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일x레하트. 증오B 이후.
*호애는 반전되었으나, 인애는 반전되지 않았다.
*드랍 안 하는 법 삽니다 :
 ↪6대의 양위에 따라 그의 영지로 이송되던 레하트가 바다로 몸을 던지는 결말이었는데.



 리탄트 왕성 구석진 곳에 존재하는 탑(실상 감옥)의 관리자 K는 아네키우스력 7404년 녹의 달 후반, 새로운 왕조로부터―당시에 오를 후보자가 안정을 취해야 한단 이유로 계승 의식이 거행되기 전이었으니, 정확히 말하자면, 예비 6대 왕조로부터―은밀한 명령을 받는다. 그것은 K 관할의 탑 최상층에 방 하나를 호화롭게 꾸며두라는 것이었다. 거기다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하는 일이었으며, 동시에 그 방에 머물게 될 사람에 대해 물어서는 안 되고, 또 그 사람을 지하에 있는 여느 죄인들처럼 다루어서도 안 된다는 조건들이 덧붙여졌다.
 6대 왕이 K에게 주문한 은밀한 공간이 마련된 것은 계승 의식을 마친 청의 달 중순쯤이었는데, 그 감방에 살게 될 사람이 도착한 날로부터 고작 반(半) 주의 간극조차 두지 않고 있었다. 이 죄인 아닌 죄인은 왕족이나 그에 준하는 상급 귀족들이 운신할 때처럼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그렇다고는 해도 긴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를 지키는 인물의 수도 차츰 줄어들어, 그가 기거할 방의 두꺼운 철문 앞에 당도했을 때는, 그와 K만이 남아있었다.
 K는 방 안에 불을 밝히며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이제 막 성인이 된 듯 얼굴에 앳된 티를 간직한 남성으로, 이마에는 흰 천을 두르고 있었다. 순간 K는 그 천이 무엇을 가렸는지를 짐작했다. 지난 한 해를 시끄럽게 만들더니, 결국에는 정당한 계승자와의 결투에서 패배하고,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또 다른 총애자에 대한 것이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나 K는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잘못 놀려 어디론가 끌려가는 일은 사양이었다.
 다른 업무로 자리를 비우느라 교대할 때를 빼면, K는 이 방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매주 침대보를 갈고, 매일같이 남자의 옷을 갈아입히고, 남자에게 직접 식사를 날랐다. 그 남자가 받는 옷이며 음식은 모두 최고급의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K가 보기에 남자는 구도자 같은 자세를 견지하는 듯했다. 그의 태도는, 자신의 부자연스러운 삶을 마치 신이 점지한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받아들인 모양새였다. 언제나 단정한 몸가짐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그는, 잘그랑 소리를 내는 족쇄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방 안을 돌아다녔고, 언제나 묵묵한 태도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방 안에 쌓인 책들은 물론 그의 요구에 따라 K가 반입한 것이었다. 혹시나 싶어 허가를 받으러 찾아간 왕은, 방 안에 호화로운 세간을 들이라 명령했을 때와 비슷하게 무심한 어조로, 그 남자가 밖에 나가려는 데 일조하는 것만 아니라면 일일이 찾아올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K는 이 강하고 엄격하면서도 어린 왕의 그런 말투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왕성에 근무한 덕택에, 현왕이 후보자였을 적부터 항상 확신을 기반으로 하는 담담한 말투를 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강렬하게 와 닿는 위화감이었다. 그래도 K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K는 입을 잘못 놀릴 바엔 차라리 얌전히 다물고 있는 것이 현명한 처신임을 모르지 않는 이였다.

 그렇게 겉보기만은 평온한, 그럼에도 가슴 한 켠의 묘한 불안을 잠재울 수 없는 1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손님이 왔다. 저를 향해 문을 열라 말하는 목소리는, 인수인계도 거의 마쳐 영지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선왕의 것이었다. K가 아는 게 틀리지 않았다면, 현왕은 지금 시찰을 나가 부재중이었다. …선왕은 남자의 탈출을 돕기 위해서 왔을까? K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선왕도, 남자도,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K는 순순히 문을 열었다. K가 자리를 정돈하고 차를 준비할 동안, 남자와 선왕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랜만이군, 레하트.”
  “……오랜만이에요. 소식을 듣지 못해 걱정했는데, 다행히 별일 없으신가 보군요.”
  “그 녀석이 싫어해서, 소식을 전할 수가 없었네. 여기 생활은….”
  “괜찮습니다.”
선왕이 말을 고를 틈을 주지 않고, 그는 단언했다.
  “구하지 못하는 물건도 없고, 성실히 돌봐주는 사람도 있고, 나쁘지 않아요.”
말을 마치고, 차를 입에 머금은 그가 창밖을 쳐다봤다. 높은 탑에선 창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허공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쩐지 그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만 같았다. 선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정말 이런 상황에 만족하는가?”
  “이제야 불평을 늘어놓을 이유도 없지요. 제가 성에 갇히게 된 것은, 1년 전이 아니니까.”
그가 선왕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선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자네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네. 다만, 짐작을 아예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 한 마디만 하지. 자네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결코 그 녀석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야. ……그럼. 잠시나마 반가웠네.”
선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K가 선왕을 문 밖까지 배웅했다.

 K는 이 만남에 대해 보고하지 않았다. 그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입단속을 시킨 사람은 없지만, K는 정말로,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며칠 만에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현왕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애당초 그녀가 이 탑에 대해 먼저 언급한 것도, 방을 마련해두라던 명령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선왕이 암살자의 흉인에 의해 숨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것은 뜬소문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성에 관(棺)이 들어왔고, 장례식은 선왕에게 걸맞은 예우를 갖춘 규모로 진행됐다. 왕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서, 관을 실은 채 호수 위의 무덤가로 나아가는 배를 송별했다. 이날, 탑 꼭대기에 갇힌 남자는, 평상시와 같이 색이 고운 비단옷 차림으로, 발코니에서 창가를 내다보며 씁쓰레 웃었다. 이 날, 남자가 처음으로 K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그는 웃고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나요?”
  “주어진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불만을 가진 적이 없어요?”
  “글쎄요. 당신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옛날보다 일이 쉬운걸요. 매번 여기까지 계단을 올라와야 하는 건 조금 힘들지만….
  “하하.”
  “게다가 제가 나서서 이 일을 맡은 거라면 직접 고른 결과에 불평하지 않을 거고, 선택의 여지도 없는 일이었다면…. 몇 달이고 투덜거리진 않을 거예요. 처음부터 갈 수 없었던 길을 생각하는 건…….”
  “바보짓이죠.”
신중히 말을 고르려던 K를 대신해 남자가 말을 끝냈다. 그의 표정은 말을 건넬 때와 다르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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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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