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3-1.
그것은 악몽으로, 반복해서 찾아와 아물지 않는 상처를 마구 긁어댄다. 몇 번이나 같은 광경을 봤는지 모른다. 특히 최근에는.
먼저 보이는 것은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하늘로 이어지는 넓게 펼쳐진 초지다. 간간히 바람이 불어 마른 풀들이 흩날린다. 그것을 뒤쫓다보면 저 멀리 갈색 선이 하나 뻗어있는 게 보인다. 그것은 세계의 끝을 보여주는 선이다. 낯익은 경치. 태어난 이래로 쭉 보았던 풍경들.
톨라 공작의 영지는 리라스의 서쪽, 벽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열매를 맺게 하는 풍요로운 흙이 깔린 아늑한 땅, 천혜의 고장이다.
때때로 비가 내린다. 신의 자비, 마를 쫓아내는 거룩한 화살이 하늘에서 날아든 것이다. 세상은 깨끗이 씻기고, 악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다만, 그 사건은 비가 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다. 신의 무력함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양.
누가 왔다.
언덕 너머에서. 벽 쪽에서.
그것은 부상을 입은 채였다. 방울져 내리는 피가 풀밭에 붉은 선을 그렸다. 그것이 마를 이끌었다. 벽 너머로부터 놈들을 불러들였다.
어머니는 완고한 사람이었다. 몸이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주제에, 한 번 결정한 것을 번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거기 없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닐 정도로 작았다.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아, 거기에 응했다. 찾아온 놈들은 이쪽의 법도에 매이지 않았다. 그놈들에게는 목적을 막는 단순한 장애물.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영원히 잃었다.
그뿐만이 아니잖아요?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여자의 목소리다. …틀림없는, 어머니의 목소리다.
그걸로 끝나지 않잖아요, 시드?
발밑에는 초목이 움트고 있다. 순식간에 자라나는 그것은 어지러이 우거진 숲이 된다. 아네키우스의 빛이 차단되는 그곳은 시원하고 기분 좋은 곳이다. 곳이었다.
찡, 하고 거기서 모든 것이 끊기며 없어진다.
꿈은 끝났다. 늘 그랬던 부분에서.
침대에서 일어난 시드는 작게 혀를 차고, 머리맡의 가죽물병에 든 독한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3-2.
순례 풍습이 시들어도 길은 나날의 왕래에 따라 유지된다. 물류의 요점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그랬다. 처음에는 마주치는 일이 드물던 행인들을 보지 못하는 날도 차츰 없어졌다.
“사흘쯤 뒤에 타이나에 도착할 것 같아.”
여행은 큰 분쟁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작은 다툼은 너무 많아서 셀 수 없었지만.
다툼의 주인공들은 현재 선두와 후방으로 나뉘어 나아가고 있다. 서로를 무시하는 상태니까 당분간은 부딪칠 일 없겠지.
“타이나라면 꽤 큰 곳인데. 기대된다. 닛카는 가본 적 있어?”
자연히 그 사이를 걷게 되는 뮤아였지만, 이런 상황에도 대강 익숙해져 이젠 초조해 할 이유도 없다. 결국 이런 식이 된다.
“없어요. 리라스는 한 번 가봤지만.”
“그렇구나. 난 왕도에 가본 적 없어. 시드네는 왕도에도 있지. 톨라 저택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데. 역시 크려나?”
“그딴 건 상관없잖아.”
“왕성보다는 작지?”
“시끄러워, 너.”
“대답을 안 해주니까 그렇지.”
그리고 앞의 세 명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세발족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쪽은 앞줄과 달리 목소리를 낮춰 대화를 나누었다.
간밤의 일을 세피아가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피아는 말을 듣고는 눈살부터 찌푸렸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고?”
“모르겠어. 그치만…….”
이쪽을 쳐다보는 눈이 침착해서, 도저히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는 세피아의 모습을 본 아피아가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 물었다.
“기억하지, 벽을 넘었을 때.”
그 순간 두 사람의 등에 오한이 일었다. 당시의 감각은 이 정도의 말만으로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마치 몸속을 파고드는 것처럼 안으로 냉기가 스며든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흠뻑 젖었을 때의 그 비참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지만, 호사를 요구할 때도 아니라서 벽에 매달렸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등 뒤에서 발소리를 들은 것만 같아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거기에는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신경만 예민해질 따름이었다. 다행히 추격자에게 들키지 않은 채로 구멍을 발견해, 숨어있던 세피아와 함께 아피아는 그곳에서 빠져나갔다.
그때, 소름이 끼쳤다. 경계에 얹힌 발 위에 벽의 그림자로부터 무언가 스며들어 얽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방금 지나온 길로 끌려갈 것만 같아, 아피아는 세피아를 끌어안고서 황급히 거기서 굴러 나왔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망설임 따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누가, 있어….”
품 안의 세피아가 여린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아피아도 뒤쪽의 불쾌한 기색을 눈치 챘다.
보고 있다.
꿰뚫어지는 듯싶은 시선을 느껴 주위를 둘러봐도, 거기엔 누구의 그림자도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 시선은 명백하게 자신들을 비난하고 있다. 도망가는 저희들을 데려오려 하고 있다.
아피아는 세피아의 손을 붙들고 무작정 달렸다. 마음이 꺾일 것만 같아서,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벽에서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오한은 사라졌다.
이제는 나쁜 꿈결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건 현실이었다. 벽을 넘기 전에도, 넘은 뒤에도 여러 악의를 맞닥뜨렸을 텐데, 그게 가장 강렬하게 떠올랐다.
그것이 저희들만 느낀 환상이 아니라면. 벽을 넘으려던 자들에게 주어지는 벌이라면.
사실, 드나들기는 그토록 쉬운데도 리탄트에 유우족이나 생이족이 출현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없었다.
“그러니까, 시드 얘기가 사실이라면….”
그 뒤를 아피아는 말하지 않았다. 단지, 가슴 부근에서 손을 꼭 쥔 채 잠시 생각에 잠긴다. 다만 끝내 고개를 내저으며 이렇게 결론내렸다.
“역시 그런 일은 없어. 거짓말이다, 세피아. 저놈이 할 만한 짓궂은 거짓말이지.”
그리고 다시 한 번, 혼자서 시드에게 다가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세피아는 그것을 곤란한 듯싶은 표정으로 들었다.
3-3.
그 여관은 유난히 공손한 태도의 주인이 맞이했다.
“순례 행렬이신가요, 예에, 이리 드시지요.”
아이들뿐인 일행, 그것도 순례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면 바보 취급당하는 일이 적지 않다. 여관의 주인장들에게 있어서도 그다지 이익을 기대할 수 없는 성가신 손님이다. 이전까지처럼 여행객들이 드문 곳이라면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기에 거절당하는 일도 없지만, 지금쯤 되면 문전박대를 당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사실, 이곳은 세 번째로 들른 곳이었다.
“아까 간 데도 좋았잖아. 돈 줄게.”
연거푸 거절당하고, 시드가 그렇게 말한 걸 거부한 끝에 이곳에 당도했다.
생이족인 주인장은 굽실거리며 고개를 숙이고선 뮤아에게 말을 건넨다. 몸집이 작은 데에다가 이런 태도라서, 퍽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작은 여관이라 내드릴 수 있는 방은 두 개뿐입니다만.”
“…괜찮지?”
“뮤아가 괜찮다면 그걸로 되지 않나요.”
방이 두 개뿐이라면, 방 배정도 실질적으로 내정돼 있다. 시드와 아피아를 한 방에 두겠다는 무모한 계획은 시도해 볼 엄두도 나지 않는 탓이다.
이렇게 해서 만사가 원만하게 해결될 텐데도, 어째선지 시드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돈 준다고 했잖아.”
저녁 식사를 할 때에도, 식당에서 쭉 투덜거리고나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뮤아가 다그쳤다.
“있지, 우린 네 시종들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줄 필요 없어. 그나저나 왜 여기가 마음에 안 드는 건데?”
“고개를 쉽게 숙이는 놈이 싫어.”
너처럼 고개 숙이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이 아니잖아, 하고 뮤아는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 생각한 구석이 있는 거겠지. 아마도.
“네, 여러분, 마실 것을 좀 가져왔습니다요.”
정작 주인장은 불합리하게 거리껴지는 줄도 모른 채로 여전히 굽실대며 접대를 보고 있다.
“이 근방에서 나는 과일로 만든 주스인데요, 조금 시큼하지만 몸에 좋다고 해요.”
그는 선명한 붉은 색 액체가 담긴 잔을 앞에 내고, 마지막으로는 보다 진한 잔을 시드 앞에 놓았다.
“손님께서는 이걸 주문하셨죠.”
그러고는 깊이 머리를 숙인 뒤 돌아갔다. 시드 앞에 놓인 잔은 정체를 묻지 않아도 모두 알 수 있었다. 알코올 냄새가 역력하기 때문이었다.
“시드….”
뮤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탄식하며 노려봤다.
“뭐.”
“저기, 내가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잖아.”
“뭐 잘못됐어?”
“순례 행렬 사이에 주정뱅이가 비틀거리고 있는 건 좀 그렇다고 생각해.”
“이걸로 취하나?”
시드는 뮤아의 말을 단박에 자르고는, 태연한 얼굴로 잔을 죽 비워버린다. 처음에야 아무래도 몰래 마셨던 것 같지만, 이제는 당당히 마시고 있다. 마시는 모양새부터가, 분명 상습범이다.
“언제부터 마신 거야?”
“글쎄다. 5년 전부터 이미 마시고 있었지.”
물이 풍부한 그라드네라에서 술은 기본적으로 특별한 음료라서, 성인이 된 뒤에야 마실 권리를 인정받는다. (미성년자의 음주는) 죄라고 할 정도로 호들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것도 틀림없다.
“한 잔 더.”
다시 주문하려는 시드를 뮤아가 말렸다.
“그래도 그 이상은 안 돼!”
“왜.”
“왜겠어!”
“설득력 없구만.”
뮤아와 시드의 말다툼은 의자를 끄는 소리에 의해 끊어졌다. 돌아보니, 아피아가 다 마신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난 먼저 방에 간다.”
그 말만 하고선 시드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간다.
또 다시 싸움이 벌어질까 뮤아가 아피아의 모습을 지켜보는 틈에, 시드는 술을 한 잔 더 주문했다.
3-4.
객실 문을 슬그머니 밀어서 연다. 작게 생긴 틈으로 촛불을 들이민다. 일렁이는 불꽃이 주위를 비추어도, 방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 뒤로 작은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촛불을 든 남자는 먼저 방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 침대 맡 책상에서 불을 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바닥에 놓인 자루의 끈을 푼다. 한참을 더듬어 몇 가지 뒤적거리다, 자루를 원래대로 묶었다.
“역시 주머니에 있나….”
신중함을 중시해서 물러설 수도 있지만, 이번에 거둘 수입을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남자는 각오하고, 언짢은 표정으로 잠든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일어날 기색은 없다. 전에도 문제없이 해낼 수 있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실례하겠습니다.”
듣고 있을 리도 없지만, 왠지 인사하고서 옷 속에 손을 집어넣는다. 이내 손끝이 돈주머니처럼 보이는 딱딱한 무언가를 더듬었다.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그것을 끄집어냈다.
“그럼 감사히 받아가겠습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도중에 그쳤다.
“뭐냐, 너.”
지척에서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쳐버린 것이다.
“…!”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서려던 남자는, 도주는 이미 불가능해졌다는 걸 알아챘다. 내밀었던 손을 소년이 붙잡고 있었다.
“기분 나쁘네. 뭐야, 주인장.”
어른거리는 불빛 뒤에서, 여관 주인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시드를 쳐다봤다.
“그게, 손님, 주무시고 계신 것 아니었는지….”
“응? 잤는데?”
“그러셨지요. 그, 알려드릴 게 있어서요, 잠시 들어왔습니다만, 곤히 주무시고 계셨기 때문에 그만……그런데 잘 생각해보니 날이 밝은 뒤에 말씀드려도 될 것 같네요. 그럼 저는 이만….”
되는대로 지어내며 자리를 벗어나려던 주인장의 손목은 풀려나지 않았다.
“잠깐 기다려.”
이렇게 큰소리를 내도 꼼짝하지 않는 닛카의 침대를 들여다보며, 시드는 어렴풋이 상황을 이해했다.
“…독이냐?”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독이냐?”
거듭 물으며 손목을 비틀자, 주인장은 소리를 질렀다.
“다, 다, 당치도 않은 소리십니다! 피곤해 보이는 분들이시라 편히 쉬시라고, 그저 그런 이유로, 예.”
그렇다면 수면제 같은 걸 썼나, 시드는 추측한다. 역시 도둑질 때문에 마을 안에서 몇 명이나 죽이는 것도 졸렬하다.
“아침엔 일어나겠지?”
“일어납죠, 일어나요, 그건 분명해요. 그런데 손님, 손님도 드셨을 텐데요.”
시치미를 떼야 했겠지만, 이상한 데가 있어 주인장은 무심코 그렇게 묻고 말았다. 음료를 마시는 모습은 제대로 보고 있었고, 시드의 잔에만 약을 빼먹은 것도 결코 아니었다. 술에 섞는다고 효과가 없어지지도 않았다. 그에 대한 시드의 대답은 주인장의 궁금증을 전혀 해소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딴 거, 나한테 효과 없거든.”
손목을 더 비틀었더니 주인장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물론 그 정도로 봐 줄 생각은 없었다.
“이래서 싫다니까. 생각도 없는 주제에 무작정 굽실거리는 놈들은.”
그건 그거고, 이젠 어떻게 할지 시드는 망설였다. 연행하는 것도 지금은 졸려서 귀찮고, 적당히 아침이 될 때까지 묶어뒀다가 뮤아한테 처분을 맡길까.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놓쳤다.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시드의 손등에 와 닿아 힘이 풀렸다. 주인장은 왼손에 든 촛불을 다시 시드의 얼굴을 노리고 던졌다.
“…이 새끼가!”
게다가 주인장의 다음 행동도 시드의 속을 긁었다. 그가 문으로 도망치는 대신 창문으로 돌진한 것이다. 그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창문을 열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2층이라고는 해도 그건 생이족의 기준, 비틀대면서도 간신히 착지해 달려 나간다.
“놓칠까보냐!”
시드 역시 창틀을 박차고, 밤의 마을을 향해 뛰어갔다.
3-5.
추격전은 간단히 끝났다. 도망치던 여관 주인은 바로 근처의 작은 오두막집으로 뛰어들었다. 시드도 따라서 오두막 문에 손을 댔지만, 잠가버렸는지 열리지 않았다. 거기서 시드는 순간적인 판단으로 문을 세게 걷어찼다. 그러자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안쪽으로 넘어갔다.
안에 있던 남자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문간에 서 있는 소년을 쳐다봤다.
“…무슨?”
그들은 아마도 가세를 더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손에 무기를 든 이들과 들지 않은 이들이 섞여 있었다. 인원은 주인장을 포함해 4명. 꽤나 위협적인 생김새로, 어쩌면 아침에 귀중품이 없어졌다고 호소하는 손님을 돌려보내는 게 평소 업무였을 듯싶었다. 이런 난입은 예상 밖이었음이 분명했다.
“이, 이놈, 이놈을!”
주인이 손가락질하며 떠드는 것을 무시하고, 시드는 서슴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직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한 남자들 중 한 명의 뒷덜미를 넌지시 잡아 올렸다. 아마 그 남자도 저보다 체격이 작은 시드에게 가볍게 들어올려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뭐?”
간신히 자신의 상황을 이해한 남자가 기이한 소리를 내자, 시드는 그 남자를 멀리 있는 다른 사람에게로 던졌다. 기습을 피할 수 없었던 남자들은 그대로 벽에 나동그라져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아―. 검을 두고 와서. 맨손은 귀찮은데.”
시드가 투덜거리고, 주인과 남은 한 사람이 기막혀한다.
“항복하면 끝내주겠지만.”
시드의 도발에 물러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정신을 가다듬은 듯싶은 남자는, 주인을 뒤로 제치며 앞으로 나와 시드를 마주했다.
“애새끼라 봐 줬더니 들떠서는….”
“아니, 언제 봐 줬는데?”
당연히 남자의 위압감에 기죽을 시드가 아니다. 차갑게 따지자 남자는 으르렁대며 덤벼들었다.
“닥쳐!”
체격차를 살린, 위에서부터 찍어 누르는 공격이 시드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시드는 피하려는 낌새도 없이, 노려보기만 하며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의 주먹이 시드의 얼굴에 꽂힌다.
남자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소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주먹은 헛돌았다. 그것을 파악할 새도 없이, 남자의 배에 강력한 타격이 왔다.
“쳇…. 그때 써먹은 게 이건가, 그놈.”
남자의 품에서 시드가 중얼거렸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맹점을 파고든다. 며칠 전 자신이 먹었던 반격이었다.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남자 뒤로 주인장의 모습이 보였다. 발치에 지갑이며 귀중품을 내놓은 채 바짝 엎드리고 있었다.
“같이 오셨던 분들의 것도 돌려드릴 테니까 제발 용서해주세요!”
“하아.”
뮤아 쪽이 먼저 도난당했던 모양이다. 따로 찾으러 온 것도 아니었지만, 일단은 검사를 위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 손끝에 묘한 것이 걸려들었다.
평소 같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물건이다. 사슬 끝에 작은 돌멩이를 매단 목걸이 따위엔 관심도 없다. 하지만 투명한 돌 속에서 아른거리는 일곱 가지 빛깔을 보고 있으면, 조바심과 비슷한 이상하게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어이, 너.”
“무, 무슨 일이신가요.”
“아침까지 이놈들 잡아두고 있어. 도망가면 어떻게 될지 알지?”
시드는 짐을 챙기고, 남자들을 묶어두지도 않은 채 오두막에서 빠져나왔다. 자신이 무엇에 내몰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3-6.
여관은 아직도 조용했다. 자신이 드나들었던 창문만이 열린 채로 끽 소리를 낼 뿐. 성급히 되돌아왔던 시드는 맥이 탁 풀렸다. 그 기묘한 초조함은 뭐였을까.
어휴, 하고 숨을 고르며 침대에 걸터앉자, 손에서 미끄러진 지갑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제자리에 갖다 두지 않았다가 날이 밝고, 자신이 훔쳤다는 오해를 사면 귀찮아진다. 누구 건지는 몰라도 근처 책상에 적당히 내버려두면 되겠지.
“들어간다―.”
들릴 리도 없을 테지만 우선은 그렇게 말하며 옆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주인장이 자물쇠를 풀어둔 덕분인지, 시드는 막힘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건, 침대 옆 테이블에 되찾아온 짐들을 내려두고 돌아가려 했을 때였다.
처음엔 숲속에서 산짐승이 내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들어보니, 그것은 방 안에서 나는 소리로, 짐승이 아니라 사람의 신음이었다.
“뭐야?”
생이족이라면 더 잘 보였겠지만, 유우족인 시드로서는 방이 어둠에 잠겨있을 뿐이므로, 일단 창문을 열었다. 달빛이 스며들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침대 한쪽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뭐하는 짓거리야?”
시드는 주저하지 않고 이불을 걷었다가, 그 안을 들여다보고 당황했다.
“어이, 왜 그래, 어이!”
명백히 이상한 상태였다. 아피아가 침대 위에서 몸을 옹송그린 채 떨고 있었다. 입으로는 괴로운 듯한 헐떡임을 흘리고, 뺨은 차가웠으며, 땀에 흠뻑 젖은 채였다.
“일어나, 멍청아!”
아무리 때려도 반응이라고는 전혀 없다. 간헐적인 경련과 신음만이 함께 흘러나오는 것이, 어떻게 봐도 위험해보였다.
“꼬맹이, 일어나. 야!”
그래서 시드는 표적을 바꿨다.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던 세피아를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반응이 없었지만, 계속해서 치니 느릿느릿 눈을 뜬다. 아직 의식이 다 돌아오지 않은 것 같은 세피아에게, 시드는 말을 걸었다.
“네 형. 좀 이상한데.”
그 순간 약의 영향에서 풀려났는지, 세피아는 재빨리 일어났다. 그러고는 옆에서 < 모양으로 웅크린 아피아를 들여다보고는 아피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시드는 세피아의 몸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목걸이!”
세피아가 돌아서서 외쳤다.
“못 봤어? 돌 달린 거!”
“아…. 저기.”
무척 사나워진 세피아의 서슬에 눌린 시드가 순순히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러자 세피아는 즉각 달려들어 목걸이를 찾아내서는, 침대로 가지고 돌아가 아피아의 손에 쥐어줬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아피아의 호흡이 차츰 잔잔해진다. 세피아는 침대에 손을 붙인 채,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다 의문스러워하는 시선을 쏟는 시드를 발견했다.
“뭐야 그거?”
“그게 왜 거기 있어?”
서로의 물음은 동시에 나왔고, 두 사람은 다시 의아해했다.
3-7.
“아니, 도망가지. 도망갈 거야, 반드시.”
텅 빈 오두막을 보고, 뮤아는 어이없는 목소리로 거듭 말했다. 그러자 시드가 크게 하품하며 대꾸한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그런 거.”
“음―. 아무래도 좋은 건 아닌 것 같지만.”
깨어나 보니 인기척이 없는 여관을 수상쩍게 여긴 일행은, 태평하게 자고 있던 시드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사정을 알게 됐다. 이후 오두막을 들여다봤지만, 거기 남아있는 것은 파괴의 흔적뿐이고, 어젯밤 시드가 처치한 남자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뭐, 일단은 경비나 신전이나 그런 데 신고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것뿐인가.”
자기들은 딱히 자경단도 아니고, 이 마을은 잠시 거쳐 가는 것뿐이니까, 쫒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뮤아나 닛카에게 있어선, 모르는 사이에 시작되고 모르는 사이에 끝난 사건이라서, 화가 난다든가 하는 감정도 생기지 않았다. 당사자인 시드가 정말 아무래도 좋다는 것 같은 태도인 것도 그랬다.
“그런데 왜 그냥 방치하고 돌아온 거죠?”
“졸려서.”
닛카의 소박한 의문에 대한 답도 단순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듣고 있던 아피아가 탄식했다.
“어중간하다고 해야 하나, 대충이라고 해야 하나.”
“그치만 시드가 없었으면 돈을 다 도둑맞았을걸. 우린 몰랐잖아.”
“…뭐, 그런가.”
그래도 곁에 있던 세피아의 설득은 마지못해 인정했다. 약을 삼켜버린 경솔함은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까지는 잘 도망치고 있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이래서야 앞일을 극복할 수도 없다.
“저기, 그러니까, 답례라든가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자책하고 있던 아피아는 세피아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고 흠칫했다.
“답례?”
“응.”
“…저거에?”
“응.”
“아니, 하지만….”
내켜하지 않는 듯싶은 아피아를 향해 세피아가 말을 잇는다.
“아버님도, 어머님도, 아피아도, 뭔가 받았을 때는 고맙다고 말하랬잖아.”
“음. 알지. 알고 있지만, 그건 좀.”
아피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세피아로서는, 아무리 사이가 나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망설이는 아피아는 처음 봤다. 아피아는 사이가 나쁘면 나쁠수록, 도리어 완벽하게 행동하는 쪽을 고수한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어지간히 맞지 않는 건지, 이 모양이라면 감사 인사도 해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시드에게 미안하다.
간밤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은 세피아는 시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 직접적인 표현에 당황했는지, ‘그러니까 굽실대는 놈은’이라고 말하면서도 시드는 곧 추궁하는 시선으로 세피아를 쳐다봤다. 이제는 세피아가 설명할 차례였지만, 세피아는 계속해서 시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물론 그런 소리를 받아들일 리 없는 시드가 코웃음을 치며 불만을 드러낸다. 그래도 세피아는 물러서지 않고 거듭 말했다.
“그렇지만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 내용을 듣고 싶어져서, 시드는 실망하면서도 재촉한다.
“말해봐.”
“아까 일은 잊어주세요. 아피아에게 물어보거나 캐내려고 하지 말아줘요.”
꽤나 제멋대로인 이야기였다. 들을 만큼 들어놓은 주제에, 자기는 말하고 싶지 않으니 잊어버려라, 하는 것이다. 평소의 시드라면 위협해서라도 알아내려고 했을지 몰랐다.
다만 상대가 세피아라는 점, 억지로 깨 있어서 졸리다는 점, 이전에 꾼 나쁜 꿈의 흔적 따위가 마음에 걸리는 일을 물고 늘어지게 할 생각도 없애버렸다.
“부탁드립니다.”
다시금 고개를 숙이는 세피아를 향해, 시드는 적당히 내뱉었다.
“아―, 알았어. 세발족에 대해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약점을 잡거나….”
“안 해.”
그 약속으로 인해, 시드는 뮤아 일행에게는 전반부만 얘기했다. 요컨대 남자들을 내팽개치고 돌아간 이유가 있기는 한데, 그 이유라는 게 꺼림칙한 예감이었다든가, 그렇게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그러니 아무래도 좋았다.
“신고하러 갈 거면 아직은 출발하는 거 아니지. 난 좀 더 잘래. 갈 때 깨워.”
또 하품을 하며 시드는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닛카가 불쑥 말했다.
“딱히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수면제가 듣지 않았다니 어찌된 일일까요?”
다른 이야기들은 무심결에 흘려들었지만, 범인들을 구속하지 않았다는 것 다음으로 미심쩍은 게 그 부분이었다. 시드의 설명은 지나치게 주관적이라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 응. 그건 됐어.”
그러나 닛카의 의문을 뮤아도 흘려들었다.
“시드는 원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됐어.”
빨간 열매와 검은 열매.
뮤아는 떠올렸다.
시드가 마을에 왔을 때의 일을.
'번역 > Southwar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1장-사람의 장: 6화. 가시덤불 (0) | 2020.04.30 |
---|---|
제 1장-사람의 장: 5화. 침묵하는 거짓말 (0) | 2020.04.30 |
제 1장-사람의 장: 4화. 빨간 열매·검은 열매 (0) | 2020.04.28 |
제 1장-사람의 장: 2화. 옛날 옛적에 (0) | 2020.04.28 |
제 1장-사람의 장: 1화. 순례의 시작. (0) | 2020.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