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마의 장: 1화. 귀환과 출발
*출처 :
"대삼림 한구석의 작은 마을에서 순례를 나선 소녀, 뮤아. 그녀는 각자의 사정을 안고 있는 소년 4명을 만나, 얼결에 함께 남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벽으로 분단된 세계를 지탱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이세계·그라드네라를 무대로 한 이야기. 제법 길어질 예정. 아니나 다를까 갱신 정지 중."
*임의로 의역한 데가 많고 일부분 번역기를 사용해 오역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피드백 감사합니다.
1-1
성산은 남쪽에 우뚝 솟아,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를 막는 보루.
그것은 신에게 이르는 계단.
그것은 사람이 돌아가는 그릇.
그것을 향해 사람은 그저 걷고,
그것에 이른 사람은 자신을 안다.
1-2
역시나 엄하다.
차라리 지금까지 겪었던 고생이 나을 지경이라, 동정을 금할 수 없다. 그와 동시에, 옆에서 보기에는 너무 우스운 광경이기도 했지만.
“오랜만이로군, 이 후레자식.”
모습을 나타낸 그가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며, 그 첫 마디를 날렸다. 그런 말은 들은 쪽 역시 당연하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네놈 얼굴은 두 번 다시 안 봐도 될 줄 알았는데.”
“이쪽이 할 말이다. 대체 누가 네놈의 못난 얼굴 같은 걸 보러 오겠느냐. 내버려 두랬더니. 림이 아직 네게 적응하지 못해 유감이야.”
이름이 언급된 림은 그의 뒤에서 무척 난처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아마 자신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고, 뮤아는 새삼 생각했다.
당사자들이야 익숙한 일일지 몰라도, 말려든 쪽에게는 민폐다. 어쨌거나 대수로운 광경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뒷짐을 진 자세로 쇠사슬에 구속된 채 짐승용 우리에 갇힌 상대와, 귀족 태가 명백한 복장을 걸친 상대가, 무척이나 진지하게 서로를 욕하고 있었다.
“솜씨가 대단하네요.”
닛카는 줄곧 감탄했는데, 그런 감명을 받기에는 좀 미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평범한 마을에서는 그다지 일어나지 않는 광경이다. 부모자식간의 다툼이라면, 본인들의 집에서나 실컷 해뒀으면 좋겠다.
“자, 이번엔 무슨 짓을 저질렀나. 후딱 털어놔라.”
“네놈한테 털어놓을 건 하나도 없어. 빨리 풀어.”
“털어놓고 자시고, 풀어줄까보냐. 멍청하긴.”
이야기는 진행되지 않는다. 진행될 리가 없다.
서로, 조금도 양보의 자세를 보이지 않는 부자지간이다.
“새끼, 두고 봐라, 이 얼간아! 곧 그 목을 비틀어 버릴 거야!”
“시끄럽다, 머저리! 너 같은 건 그대로 영지에 연행될 거다! 언제까지나 멋대로 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기어이 서로 우리를 쾅쾅 걷어차기 시작했기 때문에, 주위는 황급히 중재에 나섰다.
“시드, 사정을 조금은 설명해야지.”
“주인님, 부디 진정하십시오. 그런 식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한 사람을 우리로부터 떼어놓아 정적을 되찾았다. 그 정적은, 공작이 다시 입을 열기까지의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그래, 내가 어리석었지.”
거기에 “맞아, 네놈이 멍청이다”라고 떠들어대는 시드를 흘끗 쳐다본 공작이 코웃음을 쳤다.
“인간의 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놈과는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어.”
곧장 조금 전의 몇 배로 매도하기 시작하는 시드를, 공작은 부러 귀를 틀어막으며 상대했다.
“아―, 시끄럽다, 시끄러워. 그건 록차에 처넣어라. 술이라도 주면 조금은 닥치겠지.”
시드에게는 미안하지만, 두 사람을 이 이상 대면시키지 않는 게 무난할 것 같아 뮤아와 닛카는 그것을 묵인했다. 어설프게 끼어드는 것도 소용없어 보였다.
“이런 모습을 보여서 미안해.”
림이 기회를 잡고 말을 걸어오자, 뮤아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수고를 끼쳐 죄송합니다.”
“아니, 이쪽이야말로 시드 님이 여러 가지…. 편지는 받았어.”
그들이 이렇게 여기 있는 시점에서,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차라리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사정을 설명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혹시….”
나쁜 상상을 했을 것이다. 눈살을 찌푸리며 머뭇머뭇 물어오는 림에게, 뮤아는 최대한 밝은 표정을 돌려줬다.
“그건 걱정 마세요. 그 사정까지 포함해서 얘기해드릴게요.”
그렇지만 어디까지 솔직히 털어놓을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모처럼 돌아왔는데도 마음 놓을 틈이 전혀 없구나, 싶어 뮤아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1-3
뮤아는 무디카=투카 마을에 들를지 한참을 고민했다.
문제는 두 가지. 자신의 마음과, 편지였다.
“순례를 마치지 않았는데 돌아가기도 좀 그렇잖아.”
근처를 지나게 되니 들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자칫했다간 이제 고민도 끝났을 거라며 주저앉히게 될 게 염려됐다.
리탄트에서 호리라로 돌아가는 과정에, 대삼림 북쪽을 지나는 것은 필연이었다. 벽의 통로 같은 문제도 있었기에 일부러 리탄트를 종단할 이유가 없었다. 안내역으로서 따라왔던 위사가 그대로 사절이 되어 왕도 리라스에 간다는 사정도 있었기 때문에, 바로 톨라 영지로 나왔다. 시드가 톨라 영지에 다가가고 싶어 할 리는 없어서, 세 사람은 곧장 남쪽으로 내려가 대삼림에 이르렀다.
여전히 선두에서 쭉쭉 나아가는 시드의 등을 보며, 뮤아가 닛카에게 물었다.
“조금은 기운을 차렸을까?”
약속을 주고받았다고는 해도, 결국 아피아는 지금 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벽에 닿는 내내 시드는 쭉 무척 기분 나빠했다. 예전과 달리 주위에 그 기분을 휘둘러대지 않아 아직까진 괜찮지만, 섣불리 불씨를 지피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서 뮤아는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는 걸 떠올려냈다. 시드 자체였다.
“…역시 마을에는 들르지 않는 게 나으려나.”
중얼거리는 뮤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닛카가 되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아, 좀 옛날에 말이야.”
스스로도 완전히 잊고 있었을 정도니까, 관심은 식었겠지만, 서로 즐겁지 못한 재회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전서구의 도착은 어떻게 됐던가요.”
그것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시드가 부상으로 쓰러져 있는 동안 공작에게 보냈던 편지는, 결국 대삼림 안에서 벽을 넘으면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과연 도착했는지, 도착했다면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마을에 들를 필요가 있었다. 만약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면, 도중에 가로채든가 해서, 편지 자체를 없던 것으로 하고 싶었다.
“취소랑 사죄의 말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렇게 해서 수습될 사태라면 좋겠는데요.”
공작의 됨됨이를 잘 모르는 만큼 마음이 좀 무겁다. 시드에게 물어도, 놈은 어쩔 수 없는 바보라는 둥, 쓸모없는 놈이라는 둥, 불안함을 부추기는 답밖에 못 들었다.
“야, 뮤아.”
갑자기 시드가 뒤돌아서서 부른다. 뭔가 엉뚱한 말을 해오려나 싶어 준비하는 뮤아에게, 그는 태연한 얼굴로 물통을 흔들어 보였다.
“술 떨어졌어.”
일단은 ‘마시면서 걷지 마, 이 멍청아.’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뮤아는 시드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갈겼다.
1-4
이래저래 해서, 결국은 아무래도 좋다는 심정이 됐다. 시드를 신경써봤자 의미가 없다. 일단은 확인해봤더니, 왜 들르지 않냐고 궁금해하며 되물을 뿐이라, 단번에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어라. 이런, 뮤아. 다녀왔어?”
마을 근처에 다다르자마자, 들풀을 캐러 나온 낯익은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어땠어, 산은? 컸을 텐데.”
“그게….”
대답이 곤란했다. 차마 리탄트에 갔다고 할 수는 없고, 대삼림을 종단했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단념해 돌아왔다고 하기에는 걸린 시간이 길었다.
“아, 친구들도 있는데 붙잡으면 안 되겠지. 아버지가 쓸쓸해하셨어. 얼른 얼굴 보여드리렴.”
그런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아주머니는 얼른 얘기를 끝내주었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가자,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질문을 해왔다.
“뮤아, 어서 와. 어땠어?”
“연말에 딱 와서 다행이구나.”
“아이고, 건강해 보이네.”
“뒤에는 누구야?”
“저기, 저기, 선물은?”
전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드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는 것이었다. 여행길에 꾀죄죄해져서, 5년 전의 그 인물과는 금방 연결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태를 좀 더 진전시킨 것은, 모여드는 인파를 헤치고서 얼굴을 내민 한 소년이었다.
“뮤아!”
“레사?”
한 살 아래 소년이 이름을 부르며 뮤아를 부둥켜안을 기세로 달려오더니, 바로 앞에서 망설이며 걸음을 딱 멈췄다.
“아, 그, 다녀오셨어요.”
“다녀왔어. 그런데 레사, 내가 쓴 편지 받았어?”
레사의 집은 잡화점으로, 마을에 오는 전서구들을 중개하는 일도 하고 있다. 뮤아의 질문을 받은 레사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매일 집에 왔었어. 다음 편지는 안 왔냐면서.”
잘 생각해보니 림에게 전해달라고 한 이래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대삼림에서 리탄트로 돌입한 후에 연락이 될 리가 당연히 없었다. 그래서야 걱정할 것이다.
그래서 집에 가자마자 아버지의 질책과 포옹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뭐에 홀렸는지, 살아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니까. 그리고 그 편지는….”
“물론, 제대로 전달해드렸지. 그런데 공작 가의 위사님께 뭘 알려드린 거니?”
“별일 아니었고, 다 해결됐는데.”
연락이 다 가버렸다는 얘기다. 사과와 설명이 담긴 글을 보내야 했다. 우선은 조급한 마음에, 자꾸만 얼굴을 내미는 가족들에게 방해를 받으면서도 닛카와 함께 문장을 쥐어짜내며 편지를 썼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걸 알게 된 건, 곧장 잡화점에 그 편지를 맡기러 갔을 때였다.
한가하다며 따라왔던 시드가 갑자기 나타난 상대에게 등 뒤에서 붙잡혔다. 어라, 어라, 하고 있는 사이에 시드는 단단히 묶여 우리에 내던져졌다.
그렇게 톨라 공작이 등장했다.
톨라 영지에서 여기까지는 한나절 정도로, 마을에 모습을 보이자마자 그 소식이 톨라 영지에 보내졌다고 생각하면, 불가능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상할 정도로 빠르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이리하여 부자의 험악한 대면이 막을 올렸다.
1-5
결국, 사람들을 내보낸 뮤아의 집에서 공작에게, 아피아와 세피아의 출신은 숨기며 얘기를 했다. 벽을 넘은 것에 대해서도 말하기 곤란했다. 그 두 가지가 언급되지 않게끔 사건을 재구성했더니, 어떻게든 벽을 넘기 전에 따라잡아 탈환하고,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는 이야기의 흐름이 되었다. 사실과는 꽤나 다르지만 무난한 선이었다. 그동안 걸린 시간은 요양이나 대삼림 내부에서 방황하던 것이라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가로채질 것을 염두에 둔 탓에, 편지에는 시드의 부상과 아피아의 납치 건, 세피아의 보호 의뢰 같은 최소한만 쓴 것이 다행이었다.
“…흥, 세발족 따위가.”
다 들은 직후 공작이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내뱉는 것을 들은 뮤아와 닛카가 얼굴을 마주봤다. 결과적으로 세피아는 공작의 도움을 받지 않았지만,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일당은 아직도 호리라에 있는가.”
“글쎄요,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는 리탄트에서 왕당파의 반격을 맞고 있다면 미묘해지겠지만, 저희들은 아피아 형제를 보내줬을 뿐 상세한 배경은 모르는 것으로 얘기해뒀기 때문에, 그 추격자들이 철수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 알겠다. 당장 수배한다. 세발족들이 활개 치며 호리라를 걷고 있다니 견딜 수가 없군.”
대기하던 위사 중 한 명은 공작의 지시를 받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이어 시종 한 명이 다가와 가죽주머니를 공작에게 건넸다.
“잘 말해줬구나. 게다가 시드와 동행이라니 수고했다. 여러 가지로 폐를 끼쳤을 텐데. 이걸로 사례를….”
“저, 그래서 말인데요.”
실례인 줄 알면서도, 뮤아는 공작의 말을 끊었다.
“말씀드린 대로 저희는 아직 성산에 도착하지 못했거든요. 곧 다시 출발할 거예요. 그리고 시드는 지금까지 함께 여행한 동료고요.”
거기서 이미 짐작했을 공작의 언짢은 눈초리에도 풀죽지 않고서, 뮤아는 부탁했다.
“시드도 함께 보내주실 수 없나요?”
금세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어째서일까. 이제는 팔팔하다고 해도, 한때 생명에 직결된 커다란 부상을 당한 데다 겨우 붙잡아왔다. 더 이상 내버려두고 싶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함께라고 한다면, 성산까지인가.”
“네.”
“저걸 성산 같은 데 보내봐라. 곧장 초원으로 달려들고는 못 돌아오겠지.”
역시나 아버지다. 잘 알고 있다.
“한동안은 풀어줬지만, 언제까지고 편하게 둘 수는 없어. 1년 뒤엔 성인이니까.”
공작의 일을 맡은 만큼, 시드보다는 사리분별을 하는 것 같았다. 시드와 비교하는 게 잘못된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봐도, 공작의 말이 더 마땅해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동료’인가.”
그럼에도 설득할 말들을 생각하던 뮤아와 닛카 앞에서, 공작이 불쑥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그게 무섭지 않던가?”
뭐에 대한 질문인지 알 수 없어 잠시 어리둥절해하는 뮤아를 대신해, 닛카가 되물었다.
“…공작님께선?”
“전혀. 그딴 바보를 무서워할 리가 있겠나.”
반문은 즉각 잘렸다. 확실히 저런 태도로, 사실은 무섭다며 수긍해버려도 왠지 곤란하다.
“하지만 잘 모르는 이들은 그렇게 보지.”
공작이 말을 계속했다.
그의 시선은 열린 창문 너머 멀리에 있었다.
“저건 바보지만, 고독했어.”
그 목소리는 무거웠고, 한숨 같았다.
“예의를 표하게 해줘.”
그러며 그는 당황하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1-6
“왜 다시 가는 거야!?”
부모에 이어 레사에게마저 새된 목소리로 비난받은 뮤아가 둘러댔다.
“끝내지 못했거든. 뭔가,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말이야. 도중이었으니까….”
“이제 됐잖아, 그런 건.”
명백하게 심통이 난 한 살 아래 소년을 달래듯, 뮤아는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토닥였다.
“역시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해내고 싶어.”
“…뮤아는 있잖아, 여기가 싫어?”
“그건 전에도 말했잖아. 싫은 게 아니라, 뭔가 구별하고 싶어서….”
“나도 갈래.”
뮤아의 타이름을 끊은 레사가 말했다.
“나도 이제 곧 열세 살이니까 뮤아랑 같잖아.”
“그래도 그건.”
“같이 가도 되지? 문제 없지?”
떨떠름해하는 반응을 무시하려는 양 레사가 계속해서 말을 주워섬기는 탓에, 뮤아는 대답하기가 곤란해졌다.
개인으로서 마음껏 순례에 나서는 건 말리지 못하지만, 따라오는 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런 식으로 어울려오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권할 수 없었다.
“딱히 나쁘진 않잖아요.”
그런데 옆에서 듣던 닛카가 선뜻 그것을 받아들였다. 닛카는 뮤아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는 덧붙였다.
“물론 제대로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난 뒤의 얘기지만요. 무단으로 따라올 수는 없으니까.”
제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해가는 닛카의 귀를 붙잡은 뮤아가 소곤대며 그를 나무랐다.
“잠깐, 닛카!”
“성산까지 가는 데 그렇게 위험할 일은 없는걸요.”
“그렇지만, 좀….”
위험할 일이 없다고 해봤자 세발족과 관련된 일이 해결된 것뿐이고, 그 외의 강도에게 습격당한 적도 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은 충분히 벌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기분을 내버리면 귀찮아질 터라 레사를 살펴봤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레사는 전혀 들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화가 나 있었다.
“왜 너한테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갑자기 폭발해버린 레사가 닛카를 언뜻 노려보고는, 달아나버렸다. 말릴 틈도 없었다.
“젊어서 좋겠어요.”
“한 살 차이잖아.”
한가하게 감상을 늘어놓는 닛카를 향해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뮤아는, 레사가 떠난 쪽을 쳐다봤다.
“정말 오려나? 근데 왜 갑자기.”
“사람은 자기 일에 대해선 잘 모르는 법이죠.”
“무슨 소리야?”
“그보다는, 시드 말인데요.”
닛카는 거의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애초에 시드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밖에 나왔다가 레사에게 붙잡힌 것이긴 하다.
“아직 있어, 마을 어귀에.”
밤이 저물고 있어 공작 일행은 서두르지 않고, 하룻밤 마을에 머무른다고 했다. 재차 부탁할 거라면 오늘 밤 말고는 달리 기회가 없었다.
“아까는 분위기 탓에 잠자코 들어버렸지만, 그 말은 어물쩍 넘기려는 고도의 기술 같던데요.”
“아―.”
뮤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런 흐름에 매달려 설득하는 짓은 상당한 실력자에게나 가능할 듯싶었다. 얻어낸 것이라면, 시드의 부모라고 해도, 공작일 만하다는 감상 정도일까.
“뭐, 납득가는 데도 있으니까요. 시드, 너무할 정도로 남의 말을 안 듣죠.”
“안 듣지. 때려눕히고 싶을 만큼.”
“지금까지 들을 필요가 없어서였을까요.”
“아―….”
이번에는 또 다른 종류의 씁쓸함이 웃음에 담겼다. 당시에는 길길이 날뛰었으면서도, 아직까지 화내지 않는 것은 시드가 금세 태연해질 만큼 무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태연해지는 상황은 그다지 좋은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시드는 어쩌죠.”
“이제 우리가 뭔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
뮤아가 체념의 마음을 드러냈다.
무슨 말을 해도 그 아버지가 자신의 고집을 꺾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곧 오겠죠.”
“오겠지.”
게다가 둘 다, 이 사실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1-7
닛카와 함께 저녁식사까지 마치자, 바깥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제는 잠에 들어야 할 시간인데,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동생들이 계속 달라붙었다. 다시 떠날 거라는 얘기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부모님과는 달리, 동생들은 호기심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이 지쳐 잠들 때까지 짐을 정리하며 얘기해주기로 했다. 닛카도 어울려줬다.
“저기―, 진짜로 전부 다 모래야? 뜨거워?”
“바다는 어디가 더 컸어?”
부모님의 귀에 들어가는 것을 염두에 두면 위험한 말은 할 수 없고,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아도 좋지 않다. 성가신 부분들은 짐 정리를 하는 척 흘려듣던 뮤아가 짐 속에서 작은 나무상자를 집어 들었다. 뮤아의 표정을 보고 그 상자를 눈치 챈 동생들이 달려들었다.
“뭐야? 그게 뭐야?”
“이건 언니가 친구한테 받은 소중한 거니까 건드리면 안 돼.”
동생들을 물리치며, 나무상자를 천으로 싸서 방에 달린 선반 깊숙이 넣어뒀다.
“그거 두고 가려고요?”
“아니, 그게….”
“뭐, 그게 나으려나요.”
성의 의상실에서 찾아낸 브로치였다. 선명한 푸른 돌 안에서 자잘한 광점이 반짝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빤히 쳐다봤더니 아피아가 시원스레 줘버린 것이었다. 물론 거절했지만, 답례품 하나라도 주지 않으면 곤란해진다며 떼를 썼었다.
“그치만 이렇게 비싼 건 역시 못 받아.”
“받아. 게다가 그렇게 비싸지도 않을 거야.”
아피아의 물음에 의상 담당이 대답한 가격을 듣고서야, 뮤아는 브로치를 챙겼다. 어떻게든 하면, 아예 손대지도 못할 정도의 가격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리라에 돌아가는 도중에 닛카에게 보여줬더니, 그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거…. 호리라에서는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는 게 좋겠어요.”
제 착각이라면 좋겠지만, 하고 말은 이어졌다.
“아마 리탄트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 돌이에요. 호리라에서는 다류라 시대의 골동품들밖에 없어서…, 분명히 턱없는 가격일걸요.”
그러며 닛카가 알려준 액수는 뮤아를 덜덜 떨게 만들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다간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모처럼 받은 건데 사용을 못 한다니….”
풀이 죽은 뮤아에게 닛카는 일단 격려를 해줬다.
“무역이 재개되면 시세도 떨어지겠죠.”
먼일이 될 것 같다.
그런 얘기를 한 끝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역시 위험할 거라고 판단해서 두고 가기로 했다. 여행 도중에 불의의 사태를 대비하는 용도로써도 생각해봤지만, 그런 가격이라면 인수자를 쉬이 찾을 수 없을 거고, 애초에 팔 생각도 없었다.
“두 사람 다 잘 지내겠지.”
역시나 졸음이 쏟아진 듯한 동생의 머리를 무릎에 얹고 쓰다듬던 뮤아가 중얼거렸다. 다시 만나는 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그리 멀지 않은 날에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순한 기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잘 지내겠죠, 분명히. 아직 헤어진지 한달도 안 됐으니까요.”
“그러네.”
이 마을을 떠났던 지도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동생이 반 년 어치를 컸다든가, 그 정도의 변화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쩐지 자신의 시간이 빠른지 느린지 잘 알 수 없게 됐다.
“앞으로 1년 뒤엔 성인이구나.”
새해는 얼마 남지 않았다.
뮤아는 어지러운 마음을 돌리려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1-8
오랜만의 자택 침대는 갑작스런 귀환 탓인지, 누웠더니 다소 먼지가 느껴졌다. 익숙한 장소에서 잠에 빠져든 뮤아는, 문득 위화감에 눈을 떴다.
잠시 어둠 속에서 기다리자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황급히 일어나 창문을 연 순간, 뮤아는 기시감을 느껴 아찔해졌다.
물론 창밖의 나뭇가지에 있는 건 작은 소년이 아니라, 충분히 자란 눈매 나쁜 소년이었지만.
“아, 있다.”
무의미하게 몸을 뒤로 젖힌 시드가 그런 첫 마디를 꺼냈다.
“…어떻게 탈출한 거야?”
“열었다 닫았다 하는 곳은 약해.”
뮤아로서는 “아아, 그렇군요.”라고밖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힘을 썼나.
“망보는 사람은 어쩌고?”
“차 안에 없던데. 계속 혼자였어.”
공작은 촌장의 집에서 자고 있을 텐데, 감시를 세우지 않은 게 이상하다. 시드의 말투로 보건대, 어쩌다 볼일이 생겨 자리를 비운 것 같지도 않았다.
이상하지만 시드에게 물어봤자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을 듯해서, 뮤아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그래서 이젠 어쩔 거야?”
“그딴 영감한테 신경 쓸 틈 없어.”
“예, 예.”
저럴 줄 알았다.
“새해 정도는 여기서 맞을 줄 알았는데.”
하아, 맥이 풀린 뮤아는 하품 같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준비를 하다보면 부모님도 눈을 뜰 터였다. 갑작스런 출발에 대해 하소연하겠지만, 별 수 없었다.
“닛카는 옆방에 있으니까 깨워줘.”
시드에게 부탁한 뒤 창문을 닫고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간밤에 짐을 싸둔 게 다행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게 당연해지면 어떨까.”
솔직히 조금도 동요하고 있지 않았다. 딱히 싫다는 느낌도 없다. 어차피 이렇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었고, 물론 이 마을은 여전히 좋아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마음이 더 컸다.
“아―, 신관님께 인사도 안 드렸는데….”
투덜거리며 방에서 나왔더니, 닛카가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시드한테는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해뒀어요. 아직 들킨 것 같지는 않고요.”
시간문제겠지.
자기들이 풀어준 거라고 여겨지는 것도 찜찜하다. 함께 사라지면 그랬다는 거나 다름없지만, 목격자는 없다.
“공작의 그 태도를 생각하면 마을에 폐를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닛카의 말에 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그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공작은 이 마을에 빚을 지고 있다. 괜찮을 것이다.
“그럼 난 부모님이랑 얘기하고 올게.”
“도와드릴게요.”
“고마워.”
어제오늘 다 일상생활 중에 기습을 해서 미안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1-9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희게 빛나는 물병을, 시드가 한결같이 들이켜고 있었다.
“이런 아침부터 어떻게 구했어?”
“아, 이거. 아버지가 던져 넣었어.”
부자가 죄다 별 도리가 없다. 싫어하면서도 술은 챙기는 모양이다.
“그럼 성산 가자.”
말을 마치자마자 남쪽으로 나아가려는 시드의 뒷덜미를, 뮤아가 움켜잡았다.
“어디로 가.”
“성산.”
“대삼림을 지나진 않아!”
그때는 어디까지나 비상사태여서 그랬지, 역시나 그 안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을 지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뭐야. 오래 걸릴 텐데.”
“열지엔 안 가니까 전보다 빨라.”
“숲을 지나는 것보다 느려.”
“시끄러워. 숲은 돌아서 갈 거야. 싫으면 혼자 가.”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시드를 꾸짖고, 질질 끌며 동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시드는 단념했는지 곧 경로를 수정했다.
일찍이 비슷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떠오른 뮤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나아진 데가 없어, 우리.”
“일단 나아가고는 있어요.”
‘뒷걸음질인지도 모르지만’이라는 말을 삼키면서, 닛카는 그렇게 대답했다. 가거나 돌아오거나 옆으로 새거나, 길도 사람도 좀처럼 곧게 나아가지만은 않는 것이다.
“혹시 이번에는 공작님이 보낸 추격자가 찾아오거나 하진 않겠지?”
일이 반복되는 걸 상상했는지, 뮤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건…, 글쎄요. 음.”
닛카가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이더니, 앞에서 가던 시드를 불러 세웠다.
“시드, 방금 그 물병 좀 보여줄 수 있어요?”
“뭐야. 압수하게?”
“금방 돌려드릴게요.”
회유하며 물통을 받아든 닛카는, 그것을 잠시 확인했다가 도로 시드에게 돌려줬다.
“뭔데. 놈이 독이라도 넣었어?”
“안 들었을걸요. 대체로 시드한테는 효과 없죠?”
“효과 없지.”
가슴을 펴는 시드를 다시금 앞으로 보낸 닛카가 뮤아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뮤아가 곧장 물었다.
“뭐였어?”
“아니, 시드를 그렇게나 잘 아는 사람이 감시 하나 붙이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닛카가 턱을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지면서 시드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 병, 역시 은이었어요.”
즉, 나름대로 가격이 있다는 말이다. 낭비하지만 않는다면 성산까지의 여비로 충분하다.
“그럼 일부러?”
“뭐, 예전부터 당연하게 사용해오던 것일 수도 있지만.”
귀족의 감각은 잘 모르겠다.
숲에는 벌써 아침 햇살이 가득 찼고 새들의 지저귐도 요란했지만, 뒤에서 누군가 찾아올 것 같은 기미는 없었다. 잠시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뮤아가 확인하듯이 중얼거렸다.
“…추격자를 붙이지 않는다면 경과 정도는 보고하는 게 좋을까?”
“그래요.”
그러고 보니 아직 림과 했던 약속도 파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결정하자, 조금 전까지 느꼈던 꺼림칙함도 사라진다.
“타이나에 도착하면 새해려나.”
“그럼 송년제는 타이나에서 즐기도록 할까요.”
“아, 찬성.”
그라드네라력 7512년의 끝자락, 두 번째 순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