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4-1.
나무들 밑에 집이 늘어섰고, 숲을 벗어난 완만한 들판에는 밭이 펼쳐져 있다. 밭에서 기르는 것은 과실주의 원료가 되는 흑포도로, 좋은 날씨 아래 무럭무럭 자라나는 중이다.
무디카=투카 마을을 찾아온 이 1년도, 작년과 다를 바 없이, 신의 은총과 함께 평온함이 지속될 터였다.
실제로도, 그 한 가지 사건만을 제외하고는 마을은 평온했다. 그리고 그 사건도, 벌어진 결과만 놓고 보면 놀랄 정도로 드문 일은 아니었다. 마을의 노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어렸을 때도 있었고, 마을의 어른들이 어렸을 때도 있었던 일이라고.
그냥, 한 소년이 죽었다.
그것뿐이었다.
당사자로서는 괴로운 이야기지만, 흔한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태어난 아이 전원이 무사히 성인을 맞이하는 것은, 굉장한 신의 가호를 요구한다.
문제는, 살해당했다고 떠들어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
그리고, 죽였다고 말할 수 없는 상대.
그것이 톨라 공작의 외동아들만 아니었어도, 그런 소동이 벌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아네키우스력 7507년,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의 이야기다.
4-2.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제법 대단한 소식이어서, 전해지자마자 마을을 발칵 뒤집었다.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어봤자 그렇게 모른 체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마을 전체가 함께 맞이할 준비를 했다.
좌우지간, 공작가의 자제가 방문한다. 별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다음 영주님이다. 밉보여서 좋을 리 없잖은가.
“근데 왜 이 마을에?”
뮤아의 의문은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봤을 법한 것이다. 질문을 들은 아버지가 척척 대답했다.
“공작님은 바쁘셔서 왕도에 계속 머무르셔야만 할 때도 있단다. 그런 시기에 톨라 저택에 자제분 혼자만 지내게 두는 건 불안하다는 모양이야.”
“나는 혼자서 집도 볼 수 있는데. 나랑 동갑 아냐?”
“어허, 혼자 집 지킨 적 없으면서. 게다가 집의 크기가 달라.”
아버지는 웃으며 뮤아의 뻗친 머리를 휘젓듯이 쓰다듬는다. 엉키는 게 싫어서 뮤아는 볼을 부풀리며 그 손길을 피했다.
“그럼 같이 리라스로 가면 되잖아?”
“리라스에도 저택은 있다지만, 역시 거긴 갑갑할 거야. 나무로 지은 집이 제일이지.”
아버지는 옛날 왕도에서 일하던 시절이 있었는지,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렇게 결론짓는다. 그 영향으로 뮤아도 석조 주택들이 즐비한 광경을 보고 싶어 하면서도, 그곳에 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대삼림은 두려운 곳인 동시에 천혜의 보고다. 쭉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곳이라고 뮤아는 믿었다.
“그렇게 돼서 공작님이 이 마을에 자제분을 맡기신다는 거지.”
다 잘 된 일이라는 듯이 아버지가 그렇게 마무리하고, 뮤아도 잠시 납득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하다.
“잠깐만, 듣고 싶었던 얘기랑 달라. 다른 마을도 많이 있는데, 왜 여기야?”
공작 가의 도련님이 왜 저택을 나오는지 묻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재차 묻는 뮤아를 향해 아버지는 씩 웃어보였다.
“왜 이 마을이 선택됐냐면, 공작님께서 이곳의 과실주를 마음에 들어 하시기 때문이란다.”
이어진 결말이 목가적이라서 뮤아는 맥이 빠졌다. 혹시나 집안의 싸움으로 암살자가 목숨을 노리는 바람에 몸을 숨긴다거나, 그런 걸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하자 아버지는 웃어넘겼다.
“넌 쓸데없는 얘길 너무 많이 듣는다니까. 그런 일은 없어. 이 나라는 평화롭고, 자식들 이외에 톨라 가를 계승할 사람도 없거든.”
톨라 공작가는 새로이 나타난 가문이다. 현 당주는 3대째로 지금 국왕의 6촌에 해당하는데, 2대와 3대의 살아있는 형제는 없다. 즉 가계도는 단 하나의 선으로만 이어져 있고, 톨라라는 성씨를 가진 가까운 친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만약에…, 어디까지나 만약에. 아드님이 변을 당하신다면 아마 톨라 가는 없어지고, 영지는 몰수되고, 다른 집안의 귀족님이 찾아오게 될 거야.”
“귀찮아질 것 같아.”
“공작님께선 잘 해주시니까. 이상한 놈으로 바뀌는 건 싫지.”
어쨌거나 처음의 궁금증은 풀렸으므로, 뮤아는 신경이 쓰이는 다른 것도 물었다.
“얼마나 있을 거래? 어디에서 잔대?”
“궁금한 게 많구나. 뭐, 역시 형의 집에서 머무르지 않을까. 아니면 별채를 쓰거나. 뭐가 됐든 형님이 나서서 준비하시겠지.”
그 말에 뮤아가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정말? 그럼 토슬 집에 놀러 가면 있겠네.”
“있다고 해도 너, 희귀한 동물 같은 게 아니니까. 자제분 앞에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촌장과 뮤아의 아버지는 두 살 터울의 형제로 막역한 사이였다. 토슬은 두 살 위의 사촌인데, 또래의 형제가 없는 뮤아에게 있어선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아―, 기대된다. 어떤 애일까.”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집이든 비슷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아이들이 자기 또래의 ‘귀족님’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른들은 아이들과 달리 책임감도 느꼈다.
그리고 어른들에게는 긴장을, 아이들에게는 신기함을 선사한 그 사람이 드디어 마을에 왔다.
4-3.
“자네들의 아이와 똑같이 대해도 괜찮다. 나나 시드나 딱딱한 건 질색이야.”
공작은 곁에 서 있는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고선, 생글거리며 말했다.
“뭐, 이렇게 말해도 어렵겠지만…… 조금 지나면 대강 알게 될 테지. 음.”
정작 소년은 굵은 눈썹들을 좁히며 찌푸린 얼굴로 정면을 노려보고 있다. 겉모습은 그의 아버지를 꼭 닮았지만, 대체적으로 붙임성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태도라서, 앞날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른들이 예의상의 미소를 짓는 한편으로, 아이들은 저마다 감상을 수군댔다.
“건방져 보인다.”
토슬은 옆에 있는 뮤아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에게 있어선, 이곳의 다른 누구보다도, 상대의 됨됨이가 중요한 문제였다. 별채를 준비하는 것으로 동거는 피했어도, 그 집에서 나이가 가장 비슷한 아이니까 여러 가지 일이 덮쳐올 게 틀림없었다.
“어리광쟁이겠지.”
유감스럽게도 별로 성격이 맞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토슬은 머리 뒤로 깍지를 댄 채 한숨을 쉬고 있다. 앞으로 한 달간의 일을 생각하자니 우울한 것이리라.
뮤아도 일이 복잡해질 것만 같은 인상을 받았다.
뮤아가 느낀 소년의 첫인상은 ‘불안정하다’였다. 어디를 봐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균형이 심하게 어긋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터질지도 모르는, 한 번 무너지면 돌이킬 수 없는 그런 위태로움.
마을에는 불안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나, 당연히 그런 것으로 방문이 취소될 리가 없었다. 공작은 아들과 시종 여성을 두고 왕도를 향해 떠났다.
먼저 머무를 집을 안내할 때에도,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종이 응대했다.
역시나 한 지붕 아래 사는 건 실례가 아닌가, 라는 이유로 창고로 쓰였던 촌장의 별채를 새로 꾸며서 제공했다. 덕분에 그 공사를 위한 돈은 미리 받은 데다, 최대한 고급스러운 것들을 갖췄지만, 역시 시골마을에서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불평을 터트릴까 겁먹고 지켜보는 일동 앞에서, 소년은 안을 흘끗 쳐다보고는 말없이 들어갔다. 무엇을 하려나 지켜봤더니, 누가 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침대에 누워버린다.
“아, 저, 시드 님은 피곤하신 모양이니…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기운 없어 보이는 시종이 뒤를 따라서, 일단은 마음에 들었다는 거겠지, 석연찮은 얼굴로 마을 주민들은 해산했다.
이렇게 첫째 날이 끝났으며 그 뒤로도 소년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무뚝뚝하게 입을 다물고, 불평하진 않지만 이런저런 요구도 하지 않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4-4.
그리고 필연적인 최초의 충돌이 발생한다.
혼자서 숲을 빙빙 돌고 있던 시드에게, 제법 나이가 있는 어린이들이 트집을 잡은 것이다.
“도련님짜리는 아빠한테 가는 게 어때?”
악의 어린 말이 난데없이 내던져졌다.
“시시하잖아, 이딴 촌구석.”
리더인 노튼은 이제 곧 성인이라 어른이나 다름없는 체구를 지녔다. 일곱 살 정도 어린 시드보다 두세 배는 크다는 점이, 노튼에게 지위의 벽을 무시할 배짱을 주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지, 그는 마을 어귀의 커다란 바위 위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고, 동료 네 명도 나란히 바위에 올라 시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형적인 위협의 자세다.
그 말을 들은 시드도 고개를 들었을 뿐, 역시나 묵묵부답이었다.
“들리긴 하냐? 귀가 나쁜 거야, 머리가 나쁜 거야. 어느 쪽이냐!”
노골적인 도발이 벌어진다. 당황한 것은 그 장소를 우연히 지나가고 있던 뮤아와 토슬이었다. 이 길목은 신전으로 향하는 길이고, 두 사람은 글을 배우러 가던 중이었다.
“뭐하는 거야, 노튼 저 녀석.”
황망히 뛰쳐나가려는 뮤아의 팔을 토슬이 붙잡았다.
“괜찮아, 가만히 있어도. 노튼 형도 무턱대고 달려들진 않는걸. 상대가 상대니까.”
“저기, 토슬도 항상 저 녀석들한테 이래라 저래라 참견당하잖아.”
“그래서 안 되는 거야. 말린답시고 끼어들었다간 더 복잡해진다니까.”
토슬은 이런 식으로 관망하기만 하는 태도가 잦았다. 뮤아로서는 답답하게 여기는 부분이지만, 그렇다고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네 녀석들이랑 무슨 싸움을 한다고.”
실랑이를 하던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귀에 들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입을 다물었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거기에 시드가 있었다. 드디어 말문을 연 소년을 향해 그 자리에 있는 전원의 눈길이 쏟아졌다.
“나 좀 내버려 둬.”
단언하는 시드를 보고도, 노튼은 기죽지 않았다. 비웃는 투로 이렇게 대답한다.
“약하니까 그런 식으로 명령하냐?”
주먹다짐으로 발전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래서 시드가 바위로 한 걸음 다가갔을 때, 모두들 그대로 뛰어올라서 덤벼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당연한 짓을 하지 않았다.
“죽어.”
한 마디 중얼거리더니 제자리에서 주먹을 번쩍 치켜든 것이다.
뒤이어 무겁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위가 흔들렸다. 바위에 올라가 있던 노튼과 그의 동료들은 비틀거리며 굴러 떨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싸우고 싶으면 와라.”
그 안에서 상황을 알고 있는 단 한 명인 소년은 그렇게 내뱉고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붙잡는 이가 없다.
바위에는 커다란 금이 생겼다. 방사형으로 퍼진 그 균열의 중심에 꽉 쥔 주먹 자국이 나 있었다. 우두커니 그것을 바라보던 이들 모두가 잠시 후 사태를 깨달았다.
“대단하다!”
큰소리치는 토슬을 향해 뮤아가 추궁한다.
“아니, 잠깐만. 대단하긴 한데, 괜찮은 거야? 뭐야, 저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면 저건 귀족으로서 보통인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세계는 넓구나, 뮤아는 오묘한 감회에 빠져든다. 그녀의 공상을 깨트린 것은 갑작스레 내밀어진 학용품 가방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토슬이 달려나가고 있다.
“기다려! 어디 가?”
“쫓아가려고.”
“신관님한테는 어쩌고?”
“괜찮잖아, 글자 같은 거.”
애당초 공부에 시큰둥한 토슬로서는 땡땡이 칠 구실을 찾은 셈이었다.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는 노튼 일당이 눈치 채지 못하게끔, 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달리는 토슬의 뒷모습을 향해 뮤아는 충고했다.
“싸우러 온 거라고 오해받아서 얻어맞지 말고―! 그러다 진짜로 죽을 거야―.”
알아들었다는 신호로 손을 흔든 토슬은 숲 너머에 모습을 감췄다.
4-5.
토슬에게도 타산적인 마음은 있었을 것이다. 공작의 아들과 친해지면 부모에게 칭찬을 받고, 그를 바보 취급하는 노튼 일당도 견제할 수 있다.
“저 녀석, 재밌어.”
그러나 밤이 되자 일부러 뮤아를 찾아와 보고를 남긴 토슬은, 그런 계산 이상의 수확을 시드로부터 얻어낸 것 같았다.
“이야기 해봤어?”
바깥의 나무에 걸터앉은 토슬을 향해,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앉은 자세로 뮤아가 속삭였다. 딱히 안으로 들어와도 괜찮지만, 왠지 현관을 지나가기 귀찮을 때면 두 사람은 자주 이렇게 앉아서 대화했다.
“조금. 왕도에는 왜 안 갔는지 물어봤어.”
“왜 안 갔대?”
“전에 왕궁의 훈련장을 부서트렸대.”
“하―. 그건 돌로 만들어졌잖아.”
“낮에 봤던 것처럼 바닥이나 벽을 해치웠나봐.”
뭔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뮤아는 도리어 감탄했다. 이런 시골에 갑자기 끌려온 데 부루퉁해진 건 줄 알았는데, 혹시 늘 저 모양이었던 걸까.
“그래서 말이야, 내일은 이 근처를 안내해주기로 약속했는데.”
토슬은 무언으로 뮤아도 오지 않겠냐고 물었다. 관심은 있었지만, 뮤아는 고개를 저었다.
“내일은 신관님이랑 글자 공부를 하기로 했으니까.”
“그런 건 미뤄도 되잖아. 읽고 쓸 줄 안다, 그런 게 뭐가 재밌어.”
“다음 촌장은 글을 읽을 줄 알아야지.”
영주로부터 내려오는 공문 따위를 모두에게 읽어주는 것은 촌장의 일이다.
“그럼 뮤아는 대충 해도 문제없잖아. 그렇게 열심히 배워서 뭐하게? 신관이라도 될 거야?”
“뭐, 그럴 생각도 하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위로 오빠언니가 있으니 집안을 이을 필요는 없고, 진로 선택의 하나로 신전에 들어가는 쪽도 고려하고는 있었다. 어느 쪽이 됐든 읽고 쓸 수 있어서 나쁠 건 없다.
“그러니까 다음에 봐. 어디 알려줄 거야?”
“어, 샘이랑, 개구멍이랑, 수풀 근처.”
“위험할 것 같진 않지만, 조심해. 다치면 혼날 거야.”
“알았어. 이제 슬슬 가볼게.”
“그럼. 잘 자.”
“잘 자.”
토슬의 모습이 나무에서 사라지자 뮤아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것이, 움직이는 그를 본 마지막이 되었다.
4-6.
그건 아마 사고였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는다.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아도 용서 받는 신분이니 별 생각 없는 거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다.
당시에 제대로 해명했어야만 했는데도 그러지 않은 채 적당히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분 덕분이었으니까. 입을 다문 태도로써 벌을 바란 것이라고 해도, 그를 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게 당연하기 때문이었으니까.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밭에는 햇빛이 은은하게 쏟아지고, 나무그늘은 서늘하며, 바람은 상쾌하게 불어온다. 뮤아는 목판에 갖다 댄 손을 멈추고, 문득 신전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봤다.
그 순간, 쾅, 하고 누군가가 땅을 차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멀지 않게 연달아 울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위험한 울림에 신관도 무심코 밖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습격은 뜻밖의 방향에서 들이닥쳤다.
울림이 멎고, 예배당 문이 두드려진다. 처음에는 노크에 가까웠던 그 소리가 점차 격렬해져 간다. 얼어붙은 신관과 뮤아의 귀에 유난히도 요란하고 두려운 소리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뚝 그쳤다.
두 사람은 쭈뼛거리며 복도로 나왔다. 어째선지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라 시야가 흐렸다. 들어온 빛은 그 안으로 사람과 비슷한 기묘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상반신만 크게 부푼, 굉장히 불균형한 체형이었다. 아래로 비스듬히 뻗은 양손은 잘 살펴보면 어깨에 이어져있지 않다. 이어지기는커녕, 어깨엔 커다란 혹 같은 게 솟아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함은 먼지가 걷히자 사라진다. 그 그림자가 한 사람의 것이 아님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저보다 커다란 몸뚱이를 등에 업은 소년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입구의 문짝들은 잠긴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있다. 두들겨 맞은 끝에 빗장 부분이 부서지며 안쪽으로 넘어간 것 같았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살려…줘.”
어제 처음 들었던 목소리가 예배당의 높은 지붕에서 메아리친다. 그 목소리에는 어제와 같은 힘도, 고집도 담겨있지 않았고, 오직 당혹과 피로만이 깃들어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신관들이 황급히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렇지만 뮤아는 알아버렸다.
달려가지 않고서도 어쩐지 분명하게. 시드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머리통, 갈색의 짧은 곱슬머리가 누구인지. 그의 손발은 어째서 저렇게 굳어져 있는지.
그 무엇보다도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신이 아니고서야, 더 이상 그를 도울 수 있는 이가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4-7.
“그놈이 죽인 거야.”
고발은 노튼에 의해 행해졌다.
“토슬이 먹게 했어!”
그 외침은 조심스레 묵살됐지만, 누구나 짐작한 것이었다.
“그놈 탓이야, 내가 봤다고!”
토슬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가짜 포도 열매였다. 숲에 자생하고 있는, 아름다운 붉은 열매. 그 열매는 신선하고 맛있어 보여도 안에 맹독을 품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그 열매의 위험성을 단단히 배우지만, 무르익기 전의 흑포도와 비슷한 것을 무심코 입에 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런 실수로 여겨질 터였다.
다만, 그것과 “진짜 이야기”는 별개다. “진짜 이야기”는 마을 사이에서 은밀하게 전해진다.
두 사람은 가짜 포도를 발견하고, 토슬은 경고한다. 그러나 시드는 그 경고를 듣기는커녕 오히려 토슬에게 강요한다. 너부터 먹으라고.
그것이 가장 믿을 만한 얘기였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어쩌면 가장 불쌍한 것은 시종 여자였을지도 몰랐다. 또 다시 입을 다물고 만 소년과 마을의 조용한 적개심 사이에 낄 수밖에 없었으니까. 게다가 머무르는 곳은 막 아들을 잃은 집이다.
왕도로 사건을 전하는 심부름꾼이 보내져 답장이 올 때까지, 상황은 어정쩡하기만 했다. 그녀로서는 당장 톨라 저택에 돌아가고 싶었겠지만, 멋대로 판단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토슬의 장례식이 열리고, 마을에는 다시 소문이 퍼진다. 적의가 강해진다.
“뮤아, 있지, 그 애는 절대 자기 스스로 먹지는 않았을 거야.”
유류품 분배에 불려간 뮤아를 향해 백모는 그렇게 털어놓았다. 별채가 보이는 창문은 닫혀 있고, 방의 절반 정도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슬은 겁이 많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열매를 먹는다니 설득력이 없다.
“그런데 말야.”
망설임 끝에, 차를 입에 머금으며 백모는 말을 꺼낸다.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먹는 짓도 하지 않았을 거야.”
뮤아는 이번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해할 수 있었다. 토슬의 소심함은 최대한 위험을 피하는 쪽으로 발휘되는 것이다. 남에게 명령을 받았다고 독이 든 열매를 삼키는 것 역시 그답지 않다.
“그러니까, 역시 사고인 거겠지.”
결국은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무책임한 소문에 매달리는 것도, 백모는 좋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뮤아도 백모를 따라 차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지금까지도 꺼림칙했던 것이, 서서히 자신의 안에서 확고해지는 게 느껴졌다.
4-8.
왕도에서 온 사신은 정중하게 조의를 표하고, 위문금과 ‘시드를 톨라 영지로 돌려보내라’는 지령을 가져왔다. 일은 분주하게 진행되고, 그에 맞춰 소문에도 다시 불이 붙었다. 그 마지막 추궁 장면에서는, 끝내, 뮤아도 자리에 있었다.
마을 밖에 모여 수군대는 이들의 한가운데 겁도 없이 들어가, 그 남자 앞에 섰다.
“노튼.”
뮤아는 일부러 그의 이름을 반말로 불렀다. 그 무례에 화내며 눈을 부라리는 노튼을 향해, 뮤아는 질리지도 않고 말을 계속한다.
“이제 그만해. 시드는 나쁘지 않아.”
심지어 그것은 명백히 명령조였다.
노튼은 당황했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한참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거기서 우스운 꼴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뮤아를 노려보며 얄망궂게 쥐어짜듯이 말한다.
“…너, 사촌오빠가 살해당했는데 분하지도 않아? 아니면 귀족님들한테 꼬리치는 건가?”
“분해. 분하지.”
뮤아는 즉시 대답했다. 지금도 죽은 토슬의 얼굴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부자연스럽게 굳은 얼굴, 입가에서 흘러나오던 붉은 거품과 갈고리처럼 구부러진 채 경직된 손가락의 모습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바람이 두드리는 소리에 창문을 열었다가, 그곳에는 어둠뿐이라는 걸 알게 되는 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분노는 특정한 누군가에게 돌릴 만한 게 아니다.
“그럼 왜 감싸는데. 그놈들은 뭐든 돈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하잖아. 이번 일로 잘 알았지? 그놈들은 우리 일 따윈 벌레 취급…!”
“노튼.”
뮤아는 펄펄 날뛰는 그를 제압하듯이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되풀이했다.
“이제 그만해. 너는 나쁘지 않아.”
그 순간, 두려워하는 침묵이 주위를 감싼다. 노튼 일당의 동작이 이상해지고, 노튼 본인도 눈이 흔들리는 것을 감추지 못한다. 그것을 보고 뮤아는 확신했다.
“시드한테 먹인 건 너잖아.”
그것은 이 마을 어린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은 일로, 비슷하게 생긴 검은 열매와 빨간 열매를 이용하는 통과 의례다.
노튼은 이렇게 말했을 게 틀림없었다.
“담력 시험이다.”
조심스럽게 꼭꼭 씹다가, 따끔따끔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즉시 뱉어내면 아무렇지도 않다. 너무 오래 씹으면 입안이 온종일 아파지긴 하지만, 고작 그 정도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흑포도를 가짜 포도라고 생각해서 내뱉는다면, 그놈은 겁쟁이다.
“설마 겁먹은 건 아니겠지.”
들이밀어진 빨간 열매 한 송이. 한창 무르익는 중인지, 아니면 다 익은 건지 금방 분간할 수 없는 선명한 빨강.
시드는 아마 주저하지 않았으리라. 뜯고, 입에 넣고, 씹고, 삼킨다. 그게 우연히 독성이 낮은 열매였는지, 그는 태연하다.
불행히도, 그것을 본 토슬이 착각한다.
“…분명히. 아무도 나쁘지 않아.”
다짐하려는 양 뮤아는 중얼거렸다.
역시나 그 일은 사고였고, 다만 어딘가 잘못되었던 것뿐이다.
4-9.
지령이 떨어진지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시드가 떠날 준비도 다 갖춰졌다. 그 빠른 속도는 공작 측과 마을 측의 의견이 일치한 결과였지만, 출발하려는 날 아침에 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정작 시드가 어딘가로 훌쩍 사라져서는, 출발할 예정이었던 시각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모두가 총출동해서 수색하게 됐다.
그러던 와중에 뮤아는 부모로부터 떨어져 숲속 깊은 곳으로 향했다. 짚이는 데가 있는 탓이었다.
역시 시드는 거기 있었다. 그는 샘물 옆에서 자라난 붉은 열매를 손에 쥔 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옆모습을 향해 뮤아가 말을 건넸다.
“그건 가짜야.”
송이만 떼어낸 상태라면 구분이 어렵지만, 자라는 상태에선 이파리 뒤에 붉은 힘줄이 있으니 금방 구분할 수 있다. 갑자기 나타난 뮤아를 향해 시드는 의뭉스런 눈길을 보냈다.
“뭐야, 너.”
“뭐야, 라고 물어도. 마을사람인데요.”
“그런가.”
그걸로 납득했는지, 시드의 눈동자에서 경계하는 기색이 누그러진다.
“다들 널 찾고 있는데. 안 갈 거야?”
“갈 거야.”
기분이 나쁜 것 같진 않지만, 말투는 무뚝뚝하다. 원래 그런 성격일 것이다.
“토슬은 있지, 너한테 여길 안내해준다고 말했었어.”
“아.”
“여기서였지, 너희들이 열매를 먹은 건.”
“아.”
“죽는 게 두렵지 않아?”
혼자서 찾으러 온 건 이걸 묻고 싶어서였다. 독일지도 모르는 열매를 선뜻 입에 넣는 심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행위가 토슬을 죽이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다.
“별로.”
대답은 간단하고 모호했지만, 행동은 확실했다. 그가 느닷없이 빨간 열매를 아무렇게나 뜯어낸 것이다.
“잠깐….”
뮤아의 제지는 늦었고, 시드는 손에 쥔 붉은 낱알들을 후루룩 입에 집어넣는다. 그리고는 거의 씹지도 않고 삼킨다.
“맛없네, 이거.”
황당하게도, 그 직후의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토, 토해내!”
뮤아가 허둥지둥 등을 두드리지만 늦었을 게 빤하다. 즉효를 나타내는 독이니까 곧 경련이 시작될 터였다. 설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만큼 궁지에 몰려있을 줄은 몰랐는데.
“왜 그런 짓을…!”
“확인한 것뿐인데.”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태연해서 흠칫 놀란 뮤아는 움직임을 멈췄다. 눈앞의 소년은 경련하지도 않았고, 거품을 물지도 않았고, 굳어있지도 않았다.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은 안색으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듣지 않는 건가.”
한숨을 내쉬며 그가 중얼거린다. 뮤아는 이제 어떻게 물어봐야 좋을지 몰라서 그냥 이렇게 말했다.
“…죽고 싶어?”
“아니. 나, 이런 걸로는 안 죽고. 죽는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대답은 무척 단호하게, 그러나 우울하게 되돌아왔다.
“그래도 다른 놈은 죽겠지.”
뮤아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는 마을을 향해 척척 걸어 나갔다. 한 마디 인사를 남기고.
“그럼 이만.”
쫓아가는 것도 왠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뮤아는 제자리에서 그를 배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들 너머로 그의 모습은 사라졌고, 뮤아는 홀로 숲에 남았다. 바로 옆에서 주렁주렁 영근 붉은 알갱이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가짜 포도. 신에게 축복받은 사람들을 질투한 마물이 만들어냈다던, 그 전승.
뮤아는 포도를 한 알씩 떼어내 천천히 깨물고 내뱉었다. 혀 위에서 느껴진 아릿한 자극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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