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24-1

밤이 오기도 전에, 그는 성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만류할 이유를 찾지 못한 아피아가 홀로 배웅을 나왔다. 저물기 시작한 태양에 의해 나무들이 그늘을 짙게 드리운 안뜰에는 두 사람 말고 아무도 없었다.

  “…원망해도 괜찮아.”

사라리나트는 아피아의 말에 작게 쓸쓸한 웃음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디디스는 주모자의 아들로, 때로는 아버지를 대신하기도 했다. 죄를 묻는 게 당연한 처사다.

그날로부터 2주가 지났다. 나티아가 놀라우리만치 단박에 투항하고, 우두머리를 잃은 일파는 무너졌다. 조용한 결말을 맞이한 이번 일은, 필연적으로 없던 일이 될 터였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분이 필요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아피아가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면 사라리나트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무리라는 걸 알면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그러면서도…, 그러면서도 원하게 돼.”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 말이 지금의 사라리나트에게는 얼마나 무신경하게 들릴지 깨달았다. 새파랗게 질린 아피아를 향해, 사라리나트는 다시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그러네.”

짧게 대답하고는, 땅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미안해, 나는….”

  “아피아는….”

꺼내진 말에 아피아가 입을 다물었다.

  “아피아는 끝까지 디디스에 대해 알아주지 않았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번쯤은 얘기를 들어줘.”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 텐데.”

  “그렇지 않아.”

사라리나트가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으로선 만나봤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또 다시 서로 할말을 찾느라 침묵이 떨어졌고, 이번에는 사라리나트가 먼저 침묵을 깨트렸다.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겠네.”

  “응….”

나티아에게 가담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사라리나트가 한 것은 아피아를 데리러 갔던 것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미성년자인 데다 성에서는 아피아에게 협력했다. 아피아로서도 사라리나트를 탓할 마음은 없었고, 사라리나트에게 뒤집어씌울 죄목 역시 없었다. 하지만 주위가 두 사람의 접촉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마지막 대화가 되리라는 걸 아피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 다물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도무지 말이 나오질 않았다. 사라리나트도 같은 마음인지, 억지로 쥐어짜듯이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려 애썼다.

  “…애초에 나랑 아피아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는데.”

  “그렇지 않아!”

반사적으로 나온 부정의 말은, 안뜰에 가득 울려 퍼질 만큼 큰 목소리를 입고 있었다.

  “내게 사라리나트는 언제나 소중한 친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아. 변할 리가 없어. 설령 사라리나트가.”

당황하는 사라리나트에게 아피아는 열심히 말을 늘어놓다가, 이름을 꺼내면서 기세가 꺾였다.

  “사라리나트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한테는 쭉….”

  “마찬가지야.”

움켜쥐었던 주먹이 문득 따뜻한 것으로 감싸졌다. 사라리나트의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쭉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그 순간, 털어놓을 뻔했던 자신을 발견했다. 그런 얘기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좋지 않은 사태를 일으킬 뿐이라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을 텐데.

  “아피아?”

고개를 숙인 건,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피아는 걱정스레 들여다보는 사라리나트의 등에 손을 감으며 껴안았다. 그것은 사라리나트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 뿐이겠지만.

  “안녕, 사라리나트. 잘 지내.”

그런 빤한 작별인사밖에, 더 말할 수 없었다.

 

24-2

뮤아의 방문에, 닛카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도서실에서 얘기를 할 수는 없는 고로 뒷마당에 나갔다. 듣는다고 곤란해질 얘기는 딱히 아니지만, 성 안에서 주목받는 것도 불편한 탓이었다.

뮤아는 준비된 나무 벤치에 앉아, 가벼운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매일매일, 닛카는 도서실에 틀어박혀있고, 시드는 양조실에 틀어박혀있고.”

  “오늘도요? 미성년 음주는 여기서도 금지죠?”

  “관리인 아저씨랑 친해진 것 같아. 무법자야, 아주.”

덕분에 언제 찾아가도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었다. 본인은 맨정신이라고 우겨대지만, 술 냄새가 물씬 나는 장소에서 그럴 듯한 이야기를 하기는 역시 어려웠다.

  “뭔가 할 얘기가 있었어요?”

  “날개에 관해서라든가.”

  “그건 물어도 소용없잖아요. 그 모양이면.”

마침내 전원이 모이고 난 뒤, 시드의 등을 본 뮤아가 놀랐었다.

  “잠깐만. 뭐야, 그 날개는?”

  “아.”

시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시원스레 대답했다.

  “났어.”

  “벌써 날 리가 없잖아!”

  “…아니, 그렇지만 실제로 났으니까요.”

도움인지 뭔지 애매한 말을 얹는 닛카에게 의뭉스러운 시선을 보냈더니, 닛카는 이렇게 변명했다.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따져볼 틈을 놓쳤어요.”

확실히 너무나도 평범하게 원 상태로 돌아와 있었기 때문에, 무심코 흘려버리기 좋은 상황이었다. 이제는 오히려 없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무슨 일 있었지?”

질문을 받은 시드가 아주 잠시 동안만 눈을 굴리더니, 이내 단호하게 내뱉었다.

  “없어.”

  “없겠냐고!”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는데 꾸물꾸물 자라나는 쪽이 더 무섭다. 대답을 듣지 못한 뮤아가 끈질기게 따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다’로 일관하는 태도였다.

또 다른 당사자일 아피아는 바쁜 탓에 좀처럼 짬을 내지 못해, 아직까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뭐, 사람들은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는 거예요.”

  “시드를 사람의 범주에 넣고 싶지 않은데.”

역시나 지원하는 건지 애매한 닛카의 중재를 뮤아는 딱 잘랐다. 닛카가 어깨를 으쓱하며 계속했다.

  “그런가요? 그야 그만큼 터무니없긴 하지만, 그럴 수 있어도 별로 이상하진 않잖아요.”

  “닛카, 상당히 이상한 물이 든 것 같아.”

한숨과 함께 그렇게 핀잔을 줬지만, 뮤아로서도 닛카가 말하는 바를 왠지 모르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시드는 이상하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함에 점점 익숙해졌다.

  “회복이래서 말인데, 발은 좀 어때요?”

  “이젠 제법 평범하게 걸을 수 있어. 좀 더 상태를 봐야겠지만.”

화제를 바꾸는 닛카 때문에, 뮤아는 붕대를 감은 왼발로 땅을 걷어찼다. 뼈가 제자리로 돌아갔는지, 저리는 듯하던 아픔도 이제는 다 사라졌다. 어른 한 명을 매달고 있었으니 당연하지만, 뼈와 힘줄이 많이 상했었다고 한다.

그래도 유우족이라는 게 다행으로, 비교적 일찍부터 돌아다닐 수 있었다. 떠오르는 타이밍만 잘 잡으면, 체중을 거의 부담하지 않은 채로 지팡이를 짚는 게 가능했다. 덕분에 회복도 빠른 것 같았다.

  “…슬슬 때가 됐네요.”

그래서 닛카의 말에 수긍했다.

  “응…, 뭐. 그렇지,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는 없으니까.”

  “저희는 결국 이 나라의 침입자니까요.”

옆 나라의 사절로서 대해지고는 있어도, 신기해하는 시선을 받는 건 별 수 없다. 오래 지낼수록 허술한 데가 드러날 우려도 있었다.

  “그래도 닛카는 여기서 더 지내고 싶잖아. 그럴 권리도 있는 것 같던데.”

귀한 서적들을 제한 없이 읽을 수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아쉽기는 하지만. 역시 무리예요. 다 같이 돌아갑시다.”

  “그런가.”

맞장구를 친 뮤아는 닛카가 손에 든 책을 들여다봤다. 그 표지에는, 타이카=솔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24-3

그 이름을 듣자마자, 테피아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 정도로 분명한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던 닛카 역시, 덩달아 당황했다.

  “테리카=타이카=솔의 아들이라니!”

  “알고 계신가요?”

  “당연하지. 그는 나보다 어리지만, 나보다 몇 배나 뛰어난 식견을 가진 자였어.”

  “명령을 받았다고….”

뮤아로부터 들은 말에 대해 묻자, 테피아가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내가 그를 벽 너머로 보냈다. 연락이 두절된 지 오래였는데…, 그래. 그렇게 된 거로군.”

마지막에는 혼잣말 비슷한 것이 되어, 창 밖에 내다보이는 호수로 시선을 돌렸다. 까마득한 곳에 벽이 서 있을 것이다.

구출된 이래 한동안은 요양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던 테피아도, 순조롭게 회복돼 침실 안에서의 알현이 허락됐다. 물론 세 사람 전부 불려갔지만, 귀찮은 이야기를 싫어해서인지, 달아나버린 시드는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재차 이름을 댔을 때, 닛카가 찾았던 답이 돌아왔던 것이다.

  “아네키우스는 참으로 위대한 인도자로다! 이러한 형태로 그의 사명이 완수되리라고는.”

방 한구석에 대기하고 있는 아피아에게 확인의 시선을 보내자, 아피아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닛카는 계속해서 물었다.

  “괜찮으시다면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만, 아버지께선 어떤 목적으로 벽 너머에 보내졌나요?”

  “당시의 그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장소를 필요로 하고 있었기에 조사를 맡겼다. 아무 것도 모르고서 벽을 열 수는 없으니까. 그의 보고는 우리에게 벽 너머에 대해 많은 지식을 주었지.”

예상하고 있던 대답이었는데도, 미묘한 위화감 때문에 닛카는 눈살을 찌푸렸다. 집에 남겨진 아버지의 흔적을 생각해보면 진실일 것이다.

  “그럼 방금 말씀하신 사명이라는 것은?”

하지만 조금 전의 그 혼잣말. 무엇이 어떻게 이뤄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뜸이 들었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대답해줄 수 없군.”

돌아온 것은 거부의 말이었다.

  “하지만, 결코 자네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네키우스에게 맹세하네.”

그렇게 나오면 더 따질 수도 없다. 물러나려는 닛카에게 테피아가 말을 보탰다.

  “성 내 도서실에 그가 젊었을 적 기록한 책들이 있을 것이다. 말은 해뒀으니, 관심이 있다면 찾아가 보도록.”

그렇게 얻어낸 허가를 최대한 활용해, 서가를 뒤적거린 끝에 찾아낸 책을 닛카는 계속해서 지니고 다녔다.

  “뭔가 알아냈어?”

  “아뇨, 별로. 식물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는 건 집에 남은 기록으로도 알고 있었고요.”

그래도 자신의 뿌리가 명확해진 것은 든든한 기분일 것이다. 아버지 쪽의 친척도 있는 듯하지만, 닛카는 만날 생각은 없다고 단언했다.

  “이래저래 곤란할 뿐이잖아요.”

벽 얘기는 아직 비밀이다. 이렇게 된 이상, 어디서부턴가 차츰 나라 전체로 퍼지겠지만.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성을 그대로 따랐네?”

혼인을 하면, 양자의 본가 명을 합쳐서 새 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관례였다.

  “뭐, 간단히 말하자면, 저희 부모님은 아네키우스에게 인정받은 결혼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아…, 미안.”

  “사과할 일은 아녜요. 궁금해하는 게 당연한데.”

닛카는 사과를 슬쩍 넘기며, 어색해하는 뮤아에게 되물었다.

  “호리라로 돌아가면 어쩔 생각이에요?”

  “순례 도중이었으니까, 역시 다시 성산으로 가려고. 닛카는 어쩔 거야? 돌아가나?”

그의 목적이 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이었다면, 이미 달성한 것이었다.

  “아뇨, 저도 이럴 생각으로 동행한 거니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가게 해주세요.”

  “그거야 물론 환영이지만.”

  “어차피 이젠 갈 곳도 없고요.”

  “응?”

  “마을을 떠날 때, 가재들은 적당히 처분해 달라고 해둬서요. 없어졌거나 다른 사람이 쓰고 있겠죠.”

마지막까지 담담하게, 닛카는 그렇게 말했다.

 

24-4

슬슬 돌아가자는 제안에, 시드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역시 술에 취해 지내는 나날도 지겨워진 모양이었다.

반면, 그 소식을 들은 세피아는 금세 침울해졌다.

  “저…, 조금만 더…, 적어도 진정될 때까지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세피아의 마음은 잘 알았다. 이곳을 떠날 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게 두 사람과의 이별이었다. 왕의 대리로서 사태를 수습하느라 바쁜 두 사람과는 제대로 대면할 기회도 손에 꼽았다. 이대로 헤어지게 된다면, 다음이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뮤아는 오히려 그쪽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섣불리 시간을 보내다간 헤어지기가 더욱 어려워질 터였다. 언젠가는 헤어져야만 하니까.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슬슬 이상한 소문도 생겨나는 듯했다. 복도를 지나고 있는데, 슬며시 다가온 사람으로부터 약을 나눠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 정도라면 괜찮지만, 자칫했다간 갑자기 습격당할 수도 있다.

그보다도, 언제까지 기다려야 진정될지 또한 모르는 것이었다. 일 년이 지나도 무리일지 모른다.

  “응, 그러네….”

세피아로서도 그런 사정은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끈질기게 매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흔들리는 눈을 아래로 숙일 따름이었다. 세피아를 격려하기 위해, 뮤아는 그의 어깨를 얼싸안았다.

  “벽이 열렸을 때는 제일 먼저 올게. 왠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아, 그렇지?”

이번 소동으로 반대파의 색출도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기회를 보던 중도 세력들도 결과를 보고 국왕파로 기우는 것 같았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왕래가 가능해질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벽이 아예 무너지는 날마저 올지도 모른다.

몇 달 전에는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선뜻 받아들이는 스스로가 있다. 흥분도, 두려움도 없다. 그래, 그런 건 아무려면 어떤가.

  “뮤아는….”

묻는 소리에 뮤아가 다시금 눈앞의 작은 소년을 들여다봤다.

  “뮤아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

당돌한 질문이 뮤아에게 놀라움과 약간의 왼발 통증을 안겨다줬다. 뮤아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무섭다고 할까, 죽고 싶지는 않지만. 왜?”

  “…돌아오면 만날 줄 알았던 사람들이 없고, 이제 다시는 못 보게 됐잖아. 겨우 왔는데 다른 곳인 것 같아.”

뮤아로서는 완전히 동떨어진 사건이었다. 성 안에서 전염병은 이미 지나간 비극으로 다뤄졌고, 손님의 눈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세피아는 알고 지내던 얼굴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매번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상처는 모든 곳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죽음. 갑작스러운, 불합리한 죽음.

낌새를 느끼고, 문득 눈을 떠보면, 아무도 없는 공간을 통해 새삼스럽게 그 부재를 알게 된다.

  “너희는 산에 올라 신의 품에 이르리니. 그것은 영광의 원, 하늘의 뜰. 평온과 자비가 모든 것을 치유하리라.”

사람은 어디에 있든, 돌이킬 수 없는 성산으로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목표로 하는 바가 같다면.

  “괜찮아. 다시 만날 거야.”

뮤아는 세피아의 머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줬다. 자연스럽게 뮤아의 품에 파고드는 세피아의 중얼거림은, 그녀의 귀에 닿지 않았다.

  “무서운 건 내 일이 아니야.”

입 안에서, 작게, 사그라질 정도의 목소리로.

  “내 일이 아니야.”

 

24-5

결국 귀환의 이야기를 한 뒤 실행에 옮기기까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들었다. 대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돌려보낼 수 없다며 만류하는 테피아 측과 사양하는 뮤아 일행이 합의한 지점은, 성 안에서의 만찬이었다.

어떻게든 온 나라를 불러들이는 무도회에서 거기까지 규모를 줄이는 데 성공해 지친 뮤아를 두고, 닛카가 이렇게 평가했다.

  “딱히 저희를 위해서만은 아닐걸요. 체면 문제도 있고, 자기들이 승리 이후 건재하다는 주장도 하고, 또 벽 건너편에 있는 존재들은 좀 다르긴 해도 같은 인간이라고 간단하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잖아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닛카를 쳐다보는 뮤아에게,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왕의 일을 한다는 건 대단하네요.”

의도가 어쨌든, 한다고 결정된 일에는 뮤아도 나름대로 기대가 생겼다. 일단은 의상부터가 늘 입던 것과는 천지 차이다. 마음대로 써도 좋다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주눅이 들어 찾지 않았던 의상실에, 아피아와 함께 들어갔을 때도 절로 눈이 빛났다.

  “사실 치수를 재서 처음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수선하는 정도밖에 안 되겠지만.”

놓여 있는 의상은 의상 담당들이 만든 견본이거나, 질은 좋아도 사용되지 않은 물건들이 대부분인 듯했다. 그래도 뮤아가 보기에는 충분히 휘황찬란한 것들이었다.

  “처음부터라면 어려우니까 오히려 이쪽이 좋을지도.”

여러 가지 천을 날개에 걸쳐본다든가, 상상하기 힘들다. 만들려고 해봤자 수수한 결과물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저기, 이건 어때?”

즐거워하며 의상을 뒤지던 뮤아가 옷 하나를 골라 아피아에게 보였는데, 아피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남성용이야. 수선할 시간을 생각하면, 일단은 여성용으로 고르는 게 좋겠어.”

  “아, 그렇구나. 으응, 왠지 구분하기 힘드네. 호리라에선 남자가 이런 걸 입지는 않거든.”

잘 살펴보니 확실히 가슴과 허리 부분이 평탄하다. 막상 입으면 태가 살지 않아 보기에도 별로일 듯싶었다. 투덜거리며 옷을 내려놓던 뮤아는 문득 어떤 사실을 발견하고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까 아피아는 여성복 입어도 되지?”

정면으로 시선을 받은 아피아가, 예상 밖의 기습에 물러섰다.

  “있잖아, 아피아 옷은 어떤 거야? 좀 더 화려해? 여성스러운가?”

  “어, 음, 나는 아직 미성년자고, 주로 입는 게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이랑 비슷한 거?”

  “음, 뭐, 그런 느낌이지.”

바느질의 상태나 소재는 고급스럽지만, 전체적인 구조는 소극적인 형태였다. 좀 더 눈에 띄는 자리를 위한 옷을 만든다고 해도, 아마 장식이 약간 추가되는 정도일 듯했다.

  “에―, 시시하게. 별로 이상하지 않잖아, 이런 거 입어도.”

뮤아가 얇은 천이 겹쳐진 옷 하나를 내밀자, 아피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달아났다.

  “이상할 건 없지만…, 그런 건 익숙하지 않아서 좀.”

  “그럼 이번 기회에 해보자.”

동료를 원하는 뮤아의 권유는 억척스러웠다. 아무튼 쭉 그룹 내의 유일한 여성이라는 상황에서 지내온 탓에, 의식하지는 못해도 그런 방면의 울분이 쌓여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어울릴 거고.”

  “웃음을 사니까….”

  “누가 웃겠어.”

  “바보 취급에 어이없어할걸, 분명히….”

  “그러니까, 그런 어른스럽지 못한 반응을 대체 누가….”

말하던 뮤아는 문득 눈치 챘다. 그럴 만한 놈이 있다. 딱 한 사람.

  “…혹시 신경 쓰고 있어?”

그대로 물어봤더니 아피아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지만 눈이 흔들리고 있다.

  “아―. 그런 건가. 아―. 그렇군요―.”

  “아니, 아냐….”

  “뭐가 아닌데?”

싱글거리는 뮤아를 상대로는 입을 열수록 손해였다.

  “그러면 더욱 더 입는 게 좋겠는데. 못되게 구는 건 아니니까. 어떤 게 좋을까―.”

이미 충분히 못됐다고 생각하면서도, 아피아는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24-6

그런 일이 있었던 탓에, 당일 뮤아의 눈총이 아피아로서는 제법 따가웠다. 하지만 입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으니 입지 않는 것이다. 책망 받을 까닭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뮤아는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바빠 이쪽을 신경 쓸 겨를은 없는 듯했다. 여태 멀리서 지켜만 보던 사람들이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몰려든 것이었다. 다들 벽 너머의 인간이 흥미로운 것은 당연하고, 지금 혼자인 시드는 그 성격 때문에 말을 걸기가 어렵다. 자연히 질문은 뮤아에게로 쏟아졌다.

닛카도 뮤아랑 비슷한 조건일 텐데, 어째 요령 좋게 처신했는지 소란으로부터 벗어나 여러 문관들과 무언가 논의하고 있는 듯했다. 덕분에 그에게 갈 질문마저 뮤아가 떠맡고 있는 셈인데.

나도 뮤아의 도움을 받고는 있구나, 아피아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평소보다 찾아오는 얼굴의 수가 적었다. 그들이 필사적이지 않은 것은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자신의 책임이지만, 마음이 개운치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뭐, 적다고는 해도 끊임없기는 하다. 이런 자리에서는 업무의 일환이고, 부모의 상태가 좋지 않은 만큼 도맡아야 한다. 이별 때문인지 세피아도 요즘은 기운이 없어 보여 걱정이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적당히 대화를 나누던 아피아는 문득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그 앞의 벽에 서 있는 인물과 눈이 마주쳐 저도 모르게 기가 눌렸다.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표정을 한 시드가 노려보고 있었다. 왠지 적의마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이런 자리를 싫어한다는 것쯤은 이해하지만, 내뿜는 살기를 받는 것도 곤란하다. 별 도리가 없으니 참아줬으면 좋겠다.

그 전에, 시드가 참석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분명히 거부할 줄 알았다. 생각해보니 시드와 제대로 접하고 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터놓고 말해서, 그 소동 이후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만나봤자 분명 할 말도 없겠지만.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피아 님?”

눈앞의 상대로부터 의아해하는 물음을 받고 나서야 아피아는 정신을 차렸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어 보이며 대화를 마치고, 다시 벽으로 눈을 돌렸더니 시드의 모습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실내를 이리저리 둘러봐도 발견되지 않았다. 돌아가 버렸는지.

  “아피아―, 누구 찾고 있어?”

갑자기 등에 무게가 실렸다. 목소리, 호칭, 목덜미를 간질이는 천의 촉감 덕분에 상대의 정체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뮤아, 왜 그래?”

  “여차저차해서 겨우 빠져나왔거든.”

뮤아의 숨결에 담긴 술 냄새에 아피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조금 마셨구나.”

미성년이니 권하지 말라고 해뒀는데도, 성별이 있어 성인이나 다름없이 대해지고 시드가 벌컥벌컥 마셔대는 덕에 별로 설득력은 없었던 모양이다.

  “축제 때는 예외잖아.”

  “축제인가, 이거.”

  “비슷한 거라고 쳐―.”

비슷한 것…이려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피아에게 뮤아가 더욱 더 몸을 기댔다.

  “정말이지―, 피곤해. 나는 거 보여줘, 보여줘, 해봤자 이런 데서 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뭔가, 미안.”

  “아피아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

시드의 일도 있고, 슬슬 뮤아와 닛카도 내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일 출발할 거라는데, 일정을 망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 내일이면 작별이다. 새삼스럽게 떠오른 그 사실이 아피아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마지막인데도, 이렇게 바쁘게 흘러간다.

  “아, 그렇지. 맞아!”

그러나 감상적인 기분은 갑자기 귓가에 들려온 외침에 의해 흩어졌다. 뮤아에게 시선을 돌렸더니, 똑같이 정면에서 쳐다보는 시선과 함께 대답이 돌아왔다.

  “세피아가 불렀어.”

  “세피아가?”

특별한 용건을, 그것도 직접이나 시종을 시켜서가 아니라, 뮤아를 통해 전달하는 것을 예상치 못한 아피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여기, 여기.”

뮤아가 끌고 가는 대로 따라갔더니, 도착한 그곳은 무도회장에 인접한 발코니였다. 달빛과 창살 틈으로 흘러든 약간의 빛이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확실히 세피아가 있었다. 다만, 혼자가 아니었다.

  “자, 그럼.”

굳어버린 아피아를 놓고, 뮤아는 단박에 발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세피아도 아피아 옆을 달려서 빠져나갔다.

  “자, 잠깐, 세피…!”

부르는 게 분명히 들렸을 텐데, 무시당했다. 함께 무도회장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의 등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뒤에서 불만이 들려왔다.

  “그래서 뭔데?”

외면하고 있어도 아까처럼 사라져 줄 리는 없으므로, 체념한 아피아는 무뚝뚝한 표정을 지은 소년에게로 돌아섰다.

 

24-7

하지만 별로 할 말이 없다. 저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기…, 어땠어?”

  “재미없어.”

무엇을 묻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괴로운 질문을 시드가 뚝 잘랐다.

  “아, 음.”

무엇을 염두에 둔 대답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시드에게는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같았다.

  “후딱 나가버려야지, 이딴 곳.”

나가면 다시는 오고 싶어 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시드는 뮤아랑 같이 가는 거지?”

  “그럼.”

쓸데없는 질문이라는 듯이 코웃음을 치는 시드 덕에, 아피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드라면 괜찮겠지만, 조심해. 그렇지, 성산인가. 모두랑 같이 보고 싶었는데.”

난간에 팔꿈치를 괸 채 남쪽을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짧은 여행이었다. 자신의 여행은 이제 끝난 것이다.

  “뭔 소리야 너? 곧 보러 갈 거면서.”

  “응?”

  “준비 잘 해둬. 그거 잃어버리지 않게 좀 더 잘 달아두고. 성가시잖아.”

  “어, 응?”

그래서 시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을 때, 여간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잠깐…, 잠깐만. 혹시 나도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조심스레 물어봤더니, 시드가 눈썹을 치켜 올려,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아피아도 깨달았다.

  “도망칠 셈이냐?”

  “아니, 셈이고 뭐고….”

어떻게 말해야 알아들을지 막막하다.

  “그야 나는 여기…, 모두는 순례 중이고….”

  “순례 같은 거 애초에 관심 없어. 네가 없으면 따라오지도 않았다고.”

순식간에 머리로 피가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시드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당황한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아, 뭐, 그렇구나. 시드는 나를 이겨야 하니까. 평생 무리지만.”

아피아는 당황스런 마음을 감추기 위해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았다. 반면, 시드는 기분이 나쁘다는 양 콧방귀를 뀌었다.

  “시끄러―. 그러니까, 같이 가는 거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의 태도 덕에 아피아의 동요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말도 안 된다. 설령, 만에 하나, 그런 의미로서 말하는 것이라고 해도 제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의 무게가 들뜬 마음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무게를 잊어버린 게 이상했다.

  “가지 않아.”

아피아가 시드의 권유를 단 한 마디로 거절했다.

  “하?”

그러자 시드는 그 냉담한 대답에 눈을 부릅떴다.

  “잘 생각해봐. 갈 수 없다는 거 알잖아.”

  “왜.”

  “왜냐니…, 그런 일이 있은 뒤인데 내가 멋대로 돌아다니는 건 불가능하고.”

  “그냥 알아서 나오면 되잖아. 나도 그랬는데.”

  “그랬던 게 실수라고 말하는 거야. 벽을 넘었던 것도 사태가 급해서였지, 마음대로 들어가면 침입이야. 국가 간의 문제가 될 수 있어.”

  “그게 뭔 상관이야.”

  “상관없는 게 아니니까.”

말이 점점 적당해진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고, 나무라는 말들은 계속해서 나왔다.

  “네가 너무 무책임한 거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게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몰라.”

  “말도 안 돼. 못 가는 건, 못 가는 거야.”

  “와.”

  “안 가.”

  “왜. 가자.”

  “끈질겨. 안 간다고 했잖아.”

그러자 시드는 대놓고 불만스럽게 아피아를 노려보며, 마침내 이렇게 선언했다.

  “승부를 보자.”

 

24-8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거야?”

  “저한테 물어봤자 몰라요.”

  “좀 더 뭐랄까, 그럴…, 자리를 차려줬는데 보람이 없다고 할까.”

취해서인지 자꾸만 투덜거리는 뮤아를 내버려두고, 닛카는 자리의 중앙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에는 움직이기 쉬운 복장으로 갈아입은 시드와 아피아가 대치하고 있었다.

  “칼 써도 돼. 변명하기 좋잖아.”

  “시끄러. 너한텐 맨손으로도 충분해.”

  “뭐든 상관은 없는데, 성은 별로 부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알 반가.”

양측 다 갑자기 정신을 차려 화해하는 일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뭐, 뭐라고 할까. 그런 행복도 있는 거니까요.”

  “뭐가―.”

  “오랜만에 시드가 즐거워질 것 같아서.”

방해 받지 않도록 훈련장 입구를 위사가 지키도록 해놓은 덕분에, 모닥불의 불빛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섯 명뿐이었다. 이번에도 심판을 맡은 세피아가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규칙은 하나! 항복하면 진다!”

  “그래도 괜찮아.”

시드가 제시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승리 조건을 아피아는 받아들였다.

  “어라? 그럼 시드가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텐데.”

뮤아의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참견할 틈도 없이, 승부가 시작된 탓이었다.

개시 신호와 함께, 시드가 우렁차게 외치며 파고들었다. 여전히 배운 것은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런 공격이 명중할 리도 없어서, 살짝 몸을 돌린 것만으로 피하고, 엇갈려가는 등을 팔꿈치로 찍었다. 그러나 시드는 조금 비틀거릴 뿐, 금방 자세를 바로 잡았다.

  “좋아!”

외치는 시드를 향해, 아피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늘 말했지만 튼튼한 것만이 장점이야. 그런 식으로는 날 이길 수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이해하는 거지?”

  “해봐라, 아무리 들어도 항복 안 할 거니까.”

  “그렇겠지.”

동의하는 것으로 시드의 도발을 흘려 넘기고, 흐뭇하게 웃는다.

  “하지만 의식을 잃으면 항복이나 다름없잖아. 처음에 그런 꼴을 보였던 일은 잊지 않았지? 정의의 편을 자처한 주제에 일격에 당했으면서.”

똑같이 돌려준 도발을, 시드는 드물게도 웃어넘겼다.

  “바보냐, 너. 그런 속보이는 짓에 넘어갈 줄 알고.”

  “아, 그래.”

말을 마친 아피아가 곧장 땅을 딛고서 시드와 거리를 좁혔다. 갑자기 달려드는 것을 시드가 허둥지둥 피했으나, 기세를 몰며 공격해오는 아피아를 그렇게 해서 뿌리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피아는 시드를 따라잡아 여러 대를 때리면서 덤벼온다.

일단은 뒤로 뛰어 그 공격을 헛손질로 만들었는데, 숨 돌릴 틈도 없이 아피아가 다시 달려들었다. 그 순간, 뭔가 부딪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날려, 보고 있던 뮤아 쪽의 시야가 잠시 가려졌다.

그리고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결말은 이미 났다.

흙이 묻은 것은 아피아였다.

시드가 아피아를 돌바닥에 쓰러트린 채, 몸으로 누르고 있었다.

 

24-9

의외의 결과를 목도한 뮤아가 놀라 외쳤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닛카, 봤어?”

  “아피아가 발밑을 찼는데 시드가 그걸 뛰어서 피했던 데까지는.”

지금까지 자주 그랬던 것처럼, 아피아는 시드가 균형을 잃게 해서 움직임을 봉쇄할 셈이었던 것 같다. 좀 전의 도발은 턱이나 발 중에 어느 쪽으로 달려들지 혼동하게 만들기 위한 작전이었던 듯했다. 공격을 피했다는 건, 그 의도가 읽혔다는 뜻인데.

  “응, 그래도 처음 찬 건 먹혔어.”

두 사람의 대화에, 결국 처음 개시 선언 이후로 말이 없던 세피아가 끼어들었다.

비키도록 만들기 위한 첫 수였다. 시드가 뛴 것도 예상한 대로였다. 걷어찼던 발을 축으로 삼고서, 아피아는 다시 반대쪽 다리를 써서 공격했다.

  “두 번째 공격은 시드의 착지에 맞춰서 들어갔어. 보통은 피할 리가 없는데, 그렇지만….”

  “아, 알았다!”

뮤아가 손뼉을 쳤다.

  “시드가 착지하지 않았던 거구나.”

세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 수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몸은 그 인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시드는 지금까지의 승부에서 그 점을 사용하지 않았었다. 의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본인도 생각해내지 못했을 뿐이겠지만.

그렇게 생각지 못했던 흐름에 자세가 무너진 아피아의 어깨를 시드가 잡는다. 그 뒤로는 힘껏 자빠트리면 끝이다.

어딘가 안심한 얼굴인 세피아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번엔 시드의….”

  “…네 승리야.”

마치 동생의 말을 이어받듯이, 아피아가 선언했다. 그 말을 들은 시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떠냐. 봐라. 그럼.”

  “이제 충분하겠지. 내가 갈 이유도 없어졌고.”

무슨 말을 들었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소가 굳어지기까지 약간의 틈이 있었다.

  “아니, 너, 내가 이겼으니까 같이….”

  “그런 약속은 없었어.”

아피아의 말에 시드는 순간 반론이 나오지 않는지 그저 입을 벙긋거렸다. 얼굴이 분노로 벌게지고 있었다. 확실히 약속해 두지는 않았지만, 이야기의 흐름으로부터, 이기면 뜻대로 될 거라고 시드가 믿어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건 아피아가 약았네.”

지금부터 일어날 다툼을 상상한 뮤아가 이마를 짚었다.

  “너…, 그럼, 일부러….”

  “일부러 진 건 아냐. 그거야 직접 상대한 네가 더 잘 알잖아.”

분노로 말을 잇지 못하는 시드를 향해, 아피아는 끝까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것이 되려 시드의 화를 부추긴 것 같았다.

  “뭐, 이겼으면 ‘이겼으니까 안 가’라고 해도 됐고.”

  “우와, 치사해.”

  “처음부터 조건은 제대로 달아야 한다는 교훈이죠. 치사하지만, 싸우기 전부터 시드가 졌어요.”

하지만 아피아가 이겼으면 얘기는 더 간단해졌을 것이다. 투덜거리면서도 끝내 물러설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이래서야 납득할 리가 없었다. 수긍할 수도 없지만, 반박할 말도 찾지 못한 듯했다. 시드는 뭔가 말하고 싶은 얼굴 그대로 굳었다가, 곧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아피아를 내팽개치고 훈련장의 출구로 달려갔다. 구경꾼들이 끼어들 틈도 없었다.

  “어…, 잠깐. 봤어?”

  “…봤어요. 따라갈게요.”

  “부탁해.”

그쪽은 닛카에게 맡겨두기로 하고, 뮤아는 아피아에게 다가갔다. 아피아는 아직 드러누운 채로, 방심했던 듯한 모습이었다. 역시 예상 밖이었을 것이다.

설마 반쯤 우는 상태의 시드라든가, 그런 장관을 눈앞에서 볼 줄은 몰랐다.

  “괜찮아?”

뮤아가 아피아를 일으켜세우고, 등과 머리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줬다.

  “아피아…, 함께 못 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래도 내일 배웅 정도는 해줘. 아무리 그래도 불쌍하잖아.”

  “응….”

더러워진 한쪽 뺨을 손등으로 비비며, 아피아는 석연찮은 대답만을 할 뿐이었다.

 

24-10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아네키우스의 은혜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지에 쏟아져 마를 쫓아냈다. 하지만 사람의 등에 얹힌 우울함까지 털어주지는 않을 듯싶었다.

출발을 미룰 생각도 해봤는데, 그런다고 사태가 호전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대체로 본인이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젯밤에는 그냥 뛰쳐나가려는 걸 말리느라 여간 고생한 게 아니었다고, 닛카가 말했을 정도니까.

오늘도 일단 같이 있기는 해도, 하루 종일 엉뚱한 방향만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다. 마지막 알현에서도 그런 태도라 조마조마했지만, 아피아 형제가 미리 일러뒀는지 책망 받는 일은 없었다. 섣불리 말을 걸었다간 금세 물려버릴 듯싶은 분위기 탓도 컸겠지만.

  “고마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모두에게 감사히 생각하고 있어.”

시드의 초췌함과는 비교할 수 없으나, 정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배웅하며 그렇게 말하는 아피아도 마음 탓인지 피곤해 보였다. 시드를 보지 않으려 한다는 듯한 인상도 받았다. 반면 아피아 옆에 선 세피아는, 그와 대조적이게 무언가 호소하는 것만 같은 눈으로 시드를 빤히 보고 있었다.

  “모두와 함께 해서 무척 즐거웠어.”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이제, 잠깐. 시드, 어쩔 수 없잖아! 마지막인데 인사 정도는 해!”

어떻게든 원만히 수습해보려고 질타를 해도, 반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루퉁하게 정문을 향해 나아가 버렸다. 한 대 때려줄까 주먹을 쥐는 뮤아의 손을, 아피아가 지그시 잡으며 외쳤다.

  “시드.”

처음 부른 것은 무시됐지만, 어깨가 반응하는 것에서 들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피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시드, 약속이야.”

마침내 걸음을 멈춘 시드를 향해, 약속한다.

  “지금은 갈 수 없어. 하지만, 네가 다시 여길 찾아오면…, 그때는 반드시 같이 갈게.”

그 뒤로 멈춰선 잠깐의 시간은, 아마도 진정을 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겨우 돌아본 시드가 눈을 찌푸리며 거듭 확인했다.

  “정말이지.”

  “아네키우스에 맹세코.”

  “아네키우스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좋아, 그 말 잊지 마.”

  “잊지 않을게.”

그 순간, 작별인사도 없이 발길을 돌려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 시드의 등을 보고, 아피아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말해두겠는데, 일단 나갔다가 지금 다시 돌아오는 걸로는 안 되니까!”

만약을 위해 못박아뒀더니, 시드가 갑자기 멈춰서 크게 혀를 찬다. 아무래도 그럴 작정이었던 것 같다. 얕은꾀만은 참 잘도 부린다.

  “알았지, 기억해. 잊어버리면 용서 안 해.”

그렇게 서정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대사를 내뱉고는 다시 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등에 대고, 아피아도 작별 인사를 던졌다.

  “…잘 지내.”

  “좀 더 그럴듯한 인사말도 있잖아. 진짜 바보네.”

더 이상 말릴 생각도 사라졌는지, 뮤아가 허리에 손을 얹고서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국경까지 안내를 맡기로 한 위사는 난처해하더니 서둘러 시드를 쫓아갔다.

  “괜찮아. 그런 데만은 집념이 강해서 꼭 올 거야.”

그것도, 나라를 여는 것과는 관계없이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벽을 부수고 쳐들어올 것이다. 분명 어김없이.

아피아가 곤란한 미소로 대답하는 중에도, 시드의 모습은 점점 작아졌다.

  “우와, 정말 가야 돼. 아피아, 세피아, 꼭 다시 만나. 무조건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런 느낌이 들어.”

  “벽이 열리는 날을 기대할게요. 실례했습니다.”

뮤아가 둘을 끌어안고, 닛카가 악수를 하고, 각자 이별을 아쉬워했다. 그런 뒤 먼저 간 시드를 놓치지 않게끔 종종걸음으로 다리를 달려간다.

손을 흔들며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던 아피아는, 갑자기 소매가 붙들리는 바람에 옆으로 시선을 내렸다. 거기서 세피아의 굳은 얼굴을 맞닥뜨렸다.

  “아직 늦지 않았어. 아직 따라잡을 수 있어.”

  “세피아.”

그는 알고 있다. 조금 전의 약속이, 지금 자신의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그래서 이렇게 아슬아슬한 순간까지도 아무 말 못하고 있었다.

아피아는 동생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는 여기 있고 싶어. 아버님과 어머님, 세피아와 함께 있고 싶어. 그러니까 안 가. 가지 않을 거야.”

그렇게 부드러운 타이름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자, 세피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정말 언제나….”

그 다음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세피아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아피아는 다리 건너편을 올려다봤다.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들의 머리와 옷을 만지며 스쳐갔다.

 

그 뒤에 벌어진 커다란 소동 탓인지, 후세의 역사서는 이 한 해 왕성에서 벌어진 사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리탄트 12대 국왕 티세도의 즉위 이후, 벽의 존재가 유명무실해지는 일련의 흐름은 바로 이것이 발단이었다.

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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