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3-1

  “싫어. 싫어. 농담하지 마.”

시릴=니아사=호리라=피어스는 당시 무척 기분이 나빴다.

  “정말이지 징그러워! 어째서 내가 상대해야 하는데?”

호리라의 공주이자 차기 국왕인 그녀는, 조금 전 부왕으로부터 전달받은 자신의 역할에 대한 분만(憤懣)을 금치 못했다.

  “아버님께선 내가 괴물한테 물려 죽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 나한테 접대 따위를 명령할 리가 없어!”

한창 옷매무새를 가다듬느라 할 일이라고는 한가한 입으로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는 것밖에 없다는 점도 열변의 원인이었다. 시릴의 머리를 묶던 시녀가 중재의 말을 건넸다.

  “어머나, 폐하께서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무래도 동갑이니 얘기가 맞을 것 같다고 판단하셔서….”

  “동갑!”

사뭇 섬뜩해진 시릴이 스스로를 양팔로 끌어안았다.

  “동갑의 남자라니, 이놈이고 저놈이고 별 볼일 없는 놈들뿐이잖아! 난폭하고, 아무 생각 없고, 유치하고, 예의 없고, 시 하나 읽을 줄 모른다니까!

동갑내기라는 말을 들은 시릴의 머릿속에 맨 먼저 떠오른 것은 견원지간인 먼 친척 소년이었을 것이다. 쓴웃음을 짓는 일동 중, 빗을 든 시녀가 앞으로 나와 그것을 건네며 공주에게 말을 걸었다.

  “도착하셨을 때 멀리서 뵈었는데, 어쩐지 대신관장님과 비슷한 분위기셨어요.”

하지만 그것은 긁어 부스럼이었다.

  “숙부님과 괴물을 한 데 두다니!”

눈총을 받은 시녀가 황공해하며 물러났다. 다른 시녀들 사이에선 바보 같은 말을 했다는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흘렀다.

왕의 막냇동생이자 대신관장, 니케트=토카라=피어스를 시릴 공주가 동경한다는 것은 성 안의 누구나가 알고 있는 얘기다. 그 점을 굳이 거론하는 등의 일은 공주의 비위를 건드릴 것이 분명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머리가 다 다듬어지고, 가볍게 분을 묻히며, 준비가 끝났다.

거울에 부루퉁한 얼굴을 내비치는 시릴이었지만, 이제는 도망칠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쾌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갑자기 배가 아파졌다고 하면 어때?”

  “전하, 부디 접대 장소로 가주세요. 앞으로 일정은 그것뿐이니까 금방 끝날 거예요.”

역시나 여기서 떼를 쓰면 아버지의 체면을 구기게 된다는 것쯤은 시릴도 알고 있다. 달래져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모습을 잡아뒀으므로, 시릴은 코웃음을 한 번 치며 시녀들에게 선언했다.

  “그래, 인사만이라면. 인사 정도는 해줄게. 그 이상은 아버님께 숙여야 할 테니까, 미안.”

  “그럼 오늘 밤의 무도회는…?”

  “괴물이랑 대면하면 아프기 마련이야.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리 하여, 공주가 파란의 예고를 풍기며 나간 거실은 잠시 정적을 되찾았다.

 

3-2

그리고 돌아올 때는 소란을 이끌고 왔다.

  “의상, 의상 준비는!?”

볼을 붉히면서 선두에서 달려온 시릴이 문을 지나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네, 늘 입으시던 옷은 여기 준비….”

  “아냐! 오늘밤에 입을 옷 말이야!”

씩씩거리며 반박당한 뒤에야 일동은 왠지 모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래도 일단은 확인할 수밖에 없기에, 의상 담당이 나서서 조심스레 물었다.

  “시릴 님, 몸은 괜찮으신가요?”

  “왜? 아침부터 좋았잖아?”

어이없어하는 되물음에 사태가 분명해졌다. 당연히 의상 자체는 완성돼 있었다. 무도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쪽이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물론 오늘 밤 의상 준비도 차질 없이.”

주인의 변덕을 다들 알고 있어 무도회가 끝나기 전까지 치우지 않았다. 잘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세세한 준비는 아직 필요할 것이라고 여긴 시종장이 금방이라도 옷을 갈아입으려 들 기세인 시릴을 진정시키려 재차 말을 건넸다.

  “아직은 시간이 이르고, 피곤하실 텐데요. 우선은 좀 쉬시지요.”

  “그래, 맞아. 아직 일러. 아, 그렇지만 왠지 기다려지는걸! 쉬라고 해봤자 초조해지고.”

  “쉬는 게 무리일 것 같다면 차라도 드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음, 듣고 보니 왠지 배가 고파졌어. 준비해. 아, 그렇지. 저쪽에도 같은 걸로 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주인의 명령이 떨어진 방은 느닷없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각자 맡은 바를 하기 위해 움직이던 중, 방금 전 부주의한 말을 내뱉었던 시녀가 옆의 동료에게 속삭였다.

  “봐, 역시나. 이종족이라는 것만 빼면 반드시 시릴 님의 취향에 딱 맞을 거라고 생각했어.”

시릴의 연애 편력을 보면 남자답지 않은 중성적인 외모에 매료된다는 것이 일목요연하다. 출발 전 시릴의 모습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꽤 심한 상상을 하고 있었던 탓에 되려 그 격차가 커져 더욱 멋지게 보였는지도 몰랐다.

  “음, 그렇지. 역시 숙부님보다는 좀 떨어지지만. 그래도 숙부님은 어른이니까, 그걸 고려해주지 않으면 불공평하지? 어쨌든 비슷한 나이인데 그런 사람은 여태껏 본 적이 없어. 행동도 섬세하고, 세련되어 보이고….”

관심이 생겨 들뜬 모습으로 감상을 떠드는 시릴을 배웅하며, 의상을 담당하는 시녀들이 입가에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우리 공주님은 또.”

  “여전하시지.”

  “있지, 있지, 늘 하던 말을 꺼내실 것 같아?”

  “말한다에 한 표.”

  “하지만 이종족인데.”

  “저렇게 되면 주위를 보시질 않는다고.”

  “앗­! 시릴 님을 이종족에게 빼앗기는 건 싫어!”

  “말하는 것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용납될 리가 없잖아.”

  “설마.”

저마다의 평을 남기며 시녀들은 오늘밤을 준비하러 흩어졌다. 작은 주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완벽한 준비를 해내기 위해.

 

3-3

그리고 아피아는 정체 모를 시련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차례로 인사가 찾아오리라는 것은 알았다. 호기심, 두려움, 모멸의 시선에 노출되는 것도 각오한 바였다. 하지만 무도회 내내 곁에서 밀착해 붙드는 것은 예상에 두지 않았다. 게다가 왠지 옆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흘끗 시선을 보내면 눈이 마주치기까지 했다. 심란하다.

  “시릴 전하, 저, 조금 가까운 것이 아닌지….”

  “저는 아버님께 아피아 님을 접대하라는 명을 받았으니까요. 눈을 뗀 사이에 실례를 끼치면 변명도 되지 않아요.”

간신히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틈에 언질을 줬지만, 시릴은 생글거리며 일축해버렸다.

  “게다가 전하라니요? 반말로 부르셔도 좋아요. 저희는 같은 입장인걸요.”

그렇게 말하는 데 강하게 반발할 수는 없었다.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초대받은 입장이다. 시릴이 건넨 잔을 받아들며, 아피아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반말을 할 수는 없으니 그럼 시릴 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정말 기쁘네요. 아피아 님과는 앞으로, 꼭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고마운 말이었다. 속내가 없다면.

  “그렇군요. 시릴 님께선 앞으로 이 두 나라를 어떤 관계로 만들고 싶으신가요?”

아피아는 약간의 떠보기와 견제를 넣었다. 별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공주는 차기 왕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벽에 손을 대는 순간은 이 공주가 왕이 된 뒤였다. 그녀의 인품이 중요했다.

  “으응. 아예 통일해버리는 건 어때요? 처음에는 연합 왕국이라는 느낌으로!”

시릴이 그려낸 미래의 예상도는 예상보다 순진하고 낙관적이었다. 진심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 싶어 아피아도 가볍게 받아들였다.

  “그건 인정받지 못할 거예요. 누가 왕이 되느냐로 또 다시 싸우고 싶지는 않으니까.”

  “어머. 물론 통일왕국의 왕은 두 나라의 핏줄을 이은 아이가 잇게 되겠지만요.”

뜻하는 바가 분명해, 아피아는 무심코 음료를 뿜을 뻔했다. 놀리는 건가 하고 쳐다봤더니, 진지한 얼굴로 똑바로 쳐다보는 게 당황스러웠다. 눈동자에는 열이 있었다.

  “대, 대담한 제안이네요….”

상대의 영문 모를 기세에 눌려,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방향은 다르지만 아무래도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혹시 호리라 왕가 근처는 모두 이런 느낌인가. 그렇다면 꽤 무섭다. 여러 의미에서 이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일방적인 호의를 받기는 했어도, 그 호의는 대개 타산적인 것이라, 이렇게까지 직설적이고 사양하지 않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제법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걸요. 할 거라면 철저하게 하는 쪽이 오히려 쉬울 때도 있고.”

  “그렇지만 그건 역시 좀.”

당혹스러워하는 아피아의 태도를 알아본 시릴은 금세 침울한 얼굴이 됐다.

  “아피아 님께서 보기엔 역시 날개가 있는 건 이상한가요?”

새삼스러운 말을 듣고서야, 아피아는 폭신한 숄에 감춰져있는 그녀의 날개에 대해 떠올렸다. 너무 익숙해진 탓에, 그것이 거리껴지는 이유로 꼽힌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겠죠. 세발족의 분들은 모두 아무 것도 달려있지 않은걸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죠. 마치 괴물처럼….”

  “아뇨, 그렇지 않아요!”

아피아는 황급히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정말로 그렇지 않고, 수긍했다고 받아들여지면 좋지 않을 상황이었다.

  “괜찮아요. 이백 년은 긴 시간이었고. 괴물이 차려입은 게 우스꽝스럽다고 여겨져도 별 수 없지요.”

고개 숙인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분위기라, 아피아는 더욱 당황했다.

  “그런 것,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같은 인간이고, 당신은 무척 예뻐요.”

  “말뿐이라면 상냥한 말 정도는 지어낼 수 있어요. 그렇게 보지 않는 상대에게도.”

  “말만 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로 생각하지 않아….”

거기서 간신히 아피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휙 올려든 시릴의 얼굴이 미소로 빛나고 있었다.

  “정말인가요. 아피아 님도 저에 대해 생각해주신 거군요.”

부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 저기, 뭐, 나름대로….”

  “당장은 말해주지 않아도 돼요. 천천히 익숙해지신다면 그걸로 좋으니까!”

  “네….”

엄청나게 걸려든 듯싶은 기분이었다.

 

3-4

  “어이, 봐. 공주님의 저 들뜬 소리.”

발코니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임데가 옆에 선 동료에게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역시나 장창을 들고서 경비를 보던 동료가 흘끗 실내를 쳐다봤다.

  “아아.”

  “이종족 상대로 잘도 하셔. 그야 겉보기만은 별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지만 말이야. 설마 진심으로 결혼하겠다느니 하신 건 아니겠지.”

  “무리지.”

  “본인도 턱없는 소리라는 건 알 거고.”

호리라 국왕의 유일한 아이인 시릴은 무슨 일이 없는 한 틀림없는 차기 국왕이고, 시릴의 아이는 그 차대의 국왕일 것이다. 가뜩이나 경시되기 십상인 이종족간의 혼인인데, 벽 너머의 상대 따위는 거론될 리조차 없었다. 일단 리탄트 측에서도 아무리 개국을 위해서라 한들 제1왕자를 내보내지는 않을 테고.

  “농담이래도, 재미로 받아들이지 않는 치들도 많다는 거지. 우리가 이렇게 눈을 번뜩여야 하는 이유는.”

두 사람은 다시 어두운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성 안뜰도, 하늘도 고요해 침입의 기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 반대파가 쳐들어올 것 같지는 않은데. 이만큼 엄중할 때 굳이 올 리가 없잖아. 나 같으면 돌아가는 길을 노릴걸.”

호리라 측이 현재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개국을 반대하는 일파의 습격이었다.

왕가에서 협상 방침을 굳힌 이상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적었으나, 잠재적인 반대파의 수는 결코 적지 않을 터였다. 강경한 수단의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톨라 공작.”

공공연한 반대파 필두의 이름을 거론하는 동료를 향해, 임데는 고개를 저었다.

  “오자마자 시비를 걸었다던가. 하지만 그 사람은 단독범이지, 어떻게 봐도.”

누군가와 짜서 암약을 하리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이것저것 잘도 저지르지만, 대부분이 “싸움”이다. 이번 건에서는 말싸움뿐만 아니라, 까딱하면 국왕과 주먹다짐을 할 뻔한 데까지 갔다는 말도 있다.

  “으음. 그런가.”

  “저택에서 근신시키는 것 같아. 그 사람이니까 명령을 지키고 있을지는 미묘하지만, 난입해 오지는 않겠지. …아마.”

전과가 있어서 미심쩍기는 하다.

어쨌거나 공작이 온다고 해도 문으로지, 창에서 오지는 않을 테다. 일단 반대파라손 치더라도, 개국을 막고 싶을 뿐 왕가를 전복시키려는 게 아니니, 이 자리에 불법으로 침입할 이유도 적다. 물론 왕권을 빼앗을 기회를 노리는 자들도 더러 있겠지만, 반란을 일으키기에는 시기상조다.

덕분에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있다고 해도 발코니의 경비는 왠지 한가한 편이었다.

  “하하, 저쪽 왕자님, 기세에 밀렸네.”

다시 안의 상황을 살핀 임데가 작게 웃었다. 누가 불렀는지 국왕이 잠시 자리를 비운 터라, 안의 분위기도 조금은 느슨해진 듯했다. 지금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당연히 내빈들의 안전이지만.

  “너도 봐봐. 확실히 걸려들었지, 저건.”

임데는 과묵한 동료에게 말을 걸려고 다시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가 눈을 의심했다.

서 있다.

방금 전까지 아무 것도 없었을 난간에, 땅에 고이는 그림자처럼 검고 하늘을 찌르는 나무처럼 곧게.

남자 같았다.

실내의 불빛이 여기까지 비춰주지는 않아 용모가 확실치 않았다. 다만, 여기 있어서 좋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봐…, 뭐야.”

정면의 남자에게인지, 옆의 동료에게인지, 알 수 없는 물음을 던지며 임데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째서 동료는 저보다 먼저 경고를 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를 몸으로 알게 된다.

난간의 남자가 이쪽을 보았다. 얼굴은 여전히 확인할 수 없었지만, 임데는 시선이 꽂혔다고 느꼈다.

나는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 하는 동시에 머리 한구석에서 또 생각한다.

빨리 창을 겨눠야 해.

더 강하게 경고해야 해.

구속해야 해.

하지만 그것은 실현되지 않았다.

  “으….”

창을 쥔 손이 떨려서 들 수가 없었다.

목이 오그라들어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발은 긴장돼 꼼짝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점점 하얘져 갔다.

눈앞의 남자는 난간에서 발코니 안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 뒤 이쪽으로 걸어왔다. 세워야 한다. 막아야 한다. 그런 반복되는 사고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우뚝 선 위사들 옆을, 남자가 천천히 지나갔다. 누구 하나 붙잡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같은 기분이리라고 느꼈다.

임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 남자가 어째선지 몹시 두려웠다.

 

3-5

오한이 몸을 스쳤다.

아피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그쪽을 쳐다봤다. 머릿속에서 찌릿한 소리가 울린 것 같았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부터 그 그림자가 밤바람과 함께 미끄러져 들어왔다. 남루한 행색의 남자.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

  “어머…?”

아피아의 시선을 따라간 시릴이 작고 불분명한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이어 근처의 위사들이, 그리고 분위기에 이끌린 참석자들이, 그곳을 주목했다. 금세 긴장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밖에선 뭘…!?”

아피아는 등 뒤의 위사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위사들이 시릴과 아피아를 지키듯이 앞으로 나섰다.

회장을 경비하던 위사들이 곧장 남자를 향해 달려갔고, 손님들은 반대쪽 벽으로 피신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창들이 남자를 에워쌌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무기도 없는 궁상맞은 체격의 남자에게 그렇게까지 과잉 대응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한두 명만 갔더라도 구속에는 충분할 터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모두 그 일을 자연스럽게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과잉이 아니었다.

  “이대로 방에서 나가주실까.”

사방팔방에서 창을 겨누고 있는데도, 정작 남자는 무표정으로 그 명령을 받아넘겼다.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한 눈치였다. 물론 위사들이 즐거워할 리가 없었다.

  “네놈…!”

  “왕은 어디냐.”

험악해진 목소리를 끊은 그 말이 남자의 첫 마디였다. 무표정에 걸맞게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넓은 방에 차갑게 스며들었다.

안 된다.

아피아는 가까이 있는 시릴의 몸이 한 번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저것은 멈출 수 없다.

온몸으로 심장이 고동을 치는 게 느껴졌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피부 밑을 찌르는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아까부터 두서없는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경고, 불길한 예감, 초조함. 초조함.

무언가, 이것은.

  “자, 어디냐?”

남자는 흥정이라도 하듯 늘어선 사람들을 둘러봤다.

이제 이 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고, 움직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었다. 포위를 한 위사들조차 창을 겨누고만 있을 뿐, 그 이상으로는 아무 것도 못하고 있었다.

  “어디가 왕이냐.”

그리고 남자가 세 번째로 물은 순간.

여기저기 걸려 방을 비추던 불빛들이 일제히 꺼졌다. 어둠이, 끈적거려 무게마저 느껴지게 만드는 무거운 공기가, 활짝 열린 창문으로부터 스며들었다.

그래도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흐…윽…!”

단 하나, 그 신음만을 제외하고는.

느닷없이 치밀어 오른 격렬한 통증을 견디지 못한 아피아는 자신의 가슴을 짓누른 채 바닥에 무너졌다. 그의 몽롱한 머리를 더욱 거칠게 몰아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안 된다. 안 돼.

어둠의 기척이 이쪽을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온다. 저것이, 이쪽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손을 바닥에 짚었다. 웅크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무방비한 자세로는.

숨이 막힌다. 무릎이 떨린다.

가슴이 아프다. 아프다.

저것은, 내가.

우리들의.

저것은.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저것은, 적이다.

  “아무래도, 너로구나.”

귀 바로 옆에서 사내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왕.”

 

3-6

  “아니…에요.”

그것은 가냘픈, 쉬어버린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침묵이 내려앉은 방에서는 큰 울림으로 번졌다.

  “착각하셨어요. 그분은, 이 나라의 왕이 아니에요.”

아피아는 제게 달라붙어있던 기척이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나라…?”

  “그렇지요. 당신은 이 나라의 왕에게…, 용건이 있지요?”

머리 위에서 울리는 시릴의 목소리는 말하기가 무척 힘든지 떨리고 끊겨 있었다. 숨이 막히기까지 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그게 최대일 터였다.

안 된다.

아피아는 통증을 억누르려 애쓰며 생각했다.

저런 식으로 대처해서는.

  “네가 왕이냐.”

하지만 아피아의 회복은 늦었고, 시릴은 남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명백한 허세였다.

침입해온 상대는 자신이 원하는 대상의 나이조차 모르는 듯했다. 다행스럽게도 국왕은 때마침 자리를 비웠다. 이 남자의 속셈이 뭔지는 몰라도 아버지와 만나게 해서 좋을 건 없다고, 시릴은 판단했을 것이다.

  “너는 역시 기억하지 않는가.”

  “당신처럼 무례한 분, 알지 못합니다.”

타고난 강인함 덕분인지 그녀는 전력으로 계속 대응하고 있었다. 왕에게 필요한 자질이겠지만, 지금으로선 완전히 역효과가 났다.

  “그렇고말고. 사람의 왕.”

남자는 분명 그녀를 표적으로 삼은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외치는 듯한 말투는 그 말이 남자가 자아낸 말이 아님을 보여줬다. 의미를 물어볼 새도 없이, 그는 자신의 말을 이었다.

  “그때도, 왕은 두 사람이었다.”

간신히 고개를 든 아피아의 뺨을 냉기가 두드렸다. 보이지 않는 중에도, 남자가 움직였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남자의 팔이 시릴을 향해.

  “일단은 한 명.”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시릴의 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받아간다.”

순간, 쿵 하고 무거운 것이 닿는 소리, 옷 스치는 소리, 그리고 부드럽고 가벼운 감촉이 내려왔다. 잡아봤더니 얇은 천으로 된 숄…. 시릴이 걸치고 있던 것이리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명백했다. 저것에 곧장 위압당한 바람에, 똑바로 저항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뭘 하고 있어.

아피아의 속에 조바심이 일었다.

납작 엎드린 채 뭘 하고 있어. 자신의 몸이 여의치 못하다는 것쯤이야 이미 알잖아. 무엇을 위한 각오야.

통증을 억눌렀다.

  “…기다려!”

숨을 내쉰 아피아가 일어섰다. 귓속이 울린다. 머릿속이 아찔하다. 손발이 떨린다. 어떻게 봐도 자신은 제대로 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피아는 무너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엇 하나 해내지 못하더라도.

남자의 의식이 다시 이쪽으로 쏠린 것이 느껴졌다.

아피아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셈인가.”

  “데려간다.”

대답은 단순하고 분명했다.

  “시릴에게 무엇을 할 셈이야.”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해 데려가나?”

  “그녀를 위해.”

남자는 대답을 하기는 해도, 너무 단편적이어서 도저히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자연히, 상대방의 말을 반복하는 것 말고는 단서가 없다.

  “…그녀는 누구를 말하는 거지?”

하지만 그렇게 묻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술렁거렸다. 그 안에 담긴 성질은 방금까지의 냉랭한 감촉과 조금 달랐다.

  “알고 싶다면 기억해내라.”

이 남자는, 혹시 초조해진 것일까. 조금 전의 자신과 같이.

문득 기척이 멀어졌다. 남자는 얘기를 끊을 작정인 것 같았다. 여기서 도망치게 하면, 분명 더 이상 잡을 수 없다.

  “시릴을 놔둬! 그렇지 않으면….”

하지만 그런 으름장을 놓아봤자, 서 있는 것만으로 한계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연히 남자는 따르지 않았다. 그의 기척이 삽시간에 어둠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네가 맞이하러 오는 거야, 사람의 왕.”

시릴이 아니라, 그 마지막 말을 두고서.

 

3-7

그리고 예상대로 남자와 시릴은 사라졌다. 겹겹이 에워싼 성벽과 해자는 아무 역할을 해내지 못했고, 하룻밤 수색의 보람도 없이 그들의 모습을 성 안 어디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필연적으로 세발족 일행은 성에 갇혀 실질적인 구금 상태에 놓이게 됐다.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분은 있지만, 의심을 받고 있음이 자명했다.

  “쓸데없는 누명이에요! 저야말로 어떻게 된 일인지 따지고 싶어요! 노린 것은 이곳의 왕이지, 저희들은 말려들었을 뿐인데!”

이후로 토네리는 계속 화를 냈다.

  “다들 그게 세발족이었대요!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해요! 날개랑 귀가 보이지 않았다느니, 좀 더 캐물으면 그런 느낌이었다든가, 아마도 그랬다든가, 애매모호한 대답만 할 거면서!”

무도회의 참석 여부에 관계없이 성 안에 있던 이들은 모두 심문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것은 침입자의 외모가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쳐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방이 어둠에 휩싸였으니 별 수 없다고는 해도.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세발족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싶은 마음이 클 테다.

게다가.

아피아는 토네리의 분노를 반쯤 흘려 넘기며 생각을 돌렸다.

제가 보기에도 그 남자는 귀와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런 말을 꺼내 자신들을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겠지만.

토네리의 반응도 그로 인한 불안 때문이리라. 그것은 저희들의 사주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규탄에 대해 반박할 증거를 갖지 못한 것도 확실하다.

이제 저희들의 처우는 이 나라의 담력에 달렸다. 처형을 속단한대도, 억류 이후 인질 교환 협상을 시도할지 모른다. 물론 리탄트로서는 교환해야 할 인질이 없으니, 원만하게 수습될 리가 만무하다.

최악의 경우, 전쟁이 재개된다.

개국협상이 개전협상이 된다니, 우스갯소리조차 되지 않았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그런 탓에 호리라 국왕의 방문을 거부하기란 불가능해, 리탄트 일행은 최대한의 성의로 그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에게 성의 분위기에 휩쓸린 듯싶은 기색은 없어 다행이었다.

  “이번 일, 곁에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과하는 아피아를 향해, 그도 사과했다.

  “여러분이 걱정할 일은 아무 것도 없네. 오자마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한 나야말로 고개를 숙여야만 하겠지.”

속내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좌우지간 외동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에게 납치당했다. 걱정과 초조함에 짓눌릴 만한 상황이었다.

마주보게 앉아 상대한 그의 얼굴은 역시 어딘가 지쳐 보였다.

  “우선 자네 의견부터 들려주게. 딸의 가장 가까이에서, 그 불한당과 말을 주고받았다고 들었어. …무엇이 내 딸을 유괴했다고 생각하는지?”

솔직한 질문이었다.

동시에, 이쪽의 반응으로부터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질문이었다.

  “그것은….”

아피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으나, 이내 국왕의 눈을 곧바로 마주하며 단언했다.

  “그것은 마라고 생각합니다.”

 

3-8

찰나의 침묵이 자리에 떨어졌다.

  “…그렇군.”

침묵을 깨트린 것은 국왕의 맞장구였다.

  “들어본 바로는, 마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자였다. 다만 어째서 하필이면 이런 때에 마술사가 나타나는 것인지. 과거의 원한이라고 해도 벽보다도 오래 된 얘기인 것을.”

마술사 숙청이 이뤄졌다고 알려진 것은 다류라 시대 중기였고, 당연히 그때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왕가의 핏줄 교체도 있어 눈앞의 딘트 국왕과 당시의 왕 사이에는 깊은 관련도 없을 터였다.

  “원한 같지는 않았습니다.”

대체로 원망하는 상대에 대해 모르는 채로 돌입해 올 생각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남자에게선 그런 강렬한 적의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래도.

아피아는 북받치는 불합리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도 그것은 적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요구도 해 오지 않았다. …짚이는 데가 전혀 없다는 게 솔직한 심경이야.”

지난 며칠간 아무런 성과도 없었을 것이다.

  “불한당의 정체가 분명치 않은 이상, 자네에게 책임을 지울 수는 없네. 여러 가지 일로 당장 보내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조만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걸세.”

  “감사합니다. 시종들도 불안해하고 있었으니 폐하의 말씀에 안심하겠지요. 다만 부탁이 있습니다.”

아피아는 말을 꺼내기로 했다.

  “저만은 이 나라에 남고 싶습니다.”

눈을 약간 크게 뜬 국왕이 아피아에게 되물었다.

  “이 성에 머무르겠다는 말인가?”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정도의 대답뿐, 더 이상의 설명을 듣지 못했는데도 국왕은 그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거듭 물었다.

  “자네에게 생각이 있는 모양이군. 어쩔 셈인가?”

  “약속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볼 생각입니다.”

숙고의 시간 끝에 국왕이 천천히 일어섰다.

  “대답은 다시 하겠다. 잠시 기다리게.”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을 나갔다.

  “아피아 님, 남는다니, 그런…!”

비명을 지르는 토네리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피아는 앞만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중을 오라고 했으면, 마중을 가야겠지.”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보내준댔으니 그냥 돌아가도 되잖아요!”

  “해방인 동시에 강제로 쫓겨나는 거야. 이후로는 벽이 열리지 않을 거고. 그러면 극악한 세발족에 대해 새로운 전설이 호리라 사람들에게 전해지겠지. …그래선 안 돼.”

  “그…, 그래도, 폐하께 송구한….”

  “아버님도 말리지 않으실 거야.”

아버지로서는 몰라도, 왕으로서는 무를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그도 이미 각오했을 것이다.

  “토네리, 초조해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나를 제외한 모두가 돌아간다.”

  “그, 그런, 그런 건….”

  “이건 명령이다. 게다가 세발족이 집단으로 국내를 이동하는 건, 호리라에서 용납되지 않을 테니.”

마치지 않는 이의를 뚝 끊은 아피아가 그녀에게 분부를 내렸다.

  “얘기는 나중에 들을게. 급한 용건인데, 연락을 해줬으면 하는 상대가 있어. 아마 이 소동 덕분에 성에 오고 있겠지. 가급적 은밀하게 접촉하고 싶어.”

그도 엉뚱한 일에 휘말려들겠지만, 이 점은 별 수 없다.

아피아는 문득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슬쩍 쓴웃음을 지었다.

세피아, 이게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말하던 대로 될 것 같아.

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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