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글을 의뢰해주신 분의 드림주가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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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아직 엘피스 소속의 일개 연구원에 불과한 헤르메스의 직함 뒤에 ‘님’ 자가 붙을 일도 없고, 디오니시아의 가면도 붉은색이 아니었을 무렵의 어느 날에 있었던 이야기. 그날은 서풍이 불던 날이었다. 페리페테이아 결정 자료관에서 볼일을 마치고 천측원으로 돌아가려던 헤르메스의 시야에, 낯익은 인영이 들어왔다. 디오니시아였다. 면식이 있는 사이에 마땅히 인사를 건네려고 걸음을 옮긴 헤르메스는 그의 옅푸른 머리칼에 엉망으로 피가 묻어있는 것을 알아봤다.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헤르메스는 여태껏 불러본 적 없는―그러나 그를 만난 뒤로 몇 번 주워듣게 된―디오니시아의 별칭을 부르며 허둥지둥 달려갔다.

  “니사!”

니사는 제 이름이 불린 방향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까딱여 목례할 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단순히 그의 성격 탓이려니 넘어가기에는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다. 심한 상처를 입은 탓으로 의식이 저하됐다고 보는 게 더 그럴싸한 진단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머리만 다친 것도 아니었고. 헤르메스가 다급히 치유 마법을 걸어주는 동안에도 니사의 눈길은 허공을 가 있었다. 수 분 뒤, 상처들에서 출혈이 멎고 옷자락에 묻은 피가 지워진 뒤에야 니사가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그는 고맙다고 인사하는가 싶더니 이내 혼잣말처럼 툭 덧붙였다.

  “그냥 둬도 나았을 텐데.”

  “그럴 리가 없잖아.”

어쩌다 그렇게 다친 거야? 헤르메스의 물음에 니사는 “저 녀석을 어떻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아서.”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끝이 가리킨 곳에는 지치기는 했지만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은,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생물 하나가 웅크린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이유로?”

  “간단한 방법도 있긴 해. 그런데 그건 좀 아깝잖아.”

기껏 태어난 것을. 니사의 어조에는 고저가 없었다. 기초적인 마법의 술식에 대해 설명하는 사람이라도 그토록 무미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말에 담긴 의미가 무척 생경하게 다가왔다. 헤르메스는 불현듯이, 니사를 돌아보았다. 때마침 불어온 미풍이 니사의 귀에 매달린 기다란 금속 조각을 흔들었다.

 남들과 다르게 보이는 것을 지양하는 사회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장신구에 얽힌 소문은, 헤르메스도 들어본 적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비록 통제에 어려움을 겪기는 하나 자유로이 휘두르는 창조 마법을 도무지 제대로 다뤄내지 못하는 인물이 있다고. 그가 실수로라도 어떤 위협이 되지 않도록 채워둔 족쇄가 바로 그 귀걸이라고. 하지만 헤르메스가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니사를 알게 된 건 아니었다. 그는 니사에 대한 다른 소문도 숱하게 전해 듣고, 몇 번은 직접 봐서 알고 있었다. 니사는 창조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서도 남들을 돕는 일에 열심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얘기를 듣기만 했을 당시에는 그런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고, 이곳저곳 바쁘게 오가는 니사를 스치듯 지나칠 때는 보기 드문 사람이라는 감상밖에 느끼지 못했던 것 같은데, 막상 소문의 당사자를 마주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약점을 갖추고 태어나는 사람은 생각처럼 적지 않았다. 타고난 에테르가 적어 허약한 체질인 경우도 있었고, 체내의 어딘가 배선이 잘못돼 특정 마법을 다루는 데 서투른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본인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유별난 짓은 하지 않으려고 했고, 간혹 다음 생에는 더 나아질 것을 기약하며 자진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헤르메스는 그런 행동들을 감히 어떻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판단을 유보하고는 했으나, 비슷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도무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그러던 와중에 이렇게, 눈앞에 맞닥뜨린 이는 그토록 흔한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그들과 전혀 달랐다. 어째서 그럴 수 있을까. 문득, 귀가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할 말 있으면 해.”

조금 전만 해도 심하게 다친 채였다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멀끔해진 모습의 니사가 은근한 어조로 재촉했다. 그제야 헤르메스는 제가 니사를 붙잡아둔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여전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에 가까웠다. 헤르메스는 니사도 어쩌면 저와 같이 모난 돌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니사가 자신을 완전히 이해해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 섣부른 희망을 품기엔 지금까지 부딪혀 왔던 몰이해의 벽이 까마득한 탓이었다. 둥글지 못한 것들 둘이 있어봤자 서로 부딪치기나 할 뿐, 서로를 위한 조각처럼 맞아 들 일은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지만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아질 수 있는 것들이 없지 않으니까……. 아무리 억눌러도 사그라지지 않는 마음을, 희미하게 울리기 시작한 낯선 고동을 안고, 헤르메스는 니사의 곁에서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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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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