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x프리츠
*패러디 개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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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금달 육 개월 된 토끼입니다. 내 이름은 토식이고요. 우리 방 식구라고는 세상에서 제일 이쁜 우리 주인님과 단 두 식구뿐이랍니다. 아차, 큰일났군, 애새끼를 빼놓을 뻔했으니…….
달팽이를 좋아하는 그 애새끼는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방에는 잠잘 때 외에는 별로 붙어 있지 않아, 어떤 때는 한 주일씩 가도 어린애 코빼기도 못 보는 때가 많으니까요. 깜박 잊어버리기도 예사지요, 무얼.
우리 주인님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둘도 없이 곱게 생긴 우리 주인님은, 금년 나이 백아흔다섯 살인데 호구랍니다. 호구가 무엇인지 나는 잘 알아요. 내가 버젓이 있는 앞에서도 사람들이 주인님더러 온갖 부탁을 하고, 때문에 주인님이 나랑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되지를 않으니까, 우리 주인님이 호구인 줄을 알지요. 주인님은 나를 정말 좋아하는데, 시간만은 나질 않아서요. 그래서 우리 주인님이 호구라는 거예요.
주인님 말씀을 들으면, 다른 주인님은 내가 이 집에 들어오기 몇 주 전부터 바쁘대요. 우리 주인님하고 알게 된 지는 어림잡아 이백년이고요. 우리 주인님들이 헤어진 것도 어디 머나먼 나라에서였는데, 마침 이 캠프에 함께 오게 되었기 때문에, 주인님은 부끄럽지만 여기 있고 싶다 생각했고-바로 이 집은 주인님 말씀대로라면 ‘훨씬 더 여기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많다나 봐요-여기서 살다가 일 년이 못 되어 다른 주인님과 더 가까워지게 됐대요. 내가 이 집에 들어오기도 전에 다른 주인님이 바빠지셨다니까, 나는 다른 주인님 얼굴도 못 뵈었지요. 그러니 다른 주인님한텐 관심 같은 거 없어요. 그나마 그 주인님 얼굴이라는 그림은 나도 한두 번 봤지요. 참으로… 주인님과 다른 종처럼 생겼어요. 다른 주인님이 일을 마치게 된다면 참말로 이 세상을 사는 낙(樂)이 줄어들 거야요. 그렇게 생긴 것과 참하디 참한 주인님을 나눠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분한 일이니까요. 그 그림도 본 지가 퍽 오래 됐는데, 이전에는 그런 그림을 예쁜 내 주인님께서 자주 그리고 계시더니, 웬 낯선 것이 올 때마다 그것만큼이나 낯선 그림을 그리셨는데, 지금은 다른 주인님의 얼굴보다 낯선 얼굴을 그린 그림이 많아졌어요. 언젠가 한 번 주인님이 몰래 2층 침대에서 무엇을 꺼내다 꼬맹이가 들어오니까 얼른 감추는 것을 내가 봤는데, 그건 아마 다른 주인님 인형인 것 같았어요.
다른 주인님 덕분에 내가 맛난 간식을 먹고 살 수 있는 거래요. 일주일 전에, 아니로군, 그저께요. 주인님을 따라 여기서 한 오 리나 가서 조그만 풀밭이 있는 데를 가서 거기서 건초도 먹고, 또 그 풀밭 귀퉁이에 가서 말린 사과를 먹고 왔는데, 그 식사랑 간식이 다른 주인님 덕이래요. 그 덕분에 나는 끼니도 거르지 않고 맛난 간식도 먹을 수 있게 된다고요. 그래도 내 집 넓히고, 이갈이 할 나무에 고급 사과나무를 쓸 돈은 없대요. 그래도 주인님은 나를 정말 사랑해주지요.
그리고 우리 방 식구는 주인님이랑 나 단둘인 거나 다름없는데, 건넛방은 시끄러워요. 왜 거기들 있는지 모르겠어요. 없어졌으면.
금주에는 나랑 멀리멀리 산책도 다녀오고 자주 놀아준다고 해서, 나는 너무나 좋아서 몸을 배배꼬며 폴짝폴짝 뛰고 있노라니까, 문간에서 보랏것이-우리 방 옆에 사는 주인님 친구의 웬수 말이야요-웬 시커멓고 커다란 것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인님의 그림에서 본 적 있는 다른 주인님이요. 보랏것이 나를 보더니,
“토끼쟝”
하고 부르겠지요.
“토끼야”
나는 어째 짜증이 나서 가질 않으니까 여전히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다른 주인님이 보랏것을 쫓아버리겠지요. 그러니까 보랏것은,
“비상식량은 나눠야지”
하고 대꾸합니다.
“프리츠 앞에서 그 소리 하지 마라”
하고 낯선 사람이 말합니다.
나는 다른 주인님이 방에 있게 된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래서 그 곰 비슷한 이 앞에 가서 사붓이 앞발로 밀고는 그만 주인님 품으로 뛰어 들어갔지요. 곰에겐 큰 타격이 없었던 모양이더군요. 나는 나름대로 주인님을 붙들고,
‘주인님, 주인님, 저거랑 꼭 같이 지내야 돼요?’
라는 뜻으로 법석을 하니까
"응, 응, 그래."
하고, 주인님은 귀여운 걸 본다는 듯이 대수롭잖게 대답을 하대요. 그래서 나는,
‘언제까지?’
하고 귀를 쫑긋거리니까,
“아이구, 우리 토식이 예쁘다.”
‘싫다…’
하고 내가 도리질을 치니까, 주인님은 내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토식아, 아빠랑 잘 지내야 돼.”
‘아빠 아냐…’
“응, 우리 토식이 착하다, 헤헤.”
나는 다른 주인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으나, 첫날부터 내게는 신경도 안 쓰고, 나도 그 곰인지 사람인지 모를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주인님께서 제 앞에 말하는 것을 들으니까, 그거는 예쁜 주인님과 젊을 적부터 친구라고요. 항상 일이 바쁘대요. 더 바쁘면 좋았는데. 또, 우리 주인님과 연인이기도 한데, 면식도 거의 없다시피 한 이곳에서 기대며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요.
그 아저씨는 털들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어요. 내가 가끔 돌아다니다 보면, 그 아저씨는 나에게 관심도 없이 뭔가를 하는데, 흡사 벌꿀을 보는 곰 같습니다.
어느 날은 점심을 먹고 이내 살그머니 방 밖에 나가보니까, 곰은 그제야 밥을 먹어요. 그래 가만히 앉아서 밥 먹는 걸 구경하고 있노라니까 곰이 사람 말로,
“너 먹는 거 아니다”
하고 말겠지요. 그래 나는 고기 따위 먹지도 않으니까요. 나는 본 체도 안하면서
‘사람이 맞나?’
하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는 한참이나 나를 무시하고 있더니,
“네 주인한테나 가라”
하겠지요. 나는 필요 없다는 듯 하품을 쩍 하고,
‘주인님이랑 놀아야지!’
하면서 총총대니까, 그가 뒷전에서
‘너무 귀찮게 하지 마라.’
그러시겠지요. 그래도, 나는 한번 맘을 먹은 다음엔 꼭 그대로 하고야 마는 성미지요. 그래서 마침 들어오는 주인님 품으로 쪼르르 가서는,
‘주인님, 주인님, 저거는 고기만 먹는 흉악한 짐승이다!’
하고 나름 말해보았지요.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하고, 주인님은 나를 꼭 안아줍니다.
그 일 때문에 내가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썩 좋지 않게 되었어요. 그것은 그 다음부터는 주인님이 나를 곰같은 다른 주인님과 자주 같이 두게 되었으니까요. 다른 주인님 곁에, 날 안고 다가가기도 하고 옆에 놓아두기도 하고, 그래선 내 머리에 앞발이라도 얹어지면 헤헤헤 웃고, 또 주인님한테도 쓰다듬는 걸 종종 보고 그래요. 그뿐만 아니라 셋이서 산책을 나가면, 가끔 곰은 주인님께 건네받은 간식을 살짝 꺼내 저더러 먹으라고 주지요. 그래, 그 담부터 나는 간식을 잘 먹지 않게 되었어요.
초식동물인 나는 곰이 싫었는데, 주인님은 그렇지 않았어요. 아마 곰을 너무 좋아하나 봐요. 그렇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어요. 아니, 그것보다도 그가 잘 오지 않게 되니까, 그것 때문에 그러나 봐요. 한 번은 주인님과 꼬맹이가 얘기하는 것까지 내가 들었어요.
“카를은 그냥 바쁜 것뿐이야…”
하고 말씀하시니까, 꼬맹이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래서 지금 그렇게 혼자 앓는 거야?”
하고 툴툴하겠지요. 그러니까 주인님은,
“일이 많은데 어떡하니… 그러니 약만 살짝 가져다 줘”
“말하라니까?”
주인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시고, 그냥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니까, 꼬맹이는 한숨을 쉬면서 밖으로 나갔지요.
곰이 있는 방에서 잠을 잔 것도 벌써 달님 여럿을 보낸 뒤입니다. 아마 한 달이나 되었지요. 나나 곰이나 다행인지 거의 매일 서로 조금도 신경을 안 썼습니다. 주인님은 양쪽에다 빨리 친해지면 좋겠다고 가끔 얘기하시는 듯하지만, 정말이지 나는 그와 친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가 주인님을 귀찮게 구는걸요.
“오늘 괜찮아? 얼마 안 됐는데 무리하는 거 아냐?”
이렇게 여러 가지로 물을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님은,
“…싫어?”
하고 답하니, 그가 잠잠합니다. 그래 주인님은 다시,
“나는 괜찮은데에…”
하면서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면, 그는,
“나도.”
하면서 아무 말도 않고 주인님을 붙들고 앉아서,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뺨에 입도 맞추고 하면서,
"예쁘다, 예쁘다."
하는 등 당연한 말을 자꾸만 했지요.
그러나 웬일인지 주인님을 그렇게도 성가시게 하던 그는 방에 꼬맹이가 들어오면 갑자기 태도가 달라지지요. 이것저것 묻지도 않고, 주인님을 베어 물지도 않고, 점잖게 앉아서 대화나 나누고 그러지요. 아마 그는 곰이라서 우호적이라고 판단되지 않은 사람을 무서워하는가 봐요.
하여튼 주인님은 내가 보기에 불곰 앞에다 두기엔 너무 약해서, 어떤 때는 저녁 먹고 나서 자기 전까지 종일 말썽이라도 부리는 양 하여 주인님이 포악한 짐승 앞에 내던져지지 않도록 하는 때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있다가 내가 달님과 인사하고 슬슬 졸고 있을 때 몰래 가만히 가버리지요. 그런 때에는 내가 주인님 문 여는 소릴 듣고 퍼뜩 잠에서 깨어나 쫓아가 붙들고 싶지만, 나는 내 집 안에 갇힌 신세지요. 그러나 그런 때에 주인님은 가만히 웃으시고,
“토식아, 엄마 다녀올게.”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지요.
“토식이 코 자야지. 지금까지 깨어있으면 안 졸려요?”
하시면서 또 어떤 때에는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다 쓰다듬어 주시고는,
“응, 어서 자자.”
하시면서, 내가 잠들기를 기다린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은 주말이어서, 주인님과 곰과 토끼 셋이서 산책을 하러 나가 돌아다니면서, 나는 갑자기 주인님을 지키려 곰을 앞발로 쳤다가 주인님을 슬프게 했던 생각이 나서 어째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오늘은 주인님이랑 잘 지내고 싶은데…, 어떻게 해 드리면 좋아할까?”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문득 산책 때마다 내가 꽃을 먹으려고만 하면 가져가 버리시던 주인님의 행동이 생각났습니다. 그 꽃은 노란 꽃일 때도 있고, 분홍 꽃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꽃은 내가 먹으려고만 하면 가져가 버리는 바람에 입에 대지도 못 했습니다. 하여튼 나는 우리 주인님이 꽃을 사랑하는 줄을 잘 압니다. 그래서 꽃을 갖다 드리면 주인님이 몹시 기뻐하려니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데로나 막 뛰어갔습니다. 마침 먹음직스런 꽃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꽃을 입에 물고 달음질쳐 주인님께로 돌아갔지요.
주인님은 잠시 사라진 곰을 기다리고 있다가-그런 걸 야생에 풀어놓으면 내 친구들이 위험하지요-날 보고는 이름을 부르며 안아 줬습니다.
“그 꽃은 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하고 주인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속이 답답하지만 나는 말을 못 합니다. ‘이걸 주인님 드리려고 가져왔어요.’하고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 잠깐 망설이다가 마침 돌아오는-훈련이 참 잘 된-곰을 향해 고갯짓을 했습니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서 그렇게 툭 튀어나왔는지 나도 모르지요.
꽃을 들고 냄새를 맡고 있던 주인님은 나를 보더니 무엇에 놀란 사람처럼 화닥닥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금시에 주인님 얼굴이 그 꽃보다 더 발갛게 되었습니다. 그 꽃을 든 주인님 손가락이 미약하게 떠는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주인님은 무슨 무서운 걸 봤던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아무 말씀도 못 하십니다.
나는 꽃을 그렇게도 좋아하는 주인님이, 이 꽃을 받고 그처럼 싫어하실 줄은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주인님이 그렇게도 질색하시는 것을 보니까, 불곰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이 참 잘 되었다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인님이 저러시는 까닭은 모르지만, 하여튼 나를 싫어하는 것보단 잘 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인님이 그 꽃을 곧 내버릴 줄로 나는 생각했습니다마는, 내버리지 않고 책상 위에 놔뒀습니다. 아마 퍽 여러 밤 자도로 그 꽃은 거기 놓여 있었는데, 시들기 직전에 주인님이 두꺼운 책 사이에 곱게 끼워 두었습니다.
내가 주인님께 꽃을 갖다 주던 날 밤에, 나는 또 케이지 밖을 뛰쳐나가선, 곰 옆에 앉아 그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곰의 몸이 흠칫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귀를 기울입니다. 나는 귀가 좋은 토끼이기 때문에 그냥 들었습니다.
노랫소리! 그 노랫소리는 분명 주인님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주인님이 노래를 부르시나 부다.’
하고,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방 안으로 뛰어왔습니다. 우리 방은 불을 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창밖에 뜬 보름달이 낮같이 밝은데, 은빛 같은 흰 달빛이 방 한 절반 가득히 차 있었습니다. 나는 얇은 옷을 입은 주인님이 침대 위에 앉아서 잔잔히 콧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나이 지금 육 개월밖에 안 되었지마는, 하여튼 주인님이 콧노래를 부르는 걸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습니다. 주인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노래를 더 잘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주인님 곁으로 갔습니다마는, 주인님은 내가 곁에 온 것도 깨닫지 못하는지 그냥 까딱 아니하고 앉아서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주인님의 목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새삼 느껴졌습니다. 주인님은 참으로 어느 누구보다도 목소리가 훨씬 고우십니다. 나는 가만히 누워서 주인님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 노래는 마치도 은실을 타고 내려오는 노래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얼마 오래지 않아 노랫소리는 잦아들었습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바르르 떠는 듯했습니다. 주인님의 목소리는 차차 가늘어지더니 마지막엔 없어져 버렸습니다. 주인님은 가만 일어나시더니 발치에 누운 나를 쓰다듬었습니다. 그 다음 순간, 주인님은 나를 무릎 위로 안아 들었습니다. 주인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요. 달빛을 흠뻑 받은 내 주인님 얼굴은 몹시도 하얗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 주인님은 참으로 천사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주인님의 눈가에 눈물이 축축한 것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니 나도 갑자기 슬퍼졌습니다. ‘주인님, 왜 울고 있어요?’하고 묻고 싶었습니다. 한참 동안 주인님은 아무 말씀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한참 후에 “토식아…”하고 내 이름만 불렀어요. 주인님은 다시 말이 없으셨습니다.
하루는 밤에 옆방에서 놀다가 졸려서 내 방으로 돌아와 보니까, 곰이 하얀 봉투를 주인님의 책상에 올려놓았습니다. 어딘가 떨리는 듯 보이는 표정이라, 주인님께서 서열을 확실히 잡았구나 싶었습니다.그가 나가고 잠시 후 방에 들어온 주인님은 봉투를 발견하더니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 전날 주인님께 꽃을 드렸던 날보다도 더 새빨갛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주인님은 그 봉투를 들고 어쩔 줄 모르는 듯이 초조한 빛이 나타났습니다. 나는, 또 곰이 주인님께 이상한 짓을 했구나 싶어 주인님의 다리에 고개를 비비며 위로했습니다.
그러자, 주인님은 갑자기 잠자다 깨나는 사람처럼 “앗.”하고 놀라더니, 또 금시에 여느 꽃처럼 발갛던 얼굴이 다시 하얘졌습니다. 봉투 속으로 들어간 주인님의 떨리는 손가락이 종이 몇 장을 끌고 나왔습니다. 주인님은 입술에 약간 웃음을 띠면서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주인님은 금시에 얼굴이 새빨개지고 입술이 바르르 떨렸습니다. 주인님의 손에는 그저 종이들만 잡혀 있었을 뿐인데요.
주인님은 한참을 머뭇거리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슨 결심을 한 듯이 입술을 물고, 그 종이를 차근차근 넘기며 그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안에 무슨 글이 씌어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주인님은 그 글을 읽으면서 점점 얼굴이 발개지고, 종이를 든 손은 이제 바들바들이 아니라 와들와들 떨려서 종이가 버석버석 소리를 내게 되었습니다.
한참 후에 주인님은 그 종이를 원래 모양으로 길게 두 번 접어서 봉투에 도로 넣어 책장에 꽂아두었습니다. 그리고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멀거니 앉아서 앞만 쳐다보는데 주인님 숨이 가쁩니다. 나는 혹시 주인님이 병이나 나지 않았나 하고 염려가 되어서, 얼른 가서 가방을 밟고 의자에 오르고, 거기서 또 책상 위를 오르고, 다시 주인님 무릎으로 내려와 앉았습니다.
주인님은 몸을 숙여 내게 입 맞춰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인님의 입술이 어쩌면 그리 뜨거운지요. 마치 햇볕에 달궈진 돌이 닿는 것 같았습니다.
침대로 간 주인님 옆에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깬 뒤, 어렴풋한 정신으로 옆을 보니 주인님이 없었습니다. 가끔 주인님 옆에서 잠든 나는 그런 버릇이 있어요. 어렴풋한 정신으로 옆을 보면 주인님의 고운 얼굴이 보이지요. 그러면 다시 나는 잠이 들어버리곤 하는 것입니다.
주인님이 자리에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갑자기 무서워졌습니다. 그래서 잠은 다 달아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펴봤습니다. 방 안에는 불은 안 켰지만 어슴푸레하게 밝습니다. 오늘도 밝은 달빛이 방 안까지 희미한 밝음을 던져주는 것이었습니다. 침대 맞은편의 책상 앞에 주인님이 안자있는 게 보였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침대가-1층인데도-생각보다 높아 내려가지 못한 게 못마땅해 바닥을 탁탁 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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