도자, 우리의 수호자 아네키우스, 당신의 잠 안에서 편히 쉬니, 당신의 힘은 언제고 지상에 넘치며…….”

밤을 맞이하는, 신의 잠을 위한 기도를 중얼거리며 아피아 역시 무거운 눈꺼풀을 닫았다. 그렇게 해서 어둠이 찾아올…터였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무슨……?”

고개를 드는 건 괴로웠지만, 소리가 그치기는커녕 격렬해졌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뜬 아피아는 순간, 아픔을 잊었다.

엷은 어둠 속에서 가시덤불이 크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소리의 정체는 잎과 줄기가 격렬하게 보대끼며 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흔들리는 부분이 지나치리만치 부자연스럽다. 벼랑에 가까운 위쪽이나 땅에 가까운 뿌리 부근이면 모를까, 어째선지 가운데가 어수선하다. 뭔가 위에서 떨어진 건가 싶기도 했지만, 가시에 걸린 거라고 쳐도 너무 느리게 떨어진다.

아피아가 의아해하는 순간, 그 소리는 갑자기 속도를 더했다. 묵직한 물건이 땅에 닿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리는 바람에, 아피아는 고개를 돌리며 몸을 움츠렸다. 그 순간 무언가가 가슴에 부딪쳤다.

처음에는 조약돌이 날아온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 순간 무릎에서부터 따뜻함이 퍼져 몸이 편안해진다. 반신반의하며 그 열의 원천으로 눈길을 주자, 그 돌이, 잃어버렸을 터인 목걸이가 무릎 위에 있었다.

아피아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잡고는, 숙였던 시선을 앞으로 보냈다.

거기에 시드가 있었다. 무척 불쾌한 듯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그의 반쯤 펼쳐진 날개는 더욱 너덜너덜해졌고, 찢어진 데가 벌어진 채였다.

아피아는 아무 것도 묻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 젠장, 알겠냐!”

잠깐의 어색한 침묵 끝에 시드가 기어이 폭발했다. 침을 튀기며 고함친다.

  “이런 데서 간단히 죽어버리면 이쪽도 기분 나쁘니까! 네놈―, 기억해둬, 죽여 버릴 거야!”

지리멸렬한 말이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모를 것도 아니었다. 모르지는 않는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한 대도 못 때리는 주제에.”

무심결에 입 밖으로 낸 것은 그 말이었다. 감사도, 사과도 망설여지는 탓에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뭐야? 야.”

당연히 시드는 더욱 기분나빠하며 손을 뻗는다. 맞을 것을 각오한 아피아가 몸에 힘을 줬다. 하지만 찾아온 것은 충격이 아니라, 부유하는 감각이었다.

눈을 떠보니, 마치 모래주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시드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다.

  “돌아간다. 네 헛소리에 어울려주기도 싫고―.”

아피아는 ‘그건 내가 할 소리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말로 하지는 못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가 아까 뭘 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날았던 거다. 그 가시덤불 사이를.

바보다. 얼빠진 바보다.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바보다. 엄청난 바보다. 바보 시드.

지겨울 정도로 바보라는 말을 반복하고 나서야, 아피아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 바보는 결국 구제불능의 선인이다, 라고.

 

6-8

제법 무서운 경험을 했다.

잘 생각해보면 그런 날개로 두 사람의 체중을, 그것도 무게중심이 불안정한 자세를 잘 지탱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유우족의 보통은 잘 모르지만, 시드가 나는 방법은 꽤나 대강인 느낌이 들었다. 자세가 무너져 낙하할 뻔하기를 몇 번, 떨어트려질 뻔하기를 몇 번, 시드가 혀를 차는 것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들으며 간신히 벼랑 위에 닿는 동안, 아피아는 속으로 수도 없이 아네키우스의 이름을 외웠다.

  “뭐야 너. 설마 떨어트렸다고는 하지 마.”

시드가 어이없어하며 그렇게 말하더니, 낯빛이 어두운 아피아의 손을 잡아 손가락을 벌렸다.

  “있잖아. 자, 돌아간다.”

그런 다음 재빨리 야영장으로 돌아가려 하는 그를, 가라앉은 목소리가 뒤에서 불러 세웠다.

  “기다려.”

  “어?”

  “어떻게 알아?”

  “뭐 말이야.”

  “이걸 어떻게 알아!”

아피아는 꽉 쥔 오른손을 내밀며 시드에게 물었다. 흐름에 말려들어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 어리석었다. 스스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드는 이 돌의 필요성은 물론이거니와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을 텐데.

아피아의 질문에, 시드는 노골적으로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얼버무리려는지 곧 얼굴을 이상한 형태로 찡그려대다가, 아피아의 무언의 압박에 마침내 입을 연다.

  “말 못해. 약속이니까.”

그렇게 말하던 시드는, 특별히 약속한 것 자체까지 비밀로 두라고 요구받지는 않았음을 깨달았다. 알고 있다는 걸 아피아에게 들킨 이상, 돌에 대해선 잊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아, 아니네. 약속은 이미 어겼나. 제길.”

  “무슨 약속을 한 건데?”

  “그건 잊어버리고, 너한테 묻지도 말라고.”

그런 약속을 할 상대는 한 명뿐이니 누구와 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리고 어째선지 약속이 오간 정황에 대해서도 아피아는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날 이후 세피아의 모습이 조금 이상했던 것 같다.

  “그게 뭐냐?”

약속을 어겼다는 걸 깨달은 시드는 작심을 했는지 그렇게 묻는다. 하지만 아피아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뭐냐고 물어봤자, 자기도 모른다.

  “없으면 죽는 건가.”

  “죽어.”

확실한 것은 그것뿐이다. 자신의 생명은 이 작은 돌에 의해 간신히 이 세상에 이어져 있다.

아피아는 갑작스럽게 시드의 눈앞에 목걸이를 들이밀었다.

  “이걸 빼앗아서, 그 무식한 힘으로 멀리 던지기만 해도 네 소원은 이뤄질 거다. 하고 싶으면 하면 돼. 네가 찾아온 거니까.”

금색의 사슬 끝에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일곱 빛깔의 돌멩이가 흔들린다. 시드는 무심코 손을 대는 짓을 하지 않았고, 거기에 아피아가 조건을 덧붙였다.

  “……그러지 않을 거라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아니, 형제가 쌍으로.”

  “어쩔 거야?”

  “동생은 머리도 숙이던데.”

  “죽이고 싶겠지?”

자꾸만 결정을 재촉하는 아피아 때문에 시드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한 것 같았다. 그는 돌을 내민 팔 자체를 밀치며 외쳤다.

  “시끄러―! 그래봤자 난 재미없어! 널 때려눕혀야 직성이 풀린다고, 알겠어!”

아피아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팔을 제자리로 돌리며 손 안에 돌을 쥔다. 그리고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알겠다. 이제는 언제든 네가 원하면 승부를 받아주지.”

  “당연한 거 아냐. 야, 그것보다 빨리 돌아가자. 뮤아가 화낼걸.”

노을이 지는 시간도 이미 지났고, 밤이 숲을 뒤덮었다. 두 사람은 야영 장소를 향해, 왠지 모르게 함께 걷기 시작했다.

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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