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로 제출했었음…
*7천자쯤
승현은 그 순간 스무 해도 더 전에 있었다. 승현이 누워있던 침대 옆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그걸 가능케 했다. 잠들기 전 커튼을 똑바로 펼쳐두지 않은 덕분에 침실 안으로 새어든 빛이 그를 비추었다. 곤히 잠든 미진의 가슴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승현은 미진이 저를 지금보다 감상적이었던 동시에 냉소적이었던 어린 시절로 돌려보내 주는 것만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양이 모자라 메마른 몸과 마냥 건강하지만은 않은 혈색, 길을 지나가던 이들이 때때로 뒤를 돌아볼 만큼 길게 기른 머리 같은 것은 미진의 것이었으나, 죽은 지 스무 해가 더 지난 마리의 것이기도 했다.
승현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미진과 마리에게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고작 나이만으로도 그랬다. 마리는 승현보다 네 살 많았고, 미진은 승현보다 한참 어렸다. 차이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설령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겪은 일이라 해도, 그것이 부당한 일이라면 곧장 저항하고 거리로 뛰쳐나가 승리를 걸머쥘 때까지 투쟁하던 사람이 마리였다. 반면에 미진은 마리의 반골 기질을 닮아있기는 했으나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제아무리 얼굴이 비슷하다 한들, 결국 이토록 서로 다른 두 사람을 하나의 존재로 겹쳐보는 것은 마리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살아있다면 곧장 입 밖으로 꺼냈을 불만을 더 이상 토로할 수 없는 마리에게.
자리에서 일어서 침대 맞은편의 장식장 앞으로 다가간 승현은, 그 안에 든 손바닥만 한 액자를 바라보았다. 액자에 끼워진 사진은 색이 바래고 가장자리가 해어진 채였다. 다만 그 낡은 사진 속 인물은 여전히 매서운 눈빛으로 그 자신이 담긴 종이 바깥을 쏘아보고 있었다. 마리 누나. 액자를 손에 들고 시선을 마주쳐보려던 승현이 감상에 잠길 시간도 없이 휴대전화가 알람을 울렸다. 어느새 오전 여섯 시였다. 부쩍 아침잠이 없어졌음을 실감하면서, 승현은 액자를 제자리로 돌리고 미진이 반응하기 전에 알람을 껐다. 그러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미진에게 이불을 똑바로 덮어주었다.
미진이 깨어나려면 한 시간은 남았을 터다. 그동안 아침 식사를 차리러 부엌에 들어간 승현의 눈에 개수대에 담긴 머그잔이 들어왔다. 덩그러니 놓인 잔에는 짙은 갈색 얼룩이 묻어 있었다. 승현은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는 커피를 마시지 않았으므로, 미진의 짓이었다. 승현은 더운물로 컵을 씻어내며 미진의 안색을 좀 더 살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게 사소한 일을 맡기는 데 익숙해진 거라면 좋을 테지만, 승현이 보기에 미진이 컵을 치우지 못한 것은 제가 미진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데 익숙해져서가 아닌 것 같았다. 단지 그런 거리감을 일일이 재고 있을 만큼의 여유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저와 함께 밥을 먹다가도 먼저 식사를 마치면 곧장 제 그릇만을 씻어두고 방으로 들어가는 미진을 모르지 않았다. 한 침대를 쓰며 지내는 사이인데도, 승현은 미진에게서 거리감을 느꼈다. 미진과 만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그랬다.
3년 전 그날 걸려왔던 몇 분 남짓의 전화는, 지금도 생생히 떠올랐다.
“안승현 씨 맞으신가요.”
“누구…?”
“…마리 씨하고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어요. 그 사람 주치의였다 들었는데요.”
그 사람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어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승현으로 하여금 마리를 생각나게 했다. 마리도 이 사람처럼 가느다랗지만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서 단언하는 듯싶은 목소리를 지녔었다.
“그럼 사흘 뒤에, 금요일 열 시 괜찮으세요?”
“다음 주 수요일에 갈게요. 제가 지금 해외라서 며칠 걸리거든요.”
전화는 거기서 끊겼다. 뒤이어 구체적인 시간이 적힌 문자가 날아들었다. 일방적인 통보에 진배없는 행동이었으나, 승현은 순순히 그때 만나자는 답장을 했다.
마리의 이름은, 그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던진 것이라 해도, 승현이 무시할 수 없는 미끼였다. 마리가 죽은 지도 19년째였다. 살아있을 때조차 병문안을 오는 사람이 없었던 마리를 이제 와서 찾는 사람이 대체 누군지 직접 봐야겠다, 싶었다. 승현은 그 뒤로 약속된 날까지의 한 주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정해진 것보다 많은 일을 도맡아 해치웠고,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 눈 깜짝할 새에 약속된 날짜가 다가와 있었다. 그뿐이었다.
승현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찻잎의 종류를 세어보고, 계속해서 제자리를 서성였다.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를 모르는 체하고 앉아있기가 어려웠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마저 지나치고 만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였다. 승현은 벌컥 열리는 문을 보고서야 제자리에 멈춰 섰고, 방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지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전화기 속의 목소리를 가진 그 여자는 승현이 기억하던 마리와 똑 닮아 있었다. 허리 아래까지 기른 검은 머리와 곧추선 자세, 그리고 호흡에 맞춰 주름이 졌다 펴지기를 반복하는 품 낙낙한 셔츠가 짐작케 하는 지나치리만치 마른 몸 따위는 승현이 한동안이나 할 말을 찾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저번 주에 연락드렸는데요.”
“…송미진 씨?”
“네. 약속대로 마리 씨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가볍게 내저은 승현은 미진을 자리에 앉히고 차를 준비했다. 무슨 말부터 꺼내는 게 좋을지 마땅치 않아서, 제가 그러는 동안 미진이 뭐라도 먼저 말해주길 바란 심산에서였다. 잔에 스트레이너를 걸고 차를 따르는 동안 적막이 감돌았다. 미진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리 누나가 좋아하던 거예요.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런가요. 미진은 양손으로 잔을 감싸 쥐었다. 손에 쥐고는 바라보기만 했다. 손 안에서 느껴지는 훈기를 통해 온도를 가늠하는 듯한 저 동작을, 승현은 알고 있었다. 그건 마리의 버릇이기도 했다. 마리는 주위에 찻잔 같은 게 있으면 어딘가 쏟아버릴 게 염려된다며, 한 김 식어 미적지근하게 된 차를 단번에 들이켜곤 했다. 차가 식을 때까지 찻잔을 쥐느라 손이 묶여버린 마리의 모습을 승현은 남몰래 마음에 두고 있었다. 찻잎을 모으는 취미가 생긴 것도 마리가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된 무렵부터였다.
“마리 씨는 죽었나요?”
“저는 담당의였어요. 치료를 중단하겠다는 걸 설득해서….”
“…마리 씨는 잘 지내고 있나요?”
“누나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였어요?”
“아마 그분이 아니었다면 진작 죽었겠죠.”
미진은 차를 들이켰다. 잔을 아예 비워버리려는지 고개가 꽤나 오랫동안 젖혀져 있었다. 미진은 몸을 다시 앞으로 숙이고는, 자신이 아직 아이였을 때 우연히 마리를 만났다고 했다. 미진의 얘기는 이랬다. 아침 일찍부터 아이들 앞에서 하기엔 부적절한 행동을 저지르는 부모를 피해 집을 나간 날, 동네 골목에서 마냥 시간을 때우던 저를 마리가 데려가 주었다고. 예쁘고 상냥한 어른이라서 따라가고 말았다고. 마리가 저를 씻기고, 먹이고, 온종일 돌봐주었다고. 그게 마리와 처음 만난 날이었다고 했다. 자기가 아홉 살이었을 적의 일이니 이미 한참 오래된 일이라고도 덧붙였다. 승현은 모르던 일이었다. 마리에 대해 자신이 모르는 게 있다고 생각하려니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마리 씨가 주신 새 옷을 입고 집에 돌아갔어요. 아버지란 작자가 그제야 남한테 빌붙어먹지 말라면서 길길이 날뛰더군요.”
미진은 찻잔을 집어 들다가 코웃음을 쳤다. 이야기를 듣던 승현은 미진을 만났을 즈음의 마리가 지병이 악화돼 입원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마리가 저더러 미진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승현은 미진에게 어째서 마리가 미진에게 더 다가가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렇게 물었다.
“누나가 제 얘기를 했나요?”
“아뇨. 마리 씨를 찾은 건 그분 집에서 본 팸플릿을 기억해내서예요. 병원 홍보용 그거.”
“…….”
“잊은 적이 없어요. 사는 데 여유가 생기니까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데요.”
승현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진이 보았다는 홍보용 책자는 승현이 두고 간 거였다. 기형의 심장 같은, 요즘도 완치가 어렵다시피 한 병을 평생토록 앓은 마리가 지난한 치료 과정이 수반되는 삶에서 학을 떼려고 한 적이 있었다. 승현은 그런 마리를 자기가 근무하는 병원에 입원하도록 설득했다. 짬이 날 때마다 들러붙어 말을 걸다 보면 마리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마리 누난 무덤 같은 걸 원하지 않았어요. 부탁받은 대로 화장을 했고요.”
“죽었군요.”
“…뼛가루를 모셔두는 것도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냥 아무 데나 가서 뿌려달라고.”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미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의 얼굴은 이 방에 들어설 때보다 훨씬 안정감 있게 변해 있었다. 지금 눈을 굴리는 건 미진이 아니라 승현이었다. 승현은 덩달아 일어서서 미진을 붙잡았다. 미진이 손을 멈추고 승현을 빤히 쳐다보았고, 승현은 그 손에 제 집주소와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밤늦게 퇴근한 승현은 예상과 달리―다만 내심 기대했던 대로―제 집에서 기다리는 미진을 보았고, 그대로 그날 하루를 함께 보냈다.
승현은 문득 미진에게 마리가 남긴 기록들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리와 관련된 기록은 많았지만 그중 하나라도 미진에게 보여준 적이 여태껏 없던 것 같았다. 마리에 대한 것은 사소한 추억 하나라도 허투루 꺼내들 만한 게 아닌 탓이었다. 그러나 미진에게는 마리를 공유하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미진도 저에 버금갈 정도로 마리를 좋아하니까. 승현은 식탁 위에 그릇들을 늘어놓고는 미진을 불러내러 침실로 돌아갔다. 미진은 진작 잠에서 깼는지 미간을 좁히고선 멀거니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턱 앞에서 인기척을 내는 승현을 향해 잠시 눈길을 줬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마리 누나 유언장이요.”
“…그걸 나한테 왜?”
“따지자면 유언장은 아니고, 죽기 직전에 찍은 비디오예요.”
미진은 승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승현을 나무라지는 않고 그저 일으켜달라는 듯이 손을 내밀기만 했다. 승현은 미진의 손을 잡는 대신 그의 어깨 뒤로 팔을 두르고는, 그대로 힘을 주어 미진을 침대 끄트머리에 앉혔다. 자리에서 일어난 미진이 옷을 갈아입을 거란 말만 툭 내뱉고 손을 휘휘 내저으며 승현을 방에서 내쫓았다.
미진은 곧 말끔한 차림을 하고 식탁 앞에 나타났다. 미진의 낯빛은 언제나 그렇듯이 핏기가 별로 없어서 볕이 드는 주방에서조차 좀 우울해 보였으나, 승현은 개의치 않고 미진의 앞으로 그릇을 밀어줬다. 그리고 밀어주는 대로 꼬박꼬박 젓가락질을 하는 미진을 보며 조금 웃었다. 마리도 저랬다. 제가 반찬 그릇을 밀면 눈을 흘기긴 했어도 결국은 차려진 음식을 가리지 않고 남김없이 먹던 마리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저녁에 와서 볼게, 그거.”
“네?”
“그 사람이 한 얘기라면 나도 신경 쓰이니까.”
“응, 이따 퇴근할 때 데리러 갈게요.”
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은 현관 앞까지 가서 미진을 배웅했다. 그러고 나자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두 사람만이 사는 집은 그리 큰 편도 아닌데 휑뎅그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승현은 커튼을 걷고 집안일을 해치웠다. 마리를 거들던 시절이 절로 떠올랐다. 승현은 그런 순간들을 모두 기억에 담아두고 있었다. 죽기 직전의 마리는 지금의 미진보다 고작 한 살 많았다. 서른셋. 죽어버리기엔 너무 이른 나이였다.
승현은 자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거부할 수 없었던―애당초 거부할 필요조차 없는―운명을 달리 표현한다면 마리일 거라고 여겼다. 비교적 저를 잘 돌봐준 누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이토록 오랫동안 잊지 못할 리도 없었다. 마리는 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그때보다 의료 기술이 발전된 지금으로서도 치료할 방법이 없는 희귀한 심장병을 달고 태어난 게 그 이유였다. 그나마 집안이 제법 유복한 것만은 다행이었다. 덕분에 어린 마리를 위해 마련되었던 침실보다 온종일 가습기를 돌려도 건조하기만 한 병원의 1인실에서 더 많은 밤을 보내는 마리를 돌보면서도 불화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허나 마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승현은 마리가 죽은 직후에, 누나가 얌전히 집에 붙어있기만 했어도 그렇게 황망히 떠날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런 물음을 던진 적이 있었다. 대답은 금방 나왔다. 마리로부터 이미 답을 들은 적 있는 질문이었다.
“어차피 오래 못 사는걸.”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토 달지나 마. 어차피 몇 년 안 남은 거, 신념대로 살아봐야지 싶었던 것뿐이야.”
“그래도…….”
“남을 착취한 돈으로 연명하고 싶지 않아.”
약 돈다. 잘래. 마리가 눈을 감았다. 승현은 제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 해도 마리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집안의 비호 아래서 지내면 평탄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쯤은 마리도 모르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마리는 자라던 내내 계획해왔던 대로, 거리로 뛰쳐나가 혼자만의 삶을 살았다. 가난도 지병도 막지 못하는 기질적인 저항심이었다. 승현은 말리기는커녕, 매번 마리에게서 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가 사는 데를 찾아가 얌전히 마리가 미뤄둔 일을 대신해주곤 했다. 평온하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집 청소를 대강 마친 승현이 창고로 쓰이는 방에서 상자 하나를 끄집어냈다. 비디오테이프 더미가 든 상자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네 번째로 꺼낸 테이프 아래에 찾던 물건이 있었다. 마리의 마지막 기록. 주치의가 선고하기도 전에 자신의 삶이 초읽기에 몰렸음을 알아챈 마리는 촬영하고 싶지 않아 하던 기록이었다. 그러니까 이 비디오테이프는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낸 이기심이다. 승현은 테이프가 마리의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래도록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그것을 도로 집어넣었다. 이미 이 창고를 가득 메운 앨범, 비디오, 수기 따위는 디지털 데이터로 백업을 마쳐둔 상태였다. 닳거나 망가지는 자연스러운 풍화조차도 더 이상 마리와는 연이 없기를 바랐다. 그런 것은 단 한 번으로도 지나친 경험이었다.
그날 저녁 승현은 미진을 자리에 앉히고 영상을 재생시켰다. 혼자서 보게 하기도 뭐해서 자기도 미진의 옆에 앉았다. 모니터 속 마리는 승현의 눈에 익은 1인용 병실 침대 위에서, 환자복이 아니라 니트와 바지 같은 평범한 옷을 입은 채, 반듯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해쓱한 몰골은 흐린 화질 탓에 똑바로 보이지 않아, 변함없이 시선을 사로잡는 미모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 승현은 미진에게 마리가 저 차림을 원했다고 설명했다. 삶을 이어갈 생각도 저버리고 촬영에도 시큰둥했지만, 이왕 할 거라면 환자복으로 생을 마무리하는 것은 단연 거부했노라고. 미진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운 음성이 화면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승현은 그 순간 미진과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미진의 모습을 기록해두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게 놀라웠다. 미진이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서, 라며 넘기기에는 마리도 자신의 모습이 촬영되는 걸 내켜하지 않았었는데. 마리는 그저 승현을 내버려 둔 것일 뿐이었다. 납득할 수 없는 모든 일에 싸움을 걸던 마리가 너그러이 굴어준다는 게 못내 기뻐, 지나치게 행동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리를 놓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리게 다가왔다. 승현은 고개를 젖혔다. 줄어든 게 있는 만큼 눈물은 늘어난 모양이었다. 아마 미진도 사진을 찍자고 하면 싫은 티를 내더라도 결국 마리가 그랬듯이 받아들여줄 거다, 승현은 그런 생각을 했다. 침실에 놓여있던 그 사진 속 마리가 입고 있는 옷을 입히고 찍어달라고 해도 미진은 마리처럼 받아들여 줄 거라는 믿음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