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5자

*타낫세x레하트. 

*타32. 질투 (상대: 유리리에)가 있던 날 밤.


 

 태양이 검게 물든 달의 끝자락에서 지나는 저녁은 여느 때보다도 어두워 밤이 얼마나 깊어지는지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밤의 어둠이 제 방 안까지 내려앉았는데도 타낫세는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詩作) 같은 은밀한 취미생활 때문이 아니었다. 타낫세의 책상 위에는 아무 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그는 단지 요 며칠 새의 일들을 곱씹느라 진작 잠자리에 들어야 했을 시간들을 허랑하게 보내버리는 중이었다. 다만 타낫세는, 아직까지도 귓가에 맴도는 듯싶은 유리리에의 깔깔거리던 웃음소리에 지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나마 침대에 몸을 눕히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 깊숙한 곳의 탑, 그 중에서도 근처를 지나다니는 사람이 드물어 특히 더 조용한 구석에 위치한 이 방을 소란스럽게 만들 만한 사람은 손에 꼽혔다. 더군다나 타낫세는 저렇게 시간에 구애받지도 않고 끈질기게 노크를 함으로써 결국 자신이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라는 사실을 이미 잘 알았다. 열린 문 뒤에, 여기에 잠시 소란을 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1년 가까이 이 성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두 번째 총애자’, 레하트가 서 있었다.

 

 그러니까 타낫세는―상대가 누구든지간에―이토록 늦은 시간에 무턱대고 남의 방에 들이닥치는 짓이 얼마나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짓인지 쏘아붙여줄 심산이었다. 다만 타낫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레하트의 얼굴을 마주한 자신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말을 늘어놓을 수 없다는 점이었고, 타낫세가 몰랐던 것은 자신을 찾아온 레하트가 잠옷 위에 얇은 겉옷만을 걸친 차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타낫세가 턱밑까지 치밀어 올랐던 잔소리를 내뱉는 대신 허둥대며 레하트를 방으로 들이는 것도 당연했다.

 

 타낫세는 시종을 시켜 가벼운 다과를 준비시키면서, 레하트가 빈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는 걸 지켜봤다. 옆방에서 덜그럭대는 그릇과 눈앞에서 사부작거리는 레하트의 옷자락이 내는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크게 들려와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레하트는 제 몫으로 내밀어진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듯 쥐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을 마시지는 않은 채, 그저 타낫세를 빤히 들여다보며 웃기만 했다. 결국 제게 주어지는 어떤 위압감 같은 것을 견디지 못한 채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물론 타낫세였다.

 

  “너는 정말로 네 입장을 생각해볼 줄 모르는 건가. 계승을 코앞에 둔 이 무렵에 홀로 돌아다니는 총애자라니 부주의에도 정도가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태연히 나를 찾아오는 것만 해도…….”

  “타낫세한테 볼일이 있어서.”

  “……용건이 있다면 시종을 시켜 전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을 텐데.”

  “직접 말하는 쪽이 더 좋겠다 싶었거든.”

  “……그래, 좋아. 무슨 용무냐.”

레하트는 들고 있던 찻잔의 내용물을 한 모금 비우고 난 뒤에야 대답했다.

  “낮의 일은 너무 담아두지 마.”

 

레하트가 언급한 낮의 일이라면 분명 그것이다. 복도에서 뜻하지 않게 유리리에와 마주쳐…. 유리리에로부터 들은 말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려낸 타낫세는 다시금 레하트의 얼굴을 쳐다봤다. 레하트는 어딘가 짓궂은, 그러면서도 순진한 얼굴에 잘 어울리는 말간 미소만을 지어보일 따름이었다. 그 밖에 무언가 다른 말을 보탤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타낫세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켜 냈다. 담아두지 말라고 한들 무엇을 내려둘 수 있을까? 자신이 감히 그럴 수 있을까? 제멋대로 편해지는 일 따윈 없으리라고, 타낫세는 생각했다. 그는 레하트의 변심은 자신에게 달려있노라고 선언한 유리리에의 자신감이 두려운 동시에 부러웠다.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보지 못한 탓에 저지른―애꿎은 아이를 휘말리게 만들어 살해할 뻔한―그 일의 결과를 기다리던 제게 내려진 처분이 고발 아닌 고백이던 순간부터, 타낫세는 레하트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그래서 감히 손을 뻗지 못했다. 정신을 잃기 전에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 너머의 어렴풋한 빛이 잊히지 않아 괴로웠다. 그래서 감히 마주볼 수 없었다. 차라리 서로를 미워하고 있는 게 더욱 나았다는 후회가 들 정도로 참담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저만이 느끼는 감정이라도 되는 양, 레하트는 언제나 곁으로 다가온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향한 애틋한 경외감이 들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조금은 마음을 달리 해도 괜찮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고 말았다. 둘러댈 핑계조차 마련해두지 않고 레하트를 찾으러 나선 것 또한 그런 충동에 의해서였다. 가장 대하기 어려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목도하자마자 사라져버리고 마는 정도의 어렴풋한 충동이었지만.

 

  “정말이지 물러나선 안 되는 곳에서 물러난다니까, 타낫세는.”

그것은 유리리에가 한 말이었으나 레하트의 목소리를 입고 있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던 타낫세가 고개를 들었다. 레하트는 어느새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인 채였다.

  “…놀릴 생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이 정해지지 않은 것도 아니니까.”

  “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나, 이번 달 말일에도 오늘처럼 타낫세를 찾아올 거라고.”

  “유리리에 그 녀석은 꽤 자신하고 있던데….”

  “타낫세가 이러고 있을 것 같아서 일부러 얘기하러 온 거야! 유리리에도 분명히 말했잖아, 떠본 것뿐이라는 거. 벌써부터 질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떡해?”

레하트는 쿡쿡 웃으며 과자를 집어 입에 넣었다. 타낫세는 고개를 가로젓는가 싶더니, 이내 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너도 이미 겪어보았으니 알겠지. 내가 얼마나 유약한 인간인지…. 이런 내가 그 녀석과 같은 것을 두고 대결하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운 일이야.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렇구나. 너를 두고 물러서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머지 말은 네가 기약하는 그 날에 해도 괜찮을까.”

바보. 타낫세는 문득 레하트가 그렇게 말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레하트의 눈이 졸린 듯 단단히 감겨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부분이 타낫세는 자못 다행스러웠다. 무언가에 떠밀리기라도 한 것처럼 초조하게 후회할 말들을 쏟아내는 것보단 며칠 정도 말을 다듬어두는 게 낫겠다는 속셈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당장 고민해야할 것은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새 잠에 빠져든 레하트를 침대로 옮길 방법 역시 강구해야만 했다. 창밖으로는 다시 태양의 빛이 설핏 새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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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ouble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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