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8자
*톳즈 애정B로부터 몇 년 뒤. (덧붙여 바일과는 상호 우정 35+)
*총애자의 이름이 레하트가 아님.
바람이 불었다. 그에 반응하듯 이마에 감긴 천 자락의 끄트머리가 관자놀이와 뺨 사이를 툭툭 쳤다. 지암은 새삼 그 천에 손을 대보았다. 표식이 보이지 않게끔 이마를 싸매는 것이야 어릴 적에 매일같이 한 일이었지만, 몇 년 만에 다시 하는 일이기도 해서, 영 자신이 없었다. 지암은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남자의 팔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다시 묶어줄 수 있어?”
남자는 평소처럼 능청맞은 너스레를 늘어놓는 대신, 입을 다문 채 지암을 벽 쪽에 몰아넣고는 제 몸으로 그를 가리다시피 하며 이마의 천을 단단히 매 주었다. 남자는 어쩐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와 긴장은 거리가 먼 단어일 텐데도. 지암은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톳즈, 괜찮아?”
그러자 남자―톳즈는 곧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지암을 돌아봤다.
“으응? 뭐가~?”
“톳즈가 평소랑 조금 다른 것 같아서…. 긴장한 것 같아.”
“그야 이렇게 예쁜 아가씨랑 같이 있어서 그렇지.”
“으응.”
“그러는 지암쨩이야말로 오랜만에 나와서 긴장한 것 아냐? 너무 걱정 마, 이 톳즈님이 곁에 있으니까!”
그 말이 사실이긴 했다. 바일이 왕위를 계승하고 다른 총애자인 지암은 그 전까지와 다름없이 성 안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은 지도, 로니카가 톳즈에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떠난 지도, 몇 년이나 지났으니 실로 오래간만의 외출이었다. 그것은 바일의 아량에 의해 가능했다.
왕성에서 더 이상 선왕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무렵에 바일이 지암을 찾아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곳을 떠나고 싶지는 않은지.
“별로? 전에는 가끔 답답해서 나가고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 성이 그렇게 좁은 곳도 아니라서 적응됐고, 정말로 편하게 살고 있고. 아…. 그래도 왕도(王都)는 돌아다녀본 적 얼마 없으니까 구경해보고 싶다.”
리리아노의 비호 아래선 왕성을 나가기 위한 절차를 밟는 것조차 번거로웠던 탓에, 이제는 톳즈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는 데 만족하기로 한 지암으로선 진심 어린 답변이었다. 바일도 그 마음을 알아본 듯했다. 그는 곧 휴일 하루 정도의 짧은 외출이라면 괜찮다는 허가를 내줬다. 정말로 괜찮은 거냐고 되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좋아하는 곳이래도 계속 한 곳에만 있으면…지루하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표식은 잘 가려둬.”
그렇게 말하는 바일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덕분에 이렇게 톳즈랑 같이 왕도를 둘러볼 수 있게 된 거니까. 돌아갈 때 선물이라도 사다 줘야지, 지암은 그런 생각을 하며 톳즈에게 그럴듯한 물건들을 살 수 있는 곳을 안내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중앙 광장 근처에 늘어선 노점이며 가게들을 실컷 돌아다녔다.
사람이 모여들고 물자가 모여드는 나라의 중앙인 만큼, 눈에 띄는 가게는 많았다. 두 사람은 신기한 모양의 사탕들을 파는 가게에 들렀고―톳즈는 이상하게 길쭉한 사탕을 지암의 입에 물리고 싶어 했으나, 지암은 실랑이 끝에 그것을 톳즈에게 쥐어주고 둥그스름한 리네크 복숭아 모양의 사탕을 물었다―, 바다 근처의 섬에서만 나는 것이라 구하기도 어렵다는 꽃으로 매대를 가득 메운 꽃가게를 스치고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두 사람은 어느 노점 앞에 섰다. 지암이 먼저 발걸음을 멈추고, 톳즈가 뒤따랐다. 온갖 잡화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어 무엇을 파는 곳인지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일부러 그렇게 진열한 이유가 없지는 않은지 눈에 띄는 물건이 많았다. 표지에 제목이 적히지 않은 얇은 서책이 두세 권, 토록이나 땅돼지를 본뜬 듯싶은 조그만 봉제인형들이 여럿, 말린 풀꽃들을 넣어 만든 향주머니에, 심지어는 ‘강해지는 약’도 있었다.
“톳즈, 저거 봐.”
“아하하, 옛날 생각이라도 났어?”
“응. 뭐, 톳즈가 준 약은 효과 없었지만.”
지암이 키득거리며 웃다가 덧붙였다.
“그래도 그 대신에, 날 지켜줄 수 있는 강한 사람을 곁에 두게 됐으니까 남는 장사지?”
그러자 톳즈도 따라서 웃으며 지암의 어깨를 감싸듯 안았다.
“역시 지암은 귀여운 말만 한다니까.”
“에헤헤. 여기서 뭔가 살래.”
지암은 다시금 매대를 휘휘 둘러보더니, 은화 한 닢짜리 봉제인형을 사서는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었다. 바일이라면 고양이 인형도 개의치 않겠지. 전에도 왕을 위한 조공만 받고 정작 제 앞으로 오는 것은 손에 꼽는다며 볼멘소리를 했으니까…. 그리고 지암은 톳즈의 허리께에 팔을 감았다.
“이제 시장에서 볼 용건은 다 끝났는데.”
“…돌아가고 싶어?”
“으응…, 모처럼 나온 거라 그냥 들어가긴 아쉬운걸.”
그러니까 다음으로 갈 곳은 톳즈가 적당히 추천해 줘. 지암은 그 말만 하고 빙긋 웃었다.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어딜 가게 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햇빛의 기세도 누그러져 차츰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에, 지암과 톳즈 두 사람은 어느 길에 서 있었다. 무척 낯익은, 하지만 다시 볼 거라곤 기대해 본 적 없는 곳이었다. 거긴….
“지암도 이 다리를 통해서 성에 들어왔지?”
그래, 그 다리였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압도적인 인상을 주진 않아도 여전히 커다랗게 보이는 돌담을, 더욱 커다란 호수가 한결같이 감싸고 있었다.
“오랜만에 나오는 바깥세상은 어땠어, 즐거웠어?”
“즐거웠어. 듣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보자. 지암은 성을 좋아해?”
“어…, 좋아하는 편이려나.”
“…그렇구나.”
그리고 톳즈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에게는 침묵이 어울리지 않아, 지암은 익숙한 불안을 느꼈다. 그답지 않게 긴장해 있던 톳즈를 보았던 아침과 같은 정도의 불안. 이제는 지암이 물을 차례였다.
“톳즈는 성이 싫어? …옛날에도 그랬어. 성에만 있으면 숨이 막혀버린다고.”
“글쎄, 어떨까나. 지암과 내가 이렇게 알콩달콩 하는 게 허락되는 것은 성 밖이나, 남들 눈을 벗어났을 때뿐이야.”
“그래서 싫은 거야?”
“싫지 않아. 지암이 성에서 사는 삶을 자유롭게 생각하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치만 톳즈 말도 맞잖아. 왕성에 있으면 톳즈랑은 항상 이런 식이니까. …결혼 같은 것도 못 할 거고.”
톳즈는 지암을 돌아보는가 싶더니, 크고 거친 손으로 지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같이 도망칠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단둘이서….”
톳즈가 질문을 건네는 어조는 너무나도 가벼웠는데, 그것은 오히려 톳즈 역시 사뭇 초조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지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사랑하는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톳즈를 말이야.”
“그래. 그럼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자. …방에서만 할 수 있는 일들도 있고.”
톳즈의 얼굴에 여상한 미소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지암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서 왕성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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