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쿠니 오리코→카나메 토모히사.
*지인의 썰을 조금 수정해서 썼습니다.
미쿠니 히사오미의 자살 직후, 그의 유일한 피붙이인 미쿠니 오리코가 찾아간 것은 몇 달 전까지 저희들에 알랑거리던 족속들이 아니었다. 요 몇 주 사이 드러난 히사오미의 흠결을 비판하며 등 돌리는 그들을 오리코는 이해했다. 어차피 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것은 그들이나 저나 똑같아서, 무어라 비난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게다가 구태여 절절한 설명으로 동정표를 사려는 것은 도리어 상상만으로 역겹기까지 했다. 그래서 알고 지내던 이들에게 도움을 받으리란 기대는 진즉 접어버렸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전에 딱 한 번 만났을 뿐인 사람을 찾기 위해 길을 헤맨 것은. 오후 한 시를 겨우 넘긴 도로에 교복 차림의 사람은 드물다 못해 오리코 단 한 명뿐이었다. 상가들이 그토록 즐비한 시가지인데도 그랬다. 다들 평범하게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겠지, 오리코는 생각했다. 다른 어른들은 저를 흘끗 쳐다만 보고 사라졌다. 오리코는 걸음을 재촉했다.
몇 주 전부터, 미쿠니 히사오미가 비리를 저질렀다는 추문이 항간에 떠돌았다. 미쿠니 의원은 해명 대신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결점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항변이었겠으나, 동시에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됐다. 켕기는 게 있으니 떳떳이 말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냐는 비웃음이 자꾸만 뒤를 따랐다.
아버지의 권세를 빌렸던 오리코 역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점심시간, 평소 같았다면 다들 저마다의 일에 바빠 교실에 누가 드나드는지 눈길조차 주지 않을 급우들마저, 자신이 들어서자마자 입을 다물고 어색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제 집안의 일이 뜨거운 화제가 돼 있다는 것 정도는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오리코는 무거운 공기를 묵묵히 견디며 자리를 찾았다. 등 뒤로 꽂혀드는 시선이 따가웠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견딜 만했다. 제게 직접 물으러 오는 사람에게도 응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오리코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것이 자신의 오만한 판단이었음을 알게 됐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신문과 잡지가 어딜 펼쳐놓고 있었는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뒤를 둘러봤을 때 받은 시선들이 어떠했는지, 도무지 잊을 수 없었다. 그 뒤로 교내에서 주구장창 들은 다른 학생들의 웃음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결국 오리코는 더 버티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수업을 모두 마치기도 전에 학교에서 무단이탈한 것은 오리코의 생에 있어 처음 겪는 일이었다. 오리코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도로 위에서 막연히 서성거렸는데, 그런 오리코에게 누군가 말을 건넸다.
“…얘, 무슨 일 있니? 교복 차림인 걸 보니 학생인 것 같은데.”
어느새 다가왔는지 모를 남자는 오리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고등학생이 되지 않았음에도 키가 껑충 큰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가 드문 오리코로서는, 퍽 낯선 시선이었다. 그러나 그 시선에 좀 전까지 겪었던 눈빛들이 담고 있던 적의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맑다 못해 다정하게만 보였다.
“괜찮습니다.”
“정말? 하지만 안색이 좋지 않은데. 얼마나 오래 서 있던 거야? 열사병 대책은 필요하니까, 괜찮다면 잠시 이동하지 않겠어?”
남자는 상냥하게 웃다가, 여학생에게 멋대로 말을 거는 이상한 남자의 제의는 순순히 거절해도 좋다고 농담처럼 덧붙여주었다. 오리코는 그의 그런 태도에 마음을 놓았다. 이렇게나 수수해 보이는 인물로부터 제 몸 하나를 건사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무너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차하면 도망칠 정도의 호신술은 몸에 익혔으니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오리코는 갈색 머리 남자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남자가 데리고 간 곳은 지척에 있던 그의 집이었다. 집 안은 넓고 깔끔해 세심한 손길로 관리됐음을 짐작케 했다. 남자는 오리코를 거실로 들이며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오렌지 주스가 담긴 잔을 오리코의 앞에 내 왔다.
“냉장고를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로만 채워놓다 보니까. 너만한 애들한텐 입에 안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니요, 괜찮아요.”
오리코는 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주스를 한 모금, 입에 넘겼다. 달고 시원한 맛이었다.
“그래, 그럼. 낯선 아저씨가 갑자기 말을 걸어서 불안하겠지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
“…….”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괜찮다면 얘기를 들려주지 않을래? 털어놓고 보면 조금 나아질지도 모르잖아.”
오리코는 남자의 어조와 눈빛에서 그가 자신을 해칠 의도는 전혀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오리코는, 상대가 아무리 상냥하다고 해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제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밝힐 만큼 경계심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세한 상황을 말하는 대신, 집안에 조금 커다란 골칫거리가 생겼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며 말했다.
“…그리고 그 일이 저희 집안만의 문제가 아니게 됐는데, 그런데도 아버지는….”
“으음, 어쩌면 정말로 말할 게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다거나, 오해가 있는 건 아닐까?”
“네?”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변명할 수는 없는 거잖아. 내 생각에는, 네가 그분을 믿어드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분도 많이 힘드실 것 같은데.”
“…그런가요.”
남자는 그런 식으로 오리코를 다독였다. 무언가 호기심의 빛을 내보이지도 않고, 오리코의 안색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저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이토록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덕분에 마음에 다소 여유가 돌아와, 오리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남자는 엷은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오리코를 배웅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리코는 그 남자에 대해 신경 쓰느라, 정작 그 집에 달린 명패는 보지 못했다.
지금 주택가를 헤매고 있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게다가 아버지의 자살이 매스컴을 탄 이래로, 자신은 더 이상 학교는커녕 바깥 세상에 나가지도 않았던 탓에, 햇빛이 지나치게 눈부신 탓도 있었다. 그러나 두려움을 억누를 정도로, 그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그가 아직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굳이 교복을 입고 나선 것은 그로 하여금 자신을 좀 더 쉽게 떠올려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전에 만난 적 있으니 다시 마주하고서 물으면 돼, 혹시 저를 기억하세요, 하고…. 오리코는 익숙한 지붕을 보자마자 달음박질로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 그토록 그리던 남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오리코를 어렵지 않게 알아보고는, 오리코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지난번엔 감사했습니다.”
오리코가 그렇게 인사하며 과자가 담긴 작은 상자를 내밀자, 남자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었다.
“……미쿠니 오리코 양이지? 사정은 알게 됐어.”
순간 오리코는 그 말이, 제가 주는 것은 받을 수 없다는 간곡한 거절의 말인 줄 알고 당황해 헛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남자는 순순히 오리코가 건넨 것을 받았다. 음료 가져올게, 말하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금세 다과를 갖고 돌아오기까지 했다.
“이번에 찾아온 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일까? 아주 대략적이지만 사정은 알고 있으니까, 너무 어렵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무 갑작스러워서 죄송해요.
“아냐, 지난번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찾아와 줬다고 생각하면 싫지 않아.”
남자는 첫인상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오리코는 띄엄띄엄하게나마,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알고 계시는 대로 자신은 미쿠니 의원의 딸이며, 지난번에 얼버무렸던 집안일이란 최근 뉴스에 나온 그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고. 고작 그것을 설명하는 수 분 동안, 오리코는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인간에게서 난 존재예요. 제가 경멸스럽지 않으신가요?”
“그럴 리가. 그건 오리코 양의 책임이 아니야.”
“하지만….”
“오리코 양,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스스로 선택한 일들이야. 그리고 아무도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아.”
“…….”
“게다가 오리코 양은 그저 존경할 만한 아버지를 믿고 따랐을 뿐이잖아. 실제로 아버지가 비난받을 만한 짓을 저지른 사람이라는 걸 알고서는 그에 대해 이전과 다른 마음으로 보게 됐고. 그건 오리코 양이 그와는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해. …그러니 부모님의 일에 너무 얽매여 있을 필요는 없지 않겠어?”
이런 위로로 괜찮았을까? 남자는 검지로 뒷덜미를 긁적이며 겸연쩍게 웃었다.
괜찮냐고? 괜찮지 않다. 자신을 오로지 자신만으로 봐주는 말이 이렇게나 마음을 찌르는 줄은 처음 알았다. 오리코는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눈앞에서 남자가 당황해 티슈를 건네주는 것이 묘하게 기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자각한 오리코는, 실례했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따위의 말만을 주워섬기며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낯선 이의 낯선 위로가 부지불식간에 제 마음을 녹였다는 걸 자각한 순간, 그 마음 위에 자리 잡은 것은 환희가 아니라 두려움이었기에.
그리고 그 두 번째 만남 이래로 오리코는 그의 말에 대해 생각했다.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걷는 것이 무엇일까, 그 전에 자신이 걷고자 하는 길은 무엇이었더라. 그것을 고민하는 오리코의 앞에 그것이 나타났다. 그렇게 오리코는 기적을 받아들였다.
오리코는 그 기적 이전에 자신이 막을 내리지 않게끔 해준 은인을 찾아 인사하기로 했다. 목표가 생기니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리코가 그제야 그의 집에 걸린 명패를 읽은 덕분이었다. 그의 명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카나메 가(家)』.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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