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8-1
“자신이 나아가는 길을 잘 바라보는 것이 좋다.”
아네키우스는 검을 든 소년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바다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것을 삼켜, 모든 것을 무로 돌려보내는 장소로 통하는 길이다.”
(구세의 서 토벌의 장 6절28)
받아든 칼은 맥이 풀릴 정도로 가벼웠다.
역시나 어중간하다. 그가 전력으로 대하면 금방이라도 망가질 거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제게는 딱 좋다. 시험 삼아 두세 번 휘둘러서 칼날의 균형을 확인해봤다.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세피아, 부탁해.”
검을 다시 칼집으로 돌려놓은 아피아가 곁에서 기다리던 세피아에게 밝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세피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할 거야?”
“그런 표정 안 해도 돼. 시합이고, 상대도 제대로니까. 늘 하던 일이잖아.”
상대 쪽을 흘끗 쳐다봤더니, 림은 이미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자기 검을 가지고 있으니 빠를 수밖에.
“설마 일부러 지는 건 아니겠지?”
“예전 같았다면 기꺼이 둘 다 보내줬겠지만…….”
세피아의 솔직한 질문에 아피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포기하도록 만들려는 무리한 조건이었을 텐데, 어쩐지 받아들여져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이 시합이 끝나면 승패에 관계없이 림은 일행과 떨어져 왕도에 돌아간다. 승패와 관계있는 건 그 귀환에 시드도 함께 할지의 여부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이 조금만 더 일찍 찾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피아는 구석에서 뮤아와 닛카를 상대로 투덜거리는 듯싶은 당사자의 모습을 알아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위사를 상대로 이기기 어려울 게 빤한데도 노력해야 한다니 마음이 무겁다.
끈질기게 승부를 걸어오는 것만 빼면, 그 자체에는 딱히 해로울 것도 없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문제는 시드가 왕도로 돌아갔다가 저도 모르게 일으킬 수 있는 사태들이다. 세발족이 침입했다는 말만으로도 난리가 날 텐데, 시드가 쥐고 있는 정보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저희들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오히려 눈길이 닿는 곳에 있어주는 편이 나았다.
“슬슬 괜찮습니까?”
림이 다가와 재촉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이런 경기를 치르는 이상 어떤 의도, 그것도 별로 환영할 수 없는 의도가 있음이 분명했다.
“얼마든지.”
아피아가 대답하자 세피아는 두 사람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세피아는 심판 역이다. 뮤아나 닛카는 이런 시합을 경험해본 적이 없고, 시드에게 심판을 맡기면 난입할 것 같아 자연스레 이렇게 됐다.
“두 사람은 검을.”
두 사람은 세피아의 지시에 따라 검을 빼어들고, 칼집을 땅에 놓는다.
“상대가 항복했을 때, 상대의 무기를 떨어트렸을 때,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했을 때를 결착으로 둡니다. 양쪽 다,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승부를.”
말이 흘러나오는 동안, 아피아는 이마에 검을 대고 언제나처럼 기도의 말을 작게 속삭였다. 그 순간 묘한 기분이 가슴을 덮쳐왔다.
주변이 온통 화창한 언덕의 경치여서 그랬다.
여기는 검을 휘두르는 장소가 아니다.
“그럼, 시작하세요!”
그러나 순간의 향수는 개시 구호에 날아가 버렸다.
8-2
마침내 대삼림을 빠져나온 것이 계기였음은 명백했다.
그 앞에 있는 것은 구릉지대다. 눈앞을 가로막는 것이 드물어 어디를 쳐다봐도 멀리까지 내다보이는 드넓은 땅은, 특히 뮤아에게 감명을 준 듯했다. 반면 톨라 영지의 경치와 비슷한 탓에 시드는 약간 지겹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네 집도 포도밭은 이런 식이었잖아.”
“그치만 주변에 나무도 많고 뒤에 숲이 있었는걸.”
“뭔가 안정되지 않는 건 확실하네요.”
마찬가지로 숲에서 자란 닛카도 표정은 크게 바꾸지 않았으면서, 뮤아에게 동의했다. 바람이 너무 잘 분다.
“이러면 여기서 적도 찾기 쉽겠다.”
“적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따지려던 뮤아는, 톨라 영지에서 보이는 게 생각나 말을 삼켰다. 그러나 림이 그 말을 끝내고 말았다.
“톨라 공작령은 애초에 벽을 감시하기 위한 땅이니까요. 아네키우스의 힘으로 지켜지고 있다 해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몰라서 하는 말이니 악의 없는 견해일 테지만, 듣는 쪽으로서는 간담이 서늘해진다. 아피아와 세피아는 못 들은 척 하고 있어도, 일단은 흔들릴 것이다. 림은 한 술 더 떠서, 그 두 사람에게도 말을 걸어버린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어디 출신이신가요?”
질문을 받은 아피아는 자연스럽게 얼굴을 굳히며 준비한 대답을 꺼냈다.
“강가의 작은 마을입니다.”
대화의 흐름으로 보면 그다지 부자연스러운 건 아니고, 림의 태도도 어디까지나 온화하지만, 아피아는 거기서 어떤 함의를 느끼고 말았다. 최근 들어 림의 시선을 자주 받는 기분이 드는 것도 그에 박차를 가했다. 의심받고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림천인가요? 저는 북방 산맥의 동쪽 출신이라 가까울지도 모르겠네요. 이름을 들으면 알 수 있을지도.”
“아니, 아마 모를걸요. 나레이 마을이라고 하는데요.”
엉터리 이름이다. 실재하는 마을의 이름을 사용했다간 조사받을 때 귀찮아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손아는 눈에 띈다. 큰 마을이 아니라면 숨기 힘들고, 북방에서 큰 마을은 리라스나 타이나 뿐이므로 림을 상대로 속이기도 어렵다.
“들어본 적 없네요. 아쉽게도. 어디의 영지인가요?”
더욱 파고드는 림을 향해, 아피아의 경계심은 점차 높아졌다. 설정 같은 것은 뮤아나 닛카와 상담해서 적당히 지어냈지만, 물고 늘어지면 결점을 드러내보일 수도 있었다.
그 궁지에서 구해준 것은 뮤아였다.
“저기… 왠지 시드가 달려가고 있는데….”
조심스럽게 건네진 그 말 덕분에 림은 본래의 감시 상대를 떠올려냈다. 뮤아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시드는 어째선지 왔던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앗, 야, 어디 가!”
아피아와 뮤아는 황망히 뒤쫓는 림의 등을 배웅했다.
“뮤아, 고마워.”
“인사는 시드한테 해둬,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부러가 아니겠지, 저거…….”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드의 모습에서 그런 배려심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와줄 이유도 없고, 신경 쓰이는 걸 찾았을 뿐이리라.
쫓아다니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며 아피아는 생각했다.
방금은 얼버무렸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진상을 알게 될 것이다.
아마, 슬슬 때가 오고 있다.
8-3
“뭔가 이상한 게 여길 보고 있었어.”
역시나 시드의 설명은 대강이다.
“이상한 거라니 사람인가요, 동물인가요?”
“몰라. 눈높이가 나보다 높았는데.”
“그 정도로 커다란 동물이라면 저희도 알았을 거예요. 사람일까요.”
언덕 위에 자라난 나무 뒤로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다는 상황 파악에도 이만큼의 대화가 필요했고, 그 뒤 바로 놓쳤다는 것을 아는 데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정체는 알아내지 못한 채로 끝난 것 같았다.
“잘못 본 거 아냐?”
“지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쫓아와서 놀라 도망갔다든가.”
언덕의 반대쪽 경사면은 내려가면 시야에서 가려지는 지형이라, 시드와는 무관하게 사라졌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뮤아와 닛카가 성과 없는 추측을 하는 동안 시드는 얼른 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그럼 난 산책하고 올래.”
그렇게 말하고는 림이 말릴 틈도 없이 야영지를 떠나버렸다. 항상 있는 일이라 모두 개의치 않는데, 아피아만큼은 유난히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원하면 받아주겠다고 했어. 하지만 매일매일은 그만뒀으면 한다만.”
“시끄러―.”
잠시 후 그를 쫓아간 아피아의 항의는 묵살됐다. 시드는 그날 이래로 비가 내리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끈질기게 승부를 걸어왔다. 뮤아나 림이 시끄럽다며 눈짓으로 불러내는 게 귀찮다.
“언제까지 계속할 셈인가?”
“너를 죽일 때까지.”
“예에.”
무덤을 판 건 자신이었으므로, 아피아는 하는 수 없이 자세를 취했다. 곧장 들이닥친 시드의 주먹을 옆으로 치고 빠지며, 그 기세에 맞춰 그의 허벅지를 무릎으로 찍고, 다시 틈을 벌렸다. 시드는 여전히 움직임이 엉성하다.
“저기, 일단은 교사한테 제대로 배우고 난 뒤에 하는 게 좋지 않겠나. 가르쳐 줄 텐데, 당연히.”
화살 끝이 그쪽을 향하지 않을까 기대한 아피아가 그렇게 충고했다. 지금까지도 가르침을 받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그동안 뭘 하고 있던 걸까.
“적당히 봐주는 방법 따윈 배우고 싶지 않걸랑."
그 충고에 시드가 콧방귀를 뀌었다.
“할까보냐.”
말투로 보건대 교사들은 일단 힘을 제어하는 것부터 가르치려 들었던 모양이다. 아피아가 보기에도 그게 무척 합리적인 방법인 것처럼 보였다. 시드는 스스로의 힘에 너무 휘둘린다.
“힘만으로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럼 그런 칼 장난 같은 게 먹혀?”
“너한테는 그 이전의 문제인 것 같군. 장난이라니, 실전 같은 것을 한 적이….”
“그래서 마물을 퇴치하고 있잖아. 너는 모르지만.”
모르는 건 어느 쪽인지.
아피아는 윽박지르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 탓에 분노가 더욱 격해진다. 최근 새롭게 본 부분들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부분은 역시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다.
그렇다면 늘 그랬던 것처럼 그 장난으로 두들겨 패 주자.
아피아는 시드로부터 떨어져 다시 자세를 취하고, 내지르는 것만으로는 닿기 어려운, 조금 다가서야 발차기가 닿을 거리를 유지하면서 쿡쿡 공격한다. 서로 비슷한 체급이니 시드에게도 조건은 같았다. 당연히 시드도 걷어차려고 든다. 그것이야말로 아피아가 노리던 것이었다.
발차기를 하는 순간, 시드는 딛고 있던 발을 얻어맞아 땅바닥에 나뒹굴게 됐다. 훈련이 허술한 시드의 공격은 빈틈이 커서 균형을 무너트리기 쉽다. 파고드는 것도 간단했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화풀이 삼아, 쓰러진 시드의 가슴께를 짓밟아 줬다.
“적당히 포기하지 그래?”
“어딜.”
하지만 돌아온 것은 당돌한 말이었다. 아피아가 의미를 깨달음과 동시에 발목에 강한 충격이 들어왔다. 삽시간에 아피아는 파랗게 질렸다.
잡혔다.
밑에 깔린 시점에서 승부가 났다고 생각해 방심했다. 황급히 뿌리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러니까 장난이라고 하는 거야!”
아피아는 시드의 기세등등한 구령과 함께 자빠트려질 것을 각오했다. 사실, 거기에 저지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됐을 것이다.
“…너희들, 무슨 짓이야!”
뒤를 돌아보자, 바로 근처에 림이 험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8-4
이 구릉지대는 기복이 심하다고 하지만, 엄폐물의 밀도가 대삼림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여태까지처럼 조금만 떨어지면 찾기 힘들어지거나 하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야영지까지 끌려가 설교를 들었다.
아피아로서는 적절한 방해를 받아 살아났다는 오묘한 기분이고, 시드는 모처럼 이길 수 있었던 것을 방해받아 크게 부루퉁해져 있었다. 지켜보는 쪽도, 세피아는 걱정하는 얼굴이지만, 뮤아와 닛카는 안쓰러워하는 동시에 뭔가 기대하는 느낌으로 있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어.”
“나.”
속일 생각이 없는 건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건지, 시드는 이런 순간에도 떳떳하다.
“이유는?”
“그거야 이 녀석이….”
“훈련입니다.”
아피아는 시드의 말을 억지로 막으며 그렇게 전했다. 자연스럽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탁받았습니다. 가르쳐달라고.”
내친 김에 시드에게 책임을 떠넘겨도 봤다. 계획대로 림은 시드 쪽을 더욱 나무랐다.
“너 말이야…. 그런 건 나한테 먼저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장난감 같은 칼을 휘두를까 봐.”
그러자 시드는 역시나 말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해버려, 이야기가 헛돌게 된다.
“저건 진검이야.”
“안 맞잖아. 금방 부서지고.”
“그건 다루는 방법이 잘못 돼서. 검을 맞대기 전에 외워야 할 것들도 있고.”
“귀찮게 경기 방법을 외운다고 뭐가 돼. 그보다 출전도 못해.”
“네가 터무니없어서 금지된 거지만.”
“그런 얼간이들은 나도 사양이야.”
대화의 구석구석에서 시드가 저질렀던 짓을 엿볼 수 있는 게 흥미롭다. 이대로 흐지부지될 것 같아 안심하며 말다툼을 구경하던 아피아는, 시드가 느닷없이 꺼낸 말 덕분에 다시 그 사이에 끼어들게 됐다.
그 말은 바로 이 한 마디였다.
“게다가 림 선생님보다 이 녀석이 강해서 좋아.”
시드의 무서운 점은 보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격의 없이 그런 식으로 말한다는 점이군요, 하고 닛카가 후일 평가를 남겼다.
“그렇군.”
그리고 위사가 그런 말을 듣고 잠자코 물러설 리도 없다. 험악한 눈길을 받은 아피아에게는 불길한 예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의 대결은 중간부터지만 잘 봤습니다. 시드의 말도 일리는 있어요.”
“아니, 그런 게…….”
“어때요. 한 번 상대해 주시겠습니까?”
정중한, 그러나 거절하는 것도 망설여지게 만드는 기백을 담은 제의였다. 여기서 휩쓸려 받아들이게 되면 끝장이다. 아피아는 마찬가지로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무리 그래도 위사를 상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대볼 것도 없는 일입니다.”
“어이, 도망치지 마.”
시드가 쓸데없이 참견하는 게 짜증난다.
“그런 말씀 마시고, 부탁드립니다.”
림도 물러설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시드와 다투고 있는 것을 보여준 이상, 무예에 서투르다든가 남들 앞에서 할 자신이 없다든가, 변명할 거리도 없어 곤란해졌다.
그래서 아피아는 이렇게 운을 뗐다.
“그럼 한 가지 조건을 걸겠습니다. 승패에 관계없이 당신이 왕도로 돌아간다면, 승부를 받아들이죠.”
상대를 단념시키기 위한 제안이었다. 공작에게 명령을 받아 시드를 데리러 왔을 그로서는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의심이 심해지는 것도 알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계속 몸을 사려도 의심은 받을 터였다.
하지만 아피아의 기대는 빗나가고 말았다. 림이 제안에 응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시드 님, 좀 전의 말씀은 제가 약해서 일을 맡길 수 없다는 거였죠.”
림의 입장에서야 그런 의미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제가 이기면 함께 왕도로 돌아가 주시겠어요?”
“이긴다면.”
시드 역시 단칼에 승낙해버렸다. 방황이나 갈등 따위의 감정은 없는 건지. 그리고 그 약속을 받아낸 림이 거부할 리도 없었다.
“그럼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오늘은 벌써 어두워졌으니 내일 아침, 출발하기 전에. 괜찮겠죠?”
이리하여 아피아는 본의 아니게 시합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8-5
상대가 역량을 판단하지 못하는 틈에 밀어붙일지, 상대의 태도나 버릇을 본 뒤에 나설지는 개인차지만, 아피아는 기본적으로 후자에 가까웠다. 림도 마찬가지인 듯, 개시 구호 뒤에도 양쪽은 잠시 서로를 쳐다봤다. 빨랑―, 시드가 보내는 야유는 무시했다.
먼저 움직인 쪽은 림이었다.
위에서 정면으로 내리치는 그 검의 끝은, 맞히려는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상대의 태도를 떠보려는 첫 술이다. 아피아는 부러 똑같이 내리치며 칼날을 맞부딪쳤다. 예상대로 둔중한 무게감이 손잡이에 전해져 와, 싸움에 들어서지 않고 한 발 물러섰다. 시드 같은 상식 밖의 힘보다, 이렇게 성실히 단련된 힘이 더 무섭다. 성인 남자에게 힘으로 대항한들 밀릴 따름이다.
림이 제안한 장검 시합을 받아들인 건,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검술은 그 틀이 대략적으로 정해져 있어 승부를 명확하게 판가름하기 쉬웠다. 그런 부분이야말로 시드가 싫어하는 점이겠지만, 아피아는 체격도 근력도 전혀 다른 위사를 상대로 주먹다짐을 할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결국 아피아에게 유리한 것은 상대의 자세를 무너트리고 허를 찌르는 방법이다. 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 공격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시험 삼아 낮은 자세로 발밑을 노려보아도 간단히 막힌다.
“오―, 격해졌다. 대단해, 대단해.”
한편 관전하는 쪽은 거리를 둔 곳에 걸터앉아 태평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판에 박힌 거잖아. 뭐가 재밌는지 모르겠는데.”
“그런가? 그렇게는 안 보여.”
“아마 움직임이 깔끔해서 그럴 거예요. 저희 같은 초심자가 보기에도 동작의 연결이 매끄럽죠?”
“그렇구나. 시드랑은 다르네.”
“다르죠.”
“너희들.”
은연중에 폄하된 시드가 씩씩 화를 내며 반박했다.
“저딴 건 너희들처럼 옆에서 구경하고 떠들기 위해서만 하는 거야. 상대의 검을 부러트리면 끝장이지.”
“부러져, 저거?”
“어, 부러져. 조금만 힘을 줘도 구부러지니까.”
철은 그 경도와 한정적인 채취 장소 때문에 값이 비싸고, 그런 것으로 만들어진 칼이 부드러울 리가 없다. 뮤아는 시드의 '조금만'이라는 것도 대강 알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림과 아피아의 공방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안정적으로 쭉 이어지는 림의 참격을, 아피아가 피하는 동시에 간간히 반격하는 국면이 이어졌다.
“그보다 아피아가 밀리는 것 같은데, 이길 수 있는 거겠죠?”
“이길 수 있지.”
“아무리 아피아가 강하다고 해도 위사 상대로는 역시 무리 아냐?”
“저 녀석 말이야, 빈틈을 잡는 걸 기분 나쁠 정도로 잘하거든. 맞았다고 생각했더니 안 맞았고, 안 맞을 거라고 생각했더니 얻어맞고.”
뮤아는 감탄하며 그러냐고 물었다가, 시드가 뒤이어 남긴 소감에 놀라고 말았다.
“그치만 림 선생님도 꽤 강하네.”
“……잠깐만. 엄청 남 일처럼 말하는데.”
“나, 림 선생님 상대해본 적 없을걸. 아―, 한 번도 없었나. 아니다, 그것도 세면 한 번 있나. 있다, 있다.”
시드가 뭔가 떠오른 듯 혼자 중얼거리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 말인 즉, 조금 전의 대사는 막연히 추측한 것뿐으로, 근거는 없다는 거군요.”
닛카가 그렇게 단정 짓는 순간, 세피아의 외마디 비명이 세 사람에게도 들려왔다.
봤더니, 양손을 들고 서 있는 아피아의 목에 희미하게 빛나는 칼끝이 들이밀어져 있었다.
8-6
정말 그래도 괜찮은가, 생각한 참이었다.
지는 게 당연하고, 진다고 해도 불이익은 없었다. 시드가 반드시 왕도에서 자신의 일을 누설할 거라고는 할 수 없고.
이렇게 된 이상 검을 떨어트리고, 항복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시드 말마따나 그저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째서 몸이 움직였는지 알 수 없었다.
아피아는 뒤로 등을 살짝 돌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그에 따라 칼날도 약간 흔들렸지만, 승리를 거의 확신한 덕분인지, 림은 더 이상 공격해오지 않았다.
그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난데없이 오른손에 전해진 충격과 눈앞에 흩어진 붉은 빛에 의해, 림은 저도 모르게 놀라 주저앉았다. 틈도 주지 않고, 그의 오른손에 충격이 가해졌다. 저릿한 감각을 느낄 새도 없이, 두 번째 공격이 같은 장소에 더해진다. 검을 쥐는 힘이 느슨해진 것도 당연지사였으리라. 세 번째 공격을 받은 뒤에야, 림은 자신을 때리고 있는 게 뭔지 깨달았다.
칼자루 끝이다. 높이 들어진 그것은 다시 거의 같은 장소를 맞혔다. 그렇게 느슨해진 손에서 미끄러진 검은, 땅에 부딪히며 쿵 소리를 냈다.
한참이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아서, 자리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이윽고 세피아가 머뭇거리며 판정을 내린다.
“그… 아피아, 승리?”
“아, 항복이야.”
림은 받아들이고, 떨어진 검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아피아에게로 다가갔다. 아피아의 목부터 가슴팍에 걸쳐 붉은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상처를 보여줘.”
그렇게 말해 턱을 들게 하자, 목의 중간부터 턱 아래까지 긁힌 것처럼 베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상처는 얕고 그리 심하지 않지만, 장소가 장소인 만큼 좀 더 깊게 당했다면 어땠을지 모른다.
어째서 이런 위험한 짓을. 림은 착잡해진다.
아피아가 들이밀어진 검을 아래서부터 몸으로 밀치며 피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칼날을 완전히 피할 수 있을 리도 없었으니, 이것은 요행에 불과했다. 실제로도, 약간이긴 하지만 턱 끝의 살이 도려내졌다.
“괜찮아?”
림은 서둘러 달려온 뮤아로부터 치료용 천을 받아들고, 시드에게도 말을 걸었다.
“야, 시드. 너도 술 갖고 있지. 내놔.”
마지못해 내밀어진 술병에 천을 적셔 상처를 씻어낸다. 역시나 스며드는지 아피아는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자업자득이라는 걸 알아서일까 소리는 내지 않았다.
“잠시 누르고 있으면 그칠 거야.”
고정이 어려운 부위라서 스스로 천을 눌러 지혈하게 했다.
“고맙습니다.”
“어째서 계속했어.”
림은 인사하는 아피아에게 그렇게 캐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어요.”
“최악의 경우엔 죽을 수도 있었어.”
“죄송합니다.”
순순히 사과를 받고 나면, 림도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고는 해도, 어른스럽지 못하게 승부하다 결국 상처를 입게 만든 건 이쪽이다. 그런 고로 림도 고개를 숙였다.
“이쪽이야말로 미안했어. 처음 약속대로 나는 왕도로 돌아간다. ……시드, 잠깐 이리 와. 할 얘기가 있어.”
시드의 뒷덜미를 붙들고 조금 떨어지는 림을 배웅하며, 뮤아는 팔짱을 낀 채 탄식했다.
“으음. 역시 림 씨는 돌아가는 건가. 적어도 살레타까지는 같이 가 줬으면 했는데.”
“아피아네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어요.”
“그건 그렇지. 시드도 돌아가지 않을 거고. 잘 된 건지.”
“어라. 시드가 없는 쪽이 귀찮은 일도 적어 좋지 않나요?”
“그야 그렇지만 여기까지 함께 온 구성원에 애착이―.”
문제점은 아주 많지만 나름대로 잘 해나가는 느낌이라고 뮤아는 생각했다. 적어도 뮤아는 모두가 좋았고, 헤어지면 섭섭할 것 같았다.
“아피아, 괜찮아? 피는 그쳤어?”
아직 젖은 천을 움켜쥔 채인 아피아에게 말을 걸던 뮤아가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부족하다. 그 부족한 것이 이런 순간일수록 찰싹 달라붙어야 할 그의 동생임을 깨달은 뮤아가 주위를 둘러보자, 근처에 있었다.
하지만 세피아는 어쩐지 딱딱한 표정으로, 아피아를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8-7
결국 여러 사건들로 시간이 들어, 림과 헤어질 때는 한낮에 가까웠다. 이제부터 길을 떠날지, 이대로 하루만 더 여기 머무를지 망설이다, 화덕을 미처 치우지 못했다는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어 머무르기로 했다.
“아피아랑 시드 못봤어?”
뮤아의 물음에, 나무에 기대 뭔가 적고 있던 닛카가 고개를 들었다.
“못 봤는데, 무슨 일이에요?”
“림 씨한테, 앞으로 지내는 곳만이라도 알려달라면서 억지로 돈을 받아서. 하는 수 없이 좋다고 했는데, 그래도 두 사람한테 허락은 받아야지. 닛카는 상관없지?”
“상관없어요.”
“둘이 싫다고 하면, 돈은 시드한테 주면 되려나.”
“전서구 값이요?”
“그것보다 많은 느낌이던데….”
“그냥 받아둬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쪽도 이미 예상했을걸요.”
“그렇게는 안 돼.”
허리에 손을 얹고서 씩씩하게 자세를 취해보인 뮤아가 주위를 둘러봤다. 언덕의 어느 그늘이나 수풀 뒤에 있는지 두 사람 다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질리지도 않고 싸워대는 건 아니겠지. 위에서 좀 봐야겠어.”
뮤아는 양해를 구하고선 날개를 펼쳤다. 비행은 나름 자신이 있지만, 안전을 위해 나무줄기 높이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높아진 시야 속에서 움직이는 그림자를 찾아낸 뮤아는 그것을 주시했다.
“아닌가?”
그 사람들은 꽤 멀리 있고, 생김새가 확실치 않은 데다, 3인조여서 무관한 사람일 거라 판단하고 다른 곳을 찾아봤다. 그러자 언덕 한 개 건너에 덤불 뒤로 아피아와 비슷한 모습이 지나간 것도 같았다. 뮤아는 황급히 땅으로 내려가, 닛카에게 쫓아갈 거라는 뜻을 전했다.
“조심하세요.”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닛카의 배웅을 받으며, 뮤아는 빠른 걸음으로 좀 전에 봤던 곳을 향해 나아갔다. 사정을 물어보는 거야 밤이라도 좋겠지만, 딱히 할 일도 없고, 아까 일도 있었으니까, 시드랑 싸우기 시작할 것 같으면 그전에 말려두는 편이 좋겠다 싶었다.
“필요없으니까, 네가 가져가.”
덤불에 다가가자 역시나 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이 금방 끝날 것 같아 말을 건네려던 뮤아는, 그 순간 나온 아피아의 가시 돋친 대답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장난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그녀는 일단 고개를 숙인 채 무성한 잎사귀들 뒤에서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섣불리 얼굴을 내밀었다간 분위기를 격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뭐, 약간은 엿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도 부정은 못하지만.
아무래도 시드가 덤불을 등지고 있고, 그 앞에 아피아가 대치하는 형태인 것 같았다. 장검을 든 채 이쪽을 노려보는 아피아의 모습이 보였다. 피는 이미 멈춘 것 같았지만, 목덜미부터 턱 사이의 피부가 아직 부은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불온한 공기가 더해진 건 이상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기 때문일까. 뭣 때문인지 무척 불쾌해보였다.
“여유롭구나, 시드=신스=톨라.”
“일일이 다 부르지 마.”
“너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아피아는 거듭 쏘아붙인다.
“이런 데서 뭘 하는 거지? 너도 같이 돌아갔어야 해. 너한테는 가야 할 장소가 있다. 져야 할 책임이 있다.”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
뮤아는 쌀쌀맞은 시드의 대꾸에 진이 빠졌으면서도, 아피아를 향해서도 시드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피아 쪽에서 저렇게 덤벼드는 건 의외였다. 시드가 싸움을 걸어대는 탓에, 아피아는 마지못해 받아주는 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아피아가 계속한 말들에 뮤아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러는 동안에도 톨라 영지는 벽 너머로부터 공격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시드도 마찬가지였는지, 뮤아는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그 대답에 담긴 당황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그게 뭐야. 시비를 걸 거면 좀 제대로 된 걸로….”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내가 여기 있는데도. 세발족은 벽을 넘을 수 있다. 그건 네가 가장 잘 아는 것 아닌가, 시드=신스=톨라!”
“이 새끼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도발당한 시드가 평정심을 유지할 리도 없어서, 그는 아피아의 멱살을 잡는다. 뮤아는 허둥대며 나가려다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는 게 마음에 걸려 조금 망설였다. 게다가 그 순간 갑자기 반대편 덤불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세 개나 튀어나왔다.
“아피아…씨, 맞죠?”
그들은 중년부터 청년까지 있는 남성 집단으로, 머리에 짐승의 귀는 없었다.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에 뮤아는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아까 나무 위에서 발견했던 3인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인상에 남은 건 다들 망토를 걸치고 있는 덕분이었다.
“동생 분이랑 같이 와주시죠.”
그들은 아피아를 향해 그렇게 내뱉었다.
8-8
그런 상황이 된지라 더욱 나가기 어려워진 뮤아는, 다시 덤불 뒤에서 몸을 움츠린 채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뮤아의 상태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3인조와 시드와 아피아는 각자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예상 밖의 전개에 긴장이 풀린 시드의 손을 뿌리치며, 아피아는 그들에게 대답했다.
“꽤 늦은 등장이군.”
목소리에는 좀 전보다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있는 게, 어떻게 봐도 환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벽을 넘어온 아피아 형제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쳐왔다는 얘기다. 그 무언가가 저 3인조인가.
“얌전히 오면 나쁜 짓은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까부터 말을 걸어오는 건 리더로 보이는 가장 나이든 남자였다. 주름이 파이기 시작한 얼굴은 온화한 성격으로도 보인다. 옆에 서 있는 나머지 두 명도 으르렁대기나 할 뿐, 특별히 악당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나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렇겠지. 놈들 좋은 짓을 하는 거겠지.”
하지만 아피아의 빈정거림으로 보아 3인조가 그의 적이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세 사람의 요구 따위를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상대 쪽에서도 그건 알고 있는지, 힘을 행사할 생각인 양 다른 두 사람이 슬슬 간격을 벌리며 포위망을 만들려고 한다. 아피아는 뮤아가 자리 잡은 덤불을 등지며 그 대치를 받아들일 자세를 취했다. 이대로 숨어있기만 하는 것도 위험할지 모르나, 도저히 나갈 수가 없는 분위기다. 그런 고민을 하는 뮤아의 머리 위로 엉뚱한 말이 들렸다.
“혹시 이놈들 세발족이야!?”
시드, 깨닫는 게 늦어. 뮤아는 마음속으로 따졌다. 그리고 그가 깨달은 이상, 일이 더 복잡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예상대로, 시드는 갑자기 의욕을 불태웠다.
“어이, 네놈들, 남의 나라에 멋대로 들어오지 마.”
삿대질하며 규탄하지만, 상대는 미적지근한 얼굴이다.
“누군가요, 이 사람은.”
“관계없는 사람.”
아피아의 대답도 무뚝뚝하다.
“관계없으면, 저쪽으로 가주시겠어요.”
리더의 지시로 인해 부하 두 명의 표적은 잠시 시드로 바뀐 듯했다. 시드는 물론 싸울 마음이 충만한 것 같았으므로, 뮤아는 3대 2라면 어떻게든 될 테니까 괜찮을까 안심했다. 자기가 있는 것까지 들켜 인질이 된다거나 하는, 소설 같은 상황만은 피하고 싶었다.
“얼른 덤벼!”
오히려 들뜬 목소리로 시드가 그렇게 도발한 순간.
갑자기 뭔가가 덤불을 지나 뮤아의 발밑에 굴렀다.
“꺅!”
뮤아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허둥지둥 입을 막았는데도 커다란 비명이 자꾸만 주위에서 울렸다. 들켰다고 생각한 뮤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뒤이어 들리는 비명은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은빛의 반짝임이 지나가고, 뒤이어 붉은 색이 눈앞에 솟구친다. 신음 소리가 난다. 다시 은빛 띠가 허공을 가르고, 둔탁한 파열음이 울려 퍼진다.
인지는 뒤늦게 찾아왔다. 쇠의 냄새. 어깨와 옆구리를 누르고 웅크린 두 사람. 발밑에 떨어진 칼집.
아피아가 검을 대강 휘두르며, 그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 있었다. 아피아의 뺨이나 옷에 핏자국이 군데군데 튄 채였다.
“우린 너희들을 따라가지 않아.”
시드에게로 두 사람의 주의가 분산된 순간, 아피아가 칼을 꺼내들어 남자들에게 휘둘렀던 것이다.
“썩 꺼져. 이래서야 실력 행사도 못하겠지?”
앞에 있던 중년의 남자는 상처가 없고, 나머지 둘도 치명상은 아니지만, 이미 전투태세를 갖춘 상대에게 반격을 가하기란 확실히 어려울 터였다. 중년 남자도 솜씨에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닌지 기세가 꺾인 채다.
“도, 돌아간다!”
발길을 돌리는 중년 남자의 호령에 맞춰, 상처 입은 두 사람 또한 신음하면서도 덤불 너머로 사라졌다. 아피아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핏자국이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너 뭐야!”
남자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 시드가 정신을 차린 듯 불쑥 따져 물었다.
“뭐냐니, 보면 알겠지.”
“저건 내 상대였는데! 게다가 옆에서 칼을 쓰는 건…….”
“장난은 시시하단 거 아니었나?”
시드의 헛된 항의를 아피아가 냉담한 어조로 찍어 눌렀다. 그는 여전히 칼에 눌어붙은 피를 옷으로 닦으며 중얼거렸다.
“여럿을 상대하는데, 너처럼 대단한 힘이 없는 인간은 뭐에 의지해야 하지? 검은 편리해. 저것들을 물리치려면.”
그 목소리는 시드에게 들려주는 것 치고는 작았다.
“장난이라니. 진작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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